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생물II·식물·관찰/생명과 물질/세포의 발견/세포의 발견까지
현대의 우리는 모든 생물체가 세포로 아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세포에는 닭의 알처럼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에서 현미경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양한 크기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현미경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세포의 발견도 없었을 것이며, 근대 생물학의 발전도 상당히 오래 걸렸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작은 것을 확대해서 보려는 생각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의학서에는 인간의 근시나 원시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한다. 15세기 무렵까지 몇몇 사람들에 의해 안경이나 사물을 확대하는 장치가 만들어졌는데, 현재의 광학 현미경의 기초는 1590년경 네덜란드의 안경 직인 얀센 부자에 의해 고안되었다. 얀센 부자는 사물을 확대하는 데 렌즈 하나를 사용하는 것보다 두 개의 볼록 렌즈를 조합시킨 복합 렌즈가 훨씬 유효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최초로 복합 현미경을 발명했다. 당시(1610년)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아연관에 렌즈를 끼워 현미경을 만들었다.
세포를 최초로 관찰한 사람은 영국의 로버트 훅이다. 그는 얇은 코르크 조각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수없이 많은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셀(세포)이라고 하였다. 그가 관찰한 것은 실제로는 세포 전체가 아니라 코르크의 세포벽뿐이었다. 그의 '세포의 발견'은 마이크로그래피라는 유명한 책이 되어 1665년 런던의 왕립협회에서 출판되었다. 또한 훅은 수학·물리학·공학 등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영국의 글루도 훅이 인정한 세포를 많은 식물에서 관찰하고, 세포가 식물체의 기본적인 구조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1682년 <식물 해부학>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 속에는 식물의 정밀한 세포와 조직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가 관찰한 세포도 세포벽뿐이었다. 그는 세포를 소포(小胞)라고 불렀다.
이 무렵 네덜란드의 렌즈 연마 직인이었던 레우엔후크는 당시로서는 정교한 현미경을 직접 만들어 미생물·정자(精子)·혈구 등이 살아 있는 유리(遊離) 세포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나 그의 관찰도 세포의 내용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말피기는 동물 해부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올림과 동시에 여러 가지 식물 세포나 조직을 관찰하여 그 해부도를 남겼다. 그는 식물 세포를 소낭(小囊)이라고 불렀다. 말피기의 발견에 의한 동물 조직, 예를 들면 말피기 소체, 말피기관, 말피기층 등의 명칭은 오늘날에도 많이 쓰이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사람들의 연구는 모두 세포벽 또는 세포 윤곽을 관찰한 것으로, 세포의 내용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 초가 되자 많은 세포학자들이 세포내의 점액성 물질을 발견하고, 동시에 세포가 동식물의 조직을 구성하는 단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 생각은 도토로시에에 의해 명확히 밝혀졌다.
이 같은 배경하에 독일의 슈라이덴은 여러 가지 식물 세포를 관찰하여 식물체는 모두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1838년). 또 슈완은 동물 조직을 널리 관찰하여 동물의 몸도 세포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혀냈다(1839년). 이들 학자들에 의해 '모든 생물체는 세포로 이루어진다'라는 세포설이 확립되었다. 슈완은 세포의 형태에 주목함과 동시에 그 동적 변화에도 유의하여 오늘날 쓰이는 대사(물질 교대)라는 용어는 그가 처음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세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1. 모든 생물은 세포 또는 세포의 생산물로 만들어져 있다.2. 세포에는 생명이 있으며, 일정한 수명이 있다.3. 세포의 생명은 생물 개체 전체의 생명의 기본이다.
이 세포설을 확립시킨 슈완은 유명한 밀러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세포설에 관한 견해는 밀러에 의해 이미 제기되었다고 한다. 당시 세포설의 내용은 모두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류도 많았다. 예를 들어 슈완은 새로운 세포는 어미 세포의 핵에서 생성된다고 하여 핵을 세포 형성체라고 불렀다.
당시 이미 로버트 브라운은 핵을 발견하고(1831년), 이듬해에는 드모르틸이 녹조류의 세포 분열을 기록하였다(1832년). 또 몰은 유사 분열 과정을 상세히 관찰하였고(1835-1839년), 레마크는 무사 분열을 인정하였다(1840년). 그러나 슈완의 세포설이 너무도 획기적이었기 때문에 세포 형성체설 같은 오류는 오랫동안 정정되지 않았다.
슈완의 오류는 세포는 세포 분열에 의해 생성된다는 확실한 증거가 제출됨에 따라 점차 수정되어갔다. 그 중에서도 비르초우는 "세포는 세포에서 생성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세포 증식의 기본 개념을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현미경이 발명된 결과로 나온 세포설은 처음에 식물 세포 발견에서 점차 동물 세포나 단세포 관찰로 발전하여 완성되었다. 이 설은 세포 자체의 연구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생물의 모든 연구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세포설의 확립은 근대 생물학 발전의 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세포의 연구는 살아 있는 세포의 내용물에 노력을 기울여 잇달아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