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세계미술/동양미술의 흐름/일본의 미술/일본의 회화

다마무시노즈시와 그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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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畵본디 호류지의 금당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같은 장소의 호조덴(寶藏殿)에 안치되어 있다. 광좌 위에 선자형(宣字形)의 수미좌(須彌座)와 궁전형(宮殿形)의 불감(佛龕)을 얹은 목조칠도(木造漆塗)의 사리함이다.

아마도 불교가 전해진 당초 무렵부터 만들어지고 있던 것으로 생각되는 소금동불(小金銅佛)을 사리함에 넣어서 공양(供養)하는 신앙 형태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이 다마무시노즈시나 다치바나부인즈시이다. 즈시의 여기저기에 그린 당초무늬의 투조금구(透彫金具) 밑에 비단벌레 날개가 깔려 있었던 것이 그렇게 이름붙여졌다.

대좌(臺座)의 양측면에 그려진 본생담(本生譚)은 내용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대단히 흥미를 끈다. 하나는 사신사호(捨身飼虎)라고 하여 굶주린 호랑이에게 내 몸을 희생한다는 이야기이며, 또 하나인 시신문게(施身聞偈)는 불교의 고마운 말을 듣기 위하여 역시 몸을 나찰(羅刹)에게 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회화화한 것으로서, 한 그림 속에서 시간적인 경과를 표현한 구도는 매우 요령 있는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천수국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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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壽國繡帳

이것도 아스카시대의 공예품이지만 회화적으로 보아도 재미있다.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아름다운 자태를 엿볼 수 있는 수로서 밑그림을 그린 것은 한국 귀화인 계통의 화가라 한다.

호류지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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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隆寺-壁畵

금당벽화는 아스카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이었는데 1949년 화재를 만나 그 대부분을 소실하였다. 그러나 겨우 남겨진 비천도(飛天圖)나 원도(原圖)에 충실한 모사(模寫)에 의해 옛 면모를 엿볼 수는 있다. 벽화의 주제는 사면에 석가, 아미타, 미륵, 약사의 4여래의 정토도(淨土圖)를 그렸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고, 특히 서쪽의 <아미타정토도>는 걸작이라 일컬어지는데, 고구려에서 건너간 담징(曇徵)의 작품이라 전한다.

여래나 보살을 그린 탄력 있는 확고한 선은

'철선묘(鐵線描)'라는 중국의 수법으로서, 불신이나 의복에는 입체적인 인상을 주기 위하여 선염(渲染)이 되어 있다.

이 기법은 인도의 아잔타 석굴사(石窟寺) 벽화와 흡사하여 결국 한국 및 중국 전통을 주체로 인도나 아시아 여러 지역의 회화 기술을 합친 것이라 생각된다.

아스카·하쿠호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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飛鳥·白鳳-文樣

불교와 함께 새로운 무늬가 전해졌다. 연꽃을 위에서 본 연화문(連華紋)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아스카시대 이후 광배(光背)·보관(寶冠)·기와의 무늬 등에 쓰였다. 연꽃의 측면관(側面觀)을 문양화한 5판(瓣) 내지 7판의 팔메트(Palmette)문도 그것을 좌우로 분할한 반(半) 팔메트를 연속파상선(連續波狀線)의 곡간(谷間)에 배치하는 팔메트 당초(唐草)문으로서 불교미술에서 이따금 등장하였다. 또한 페르시아에 기원을 둔 연주문(連珠紋)은 작은 원을 포갠 무늬로 불상의 법의(法衣)나 광배 등을 장식하였다.

쇼토쿠 태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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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德太子像

호류지 관계의 회화작품 중에서 7세기에서 8세기 초엽의 것이라고 추정되는 쇼토쿠 태자상이 있다.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가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일본 국보의 하나이다. 양쪽 곁에 두 왕좌를 세운 구도는 불화나 불상조각의 삼존형식에서 따온 것으로서 중국 초상화를 본뜬 것이라 하겠다.

야쿠시지 길상천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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藥師寺吉祥天畵像

덴표시대의 불화인데, 당(唐)의 귀부인과 같은 그 용자(容姿)나 화려한 의복의 묘사는 채색화로서의 정수를 다하고 있다.

도리게타치온나 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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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毛立女屛風

길상천화상과 마찬가지로 뚱뚱한 그 얼굴모습은 그 무렵 미인의 전형이었고 나무 밑에 미인을 세운 그림도 서역(西域)이나 당에서는 매우 유행했었다. 처음에는 머리나 의복에 새털이 달려 있었는데 지금은 빠져 없어져 버려 밑그림만 보일 뿐이다.

만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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曼茶羅 밀교회화의 하나인데, 이 말은 본디 사물의 본질을 갖추고 있는 일, 다시 말하면 대오(大悟)의 경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미술사에서 만다라도(圖)란 완전 무결한 상징으로서 단상(壇上)에 다수의 불상을 그렸던 것을 족자로 만들어 당내(堂內)에 안치한 것을 가리킨다. 헤이안시대에 사이초(最澄)나 구카이(空海) 등이 당에서 밀교화를 가져왔는데 이로부터 만다라를 많이 그렸다. 현존 최고(最古)의 만다라는 진고지(神護寺)의 것으로서 820년경의 작이다.

후지와라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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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原佛畵

곤고부지(金剛峯寺)에 있는 <불열반도(佛涅槃圖, 1086)>가 후지와라 불화의 대표작이다. 석가가 구시나가라의 사라쌍수(沙羅雙樹) 밑에서 입멸(入滅)했을 때의 정경을 그리고 있다.

11세기 말의 작품에 <석가금관출현도(釋迦金棺出現圖)>가 있다. 석가가 신통력을 가지고 관(棺) 뚜껑을 열어 재생 설법했다는 극적인 광경을 마카마야경(摩訶摩耶經)에 의하여 그린 것이다. 12세기에 들어서서 기준작으로는 고오고고쿠지(敎王護國寺)의 <12천상(天像)>을 들 수 있다.

파랑·초록색·노랑 등 부드러운 색조로 채색하여 정치(精緻)한 절금(截金:가늘고 길게 자른 금은박을 무늬를 그리듯이 화면 위에 놓는 기법)무늬와 함께 헤이안시대 후기 불화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정토교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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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土敎繪畵

곤카이코묘지(金戒光明寺)에 전해 내려오는 <아미타삼존지옥극락도병풍(阿彌陀三尊地獄極樂圖屛風)>은 가마쿠라시대의 작품인데, 아미타여래의 손에서 오색(五色) 실이 늘어져 있는 것이 특색이다.

내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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來迎圖

이것은 헤이안시대 귀족계급 사이에서 유행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걸작은 고야산(高野山)에 전해지는 <성취내영도(聖聚來迎圖)>이다.

수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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垂迹畵

신(神)과 부처는 본디 일체로서, 민중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처가 일본의 신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에 의하여 그려진 것을 말한다. 그 발생시기는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 초기에 걸친 무렵이었다. 대표작으로 <가스가샤지(春日社寺)의 만다라>를 들 수 있다.

야마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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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和繪

나라시대 전후의 세속화(世俗畵)는 거의 전부가 중국식 사물을 그린 것이었는데, 9세기 중엽부터 비로소 일본의 산수나 풍속을 섬세하고 우미하게 그린 야마토에가 생성, 완성되었다. 야마토에의 특색은 주로 장병화(障倂畵)·두루마리·초상화 등에서 발휘되었다. 그리고 야마토에는 헤이안·가마쿠라시대에 발달을 보았고, 마침내 무로마치시대에 이르러 침체되었다. 그러나 그들 민족적인 조형감각에 의하여 육성된 야마토에의 전통은 그대로 절멸된 것은 아니고 모모야마·에도시대 그리고 근대까지도 계승되어 일본회화의 뿌리 깊은 힘을 발휘해 왔다.

장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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障屛畵

장병화란 병풍화나 장지화를 말하며 장지란 오늘날의 밝은 장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헤이안 시대의 후스마나 간막이를 가리킨다. 보도인(平等院)의 <호오도비라에(鳳凰堂扉繪)>, 고오고고쿠지(敎王護國寺)의 <산수병풍>, 도쿄국립박물관의 <쇼토쿠 태자 화전병풍(聖德太子畵屛風)>

등을 들 수 있겠다.

두루마리(에마키모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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繪卷物 두루마리라는 형식은 애당초 중국에서 전해졌고 일본적인 제재를 그린 일본적인 두루마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10세기에 들어서이다. 이것을 제재에 의하여 분류하면 종교적인 두루마리와 감상적인 두루마리로 나뉜다. 우선 종교적인 두루마리에는 <화엄 오십오소(華嚴五十五所) 두루마리>, <십이 인연(十二因緣) 두루마리>, <지옥조시(地獄草紙)>, <아귀조시(餓鬼草紙)>, <광명진언공덕화사(光明眞言功德畵詞)>, <화인과경(畵因果經)> 등이 있다. 전기류(傳記類)에는 <화엄종조사화전(華嚴宗祖師畵傳)>, <동정화전(東征畵傳)> 등이 있다. 감상적인 두루마리로는 <겐지모노가타리(源代物語) 두루마리>를 위시하여 <네자메모노가타리(寢覺物語) 두루마리>,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일기 두루마리>, <헤이지모노가타리(平治物語) 두루마리>, <장군총(將軍塚) 이야기 두루마리>, <삼십육가선(三十六歌仙) 두루마리>, <조수희화(鳥獸戱畵)> 등이 있다.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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肖像畵

가마쿠라시대에 들어서자 미술계 전반에 걸쳐서 사실주의적인 경향이 짙어졌으므로 여기에 초상화의 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진고지(眞護寺)에 전하는 <미나모토요리토모(源賴朝)>, <다이라노시게모리(平重盛)>, <후지와라노미쓰요시(藤原光能)>의 3화상이 특히 유명하다. 이 밖에 <고토바 천황상(後鳥羽天皇像)>은 초상화 중의 사화(似畵)인데 사화란 숭배, 예배 따위의 대상으로 하기 위하여 이상화된 의용적(儀容的)인 상이 아니라, 대상에 닮게 하는 것을 주안으로 한 사생적인, 기록적인 요소가 짙은 초상화를 말한다. 이 <고토바 천황상>은 섬세한 선을 몇 가닥이나 포개 그어서 인물의 얼굴을 정돈하고 있으며 이 묘법에는 사생화로서의 박진력이 보인다.

야마토에의 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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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和繪-畵風

야마토에의 주제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화풍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이것을 크게 나누면 채색화(彩色畵)와 백묘화(白描畵)로 된다.

<호오도비라에(鳳凰堂扉繪)>나 <겐지모노카타리 두루마리> 등의 풍경은 짙은 색채로 그려져 있고 선묘(線描)도 있으나, 그것은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어서 전체적으로는 색채효과가 현저하고 정취적인 인상이 강하다.

이와는 전혀 대조적인 양식으로서 <지옥조시(地獄草紙)>를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오로지 운필(運筆)에 주력을 쏟아 선의 속도나 변화에 의하여 움직임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동적이고 극적이어서 서사적이고 설명적이다.

백묘(白描)란 것은 먹 일색의 묘선을 주로 하여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데, 그러나 여기에 조금 담채(淡彩)를 가한 것도 포함시켜 그렇게 부르고 있다. <조수희화(鳥獸戱畵)>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유창한 속도와 변화를 겸비한 경쾌하고 자유자재한 묘선으로써 동물이 재미있게 뛰노는 양상을 아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수묵화·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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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墨畵·山水畵

가마쿠라 말기에서 무로마치시대에 걸쳐서 송원화(宋元畵)는 대단한 기세로서 흘러 들어갔다. 그 영향으로 일본에도 수묵(水墨)으로 그린 수묵화가 유행되었다. 수묵화란 먹 일색의 선·면·농담(濃淡)으로 입체감이나 색채감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서, 중국 당시대의 수운묵장(水暈墨章)이란 말에 기인한다. 먹으로 오채(五彩)를 표현한다는 사상인데 당나라의 오도자(吳道子), 왕유(王維), 왕묵(王墨) 등이 주로 산수·인물에 이 기법형식을 쓴 다음부터 확립되었다. 따라서 수묵화의 역사는 그대로 산수화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의 무로마치시대 회화사의 주류는 송원화를 규범으로 하는 한화가(漢畵家)들의 수묵산수화에 의해서 점유되었다고 하여도 무방하다. 슈분(周文), 소탄(宗湛), 가노마사노부(狩野正信) 등은 본령을 수묵산수화에 두고 그 중에서도 남송원체화(南宋院體畵)에서 배웠으나, 아미파(阿彌派)처럼 목계화(牧谿畵)나 옥간화(玉澗畵)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고 일본 수묵산수화의 대성자인 셋슈(雪舟)는 송원뿐만 아니라 명화(明畵)에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아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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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彌派

노아미(能阿彌)·게이아미(藝阿彌)·소아미(相阿彌)의 3대를 말한다. 무로마치시대에 약 1천년간 계속된 회화·다유(茶湯)·렌가(連歌) 따위의 예도(藝道) 일반을 널리 전문으로 하는 일파이다. 협의로는 전기 세 사람의 수묵화의 화풍을 말한다.

셋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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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舟

일본 수묵화의 완성자로서 화법을 슈분에게서 배웠다. <추동산수도(秋冬山水圖)>, <산수장권(山水長卷)> 등의 걸작을 남기고 있다. 슈분 문화에서 나왔으면서도 슈분화(周文畵)의 섬약함에서 탈피하여 중국화가의 수묵화에 떨어지지 않는 격렬함이 있고 독특한 필의(筆意)에 넘쳐 있다. 그는 또한 장식적인 화조화도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운고쿠파(雲谷派)뿐만 아니라 카노파·하세가와파(長谷川派) 등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가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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狩野派

수묵화의 장식적인 용도로서의 이용에 있어서 충분히 수묵화의 특성을 보지하면서, 그 위에 장식효과도 가해서 새로운 장식으로서의 회화를 만들어 낸 것은 가노파였다. 수묵화라는 그림으로서는 가장 단순한 화면밖에 갖지 않는 그림과 일견 모순된 장식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좀 기이하게 느껴지지만 가노파의 시조로 알려진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1434∼1530)의 아들인 모토노부(元信, 1476∼1559)는 수묵화의 묘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충분한 장식효과를 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서 먹은 화면의 장식성을 받치는 액센트로서 작용하고 있고, 선은 리듬이 되어 있다. 이 사실이 수묵화의 본질과 어떠한 관계에 있다고 해야 옳을지 모르지만 수묵화라는 중국 중세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회화의 일본으로의 회귀(回歸)이고 또한 근세로의 발돋움인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작품으로는 가노 쇼에이(松榮)의 <화조도(花鳥圖)>, <주코인(聚光院)의 후스마에>, 가노 에이토쿠(永德)의 <당사자도병풍(唐獅子圖屛風)>, <회도병풍(檜圖屛風)>이 있고, 가노 미쓰노부(光信)의 <화조도 후스마에>, 가노 타카노부(孝信)의 <시신덴(紫宸殿)의 현성(贅聖) 장지>, 가노 산라쿠(山樂)의 <다이가쿠지(大覺寺)의 후스마에> 등이 있다.

하세가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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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谷川派

도하쿠(等伯)를 중심으로 하는 유파인데 도하쿠는 가노파의 관학성(官學性)에 대하여 재야적인 존재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의 화풍은 다양하고 힘찬 묘선이 생성하는 상쾌한 화취(畵趣)는 호기에 넘치고, 멈출 줄 모르는 풍부한 천품은 모모야마화단의 거장이 되기에 꼭 알맞다. <송림도병풍(松林圖屛風)>, <고목원후도> 등이 대표작이다. 아들 규조(久藏)가 그린 <앵도(櫻圖)>도 유명하다.

가이호 유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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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北友松

가이호파의 창시자인 유쇼(1533∼1615)는 가노 모토노부(元信)에게서 배우고 남송의 양해(梁楷)에 사숙하여 이른바 감필체(減筆體)를 자기 것으로 하고, '후쿠로진부츠(袋人物)'라는 독특한 인물화를 창조하였다. 그의 그림에는 무인적(武人的)인 예리한 기백과 힘이 넘쳐 있고 모모야마적인 웅대한 기운이 느껴져서 강렬한 개성으로 채색되어 있다. 작품으로는 겐닌지(建仁寺)의 후스마에가 유명하다.

낙중락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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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中洛外圖

<낙중락외도>는 이미 무로마치 후기에 볼 수 있고 가노 에이토쿠가 그린 우에스기카(上杉家)의 것은 수가 적은 그의 유품으로서 귀중하다. 낙중락외란 교토 시중과 교외를 말하고 이것들을 한 눈 아래 병풍 한쌍에 나눠 그린 것을 낙중락외도라 한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풍속화적인 주제가 그려진다.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 교토의 생생한 현실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시대의식이나 풍조가 여실히 표현되어, 확실히 풍속화의 근간(根幹)이기도 한 중요한 장르이다. 설립 당초부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모모야마시대에 들어서자 더욱 현저하게 된다.

낙중락외도는 모모야마시대의 현실주의가 가장 현저하게 표시된 것으로서 사료적인 가치도 크다. 주요한 작품으로서는 미쓰이카(三井家)의 <취락제도(聚樂第圖)>, 야마오카카(山罔家)의 <낙중락외도> 등이 유명하다.

인물·미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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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美人畵

풍속화에서의 전체적인 것에서 부분적인 것으로, 객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 것에로의 진전은 마침내 화면에서 인물 그 자체를 추출(抽出)하고 그 자태나 용모·복장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표현하게 되었다. <히코네 병풍(彦根屛風)>, <마쓰우라 병풍(松浦屛風)> <유녀도(湯女圖)> 등이 있다.

17세기가 되자 청신한 아름다움이 점차 소멸되고 도리어 퇴영적으로 난숙(煖熟)해 버린 미녀의 모습이 즐겨 그려졌다. 이리하여 근세의 풍속화는 쇠퇴되어 가고 마침내 새로이 등장하는 우키요에(浮世繪)가 이에 대체되었다.

양풍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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洋風美術

1543년 포르투갈인의 도일(渡日)을 계기로 일본에도 유럽 문화의 물결이 밀어닥쳐 그때까지는 볼 수 없었던 이색적인 회화나 공예품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기독교 미술을 중심으로, 또한 그것에 부수되어 들여온 외국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하여 일본인 스스로의 손으로 의해 만들어진 양풍 미술을 말한다.

회화면에서는 기독교 회화를 중심으로 한 양풍 회화가 성하게 만들어졌다. 그 하나는 기독교에 직접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불화(佛畵)와 한가지로 신앙의 대상이 된 것, 둘째는 그리스도교 문화에 부수되어 들어온 것으로서, 종교에 직접 관계 없이 유럽의 풍속을 그린 것, 셋째는 좀 성격이 다른 것으로서 유럽 문화의 이입에 수반된 외국인의 내항 풍경을 그린 것 등이다.

도사·스미요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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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佐·住吉派

후지와라시대부터 야마토에의 유파로 알려진 도사파는 무로마치시대가 되자 가노파에 눌려서 존재가 희미했다. 그러나 17세기에 도사미쓰오키(土佐光起)가 조정(朝廷)화가로서 활약하고 그 부흥에 힘쓴 사실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품으로는 <이쓰크시마 마쓰시마 도병풍(嚴島松島圖屛風)> 등이 있고 독창성이 결여된 표면적인 사실에 빠지기 쉬운 신양식을 취하였으므로 그 화풍은 점차로 피상적인 사실주의의 형식적인 묵수(墨守)로 되어갔다.

소타쓰·고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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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達·光琳派

도사·스미요시(住吉)의 양파가 떨치지 않았을 때 야마토에의 진수를 획득하고 그것을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포착하여 충실된 장식화로서 표현한 그룹의 선도자가 다와라야(俵屋) 소타쓰이다. 그의 화업(畵業)은 일본미술사에 있어서 한층 더 빛나는 빛을 발하는데 작품창조에 있어서 그를 에워싼 많은 문화인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더욱이 예술에 있어서는 만능 천재로 알려진 혼아미 코에쓰(本阿彌光悅)와의 교류에 의하여 소타쓰 회화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그의 그림은 고전에서 힌트를 얻으면서 몰골법(沒骨法) 등의 기법 등을 채용하고 화려한 색채를 교묘하게 처리하여 지극히 조화된 장식화적인 아름다움을 발휘하고 있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 <무악도병풍(無樂圖屛風)> 등 걸작이 있다.

소타쓰의 후계자로서는 오가타 코린(尾形光琳)이 활약을 하였다. 그는 소타쓰의 장식성을 이해함과 동시에 복식의장(服飾意匠)의 본질을 살리고 또한 수묵화의 요소를 받아들여서, 소타쓰와는 취향이 다른 세련된 장식화를 완성했다.

그의 작품에는 예리한 자연을 잘 분간할 수 있는 힘이 충분히 표현되어 있는 것이 많은데 <연자화도병풍(燕子花圖屛風)>이 첫손으로 꼽힌다.

문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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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人畵

문인화와 남화(南畵)는 본디 별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문인화란 것은 일반 문화인이 그리는 그림을 말하는데, 기교에 사로잡히지 않고 정신면을 강조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조정화가(朝廷畵家)가 만든 딱딱한 화법의 북종화(北宗畵)에 대하여 부드러운 남종화라는 양식이 있었는데 그것과 문인화가 14세기, 15세기경부터 하나의 양식으로 종합되어 발전해왔다. 대표적인 화가로서 기온 난카이(祇園南海), 핫토리 난카쿠(服部南郭) 등을 들 수 있다.

마루야마시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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圓山四條派

문인화가 한창인 시대에 한편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주의를 특히 주장한 일파가 있었다. 마루야마오쿄(應擧)는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중국이나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안경화(眼鏡畵)에 흥미를 가져 원근법이나 음영법(陰影法)의 기술을 획득하고 회화에서의 사생의 필요를 통감하였다. 그러나 장식적인 표현을 전혀 무시했던 것은 아니고 사생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 적당히 장식성을 집어 넣은 신양식이었다. <호즈가와도병풍(保津川圖屛風)>은 그의 화법의 특색을 충분히 발휘한 중요한 작품이다.

마루야마파와 나란히 사생주의 회화에 손댄 것이 교토시조(京都四條)에 살았던 마쓰무라 고슌(松村吳春)을 중심으로 한 시조파였다. 그 화가로서 마쓰무라 케이분(松村景文) 등을 들 수 있다.

우키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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浮世繪

에도시대에 지방을 중심으로 발달한 서민풍속화를 말한다. 목판화(木版畵)를 주된 표현 형식으로 해서 채용한 유일한 화파(畵派)로서, 유곽이나 극장으로 대표되는 도시의 환락경(歡樂境)을 기반으로 독특한 미의 세계가 추구되었다.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宜)에 의하여 먹 일색의 목판화 <묵쇄화(墨刷畵)>가 발표되었으며 이후에 단(丹)을 붓으로 채색하는 <단화(丹畵>, 단 대신 선홍색을 주색으로 하고 다시 수색(數色)을 채필(彩筆)하는 <홍화(紅畵)>, 먹 부분에도 광택을 곁들인 <칠화(漆畵)>로 진전되어 마침내 선홍색이나 초록색 등 수색을 목판쇄(木版刷)에 의하여 부채(賦彩)하는 <홍쇄화(紅刷畵)>가 생겼다.

1765년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에 의하여 다색쇄각쇄기법(多色刷刻刷技法)이 완성되고, 화려한 니시키에(錦繪)시대가 되자 목판에 의한 명쾌한 색면 배치와 각도가 생성시키는 토운의 묘선에 의하여 도리이 기요나가(鳥居淸長)·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磨) 따위 명수가에도 서민의 미의식을 대변하여 시시각각의 세상(世相)을 반영하는 주옥과 같은 명작을 계속 발표하였다. 미인화·야쿠샤에(役者繪)를 대표적인 주제로 하고 나중에는 풍경화나 화조화 등도 유행하였다.

도리이키 요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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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居淸長

하루노부에 의하여 몽환(夢幻)의 세계로 멀어진 우키요에 미인을 또다시 현실의 틔인 공간으로 불러들이고 사실적인 묘사에 의한 미인군상에서 건전한 자태미를 추구하였다. 대표작으로 <풍속(風俗) 아즈마노니시키(東之錦)>를 들 수 있다.

기타가와 우타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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喜多川歌磨 (1753∼1806)

기요나가의 군상 표현에서 바뀌어 대상에 근접하는 '오쿠비에(大首繪)'라는 형식을 창안, 여성의 이상미를 싫증날 줄 모를 만큼 추구하였다. '운모쇄(雲母刷)'나 노랑바탕의 백(Back) 속에 유연한 여성의 피부표면을 아름답게 떠오르게 하였고, 때로는 주선(朱線)을 쓰거나 또는 윤곽선을 버려 쓰지 않는 등 진지한 연구의 흔적이 인정된다. 대표작에 <가찬연지부(歌撰戀之部)>·<부인상학십체(婦人相學十體)> 등 시리즈가 있다.

아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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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田派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잠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양풍화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 아키타의 사타케 쇼잔(佐竹曙山, 1748∼1785)은 그의 가신(家臣) 오다노 나오타케(小田野直武)와 더불어 양풍화 작품을 그렸다. 아키타파(蘭畵)는 예를 든다면 쇼잔의 <소나무에 당조도(唐鳥圖)>는 한양(漢洋) 절충적인 표현형식을 취하는데 자연과학적인 진지한 관찰태도가 좀 기이할 정도로 보일 만큼 표현의 위화감(違和感)을 구조(救助)하고 있다.

나오타케의 대표작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에서 조금 강조된 원근법과 돌연 전면에 그려진 근경(近景) 정물의 대비는 18세기 네덜란드풍(風)의 영향이겠고 그림물감은 투명한 일본화의 안료(顔料)를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