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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회화의 전개
편집中國繪畵-展開
중국회화에는 독자적인 특색이 있다. 그것은 중국이 타국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입었다는 것과, 외래문화에 대해 항시 주체성을 잃지 않고 동화(同化)하였던 수용방식에도 그 원인이 있겠다. 중국회화의 성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보수적·지속적이어서 관심의 도(度)는 횡적(橫的) 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고, 종적(縱的) 계열(系列)에 있어, 가령 원대(元代)에는 남송(南宋)을 뛰어넘어 북송(北宋)으로, 명대후기(明代後期)에는 전기(前期)를 부정하고 원말(元末)로, 이렇게 전대(前代)를 거슬러 올라가 반복적인 전개를 되풀이하여 왔다. 그래서 화론(畵論), 화사(畵史), 화가전(畵家傳), 저록(著錄)(작품을 기록한 책) 등과 같이 중국회화만큼 직접적인 문헌이 풍부한 예는 달리 없다.
또 원말(元末)로써 규범으로 삼아야 할 전형은 그 성립을 끝마쳤고 그 후는 그 전형을 계승·저술하는 것이 화가의 본도(本道)라고 하는 인식도 명대 중기의 문인에 의해 제창되고, 보편화되었다. 소위 '방:본뜨다'라 하는 개념이다. 전형의 확립과 방고의 제작태도는 당연히 제재의 제한(制限)마저도 생기게 하였다. 송대(宋代)까지는 도·불교화(道·佛敎畵)·인물·화조(花鳥)·축수(畜獸) 등 수없이 그려지던 것이 명대(明代), 특히 중기 이후에는 산수화(山水畵)를 주류(主流)로 하게 되었다.
재료의 특질로서는 모필과 묵(墨)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전자는 묘선(描線)에 따라 형상을 파악하는 것을 중시하고 서(書)의 필법으로써 그리는 방법이며, 후자는 농담을 나타내는 먹(墨)에 의해 색채를 대신함으로써 검정(黑) 일색으로 자연·동식물을 표현하는 기법이며, 한걸음 나아가서는 작화(作畵)의 목적은 사생(寫生)이 아니고, 흉중(胸中)을 토로하고, 인격을 투영(投影)하게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그림이 실물과 닮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副次的)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화(中國畵)에는 '미(美)'라고 하는 가치판단은 존재치 아니한다. 중국화의 평술(評述)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말을 쓰는 일은 일찍이 없었다.
평가(評價)의 첫째는 '기운(氣韻)'의 유무(有無)이며, 기술의 교졸(巧拙)에는 '진(眞)' '묘(妙)' '능(能)'이라는 어휘가 사용된다. '기운'이라는 말은 처음에는 그려진 생명의 맥동(脈動)을 지칭한 것이었으나 후에는 이것이 산수화에도 전용(轉用)되어 그림의 품격과 정취, 내면적인 충실성 등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기운의 개념이 변화를 가져온 시기, 즉 당송(唐宋)시대 또는 청말(淸末) 민국(民國) 기간을 가지고 시대구분으로 생각하는 수도 있으나, 여기에서는 종래대로 왕조를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하기로 한다.
중국화는 오랜 역사와 전란(戰亂)으로 인해서 멸실(滅失)된 정도가 아주 심하다. 당(唐) 이전의 자료로서는 발굴된 벽화, 전이나 석재(石材)에 새긴 화상(畵像), 화분·사자·악기 등에 다듬어진 공예화(工藝畵)를 제외하고는 극기 그 유품이 드물어, 당 이전은 '그림 없는 회화사(繪畵史)'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송원(宋元)에 이르러서도 진정한 유적은 극히 소수(少數)에 그칠 뿐이다. 가짜를 가려내어, 만인(萬人)이 납득할 만한 고명(高名)한 대작가(大作家)의 기준작(基準作)을 확정하는 것, 이것이 중국회화 연구의 첫째 절차이며 과제다.
한대의 회화
편집漢代-繪畵
중국에서는 석기시대에 채문토기(彩紋土器)의 문양(紋樣)으로부터 발달된 귀얄(刷毛)의 존재가 짐작되고 채색회화(彩色繪畵)의 부류는 멀리 은대 후기에 제작되었던 증거가 있다.
한대(漢代)에서는 예교주의(禮敎主義)의 국책에 의해 충신, 효자, 열녀 등의 권계화(勸戒畵), 신령(神靈)과 초자연적 세계의 산수화 등이 궁전이나 분묘의 벽화로 그려지고, 돌이나 기와에 새겨졌다. 치졸한 표현을 벗어나지 못한 것도 있으나 개중에는 생명감이 넘쳐 흐르는 유려한 필선도 볼 수 있으며, 선묘(線描)를 축(軸)으로 하는 중국회화의 기본적인 형식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화상석(畵像石)으로서는 산둥(山東)의 무씨사당(武氏祠堂) 외에 이난(沂南)·난양(南陽)·쓰촨(四川)의 것이 유명하다.
6조의 회화
편집六朝-繪畵
6조시대의 회화의 특색은 후한 말(後漢末)에 등장하게 된 문인화가(文人畵家)에 이어서 수다한 명수(名手)를 낳은 점, 그리고 송병(宋炳)·왕미(王微)의 화론(畵論)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노장사상(老莊思想)으로 논증된 뛰어난 예술비평이 행해지기 시작한 점, 제재(題材)로서는 종래의 권계화나 사전설화화(史傳說話畵)외에 새로이 불교회화가 개척되었던 점 등이다. 오늘날 화사(畵史)에밖에는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화가 가운데에서 고개지(顧愷之)가 가장 유명하고, 대영박물관 소장의 <여사잠도권(女史箴圖卷)>의 원본은 그의 제작이라 전해지는데, 산수화로서도, 위트 있는 인물화로서도 구도·필법 모두 고대의 동화적(童畵的) 표현으로부터 월등히 진보되어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의 회화
편집唐代-繪畵
문학이나 도기를 통해 상상될 수 있는 유려하고 풍만한 당대의 회화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전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멸실(滅失)되어 가히 그 진상을 짐작할 방법조차 없다. 초당(初唐)의 토목건축에서 거복(車服)의 제(制)에까지 종사하였던 궁정화가 염입덕(閻立德)·염입본(閻立本) 형제, 서역(西域) 전래의 특이한 음영법(陰影法)으로 평판이 높았던 울지을승(尉遲乙僧), 또한 당나라 전성기 쾌검(快劍) 진을 가른다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필선(筆線)으로서 장안·뤄양(長安·洛陽) 두 도읍의 사찰의 벽화를 독접하였고, 후세 인물화의 상징적인 존재로 그 이름이 자주 되새겨졌던 오도자(吳道子), 농채(濃彩)와 치밀한 장식적 화풍으로, 후세의 금벽산수화(金碧山水畵)의 전통을 텄고, 명의 동기창(董其昌)에 의해 북송화(北宋畵)의 시조(始祖)로 추앙된 이사훈(李思訓), 이소도(李昭道) 부자(父子) 등 그 어느 작가의 작품도 복원할 수 있는 실마리조차 충분한 것이 없다. 다만 시인으로 상서우승(象書右丞)의 벼슬에까지 올랐던 왕유(王維)는 문헌에 따르면 직인(職人)을 지휘감독하여, 웅장한 발묵풍(潑墨風)의 산수화를 그린 듯하나, 동기창이 이사훈과 대치시켜, 남송산수화(南宋山水畵)의 시조라고 본 것과 같은 그런 제1급의 화인이라고는 그 화풍상(畵風上)으로도 결코 말할 수가 없다.
당대 회화의 중요한 의의(意義) 중의 하나는 수묵화의 성립이다. 이 동양 독자적인 양식과 기법은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에 걸쳐, 왕묵(王墨), 왕묵(王默), 왕흡(王洽), 고황(顧況), 장지화(張志和) 등의 강남지방(江南地方)의 화인(畵人)에 의해, 술을 마시고 만취가 되어 모발(毛髮)이나 수족(手足)으로 먹을 튕기면서 음악에 맞춰 화포(畵布) 위에 사람을 태우고 이리저리 끌고 다녀, 그런 연후에 생긴 형체를 정리하여 완성시킨다는 식의, 반(半) 구경거리 같은 광태(狂態)를 통해 시작되었다. 흉중에 맺힌 심정이나 의지를 토로하고 표출다는 수묵화 표현의 본질이 극히 격렬하고 방자하며 조방(粗放)한 형으로서 포착되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화풍에 대해 일격체라고 불리는 이 화풍은 5대(代)의 석각(石恪)을 거쳐 북송 수묵화의 황금시대를 맞게 된다.
송대의 회화
편집宋代-繪畵
송대의 회화는 금군(金軍)의 침입에 의한 정강(靖康)의 변(變)(1127)으로 종실(宗室)이 남도(南渡)한 시기를 경계로 하여 북송(北宋)·남송(南宋)의 두 시대로 구분된다.
중국 역대의 왕조 중 송대(宋代)만큼 화가를 우대하고 미술에 이해를 보여 준 천자(天子)는 없다. 태조(太祖)·태종(太宗)은 서촉(西蜀)이나 남당(南唐)을 병합하자 그 화인(畵人)을 궁정의 화원(畵院)에 소집하여 대조(待詔)·저후(著候)·예학(藝學)·화학정(畵學正)·학생·공봉(供奉) 등의 역직(役職)을 부여하고 보호 육성을 꾀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산수화에는 연문귀(燕文貴) 외에는 화원보다는 오히려 재야(在野)의 화인(畵人)에서 후세 산수화의 2대조류의 원조라고 간주되었던 대가(大家)가 출현하였다. 북송(北宋) 말 휘종(徽宗)은 철저한 관찰에 의한 세밀한 사생과, 시정(詩情)의 표출을 목표로 화원의 개혁을 기도하여, 남도(南渡) 후의 고종(高宗)에 이르러서 그 성과는 공전의 성황을 이룬 결실을 맺었다.
이후 말기의 선승(禪僧)들에 의한 여기(余技)로 하는 수묵화 이외에 화원을 빼고서는 주목할 만한 화인은 없다. 그러나 자유로운 분위기로부터 다양한 화풍이 성행되어 개성적인 작가가 속출하였다.
이성
편집李成
자는 함희(咸熙). 당말(唐末)에 장안에서 산둥의 영구(營丘)로 옮겼고 이영구(李營丘)라고도 한다.
험준하게 우뚝 솟은 산들, '천리원(千里遠)'이라 말하는 끝없이 펼쳐진 평야와 게(蟹)의 발톱, 사슴의 뿔을 닮은 수목 등, 화북(華北) 황토지대의 경치를 '먹(墨)을 아끼기를 금과 같이'라고 평해진 담묵(淡墨)으로 묘사해 냈다. 그는 북방계(北方系) 산수화의 원조이기도 하다.
동원
편집董源
자(字)는 숙달(叔達), 일명 북원(北苑)이라고도 한다. 남경인(南京人)으로 남당(南唐)을 섬겼으며 후일 원부사(苑副使=庭番)가 되었고, 수묵화 외에 금벽 채색화(金碧彩色畵)도 그렸다고 한다. 기암괴석이나 고수(枯樹)를 그리지 않고 습윤(濕潤)하고 온화한 강남(江南)의 실경(實景)을 그렸다. 후일 미불에 의해
'평담천진(平淡天眞)'이라고 높이 호칭된 이래 남종화파(南宗畵派)의 원조로 추앙되었다. 제자로는 거연(巨然) 등이 있다.
범관
편집范寬
이름은 중정(中正), 자(字)는 중립(仲立). 산시(陜西) 화원(華原) 사람으로 대범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해서 '범관(范寬)'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원망(遠望)하더라도 좌외(座外)를 떠나지 않고 발밑으로부터 솟아오른 듯한 거대한 주산(主山)을 화면의 중앙에 배치하고, 5대(代)의 형호(荊浩)·관동(關同)의 당조(唐朝) 이래의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였다고 간주된다. 산림(山林) 중에 종일 정좌(正坐)하고, 귀가 후에는 일실(一室)에 틀어박혀 마음으로 체득한 이미지에 의해서 제작하는 '흉중(胸中)의 구학(丘壑)'의 작화태도(作畵態度)는 범관으로부터 유래된다고 한다.
곽희
편집郭熙
북송(北宋) 초기, 각지에서 성립한 전기(前記) 3인의 화풍 사이에는 상호간의 영향관계는 인지(認知)될 수 없으나 이성(李成), 범관(范寬)의 북방계(北方系) 산수화의 이념과 양식은 신종조(神宗朝) 화원화가 곽희에 의해 통일, 집대성되었다. 평원(平遠=水平視)·고원(高遠=仰視)·심원(深遠=俯瞰視) 등의 갖가지 시점에서 포착한 자연을 동일화면에 설정하는 3원법(三遠法)을 위시하여 아침(朝), 저녁(暮), 청(晴), 우(雨)의 광선이나 연무(煙霧), 4계(季)의 구별까지도 표현을 가능케 한 기법의 완성자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휘종
편집徽宗
이름은 길(佶). 신종(神宗)의 제11자(子). 이성(李成), 동원(董源) 등과 같은 시기에 등장한 서촉(西蜀)의 황전(黃筌)과 그 일족은 명확한 묘선(描線)과 농후한 색채에 의해 호화롭고 장식적인 화조화(花鳥畵)를 그려, 이것이 궁정화원의 지도양식이 되었다.
한편 수묵(水墨)을 주로 하고, 윤곽선을 쓰지 않는 남당(南唐)의 서희(徐熙=황씨의 '부귀의 본'에 대해, '野逸'이라고 불렀다)는 황씨에 의해 조악(粗惡)하며 격(格)에 들지 않는 것으로서 배격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서숭사(徐崇嗣)는 황씨체에 접근하여 양자 간의 절충이 시도되었다.
그의 화풍은 곽희와 동시대(同時代)의 최백(崔白)·오원유(吳元瑜) 등에 의해 완성되어, 원체화조화가 성립되었는데 최백(崔白)을 제외한 이상 여러 화가의 작품은 거의 멸실(滅失)되어 남아 있지 않다. 일대(一代)의 풍류천자(風流天子) 휘종필(徽宗筆)이라 전해지는 몇 점의 그림이 북송 후기 화풍의 추이를 추측케 하는 데 불과하다. 휘종은 시(詩)의 일구(一句)를 주어 경작케 하여, 함축과 여정(餘情)을 띤 제재를 취급함을 가(佳)한 것으로 하는 그러한 통제와 지도를 행하는 반면, 내부(內府)의 수장(收藏)을 늘리고, 스스로도 화필(畵筆)을 들어 그 천재적인 재간을 발휘하였다.
마원
편집馬遠
가학(家學)은 하중(河中)의 불화사(弗畵師)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5세(世) 7씨(氏)의 화가를 배출시킨 일족 가운데서 가장 걸출(傑出)하며 하규(夏珪)와 더불어 남송(南宋) 원체화를 대표하는 화인(畵人). 광종(光宗) 영종조(寧宗朝)의 대조(待詔). 북송 산수화의 웅대한 경관은 소실되고, 주산(主山)은 비스듬히 잘리어, 화면의 한구석에 밀어 붙이고 잔산잉수(殘山剩水), 변각(邊角)의 경(景), 마일각(馬一角) 등으로 불리는 일편(一片)의 자연으로 변모되었다. 여백(余白)에 시정(詩情)과 의미가 담겨진 휘종의 지도이념이 쇠약해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양해
편집梁楷
영종조(寧宗朝) 화원의 대조(待詔). 시여(賜與)받은 금대(金帶)를 원중(院中)에 걸어놓고 떠났다는 기행(奇行)의 주인공으로 '양풍자(梁風子)'라고 불리었다. 인물산수화(人物山水畵)에 뛰어나며 특히 감필체(減筆體=필체를 적게 간략화하고, 사의를 목적으로 한 기법)로 된 인물화는 절품(絶品)으로 평가되고 있다.
미불
편집자(字)는 원장(元章)으로 양양만사(襄陽漫士), 해악외사(海岳外史) 등의 호(號)가 있다. 휘종에게 소치(召致)되어 서화학 박사가 되었고, 그의 탁월하고 직관적인 감식안은 그의 비망록 <화사(畵史)> 중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붓을 쓰지 않고, 연근이나 사탕수수의 짜고 난 찌꺼기 등을 구사한 조방(粗放)한 화풍은 후세에 '미가산(米家山)'이라 불리는 형식화된 점태법(點苔法)으로 변질되어 남종(南宗) 문인화(文人畵)에 많이 이용되었다.
목계
편집牧谿
송말(宋末) 탁종(度宗) 때의 촉(蜀)나라 사람. 중년에 선승(禪僧)이 되어 호를 목계, 휘(諱)를 법상(法常)이라 칭하며, 서호(西湖)의 육통사(六通寺)를 창건하였다. 남송선여(南宋禪餘)의 수묵화, 나아가서는 동양 수묵화의 정상을 이루는 대작가인데 그의 그림은 중국 본토에서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하였었다.
그 밖의 화인
편집-畵人 미불과 같은 문인 그룹에 속하는 사람으로는 목석화(木石畵)에 소식(蘇軾), 마(馬)·인물화에 이공린(李公麟), 묵죽(墨竹)에 문동(文同) 등이 있고, 종실(宗室)에는 조영양(趙令穰), 왕선(王詵)이 있다. 남송(南宋) 초기의 화원화가로서 이당(李唐), 이적(李迪), 소한신(蘇漢臣), 마화지(馬和之), 미불의 아들 미우인(米友人) 등이 있고 좀 내려와서는 마원(馬遠)의 아들 마인(馬麟), 유송년(劉松年) 등이 활약하였다. 목계(牧谿)에 이어서 등장한 선승화가(禪僧畵家)로서는 옥간(玉澗), 온일관(溫日觀) 등이 있고 남송의 진사(進士)로 원조(元朝)에 봉직하지 않았던 전선(錢選)은 절지화(折枝花)나 소동물(小動物)을 그려 원체화(院體畵)를 부흥시켰다.
원대의 회화
편집元代-繪畵
원대의 화가는 화원계(畵院系), 문인계(文人系), 거기에 산수화의 이곽파(李郭派) 등 셋으로 대별된다. 원대(元代)에는 화원(畵院)의 제도는 없었고, 남송의 멸망과 더불어 화공(畵工)은 후원자를 상실하여, 대부분 저장지방(浙江地方)의 한 양식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정착하였다. 그러나 중국내에서의 평판은 그리 좋은 편은 못 되었다. 화원계(畵院系)의 화인에 비하여 문인화가의 활약은 눈부신 바 있어 동원(董源)·미불·미우인(米友仁) 등과, 또 한편으로는 이곽파(李郭派)의 화가들도 이성(李成), 곽희(郭熙) 등을 스승으로 받들고, 북송(北宋)으로의 복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북송의 여러 선학(先學)들의 예술의 본질은 상실되어 자연을 관찰하는 의욕도 희박해지고 기법상으로도 조잡하여, 산수화로서는 구도에 있어 통일성이 결여되고 화면의 원근(遠近)의 표현도 성공을 보지 못하였다.
조맹부에서 비롯된 복고운동은 원말 황공망(黃公望), 왕몽(王蒙), 오진(吳鎭), 예찬(倪瓚)의 4대가에 이르러 남종(南宗) 산수화풍의 전형이 완성케 되었다. 명 말의 동기창(董其昌)은 4대가 이후에 규범이 될 수 있는 강렬한 개성적인 작가는 없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방 아무개'라고 낙관(落款)한 산수화가 이의적(二義的)인 모사(模寫)는 아니고 독립된 작품으로서 성행하게 되었다.
조맹부
편집자(字)는 자앙(子昻), 호(號)는 송설도인(松雪道人). 후저우(湖州)사람으로 송태조 11대손이다. 한림학사 승지(翰林學士承旨)가 되었으며 문민(文敏)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시문·서화(書畵)에 모두 능해 원조(元祖) 전반기 화단(畵壇)의 지도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화조수축(花鳥獸畜)도 그렸으나 산수화는 북방계(北方系)의 이곽풍(李郭風), 남종계(南宗系)의 동원풍(董源風)의 2체(二體)를 좇아 모방하였다. 그러나 원본(原本)이 갖는 사실성·일격성(逸格性)은 저하되어 버렸다.
예찬
편집倪瓚
자(字)는 원진(元眞), 여러 가지로 불리었던 호(號) 중에서 운림이 가장 알려져 있다. 무석(無錫)사람으로 부호의 집안이며 '청비각(淸悶閣)'을 축조하여 풍부한 수장(收藏)을 과시하였으나 50세경 전란(戰亂)을 예측하여 가재(家財)를 버리고 여행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극단적으로 결벽하며 속진(俗塵)을 꺼려하여 '예우(倪迂)'라고 불릴 정도로 기이한 언동이 많은 점에서 미불과 닮았다고 한다.
동거양식(董巨樣式)에 이곽파(李郭派)를 가미하여, 숙산체(肅散體:냉랭하고 깔끔하다는 의미)라고 불리어 몇 그루의 나무와 강변의 한 소정자(小亭子)에다 인물을 그려 넣지 않는 독특한 산수화를 만들어 내었다.
황공망
편집黃公望
자(字)는 자구(子久), 대치도인(大癡道人)이라는 호(號)를 갖고 있었다. 상숙(常熟) 사람이다. 4대가(四大家) 중의 최연장자로서 경사구류(經史九流)의 학문에 통달하였으며 예운림(倪蕓林)과 더불어 가장 문인다운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조자앙(趙子昻)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동거(董巨)를 사법(師法)으로 삼아, 남종화(南宗畵)의 묘사형식을 완성하여, 명대(明代) 이후의 산수화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화법상(畵法上) 다른 세 사람을 포괄하는 폭넓은 성격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 우주(宇宙)의 점에도 유례없는 웅대함을 나타내고 있다. <부춘산거도권(富春山居圖卷)>은 중국 산수화의 최우수작으로서 유명하다.
왕몽
편집王蒙
자(字)는 숙명(叔明). 오흥(吳興)사람으로, 조맹부의 외손(外孫), 또는 조카라고도 전해진다. 원말(元末), 난(亂)을 피해 저장(浙江)의 황학산(黃鶴山)에 은거하여 황학산초(黃鶴山樵)라 호(號)하였다. 홍무(洪武) 초기, 명조(明朝)를 섬겼으나 호유용(胡惟庸)의 음모사건에 연좌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고원형식(高遠形式)의 구도에 웅위(雄偉)한 산용(山容)을 화폭 가득히 쌓아올려 집요하게 그리는 것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오진
편집吳鎭
자(字)는 중규(仲圭), 매화도인(梅花道人)이라 호(號)하고, 자싱(嘉興)사람. 다른 3가(三家)와 달리 정통 학문을 수업하지 못했으며 역(易)을 생업(生業)으로 하였다. 거연(巨然)의 화풍을 배워, 콘트라스트가 강한 농담묵(濃淡墨)으로 산수·대(竹)·매화(梅花)를 그렸다.
그 밖의 화인
편집-畵人 조맹부의 일족(一族)으로 그림을 잘 그린 사람에 그의 아내인 관도승(管道昇), 그의 아들 조옹(趙雍), 조인(趙麟) 등이 있고, 그룹으로서는 위구르인인 고극공(高克恭), 감식에도 능하였던 가구사(柯九思), 묵죽(墨竹)의 이간, 조맹부의 제자로 황씨체의 화조(花鳥)를 그렸던 왕연(王淵) 등이 있다. 이곽파의 화인에는 조지백(曹知白), 강체, 주덕윤(朱德潤) 등이 있고, 또한 전반기의 산수화가로서는 마완(馬碗), 도사(道士)인 방종의(方從義), 성무(盛懋), 원말(元末)에는 묵란(墨蘭)의 승설창(僧雪窓), 묵매(墨梅)의 왕면(王冕) 등이 있다. 그리고 조어(藻魚)의 뇌암(賴庵), 율서(栗鼠)의 용전(用田), 송전(松田) 등의 지방화가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명대의 회화
편집明代-繪畵
명대의 회화는 시기적으로나 유파상(流派上)으로도 대체로 3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제1기는 명초(明初)에서 영락(永樂)까지로, 원말(元末) 4대가 중 예찬(倪瓚)과 왕몽(王蒙)은 홍무년간(洪武年間)까지 생존해 있었고, 전자를 형식상 답습한 왕발, 후자를 스승으로 하여 모방한 서분(徐賁) 등이 활약했고 또한 조원(趙原) 등도 있었다. 제2기는 선덕(宣德)에서 홍치(弘治)까지로, 화원이 질량(質量) 공히 충실해졌고, 남송원체(南宋院體)의 화조도를 부활시킨 변문진(邊文進) 일족(一族)이나 대문진(戴文眞)을 필두로 한 이재(李在)·석예(石銳)의 산수, 임량(林良)·여기(呂紀)의 화조(花鳥) 등, 절파(浙派)라고 불리는 화인(畵人)이 종횡으로 분방(奔放)한 필묵을 구사하였다. 절파(浙派)란 대문진의 출신지인 저장성 항저우(浙江省杭州)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남북 양송(兩宋)의 산수화, 지방양식적인 불화(佛畵), 중당(中唐) 이후의 광일(狂逸)한 수묵화 등의 다양한 기법을 받아들인, 운필(運筆)이 빠르고, 농담의 묵법(墨法)이 격렬하고, 어수선한 작품으로 되는 인물·산수화가를 지칭한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가서, 어느 유파에도 따르지 않은 일군(一群)의 개성적인 화가, 즉 주신(周臣)·당인(唐寅)·구영(仇英)·장령(張靈) 등이 있어, 원파(남송원체화를 계승하였다는 의미)라고 불린 적이 있다.
제3기는 정덕(正德)·가정(嘉靖)에서 명 말(明末)까지로 성화(成化) 때부터 활약하였던 심주(沈周) 문하(門下)의 문징명(文徵明)을 맹주(盟主)로 오파(吳派)의 문인화가(文人畵家)가 이 시기의 초기에 환영을 받았던 주단(朱端)·오위(吳偉)·장로(張路) 등 절파의 화가에 대체하여 화단(畵壇)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만력(萬曆)·숭정(崇禎) 때의 동기창(董其昌)의 이론적인 지지를 얻어, 유파(流派)로서는 세분화(細分化)되면서도 이후 청조말년(淸朝末年)까지 중국화(中國畵)의 주류를 형성한다. 오파(吳派)란 북송화계(北宋畵系)의 절파(浙派)에 대해서 말하는 명대(明代) 남종화파(南宗畵派)의 이름으로 예운림(倪蕓林)을 제외한 원계(元季)의 3대가와 명대 남종화인(南宗畵人)의 대다수가 오군(吳郡) 출신인 점에 연유한다. 중담묵(中淡墨)에 의한 미묘한 묵조(墨調)나 화려한 색채, 문인(文人) 서클에 꼭 알맞은 온화하고 우아한 작풍이 그 특색이다.
오파 문인화 외에 만력에서 명말(明末)에 걸쳐서는 다양한 개성적인 작가가 출현하였다. 이사달(李士達), 오빈(吳彬), 정운붕(丁蕓朋), 항성모(項聖謀) 등이 이에 속하는데 진홍수(陳洪綬), 최자충(崔子忠) 등은 멀리 6조(六朝), 당(唐)에까지도 거슬러 올라간 의고적(擬古的) 작품을 남기고 있다. 절파(浙派)는 사시신(謝時臣)을 거쳐 남영(藍瑛) 일족에 이르러 그 막을 내렸다고 하는데, 남영은 오히려 남북 양화풍(兩畵風)의 절충적인 성격이 강하다.
대진
편집戴進
자(字)는 문진(文進), 정암(靜庵)이라 호(號)하며 첸탕(錢塘)사람이다. 선덕화원(宣德畵院)에 등용되어 명조(明朝) 제일의 명성을 얻었으나 동료의 시샘을 받아 추방된 후 궁한 가운데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절파(浙派)의 원조로 지목되며, 화원(畵院)의 화풍을 결정지웠다고 한다.
당인
편집唐寅
자(字)는 백호(伯虎)이고 육여거사(六如居士)라고 호(號)하며, 오(吳)나라 사람이다. 시서화(詩書畵) 3절(三絶)이라 추앙되고 그 자신도 강남 제일의 풍류재사(風流才士)임을 뽐냈으나 관도(官途)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주색(酒色) 가운데 생애를 마쳤다.
심주
편집沈周 자(字)는 계남(啓南), 호(號)는 석전(石田), 장저우(長州)의 명문출신으로 부조(父祖) 일족이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났는데 심주(沈周)는 송원화(宋元畵) 특히 황공망(黃公望)에게 몰두하여 만년(晩年) 오진(吳鎭)을 배워, 필묵(筆墨)의 격조(格調)가 강한, 웅건(雄健)한 화풍을 창출하였다. 남종화(南宗畵) 부흥의 선도자로서의 명성에 비하면 수작(秀作)이 많지 않다.
문징명
편집文徵明
자(字)는 징중(徵中), 호(號)는 형산(衡山). 장저우(長州) 사람. 근엄한 성품으로서 가정기(嘉靖期). 문인사회의 중심적 존재로서 존경을 모으고, 심주(沈周) 문하(門下)로서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 원조(元祖)로 지목되고 있다.
일족 중에 문팽(文彭), 문가(文嘉), 문백인(文伯仁), 문숙(文淑), 문진형(文震亨), 문종간(文從簡), 문점(文點) 등이 있고, 그 문하에 진순(陳淳), 육사도(陸師道), 전곡(錢穀), 주랑(朱郎) 등이 있다.
동기창
편집董其昌
자(字)는 현재(玄宰), 호(號)는 사백(思伯). 관직(官職)은 대종백(大宗伯)이 되엇고, 문민(文敏)이란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화정(華亭) 사람이다. 문징명(文徵明) 이후 서화(書畵)의 제일인자로서 예림백세(藝林百世)의 대종사(大宗師)로 추앙되었다. 그의 화론(畵論) '남북2파론(南北二派論)'은 왕유(王維)·동원(董源)·거연(巨然)·미불에서 원말의 4대가를 거쳐 오파(吳派)에 이르는 문인화의 계열을 선(禪)의 남종(南宗)으로 간주, 이를 정통으로 존중하고, 원체계(院體系)인 직업화가의 일군(一群)을 쇠미(衰微)의 일로를 걷던 북종(北宗)에 비유하며 이를 경멸하였다. 여기에 절파(浙派)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오파는 이에 강력한 논거(論據)를 얻었으나 수석(樹石) 준법의 하나하나에서 전대(前代)의 전형을 구하려고 하는 주장과 수법은 청조 초기의 정통 남종화(南宗畵)를 완전한 형식주의로 전락케 하였다.
그 밖의 화인
편집-畵人 절파(浙派)의 화인에는 선덕(宣德)의 상희(商喜), 성화(成化)의 종흠례(鍾欽禮), 홍치(弘治)의 서림(徐霖), 정덕(正德)의 사충(史忠) 등이 있고, 오파(吳派)의 화인(畵人)에는 문씨(文氏) 일족 외에 거절(居節), 왕각상(王殼祥), 송욱(宋旭), 육치(陸治), 막시룡(莫是龍), 장굉(張宏) 등 동기창(董其昌)의 분파(分派)인 소운종(蕭蕓從), 조좌(趙左), 심사충(沈士充) 등이 있으며, 일격체(逸格體)의 수묵화가로서는 만력(萬曆)의 서위(徐渭)·장서도(張瑞圖), 천계(天啓)의 보하(普荷)·장풍(張風) 등이 유명하다.
청대의 회화
편집淸代-繪畵
청조(淸朝) 초기에는, 망국(亡國)의 한을 필묵에 싣거나 혹은 회화를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제작에 임한 개성적 작가들의 활약이 괄목할 만하다. 모두들 명(明)의 왕실(王室) 출신인 8대산인(八大山人), 석도 외 매청(梅淸), 홍인(弘仁), 공현, 정수(程邃), 법약진(法若眞), 예원로, 나목(羅牧)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화단(畵壇)을 주로 제압하고 있던 것은 오파문인(吳派文人)의 정통을 계승한 4왕5운의 6대가와 그 주변의 화인 세력이었다.
한편 순치(順治)·강희(康熙)·건륭(乾隆)의 역대 천자도 송대(宋代)의 천자에 못지않게 예술을 애호하여, 내정(內廷)에서 봉직하는 화인(畵人)의 충실을 기하고, 황제의 기호에 맞는 우미하고 단정하며, 대체로 일격(逸格)의 기미(氣味)가 없는 몰개성적인 청조원체화를 생산케 하였다. 장종창(張宗蒼), 전유성(錢維城), 동방달(董邦達), 동고(董誥), 정관붕(丁觀鵬), 이탈리아인인 낭세령(朗世寧), 우리나라 사람인 이세탁(李世倬) 등이 이에 속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공전 절후(空前絶後)하리만큼 중국미술의 수집(蒐集)을 행하였으나 화원의 작품은 고화(古畵)와 더불어 이 컬렉션의 중요한 일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화원도 가경제(嘉慶帝)의 시대를 최후로 하여 쇠퇴일로(衰退一路)를 걸었다.
건륭시대(乾隆時代)에는 이 이외에 상두(商都) 양저우(揚州)를 중심으로 하여 인기가 있던 8괴(八怪)라 불리는 그룹이 있다. 모두 중년을 지나서 화업(畵業)을 시작하여 화조(花鳥)·산수(山水)도 그렸으나, 묵죽(墨竹)·묵란(墨蘭)·묵매(墨梅) 등 여기적(餘技的) 제재를 취급하였고 또한 기이함을 자랑하는 난폭한 작품도 있음을 볼 수 있다.
근대 중국화 양식의 원형(原型)은 전통을 계승한 화원계(畵院系) 및 4왕계(四王系)도 아니고, 자유럽고 정형(定型)을 무시한 8괴계(八怪系)의 회화이며, 그 영향은 도광(道光)·광서(光緖) 연간(年間)의 조지겸(趙之謙), 민국(民國)의 오창석(吳昌碩)을 거쳐 현대의 중국화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4왕5운
편집四王五雲
왕시민(王時敏), 자(字)는 손지(遜之), 호(號)는 연객(煉客), 왕감(王鑑). 자는 원조(圓照), 호(號)는 상벽(湘碧). 왕휘, 자(字)는 석곡(石谷), 호(號)는 경연산인(耕煉山人). 왕원기(王原祁), 자(字)는 무경(茂京), 호(號)는 녹대(麓台) 등의 4명을 4왕(王)이라 하고 오파문인화(吳派文人畵)의 정통(正統)으로 지목된다. 남북2종(南北二宗)의 화풍(畵風)을 합일(合一)하여 '백년(百年) 이래 오직 한 사람'이라고 지칭된 왕석곡(王石谷)이 창서우(常熟) 출신임을 제외하고 모두 태창(太倉) 사람들로서 지연(地緣)·혈연에 의한 동족의식도 유파로서의 결합을 공고히 하여 주었다.
또한 천주교도(天主敎徒)가 되어 유럽에 도항(渡航)한 오력(吳歷), 자(字)는 어산(漁山), 호(號)는 묵정(墨井)과 서숭사계(徐崇嗣系)의 몰골사생법(沒骨寫生法)에 의해 명대(明代) 이후의 화훼화(花卉畵)를 일신(一新)하여 후세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운격, 자(字)는 수평(壽平), 호(號)는 남전(南田) 두 사람을 더하여 청초(淸初)의 6대가라고 지칭되었다.
양주 8괴
편집揚州八怪
금농(金農)을 필두로 나빙(羅聘), 정섭(鄭燮), 이치, 왕사신, 이방응(李方膺), 고봉한(高鳳翰), 황신, 민정(閔貞) 외에 고상(高翔), 거기에 화암을 더하여 함께 8괴(八怪)라고 부른다. 대부분은 양저우(揚州) 이외의 출신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와 경제적인 원조를 구해 양저우에 정착한 사람들이다. 명대 중기(明代中期) 이후 현저해진 문인화가의 직업화(職業化)의 좋은 본보기이다.
그 밖의 화인
편집-畵人 공현과 같이 금릉(金陵) 8가(八家)의 그룹 중에서 번기(樊圻), 오굉(吳宏) 등, 관리(官吏)이면서 화원화가를 겸한 사람에 장정석(蔣廷錫) 당대(唐垈), 추일계(鄒一桂) 등이 있고, 4왕(四王)에 준하는 계통에 전두(錢杜), 해강(奚岡), 대희(戴熙), 황이(黃易), 탕이분(湯貽汾) 등이 있는 외에 화조화가(花鳥畵家)에 방훈(方薰), 왕무(王武), 마원어(馬元馭), 미인화가(美人畵家)에 여집(餘集), 개기(改琦), 비단욱(費丹旭), 초상화가에 증경(憎鯨), 우지정(愚之鼎)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