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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시대의 문자
편집갑골문
편집甲骨文
중국의 문자(文字)가 어떻게 하여 발생하였는가, 그 상세한 이유·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개인적·사회적 제 조건이 쌓이고 쌓여, 사물의 형체를 포착하고 숫자를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언어를 기호화(記號化)하는 것에 착안하게 되었을 게다.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있는 중국 최고의 문자는 기원전 1400년경이라 생각되는 은(殷)의 귀갑수골문(龜甲獸骨文)이다. 이것은 19세기 말(末),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근교에 있는 샤오툰, 소위 은허(殷墟)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은왕조(殷王朝)는 신(神)에 대한 신앙심이 두터웠으며, 점괘로 얻은 신의(神意)에 따라 정치를 행하였다.
이 갑골문(甲骨文)은 은인(殷人)이 점(占)에 사용한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에 신에게 묻는 것이나 그 결과를 새긴 기록이다. 한민족은 늘 미(美)를 사랑하는 인종(人種)이다. 따라서 막 생겨난 문자에도 곧 미화(美化)하는 노력이 가해졌다. 갑골문에는 원시적인 상형문자(象形文字)와 상당히 진보된 구성을 보이는 문자가 산재(散在)한다.
원래 예리한 소도(小刀)로 새긴 것이기 때문에, 필화(筆畵)는 소박하고 직선적이지만 고대인다운 미적 조형감각이 구석구석까지 작용하고 있다.
현존하는 기원전 1400∼기원전 1100년 간의 갑골문은 자형의 변천과 서풍(書風)에 의해 다섯 시기로 구분되어 있다. 또한 동일한 은허(殷墟)에서 묵서(墨書)가 있는 도편(陶片)이 발굴되어 이미 뛰어난 모필(毛筆)이 존재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밖에 은왕조(殷王朝)에서는 신성한 조묘(祖廟)의 제기(祭器)인 청동기(靑銅器)의 명문(銘文:金文이라고도 부른다)이 있다. 문자인지 그림인지를 분간하기 힘든 간단한 도상문자(圖象文字)가 많다.
고문
편집古文
주대(周代)에 들어서는 갑골(甲骨)의 사용은 쇠퇴되고, 동기(銅器)의 제작이 성행되었다.
이러한 금문 (金文) 은 점차로 기록적 사명을 확대하여 장문화(長文化)한다. 처음에는 아직 얼마쯤 상형성(象形性)을 유지하나 마침내 필화(筆畵)는 복잡해지고 곡선형이 많아져, 좌우대칭의 호쾌한 기상(氣象)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기 (中期) 이후에는 상당한 장식성조차도 가중되게 된다. 이 시기(기원전 1100∼기원전 250년경)의 서체를 일반적으로 고문(古文)이라 부른다.
진시황제의 문자통일
편집대전·소전
편집大篆·小篆
춘추(春秋)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금문(金文)의 서체(書體)는 지방차(地方差)가 현저해지나, 마침내 열국간의 교통이 빈번해짐에 따라, 자체(字體)나 서풍(書風)의 상호 전파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자획(字畵)의 합리적 정리가 행해졌다. 그런데 서방(西方)의 진국(秦國)에서는 동방제국(東方諸國)과 상당히 상이한 서풍(書風)으로 발전하여, <설문(說文)>에서 말하는 대전(大篆)이라는 서체가 되었다.
마침내 개략해서 기원전 250년, 진(秦)이 천하를 통일할 때쯤 되어서는 대전(大篆)을 모태로 하여 소전(小篆:일반적으로 전서라 한다)이라는 신서체(新書體)가 탄생하였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재상(宰相)인 이사(李斯)의 헌책(獻策)에 따라 문자의 통일을 단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소전(小篆)은 새로운 제정(帝政)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듯이 힘찬 곡선으로 장중하게 꾸며졌다.
이 시기의 유품으로서는 청동기(靑銅器)의 명문(銘文), 석고문(石鼓文=大篆), 태산각석(泰山刻石=小篆) 등이 있다.
서체의 분화·발전-진·한·삼국·육조
편집서체의 전개
편집書體-展開
진(秦)은 불과 15년으로 멸망하였으나 서체의 변천상은 급속한 것이어서 이미 소전(小篆)의 약체(略體)로서 직선적이며 장식성이 적은 예서(隸書)가 싹트고 있었다. 시황제가 도량형을 통일시켰을 때에 그 표준으로 만들어진 권(權)이나 양(量)의 각자(刻字)에 이 서풍(書風)을 볼 수가 있다. 대량생산으로 인해서 문자가 간략화되었던 것이다.
전한(前漢)에 들면 전서(篆書)는 현저히 쇠퇴하고, 예서(隸書)의 계통이 발전하였다. 이 무렵의 간략체(簡略體)를 고예(古隸)라고 부른다. 그리고 기원전 100년경에는 새로운 장식으로서의 파세(波勢)를 보인 팔분체(八分體)가 출현하였으며 또 고예의 속사체(速寫體)에서 초예(草隸)가 생겨났다.
후한(後漢)에서는 초예(草隸)·장초(章草)가 주류(主流)가 되고, 전서(篆書)와 팔분체는 주로 의례적(儀禮的)인 경우에 사용되었다. 후한 후기의 소위 한비(漢碑)는 권위를 상징하는 듯 보이는 팔분체(八分體)가 그 미(美)를 과시하고 있다.
이런 경과를 보여주는 유품으로서는 서역 출토(西域出土)의 목간(木簡), 을영비(乙瑛碑)·예기비(禮器碑)·조전비(曹全碑) 등의 한비(漢碑)가 있다.
한(漢)이 멸망하자 권위적인 것에 대한 반항,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향한 동경정신이 고양(高揚)되어, 3국(三國)의 글씨는 전혀 자유로운 표현이 존중받게 되었다. 가장 전례적(典禮的)·의례적이었던 한대의 예서(隸書)는 의지적(意志的)인 힘이 강조되고 감각적인 긴장을 나타내게 된다. 그리하여 강한 파세(波勢)를 뿌리쳐서 점차 유연한 필치가 되었다. 이 무렵 장지(張芝)라든가 종요라는 개인의 이름이 출현하기 시작하고 여기에 개성이라는 것을 존중하고 글씨를 감상의 대상으로서 본다는 자각이 생겨났다. 장지는 초서(草書)의 명인이고 종요는 해서(楷書)의 명수였다고 전해진다.
위(魏)에서 서진(西晋)에 걸쳐서는 자체(字體)의 교착(交錯)이 심하게 행해졌다. 한(漢) 이래의 장초(章草)는 말끔히 그 파세가 정리되어 새로운 초서(草書)가 되고, 초예(草隸)에서 한발 진보된 일체(一體)가 행서(行書)로 되었다.
이 두 가지가 실용문자(實用文字)로서, 동시에 감상서 표현으로서 주류가 되었다. 서역발굴(西域發掘)의 목간(木簡)에는 이 시대의 행초풍(行草風)의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예서(隸書)의 리듬과 풍성하게 흔들리는 자체(姿體)의 여흔(余痕)을 남기고 있다.
<이백척독고(李柏尺牘稿)>는 동진(東晋) 초기의 유품으로서 귀중한 것인데 거기에는 행서(行書)·초서(草書)·장초(章草)의 서체를 찾아볼 수 있다.
후에 서성(書聖)이라고 추앙되던 왕희지(王熙之)기 동진(東晋) 중기에 등장하였다.
처음에는 혼후(渾厚)하고 우미한 서풍(書風)으로 썼으나, 후반생(後半生)에서는 소쇄(瀟灑)하고 어딘지 쓸쓸함을 띤 그런 서풍에 도달했다. 그의 아들 헌지(獻之)도 서예에 능하여 이 2왕(二王)의 출현에 의하여 행초(行草)의 표현은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동진의 유품으로서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문서와 사경(寫經)이 있으나 왕희지(王羲之)에 관해선 당인(唐人)의 쌍구전묵법(雙鉤塡墨法)에 의하여 모사(模寫)한 <상란첩>과 <공시중첩(孔侍中帖)>이 있다.
그리고 남조(南朝)로서의 동진(東晋)에는 팔분(八分)의 장식을 버린 간단한 일종의 원시적 해서(楷書)가 점차 형체를 굳혀 5세기 중엽에는 참으로 훌륭하게 완성된 해서가 되어 등장하였다. 필법(筆法)·서법(書法) 등을 엿볼 수 있는 이 해서의 성립은 종래의 서도(書道)를 일변시켰다. 이에 이르러 전기(前期)까지 남아 있던 예서(隸書) 이래의 파세는 깨끗이 없어지고 행서(行書)·초서(草書)도 같은 골법(骨法)과 구성의 법칙으로 통일되게 되었다. 사경(寫經)과 서역 출토의 문서에 의해, 이러한 해서의 전개를 볼 수가 있다.
한편 4세기 초, 종요·색정(索靖) 등 화북(華北)의 명가(名家) 서풍(書風)이 서방으로 유입되어, 카라샤르(焉耆) 지방에서 고착(固著)하였다. 그의 글씨는 예(隸)·해(楷)의 중간을 취하여, 호인(胡人) 독자적인 감각을 갖는 의지적(意志的)인 풍격(風格)을 지니고 있다. 북위(北魏)도 마침내 이 파(派)의 서풍(書風)을 계승하여 5세기 중엽경에는 북위 일류의 호강(豪强)한 해서(楷書)를 창출하였고 남방 한인(南方漢人)의 유려 우미(流麗優美)한 서풍(書風)과 재미있는 대립을 보이고 있다. 룽먼석굴의 조상기(造像記)나 출토(出土)된 사경이 주된 자료가 되어 있다.
해서의 전형-수·당
편집당의 4대가
편집唐-四大家
6조(六朝) 후반기에 있어 남북2파(南北二派)의 대립도 북인이 점차 남방문화(南方文化)를 동경해서 접근하여 정치상의 통일자(統一者) 수조(隋朝)가 등장할 무렵에 글씨도 새로운 수양식(隋樣式)으로 정리(整理)되려 하고 있었다. 전대(前代)에는 볼 수 없었던 정치(精緻)한 구성을 갖게 되고, 정제(整齊)한 가운데에도 소쇄(瀟灑)한 기상을 갖는 해서(楷書)를 묘지(墓誌)나 비(碑)에서 볼 수 있었다. 수조(隋朝)를 대표하는 서가(書家)는 지영(智永)이다. 그의 글씨로서 저명한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이 현존하고 있다. 그리고 초당(初唐)에 이르러, 해서의 양식이 응집되어 우세남(虞世南)·구양순(歐陽詢) 등 명가(名家)가 배출하여 중국 서도(書道)의 전형(典型)은 여기에서 확립되었다. 그 해서는 분간포백(分間布白)에 의한 반듯한 건축성(建築性)을 발휘하였고, 더욱이 풍성한 정신을 알맞게 담은, 참으로 전형이라 하기에 족한 양식이었다. 우세남(虞世南)은 <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 구양순(歐陽詢)은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 등이 대표작이다. 우(虞)·구(歐)보다 좀 뒤에 등장한 저수량은 만년에 서체가 가느다랗고 맑으며, 감정이 내키는 대로 붓을 놀려 절묘한 풍운(風韻)을 나타내고 있다. 이 경향은 측천무후(則天武后) 때까지 유행하였다. 빈틈없는 고식적인 전형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정신이 움직이고 있었다. 저수량의 글씨로서는 <안탑성교서(雁塔聖敎序)>가 유명하다.
성당(盛唐)에 접어들어서는 우(虞)·구(歐)·저와 더불어
당의 4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안진경(顔眞卿)이 등장하여 서법(書法)은 다시 새로워졌다. 이어 장욱(張旭)과 회소(懷素)가 출현하여 취(醉)한 김에 그 격정을 광초(狂草)에 쏟아 놓았다. 이것은 인간의 환희의 표현이며 전인간성의 표현이었다. 안진경의 글씨에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 <안근예기(顔勤禮記)> 등이 있다.
그러나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에 접어들면, 당인(唐人)이 뽐내던 해서(楷書)도 정법(定法)으로서 추상화(抽象化)되어, 유형(類型)으로서 침전(沈澱)하여 갔다. 그리도 번성하던 당조(唐朝)의 서도(書道)도 이런 과정을 밟아 붕괴되어 갔다. 만당의 작가로서는, 유공권(柳公權)·배휴(裴休) 등이 있다. 또한 5대(代)에는 양응식(楊凝式)의 존재가 전하여지고 있으나 글씨의 진상은 잘 알 수 없다.
당시대(唐時代)의 유품은 다수의 석각(石刻), 서역 출토의 사경(寫經), 소수의 전세(傳世)된 필적이 있다.
새로운 창작활동-송·원
편집북송의 4대가
편집北宋-四大家
북송 전기(北宋前期) (960∼1050년?)에는, 당말(唐末) 5대(代) 이래의 황폐가 점차로 정리되어 갔다. 왕희지(王羲之)의 서풍(書風)이 추모되었고, 고래(古來)의 명필(名筆)을 집성한 법첩(法帖)이 만들어져 반성의 동기가 되었다. 992년(淳化3), 칙명(勅命)에 의해 상각(上刻)된 <순화각법첩(淳化閣法帖)> 10권은 서법(書法)의 규범을 보여주어, 점차 새로운 바람이 일어나려고 하였다.
드디어 후기(1050∼1130년)에 이르러 송대(宋代)의 특색을 여지없이 발휘한, 새로운 본격적인 글씨가 탄생되었다. 채양(蔡襄)이 선구가 되고 이어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 등 소위 '북송 4대가(北宋四大家)'가 출현하였다. 채양(蔡襄)은 안진경(顔眞卿)의 법(法)을 배워 근직(謹直)한 글씨를 썼다. <천주 만안교기(泉州萬安橋記)> <사사어서시표권(謝賜御書詩表卷)>의 유작(遺作)이 있다. 소식(蘇軾)은 전혀 당조(唐朝)의 전형(典型)과 서법(書法)을 부정하여 강렬한 개성을 크게 표방하고 기백웅대(氣魄雄大)한 서풍을 이루었다. <한식시권(寒食詩卷)> <이백선시권(李白仙詩卷)>의 글씨 등이 있다. 황정견(黃庭堅)은 침착한 필세(筆勢)로 천태만상의 광초(狂草)를 전개하고 있다. <복파신사시권(伏波神詞詩卷)> <이백억구유시권(李白憶舊遊詩卷)>의 유작이 있다. 미불은 가장 고법(古法)을 중시하고 격조 높은 서경(書境)을 개척하였다. <행서삼첩(行書三帖)> <초서사첩(草書四帖)> 등의 유묵(遺墨)이 있다. 이 4대가(四大家)의 글씨는 각인각색의 서미(書美)를 전개하고 있으나, 그 글씨에 스며든 듯한 열띤 체취(體臭)는 서법(書法)을 초월하여 송인(宋人)다운 의기(意氣)를 보여주고 있다. 자아를 알고 의지의 힘을 알며, 정감(情感)의 강도(强度)를 안 그들의 글씨는 오로지 개성적인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경계로 하여 서(書)의 취향은 전혀 일변하는 것이다. 북송의 4대가의 친필은 다행히 전해진 것이 있어 그 진상을 알 수가 있다.
남송(南宋)의 초기(12세기 초)에서는 북송(北宋) 4대가의 웅혼(雄渾)한 서풍이 유행하였다. 능서(能書)로서 유명한 고종(高宗)의 글씨는 황산곡(黃山谷)에서 나왔다. 당시 강북(江北)에 나라를 창건한 금조(金朝)에도, 같은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미불의 서풍이 도입되어, 오거·왕정근(王庭筋) 등이 활약하였다. 이윽고 이 서풍(書風)은 무너지고, 전아(典雅)하고 정적(靜寂)한 아름다움을 찾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남송(南宋) 후반기에 등장한 장즉지(張卽之) 등이 이에 해당하였다. 장즉지는 미불의 서풍을 배웠다고 하면서, 골력(骨力)이 있고 윤기가 도는 특이한 풍격(風格)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선림(禪林)과의 관계가 깊었으며, <금강경(金剛經)> 등의 많은 유묵(遺墨)이 있다.
원(元)의 초기(13世紀末)가 되어서는, 조자앙(趙子昻)·선우추(鮮于樞)·등문원(鄧文原) 등이 출현하여 또다시 새로운 서풍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전아우미(典雅優美)한 글씨에 능하였던 조자앙은 선우추의 사후(死後) 일세(一世)를 풍미하였다. 그는 왕희지의 글씨의 정통(正統)을 배워 해행초(楷行草)에 능하였고, <난정십삼발(蘭亭十三跋)> 등의 수작(秀作)을 남기고 있다. 또한 가구사(柯九思)는 정연(正然)한 격조(格調)에 다소 격렬한 기상(氣象)을 내재시켰다.
후기에 들어서는 조자앙(趙子昻)의 정통정신에 반항하는 주관주의가 번성하였다. 그리고 격(激)한 금속적(金屬的)인 긴장을 보이는 서풍이 정통적인 글씨와 대립하였다. 장우(張雨)·강리기기·양유정(楊維楨) 등이 이 주의에 해당된다. 기기는 원래 서역의 호인(胡人)인데 원조(元朝)에 봉직하고, 글씨는 각체에 능하여 조자앙 이래의 제일인자라고 일컬어졌다. 장초(章草)를 섞어 쓰여진 <이태백시(李太白詩)> 등은 진귀한 유품이다.
송원의 묵적
편집宋元-墨跡
북송 후기(北松後期)에 4대가(四大家)가 등장하고 북송말(北宋末) 이후 선승(禪僧)들간에 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의 서풍(書風)이 인기를 모았다. 원래가 여기(余技)인 고로 자유분방한 것이 많고, 또한 서도사(書道史)의 정통을 계승하는 것도 아니어서 중국에 있어서는 아주 멸실(滅失)되어 버렸다. 묵적(墨跡)은 정통적 서법(書法)을 지켜서 쓰여진 것은 아니나 선(禪)에 의해 단련된 기백을 단적으로 나타내며 필자의 인간성이 보는 자로 하여금 강한 인상을 받게 하였다.
이 서풍은 북송(北宋)에서는 묘총대사도잠(妙總大師道潛)·환오극근(歡悟克勤), 남송(南宋)에서는 대혜종고·밀암함걸(密庵咸傑)·북간거간(北磵居簡)·무준사범(無準師範)·허당지우(虛堂智愚), 원시대(元時代)에는 무학조원(無學祖元)·중봉명본(中峰明本)·고림청무(古林淸茂)·요암청욕(了庵淸欲)·초석범기(礎石梵琦) 등의 묵적(墨跡)이 존중되고 있다.
명·청의 서
편집오중파와 낭만주의
편집吳中派-浪漫主義
명의 초기(14世紀初)에 접어들어서는, 글씨(書)의 경향은 자연히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즉 원말(元末) 이래의 금속적인 딱딱한 선(線)을 구사하는 일파(一派)와 격조파(格調派)를 추모하여 하나의 형(型)을 구하는 일파가 출현케 되었다. 그리고 이 두 흐름의 총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원조(元朝)의 질후(質厚)한 감각이나 강렬한 정신이 소멸되고 평명(平明)한 통일(統一)을 지향하고 있다. 이 무렵에는 송수(宋璲)·송극(宋克)을 위시하여 해진(解縉)·심탁(沈度)·심찬(沈粲) 등의 서예가가 등장하였다.
성화기(成化期:15세기 후반)에는, 쑤저우(蘇州)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오중파(吳中派)가 당시의 예술계를 리드하였으며, 심주(沈周)·오관(吳寬)·당인(唐寅)·축윤명(祝允明) 등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모두 시서화(詩書畵)에 능하였었다. 그리고 16세기에 들어서면 문징명(文徵明)이 가장 명조적(明朝的)인 새로운 풍격(風格)을 확립시켰다. 문징명은 시서화(詩書畵)는 물론이거니와 우선 인간적으로도 당시의 태두(泰斗)라고 추앙되었으며, 90세의 만년(晩年)까지 그 필력(筆力)을 발휘하였으므로, 그 후의 서화계(書畵界)는 거의 문파(文派) 일색(一色)으로 뒤덮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문문(文門)에 속해 있으면서도 왕총(王寵)·진도복(陳道復) 등은 문파(文派)에 빠지지 않는 별격(別格)을 출현시켰다. 이 알기 쉽고 분명한 격조를 자랑하는 명(明)의 글씨는 자칫 범속(凡俗)한 산문적(散文的)인 형(型)으로 전락해 갔다. 그리하여 후기에 들어서 막시룡(莫是龍)·미만종(米萬鍾)·동기창(董其昌) 등이 등장하여 이러한 풍조에 반항하고 문인주의적(文人主義的) 정신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동기창은 일체의 직업적인 작의를 배제하고 진솔함을 표현하는 가운데 시정신(詩精神)을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엄숙한 정신을 난삽한 붓끝으로 발휘하였다.
이 동기창이 이끈 문인(文人)의 정신은 다음에 오는 명말(明末)의 왕탁(王鐸)·황도주(黃道周)·예원로·장서도(張瑞圖)·진홍수(陳洪綬)·부산(傅山)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당시는 마침 만인(滿人)들의 발흥기(勃興期)에 해당하여, 여러 방면에서 상당히 심한 전변(轉變)을 시현(示顯)한 때였다. 그들은 동기창과 마찬가지 정신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동(董)의 주지적(主知的) 경향에 대항하여 정취(情趣)가 내키는 대로 격렬하게 일어나는 마음을 글씨에다 담고 있다. 행초(行草)의 연면(連綿)함과 장조폭(長條幅)을 사랑하고, 의기(意氣)와 정열(情熱)의 흐름에 따라 반드러운 견포(絹布) 위에 붓을 놀렸다. 글씨의 면모를 일신시킨 이 서풍은 청조 초기(淸朝初期)까지 유행하였다.
첩학파·비학파의 고전주의
편집帖學派·碑學派-古典主義청조 초기(17世紀末)에는 명말(明末)의 낭만주의시대를 계승하여 연면취미(連綿趣味)가 성행하였으나 동시에 동기창의 서풍도 재차 유행하였다. 그리고 진첩(晋帖)과 당비(唐碑)의 연구가 시작되어, 마침내 전혀 새롭고 풍성하며 커다란 구조성을 갖는 강희기(康熙期) 독특한 서풍이 생겨났다. 강희제는 학문예술(學問藝術)을 사랑하여 스스로도 강희예술(康熙藝術)에 기여하는 바 큰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사승(査昇)·진혁희(陳奕熙)·하작·왕주(王樹)·장조(張照) 등이 활약하였다.
중기(中期)에는 조정(朝廷)의 관료 문인간에서 조자앙(趙子昻)의 격조(格調)가 애호(愛好)를 받았다. 그러나 왕주(王樹)·장조(張照) 이래의 진당 법첩(晋唐法帖)의 연구는 점점 성행되며, 건륭(乾隆)∼가경(嘉慶)기에 걸쳐서 유용(劉墉)을 비롯하여 양동서(梁同書)·왕문치 등에 의해 교묘한 구조에 풍부한 정신을 담은 고전주의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첩학파(帖學派)'라고 이르고 있다.
한편, 건륭 초기(乾隆初期)의 금농(金農)과 정섭(鄭燮)은 야일(野逸)의 풍(風)을 즐겨하여 한비(漢碑)의 고비(古碑)를 따라서 괴기한 것을 썼다. 그래서 계복(桂馥)·등석여(鄧石如)·이병수(伊秉綬)·진홍수(陳鴻壽) 등이 배출되고, 진한(秦漢)의 고비(古碑)에 의해 전서(篆書)·예서(隸書)에 새로운 업적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비학파(碑學派)'라고 부른다. 옹방강(翁方綱)의 한당비학(漢唐碑學)의 이론은 이 시기의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첩학(帖學)·비학(碑學)의 구별은 있으나 이 시기의 고전주의의 특색은 한결같이 고법의 탐구와 새로운 전형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고법(古法)의 탐구, 고대정신을 중시하는 경향은 점차 강해진다.
북파창도
편집北派唱導
우선 가경(嘉慶) 말년에는 유학(儒學)의 대가인 완원(阮元)이 등장하여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발표하여 북파(北派)로의 복귀를 창도하였다. 이어 포세신(包世臣)도 북위비(北魏碑)의 존귀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론을 배경으로 하여 청대 후기는 새로운 낭만주의 시대를 맞았으며 청말(淸末)의 서단(書壇)은 매우 '금석(金石)의 기(氣)'를 애호하게끔 된다.
진한(秦漢)의 전예(篆隸)에 정열을 기울이는 자, 북위(北魏)의 조야(祖野)한 석각(石刻)에 고전미를 구하는 자(者) 등이 배출되었다. 오양지(吳讓之)·하소기(何紹其), 그것을 행초(行草)에까지 응용하려고 하는 자(者)·양기손(楊沂孫)·조지겸(趙之謙)·서삼경(徐三庚)·양현(楊峴) 등은 이 시기의 대표적 작가이다. 그 중에서 조지겸은 북파비학(北派碑學)의 이상을 실현하고 모필(毛筆)의 자연성을 무시하면서까지도 그 원시성(原始性)을 추구하여마지 않았다. 그의 글씨는 세칭 '북위서(北魏書)'로 불리고 있다. 신선한 감각과 지성을 엮어 넣은 근대예술로서의 글씨는 여기에서 개화(開花)를 본 것이다. 청조의 최말기(最末期)에는 고문자학(古文字學)의 연구가 왕성히 행해져, 그에 따라서 고문(古文)과 전서(篆書)에 특이한 작가가 등장하였다. 오대징(吳大徵)과 오준경(吳俊卿)이 그에 해당하는데 특히 오준경은 주(周)의 석고문(石鼓文)에서 얻어진 기법을 구사하여 종래에 없던 전서(篆書)·행서(行書)·초서(草書)를 썼다. 한가닥 퇴폐적인 정취가 당세(當世)의 취향과 투합된 것이었으며 청조(淸朝)의 서도(書道)는 이 오준경에 이르러 종말을 고하였다.중국의 글씨 역사는 전반은 서체(書體)의 변천을, 후반은 서풍(書風)의 변이(變移)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그간 한민족(漢民族) 특유의 미의식(美意識)에 의해서 항시 문자는 아름답게 형체가 만들어지고 또한 걸출한 천재들에 의해 무상(無上)의 법이 제시되었다.
중국인은 법(法)을 존중한다. 그러나 법은 일정불변의 것은 아니다. 때로는 변경되고 때로는 새로운 법으로 대치되기도 한다. 4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글씨는 앞으로도 새로운 서법(書法)을 찾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