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평안남도
대동문
편집大同門
북한 지정 국보 제1호.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 원래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6세기 중엽에 세웠다. 현재의 것은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1635년 다시 세운 것이다.대동문은 무지개형 문을 가지 웅대한 돌축대 위에 앞면 3칸(15.91m), 옆면 3칸(10.34m)이고, 합각지붕을 한 문다락으로 이루어졌다. 대동문의 총높이는 19m이다. 축대는 큰 돌을 묘하게 쌓아올려 옆벽물매와 평면휘임을 잘 주어 든든하고 안전하다.문단락은 다른 문단락보다 널마루가 높고 가운데가 넓으며 난간까지 설치하여 굽어보기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1층과 2층의 기둥들은 다른 성문기둥보다 높으며 기둥 위에 3포 두공을 짜올려 성문 자체를 장대하게 처리하였다.특히 건축시공에서 모서리기둥을 중간기둥들보다 굵고 높게 또 약간 앞으로 기울여 세움으로써 역학적으로 평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동시에 안정감을 주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굵은 나무기둥을 사용한 대담한 구도와 힘받이 부재들의 억센 물림, 16개의 기둥과 두공, 도리 등의 간격을 규칙성있게 배열하여 성문을 웅대하고 위엄있게 한다.또한 3단의 두공, 대공화반의 간결하고 섬세한 정식조각, 아름답고 찬연한 단청 등은 우리나라 문단락 건축의 전형의 하나로 선조들의 뛰어난 건축술과 기교를 잘 보여준다.대동문은 고구려에서 6세기 중엽에 평양성을 쌓을 때에 세운 문루로서 그 후 여러 차례 회적들에 의하여 불탔으며 현재 있는 것은 1635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는 대동문의 구조와 장식을 마음대로 떼고 붙임으로써 옛 모습에 손상을 주었으며 6·25 때 피해를 입었으나 1954년과 1959년에 보수·정비하였다.
보통문
편집普通門
북한 지정 국보 제2호. 보통문은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위치하며 북한이 국보 제2호로 지정한 문화재이다. 보통문은 고구려시대에 처음 세워진 후 조선시대에 와서 고쳐 세워진 성문으로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그 서문으로 처음 세웠다.지금 있는 건물은 1473년 고쳐 지은 것이다.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고구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시되었다.건축양식은 장중하면서도 균형이 잡혀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보는 듯하다.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2층 문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축대 복판에는 홍예문길을 냈다. 문길 앞쪽에는 앞뒤 쇳조각을 줄지어 입힌 튼튼한 널문을 달았다.높이 쌓아 올린 축대와 넓이 4.4m, 높이 4.55m의 홍예문길은 선조들의 높은 돌쌓기 기술을 보여준다. 문루는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이다. 보통문은 다른 성문들에 비하여 전체 높이가 조금 낮고, 또 1층 면적에 비하여 2층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게 되어 있다. 측면에서 1층 양쪽 바깥기둥의 밑동과 마룻도리를 연결하는 3각형, 그리고 정면에서 축대바닥 양쪽 끝과 문루의 용마루 중심을 연결하는 3각형은 거의 정삼각형에 가깝게 되어 있다. 그리하여 보통문은 장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칠성문
편집七星門
북한 지정 보물 제4호.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 있는 칠성문은 6세기 중엽에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에 처음 세웠다가 서기 1712년 조선시대에 다시 세운 문이다. 이름은 하늘 북쪽에 위치한 북두칠성에서 따 북문이란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이 성문의 문루는 정면 3칸(7.38m), 측면 2칸(4.36m)의 단층건물이다. 문루에는 사방 돌아가면서 흘림기둥을 세웠는데 정면 가운데는 무지개문길을 피하여 조금 넓게 잡았다. 두공은 없고 마구리 대들보 밑에는 아름다운 초엽을 받쳤다.건물 내부는 통천장으로 시원하게 튀워 놓았으며, 가운데 칸의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문루에는 화려한 모루단청을 입혀 건물의 품위를 살렸다. 지붕은 홑처마 합각식이다. 성문 옆엔 옹성을 쌓아 성쪽으로 몰려오는 적에 집중타격을 가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을밀대
편집乙密臺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 밑에 있는 을밀대는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쪽장대로 세워진 정자이다. “을밀대”란 이름의 유래를 보면, 먼 옛날 “을밀선녀”가 기막힌 이곳의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설화와 을지문덕 장군의 아들 을밀 장군이 이곳을 지켜 싸웠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또 이 정자를 “사허정”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방이 틔어 있어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의 이 정자건물은 조선조 1714년(숙종 40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고쳐 지은 것이며, 최근에는 1960년에 개수를 한 바 있다.을밀대의 구조를 보면, 높이 11m의 축대 위에 세워졌는데 정면 3칸(7.46m), 측면 2칸(5.29m)의 단층 합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둥은 1m 정도의 4각 돌기둥을 밑부분에 받치고 그 위에 흘림기둥을 이어 세우는 식으로 하여 비바람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였다.
숭인전
편집崇仁殿
북한 지정 보물 제4호. 1325년에 지은 사당건물로서 현재 있는 우리나라의 옛 건물 가운데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건물이다. 건물은 평양시 중구역 종로동 평양학생소년궁전 옆에 숭령전과 나란히 서 있다. 본래는 중심건물인 정전을 비롯하여 재계청, 신문(숭인전의 남문), 동, 서 행랑, 동, 서 협문, 대문, 소문, 비각 등 10여 채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6·25 때 부속건물은 파괴되고 정전도 피해를 입었으나 1954년에 정전과 대문 등이 복구되었으며, 1977년에 길건너 숭령전 옆으로 옮겼다.정전은 앞면 3칸(12.97m), 옆면 8.72m이며, 배부른 기둥에 안팎 3포로 짜올린 포식두공을 얹었으며, 겹처마 합각지붕에 아름다운 단청을 하였다. 이 건물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모서리 기둥을 가운데 기둥보다 약간 내세우면서 조금씩 높였을 뿐만 아니라 안기울임을 주어 건물의 안정감을 돋군 것이다. 두공의 산미는 간결한 쇠서형이다.천장은 통천장이고 동자주와 대공에 간단한 장식을 붙이고 대공좌우에 활개까지 걸었다. 숭인전의 정전은 건물 각부재 요소들의 결합과 힘의 전달, 그 역학적 처리, 천장구조를 노출시켜 압박감을 제거시킨 효과적인 장식수법 등 고려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이 건물은 고려시대의 뛰어난 건축술과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는 국보적 유적으로서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서 가치 있는 자료이다.
최승대
편집最勝臺
평양시 중구역 금수산의 최고봉인 모란봉에 있는 정자이다. 봉우리가 모란꽃 같이 아름답다 하여 모란봉이라 이름붙여진 것과 마찬가리로 여기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최고로 아름답다 하여 최승대라는 이름이 어느 사이엔가 붙여졌다 한다.본래 최승대 자리는 6세기 중엽에 쌓은 고구려 평양성 북성의 북쪽 장대터였다. 1714년 평양성 수리공사 때 이 자리를 10m 가량 돋구고 봉화대를 설치하였고, 조선조 숙종 42년인 1716년에 오승대란 이름으로 정자가 세워졌다.그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승대는 현재 정면 3칸(7.36m), 측면 2칸(4.67m)의 단층 겹처마 합각집으로 높은 석축 위에 서 있다. 이 일대에는 진달래·매화·측향나무·복숭아나무·살구나무·소나무 등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
쌍영총
편집雙楹塚
용강군에 위치한 고구려의 벽화고분. 분구는 간신히 원형을 나타내고 있으며 널방의 구조는 전실의 남벽 중앙에 달린 널길, 방형의 앞방, 앞방과 널방 사이의 통로, 방형에 가까운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이다. 통로 좌우에 8각돌기둥이 하나씩 세워져 있어 이 벽화고분을 쌍영총이라고 이름지었다. 천장가구는 전실·현실 모두 평행3각굄 천장이다.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이며, 그 배치상태는 동벽에 수레 2대, 갑옷을 입은 개마무사 1명, 기마무사 2명, 남녀입상 약 30명 등과 북을 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널길의 서벽에는 수레, 기마인물과 남녀 등 30여 명 및 북을 치는 인물, 창을 쥐고 춤추는 인물 등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널길에서 앞방으로 들어가는 좌우 두 벽에는 장사장을 그렸고, 앞방의 벽화는 동·서벽에 청룡과 백호를 그리고, 남벽에는 인물입상을 그린 것같으나 분명하지 않고, 네 벽에는 기둥과 두공을 그렸다.천장의 제1단 굄돌에는 당초문, 제2단 굄돌에는 봉황과 구름무늬, 제3단 굄돌에는 당초문, 3각굄돌에는 괴상한 무늬, 그리고 천장의 뚜껑돌에는 연화문을 배치하였다. 통로의 좌우에 세운 8각돌기둥에는 반룡을 그렸다.널방의 벽화는 네 벽에 기둥·두공·도리를 그리고, 도리 위에는 “八”형의 솟을을 그렸으며, 천장부의 제1단 굄돌에는 사격자무늬 속에 동심원이 있는 무늬, 제2단으로부터 위의 굄돌에는 연화문을 배합한 무늬를 그렸다. 북벽에는 화려한 장방 안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생활하는 주인공 부부의 실내생활도가 그려져 있고 동벽에는 9명의 인물이 행진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공양도를 보고 있다.서벽에도 장방이 그려져 있으나 내부는 분명하지 않다.
용강대총
편집龍岡大塚
북한 지정 국보 제10호.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읍 진지동에 위치하며 고구려 때(5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현실(玄室)은 벽 하나의 넓이가 3.84m, 높이 4.42m 되는 네모난 방이며, 앞방은 동서 5.2m, 남북 1.71m, 높이 3.7m로서 긴 모양이다. 2개의 방은 모두 막돌과 벽돌로 쌓고 그 위에 회(灰)를 발랐으며 현실(玄室) 천장은 네모난 돌을 평행으로 어긋나게 놓아 3단으로 위를 좁히고 마지막 한 단은 3각형이 되게 덮게 돌을 덮었으며, 앞방 천장은 들보를 써서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 부분을 모두 삼각형을 이룬 평행고임으로 만들었다.이 무덤 안은 지상에서 사는 집과 같은 감이 들도록 꾸몄으며, 특히 앞방 천장에는 마을집 처마 끝에 날듯한 새를 그림으로써 아름다운 정서를 풍기게 했으며, 앞방에서 현실(玄室)로 가는 통로 좌우벽에 벽장이 있다.
대안리 제1호 벽화고분
편집大安里第一號壁畵古墳
북한 지정 국보 제11호. 평안남도 용강군 대안구역에 있다.대안리 제1호 벽화고분의 크기는 동서 19.5m, 남북 22.5m이며, 무덤은 남향이고, 내부는 흙을 덮기 전 절반가량 땅속에 들어가도록 돌로 쌓았고 무덤안 짧은 복도로 들어가면 동서로 길게 생긴 네모난 앞방과 다음에 현실(玄室)이 있다. 천장은 네 벽 위에 3각형이 되게 판석(板石) 4개를 얹어서 전체로 8각형을 이루고 있어 독특한 구조이다. 앞방 천장은 가로 세로 길게 생긴 중간을 세 부분으로 나눈 다음 양쪽 천장부분을 각각 삼각형이 되게 돌을 박은 뒤에 다시 돌을 덮어 중간 천장부분은 꺾인 천장식으로 하였다.현실(玄室) 벽에는 골기(骨器)와 집안에서 사람들이 생활하는 장면과 색옷을 입은 사람들이 노는 듯한 그림이 있고 앞방과 현실(玄室) 중간 통로 벽에는 문지기와 같은 장사의 모습과 앞방 네 벽에는 많은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북쪽 벽에는 용·해·달·별(세 발 가진 까마귀)·봉황새·수레·도끼 든 군인 등과 연꽃무늬·덩굴무늬·바퀴무늬·구름무늬·불꽃무늬 등의 그림이 있다.무덤 벽화에는 여자가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베짜는 모습은 최초의 벽화로서 유명하며, 이 무덤에서는 우수한 건축기술과 풍습, 그리고 베짜는 수공법 및 생활전모를 엿볼 수 있다.
강서대묘
편집江西大墓
강서군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벽화고분. 강서삼묘 중 가장 큰 벽화고분이다.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며, 기저의 지름은 약 51.6m, 높이는 8.86m이다.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무덤이다. 널방 네 벽과 천장은 질이 좋고 잘 다음어진 큰 화강암 판석 각각 한 장으로 축조하였고, 천장은 2단의 평행굄돌을 안쪽으로 내밀고 그 위에 2단의 삼각굄돌을 얹고서 덮개돌을 덮은 모줄임천장이다.벽화의 내용은 사신도 및 장식무늬이며, 회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 면에 직접 그렸다. 널방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인동·당초 무늬를 그려 장식하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 마리씩 그렸으며, 동벽에는 청룡, 서벽에는 백호, 북벽에는 현무,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는데, 천장의 황룡은 침수에 의하여 박락되어 분명하지 않다.천장벽화는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의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감싸안은 초롱무늬가 S자형으로 이어져나간 무늬띠를 돌렸으며, 제2단 굄돌 옆면에는 비천·비운·신선·산악 등이 그려져 있다. 이 굄돌의 아랫면에는 인동초롱무늬의 중앙에 연꽃무늬가 가미되어 있고, 좌우에 연꽃을 그렸으며, 그 아랫면에는 구석에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를 배치하고 그 좌우에 마주 대한 봉황을 그렸다. 제4단 굄돌 옆면에는 괴조와 봉황이, 그 아랫면 구석에는 연꽃과 인동이 혼합된 무늬가 그려져 있다.고분축조 및 벽화연대는 7세기 초로 추정되며, 벽화는 대체로 철선묘법으로 그려졌는데, 사신도는 그 구상이 장대하고 힘차며 필치가 세련되어 우리나라 고분벽화 중에서 극치를 이루는 걸작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