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현대사회의 대중과 사상/근대사회의 발전/전근대사회

전근대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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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近代社會

전근대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전형으로서 공동체(共同體)를 들 수 있는데, 인류가 경험한 가장 원초적인 것은 원시공동체(原始共同體)이다. 따라서 원시공동체로부터 농업공동체(農業共同體)로의 구조변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생활방식이나 혼인형식을 둘러싸고 모건이나 엥겔스 그리고 웨스터마크 이래의 인류학자나 사회학자 사이에 심한 대립이 있었다.모건은 『고대사회』에서, 엥겔스는 『가족·사유재산 및 국가의 기원』에서 모계씨족(母系氏族)을 중심으로 한 원시공산제(계급발생 이전의 원시사회에 존재했다고 추정되는 단순한 공산조직으로서의) 사회를 생각했다. 그 제일 처음에는 수렵(狩獵)이나 어로(漁撈)에 종사하면서 방랑생활을 보낸 무리(群社會, 호드)가 있어 난혼(亂婚) 내지 집단혼(集團婚)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일정한 토지에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서 사유화(私有化)가 시작되고, 모계제(母系制)에서 부계제(父系制)로 옮겨져 일부일부(一夫一婦) 가족도 성립하고 계급사회가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물론 인류학자들의 비판에서 볼 수 있듯이 모계제로부터 부계제로, 공산제로부터 사유제로라는 가설을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발전법칙으로서 실증하는 뚜렷한 근거는 없으나 생산력이 아직 발달되지 못했던 원시시대에는 몇 사람이 생산수단을 공유하고 공동노동이라는 형태로 특별한 생산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뒤르켐도 부분 상호간에 아무런 차별도 없고, 또한 어떤 고정적인 조직도 갖지 않은 동질적인 집단을 가정해서 '호드'라 불렀는데, 이것은 모든 사회유형이 거기에서부터 싹트게 되는 사회원형질(社會原形質)이라고 했다.

원시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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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始共同體

원시공동체는 문명사회에 선행하는 형태이며, 소위 말하는 자연사회(自然社會)로서 그 구성은 아주 단순하다. 남녀간의 본업이 이미 나타나서 남자는 주로 수렵이나 어로에 종사하고, 여자는 간단한 농경이나 육아(育兒)에 종사하였으나 내부의 분화(分化)는 진전이 없고 계급관계도 없었다. 생산수단이 사회 전체의 소유이고 생산물이 평등하게 분배되었다는 의미에서는 공산제였다. 그러나 점차 토지에 정착해서 농경이나 목축을 주로 하게 되자 혈연(血緣)을 매개로 하는 씨족공동체(氏族共同體)로 전화했다. 여기에서도 생산용구는 여전히 보잘 것 없고 생산력도 낮았기 때문에 씨족 전체의 협력에 의한 집단노동이 없고서는 생활의 유지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맹수의 위협을 막을 수도 없었다. 혼인도 난혼이나 집단혼 형식이 취해졌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제도로서 집단혼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명확한 증거는 없으나 처음에는 혈족간의 혼인을 금지하는 규정이 없었으므로 모건이 말하고 있듯이 한 무리의 남자가 서로 대등한 자격에서 집단적으로 한 무리의 여자와 통혼했으나 점차 혈연관계에 있는 형제자매의 혼인이 금지되는 동시에 모건이 말하는 푸나루아 혼(친자매, 방계의 자매가 반드시 서로 혈연관계가 없는 몇 사람의 남자와 집단적으로 통혼하거나, 반대로 친형제, 방계의 형제가 반드시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몇 사람의 여자와 집단적으로 혼인하는 형태)을 거쳐 족외혼(族外婚)의 확립과 동시에 복수의 씨족으로 형성되는 부족(部族)으로, 다시 생산력의 발달과 더불어 부족동맹(部族同盟)으로 사회권이 확대되었다.원시공동체의 단위는 씨족으로서 혼인과 종교에 관해서 강한 규제를 받고, 제각기 자기의 토템을 갖고 있어서 동물의 이름을 그대로 토템으로 하여 씨족의 명칭으로 삼음으로써 씨족 내의 강한 친근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같은 조상을 숭배하고, 언어나 관습을 같이함으로써 집단으로서의 통일도 이루게 된다. 이러한 원시인 종교의 중심이 되는 것은 애니미즘이라고 불리는 영혼숭배(靈魂崇拜)로서, 원시인들에 있어서 인간의 육체에는 혼이 붙어 있고, 자연물, 예컨대 동물이나 초목석(草木石) 같은 것도 인간과 같이 살아 있는 존재로서 영혼을 갖는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숭배함으로써 씨족으로서의 동족적 질서가 유지되었다. 혼인형태도 부족내의 다른 씨족과의

통혼이라는 족외혼(族外婚)이 되었으나 태어난 자식은 모친의 토템 씨족에 속했으므로 모계제가 취해졌다. 그러나 다른 부족으로부터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는 부족으로서의 통일이 필요해서 차차 부족 내부의 조직화가 도모되어 남녀노소의 순서에 따라 상하(上下) 구별도 생겼다. 또한 생산력의 발달, 예컨대 창이나 활의 사용, 토기나 직물과 같은 기술의 발명, 동물의 가축화 등에 의해서 원시적 채취경제(採取經濟)로부터 농업목축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경제로 옮아감에 따라 개인경영으로도 자기 생활유지에 필요한 자료를 획득하고 보존할 수 있게 되어 공동노동의 필요성이 적어졌다. 이리하여 수확물이나 토지의 사적 점유(私的占有)가 시작되고, 부족간의 정복에 따른 토지수탈 등에 의해서 사유재산제와 계급국가가 형성되어 원시공동체는 해체되고 노예제사회로 옮아갔다.

농업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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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業共同體

원시공동체가 붕괴한 다음의 사회구성체가 농업공동체로서의 공동조직을 근간으로 해서 봉건사회의 종말까지 계속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적 점유를 포함하는 공동체조직을 농업공동체라 하고 이것을 원시공동체의 가장 마지막이며, 특별히 공동체라고 불려야 할 구성의 최초 형태라고 말했다.이미 이 시대가 되면 원시공동체와 달리 토지의 사적 점유와 사적 소유가 시작되고 생산력의 발전과 분업화도 진전된다. 그리하여 가족의 형태도 원시적인 종족공동체(種族共同體)로부터 가부장제가족(家父長制家族)으로 옮아감으로써 혈연의 유대도 약해졌다. 그러나 아직 이 단계에서는 근대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자립해서 생산을 영위하기에는 아직 개인의 생산력이 너무 유치해서 여전히 공동체적으로 점취(占取)된 토지를 기반으로 해야만 했다. 이와 같이 토지의 공동체적 점취(共同▩的占取)라는 것, 구성원의 활동이 모두 어떤 형태로든 공동체로부터의 규제, 즉 경제외적 강제를 받고 있었다는 것, 나아가 사회적 분업도 공동조직으로 편성되어 토지가 공동체를 성립시키는 물질적 기초가 되었다는 것 등이 근대사회와 다른 점이다.이와 같이 공동체의 구조는 공동체 규제를 매개로 해서 구성원이 결합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침공에 대해서는 공동체 전체에 의해서 방위를 도모함과 동시에 내부에 있어서 공동체의식이 극히 강해서, 그것이 폐쇄성(閉鎖性)과 전통적 지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농업공동체 내부는 그 나름의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토지의 공동점취라는 것과 노동용구나 생산물의 사유라는 사실의 불합리, 나아가 공동체에 의하여 공동으로 점취된 토지 가운데 이와 상반되는 사적(私的)으로 점취된 토지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것이며, 생산력이 발달하고 사유가 한층 더 심해짐에 따라서 공동체 규제가 오히려 장애가 되어 공동체의 해체를 초래하게 되었다.그러나 공동체 조직은 근대자본주의 생산으로 이행되기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로 토지를 공동체적으로 점취했는가, 또 공동체 내부에서의 토지의 사적 점취 진전도(進展度), 거기에 대응하는 공동체 내부의 구성, 예를 들면 혈연관계의 이완도(弛緩度)나 사회구성의 형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 공동체로 나눌 수 있다.마르크스는 아시아적 형태=종족공동체, 고전고대적 형태=도시공동체, 게르만적 형태=촌락공동체를 각각 다른 특질을 갖는 공동체의 기본형태로 들고 있는데 이 세 가지는 역사적으로 잇달아 일어난 발전단계라고 볼 수가 있다.

종족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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種族共同體

이것은 농업공동체의 제1단계로서 부족사회의 해체로부터 고전고대적 형태로 옮기는 중간에 과도적으로 경과한다고 생각되는 발전단계이다.아시아에서는 종족공동체로부터 고전고대적 형태로 이행하지 않고 오랫동안 이 형태를 유지함으로써 아시아적 정체라고도 말하여지고,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하는 특유한 토지소유제를 갖게 되었다. 이 아시아적 형태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고대 노예제사회에 선행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이라고 보는 견해와 노예제 생산의 아시아적 특질이라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이 아시아적 형태는 종족공동체라고 불리듯이 종족 또는 그것을 구성하는 혈연집단이 토지 공동점유의 주체이지만 종족·도시·촌락의 3개 공동체 가운데서 사적 점유가 가장 뒤지고 있었다는 것과 종족공동체적 규제가 강한 것이 특징이며, 농경에 있어서 인공관개(人工灌漑)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관개 및 기타 공공사업을 주관하는 전제군주의 권력이 강해서 이른바 동양적 전제국가를 이룩했다. 또한 노예도 있기는 했으나 집안일에 종사하는 가내 노예의 색채가 강해서 생산력으로서의 노동 노예제로 발전하지 않았던 것도 특징이다.

도시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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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市共同體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리스, 로마의 노예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도시공동체로서, 공동체 내의 분업의 발달이나 생산력의 상승에 의한 혈연적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이것은 공동체 내부에 대장장이나 목공, 상인 등이 나타나서 공동체 내부의 분업과 생산력이 발달되고 이에 따라서 혈연적 규제가 한층 더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단계가 되면 토지의 점취도 진척되어 집터나 밭이 사유지로서 공동체로부터 배분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지(耕地)·방목지(放牧地)·삼림(森林) 등의 공유지도 공동체 성원(成員)의 필요에 따라서 사적 점취가 인정되고 계급분화(階級分化)도 진전되었다. 여기에서 자유지를 발판으로 공유지 획득경쟁이 한층 더 심해져 차차 대토지소유경영(latifundium)으로 이행하고 그 노동력은 주로 노예에 의해서 보급되었다. 또한 가부장제(家父長制)의 진전에 따라 가장권(家長權)이 강화되었고,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해서 다른 도시국가와의 전쟁을 위해 국왕을 포함한 귀족들이 무장한 전사(戰士)로서 단결을 강화하여 소위 말하는 전사공동체(戰士共同體)가 형성되었으며, 토지사유의 확대에 따라서 노동력 보급원으로서의 노예획득의 움직임이 더욱 격화되었다. 또한 도시 안의 수공업자나 주변 농촌의 농민도 점차로 완전무장한 전사로서 귀족과 같은 시민의 지위로 상승하고, 도시공동체의 일원으로 끼이게 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 로마의 도시공동체는 노예노동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노예제사회로 분류된다.

촌락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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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落共同體

농업공동체의 최후의 기본형태인 게르만적 형태는 인인집단(隣人集團)으로서의 촌락이 토지점취의 주체라는 것에서 촌락공동체라고 불리었다. 프랑크왕국의 형성과 확대에 따라서 나타났는데 이 촌락공동체를 기반으로 해서 유럽의 봉건사회 구조가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이 공동체에서는 토지의 사적 점취는 더욱 활발해지고 종족적인 혈연관계의 의의는 거의 사라졌으나 공동체적 규제를 남긴 점에서 전근대적이었다. 예를 들면 촌민의 토지는 자기의 주택 및 택지와 그 가까이에 있는 농경지를 사유하는 이외에 주변에 있는 공동경지도 공동체로부터의 규제를 받으면서 사적인 점취가 인정되었고, 겨우 방목(放牧)을 위한 공동지만이 촌락 소유로 되어 있었던 데 지나지 않는다.이와 같이 토지의 사유화가 진전됨에 따라서 공동체 내 성원의 상대적 독립성과 사적 활동의 정도가 높아지고, 가부장제적 지배가 약해짐에 따라서 사적인 인간관계가 이루어졌다. 또 종전까지는 신분적으로 구속되어 소나 말처럼 취급되던 노예도 어느 정도 재산사유가 인정되어서 예농(隸農)의 지위로 향상되었다.또한 수공업의 발달에 의해 분업도 진전되어 독립적 지위를 얻은 수공업자들이 도시로 옮겨와 길드를 형성하고 상품교환에도 손을 대게 되었다.이와 같이 전체로서는 공동체적 잔재를 남기고 있으면서도 상품생산이나 화폐경제가 시작되고 자급자족의 자연경제에서 탈각해 나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생산력의 높은 단계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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奴隸制度

노예제도는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노동제도로서 원시공동체의 붕괴와 사유재산제에 기인하는 계급관계를 기초로 해서 발생한 것으로서, 농경기술의 진보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서 포로 등을 노동력으로 사용하여 이것을 노예로 전환시킨 데서 비롯된다.또한 공동체의 해체와 더불어 토지수탈이 개시되어 대토지소유가 형성되자 이에 대응해서 빈궁한 사람들은 몰락하여 노예가 되었다. 노예는 자기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자기의 육체 그 자체까지를 파는, 하나의 재산으로 간주되었던 점에서 예농과 다르며, 특히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가장 번창했다.엥겔스는 『반(反) 뒤링론(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오래지 않아 낡은 공동체사회를 뛰어넘어 발전한 모든 민족의 지배적 형태가 되었으나 얼마 안 가서 다시 그 생산이 붕괴한 주된 원인이 되었다. 노예제도는 처음으로 농업과 공업간의 광범한 분업을 가능케 하고 따라서 그리스의 번영을 초래하였다. 노예제도가 없었다면 그리스라는 국가와 그 예술·과학도, 또한 로마 제국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라는 기초가 없었다면 근세 유럽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리스의 노예는 정복에 의한 포로, 몰락한 소농(小農), 노예 집안 출생 및 팔렸거나 버려진 어린아이, 법률에 의한 채무노예(債務奴隸), 소아유괴(小兒誘拐)에 의한 노예 등으로 이루어졌고, 그 수는 기원전 4세기경의 아테네에 40만명, 다시 말하면 성년 남자 한 사람에 대하여 약 18명의 비율로 노예가 있었다고 한다. 그 대부분은 농업노동에 사용되고 일부는 상공업이나 가내노동에 종사했다. 로마시대에 들어와서부터 노예제도는 점점 더 번져서 노예에 대한 수요의 증가 때문에 노예획득을 위한 전쟁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또한 로마의 대토지소유제도하에서도 노예의 혹사가 가능했다는 것과 싼 값으로 얻을 수 있었다는 이유에서 노예가 노동력의 기초를 이루었다.

라티푼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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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tifundium

고대 로마에 있어서의 노예노동을 기초로 하는 대규모 경영에 의한 대토지소유형태로서, 중세에 있어서 장원제도(莊園制度)의 하나의 기원을 이루었다. 로마공화제하에서의 전쟁은 한편으로는 토지수탈을 위하여, 다른 한편에서는 노예획득을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라티푼디움에서는 토지 소유자의 거주지인 직영지(直營地)가 있고, 그 바깥 쪽에 노예노동에 근거를 둔 직영경지(直營耕地)가 있었다. 그 밖에 소작농민(小作農民)으로서 중세 예농의 선구가 된 콜로누스(小作農)에게 빌려준 경지가 있었다. 이 콜로누스는 신분적으로는 독립했으나 대지(貸地)에 정주(定住)하면서 공조(貢租)를 바치게 되어 있었다.그 뒤 노예와 노예소유자와의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대규모 농업은 분해되고 토지는 작은 땅조각으로 분할되어서 그것이 일정한 조건으로 소농민에게 대여되게 되어, 점차로 콜로누스는 예농으로서 농업에 있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 갔다.

고대사회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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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社會-崩壞

로마 제정(帝政) 말기가 되면 노예 노동력의 과도한 착취와 학대로 인해 노예의 반항이 높아가고, 노예의 출생률 격감과 사망자 격증, 노예 공급원의 고갈 등에 의해서 노예의 가격이 높아진 반면, 노예의 생산능률은 극히 낮아져서 소유자에게 커다란 부담이 되었다. 이 때문에 노예제도는 생산력의 발전을 부추길 수 없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저해하는 것이 되어 고대사회의 노예제도는 급속하게 쇠퇴하고 새로이 예농을 노동의 단위로 하는 봉건사회로 이행했다.

봉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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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建社會

봉건사회는 봉건적 생산양식을 기초로 하는 사회로서, 노예제사회에 이어서 발전하였으며, 자본주의 사회에 선행되는 사회형태이다. 봉건사회로의 이행은 로마의 대지주제도 그 자체 속에 싹트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에 의해 확립되었다.봉건사회는 경제적으로는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였으며, 그 위에 극히 엄격한 지배예종(支配隸從)의 신분관계가 생겨났다. 그 하나는 영주(領主)와 가신(家臣)이라는 주종관계로서 영주가 가신에게 봉토(封土)를 주고, 그 봉토를 통해서 인격적인 충성관계가 맺어지고 군무(軍務)에 복역할 의무가 지워졌다. 다른 한편으로 봉토를 받은 지주와 예농과의 엄연한 신분적 지배관계도 확립되었다. 이러한 상하의 신분관계에 의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서 유지된 전제적(專制的)인 사회가 봉건사회이다.봉건사회의 예농은 노예와 달라서 부역(賦役) 등 영주에의 부담의무를 제하고는 나머지 시간을 자기 경영에 사용할 수 있었지만 임금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면 근대적 고용인은 아니고 토지와 일정한 신분에 매여 그 토지에 자기의 생애를 맡기지 않을 수 없었고, 토지와 더불어 상속·매매·양도된 점에서 자유 소작인과 구별된다.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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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園

봉건제도의 정치적·경제적 단위로서 유럽에서 11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지배적이었던 것에 장원이라는 것이 있다. 장원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촌락을 기초로 하는 자급자족 경제의 단위로서 그 가운데서 영주와 예농의 신분관계가 유지되었다. 장원은 세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영주가 직접 경영하는 직영지로서 영주의 직접적인 수요(需要)를 충족하기 위해 영주의 종복(從僕)이나 예농의 부역으로 경영되었다. 둘째는, 예농에게 대여해준 대토(貸土)로서 영주에게 공조를 바치는 의무를 지고 있는 탁영지(託營地), 셋째는 공유지로서의 삼림·목장·호소(湖沼)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보통 1주일에 이틀 내지 사흘 동안 영주를 위해 일한다는 부역이 부과된 외에 직영지의 수확기나 축제일, 그외 영주 소유의 삼림의 벌채, 목초베기, 도로공사 등 임시부역이 과해지고, 공세(貢稅)나 생산물의 공납(貢納)이라는 강제도 부과되고 있었다. 나아가 자녀의 결혼에 관해서도 영주의 허가를 필요로 했고, 상속인이 없이 사망했을 때에는 재산을 몰수당하며, 상속할 경우에도 무거운 차지상속세(借地相續稅)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영주재판권에도 복종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예농의 생활은 언제나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중세말기에 예농의 반항이 격화되어 농민전쟁이 된 것도 그런 것이 원인이었다. 예컨대 영국에 있어서는 14세기 말경 대규모 농민폭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프랑스에서도 14세기 중엽, 독일에서도 16세기에 각지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정도이다.이와 같이 부역이 농민을 착취하는 데 큰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재해와 기근의 속출,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이나 내란 때문에 풍작이 들었을 때조차도 생활에 필요한 생산물을 손에 넣을 수 없을 만큼 궁핍해졌으므로 부역도 일년에 며칠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부역의 철폐야말로 농민의 해방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즉,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화폐경제의 발달에 영향받아 영주의 화폐에 대한 욕구가 높아짐에 따라서 점차로 물납(物納)으로부터 금납(金納)으로 바뀌어졌다. 또한 직영지도 점차 탁영지로, 다시 자유소작제도로 바뀌어짐에 따라 장원경제는 소멸의 과정을 밟게 되었다.

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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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ld

농촌의 근대화, 특히 사람과 사람과의 봉건적 신분관계의 해방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서 도시에서의 화폐경제 발달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산업자본가를 담당자로 하는 상공업의 발달이 있기까지에는 오랜 역사적 도정(道程)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세도시에 있어서 도시의 주민은 점차적으로 영주의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해서 상공업에 진출하고,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길드나 춘프트(Zunft:수공업자의 독점적 同職組合)를 만들었다. 그러나 길드도 경영자(주인)·직인(職人)·도제(徒弟)라고 하는 신분관계를 강하게 유지하고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매뉴팩처(manufacture, 工場制手工業)를 거쳐서 근대적 공장제 대공업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이룬 것이었다.길드는 유럽 중세도시에 있어서의 상인이나 수공업자에 의한 직업상의 단체로서 상인 길드로 결성되었으나 12세기경부터 수공업자들이 상인 길드로부터 독립하여 수공업 길드로서의 크라프트(同職) 길드 내지 춘프트를 만들었다. 이 길드는 봉건영주에 대항함과 동시에 길드원 사이에 엄격한 규정을 두어 동업자의 격증에 따른 경쟁을 막기 위하여 강력한 독점체를 형성했다.길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도제제도로, 경영자·직인·도제 사이에 뚜렷한 신분관계가 성립되어 도제가 되려는 사람은 경영자와 수업계약(修業契約)을 맺고, 수업료를 내면서 경영자와 기거를 하며 수업하는 틈틈이 가정 내의 잡무에도 종사한다. 일정한 연한이 지나면 직인이 되고, 기술과 경험을 쌓으면 독립한 경영자가 되어 길드원이 될 수 있었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기에는 이 길은 아주 좁았다.그렇기 때문에 나중에는 도제나 직인이 별개의 조합을 만들어 경영자와 대항하여 싸우게 되었는데 이 길드 내의 대립과 길드 그 자체가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게 되자 길드는 특권을 상실하고 붕괴되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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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aissance-宗敎改革

봉건사회가 붕괴하고 근대시민사회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 르네상스 및 종교개혁이며, 또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화폐경제와 생산력의 발달이다. 나아가 자본주의 성립을 촉진한 것으로서 상업혁명(商業革命)에 의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과 인클로저(enclo­sure)에 따른 자유로운 노동력의 형성을 들 수 있다.르네상스는 자유시민들에 의한 도시의 화려한 생활을 배경으로 이탈리아에서 개화한 것으로서 고대의 자유로운, 그러면서도 인간중심적이고 세속적인 교양·문화·예술에서 전형을 찾고, 중세의 교회적·수도원적, 즉 초세속적인 감정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어 전통과 권위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인간을 해방하려고 한 데에 그 근대적 의의가 있었다. 특히 종교로부터 인간의 이성(理性)을 해방시키고, 결국에는 미신과 맹목적인 신앙의 세계를 타파한 것으로 자연과학의 발달을 들 수 있다.또한 종교개혁의 근대적 의의도 간과할 수는 없다. 봉건적 신분관계를 유지하고 화폐경제의 발달을 저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는 중세에 있어서의 최대 봉건영주이며 정신적 권위자이기도 했던 로마교회와 그 신학적 사상을 들 수 있다. 로마교회는 유럽봉건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정신적 권위자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우월자였으며, 일체의 문화나 이데올로기의 장악자이기도 해서 중세인의 생활은 모두가 이 교회적 형식 속에 얽매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불가능하고 영리(營利)의 정신도 부(富)의 관념도 모두 부정되었다.로마교회가 중세 최고권위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 것은 4세기말 로마제국의 국교(國敎)가 된 뒤부터이고, 절대적인 세력을 떨친 것은 십자군전쟁(11-12세기에 그리스도교도가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을 회교도로부터 빼앗기 위해 일으킨 전쟁)과 유명한 카노사굴욕(1077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굴복한 사건)으로 신성로마의 황제를 굴복시킨 이후이다. 그러나 로마법황의 지배를 강대하게 한 것은 그것이 갖고 있는 물질적인 힘이었다. 로마교회의 최성기(最盛期)에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제국의 3분의1 이상의 토지가 승려의 수중에 있었는데 이는 위조증서에 의한 토지수탈, 영주들로부터의 기증, 면죄부(免罪符:로마가톨릭교에서 신자의 죄를 용서했다는 증명으로 발행한 증서)의 발행, 불신자나 이단자로부터의 몰수, 10분의 1세(십일조) 등에 의한 것이었다. 특히 승려의 부패가 심해짐에 따라 면죄부의 남발은 극에 달했다.그러나 십자군의 일곱 차례에 걸친 원정이 결국 법황권(法皇權)의 쇠미(衰微)를 촉진하고, 봉건제후의 기본체제를 파괴시켜서 민족국가의 성립을 촉진하게 되었는데 로마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킨 것으로는 종교개혁을 들 수 있다.종교개혁은 루터와 칼뱅에 의해 전개되었다.루터는 신과의 교섭장소를 교회적 제도에서 찾지 않고, 신 앞에서 모든 사람은 자유롭다고 하며 세속적 직업을 인정하고 영리활동을 긍정하여 직무를 다할 것을 주장하였다. 칼뱅도 세속적 직업이야말로 신의 영광을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될 의무라고 한 것과 또 지상의 권위에 대한 정신적 권위의 우월성을 부정하여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생각하고 종교를 보호하는 것은 세속군주의 의무라고 하여 그리스도교의 세속군주에 대한 복종을 주장한 것이 근대국가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되었다.이 프로테스탄티즘의 입장은 가톨릭교가 비합리주의 및 신비주의를 취했던 것에 반해, 세속주의·합리주의를 취한 것에 근대적 의의가 있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말하고 있듯이 근대산업의 형성에 공헌한 기업가나 상인 등의 신흥시민계급에서 프로테스탄트적 색채가 강했던 이유는, 로마교회에 대한 저항으로 발생한 종교개혁이 한편으로는 종래의 부(富)에 대한 관념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그들이 쉽게 상공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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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胎動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근대화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러나 근대사회의 성립은 시민혁명(市民革命)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봉건사회의 해체과정 속에서 준비되었고 도시의 발흥 속에 화폐경제를 확립하여 자본주의로 향하는 단서가 되었다.봉건사회에 있어서의 예농제(隸農制)는 도시에 있어서의 상업자본의 신장에 의해서 쇠퇴되어 농업과 공업의 분리, 촌락과 도시의 분화가 진전되고 동시에 도시가 갖는 역할은 점점 더 중요한 것이 되었다.14세기에 접어들자 밀라노, 피렌체(플로렌스) 등의 도시가 발흥하였는데 이들 도시는 봉건적 구속에서 벗어나 시민적 자유를 획득함과 동시에 도시는 그 주위의 봉건적 지배를 몰아내고, 또 농촌에 영향을 주어 농민해방과 계급분화를 촉진시켰다.이와 같이 봉건경제의 해체에 도시가 끼친 역할은 큰 것이어서 이탈리아 상업도시를 중심으로 지중해 무역은 융성해지고 상업자본 축적이 이루어졌으며 세금의 금납화(金納化)를 촉진하였고, 농촌에의 화폐경제의 침투는 생산력 발전의 장애가 되어온 예농의 지위를 해방시켰다. 또한 도시의 길드도 점차로 쇠퇴해서 매뉴팩처(工場制手工業)에 이행하고, 농촌분화에 따라 토지에서 해방된 농민은 점차 도시에 흡수되어 임금노동자로 변했다. 또한 자본주의 발전의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유럽경제의 중심을 지중해로부터 대서양연안(大西洋沿岸)으로 옮기고 민족국가의 성립을 촉진한 것으로는 인도항로(印度航路)의 발견을 들 수 있을 것이다.이 과정을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접생산자인 노동자는 토지에 얽매어 있어 다른 사람의 농노 내지는 예농의 상태를 벗은 뒤에야 비로소 자기의 인격을 처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어느 곳이나 시장이 눈에 띄는 곳으로 자기의 상품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노동력의 자유로운 판매자가 되기 위해서는 길드의 지배, 즉 길드의 도제제도(徒弟制度)나 직인제도(職人制度) 및 사악(邪惡)한 노동규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생산자를 임금노동자로 바꾸는 역사적 운동은 일면으로는 예농과 길드의 해방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다른 일면으로는 이 새로 해방된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의 판매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봉건제도라든가 각종 길드에 의하여 제공받았던 생산수단, 즉 토지와 기타 생활의 보장을 포기해야만 했다.자본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탱할 기초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그 중 하나는 자본의 집중·집적(集中·集積)이며, 다른 하나는 방대하고 자유로운 임금노동 계층이다. 전자는 상업혁명에 뒤이은 원시적 자본 축적에 의해 진행되었고, 후자는 인클로저(enclosure) 등의 농업혁명에 의한 농민의 이농(離農, 離村)과 도시로의 유입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와 같은 정황을 교묘하게 암시·묘사한 책이 바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이다.

모어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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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Utopia

토머스 모어의 시대는 세계경제의 중심이 점차적으로 앤트워프 및 런던으로 옮겨지고 있던 시대로서 영국에서도 농업생산의 자본주의화와 목장경제의 융성에 따라서 원시적 축적(소수자에 생산수단이 축적되고 다른 곳에 노동력을 파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당시 영국의 양모(羊毛)는 질이 좋았으므로 교통로 신장에 따른 판로의 확대에 의해서 그 수요는 현저하게 확대되고 큰 이윤을 양모에서 얻을 수가 있었다. 이것이 지주들을 토지획득에 광분케 하여 농민으로부터 영세한 땅의 한 조각까지도 빼앗아서 그들을 토지에서 내쫓고, 인클로저를 강행해서 농지를 목장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이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같은

비참한 상태로 몰락해 가는 농민의 모습을 본 모어는 그 해악(害惡)의 근원을 사유재산제에서 찾고 공산주의 사회를 공상(空想)했다.그의

『유토피아』는 농민의 궁핍과 국가의 유혈정책(流血政策)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으로서 제1편과 이상한 섬인 유토피아의 모습을 묘사한 제2편으로 나누어진다. 그는 마지막 끝맺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많은 금은세공사(金銀細工師)나 대금업자 등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들이 유쾌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는데, 가난한 노동자가 소와 말보다도 비참한 생활밖에 할 수 없을 때 이것이 정의(正義)이겠는가?"라고.

절대주의(절대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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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對主義(絶對王政)

봉건사회가 해체되어 근대시민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나타난 전제적 국가형태로서 절대주의를 들 수가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15세기-16세기에 성립되고, 17세기-18세기의 시민혁명에 의해 붕괴되기까지 존속했던 중앙집권적 체제로,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에 대한 봉건귀족의 대응과 그에 따른 체제의 재편성에 의해 성립되었다.마르크스는 절대왕정을 정의해서 "절대왕정이라는 것은 종래의 봉건적 문벌(門閥)이 몰락하고 중세적 시민계급이 근대적 부르주아 계급으로 성장하여, 이 두 계급의 투쟁에서 어느 편도 다른 한편을 아직 완전히 극복하고 있지 못한 과도기에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으며, 엥겔스도

"예외적으로 서로 싸우는 양계급이 거의 균형을 이룬 결과 국가권력은 외관상의 조정자로서 한때 양자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주는 시기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귀족과 시민계급이 서로 균형을 이룬 17세기-18세기의 절대왕정이 그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절대주의는 발흥하고 있는 신흥 시민계급과 몰락해 가는 봉건적 계급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데서 국왕은 외견상으로는 당파나 계급을 초월한 듯이 존재했으나 그 계급적 성질에서 말한다면 봉건적 토지소유자의 이익을 대표했다.그러나 국왕은 자기의 정치경제상의 권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국내 봉건제후의 정치적 독립성을 파괴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왕권강화를 위한 강력한 상비군(常備軍)과 많은 액수의 군비를 필요로 했다. 이것의 부담자는 중산적 생산자층이었으므로 국왕은 부르주아 계급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부르주아 계급도 자기의 이익에 상응하는 정치적 질서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강력하지 않았던 동안은 국왕을 지지하고 외국세력에 대항해서 자국의 부강을 도모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나 국내 상업자본의 비약적 발달과 매뉴팩처(工場制手工業) 진전에 의해 국왕의 경제간섭이 중압적인 것이 되자 부르주아 계급의 전제정치에 대한 공격은 마침내 격화되기에 이르렀다.한편 국가의 충실한 사회적·군사적 기초를 이루고 있던 자영농민 계층이 농촌에서의 계급분화에 의해서 몰락하는 데 놀란 절대군주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인클로저의 진전을 저지하고, 나아가 봉건제후와 결탁하여 체제의 유지를 위한 시책을 펴나갔다.

중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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重商主義

중상주의 정책은 절대왕정 체제의 경제적 배경을 형성했다. 즉, 절대군주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고, 그 대가로서 그들에게 독점권과 특허권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예컨대 무역 차액(差額)에 의해 금·은이 유입되었다. 이것이 절대군주주의 재원(財源)이 된 동시에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이루어, 상업자본으로부터 산업자본으로 전화하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