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서양미술의 흐름/르네상스의 미술/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조각

르네상스 조각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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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彫刻-展開

15세기 초엽, 그 때까지 그 본질에 있어서 중세적 양식을 답습하고 있던 이탈리아 조각은 종래에 볼 수 없었던 두 개념, 즉 고전 형식의 재현과 적극적인 사실(寫實) 표현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고전 예술에 대한 관심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인간을 만물의 척도로서 중시하는 고대 사상과 그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 반면에 휴머니즘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불러일으켜, 북방에 있어서 중세 예술의 말기를 장식하는 자연주의로 나아갔다. 같은 자연주의라 할지라도 15세기에 있어서 자연에의 접근은 중세와 달라서 직관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었고, 종합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신의 질서를 상징하는 것보다 자연 바로 그것을 위하고, 세계의 기존 사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체상이 또다시 주제로 채용된 것은 그 표현이다.

초기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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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베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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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enzo Ghiberti (1378∼1455)

피렌체 대성당의 산 지오반니 세례당 제2문 제작(1403∼1424)에서 좋은 평을 받아 1425년에 제3문의 제작도 그에게 일임되었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취재한 열 장면을 선택하였다.

인간의 창조부터 솔로몬과 시바 여왕과의 알현까지로, 좌상방(左上方)에서 시작하여 일찍이 브루넬레스코와 경작(競作)했던 주제인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으로 하다>의 장면은 우상(右上)에서 두 번째의 패널 중에 표현하였다. 이 패널에는 아브라함의 희생이 우상단에 있고, 좌하단에 세 천사의 향응(饗應)이 부조되어 있다. 시간적으로 격차가 있는 사건을 동일 구도 내에 담기 위하여 웅대한 경치를 배경에 두었다. 거의 환조(丸彫)에 가까운 전경의 인물에서부터 훨씬 먼 원경의 세미한 박부조(薄浮彫)에 이르는 미묘한 변화는, 조토 이래 조각의 회화적인 경향을 최고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티투스의 개선문에서 달성된 효과를 따라붙는 것이며, 인물상을 에워싼 분위기의 묘사는 대단히 훌륭하다. 로마의 부조보다 한층 사실적인 점은 그가 브루넬레스코와 도나텔로에 대한 최근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며, 엉덩이를 보이면서 풀을 뜯는 말의 묘사는 그 자신의 정도를 표시하고 있다. 세 천사는 해부학적으로 부정확하지만 무릎을 꿇고 앉은 족장 아브라함에게 걸어서 다가서는 표현은 뛰어난 기교의 소산이며, 중경(中景)의 늘어선 수목에 그 리듬이 반복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세부로부터 그가 고전 예술의 장식성에 대하여 나타낸 반응을 엿볼 수 있다. 패널 우측의 감실에 수납된 남성의 나체상 삼손은 프락시텔레스풍의 자태와 로마적인 근육을 가진 헤라클레스상(像)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고전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삼손의 봉발(蓬髮)과 작은 머리와 다른 감실에 있는 상(像)의 육체와 착의(着衣)의 비합리적 표현, 또 청동문을 둘러싼 화초와 동물무늬가 선조적(線條的)이어서 양괴감이 부족한 점 등 상당히 중세적 성격을 띤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기베르티의 고전주의는 중세 양식으로 보면 우연적인 것이었다. 그가 인물의 성격 표현에서 미숙한 점은 낙원 추방과 같은 극적 장면에서 흉내내는 자태를 취하게 한 것으로 명백하여진다.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평한 이 제3문에는 초기 르네상스 조각이 가진 특색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그는 <평론집>도 저작하여 당대 미술경향을 기술하였고, 또 자서전도 수록하여 중요한 미술자료를 남겼다.

조각에 회화성을 부여하는 것으로써 기베르티는 무한한 공간에 고립된 입체의 강력함과 크기를 과시하는 조각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조각을 회화에 종속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그 부자유한 소재로써 한계를 느끼게 하였다. 브루넬레스코와 마찬가지로 제2문의 경작(競作)에서 떨어진 퀘르치아는 조각 본래의 입장을 추급해 간 작가라 할 것이다.

퀘르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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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po della Quercia (1374∼1438)

시에나의 조각가인 그는 1425∼1438년에 볼로냐의 산 페트로니오 성당의 주현관(主玄關)에 대리석 부조(浮彫)를 제작하였다. 그 중의 한 장면인 <원죄>에 있어서 그는 배경을 거의 말소하고 인물상 표현만으로 고전적 수법으로 복귀하였다. 인상(人像)은 소박하게 힘이 억센 영웅적 자태로 포착하였다. 이것으로 마치 기베르티가 풍경으로서 간접적이고 막연하게 전한 비극적 장면과 같은 정경이 직접 호소해 온다. 인물의 프로포션과 근육의 처리는 고대 조각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인간성과 다이내믹한 톤은 르네상스의 것이다. 그의 해부학에 대한 지식은 인체에 충분한 중량과 완전한 운동을 주는 데까지는 아직도 불충분하였다. 좌우 양발의 원근의 위치, 아담의 오른 팔, 신체의 부자연, 그리고 뱀이 엉켜붙은 나무 줄기와의 공간관계가 잘 처리되지 못한 점이 인정되듯이, 기교 면에 있어서는 기베르티에게 한발 뒤지지만 인물상에는 생명이 충실하여 고귀함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감정과 극적 내용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를 위해 기타 부속물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인체만으로 관념을 형상화하려고 했다. 이 태도는 정신에 있어서는 로마보다도 오히려 그리스에 가깝다고 하겠다. 퀘르치아의 구상은 미켈란젤로가 출현할 때까지의 근 1세기 동안 등한시되었다.

기베르티와 퀘르치아에 대하여 고전 예술이 영향을 끼쳐졌다는 것도 명백하며, 각자는 그 성향에 따라 반응하였으나 양자가 다 같이 동시대의 사상을 충분히 표명한 형체를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이것은 과학적 탐구심이 왕성한 당대의 이상을 인간상에 구체화할 기술적인 용의가 부족한 때문이었다.

도나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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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atello (1386∼1466)

도나텔로의 예술을 형성한 데는 브루넬레스코와 더불어 로마에 유학한 사실을 들 수 있다. 대머리이기 때문에 <로 츠코네>라 불리는 상(像)은 피렌체 대성당 종루(鐘樓) 중의 감실용(龕室用)으로 제작된 것인데(1423∼1425) 그의 철저한 사실(寫實)을 실증하는 작품이다. 그는 미(美)라고 하는 추상적 표준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억센 인간성을 극명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했다. 융기한 목의 근육과 굽어진 손목, 중후한 의상, 응시하는 표정은 과연 힘있는 남성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백성과 같은 <그리스도 상>(1420?), 말라 빠져 추악한 <막달라 상>(1455?), <세례자 요한 상>(1455)은 이것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사실주의적인 작품들이다. 그러나 1440년경의 청동(靑銅) <다비드 상>은 독립 조상(彫像)인데, 종래의 전통을 파괴하고 있다. 그 평정한 자태의 표현은 고대 양식의 충실한 번역이라 하겠다. 가느다란 팔과 딱딱한 체구에는 우미한 곡선은 없지만 그의 예리한 관찰로 미성숙한 남자상을 남김없이 포착하고 있다. 토스카나 지방의 목동이 쓰는 것과 같은 모자는 다소 기묘한 감을 주지만 그 비고전적인 면모에 내려진 음영(陰影)에는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특수성과 일반성의 결합이나 나체상에 비범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파도바의 산 탄토니오 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가타멜라타 장군 기마상>(1453)이다. 그가 로마에서 보았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을 본으로 한 것이다. 초기 르네상스에 있어서 군상(群像)의 안정과 정밀(靜謐)이란 고전적 효과는 그 양괴성과 평형감으로 표시되었다. 말 탄 자의 수직선, 장군이 가진 칼과 지휘봉으로 구성된 날카로운 대각선, 커다란 마체(馬體)의 수평적인 중량감 및 말의 네 발이 만드는 삼각형이 기묘한 교차를 보여 주고 있다.

왼쪽 앞발 아래에 있는 구슬은 물리적 평형을 갖기 위해서도, 대좌(對座)에서 전진하려는 마체를 저지시키는 데에도, 실제상의 필요에서나 장식상에서나 다같이 군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체와 마찬가지로 마체에도 해부학적인 정확함을 추구하였고, 다리와 코에 정맥이 부풀어 나오게 했고, 또 두부의 딱딱한 구조와 피부에도 극명(克明)한 현실의 관찰을 볼 수 있으며, 안장의 모포와 갑옷의 옷감 성질에 대해서까지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둔중한 말처럼 보여 기사(騎士)에 비례하여 너무 큰 것 같지만 완전 무장한 사람을 지탱하기에는 실제적으로는 이것조차 무리일지 모르겠다. 그는 갑옷과 안장에 풍부한 장식을 다는 것으로 기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커다란 말에 끌리기 쉬운 사람에게 주의를 쏠리도록 노력하였다. 한 사람의 유능한 장군의 풍모를 표현한 점에서 벌써 뛰어난 초상(肖像)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나아가서 고전적 형식을 빌어 하나의 전형적인 인물을 구체화한 점으로 그것은 초상 이상인 것이다.

고대에 대한 공감과 철저한 사실과 근대적 지성, 그리고 인생의 희비극을 뚫어 보는 통찰 등, 이것을 무기로 하여 그는 초기 르네상스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롭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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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ca della Robbia (1400∼1482)

처음 금세공을 배워 피렌체 대성당을 위하여 <칸토리아(聖歌隊席)>를 제작하였는데(1431∼1438), 도나텔로의 작품과 비교하면 따스하고 밝은 인간미가 감돌고 있다. 40세경부터 유약(釉藥)을 한 다색의 테라코타상(像)의 제작에만 전념하여 그 후에 이 기법이 롭비아가(家)의 특기가 되었다. 애호한 주제는 <성모자상>이며 청동이나 대리석의 고정적 조각보다 더 널리 일반에게 보급되었다. 우미한 여성상의 표현 가운데 아직도 고대 조각의 영향을 지니고 있다.

기타 도나텔로의 서정적 방향을 추구한 사람(롭비아도 그 중 한 사람이다)에 데시데리오 다 세티냐노(1428∼1464), 라우라나(1430∼1502), 안토니오 로셀리노(1427∼1479?) 등이 있다.

폴라이우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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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io Pollaiuolo (1432?∼1498)

도나텔로는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인 과학적 탐구심에서 시작한 인체구조 표현의 유력한 대표자이다. 동생 피에로(1443∼1496)와 더불어 피렌체에서 아틀리에를 경영하면서 회화·조각·공예 전반에 걸쳐 활약하여 매우 번창하였다. 해부학의 지식과 유체 기법의 습득과 격렬한 동태의 표현은 명백하게 도나텔로의 일면을 계승한 것이다. 그의 작품인 <헤라클레스와 안타에우스>의 소군상은 세부에 엄밀한 연구 성과를 반영하기 위하여 청동을 소재로 선택하였다. 이 조상(彫像)에는 서로 싸우는 거인의 근육 조직을 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묘사하여, 소품이지만 박력을 가진 격렬한 운동감을 보여 준다.

베로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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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rea del Verrocchio (1435?∼1488)

폴라이우올로와 함께 15세기 후반의 피렌체에 있어서 과학적 경향을 걸어 온 조각가이며 도나텔로의 제자이다. 그도 역시 인체에 해부학적 구조의 정확함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표현하려고 하였다. 그것은 1465년 메디치가(家)를 위하여 제작한 브론즈상 <다비드>로 명백해진다. 깡마른 청년의 체구가 강조되고 늑골이 탄탄한 갑옷 위에 투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한편 베로키오는 그의 뜻대로 15세기에 배운 감정 표출의 전부를 여기에 주입하였다. 그가 만든 상은 전체의 운동이 주는 인상에서 아무래도 팽팽하게 된 신경을 느껴 볼 수 있다. 말을 탄 사람의 자세가 한층 이 효과를 높여 주고 있다. 가타멜라타의 쭉쭉 뻗은 자태에 대하여, 콜레오니는 등자를 펴고 몸을 오른편으로 젖히고 있으나 시선은 다른 방향으로 향해 있다. 말도 긴장하고 있어 도나텔로의 둔중한 말과 다르지만 기사는 이 준마를 잘 길들이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말의 전진운동은 목줄기의 주름으로 보아 재갈을 물린 끈을 꽉 죄서 억제되어 있다. 도나텔로가 앞발 아래에 구슬을 두어서 간접적으로 표현한 후방 균형의 효과를 그는 이렇게 하여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리적으로는 도나텔로가 우수할지 모른다. 이것은 근골질(筋骨質)이며 전체가 예각적(銳角的)인 리듬을 반복한다. 두드러진 두부, 신경질적이고 의지적이며 또한 무엇인가 신비적인 표정은 그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승이었던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리하여 이 특징은 베네치아에 있는 <콜레오니 장군 기마상>(1496)에 표현된다. 도나텔로의 <가타멜라타>와 비교하여, 두 다비드상(像) 이상으로 15세기의 조각상에 나타나는 양식의 변화를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다. 도나텔로는 고전적 의상 밑에 로마 장군의 위용과 힘있고 지적인 얼굴을 부여하였다.

결국 베로키오의 작품보다 위풍당당한 용병대장의 인품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사(戰士)의 격정과 과장된 동작과 도전적인 표정으로써 베로키오는 도나텔로에게 억제당한 감정을 극적인 것으로 바꾸어서 표현한 것이다. 콜레오니의 거친 성격과 가타멜라타의 냉정한 의지가 퍽 대조적이기는 하지만 거의 희화(戱畵)가 되어 버리지 않느냐고 생각할 만큼 영맹한 얼굴 표정이 그 자태와 더불어 무서운 박력으로 육박해 온다. 레오나르도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의 기마상>(1483년)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한다면 이상의 두 작품과의 비교는 대단히 흥미로울 것이다.

베로키오는 초기 르네상스의 최후이며 또 위대한 조각가이다. 그의 <기마상>의 고전적 형체를 통하여 과학적으로 정확한 인간과 자연을 표현하는 길이 열려진 것이다. 이것은 조각가로 하여금 현실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연구하게 하는 데로 인도해 준다. 한편 가치 기준을 개개 인격에 두는 풍조는 당시의 정치 이론에도 나타났던 것이다. 피렌체의 정쟁(政爭)과 내분은 메디치가의 추방과, 샤를 8세의 치하에 있었던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하는 연유가 된다. 15세기에 있어서 예술의 지도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던 피렌체는 드디어 영원히 그 명예를 상실, 16세기 후반에 성기(盛期)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은 교황의 권력하에 있던 로마로 옮겨 가게 된다.

전성기의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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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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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onarroti Michelangelo(1475∼1564)

건축을 위시하여 조각·회화·시, 그리고 공학(工學)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는데 특히 조각은 그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었다. 처음에 기를란다요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웠으며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인정을 받아 그가 소장하고 있던 고대 미술을 접할 수 있었고 또한 도나텔로의 영향도 받아서 조각에 전념하게 되었다.

초기의 작품에는 <피에타>(로마의 산 피에트로 성당 내에 있음, 1499)와 <다비드>(1504)가 있다. 전자는 완벽한 고전적 작품인데 해부학과 의복의 처리법을 터득하고 있음을 실증하고 있다. 앳된 여성(성모 마리아는 영원한 처녀이다)의 무릎에 거의 수평으로 뉘어진 남성상(그리스도의 고전적 표현)을 표현한다고 하는 어려움을 피라미드형의 구성으로 훌륭하게 해결하였다. 후자는 틀림없이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갈고리형으로 굽은 오른편 손목은 확실히 츠크네를 모방하였고, 세부의 해부학적 표현과 고정된 눈에도 전 시대의 잔재를 엿볼 수 있다(석재가 높이에 비하여 얇은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그러나 그의 면모는 표정이 넘쳐 있고 그 거대한 크기(5.5m)와 더불어 전형적인 남성의 나체상이 되어 있다. 두 어깨의 위치에 높고 낮음을 만들고, 목줄기 근육을 과장하여 조상(彫像)에 긴박감을 부연한 점은, 체구를 상반되는 두 방향축에 중심을 두고 있는 것과 함께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다비드>상이 풍기는 긴장감과 불안정성은 헬레니즘 조각의 다방향성(多方向性)을 한층 강조한 것이다. 일견, 미켈란젤로의 전형적인 상(像)은 도나텔로의 서정적인 양치기 목동이나 베로키오의 신경질적인 젊은이에 비하여, 참다운 고전적 감정을 가진 작품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상이야말로 현실에 성서의 영웅적인 행위를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의 목적은 소년의 우미함과 젊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청년의 무한한 에너지와 육체의 자신을 구현하는 하나의 전형을 제작하는 데에 있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브뤼쥐 대성당(벨기에)의 <성모자>에는 어린애가 성모의 무릎 사이에 서서 그의 옷자락 속에 파묻혀 있다. 전 시대의 성모자가 가졌던 온화한 유희성은 비감을 띠어 여기에서는 성모의 얼굴이 우수에 차 있다. 성모는 비개성적이고 또 중성적이라고도 할 얼굴 모습이다. 육체는 가령 팔과 어깨의 관절부에 있는 옷의 주름의 표현과 같이 의상에 의하여 완전하게 표출된다. 인물의 다양한 동정에도 불구하고 군상(群像)은 한데 엉켜 통일되어 있다.

그의 다음 작품으로서는 1505년에 주문을 받은 율리우스 2세 묘묘(墓廟)의 여러 작품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실현되지 않았으나(40점의 彫像을 포함), 오늘날에 와서 그 중심상이 되는 <모세>, 루브르에 소장되고 있는 두 점의 <노예(奴隸)>(모두가 1516)가 남아 있고, 그의 최초의 구상의 변형 축소된 작품이 빈코리의 산 피에트로 교회에 있다. <노예>상의 상징적인 의미는 차치하고 그 비꼬인 체구와 근육의 율동에는 생생한 현실감이 있다. <다비드> 상에도 그것을 느낄 수가 있으나 노예의 가슴에 걸려진 끈이 더한층 그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끈이 늠름한 육체를 결박하고 있는 모양은 1506년 로마에서 발견된 고대 라오콘 군상의 큰 뱀을 회상하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사람이 전력을 경주하는 모습이 아니고 정력이 다한 후의 쇠약을 암시한다. 현실이 추상에까지 승화되어 당당한 체구에 비하여 무력한 저항이 어떤 비장감마저 자아내게 한다.

2.5m에 이르는 <모세>의 좌상(坐像)은 당시 '무서움'이라 일컬어지던 힘을 풍기고 있다. 얼굴에서 보이는 분노와 우려는 위대한 구약의 지도자의 사연을 고하고 있다.

이후 그는 산 로렌초의 새로운 성기실(聖器室)에 메디치가(家)의 묘묘(墓廟)를 건축하게 된다(1520∼1534). 이 건축도 조각도 미완성으로 그쳤지만 이것은 바로크에 있어서 예술적 총합법(總合法)의 선례가 되었다. 네무르공(公) 줄리아노와 우르비노공 로렌초의 좌상 아래 각각 두 점의 나체상이 석관(石棺) 위에 있다. 메디치가의 두 사람 얼굴은 초상이라기보다도 중성적인 전형이라 하겠다. 줄리아노는 활발한 성격을, 로렌초는 명상적 성향을 반영한다. 석관 위 남녀의 나체상은 전자는 밤과 낮을, 후자에는 아침과 해질 무렵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나상에 미켈란젤로는 인간 나체의 이상적인 상을 표현하였다. 의상은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장해가 된다고 생략하였다. 안면마저 개성적인 것이라고 하여 중요시되지 않았고, '밤'은 그늘 속에 사라지며 '낮'은 미완성인 채로 그쳤다. 신체도 두 어깨와 다리의 현저한 대립이 강렬한 인상을 풍겨준다. 발달한 흉부와 복부 그리고 각부의 거대한 프로포션은 여성까지도 남성적인 것으로 하였다. 더욱이 이들 인체에 비하여 작은 석관은 상을 지탱하지 못하여 거대한 몸뚱이가 곧 무너져 떨어질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도 그 <노예>에서 보는 인간 육체의 소진과 무력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가슴은 속박하는 끈 대신에 권태와 침체가 있어 한편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조각의 형태를 빌려와 그 관념 내용을 피력한 것이다. 불신과 회의의 시대에 산 열렬한 그리스도 신자인 그는 이들의 상 속에 자신의 환멸감과 좌절감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에 조각된 <승리>상은 메디치가 가묘(家廟)의 감실에 놓여 있었던 <메디치의 성모자>상과 같이 극단적인 신체의 비꼬임을 보여 준다. 두부는 몸뚱이에 비하여 훨씬 작고 그 우미한 인체의 비례 또한 마니에리슴적인 인상 표현의 특징이다. 마니에리슴적 고뇌는 미켈란젤로 후기의 <피에타>의 세 작품과 초기에 제작한 동제 작품을 비교함으로써 알 수가 있다.

초기 군상은 고전적 작품인데 성기 르네상스적 이상을 반영하고 있으나, 시대를 따라 내려와 <피렌체의 피에타>(1548∼55), <팔레스트리나의 피에타>(1556경), 나아가서 만년의 작품인 <론다니니의 피에타>(1555∼64)에는 고전 형식의 부정과 육체나 물질의 공허함과 취약함에 대한 체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이들 작품에 병행하여 만들어진 그의 시에서 추측할 수도 있다.

마니에리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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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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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venuto Cellini (1500∼1571)

피렌체 출신의 조각가이며, 금세공인 그는 또한 유명한 <자서전>에서 자칭한 바와 같이 모험가·무뢰한·호색가이기도 하였다.그 책은 바사리의 <전기>와 더불어 당대 예술가의 특색을 전해 주며 열렬한 기백과 강한 개성을 풍긴다. 피렌체의 팔라초 베키오 전의 로지아 다 란치에 있는 <페르세우스>(1554)를 주조(鑄造)하였을 때의 기사는 그 청동상 이상으로 박력이 넘친다.

상(像)은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메두사(그리스 신화의 세 자매 괴물 고르곤의 하나)의 동부(胴部)이고, 나머지 하나는 칼로 베어낸 머리를 들어올리는 영웅상이다. 주제가 가진 극적 내용은 남성의 근육 표현에서 볼 수 있는 미켈란젤로적인 과장과 주금가(鑄金家)로서의 기술을 과시하는 첼리니의, 너무나 사소한 데 집착을 하는 버릇으로 인하여 그것을 잃고 있다. 두 육체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군상(群像)을 정시(正視)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받침이 되고 있는 메두사의 발을 페르세우스의 왼발로 끌어들인다고 하는 기묘한 착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식성을 주로 하였기 때문에 극적인 박력을 희생한 점은 목에서 떨어지는 피의 표현에서도 볼 수 있다. <자서전> 중에 조금사(彫金師)로서 철저한 자기 주장은 페르세우스의 어깨로부터 비스듬히 걸린 끈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는 그에 대한 그 시대 사람의 비난을 예기하여 페르세우스의 투구 천변(天邊)에 자각상(自刻像)을 붙였다. 이 작품에 앞서서 그는 1540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에 가서 황금으로 <식탁의 소금 단지>를 제작하였는데(1543) 대지의 여신과 해신(海神)의 나상을 위쪽에 두고, 그 주위에 소금 넣는 데(海産)와 후추 넣는 데(陸産)를 나란히 두었으며, 동부(胴部)에 인체와 짐승과 고기 등을 부조로 장식하였다.

볼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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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vanni da Bologna (1529∼1608)

미켈란젤로 사후의 피렌체에 있어서의 지도적 조각가이다. 도우에(북프랑스)에서 태어나 앙베르에서 수업하였으며, 로마를 거쳐 1555년 피렌체에 와서 조각가 및 건축가가 되었다. <메르쿠리우스>(1576?)는 청동의 소상(小像:62.7㎝)인데 공중에 날아다니는 전령신(傳令神)을 표현하여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왼발부터 로켓처럼 날려고 한다. 옆에서 보면 이 오른팔과 아래로 내려진 왼팔은 활 모양의 곡선을 그리며, 그것이 다른 두 곡선 즉 머리에서 오른 다리의 선과 왼편 겨드랑이부터 왼쪽 다리로 흐르는 선과 교차한다. 조금 방향을 바꾸어 정시하면 들어올린 팔은 오른발로 흘러내리고, 왼발에서 상승하는 선은 동부를 거쳐 머리로 올라간다. 이 미세한 균형은 반면에 극히 불안정한 감을 준다.

후기 대표작 <사빈의 약탈>(1582)은 고대 로마의 전설을 주제로 했다고 하는 군상(群像)인데, 미켈란젤로의 피그라 셀펜티나타(蛇行態)를 보다 철저하게 하여 주위에서 균등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점으로 <메르쿠리우스>보다 한층 더 복잡하다. 그는 각각 다른 성격의 세 인물을 공통적인 행동으로 통일하고자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감정의 표출보다도 오히려 장식적 효과를 목적하고 있으며, 세 인물의 얼굴은 고전적 양식에 나타나는 이상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