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현대사회의 대중과 사상/현대대중사회/대중사회

대중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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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社會

현대는 대중사회의 시대라 불리고 있다. 대중사회라는 것은, 나라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19세기 말경부터 20세기에 걸쳐 자본주의가 산업자본의 단계를 경과하고 독점자본의 단계로 이행하게 됨에 따라서 생산력의 급격할 발달이나 독점과 집중과정(集中過程)의 진행을 가장 중요시하는 고도의 산업사회(大量消費社會)가 성립되고, 이에 따라서 사회구조의 여러 국면과 인간의 생활과 행동의 모든 분야에 이제까지 예상도 못한 변화가 넓고 깊게 생겨났으며,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사회구조가 점점 크게 되고 복잡하게 되며 합리적으로 된 반면, 인간의 주체성이 점차로 상실되고 소외되며 무력화하고 정동화되어, 사회구조와 인간의 존재에 여러 가지 모순이 눈에 띄는 현대사회 특유의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사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상황을 가져오게 한 요인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먼저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대중사회적 상황을 가져온 조건과 과정을 추구하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대중사회의 구조적 특질과 그것이 내포하는 문제성이 저절로 이해되는 것이다.

고도산업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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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度産業社會

대중사회의 도래(到來)를 촉진한 것은 산업의 고도화(高度化)였다. 대중사회란 실은 고도산업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도산업사회의 시대는 대량소비 이외에도 한편으로는 기계시대,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과 관리의 시대'로서 특징지을 수가 있다.

기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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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械時代

현대의 첨단을 걷는 오토메이션(automation)을 위시하여 테크놀러지의 진보와 발달에는 주목할 것이 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안다는 것은 대중사회로서의 현대를 이해하는 첫번째 열쇠이다. 현대를 특징짓는 기계주의(機械主義)의 우월은 생산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영역에서 눈에 띈다. 그것이 가장 철저하게 나타나는 것이 생산의 영역이고 여기에서부터 다른 영역에 기계주의의 영향이 파급되고 있다.생산기술의 기계화가 진전됨으로써 생산 공정(生産工程)은 연속화·자동화하여 기술에 의한 소외를 불러일으킨다.대량생산 방식의 도입은 상품의 표준화 및 규격화를 통하여 생활양식의 평준화(平準化)와 획일화(劃一化)를 가져온다. 또한 생산공정의 기계화에 알맞은 집단이나 조직의 기구화(機構化)·관료제화(官僚制化, 機械化)는 조직에 의한 소외를 심각하게 만들고, 마침내 통신기술의 발전에 의한 전달수단의 대량화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제공하는 준환경(準環境) 속에 사람들을 방치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을 통틀어서 기계시대라는 이름 밑에 일관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뿐만 아니라 기계의 의미는 생산의 영역에만 좁게 한정되지 않고 넓게 위에서 말한 여러 영역을 포함하게 되지만 우선 생산 또는 노동의 영역에서부터 살펴가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테크놀러지의 진보(기계화로부터 자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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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chnology-進步(機械化-自動化)

근대의 시민사회는 산업혁명을 토대로 성립되었으나 현대 대중사회는 과학기술 혁명에 기인한다고 알려져 있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생산의 기계화가 진행되어 종래의 수공업 생산이나 가내공업(家內工業)은 일소되고, 기계제 공업(機械制工業)이 소비제 생산부문으로부터 생산제 생산부문으로, 나아가서는 교통운수부문(交通運輸部門)까지 점차 파급되고 기계에 의한 분업(分業)이 일반화했다. 생산의 기계화와 그에 따른 기술적 분업의 진전은 생산공정을 세분화하고, 작업의 내용과 속도를 일정하게 하고, 비합리적이고 부정확한 인간의 능력을 기계가 대신함으로써 생산능률을 높이고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극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 벨트 컨베이어(belt conv­eyor)에 의한 일관 작업방식(assembly line system)이다. 이런 종류의 정밀하고 확실한 기계장치의 개발이 기계화(mechan­ization)인 것이다.기계화의 진행에 따라서 노동은 단순화되고 경감되었으나 이 단계에서는 아직도 기계를 조작·조종하는 것은 인간이었고, 또 세분화된 작업에는 다수의 미숙련노동자(未熟練勞動者)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기계화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해서 과학과 기술이 급격히 진보되고, 특히 일렉트로닉스(電子工業)가 발달하여 전자계산기(電子計算機)가 도입된 결과 인간에 의한 기계의 조작·조종이나 단순노동이 인공두뇌(人工頭腦)를 중핵(中核)으로 하는 기계체제에 의해 전면적으로 배제되고, 생산공정이 자동화되는 것도 먼 장래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것이 '오토메이션'이다. 그 전형적인 것은 석유화학·발전(發電)·제철 등의 대규모적인 장치공업(裝置工業)에 있어서의 프로세스 오토메이션이지만, 부분적으로는 자동차공업에서의 메커니컬 오토메이션이나 사무부문(事務部門)의 비즈니스

오토메이션의 진보도 괄목할 만한 것이다.

기술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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技術-人間

현재 생산공정이 완전히 자동화되기에는 아직 멀었지만 기술진보의 결과 노동에 종사하는 수많은 인간이 전세기(前世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기계장치나 기술체계의 지배 아래 놓여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기술 또는 기계와 인간과의 관계가 전세기 이상으로 문제화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기술혁신으로 말미암아 노동의 질이 변하고 노동력의 구성이 변화하여, 낡은 형태의 수공업적 숙련 대신에 고도의 기술적 지식이, 힘든 근육노동 대신에 감시노동(監視勞動)이, 학력이 낮은 중고연령층(中高年齡層) 대신에 학력이 높은 젊은 층이 진출하여 생산공정 전체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독창성, 그리고 일에 대한 흥미가 조장되는 면도 없지 않다.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 묘사된 바와 같은 일관작업방식 속에서의 단조롭고 비인간적인, 톱니바퀴로서의 노동은 종말을 고하고 인간이 다시금 기계의 주인이 된다고 하는 낙관론도 있다. 그러나 기계화와 자동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현단계에서는 오히려 한편에서는 고도의 기술을 익힌 소수와, 다른 한편에서는 단순한 반복작업에 종사하는 기능이 낮은 다수의 단능공(單能工) 사이에 양극분해(兩極分解)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기계나 설비에의 인간의 예속, 작업의 단순화나 표준화에 의한 개성(個性)의 몰각(沒却), 정신적 긴장도라든가 고독감이나 톱니바퀴 의식 같은 것이 증대하는 경향이 아직도 강하게 존재한다.

노동과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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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疏外

고도의 기계화·분업화·합리화·자동화를 특색으로 하는 거대한 기술적 장치에 있어서의 노동과정은 인간의 의지나 감정으로부터 독립된 객관적 과정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의 노동은 살아 있는 개성의 표현일 수는 없고, 주체적 창의·연구가 발동하는 여지는 극도로 한정되어 노동에 대한 인격적이고 내면적인 관계는 좀처럼 성립하기 어렵다.인간으로서의 노동자는 생산공정의 비인간화에 의하여 주체적 인격을 잃고, 노동으로부터 생(生)에 대한 충족감을 찾아내기에 애쓰고 있다. 노동은 복잡한 분업체계 속에서 분할되어 원자화(原子化)된 단조한 부분작업이고, 노동자 사이에는 인간적인 접촉이나 인간적인 관계가 성립하기 힘들다. 다만 원자적·기계적인 병존관계가 있을 따름이고, 인접한 노동자로부터 심리적·사회적인 거리는 오히려 증대한다. 이리하여 노동증대에 있어서의 소외와 고립은 물적(物的)·기술적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기술적 합리성은 이것을 가져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그런데 이 기술적 합리성은 이윤추구(利潤追求)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이 목적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는 상품노동력으로 간주되어 질(質)보다도 양(量)에 환원되고 만다. 또 노동은 그 대가(代價)인 임금을 위하여 수단적으로 행하는 고통이며, 인간이 갖는 정서적·감정적 요소를 억압하도록 타율적으로 강제되는 부분노동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퍼서낼러티(人格)의 분열을 가져오지 않고서는 수행되지 않는다. 여기에 인간이 거대한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그 톱니바퀴가 되고 부분품으로 변하여 그에 종속한다는 사태(原子化)가 생기게 된다. 또한 합리화가 진전되면 진전될수록 욕구불만이 안으로 뻗어 정서화(情緖化) 경향이 강하게 된다는 이율배반의 상태가 첨예화된다. 대중사회적 상황의 기본적인 특질은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노동관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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勞動觀-變遷

기술진보의 결과 인간의 행복을 실현하고 확충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기계가 도리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으로부터 창조성과 자발성, 그리고 본래의 인간다운 맛을 빼앗아 버리게 되자 노동에 대한 관념도 크게 바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까지의 수공업자나 직인(職人)은 도구의 주인이고, 자기가 완성하는 작업 가운데서 삶의 기쁨과 일에 대한 취미를 발견했으며, 자본주의가 발흥하는 시기의 금욕적 프로테스탄트(中産的生産者層)는 신(神)의 영광을 위하여 현세적 향락(現世的享樂)을 억제하면서 노동에 열중했었다. 그러나 현대의 노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빵을 얻기 위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필요악(必要惡)이며 고통이라고 말하게 되었다.노동은 약간의 수입과 지위와 권리를 위한 수단이며 현세적 향락을 위한 수단이다. 현세적 향락은 노동에서는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 이외의 곳에서 인생의 목적을 찾으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한 노동관은 칼뱅주의의 직업윤리(職業倫理)와는 아주 대립되는 것으로서 노동의 윤리는 여가(餘暇)의 윤리로 옮겨지고 있다. 이 경우의 여가는 어디까지나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노동이야말로 여가를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일 중심에서 여가 중심으로 이행되고 있다. 그리하여 노동에 있어서의 주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은 여가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려고 애쓴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의 생활이 노동과 여가로 양분(兩分)되고 노동보다도 여가에서 삶의 뜻을 찾는 데에 현대 특유의 생활양식이 전개되는 근본원인이 있다. 대중사회적 상황 중 하나의 중요한 측면인 여가의 윤리의 전반화(全般化)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이유와 조건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노동의 존재방식에 따라서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조직과 관리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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組織-管理-時代

기계화·분업화·합리화가 진전되어 기술적 장치가 거대해짐에 따라 인적(人的)·제도적 조직도 거대화하고, 능률적으로 운영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비로소 물적요소(物的要素)와 인적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되고 완전연소(完全燃燒)되는 것이다. 현대에는 어떠한 조직이나 집단도 조직 전체의 능률적 운영에 의한 최대한의 효과를 두려는 데서 점점 더 대규모화하고 기계적·비인격적인 기구로 변화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정에서 나타난 각종 대규모 조직의 내부나 나아가서는 모든 생활면에 걸쳐(전 기구적으로) 기계 같은 합리성과 비인격성이 군림하여 인간은 기계의 톱니바퀴와 같이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은 조직목적을 실현할 뿐 아니라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거대한 메커니즘에 편입·배치되며, 거기에서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제약을 받아 가면서 제각기 나누어진 지위를 차지하고 그에 따라서 특수한 역할을 수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자기의 넋을 휴대품 보관소에 맡겨 두고 자기 자신을 분단하고 부분화(部分化)하며 원자화하면서 사무적으로 움직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조직화와 기계화가 추진되면 될수록 거대한 메커니즘에의 인간의 종속, 그리고 그곳에서의 인간의 강제적 획일화 및 이 메커니즘에 대한 인간의 무력화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이것이 현대의 특수한 문제상황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료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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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僚制化

인간의 강제적 획일화, 인간의 무력화라는 상황은 조직의 차원에서는 관료제화에 의해서 초래되는 것이다. '관료제'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이고 합리적인 규칙의 체계에 의해서 직무상(職務上)의 권한이나 의무를 뚜렷하게 정한 히에라르키(hierarchie, 직위나 각급기관의 상하 계층적 질서를 구성하는 명령과 복종의 단계조직) 상(牀)의 통합적·형식적인 조직을 말하는 것으로서 능률의 논리라든가 형식합리성(型式合理性)이 조직의 구석구석에까지 일관되고 있다. 거기에서의 직무 수행은 몰주관적(沒主觀的)이고 비인격적인 규칙의 체계에 얽매이고 권한의 원칙에 의거해서 그 범위내에서 행해진다. 그러므로 직무수행에 따르는 명령과 복종은 일반적으로 구속력을 갖는 규칙의 준수라는 형태를 취하며 규칙에 의한 지배는 원칙적으로 일체의 비합리적인 개인사정을 배제하고 공평하게 행해지며, 직무행위의 비인격화·형식합리화를 최고도로 실현하게 된다. 이 직무행위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능을 가진 전문인(專門人)에 의하여 전체적인 인간성을 무시하고 수행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과의 직접적인 접촉보다도 오히려 문서라고 하는 추상적·객관적인 수단을 통해서 인간관계를 간접화하면서 정확하고 확실하게 수행되며 마침내는 관리수단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공사(公私)의 혼동을 배제하고 실시되므로 비인격화는 한층 더 촉진된다.특히 관료제 구조의 중핵(中核)을 이루는 직무의 히에라르키를 통해 조직의 정점에서 결정된 정책은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인 명령으로서 하달되고, 각 단계에 위치하는 구성원은 직무상의 규율과 통제에 의해서 엄격히 종속(從屬)되며, 이 명령을 받아들여서 전체의 에너지를 조직목적의 실현을 위해 계획적이면서도 신속하고 강력하게 동원할 수 있게 된다.그것은 관료제적 조직의 기술적 탁월성(卓越性)이기도 하지만 이 기술적 탁월성이 인간성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와 인격의 독립을 부정하게 됨에 따라서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조직에 의한 인간의 소외가 그것이다.

관리기술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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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理技術-展開

거대한 기구에 있어서의 인간은 개인적인 질(質)로서가 아니라 서로 교환 가능한 양(量)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호환성(互換性)과 개인적인 질에 대한 의존으로부터의 자유를 원칙으로 하는 메커니즘에 의해서 인간은 점점 더 물상화(物象化)되고 소외되어 무력한 존재로 변하고, 이와는 반대로 조직 운영상의 계산가능성과 예측가능성 및 조직능률의 증진은 점점 더 현저하게 된다. 그것을 촉진하기 위한 관리체계의 정비와 관리기술의 합리화는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을 위시하여 포드의 컨베이어 시스템 및 직계제(職階制)를 중심으로 하는 인사관리 등에 의하여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헛되이 조직의 저변(底邊)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자율적 결정을 박탈하고, 그것을 정점으로 집중하거나 기계의 체계화를 통하여 관리를 자동화하며, 인간의 자주성을 극도로 제한하기도 하고 직위의 체계라는 비인격적인 기구에 인간을 종속시킨다는 규율과 능률위주의 합리화에 치우쳐, 이것이 오히려 밑바닥층의 광범한 사람들 사이에 욕구불만과 불안을 일으켜 자발적인 인간협력을 전반적으로 저하시킴으로써 결근·이동·태업·파업 등을 가져와, 조직의 능률적인 운영에 지장을 주는 결과가 되었다.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소위 말하는 인간관계 관리(人間關係管理)이다. 이 새로운 관리기술은 인간의 비합리적인 감정이나 행동, 그것을 제약하는 비형식적인 인간관계에 착안하고 이 인간관계의 개선을 통하여 비합리적·정동적(情動的) 요소를 조작한뒤 그것을 합리적 기구속에 맞추어 넣어가는 아주 교묘한 심리적 착취 기술이다. 이러한 조작기술에 의해서 비합리적 요소를 포함하는 전체로서의 인간의 장악을 꾀하는 관리의 전체화가 이루어지는 곳에 조직과 인간과의 모순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동조와 일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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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調-逸脫

조직과 인간과의 모순이란 말할 것도 없이 조직화와 원자화, 합리화와 비합리화가 동시에 공존(共存)한다는 모순이다. 조직이라는 것은 본래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고 복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조직의 거대화(관료제화)는 근대 이후의 사회를 통하여 보편적 합리화 과정의 일환으로서 그 기술적 탁월성에 의하여 사회생활의 철저한 합리화와 능률화를 이루고 그 위에 인간의 자유와 인격의 독립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직화·기구화·관료제화가 극단적으로 수행되어 인간행동이 지나치게 합리화되고 제도화되게 되자 이 거대한 합리적 기구의 내부에서 오히려 인간의 비합리성이 항진(亢進)되고 침전되며 또 인간이 자유를 상실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생겨나게 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관료제 기구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몰인간화(沒人間化) 경향에 저항하는 전체로서의 인간이며, 전체성이나 자발성 그리고 주체성에의 욕구와 소망(所望)을 갖고 있으나 조직목적은 이것을 예측 불가능한 우연적 교란 요인(攪亂要因)으로 보고 억누르기 때문에 이러한 욕구와 소망은 조직 속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게 되고 욕구불만이 쌓여 인간의 욕구와 조직의 목적 사이에 끊임없는 긴장관계가 생긴다. 그 결과 실제의 인간행동은 조직이 정한 행동 규범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려고 하며 일탈행동(逸脫行動)을 필연화시키게 마련이다.빈번한 이동·결근·태업(怠業) 등이 그것이며, 그렇게 심하지는 않더라도 조직에 대한 충성과 애착은 저하하고 공격·퇴행(退行)·도피의 경향이 강하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직의 틀에 얽매여 기구의 톱니바퀴로 변화하며 상하의 의사소통(意思疏通)이나 조직에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는 가운데 위로부터의 명령이나 규칙에 복종하고 승진이나 승급 또는 벌칙이나 제도적 조치를 통해서 (적어도 표면상, 또는 대개는 낮은 수준으로) 기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동조하게 된다. 즉 팀워크(team-work)를 중요시하고 이른바 '명랑한 로봇'이 대량으로 생산되는 셈이다. 여기에 현대의 불가피한 숙명적인 관료제의 병폐가 있다고도 생각된다.

대중민주제(매스 데모크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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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民主制(mass democracy)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말을 글자 뜻 그대로 풀이한다면 인민의 지배이며, 일체의 권력은 인민 전체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원리에 입각한 정치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치권력의 주체는 원래 인민에게 있고, 그 합의(合意)에 의해서 비로소 정치권력의 행사는 정당화된다.데모크라시가 여론에 의한 정치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정치의 주체인 인민도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양과 질의 양면에서 크게 변화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병행해서 정치적 지배와 권력행사의 방법도 변동해 왔다. 물론 데모크라시가 어떤 형태를 취하거나 원칙이야 어떻든 간에 실질적으로는 일종의 귀족주의적(貴族主義的) 경향을 피할 수는 없다. 아테네의 민회(民會)에 모인 인민은 노예를 제외한 비교적 소수의 시민들이었으며, 이 시민들은 일부의 선동정치가(煽動政治家, dem­agog)들에게 조종되고 있었다. 또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낡은 제도를 타도한 시민혁명 이후의 고전적(古典的) 데모크라시를 이룬 것은 전체 인민이 아니라 일부의 신흥 시민계급(新興市民階級)이었으며, 그것도 전시민의 직접적인 정치참여가 아니라 일정액 이상의 납세능력이 있는 사람들(公衆)이 여론이라는 형태로 자기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정치에 반영시켜서 정치를 움직이는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매스 데모크라시(mass democracy)의 단계가 되면 시민계급 이외의 광범한 대중이 정치에 참가하게 되지만, 대중과 정치와의 관계는 고전적 데모크라시의 경우와 같이 공중(公衆)이 정치의 궁극적인 주체라고 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있다. 광범한 대중은 더욱더 거대화하는 정치 권력에 지배되는 수동적인 객체로 전화되고 만다. 문제는 정치가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는 한편, 그와 반대로 대중이 정치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있는 데에 있다. 매스 데모크라시는 그러한 현대에 있어서의 데모크라시의 변질과 왜곡(歪曲)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대중의 정치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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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政治參加

신흥 계급에 의한 민주주의적 의회 개혁운동은 영국에서 곡물조례(穀物條例)를 둘러싸고 한층 더 높아져서 1832년의 선거법 개정안의 성립과 더불어 고전적 데모크라시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정치형태는 교양(敎養)과 재산이 있는 일부 특권층(시민계급을 주체로 하는)이라는 동질기반에서 성립되는 것으로 소위 공중(公衆)의 공동체에 대응하고 있었다. 광범한 노동자층은 거기에서 배제되어 교육도 받지 못하고 교양도 없는 채로 그날그날을 살아나가기에 급급한, 완전히 체제외적(體制外的)인 존재였다. 그러한 공중의 공동체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동질기반에 서게 됨으로써 그들 사이에 본질적인 이해대립도 없고, 간혹 있었다고 하더라도 합리적인 토론과 이성적(理性的)·자주적인 판단에 따른 여론형성을 통해서 합의에 도달하여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태는 그 뒤의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뿌리째 사라져가게 되었다. 노자 2대계급(勞資二大階級)에의 사회 분열과 계급 대립의 격화, 차티스트 운동(1835-1848)을 시발로 하는 노동자의 정치적·경제적인 요구의 증대, 교육의 보급, 매스 케뮤니케이션의 점차적인 발달 등은 고전적 데모크라시의 기반인 공중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1867년에는 소시민층(小市民層)과 도시노동자층에게 선거권이 인정되고, 금세기(今世紀)에 들어와서부터는 참정권이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종래에는 체제외적인 존재이었던 광범한 대중이 정치에 참가하여 기본적인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또한 이와 더불어 이질적인 배경을 갖는 사람들의 비합리적인 요소가 정치 속에 섞여 들게 되었다.

대중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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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國家

동질기반에서 성립되는 고전적 데모크라시의 단계에서는, 국가는 야경국가(夜警國家)로서 시민의 편안한 잠을 지켜 주고, 시민생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자유방임정책(自由放任政策)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질적인 이해의 대립이나 모순을 포함하는 대규모의 사회에서는 이들 이해를 조정하고 모순을 해결하며 복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국가기능을 대폭적으로 증대하기 마련이었다. 또한 여론과 정치를 연결하는 정당(政黨)의 조직이나 정치를 실시해 나가는 국가나 관료의 기구도 그에 따라 규모와 복잡성을 증대해 가고 있다. 더욱이 국가기능의 확충과 국가권력의 강대화에 의해서 근대국가의 이념인 민의(民意)에 근거하는 정치는 점점 더 민의로부터 멀어지고, 또 합리적인 토론의 마당인 의회는 단순한 말씨름과 갈채의 마당으로 화하여 데모크라시는 공동화(空洞化)해 가는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다.매스 데모크라시의 단계에서는 거대한 정치기구의 정점에 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이 권력기구를 통해서 또는 매스 미디어(mass media, 大衆媒體)의 작용을 통해서 밑으로부터의 여론에 기초한다기보다는 위로부터 여론을 형성해서 대중을 이끌고 나가려는 위험성이 있다. 이것이 대중국가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중민주제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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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民主制-矛盾

위로부터 여론을 형성하여 대중을 마음먹은 대로 이끌어가는 대중국가의 현실은 매스 데모크라시의 자기모순(自己矛盾)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매스 데모크라시화(化)와 관료제로 보면 관료제화는 신분적 지배(身體的支配)라든가 명망가 지배(名望家支配)를 타파하고 사회적 차별을 평준화하는 작용을 통해서 매스 데모크라시의 성립을 가능케 했던 것이지만, 이 민주화 과정을 지나서 정치 무대에 등장한 대량의 조직되지 않은 대중은 관료제 지배를 통해서 정치나 행정에의 적극적인 참가를 실질적으로 배재당하고, 단순한 정치의 객체인 피지배자(被支配者)로 전화(轉化)되는 결과가 되어 매스 데모크라시 그 자체가 알맹이 없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이러한 이유로 매스 데모크라시에 있어서는 정치의 주체인 대중은 전체로서 조직되어 있지 않고 정확한 정보에 접할 기회도 없어, 거대한 관료제 기구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하기 때문에 정치에서 소외되고, 조작대상(操作對象)의 형태로 체제의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기계화와 기구화를 주축으로 하는 산업화 과정이 광범한 인구량을 생산수단에서 떼어내고, 노동으로부터 소외시켜 기구의 톱니바퀴로 변화시킨 것과 흡사하다.

엘리트에 의한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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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te-支配

매스 데모크라시화와 병행하는 정치기구의 관료제에 의한, 광범한 미조직대중(未組職大衆)의 정치권력이나 행정수단으로부터 분리, 정치로부터의 소외라는 길은 그대로 정치 권력이나 행정수단을 장악하는 소수인들, 즉 엘리트의 지배력 강대화의 길이었다. 전능(全能)한 엘리트와 무력한 대중이라는 이미지는 약간 과장되고 지나친 감이 있기는 하지만 매스 데모크라시 하의 지배층과 피지배층과의 힘의 관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민주주의 형식은 갖추었어도 현대의 대규모한 대중국가에서는 정치나 행정을 맡는 임무와 권한, 그 운영상의 기술과 특권이 소수의 엘리트에 집중되고 독점되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대중국가의 지도·운영에는 풍부한 지식과 경험에 의한 특수한 기술이 필요하고 이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특권적 지위를 갖게 되고 그러한 기술도 없고 여유도 능력도 없는 일반대중은 사실상 엘리트에 의존하여 이끌려가게 되며 또 그것을 감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엘리트의 지위는 고정화되고 직업화되어 그들의 특수한 의도나 이해가 공공의 복지라는 이름으로 일반대중에게 교묘하게 강요되게 되는 데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조직된 소수자에 의한 권력적 지위와 정책 결정권과 조작기술의 독점, 그리고 이것에 근거한 지배는 대중 국가에서는 더욱더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과두제(寡頭制)의 철칙'이라고 부른다.

심벌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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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bol 操作

심벌(상징), 예컨대 '평화'·'자유'·'민주주의'·'보다 잘 살기 위한 정치' 등을 통해서 사회를 통제하는 양식을 말한다. 매스 데모크라시에 있어서의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정치지도는 권력적 지위의 독점에 의한 지배행사(支配行使)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일반대중의 내면적 시인(是認), 또는 복종의 자발성을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것은 권력에 의한 강제가 노골적으로 행해지면 반드시 저항이 생기고 때에 따라서 지배의 기초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엘리트는 강제를 합의로 바꾸기 위해서, 얼핏 보아서는 강제성이 없이 동조를 원리로 하는 교묘한 조작기술에 의해서 대중을 길들여 나가려고 한다. 그것은 주로 심벌 조작(매스 미디어를 통한)에 의해서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하고 대중이 갖는 정서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 호소하여 자기의 의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방법을 취한다. 이 때문에 강대한 정치권력이나 거대한 관료제 기구에 의해서 소외되고 무력화한 대중은 이 권력과 기구에 말려들기 쉽고, 수동적이고 정동적인 대중으로 전화해서 체제내에 편입되어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정치적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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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治的無關心

정치적 상황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나 태도 및 행동이 둔화(鈍化)되어 정치권력에 대하여 적극적인 충성(또는 同調)도 표시하지 않으면서 반항(또는 逸脫)도 하지 않는 태도나 행동을 말한다. 정치적 무관심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어서 직업·계층·연령·학력 등에 따라서 한결같지 않다. 또한 오늘날의 대중이 모두 한결같이 정치적 무관심에 빠지고 만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도피하거나 정치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갖거나 정치의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고전적 데모크라시가 정치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자발적인 참가에 의하여 유지되었다면, 매스 데모크라시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불참가에 그 특색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에 대한 무력감, 행동에 대한 자극결여, 현상에 대한 몰입(沒入), 미래에 대한 터무니 없는 기대가 엘리트의 조작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현대의 대중사회에 있어서의 정치적 무관심의 전형은 래디컬(과격)하거나 리버럴(자유주의적)하지도 않고, 보수적이거나 반동적이지도 않은, 즉 비행동적인 신중간층(新中間層:화이트 칼라)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이 계층은 정치에 관한 지식은 갖고 있으나 매스 미디어에 조작당하여 정치를 가십화(gossip化)하고 때로는 경멸하는 결과 현상에 대한 불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참여의 의지를 잃고 비정치적 영역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現代型無關心). 또한 구중간층(舊中間層:農·工·商業, 自營業主層)에서는 자기 주변의 생활문제나 구체적 이익에 관계되는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보다 크고 멀리 떨어진 정치문제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日常型無關心).특히 나이 많은 연령층이나 저소득층은 특징적인 정치에의 무지(無知)와 묵종(默從)과 권위에의 동조(傳統型無關心)에 흐르는 경향도 있다. 한편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관심과 이웃하고 있는 일이 많아서 어떤 계기로 인하여 폭발적인 운동으로 번질 가능성을 갖고 있으므로 엘리트는 갖가지 수단을 피워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체제에의 동조행동(同調行動)으로 끌어 넣으려고 노력한다. 여하튼 정점에서 권력의 집중과 지배력의 확대와 심화를 꾀하려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저변에서는 무력하고 흩어진 정동적이고 수동적인 대중의 침전(沈澱)은 정치의 영역에 있어서의 대중사회적 상황과 그 문제성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 해체와 재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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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解體-再編成

근대사회는 공동체의 해체 위에 성립했다고 흔히 말한다. 이 공동체의 해체를 가져온 것은 주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상품의 교환이 발전한 데서 기인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해체와 병행해서 여러 가지의 기능집단과 자발적 결사(結社)를 분출시켜 사회의 내부를 이질화(異質化)시키는 동시에 동질화(同質化)시키고 사회권(社會權)을 확대시킴으로써 거대사회(巨大社會)를 성립시켰다. 그 이후 산업이 급격하게 고도화되고 기계나 기술의 체계, 조직과 관리의 기구가 한층 더 매머드화 되고, 정치권력이 중앙집권화됨에 따라 압도적인 인구가 고향을 떠나 생존수단에서 이탈하여 경제·정치·문화의 중심인 거대도시에 집중하였다. 거대도시에의 인구집중은 현대에 있어서 더욱 그 정도가 심한 것이다.인구집중 현상은 실은 자본과 권력의 장악력의 확대와 심화를 그 근거로 하고 있다. 바꿔 말해 거대도시를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하는 지역의 재편성, 또는 그 계열화(系列化)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면에서 본다면 거대도시에의 인구집중과 거기에 나타나는 거대도시의 영향범위의 확대(광역화)는 비도시 지역에 아직 남아 있는 예로부터의 전통적·공동체적인 사회관계나 가치체계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인위적 사회환경을 형성하는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기계문명이 번창하는 거대도시에서는 끊임없는 변동이 일어나 사회관계와 가치체계, 그리고 생활양식이 눈부시게 변화한다. 고향을 떠난, 고향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공통된 가치나 규범, 목적이나 이상도 없이 다만 모래와 같이 누적하며, 거대도시라고 하는 모래언덕을 이루고 그 속에 휘말려 들어가고 만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이 혹시 있다면 그것은 획일적인 도시문명이며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침투뿐이다.

도시적 생활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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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市的生活樣式

거대도시(巨大都市)는 끊임없는 해체와 재편성의 과정에 있는 사회로서 많은 수의 익명(匿名)의 사람들이 혼잡을 이루어 확실한 윤곽을 잡기가 어려운 사회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외면적이고 비인격적인 사회관계는 대중사회 상황의 일면을 이루고 있다. 그보다도 거대한 도시사회야말로 대중사회 그 자체, 또는 그 모델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또한 그 대표적인 주민인 화이트 칼라 층의 생활양식이나 생활태도 가운데에 대중사회를 특징짓는 중요한 특성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화이트 칼라를 전형으로 하는 도시적인 생활양식은 기본적으로는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와 고용관계에의 의존이라는 사정에 의하여 제약되고 있다(이점에서 블루 칼라와 조금도 틀리는 것이 없고 다만 그 일하는 장소 ―― 사무소와 현장, 그리고 직무의 내용 ―― 관리기능과 집행기능이 다를 뿐이다). 이들 도시노동자는 자영업주(自營業主)와 같이 자기의 직장을 소유하지 않기 때문에 직장과 사는 곳과는 아무래도 별개의 곳이 된다. 그래서 직장(직업생활)에서는 수입과 바꾸기 위하여 노동력을 팔고, 사는 곳(소비생활)에서는 이 수입과 바꿔서 소비물자를 구입한다. 생산과 소비라고 하는 중요한 생활영역은 수입을 통해서 연결되며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생활영역을 통해서 노동력→화폐, 화폐→소비물자라는 교환관계가 성립된다. 여기에 도시 근로자 특유의 생활구조와 생활관계, 생활양식과 생활태도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화폐 경제의 중심인 거대도시의 주요한 사회관계가 교환에 기초하는 이상, 이 교환에 참여하는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사회관계는 서로가 다른 사람을 자기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보며, 이해타산에 의해서 이용하는 소위 게젤샤프트(Gesellschaft, 이익사회)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교환관계를 매개로 하는 화폐는 사회관계를 냉혹무정하게 하고 수량적·객관적·추상적·비인격적인 것으로 바꾸어 나가는 역할을 한다.

사회관계로부터의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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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關係-疏外

사회관계의 비인격화(impersonalization)는 사람들을 사회관계 속에서 고립시키고 소외한다. 거대도시에 지배적인 사회관계는 예컨대 대면적(對面的)인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라는 형태를 취하는 경우일지라도 마음이 통하지 않는 물건과 물건과의 관계로 기울어져 간다. 여기에서는 금전관계가 모든 인간관계보다 우선한다. 사람들을 결합하는 공통적인 관심은 교환이라는 것에 수축(收縮)되고 말며, 적극적인 의미를 갖지 않게 되기가 쉽다. 또 생활요구나 생활관심은 복잡해지고 확산하기 때문에 공통된 방향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생산하는 장소에 못박히고 강제적으로 획일화당하고 있던 사람들은 생산 이외의 곳에서는 얽매였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나하나의 흩어진 개인으로 분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생산 이외의 곳에서도 사회관계에서 소외되어 인격적이고 정서적인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데서 욕구불만을 해소시키지 못한 채로 비합리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 그것은 고립감과 고독감을 합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좋은 예가 직장과 가정의 중간에 성립하는 거리의 군중이다. 군중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제멋대로의 방향으로 이합집산(離合集散)한다. "군중 속에서 있을 때만큼 서글픈 때는 없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이것은 서로 결합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현대의 거대도시와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는 마치 경기(景氣)의 바람에 날려서 쌓이는 모래언덕과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모래알과 비슷하다. 현대의 거대도시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문화나 규범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는 의미에서는 자유스럽지만, 서로서로의 사이를 결합하는 강력한 심리적 유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는 고립적이며,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접촉이 어렵고, 외면적인 기준에 의해서 행동하고 평가된다는 점에서 익명적이고 비인격적인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집합체이며, 이런 의미에서 대중사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역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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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域-解體

거주지역(居住地域)이 주민의 단순한 잠자리에 지나지 않고 이미 주민의 생활이나 행동에 통제력을 미칠 수 없는 상태를 지역의 해체(community disorg­anization)라고 한다. 지역의 해체는 사회관계의 비인격화와 표리(表裏)가 되어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지역으로부터 소외되어 나가는 것을 나타내는 현상이다.거대도시에는 방대한 자본과 인구가 집중하여 정치·경제·문화상의 기능을 배타적으로 수행해 나감으로써 그 세력권은 넓어지기만 하여 그 주변지역은 물론 원격지(遠隔地)까지를 끌어넣어 해체하고 재편성해 나간다. 즉, 지역의 확대과정이 지역의 해체과정과 함께 동시에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거대도시지역 내부만을 보더라도 해체와 재편성이 부단히 계속된다. 예를 들면 주변의 교외지역은 이미 지역으로서의 자율적 기능이나 통합도 없어지고 있다. 그 하나의 요인은 도시근로자의 사는 곳과 직장의 분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의 주요한 생활활동이나 생활관심(생산과 소비에 걸친)은 그 거주지역의 외부에서 행해지거나 충족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의 양면에서 거주지역에 대한 의존도는 낮아지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있는 관계에 있어서 지역이나 이웃에서 연대적(連帶的)인 생활관련을 맺는 일도 거의 없다. 게다가 원칙적으로는 직업상 토지자체에 구속되지 않고 정착성이 없으므로 지역이동이 빈번히 일어나기가 쉬운 것이다. 이리하여 거대도시에 있어서의 거주지역은 고용근로자의 주요한 생활관심을 충족시키는 기능을 거의 모두 잃고, 그 내부에서 포괄적인 사회관계가 성립하기 어렵게 해체를 계속하고 있다.

아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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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my

사회의 해체에 의해서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적 기준이 약해지든가 없어지든가 하여 무규제(無規制) 상태가 생기고, 그것 때문에 인간 자체도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욕구불만이나 불안에 빠져서 퍼서낼러티의 분열을 일으키거나, 여러 가지 반사회적(反社會的) 또는 비사회적인 행동을 저지르게 되는 사태를 말한다. 대중사회로서의 거대도시의 내외에 있어서 일어나는 사회해체는 또한 아노미의 문제이기도 하다. 거대도시에서 범죄나 비행, 매춘이나 부랑(浮浪), 신경증(神經症)이나 자살, 유기(遺棄)나 이혼 같은 것들이 눈에 띄게 많은 것은 거대도시가 계속해서 해체하고 변동하여 여러 가지 가치기준의 대립을 가져오게 되고 안정된 질서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거대도시에 있어서의 사회관계로부터의 소외와 지역으로부터의 소외, 나아가서는 거기에 반항하는 지역적 저속문화의 자극 등은 가족·이웃·학교·직장 등에 있어서의 규율이나 상호감시의 약체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의 소비적인 자유의 향수(享受)와 함께 인간의 생활이나 마음의 의지할 곳을 빼앗고 불안과 실의(失意), 고독감과 고립감, 무력감과 자기상실, 붕괴감각, 방향과 목표의 상실감 등을 높이며 부적응행동(不適應行動)과 퇴행현상(退行現象)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만사가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현대문명의 선단(先端)을 가는 거대도시에서는 사회나 집단이나 문화의 차원에서도, 인간의 행동과 의식의 차원에서도 아노미를 가져오는 힘이 잠재해 있고 인간을 매스화(mass化)하고 비합리화하며 정동화하는 유력한 환경조건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다.

가치기준의 외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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價値基準-外面化

인간이 인간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사람들의 가치기준이 내면적인 것으로부터 외면적인 것으로,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으로, 질적인 것으로부터 양적인 것으로 옮아가는 경향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교환관계에 기준을 두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는 유일한 수단은 화폐이며, 만사가 돈이면 해결된다는 점에서 금전숭배(金錢崇拜)와 물질적 성공을 위한 노력이 인간행동의 가장 유력한 동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내면보다는 외면을 꾸미고 물질적 성공을 상징하는 일체의 부(富)를 과시하려고 한다. 이것은 물신숭배(物神崇拜)이며 미국적인 유물주의(唯物主義)이고 물질에 의한 사람의 소외이다. 또한 거대도시에 있어서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인간관계가 지배적이므로 외부로부터 눈에 띄는 형식(形式:外見)을 중요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한층 더 조장된다. '유행(流行)'이 그 좋은 예이다.

대중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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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操作

대중조작(mass manipulation)이란 보통으로는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권력을 가진 엘리트가 합의에 의한 동조(복종의 자발성)를 얻기 위하여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주된 통로로 하는 심벌(상징)을 교묘하게 구사하여 원자화·정서화되어 주체성을 잃은 대중에 대해 물리적 강제력을 드러나게 행사하지 않고, 선전과 설득 또는 유도(誘導)로써 대중이 무의식 중에 일정한 정치목표에 동조, 복종하도록 하여 체제 안에 편입시키기 위한 숨은 권력행사를 말한다.그러나 대중조작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면서 부단히 행해지고 있으므로 보다더 넓은 의미로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간단히 말하면 현대의 인간은 거대한 기술·기계·조직·기구의 조종을 받으며, 돈과 물질에 의해 움직여지는 경향이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강제적으로 획일화되고 동조를 강요당하는 것이며, 후자의 경우에는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의 평가라든가 익명의 권위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보다는 조종을 받는 로봇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경향을 더욱 조장하는 것이 매스 커뮤니케이션과 그에 의한 대중조작이다.

준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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準環境

현대처럼 복잡하고 대규모화된 사회에서는 다양하게 분화하고 이질화하여 서로 연관이 없는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 광대한 세계에 관한 이미지를 주는 것이 없어서는 안된다.그런 의미에서 신문·잡지·라디오·텔레비전·영화 등의 기계적인 기술수단을 사용, 활자·전파·영상(映像) 등을 통해서 불특정다수(不特定多數)의 대중에 대해서 되도록 빨리 대량으로 정보·지식·의견·오락 등을 전달하는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현대사회가 성립되기 위한 기초적인 조건의 하나이다. 결국 그것의 사회적 기능은 극히 미약하다는 직접경험의 영역과 극히 크다고 하는 간접경험의 영역과의 단절을 이어 줌으로써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신변에 가까운 세계의 외부에 널리 퍼져 있는 사회환경(또는 보다 정확하게는 그에 대한 이미지)에 합리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생활이나 행동은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간접적인 수단으로 얻어진 환경에 관한 이미지에 대한 반응인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대인이 살고 일하고 있는 환경은 현실의 환경이 아니라 그에 관한 관념 또는 이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사람은 말하자면 카피(Copy)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아서 이것을 '준환경'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으로 재편성된 준환경은 반드시 현실의 환경을 충실하게 축소한 것이 아니라 특수한 방법으로 왜곡(歪曲)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합리적이어야 할 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이 교묘한 작용으로 비합리화될 위험성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여기에 큰 문제가 있다.

흥미본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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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味本位化

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이 교묘하게 조작당하여 비합리화될 위험성은 보내는 측과 받는 측의 성격에 따른 내용의 왜곡(歪曲)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현대의 매스컴 기업은 영리기업(營利企業)이고 영업성적이 매상(구독량·시청률)에 좌우되는 이상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에게 팔기 위해서 대중의 취미·기호에 영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상업주의화(商業主義化)나 센세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해지고 흥미본위화에 의한 내용의 수준 저하는 피치 못할 일이 된다. 한편 받아들이는 측인 대중도 노동이나 생산의 장소에서 소외되어 도시적 환경에서 비인격화한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뜻이 있어도 심신이 모두 지친 상태에서는 직장 밖의 여가나 소비의 장소에서 쾌적원리(快適原理)를 택하여 한때의 기분풀이를 추구하게 된다. 대중문화에 있어서의 그레셤의 법칙(Gresham's law: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은 생산적·이성적(理性的)·합리적 인간을 소비적·정동적·비합리적 인간으로 전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쉽다. 이러한 경향에서 고상한 내용이나 창조력을 자극하는 계기를 기대할 수는 없고 오히려 감각적인 인상본위(印象本位)의 사고방식에 빠질 위험성이 큰 것이다. 이는 사실상 정신생활의 상실이며, 의식과 인식능력의 소외이다.

현실도피의 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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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實逃避-助長

대중이 정동적인 심벌조작에 의해서 비합리적인 존재로 변하고, 현실을 올바로 보고 비판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이 무디게 되면 오히려 현실로부터 의식 중이거나 무의식 중이거나 도피하는 경향이 결과적으로 조장될 가능성이 커진다. 보내지는 내용이 상업주의적인 색채를 점차로 강하게 풍기면 풍길수록 사람들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현실적인 제문제에의 관심을 희박하게 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게 된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사회적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것에 착안하는 정치권력이나 독점자본은 그것을 이용해서 대중을 심리적으로 조작하고, 여가·오락·유행에 대한 관심을 높이려는 것과는 반대로 정치에의 관심이나 비판력을 약화시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현실도피에의 경향은 널리 번져가게 된다. 따라서 정치나 경제에 관해서 관심과 지식을 가진 경우일지라도 현실문제에 부딪치려는 의욕이나 운동을 일으키기보다는 오히려 '능동적 참가로부터 수동적 지식으로'라는 말과 같이 표면적인 관심만을 자극하고 실제로는 마비되고 마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영향을 '마취적 역작용(逆作用)'이라고 말하는 수도 있다.

숨은 설득과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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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說得-動員

미디어(媒體) 시장에 방치된 대중은 자본이나 권력을 꾀하는 비인격적인 영향력에 직면하여 자기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모르는 채로 누군지도 모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조종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는 수도 있다. 대중은 자율성을 잃고 매스 미디어(mass media)를 통한 숨은 설득과 조작에 의해서 암시작용(暗示作用)에 걸리고 무기력하고 피동적인 동원대상으로서 강제가 없는 동조(同調)라는 물결 속에 빠져들게 된다. 현행질서나 사회규범에 대한 비판적인 눈은 반복해서 보내오는 선전이나 광고의 내용이나 정치적인 슬로건의 정서적 호소 앞에 흐려져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기정사실로 생각하며 현상을 긍정하고 승인하는 태도가 저절로 자라나게 된다. 교묘한 대중조작을 통해 자본이나 권력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동원되어 현체제에 끼여들기도 하고 화려한 상품을 사기도 하여 현상에 매몰되는 경향이 조장되는 반면, 비판적인 움직임이나 혁신적인 행동양식의 싹은 잘리거나 짓밟히어 현체제는 유지되어 나가게 된다.조직의 사슬을 벗어난 흩어진 대중은 껍질 없는 게와 같이 무력해져서 자본이나 권력의 교묘한 조작에 몸을 맡기고 만다. 사회가 평온무사할 때에는 대중은 태평 무드에 취해서 체제수익감(體制受益感)이 늘어가고, 또 사회가 위기에 직면한 때에 지배층은 국내의 여러 가지 모순을 감추고 반체제의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함과 동시에 가상적(假想的)을 내세워 국민대중의 불안과 불만을 국내에서 국외로 쏠리게 해서 배외적(排外的) 공격성을 강화하고, 이것을 체제의 유지와 강화에 이용한다. 몰락해 가는 구중간층(舊中間層) 등의 불만을 배경으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국가라고 하는 커다란 전체에의 일체화로 바꾸어 급속하게 권력을 장악하고 파시즘 체제를 강화한 나치스의 전략은 그 좋은 예이다. 여하튼 대중조작에서는 이성에 의한 설득보다도 정서에 의한 일체화가 행해지므로 합의에 의한 지배는 동조에 의한 지배로 변질되는 것이다.

대량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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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量消費

산업이 고도화하면 대량생산이 널리 일어나고 또 대량생산이 진전되면 확대재생산(擴大再生産)이 필요해져서, 어떻게 해서든지 대량판매를 추진하여 대량소비를 촉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선전·광고의 기술은 소비행동 같은 것에 관한 연구에 의해 최근에는 장족(長足)의 발전을 보아 대중의 구매력을 끌어 올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편 대중도 노동생산성의 비약적인 상승과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해서 소득수준도 점차로 높아지고, 생활의 다양화와 고도화에 응해서 생활요구가 다양해지고 생활수준의 상승을 보여 왔기 때문에 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구매력을 갖게 되었다. 이것과 기업자의 팔겠다는 노력이 결합되어 소위 말하는 생활혁명이라든가 소비혁명이라고 불리는 사태가 일어나 대량소비사회의 출현을 가져왔다.

세일즈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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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s-時代

현대 경제는 대중의 방대한 소비수요(消費需要)에 의한 고도 대량소비경제이며, 경제의 번영은 낭비에 의한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이 낭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상업주의적 대자본이고, 내구소비재(耐久消費財)로부터 사소한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거리에 범람하고 있는 대량의 상품을 팔아 넘기기 위해 대자본·대메이커는 거액의 선전비를 쏟아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구매욕을 선동하는 선전·광고에 혈안이 되고 있다. 소비자로서의 대중을 손에 넣는 데는 여러 가지 수법이 있는데 그 하나로는 대중의 의식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심층심리(深層心理)를 조종하는 방법이다. 대중에게 꿈과 희망을 넣어주면서 정서의 안정, 가치의 보증, 자기만족, 창조의 기쁨, 애정의 대상, 역량감(力量感) 등을 주입하는 것이 상투수단으로서 그 근저에는 대중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둘째는 대중의 허영심이나 계층심리(階層心理), 나아가서는 향락적 가치관에 호소하고, 때로는 이를 조장하는 방법이다. '소비는 미덕'이라든가 '소비자는 왕'이라고 하는 캐치 프레이즈에 의해서 쾌적하고 이상적인 생활의 이미지나 디럭스한 표준을 만들어내서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여 낚아 올리고 있다.셋째는 대중이 사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일종의 강제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해마다 모델 체인지를 하여 유행을 바꾸거나 하여 계획적으로 물품과 욕망을 폐물화(廢物化)시켜 유행에 뒤떨어지게 함으로써 새것을 더 많이 팔리게 하는 전략이 취해진다.넷째는 사는 사람의 약점을 이용하여 그것을 거점으로 해서 구매층을 늘려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버이는 자식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졸림을 받으며, 유행과 레저(liesure)는 젊은이나 여성을 끊임없이 사로잡는다.어떻든간에 대자본에 의한 판매수법은 대규모적이고 계획적이며 교묘하다. 선전·광고는 거리를 메우고 커머셜은 안방에까지 침입해서 인간의 심층심리나 유행심리를 자극하고 소비행동에 동기를 주게 되므로 대중은 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처하게 되고 만다. 세상은 그야말로 선전과 세일즈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소비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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消費革命

기술혁신과 소득수준의 상승에 의해서 기업측으로부터의 체계적·계획적인 판매활동과 대중측의 가치관 ―― 노동보다 여가를 중요시하고, 절약보다 향락을 찾으며 내면의 충실보다 외면의 호화로움을 추구하는 ―― 의 변화를 배경으로 해서 내구소비재 수요와 문화향락수요(文化享樂需要)의 이상적(理想的)인 증대를 특징으로 하는 고도 대량소비시대가 출현하고 소위 소비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상이다. 생산우선(生産優先) 시대는 끝나고 소비우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소비내용의 질적 고도화는 이미 일부의 지역이나 계층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도시로부터 농촌으로, 상층으로부터 중·하층으로

대량생산의 결과 일용품화한 각종의 내구소비재나 고급품이 보급되고 레저가 세상을 풍미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통상적인 의·식·주 이상의 것들에 대한 소비가 소비생활의 중심이 되고 레저산업을 위시한 제3차 산업이 급속하게 발달하여 생활이 합리화·쾌적화된다. 그리고 이제까지 교환가치로 평가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던 사회적 필요노동(요리·재봉·세탁·청소·육아·recreation 등)은 가공식품·외식(外食)·기성복·가정용 전기기구·레저산업 등의 사회적인 상품 또는 서비스에 의해서 대폭적으로 교체되어 가사노동(家事勞動)의 대부분이 사회화되고 생활구조나 생활양식이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고도 대중소비시대)

풍요 속의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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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饒-貧困

소비시장·레저시장의 현저한 확대와 그에 수반된 생활양식의 변화는 아메리카니즘의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적 생활양식은 고도의 기계와 소득문명생활수준 위에서 성립된 것이고, 소비혁명은 소득혁명을 수반하고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소득수준의 평준화라는 의미에서의 소득혁명은 사실상 반드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각기의 소득계층간의 격차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듯하며 오히려 그 격차가 증대하는 경향이 있다. 문 라이팅(야간작업), 중년 가정부인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파트타임(시간제) 노동, 월부제도의 보급은 점점 더 증대되는 생활수준과 요구수준(要求水準), 그로 인해 증대하는 소비수요에 가계(家計)가 미치지 못하는 실정을 말해 주고 있다.일반적으로 소비수준이 낮은 후진국에서는 내구소비재·레저 등의 보급에 의한 가계지출의 팽창과 수입과의 불균형이 현저하다. 그리하여 겉으로 보기에는 아메리카니즘의 범람에도 불구하고 생활고는 해소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토지문제나 주택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늘어난 가계를 메우기 위하여 농민들의 품팔이 겸업, 도시 하층민의 내직(內職), 신중간층을 중심으로 하는 가정부인들의 파트타임 노동, 맞벌이, 월부제도에의 의존 등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다. 확실히 물질생활은 향상하고 생활양식은 평준화해서 계층의 차는 겉보기에는 나타나지 않아 풍요한 사회란 환상을 낳고는 있으나, 실제로는 광범한 계층 사이에서 생활 수준의 향상이나 생활내용의 풍부화를 보이면서 상대적으로 궁핍화 현상이 새롭게 진행되고 있다.

물질과 정신의 언밸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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物質-情神-unbalance

생활이 물질적으로 넉넉해지는 반면, 팽창된 가계지출로 말미암아 고통스러워지는 곳에 부자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도 아닌 광범한 근로대중간에 소시민적인 생활태도가 번져, 부단한 욕구불만이나 위압감·결핍감·궁핍감·소외감이 생기는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인 사치스런 궁핍 이외에 고도대량 소비사회는 정신적인 빈곤의 만연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도화된 물질문명에 의해서 규격화·표준화된 대량의 상품을 사면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물질생활면에서 평준화되고 획일화되어 개성을 잃기가 쉽다. 그리하여 물질생활의 규격화와 표준화는 정신생활의 빈곤화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매스 커뮤니케이션이나 매스 레저 등의 대중문화의 침투는 이것에 박차를 가한다. 여기에 '대중사회시대'의 모순의 일단이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이홈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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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home 主義

자기를 보다 큰 사회라든가 체제로부터 분리하고 자기와 가족의 세계 속에 폐쇄해서 오로지 사생활을 존중하고 사생활의 쾌적화에 급급하며 자기들만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이 마이홈 주의이다. 사생활을 풍부케 하고 중요시하여 행복감을 찾으려는 그 자체는 인간의 정당한 권리이며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칠 때에는 사회적인 연대성에 대한 의식과 감각을 벗어나 체제와의 연관이나 사회활동에의 적극적인 참여를 잃어버리게 되고 사생활에만 몰두하는 것으로 끝나기 쉽다. 그것은 거대한 기술·기구·권력 그리고 거대한 사회나 대중문화에 의한 소외의 결과인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적극적인 에너지의 상실이며, 새로운 소외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사생활의 쾌적화에만 몰두하는 마이홈 주의는 가령 풍요 속의 궁핍감이 빚어질 때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집합적 노력(集合的努力)을 낳기 어렵게 하고 오히려 상위자(上位者)에 대한 열등감, 동지위자(同地位者)간의 경쟁의식, 하위자에 대한 차별감과 우월감을 가져오는 계층심리를 조장한다. 이렇게 되면 욕구불만을 축적시키면서 현실에 매몰되어 있는 체제에 순응하는 방향으로 표류하는 결과가 되기 쉽다고 하겠다.

호모 루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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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o-ludence

노는 사람이라는 뜻. 레저 시대의 인간상이다. 사생활 존중주의가 횡행하는 현대사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레저를 추구하고 노는 것 그 자체를 추구하는 향락인, 또는 여가중심형의 인간이다. 이것은 특히 젊은 세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나 쾌락주의적 또는 향락주의적인 가치관은 직업·계층·성(性)·연령을 떠나서 점차로 널리 번져가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에 입각해서 인생의 의의를 소비·레저·놀이·향락에서 찾으며, 그것을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해 추구하는 인간을 호이징가(J. Huizinga, 1872-1945)에 의해서 호모 루덴스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래 인간은 지혜와 이성과 지식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知識人)이였으며, 생산과 노동에 정통한 호모파베르(homo faber, 工作人)였다. 그런데 생산 또는 노동의 마당에서 소외된 인간성을 소비 또는 여가(餘暇) 가운데서 찾아보려고 하여 근검절약을 앞세우는 노동윤리를 부정하고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시간을 적극적으로 쾌적하게 소비하려는 여가윤리(餘暇倫理)가 우세해짐에 따라 일시적인 기분풀이라든가 열광적인 광란 속에서 인생의 보람과 스릴을 느끼며 인간의 실존(實存)을 확증해 보려고 애쓰는 인간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대중적 인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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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的人間像

현대인의 적지 않은 부분은 생산이나 노동에 있어서의 소외, 정치기구나 도시적 환경에 의한 소외에 덧붙여 소비나 여가생활에 있어서의 소외, 정신생활에서의 소외라고 하는 몇 겹의 소외상황에 싸여 있다. 그 결과 자기의 무력감과 다른 사람에 대한 무관심에 빠져 호모 루덴스(homo ludence)화 하기까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현대인의 생활과 행동과 심리를 특징짓는 것은 거대한 기구 속에서의 원자화와 비합리화·정서화이며, 수동화(受動化)와 소비화이다. 여기에서 현대사회와 문화에 의해서 규정된 현대고유의 인간유형, 즉 대중적 인간상이 성립한다.대중적 인간상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직되지 않은 하나하나로 흩어진 인간의 집합체라는 집단형태에 있어서는 거의 유사한 성격을 갖는 군중(群衆, 무리)이나 공중(公衆)과 대비하면서 그 역사적·이념적인 배경과 의의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現代人의 個性)

군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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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衆

공통된 관심과 집합(集合)에 의해서 생기는 특유한 심정을 가지면서도 고정된 목적조직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인간의 집단을 말한다.군중현상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오래된 것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그것은 특히 19세기 말의 격심한 변동기에 두드러진 사회불안을 배경으로 격화된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이 고조되었던 것과 관련해서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격심한 운동 속에서(crowd)의 심리와 행동의 이상상태를 관찰하고 이름 없는 군중이 대두되는 것을 놀라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주목한 사람이 르봉(G. LeBon, 1841-1931)이다. 그가 본 군중은 소위 혁명적인 군중이었으며, 난폭·잔인한 충동성, 지도자의 선동에 맹목적·무비판적·몰이성적(沒理性的)으로 반응하는 피암시성(皮暗示性), 일시의 흥분으로 폭발하는 감정격분성(感情激奮性), 용서없는 파괴를 저지르는 잔인성 등의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군중이었다. "군중은 추리(推理)하지 않는다"는 그의 군중관은 소수의 지적(知的) 엘리트에 대립하는 무자각하고 무분별한 인간집합이라 하여 군중을 멸시하는 귀족주의적인 입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한편으로는 기존질서를 위협하고 사회를 혼란으로 빠뜨려 넣는 혁명적 군중에 대한 공포심과 결부되어 혁명을 군중의 신경질적인 산물이라 한 데서 비난을 받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적 군중에의 공포와 더불어 민주주의 확충에 대한 공포 때문에 소수의 지적귀족(知的貴族)의 지도에 대해 열등한 군중지배의 산물인 민주주의 사회에의 불신과 현대문명에 대한 세기말적(世紀末的)인 불안과 위구심(危懼心)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群衆心理)

공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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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衆

르봉이 군중의 시대를 멸시하고 민주주의와 기계문명을 어둡고 차갑게 내다본 데 반하여 타르드(G. Tarde, 1843-1904)는 신비적 실체화(神秘的實體化)로서의 군중이나 군중심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나 이성적인 토론을 통해서 여론을 형성하고 민주주의를 짊어질 새로운 집단으로서의 공중(public)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르봉이 표명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타르드에 있어서는 공중적 기초 위에 확고한 전망을 하게 되어 간접적 접촉 위에서 성립되는 근대적 집단에 대한 신뢰로 바뀌었다. 결국 그가 본 공중이라는 것은 서로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사람들끼리 물질적으로 접근하지도 않고, 얼굴을 맞대는 일도 없이 분산하여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공통된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에 관한 각자의 판단과 의견을 너그러운 태도로 냉정하게 교환하여 보다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순수한 정신적 집합체이다.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본이 되는 여론(공중의 의견)을 짊어질 능력이 있으며, 이성(理性)에 눈을 뜬 합리적인 존재였다. 여기서 묘사한 공중의 시대는 밝은 세계였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낙천적인 신앙에 근거했던 것이라 하겠다.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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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

민주주의의 담당자인 공중에 대한 타르드의 무한한 신뢰는 그 뒤에 일어난 사회의 대중화과정의 진행 속에서 무참하게도 배반당하고 이념으로서의 공중이라는 이성적 인간상은 대중사회적 현실 앞에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공중은 르봉이 묘사한 군중의 양상을 차차 드러내게 되었다.공중=이성적·합리적 인간상이라는 낙천주의는 대중(mass)=정동적·비합리적 인간상이라는 비관론으로 바뀌어 간다. 대중(大衆)이란 매머드 조직 속에서 강제적으로 획일화되고, 직장 밖의 소비·여가생활에서도 표준화되어 개성을 상실하여 정서화되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나뭇잎과 같은 존재이며, 독점단계의 현대사회에서의 새로운 군중인 것이다.이 새로운 군중으로서의 대중은 조직된 집단을 구성하지 않고 잡다한 직업이나 계층, 학력이나 교양 등을 갖고 있으며, 한편 공통된 관습이나 전통이나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은 뿔뿔이 흩어진 익명적 불특정 다수자의 부정형(不定形)한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대중은 매스 미디어(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준환경 속에 놓여져 엘리트와는 구별되는 광범한 피지배층을 형성하는 점에서 소극적인 공통성을 띠고 있는데 그친다. ((大衆社會論과 大衆)

현대인의 개성(외부 지향형 인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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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人-個性(外部志向型人間像)

대중에게서 많건 적건 간에 볼 수 있는 사회적 성격유형은 리스먼(D. Riesman)이 말한 외부(타인) 지향형(志向型)이라는 것이다. 리스먼의 말에 의하면 현대인은 근대 이전의 사회에 전형적인 전통 지향형(傳統志向型)의 인간은 물론 근대사회를 대표하는 내부지향형의 인간과도 다르다. '전통지향형 인간'은 고정된 관습이나 안정된 사회질서에 의해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생활양식에 얽매여 개체의식을 갖지 못한 채로 수치를 두려워하는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게 된다. '내부지향형의 인간'은 르네상스 이후 자본의 축적과 이동의 증대 등 변동적인 양상이 심해진 결과, 고정된 전통이 아닌 옮아가는 환경을 겪어 나가며 존속하는 자아(自我)에 힙입어 개성에 의한 선택을 하여 양심(良心)의 자유에 따라서 행동하는 주체이며, 고독을 참고 견디어 내는 인간이 요구되었을 때에 성립되었다. 그 행동에 동기를 주는 것은 죄(罪)를 자각하는 감정이다. 그러나 사회가 고도로 기계화되고, 종래의 경쟁적인 시장의 주인공이었던 독립자영의 기업가나 그것을 특징짓는 창의연구와 기업심이 소멸되어 가고 자본의 축적과 시장의 개척을 지향하는 사회로부터 여가의 소비와 인간관계에 중점을 두는 사회로 옮아감과 동시에 새로운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 세워지는 인간유형이 나타나게 된다. 현대를 대표하는 '외부지향형 인간'에게는 행동의 기준이 내면화되는 일이 없이 외부에의 적응준비가 내면화되는데 그치고 '집단의 윤리'에 따라서 타인의 행동이나 기대에 민감하게 반응(동조)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이미 수치를 두려워하는 감정이나 죄를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한 불안에 의해 규제 받는 인간이 지배적이 된다. ((他人志向型)이와 같이 자기의 내적 일관성(內的一貫性)을 버리고 외부집단의 분위기나 가치기준에 재빠르게 적응하는 경향은 자기 소외감·무력감·고독감의 표현이고, 퍼스널(인격적)한 불안정성 감각에 빠져 있음을 반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적 인간은 기구로부터, 권력으로부터, 그리고 자기인격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생산·유통·행정·매스 커뮤니케이션 등의 수단을 장악하는 소수의 엘리트의 조작에 몸을 맡기고, 수익계층(受益階層)으로서 체제 안에 끼이게 되어 동조와 기대적 사회화(期待的社會化)에 시종하여 현상에 매몰하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존재인 것이다. 프롬(E. Fromm)에 의하면 이 대중적 인간상에 있어서는 착취적·저축적 구조가 아닌 수용적(受容的)·시장적(市場的) 경쟁이 구조 아닌 팀워크나 성공이 아닌 익명의 권위, 개인적 양심이 아니라 적응과 순응에의 욕구, 지배감각이 아닌 무의식적인 무력감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거대기구 속에서 서로 협력하고, 언제라도 기꺼이 명령에 따르고, 기대에 보답하며, 마찰을 일으키지 않고,인간관계에 조화하는 로봇, 이것이 현대인이라고 말하여도 결코 과장은 아닐 것이다.

대중사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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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社會論

대중사회적 문제상황을 클로즈업하여 현대사회와 현대인의 병리적(病理的) 측면을 파해친 것이 대중사회론이다. 대중사회론이라고 해도 물론 그 보는 각도는 일정하지 않고 여러 가지 유파가 있다. 귀족주의적 입장의 비판이 있는가 하면 민주주의적 입장의 문제제기도 있다((大衆社會論의 諸相). 그 접근방법이 문제의식, 그 상태나 방향은 다를지라도 현상인식에서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현대사회의 중요한 측면을 잘 파악하여 문제를 제기한 점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사회론이 제기한 문제는 현대의 병든 사회·문화·인간의 병태(病態)를 페시미스틱(비관적)하게 진단할 뿐으로 미래의 전망이 부족하다. 또 그 현상인식도 어두운 면을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현상을 올바르게 묘사하고 있느냐 어떠냐는 것에도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가지 비판이 나올 수 있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

대중사회의 생리와 병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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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社會-生理-病理

대중사회적 문제상황은 독점단계에 있어서의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위기를 집약적으로 표시하는 것인데, 그것을 요약하면 한편에서는 조직화의 진행에 근거한 생산·행정·커뮤니케이션 그 밖의 수단으로부터의 분리와 소외·원자화, 다른 한편에서는 형식합리성 또는 기술적 합리성의 침투에 따른 인간 및 인간관계의 비인격화와 정서화라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며, 합리화된 기구의 심층부에 있어서의 비합리성의 침전이라는 모순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접촉과 지역적인 결합을 특색으로 하며 이전의 사회형태의 전면적인 구조변화의 결과로 생긴 것이고, 낡은 것을 파괴하는 힘이 동시에 새로운 것을 형성하는 힘에서 오는 해체와 혼란과 부적응, 즉 '아노미'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만하임(K. Mannheim, 1893-1947)은 그 원인을

'산업적 대중사회'의 구조적 2중성에서 찾았다. 산업적 대중사회는 대규모의 산업사회로서는 최고도로 합리적이고 계산이 가능하며 욕구충족을 완전히 억압하고 단념하는 행동조직을 만들어내는 반면, 대중사회로서는 부정형(不定形)한 인간집합에 특유한 모든 비합리성이나 격정적인 폭동을 낳게 된다고 한다. 표층부(表層部)에 있어서의 합리적 산업사회와 심층부(深層部)에 있어서의 비합리적 대중사회의 동시공존과의 이율배반으로, 소수의 엘리트와 방대한 대중과의 거리나 힘의 차이가 증대하고 원자화되어서, 절망적인 불안상태에 놓인 무력하고 흩어진 대중이 갖는 비합리성은, 사회기구 속에 통합되지 않은 채로 정치의 영역에 탈출구를 찾거나 사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사회의 기본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정동적인 심정민주주의(心情民主主義)로 흐르는 경향으로부터 독재의 위협이 생겨나게 되고, 밖의 사생활 분야에서도 암시·설득·선전·선동이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행해져 독재의 위협과는 반대로 넉넉하고 평온한 사회에 대한 수익감이 늘어나게 된다.

대중사회론의 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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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社會論-諸相

대중사회론을 크게 나누면 귀족주의적 입장과 민주주의적 입장으로 구분되다. 전자는 19세기 말의 사회적 변화에 의해 엘리트 층의 폐쇄성이 무너지고 대중이 사회적 세력으로서 대두되어 엘리트적 가치가 위기에 빠진데 대한 반동으로서 생겨, 대중이나 대중사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그 원류(源流)는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共同社會)적인 지나간 시대에 향수를 느끼는 낭만주의나 그 비슷한 사상(퇴니에스, 프라이어, 뒤르켐, 쿨리)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대중사회를 문명의 병태(病態)로 보고 기계문명이나 민주주의 그 자체를 부정하고, 주견(主見) 없는 대중을 멸시하며 귀족적인 문화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오르테가, 파레토, 미헬스, 모스카, 르봉, 부르크하르트 등에 의해서 대표된다.이에 반하여 민주주의적 입장은 20세기의 러시아 혁명, 특히 나치스 혁명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엘리트의 대두를 앞두고 파시즘에의 위협이라는 위기감에서 이에 대항하여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려는 동기에서 생겨났다. 말하자면 '위기에 있어서의 대중사회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레테러, 아렌트, 노이만, 만하임, 프롬 등의 독일계 학자에 의해서 대표된다. 이와 유사한 입장은 밀스, 리스먼, 데그레지어 등 미국학자에서 볼 수 있으나 독일만큼 위기감이 심각하지 않다. 풍부한 사회 미국을 배경으로 한

'정상상태에 있어서의 대중사회론'이며 사회론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 학자 사이에는 중간집단무력설(中間集團無力說)과 과잉동조설(過剩同調說) 등과 같이 역점을 두는 방법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있으나, 대개는 중간집단이 무력화하는 데 따라서 전능한 엘리트와 무력한 대중이 대치하고 그로 인하여 과잉동조가 일어나는 '벌거벗은 사회'가 대중사회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체제의 차이를 초월하여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또 대중사회를 대중심리면이나 사회심리학적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대중사회론과 마르크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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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社會論-Marx主義대중사회론은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현대사회의 문제상황에 촉발되어 그에 대응해서 생겨난 이론이며, 또 어느 의미에서는 20세기적 현실을 반영하는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19세기의 산업자본단계에서 생겨난 마르크스주의를 가지고서는 현대의 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는 견지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결하고 또는 그것을 수정하는 측면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계급의 양극분해(兩極分解)와 궁핍화를 예견하고,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의 첨예화를 예상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은 신중간층(新中間層, 화이트 칼라)의 비대화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다원적 분화(多元的分化), 소득의 상승이나 사회이동의 격화에 의한 평준화, 계층심리적 수익감(階層心理的受益感)의 조장과 계급대립의 제도화라고 하는 일련의 사실(계급의 대중화)을 옳게 설명하고 그것에 대처하는 데는 너무나 낡아서 교조주의적(敎條主義的)인 동맥경화증에 빠진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의 결점을 특히 사회심리학적 견지를 도입해서 수정하려는 의미에서 대중사회론이 갖는 의의와 효과는 매우 큰 바가 있다.

대중사회론과 체제의 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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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社會論-體制-相違대중사회론에서는 기술과 기계, 조직과 기구, 도시와 매스 커뮤니케이션이 거대화하면 체제의 상위에 관계 없이 인간은 소외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생활과 사고방식이 유사해지는 것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체제 사이에 그런 점에서 상당히 공통된 특징이 보이는 것은 확실히 부정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도시화와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포함해서 기계시대의 여러 특징들은 사회주의체제 속에도 많거나 적거나간에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중사회론은 유효하다. 그러나 기술과 기계, 조직과 기구 같은 것은 그 주어진 체제에 따라 계약을 받기 때문에 다른 의미나 기능을 갖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꾸어 말한다면 문제를 기술·기계·조직·기구와 인간 일반으로 푸는 것은 모든 것을 그 기저체제(基底體制)에 환원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틀린 일이다.

계급의 논리·대중의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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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級-論理·大衆-論理기계시대라든가 고도산업사회라고 하는 발상 아래 체제의 논리를 은폐하면 생산력적 관점과 생산관계적 관점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여기에서 당연히 계급의 논리가 후퇴하거나 소멸해서 대중의 논리가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위험이 있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확실히 대중사회적 양상을 짙게 띠고 대중의 논리가 거기에 침투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인 이상 그것은 대중사회인 동시에 계급사회이기 때문에 계급의 논리가 소멸해 버리고 만 것은 아니다. 다만 대중의 논리에 의해서 계급의 논리가 표면상 흐려져서 계급이 대중화한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계급의 논리가 형태를 바꾸어 존재하고 작용할 따름이며 그 규정적(規定的)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논리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대중사회론과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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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衆社會論-大衆

계급의 논리에 대한 배려가 적거나 거의 없는 것과 관련해서 대중사회론에 있어서의 대중은 예외 없이 수동적·객체적(客體的) 존재이며, 비합리적·정서적 존재로서 원자화되고 흩어진, 껍데기 없는 게로 비유하여 묘사되고 있다. 대중은 마이너스의 심벌이고, 숙명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취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능(全能)한 엘리트 대 무력한 대중이라는 도식이 그것이다. 이 견지는 파시즘의 기초가 된 엘리트주의적인 생각일 뿐이다. 엘리트가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는 것은 그들이 계급적으로 결속해서 권력수단을 독점하고, 대중을 조작하여 체제 안에 끌어 넣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회색(灰色)으로 염색된 모래와 같은 존재라고만 볼 수는 없다. 그 대부분은 사회를 담당하여 역사를 추진하는 생산적 대중이며, 엘리트의 압력에 저항하여 자율적·자발적인 조직에 결집하고, 광범하고 다양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압력이 정치를 움직이는 유력한 요인이 되고 있다. 엘리트와 대중의 관계를 고정화해서 숙명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행체제의 벽은 두껍고 반체제운동을 위시하여 대중운동의 펀치력은 더욱 약하다. 대중이 정치적 무관심에 빠져 수익심리에 기울어지고, 마이홈 주의에 도피한다고 하는 퇴행현상은 무시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또 혁신(革新)의 불모(不毛)라고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사회주의정당이 목표를 상실해서 우경화(右傾化)하여 계급정당으로부터 대중정당으로 전화하거나, 노동운동 자체가 체제의 자동안전장치로 전락하여 조합 자체가 체제의 울타리 속에 얽매어 체제개혁을 위한 운동을 벌이기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대중사회론이 제기한 문제는 이론상으로나 실천상으로나 무시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운위되는 것도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정에 따라서는 중대한 정치적 이슈(issue, 문제)를 둘러싸고 시민이 들고 일어나서 대중운동이 일어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것과 변혁의 논리가 어디서 어떻게 연결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대중을 고독하고 무력한 존재라고 규정지어 버린다는 것은 변혁의 에너지를 부인하고 마는 결과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