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경상남도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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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

경남 합천군 가야산에 있는 절이다. 통도사·송광사와 함께 한국 3대 사찰의 하나이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건립되었는데, 애장왕의 왕비의 병이 치유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절은 신라 말 승통희랑(僧統希朗)에 의해 크게 일어나고, 고려 때는 의천(義天)이 『속장경(續藏經)』의 간행을 시도한 곳이다. 창건 당시의 건축은 알 수 없고, 3층 석탑·석등 등이 현존한다.조선 성종 12년(1481) 이후 8년 간 중건하였으나 여러 차례 불탔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국보로 지정된 대장경판고(大藏經板庫)에는 유명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보관되어 있다.

팔만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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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萬大藏經

국보 제32호.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고자 고종 23년(1236) 강화에서 조판에 착수하여 동왕 38년(1251) 완성한 고려의 대장경이다.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외침(外侵)을 부처님의 힘으로 막고자 방대한 대장경의 간행사업을 추진했다. 제1차는 거란의 침입으로 곤경에 직면했을 때 불력으로 물리치고자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도감(都監)을 두고, 『대반야경(大般若經)』 『화엄종(華嚴宗)』 『금광명경(金光明經)』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등 6,000여 권을 조조(彫造)하였다. 현종 때 시작하여 문종 때 완성된 이 초판 고본(古本) 대장경은 고종 19년(1232)의 몽골 침입 때 불타고, 일부가 일본에 전한다. 그 후 의천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송에서 가져온 불경과 요(遼)·일본에서 수집한 불경의 총목록을 작성하고, 이에 따라 차례로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속대장경(續大藏經)으로 1,010부(部) 4,740여 권에 달하였으나, 몽골의 병화로 거의 없어지고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후 강화도에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대대적인 조판 사업이 진행되었다. 동왕 23년(1236) 강화도에 장경도감(藏經都監)을 설치하여 사업에 착수, 동왕 38년(1251) 총 8만 1,137매(枚)의 대장경을 완성하니, 이것이 유명한 팔만대장경으로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다. 대장경의 조판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출판 기술에 큰 공헌을 하였다.

해인사 고려각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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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高麗刻板

해인사에 있는 조선 말까지의 여러 각판 중 고려시대의 것으로 『대방광불화엄경』 진본(晉本) 728매, 주본(周本) 941매 등 불경과 그 밖의 서적 등 총 54종 2,835판이다. 그 가운데 28종, 2,725판은 국보 제206호로, 26종 110판은 보물 제734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로 지정된 판은 『금광명경(金光明經)』, 『불설보문경(佛說普門經)』, 『불설예수시왕생경(佛說預修十王生經)』 등이 있다.

해인사 장경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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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寺藏經板庫

국보 제52호. 해인사에 딸린 건물의 하나. 조선 초기의 건축물로 남쪽의 것을 수다라전(修多羅殿), 북쪽의 것을 법조전(法寶殿)이라 하는데 여기에 고려 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그 앞 두 동의 소당에는 보판(補板)과 잡판(雜板)을 소장하고 있다.

통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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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度寺

경남 양산시 하북면에 있는 절이다. 신라의 자장율사(慈裝律師)가 당나라에서 부처의 가사(袈裟)와 사리(舍利)를 받아 가지고 귀국하여 선덕여왕 15년(646)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엔 대웅전·적멸궁(寂滅宮)·법당(法堂) 등이 있었다. 계율종(戒律宗)의 근본 도장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6년(603)에 재건하고, 인조 19년(1641)에 중건했다. 가람 배치가 독특하고 내부에는 불상이 없으며, 다만 거대하고 화려한 불단(佛壇)이 조각되어 있다. 해인사·송광사와 함께 3대 사찰의 하나로 꼽힌다.

통도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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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度寺大雄殿

보물 제144호. 통도사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의 법당이다. 통도사의 가람건축들은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대웅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뒤쪽에는 금강계단이 있다. 계단의 사리탑 속에는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봉안되어 대웅전 안에는 불상을 안치하지 않고 큰 불단만을 마련하였다.1961년 7월 보수공사 때 발견된 동쪽 합각(合閣) 머리의 서까래 세 개에 쓰여 있는 순치이년갑신오월(順治二年甲申五月)의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보아 이 건물이 1645년(인조 23)에 건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통도사 봉발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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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度寺奉鉢塔

보물 제471호. 고려시대의 탑으로 높이는 약 3m이다. 통도사의 용화전 앞에 세워져 있다. 기단부와 발형(鉢形)의 신부(身部)로 된 석조물로서 하대석은 사각형 지대석 위에 놓였고 원형의 측면에 두 줄의 테를 둘렀다.

표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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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忠寺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재약산에 있는 사찰이다. 654년(태종무열왕 1)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죽림사(竹林寺)라 하였다. 1286년(고려 충렬왕 12)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국사가 1,000여 명의 승려를 모아 불법을 일으키기도 하였다.1839년(조선 헌종 3) 사명대사의 법손(法孫)인 월파선사(月坡禪師)가 사명대사의 고향인 무안면에 그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 있던 표충사(表忠祠)를 이곳으로 옮기고 절 이름도 표충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표충사 청동함은향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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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忠寺靑銅含銀香?

국보 제75호. 표충사에 있는 향로로 고려 19대 명종 7년(1177)에 제작되었다. 1957년에 처음 발견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향로로 주발 모양의 몸채와 둥근 받침의 대좌(臺座)가 연결되어 있다. 높이 27.5cm, 구경 26.1cm이다.

표충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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表忠寺三層石塔

보물 제467호. 통일신라시대의 화강석제 석탑으로 높이 7.7m이다. 표충사의 조사당과 팔상전 앞에 세워져 있다. 9세기 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은 단층이며 면석은 5매로 만들어졌으며,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매석으로 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석탑 양식을 다루고 있으나 단층기단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각부 비례가 적당하여 우수작이지만 초층 옥신이 지나치게 큰 점이 흠이다.

진흥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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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興王陵

사적 제177호.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능묘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보호구역 37,927m2로 경주시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 있는데, 봉분 이외에는 전혀 다른 시설이 없는 평범한 원형 토분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뒤쪽 언덕에는 진흥왕릉을 비롯한 대형 분묘 4기가 상하로 줄지어 있는데, 모두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3년 왕릉 주위에 회랑 보도를 만들어 그 일대의 왕릉을 보호하고 있다.

수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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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露王陵

사적 제73호. 가야시대 김수로왕의 능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있다. 봉분 이외에 아무런 시설도 없는 원형 토분이다. 1580년(선조 13) 영남관찰사 허엽(許曄)이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석단·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긴 능비가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수로왕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다고 전한다. 능의 전면에는 가락루·연신루·회로당 등의 건물이 있다.

수로왕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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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露王妃陵

사적 제74호. 가야시대의 수로왕비의 능이다.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 있다. 인도 야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의 무덤으로, 커다란 원형 토분만 덩그렇게 남아 있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진주태후허씨지릉”이라고 새긴 능비가 서 있다.

쌍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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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磎寺

경남기념물 제21호.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에 있는 절로서, 해인사(海印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33대 성덕왕 22년(723)에 혜조(慧照)가 창건한 것으로 처음에는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중국 혜능(惠能)의 두상(頭像)을 봉안(奉安)하였다는 탑과 최치원(崔致源)이 지은 진감 선사 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가 있다.

쌍계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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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磎寺大雄殿

보물 제500호.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이다. 쌍계사 경내에 있는 건물로 크기와 형식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전체적으로 중앙에 비해 좌우 퇴간(退間)의 너비가 좁고, 기둥 사이의 넓이에 비해 기둥이 높아 산곡간(山谷間)의 형태를 보여준다.

쌍계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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雙磎寺浮屠

보물 제380호. 통일신라시대의 부도이다. 쌍계사 경내에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도로서, 높이는 2.05m이다.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옥개석·상륜이 차례로 얹혀 있는 8각원당형의 승탑이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무겁고 조각 수법이 거친 편이다.

진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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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州城

사적 제118호. 진주의 진주공원 일대와 내성동에 걸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축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때 장렬한 항전이 있었다. 성내에 촉석루가 있다. 1958년 11월 고적으로 지정되었다.

진주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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晉州矗石樓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고려 말의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조선 10대 연산군 10년(1504)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또 6·25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 새로 건축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이충무공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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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忠武公遺蹟地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통영시와 한산도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 통영시 명정동에 있는 충무 충렬사(사적 제236호)를 비롯하여, 통영시 문화동 여황산 언덕에 있는 세병관(보물 제293호)은 병기를 깨끗이 씻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도 이충무공이 군사를 지휘하던 제승당(사적 제113호)은 한산섬 북쪽에 있으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라는 시로 유명한 “수루”가 있다.

충무 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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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武忠烈祠

사적 제236호.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사우(祠宇). 경상남도 통영시 명정동에 있다. 조선시대의 건물로 이충무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셔 두었다.1606년(선조 39) 왕명을 받아 이운룡(李雲龍)이 건립하였고, 1663년(현종 4) 사액(賜額) 되었다. 정조어제기판(正祖御製記板)과 명나라에서 이충무공에게 내린 8가지의 하사품이 보관되어 있고, 정문 밖에는 타루비(墮淚碑) 등이 세워져 있다.

밀양 영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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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陽嶺南樓

보물 제147호.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누각으로 구객사(舊客舍)의 부속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에 다시 지어진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다.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가운데 하나이다.

문익점 면화시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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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益漸棉花始培地

사적 제108호.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다. 1363년(고려 공민왕 12)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 간 귀향살이를 하고 귀국할 때 관리의 눈을 피해 붓뚜껑 속에 목화씨를 숨겨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재배하였다. 1965년 당시 목화씨를 뿌렸던 300여 평의 밭을 사적지로 지정하였으며, 이 마을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삼우당 선생 면화시배 사적지”라고 쓰인 사적비가 있고, 전시관도 건립되었다.

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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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妓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왜군의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진주 촉석루 서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1824년(순조 24)에 관찰사 이지연이 건립했으나 6·25전쟁 때 불타버린 것을 1960년에 재건하였다.

효자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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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子里三層石塔

보물 제397호. 진주시 수곡면 효자리 448. 높이 450cm(화강암). 하층 기단은 일부가 파묻혀 구조가 분명하지 않으나 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 1주(柱)가 있고 갑석 윗면은 경사져 있는데 중앙에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괴임이 있다. 상층 기단 중석은 모두 4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고 우주와 탱주 1주가 조각되었다. 특히 우주와 탱주는 폭이 넓어 중석 전체 폭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갑석(甲石)은 2매의 판석으로 아래에는 부연(附椽)이, 위에는 2단의 괴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딴 돌로,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형이 모각(模刻)되었으며 특히 초층 옥신 양면에는 방광문 내에 창살이 있는 두 짝의 문비(門扉)와 고리가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상당히 두터운 편으로 1·2층은 받침이 4단이며 3층은 3단이다. 처마선은 위아래가 모두 수평을 이루나 네 귀에서 완만하게 솟아 있으며, 낙수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이 석탑은 각 부분의 재료가 두터워 둔중한 느낌을 주며 기단부와 탑신부와의 비례도 조형상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용암사지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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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岩寺沚浮屠

보물 제372호.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219 소재. 높이 193cm(화강암). 이 부도(浮屠)는 파손된 것을 1962년에 원래 위치에 복원하였는데 지대석·중대석·탑신석은 새로 보충하였다.하대석은 각 면에 안상(眼象)을 1구씩 마련하고 그 안에 천부상(天部像)을 부조하였는데, 양감이 있으며 천의의 표현도 생동감이 있다. 하대석의 상면은 경사가 있으며 중앙에 1단의 낮은 괴임이 있다. 중대석은 후보(後補)인데 원래는 운용문(雲龍文)이 있었으나 지금은 우주(隅柱)만을 조각하였다. 상대석은 윗변에 단판의 연화가 돌려져 있으며 중앙에는 3단의 받침이 낮게 각출(刻出)되어 있다. 탑신석 역시 후보인데 각 면에 우주형(隅柱形)과 방곽문(方廓文)이 모각(模刻)되어 있다.옥개석은 얇은 처마 밑에 높은 부연(副緣)이 새겨져 있으며 낙수면은 경사가 완만한데 각 모서리를 내려 뻗은 우주의 끝에 큼직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옥정(屋頂)에는 연화(蓮花)가 돌려져 있으며상륜부에는복발(覆鉢)·앙화(仰花)·수연(水煙)이남아 있다.

단성석조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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丹城石造如來坐像

보물 제371호. 진주시 망경동 산3. 불상 높이 133cm. 불상은 진주(晋州) 금선암 본존(本尊)으로 봉안되어 있다. 본래는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원리 남사의 폐사지에 묻혀 있었던 것을 이 사찰의 주인 박수(朴守)라는 보살이 1957년에 수습하여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다.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나 불상의 무릎과 대좌 윗부분이 약간 파손되었다.나발(螺髮)의 머리는 육계가 없으며 얼굴 상호(相好)는 긴 편이다. 코는 길게 표현해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있지만 입가엔 고졸(古拙)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오른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으며 왼손은 배 앞에 놓아 약기(藥器)를 들고 있다.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法衣)를 걸치고 있는데 옷주름 선에서는 형식화가 심하며 왼쪽 어깨의 거의 끝 부분부터 옷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광배는 2조의 굵은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고 있으며 신광 바깥 테두리 아래 부분에는 무릎을 꿇고 손에 공양물을 들고 있는 공양자상이 양쪽에 1구씩 표현되어 있다.

차륜식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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車輪式土器

보물 제637호. 국립김해가야박물관(임대). 높이 22.5cm, 길이 24.0cm, 바퀴지름 10.2cm. 수레바퀴가 붙은 토기는 가야지역 고분에서 여러 점 발견되었으나 이 토기는 그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이다.고배(高排)의 각 부(脚部)에 해당되는 받침은 이 시대 고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이 벌어진 나팔형인데, 2단으로 된 투창은 긴 직사각형 투창으로 상단과 하단에 어긋나게 뚫고 있다. 받침 위에 중공(中空)의 원통이 반원을 그리며 좌우로 뻗어서 2개의 뿔잔이 한 뿌리에서 좌우로 뻗은 형상이고 뿌리 부근에서 잔과 직각되는 쪽 좌우에 돌기가 있어 여기에 수레바퀴 모양으로 생긴 것이 끼워져 있다. 수레바퀴는 차축(車軸)이 6개이고 따로 만들어 돌기에 꽂아서 돌게 되어 있다. 잔이 마주 대하는 쪽, 곧 대칭되는 위치에 장식이 붙어 있었으나 현재는 한쪽이 부러지고 없다. 남아 있는 장식의 모양은 길게 뻗은 줄기 끝이 갈라지면서 양쪽으로 말려 막 솟아오른 고사리 모양을 하고 있다. 소성(燒成)은 매우 양호하며 회유가 부분적으로 생성(生成)되어 있다.

진주 청곡사 목조 제석천·대범천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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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州靑谷寺木造帝釋天·大梵天倚像

보물 제1232호.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18번지(청곡사). 2구(軀) 목재(적송) 총높이 210cm, 어깨폭 70cm. 제석·대범상은 사천왕상과 더불어 불교에서는 대표적인 호법선신으로 많은 조상예(造像 例)를 남기고 있는데 사천왕상이 위엄을 나타낸 험상을 나타내고 있음에 반하여 이 상(像)의 얼굴부분은 보살상에 가까운 자비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호분으로 흰색을 나타내어 보살상과 구분하고 있으며 보관은 봉황·화염패 등으로 장식하여 입체감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양손도 합장이 아닌 수인(手印)을 결(結)하고 있어 이것 또한 입체감을 나타내려 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의문(依文)도 불화에서의 제석·대범상(帝釋·大梵像)과는 다른 양식을 살필 수 있어 주목된다.조각의 기법은 조선 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양식적 특징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조성된 조상예와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어서 우리나라 제석·대범상의 조각상으로서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중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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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碗口

보물 제858호. 진주시 남성동 171-1(국립진주박물관). 전장 64.5cm, 통장 20.5cm, 약실장 44cm, 구경 23.5cm. 외경 27.1cm(청동).

원래 이 완구는 일명 댕구라고도 하지만 최초에는 화통완구 또는 총통완구라고도 한 유통식(포구에 화약과 발사물을 장전함) 화구의 일종이다. 이는 이미 조선 초 태종 때 최해산(1380∼1443)이 제작하여 시방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가 있고 그 후 세종 즉위년(1418) 8월에는 대마도 경차관 이예(李藝)가 돌아오면서 그곳에서 수철제(水鐵製)화통완구를 가져다 재래의 동제(銅製)완구를 개량하려고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가 동왕 4년(1442) 8월에 이르러 전국 해안에 연대(烟臺)를 증축하고 수철제완구를 보급하는 조치가 이루어졌다.이 중완구는 명문으로 보아 선조 23년(1590) 9월에 함경도 고주포영에서 화포장 이물금(李物金)에 의해 주조되었고 또한 여기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사하면 그 사정(射程)은 400m에 미친다고 하였다.

의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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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문화재 130호. 밀양시 부북면 오예리 315에 있는 함평 이씨의 제숙소(齊宿所). 광해조 때 무과에 올라 호군(護軍)을 지낸 이선지가 모부인의 모하에 의모를 짓고 살던 집인데 집터만 남아 전해온 것을 수차례에 걸쳐 건물을 수축해 오다가 고종 34년(1897)에 증손인 이만헌이 중종(中宗) 의견을 모아 현재와 같이 중수하였다.

어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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魚變堂

지방지정문화재 제108호.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394. 1887년 당시 부산포진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관련 인물은 박기우(朴起羽)이다. 그는 조선 말기의 사람으로 순조 20년 무과 합격, 홍주 안동 영장(洪州安東煐將), 부산포 영종포 첨사(釜山浦永宗浦僉使) 등 내의 요직을 역임했다. 해유문서(解由文書)는 무안면 연상리 어변당에 보관되어 있다.

천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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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眞宮

지방지정문화재 제117호. 밀양시 내일동 40. 영남루 경내에 있다. 이 건물은 이조 효종 6년(1665) 창건된 건물로서 단층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주심포(柱心包)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단군의 진영을 봉안(奉安)하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5일 어천대제, 음력 10월 3일 개천대제를 봉대행하고 있다.

만어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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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魚寺三層石塔

보물 제466호. 밀양시 삼량진읍 용전리. 탑의 형식은 신라형 3층석탑으로 4매석으로 된 단층지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각 옥개석의 낙수면은 경사가 급한 편이나 전각의 반전으로 첨담에서는 평탄해졌다. 이 탑의 조성연대는 고려 명종 10년(1180)이므로 같은 시기에 건립한 것이다.

아미타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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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彌陀如來立像

보물 제998호. 양산시 웅상읍 소주리 171. 아미타여래입상은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미타암의 석굴사원 안에 안치되어 있는데 불신과 광배대좌가 한 장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납발(蠟髮)의 머리에는 육발(肉髮)이 큼직하며 두 귀는 어깨부분까지 길게 늘어졌다. 얼굴은 둥글고 양감(量感)이 있어 자비로운 상호를 나타내고 있다. 신체 역시 양감이 풍부하여 건장하고 둥글게 처리된 어깨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있는 체구를 만들고 있다. 통견의 법의는 전신에 걸쳐 유려한 옷주름을 이루고 있는데 가슴 앞에는 금의를 묶은 띠매듭이 표현되었으며 “U”자형의 옷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렸다. 광배는 주형거신(舟形擧身)으로 안에 두 줄의 굵은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고 그 사이에 좌우대칭으로 꽃무늬를 배치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돌렸다. 연화좌의 대좌에는 안상이 조각되어 있다.이와 같이 불신, 광배, 대좌가 동일석으로 된 예는 감산사 아미타불입상 및 미륵보살입상이 신라시대에 조성된 작품으로 생각된다.

다솔사 보안암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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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率寺普安庵石窟

유형문화재 제39호. 사천시 곤양면 무고리 산43번지에 있으며 다솔사(多率寺)에 딸린 암자이다. 일명 미륵암(彌勒庵)이라고도 했으며 창건년대는 명확하게 전하지 않으나 기록 등으로 미루어 신라 때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현재 석굴 중앙에는 돌을 쪼아 만든 석가모니의 좌상(坐像)이 안치되어 있고, 좌상 뒤 좌우에는 아주 작은 돌을 쪼아 만든 16구(具)의 나한상(羅漢像)이 배치되어 있다.

다솔사 대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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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率寺大陽樓

유형문화재 제83호. 경내 입구 오른편에 웅장한 모습으로 본전과 마주하고 있다. 아래·위층의 높이가 모두 13m에 달하며,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그 육중한 몸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 아래층은 본래 출입문 구실을 해왔으나 누각 왼편에 새로 돌계단이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로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2층은 승려들의 수도장일 뿐 아니라 불교신자들의 집회장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해방 전에는 민족정신 함양의 도장이었을 뿐 아니라 해방 후에는 좌우익의 혼탁한 사회질서를 바로 잡기 위하여 지역사회 청년들의 교육도장이 된 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는 서울어서 피난 온 동여중학교가 이곳으로 옮겨와 학생들의 교실로서 4년간이나 활용된 바 있어 2세 교육에 이바지함이 컸다.

신벽동 지석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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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碧洞支石墓群

기념물 제39호. 사천시 남양 2동 신벽마을 국도 3호선 산쪽으로 약 50m 가량 오르는 논밭 가운데 모두 7기의 지석묘가 북두칠성의 형태로 놓여 있다.

조명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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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明軍塚

기념물 제39호.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번지에 있는 이 군총은 선조 30년(1597) 1월에 일어났던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에 포진하고 있던 왜구를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무덤의 형태는 사방 20칸(36㎡)의 방형분묘로서 흔히 “당병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 “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이 무덤만은 약 400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또 1985년 11월 14일 지방문화재기념물로 <조명군총>이라 명칭하여 보호되고 있다.

각산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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角山山城

문화재자료 제95호. 사천시 대방동 산40번지의 3필지의 삼천포항을 서남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는 산이 각산인데 이 산의 8부능선에 길이 242m를 돌로 쌓은 석성이다. 고려시대에는 삼별초난을 토평하는 데도 활용되었으며 왜구의 침범에는 지역주민들이 이 산성을 의지해서 대응했다.

충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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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翊祠

의령군 의령읍 중동리 남산 밑에 위치한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켰던 홍의장군 곽재우와 그 휘하 장병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의병의 전적도와 유물을 전시한 기념관, 충의각이 있다.충익사 경내 입구에 우뚝 솟은 의병탑은 곽재우 장군과 휘하 17장령의 위훈을 기리고 연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탑의 높이 27m로 가운데 둥근 18개의 백색환은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을 뜻하고 양쪽기둥의 팔자형은 횃불을 상징한다. 기념관에는 곽재우 장군의 전적도 5폭과 보물 제671호로 지정된 장검 등 유물 등이 소장되어 있으며 경내 뜰 안에는 도기념물 제83호 모과나무가 있다. 또한 주변에는 우리 선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군립의령박물관과 남산 정상에는 중동고분군과 아래에 체육공원이 자리잡고 있어 가족과 함께 여가를 즐기거나 각종 모임 장소로서 안성맞춤이다.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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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19호. 1963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되었다. 이 금동불상은 원형의 연화문대좌(蓮花紋臺座) 위에 직립한 자세의 석가여래(釋迦如來) 입상(立像)인데 광배(光背)에 운용문(雲龍紋)이 새겨져 있고, 희귀하게 배면에는 4행 47자의 명문(銘文)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전신 높이 16.2cm, 불상 높이 9.1cm, 광배 높이 12.1cm, 좌대 높이 4.1cm인 금동여래상(金銅如來像)은 흔히 발견된 불상과는 달리 연가 7년(延嘉七年)의 연대까지 뚜렷하게 각자(刻字)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며, 훼손된 부분이 거의 없는 상태로서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보천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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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泉寺址三層石塔

제373호. 경남 의령군 의령읍 하리 797의 1. 이 3층석탑은 원래 보천사의 법당으로 추측되는 위치의 전면에 석등(石燈)대좌(臺座)와 함께 서 있으며, 이중의 기단(基壇) 위에 삼층 방형(方形)탑신을 얹은 전형적인 신라시대양식을 취하고 있으나 제작연대는 고려 초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층층이 균형 있는 체감율(遞減率)을 갖고 있으며 옥개석의 아름다운 곡선과 수직으로 끊어낸 처마의 전각 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지대석의 네 귀에 돌기둥을 세워 기단부가 물러나지 않도록 조처했으며, 기단의 면적이나 갑석의 턱과 홈에 의한 견실한 결구 등은 아주 용이주도한 축조물임을 보여준다. 탑의 전신 높이는 4.57m이다.

석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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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氷庫

보물 제310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건조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믿을 만한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고, 다만 조선조 시대에 중수하였다고만 보는 빙고이다. 이는 구조양식의 측면과 장빙의 풍이 그 당시에 제도화되어 성행하였던 점을 미루어 보아서이다.이 빙고는 봉토도 거의 완전하며, 외부의 모양은 마치 거대한 고분처럼 보이고 뒤에 흐르는 개천에 직각되게 남북으로 길게 구축되었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시설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지르며 쌓아 올려서 천장을 구성하였으며 사이의 천장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설치되었다. 벽은 잡석으로 쌓았으나 평평한 방벽이 되게 표면을 치석하였다.이러한 구조양식은 석빙고의 전형인 경주나 안동의 석빙고와 동일한데 규모에 있어 이 석빙고가 약간 작다.

관룡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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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龍寺大雄殿

보물 제212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 이 건물은 1965년 해체·보수 공사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조선 태종 원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에 중창하였고, 그 후 영조 25년에 중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관룡사 사적기에는 숙종 30년(1704) 가을의 대뇌우로 금당 부도가 유실되고 주승 20여 명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후 38년(1712)에 이 대웅전과 기타 당옥은 재건한 것으로 되어 있어 상량문과는 일치되지 않는 점이 있으나, 건물에 관한 한 상량문을 더 중시해야 옳을 것 같다.팔작지붕의 다포집계 건물로 비교적 조선시대 중기 이전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 내부에는 뒤쪽에 치우쳐 고주(高柱) 2개를 세워 그 위로 대들보가 건너가게 했다. 고주(高柱)를 의지하여 불단을 설치했고 그 상부에 닷집을 달았으며, 천장은 우물 천장이지만 중앙 부분을 주위보다 한층 높게 한 것이 특이하다.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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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龍寺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295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0-2. 석굴암의 본존과 똑같은 양식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좌상(坐像)은, 나발(螺髮)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직하며 얼굴은 4각형이지만 풍부하다. 목의 삼도(三道)는 가슴까지 내려와서 형식화(形式化)를 지향하고 있다. 결가부좌한 모습에 통견의 법의는 몸에 밀착된 것이며, 몸은 통일 초기처럼 당당하지는 못하나 통통하고 안정감을 주며, 특히 하체의 의문은 형식화되고 있고 광배는 결실되어 있다. 대좌의 상대는 반구형이며, 판내에 화문이 있는 종변 연화문이 앙련으로 조각되고 중대석은 8각이며 각 모서리에 주형이 있다. 이 불상 바로 앞에 대하석만 옛 모양 그대로 완전히 남아 있는 석등이 있는데, 등은 없다.

창녕 술정리 동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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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寧述亭里東三層石塔

국보 제34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다. 이 탑은 원래 노변에 있었고 민가의 담 밑으로 하층기단의 일부가 들어가 있었으나, 1965년 주위에 있던 민가들을 철거하여 정화보존조치를 취하였고 탑도 함께 해체해서 수리하였다. 이때 3층 탑신상면(塔身上面)의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에서 청동향로형용기(靑銅香爐形容器), 황색(黃色)유리제(製), 사리병(舍利甁), 사리(舍利) 7립(粒), 향편(香片), 유리소주(小珠) 등의 사리장치(舍利裝置)가 발견되었다.본탑(本塔)을 동탑이라 함은 한 사찰내에 쌍탑이 건립된 때문이 아니라 술정리에 2기(基)의 석탑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며 서3층석탑은 본탑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있다.이중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기단은 이중 4개의 면석과 4개의 갑석으로 조립되었고, 상하기단의 면석에는 모두 탱주 2주식이 각출되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1석이며 옥개석 받침은 각 층 5단이고 상륜부는 전실되었다.세부양식에서 신라석탑의 통식을 따르고 작풍에 있어 장중명쾌한 기풍이 있는 석탑이다.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각부의 수법도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불국사 3층석탑과 비견되는 작품이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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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국보 제33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삼국시대(진흥왕 22년, 561).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령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이 비는 자연암석을 이용하여 개석이나 대석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기 비문의 통식을 갖추고 있으며 일면을 간 다음 외연에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으로 줄을 돌렸는데 우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아 말행은 3자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우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다.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연시, 사적, 수가인물의 3부분으로 되어 있고 인물열기는 속부·인명·직관·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며 자경 4cm이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이 불분명한 점이 있으나 한반도에 전하는 비석으로는 최고의 것이다.

영산 만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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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山-橋

보물 제564호.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434. 교반에 세워진 남천석교비에 의해서 1780년 석수 백진기가 축조하였고, 1892년 현감 신관조가 석수 김내경을 시켜서 중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암반 위에 대석을 정치하고 편단석을 올려 반원의 홍아를 구축하였다. 홍아재료는 화강암 각재이며, 전후 양측의 다리 벽은 자연잡석을 쌓아 메꾸었으나 홍아 머리돌 위에는 비교적 규격이 큰 정형의 각석을 배열하였다. 홍아 석축 위는 상승각도가 완만한 흙으로 되어 있고 난적석벽(亂積石壁)은 더욱 길게 전후로 연장되어 양 안상(岸上)의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진감선사 대공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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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鑑禪師大空塔碑

국보 제47호.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7.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썼으며 승, 빈영이 새겼다.이 탑비는 고운 최치원의 사산비의 하나로 유명하다. 진감선사는 애장왕 5년(804)에 입당, 흥덕왕 5년(830)에 귀국, 쌍계사를 창건하고 역대 왕의 존경을 받다가 문성왕 12년(85) 쌍계사에서 77세로 시적하였다.비의 높이는 3m 63cm, 탑신의 높이는 2m 2cm, 혹은 1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현재 비신의 우측 상부에 크게 흠락된 부분이 있고 또 균열이 상당히 심하다.중앙에 높직한 비좌를 마련했는데 4면에는 운문이 있고 상면에는 비신에 맞게 구멍이 뚫어져 있다. 귀두는 짧고 추상적인 동물의 머리로 표현되어 신라 후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수는 양측을 비스듬히 자른 오각형으로 4면에 쟁주하는 용이 있고 전면 중앙에 방형으로 깊이 판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비문의 자경은 2.3cm, 자수는 2,423자이다.

대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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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源寺

산청군 삼장면 대원리에 있는 절. 진흥왕 9년(548)에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平原寺)라 하였다. 그 뒤 1천여 년 동안 폐사되었던 것을 숙종 11년(1685)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터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이라 개칭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 제일의 강당이 되었다. 고종 27년(1890)년에 혜흔(慧?)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중건하였다. 서쪽에는 조사영당(祖師影堂)을 보수,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했다.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려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12등 184칸의 전의 건물을 지었다.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산왕각,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부근에는 선비들이 수학했다는 거연정(거연정)과 3층석탑이 있다.

단속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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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俗寺址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마을 한가운데 단속사터가 있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동·서 3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단속사에는 신충이 그린 경덕왕 초상화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없다. 또한 단속사에는 두 개의 탑비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법랑(法瑯)에 이어 선종을 익힌 명필 탄연(坦然)의 비인데, 부서진 것을 수습하여 동국대 박물관과 숙명여대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