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사회 I·문화재/문 화 재/중요 문화재/강원도

장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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莊陵 사적 제196호. 조선 제6대왕 단종의 능.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다. 1457년(세조 3)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가 중심이 되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어 영월에서 사사(賜死)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매장했다. 1698년 묘호를 단종이라 하고 능을 장릉이라 했다. 능의 양식은 왕명에 따라 간단하게 조성되었다. 봉분 앞에 상석(床石)과 4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이 있으며, 망주석(望柱石) 2개, 문석(文石) 2개, 석수(石獸) 여러 개가 있다.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을 설치하였다.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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倒彼岸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국보 제63호. 도피안사에 있는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신라 48대 경문왕 5년(865)에 제작되었으며 머리에는 육계(肉?)가 있으나 뚜렷하지 않고 불상의 얼굴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과 같다. 높고 안정된 이중 대좌(二重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상의 높이는 91cm이다.

정암사 수마노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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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巖寺水瑪瑙塔 보물 제410호. 고려시대의 칠층석탑.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의 정암사 적멸보궁(寂滅寶宮) 뒤쪽에 있다. 높이는 9m이다. 지대석은 모를 죽인 화강암재로 6단을 쌓아 마련하고, 탑신을 받치기 위한 1단의 받침을 모전석(模塼石)으로 만들고 그 위에 너비 1.78m, 높이1.03m인 사각형 옥신(屋身)을 모전석으로 15단을 쌓아 만들었다.

의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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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湘臺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동해안에 있는 정자.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하였던 곳으로, 1925년 8각형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명명하였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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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田寺址三層石塔 국보 제122호.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에 있는 진전사터에 세워진 석탑. 신라시대 것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때의 탑과 같은 모양으로 탑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탑의 몸돌에 조각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오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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烏竹軒 보물 제165호. 강원도 강릉에 있는 율곡(栗谷)의 생가. 조선시대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희귀한 예로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청순하고 소박한 팔작집이다. 평면구조는 왼쪽으로 향한 2칸이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이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昌枋)만이 돌려지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고 초공(初工) 하나로 장설(長舌)과 주심(柱心)도리를 받도록 했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華盤)이 한 개 있을 뿐이다. 추녀도 너무 들리지 않고 원만하다. 뒤뜰에 까만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오죽헌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경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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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浦臺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 관동팔경의 하나. 강원도 강릉시에서 동북쪽으로 7km 지점, 언덕 위에 있는 누대(樓臺). 고려 27대 충숙왕 13년(1326)에 박숙(朴淑)이 창건하고, 조선 제11대 중종 3년(1508)에 한급(韓汲)이 옮겨 세웠다. 경포호수와 솔밭, 동해의 청파에 떠도는 백조, 추석 달맞이 등이 매우 아름답다.

낙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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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産寺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오봉산에 있는 절.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 신라 30대 문무왕 11년(671)에 의상(義湘)이 건립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3년에 다시 복구한 것으로, 절 주위에는 칠층탑과, 공중에서 보석을 얻어 넣어 두었다는 공중 사리탑(舍利塔) 및 그 비(碑)가 있다.

낙산사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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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産寺七層石塔 보물 제499호. 강원도 낙산사에 있는 조선 7대 세조 13년(1467)에 건립된 석탑. 조선 때에는 불교의 탄압으로 석탑의 건립이 거의 없었으므로 당시의 석탑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특히 금동제(金銅製)의 상륜(相輪)은 당시 건축 양식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전체 높이 6.2m, 상륜(相輪) 높이 1.41m.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상륜은 청동제이다.

낙산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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洛産寺銅鐘 보물 제479호. 낙산사에 있다. 1469년(예종 1)에 구리로 만든 종으로, 높이 158cm, 구경(口徑) 98cm, 보살상 높이 36.8cm. 낙산사 앞뜰 한구석에 마련한 종각에 있다. 조각 장식이 뚜렷하고 모양이 아름다운 조선시대의 걸작에 속한다.

강릉 객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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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客舍門 국보 제51호.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에 있는 문(門)의 하나. 단층의 맞배지붕으로 3칸 2호(戶)의 장중한 형태를 갖춘 우수한 팔각문(八脚門)이다. 건립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수법(手法)으로 보아서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한국 목조 건축사상 뛰어난 구조와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다.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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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에 위치한 절.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에 자장(慈蔣)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암자를 지은 것이 시초이다. 현재는 고려 때의 팔각(八角) 구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石造菩薩坐像)이 남아 있을 뿐이다.

월정사 석조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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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寺石造菩薩坐像 국보 제139호. 고려시대의 석조보살좌상. 높이 1.8m. 강릉에서 출토된 한송사지석조보살좌상, 신복사지보살좌상과 더불어 특이하고 아름다운 불상 조각의 형식을 띠고 있다. 월정사 경내의 팔각구층석탑을 향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월정사 팔각구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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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精寺八角九層塔 국보 제48호.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五臺山) 기슭의 월정사에 있으며 고려 중기 다층석탑의 대표적인 예이다. 전체 높이 15.15m. 하성기단의 갑석에는 연화문이 새겨지고 옥개석(屋蓋石)에는 층급 받침 대신 백제식 석탑에서 볼 수 있는 각(角)과 원(圓)의 2단받침을 쓴 것이 특이하다. 탑의 남쪽 면 앞에는 북쪽을 향해 앉은 보살석상이 있는데, 이러한 유례는 강릉의 신복사지 삼층석탑(神福寺址三層石塔)에서도 볼 수 있다.

상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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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월정사(月精寺)의 말사(末寺).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23년(724)에 건립되었다. 신라시대의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동종(銅鐘)과 대리석 탑이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광복 후에 개축한 것이다.

상원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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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銅鐘 국보 제36호. 상원사에 있는 구리종. 725년에 주조되었으며, 높이는 1.7m이다. 천판의 명문에 의하면 휴도리(休道里)라는 귀부인이 기증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무늬대[紋樣帶]는 모두 당초문과 반원형으로 구획지은 속에 천인상으로서 장식되었고, 종신에는 당초문 띠를 바깥에 두른 연화문 당좌(撞座)와 두 병좌주악천인상(竝座奏樂天人象)을 두 군데 배치하고 있다. 전체의 모습이나 무늬의 수법, 특히 바람에 날리는 천의자락의 선 등이 봉덕사종에 비해 부드럽고 단아하며, 여러 점에서 현존하는 신라종의 백미(白眉)라고 하겠다.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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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院寺木造文殊童子坐像 국보 제221호. 상원사에 있는 조선 초기의 문수동자상. 높이 98cm. 나무의 질감을 최대한 살려 조각한 것으로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세조의 쾌유를 비는 뜻에서 새긴 기원문이 1984년 7월에 발견되었다.

죽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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竹書樓 보물 제213호.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 강원도 삼척시 성내리에 있는 누각. 고려 25대 충렬왕 1년(1275) 이승휴(李承休)가 창건하였고, 조선 3대 태종 3년(1403) 부사(府使) 김효손(金孝孫)이 중수하였다. 누각 안에 이율곡의 시와 당대 명인들의 편액이 걸려 있다. 자연석 위에 길이가 서로 다른 17개의 기둥을 세워 지은 정자로 관동팔경의 정자 중 가장 크다.

너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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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민속자료 제33호.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있다. 산속에 사는 화전민들이 나무 껍질이나 판자로 지붕을 이은 집을 너와집이라 한다. 원래 함경도 산촌에서 발달한 가옥 형태로, 나무를 넓게 쪼개어 지붕을 만든 너와집뿐만 아니라 나무 껍질로 지붕을 만든 굴피집도 보존되고 있다.

춘천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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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川七層石塔 보물 제77호. 춘천시 소양로 2가 162-2. 이 탑이 속해있던 사찰이나 탑건립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자세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 인조임금 때(1623~1649) 충원현감(忠原縣監)을 지냈던 유정립(柳鼎立)이 춘천으로 낙향하여 이 석탑 근처에 집터를 닦다가 충원사(忠圓寺)라는 글씨가 새겨진 물건(佛器)를 발견하였다는 기록으로 일명 “충원사 칠층석탑”이라고도 불리운다.이 탑은 다층탑으로 조립된 석재의 수가 적고, 상대갑석과 일층 옥신석 사이에 위로 향한 연꽃잎(伏蓮)을 새긴 또 하나의 부재(別石)를 넣어 만든 특징적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탑으로 보인다.현재 높이 6.38m의 화강암 석탑으로 탑의 부재중 상륜부(相輪部)를 제외한 부재는 모두 남아 있으나 화재로 인해 옥개석(지붕돌)이 훼손되어 있다.

청평사 회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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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平寺回轉門 보물 제164호. 춘천시 북산면 청평 1리 675 소재. 청평사는 고려 광종대인 973년에 백암선원(白岩禪院)으로 창건된 유서 깊은 절이다. 사찰에는 보통 상징적으로 3개의 문이 있는데 절 입구의 일주문(一柱門)과 중심부에 사천왕상을 모신 천왕문(天王門), 그리고 뒷면에 해탈문(解脫門)이 있다. 이 회전문은 사찰의 중문으로 사천왕문에 해당된다.맞배지붕 삼량가구로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중앙의 한 칸은 넓게 잡아 통로로 사용토록 하고 상부에 홍살문처럼 살대를 배열하여 문으로서의 표시를 하고 있다. 또 좌우는 칸을 좁혀 전면과 바깥 측면에 벽을 친 후 마루를 깔았는데 이곳에 천왕상을 안치했던 것으로 보인다.이 건물은 기둥 위에만 공구를 배치한 주심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새 날개모양의 부재인 익공(翼工)을 설치하였다. 문이 움직이거나 회전하는 장치가 없는데도 회전문이란 독특한 이름이 붙여진 것은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위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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威鳳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호. 춘천시 중앙로 1가 강원도청 앞. 이 문은 조선 인조 24년(1646)에 춘천부사 엄황(嚴惶)이 지었던 문소각(聞韶閣)의 내부 담장 출입문(內三門)이다. 그 후 고종 27년(1646)에 유수(留守) 민두호(閔斗鎬)가 왕명으로 문소각을 확장하여 조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임금의 피난지로 이궁(離宮)으로 고쳐 지었으나 임금이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1619년 문소각에 화재가 발행하여 이 문과 문루(門樓)였던 조양루만 남고 모두 불타버렸다. 이때 이 문은 현재의 도청 뒤편에 이전되어 문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19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위치를 옮겼다.

조양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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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陽樓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호. 춘천시 우두동 산 5(우두산). 이 건물은 조선 인조 24년(1646) 춘천부사 엄황(嚴愰)이 건립했던 문소각(聞韶閣)의 문루(門樓)였다. 그 후 문소각은 1916년 화재로 불타버렸으나 조양루는 순종 2년(1908)에 지금의 장소인 우두산으로 이전되어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문루는 성문 또는 지방관청의 외부 울타리에 출입자를 통제하고자 세운 건물이다. 팔작지붕 익공계 양식을 가진 겹처마 중층건물(門樓)로, 아래 칸은 출입용이며 위층은 감시와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이다.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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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보물 제78호.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고려의 고승 원광국사(930~1018)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서 대학자인 최충이 비문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써서 현종 16년(1025)에 세웠다. 거돈사지에는 원공국사의 부도(보물 제190호)인 승묘탑도 있었으나 현재는 경복궁 안에 옮겨졌다.귀부의 거북머리가 용머리처럼 변화하였는데 양쪽 귀 뒤가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되어 있다. 귀갑문 안에는 사자와 연꽃무늬가 교대로 장식되어 있다. 비 머리인 이수에는 구름 위에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싸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높이가 499.7cm, 비신의 폭은 123.8cm이며 고려 초 조각예술의 높은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거돈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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居頓寺三層石塔 보물 제750호.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9세기 신라석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탑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는 층급 받침이 5단으로 귀 끝이 약간 치켜들려 있다. 탑꼭대기의 상륜부에는 노반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 3층 정형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높이는 5.44m이다.

흥법사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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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法寺眞空大師塔碑龜趺-?首 보물 제463호.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진공대사의 탑비는 신라말 고승인 진공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어 태조 23년(940)에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비이다. 비신은 경복궁에 옮겨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 비에 따른 부도도 1931년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귀부는 용두화한 거북머리에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네 발로 대석을 힘있게 딛고 있다. 이수는 진공대사란 전자글씨가 새겨 있고, 구름문양 속에 생등하는 용이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조각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흥법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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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法寺址三層石塔 보물 제464호.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밑 기단에는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이 조각되었다. 기단에 비하여 탑신이 빈약하게 작아졌으며, 옥개석의 낙수면 경사가 급하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으며 탑 높이는 3.69m이다.

신복사지 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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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福寺址石佛坐像 보물 제84호. 강릉시 내곡동 403 소재. 갑석높이 22cm, 불상 높이 121cm, 대좌높이 22cm. 탑을 향해서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으로 고려 초기인, 즉 10세기 후반기에 제작된 것이다. 보살상은 탑을 향해서 왼쪽 무릎을 세우고 공양하는 자세로 복판앙련(複瓣仰蓮)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다. 원통형의 높은 보관(寶冠) 위에 8각의 천개(天蓋)를 씌웠다. 부드럽고 복스런 얼굴에 비대하고 풍만한 체구를 지녔고, 규칙적인 간격의 옷주름과 단순해진 장신구 등에서 신라적인 요소가 사라지고 고려 초기 즉 10세기 후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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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雲亭 보물 제183호. 강릉시 운정동 소재. 조선 상류주택의 별당건축에 속하는 목조건물로 중종(中宗) 25년(1530)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었다고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남향을 하고 세웠으며 내부의 우측 2칸은 대청마루로 하고 나머지 좌측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대청 앞면에는 각각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아 전면 전체를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고, 측면과 후면은 벽을 쳐서 두짝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주위에는 쪽마루를 돌렸으며 대청의 천장은 서까래가 그대로 나타나는 연등 천장이며 지붕의 합각 밑부분은 우물천장으로 만들어 윗부분을 가리고 있다. 내부는 중간에 미닫이를 두고 두 방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해운정(海雲亭)의 현판은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며 기문은 권진응(權震應)이 지었고 율곡을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시문판(時文板)을 보존하고 있다.

신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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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興寺 문화재자료 제7호. 속초시 설악동 170번지. 신흥사는 652년(진덕여왕 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향성사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향성사란 명칭은 “중향성불토국”이란 뜻으로 지금의 자리에서 동방 약 1km 지점에 세웠으나 701년(효소왕 10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의상조사가 지금의 신흥사 북방 1.5km 지점인 현 내원암 자리에 선정사를 중건하여 불법을 전하다가 인조 20년(1642)에 화재로 소실되었다.인조 22년(1644)에 고승 영서, 연옥, 혜원 세 스님이 현 위치에 중건하고 신흥사라 명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래 신흥사는 1912년부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건봉사가 38선 이북지역으로써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자 1971년 신흥사가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승격되었다.보제루(유형문화재 제104호), 극락보전(유형문화재 제14호), 1799년부터 1827년 사이의 역대 신흥사 고승들의 부도가 모여 있는 부도군(문화재자료 제115호) 등이 있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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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城寺址三層石塔 보물 제433호. 속초시 설악동 24-2 소재. 향성사 옛터에 남아 있는 이 탑은 2중기단의 석탑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4.33m, 지대석 폭 3.6m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탑은 후박하고 온아한 품격과 옥개 등에도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고 거의 직선에 가깝게 단조로운 처리로 통일신라 석탑의 맛을 계승하고 있다. 1966년 해체·보수할 당시 3층 옥신 상면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고, 동판이 덮여 있어 사리를 모셨던 것이 틀림없었으나 내부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삼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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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和寺 동해시에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율사가 절을 건립하고 흑연대라 하였고, 그 후 범일국사가 재건하여 삼공암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 약사전만 남았었는데 현종 1년(1660)에 중건되었다. 순조 23년(1823)과 고종 43년(1906), 두 차례 재난에 의해 소진됐던 것을 재건축했다. 경내에는 삼층석탑(지정문화재 제713호)과 철불(보물 제1292호)이 있다.

해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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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巖亭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3호. 단층 8작지붕 초익공 양식. 정면 3칸, 측면 2칸. 동해시 북평동 8통 2반. 고려 공민왕 10년(1361) 삼척 심씨의 시조인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가 생활할 때 건립한 것으로 후학 양성과 풍월로 여생을 보낸 곳이다. 그 후 화재로 타버렸다가 조선 중종 25년에 어촌 심언광이 중건하고 정조 18년에 중수하였다.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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烽燧臺 강원도 기념물 제13호. 동해시 대진동 산 28 소재. 본래 이름은 어달산봉수로, 옛 우계현의 남쪽 30리인 어달산 정상에 직경 9m, 높이 2m의 돌로 둥글게 쌓은 봉돈의 옛터가 남아 있다. 고려시대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하는 통신시설이나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공양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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恭讓王陵 강원도 기념물 제71호. 삼척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제34대, 재위기간 1389~1392)의 능묘이다. 공양왕은 왕조의 몰락과 함께 폐위되어 왕자 석(奭), 우(瑀)와 함께 원주와 간성을 거쳐 삼척에서 조선조 태조 3년(1394)에 교살되었다고 전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공양왕릉이 두 군데 있는데 삼척의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남아 있다. 경기도에 있는 공양왕릉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삼척의 공양왕릉은 민간에 오랫동안 구전되어 왔다.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공양왕릉은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옆은 왕자, 나머지는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무덤이라고 전한다.

준경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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濬慶墓 강원도 기념물 제43호. 삼척시에 있다. 조선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의 아버지인 양무장군의 묘이다. 고종 광무 3년(1899)에 묘소를 수축하고 제각과 비각을 건축하였다.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으로 되어 있어 원시림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산자수려한 곳이다. 이 곳의 낙락장송인 황장목들은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쓰였다고 한다.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으로 양친을 안장한 뒤, 5대에 이르러 조선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에서 4㎞ 떨어진 곳에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인 영경묘(강원도 기념물 제43호)가 있다.

이승휴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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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休遺墟址 강원도 기념물 제60호. 삼척시의 천은사 사적기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학자인 이승휴가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이 절 인근 지역인 두타산 귀동으로 돌아와 용안당에 머물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다 한다. 제왕운기 서문에 “두타거사 신 이승휴”라 기록되어 있고 용안당을 후에 간장사라 이름을 고쳤는데 이것이 현 천은사의 전신 사찰인 점으로 미루어 이 지역이 이승휴와 관련된 유허지임을 알 수 있다.

삼척 초당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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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陟草堂洞窟 천연기념물 제226호. 삼척시에 있는 총연장 70km로 추정되는 수직동굴로서 풍촌 석회암층에 형성된 동양 최대 규모의 동굴로 많은 지하수가 소한천 입구로 흘러나온다. 이 동굴의 특징은 3층 동굴로서 하층이 가장 길며, 큰 광장이 여러 곳에 형성되어 있고, 동굴 바닥 곳곳에 연못이 있으며 피압수가 마치 분수대 모양으로 여기저기서 솟아올라 아름다운 광경을 자아낸다. 동굴 내부에는 대규모의 종유석상이 발달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는 물김, 종딱정벌레, 장님굴새우, 화석곤충 등 휘귀한 특수 생물이 서식하고 있으며, 국내 최초의 작은 석화가 발견되었던 곳이다.

태백산 천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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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山天祭壇 중요민속자료 제228호. 태백시 소도동 산 8번지. 편마암으로 축조된 장방총 석단으로 높이는 2m, 둘레 20m이다. 단의 남쪽에는 제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매년 개천절에 제사를 지내는 천왕단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삼엽충화석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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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葉蟲化石群落地 천연기념물 제57호. 태백시. 규모 475㎡. 4억 2천만년 전의 고생대 초엽 캄브리아기 말엽부터 오르드비스기 사이에 생존했던 절족동물(갑각류)에 속한 동물인 삼엽충화석 군락지이다. 이 화석은 중국의 동남부지역 남·북아메리카, 유럽 기타 지역에서 나타나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이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삼엽충화석은 5속 15종으로 분류되며 1cm 이하에서 22cm에 이르는 다양한 크기의 화석이 있어 지질시대 결정과 화석생물 특성 등 학술연구 자료로 중요하다.

용연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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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淵洞窟 강원도 지방기념물 제39호. 태백시 화전동 산 47-1 소재. 화전동의 용소골 산등성에 자리한다.약 1억 5천만년에서 3억년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하는 석화동굴이다. 동굴 속에는 각종 석순과 종유석이 즐비하고 특히 동굴 중간에 폭과 높이가 약 30m, 길이 약 150m 정도 되는 광장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1966년 4월 7일 한·일 합동 동굴조사 때 동양에서 처음으로 초동굴성갑충, 긴다리장님좀딱정벌레,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리는 옛새우와 장님톡톡이 등 6종의 생물이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태백산 석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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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白山石- 민속자료 제4호. 소도동 산 192 소재. 태백산 천제단의 천제신앙과 관련하여 태백산신의 수호신으로 태백산으로 올라가는 길목 양쪽에 위치하여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졌다. 대개 나무로 깎아 만든 장승을 마을입구나 신성지역에 세워 표시하는데 비해 돌로 만든 것이 특이하다. 길을 사이에 두고 왼쪽의 것이 천하대장군이고 오른쪽의 것이 지하여장군이다.

중금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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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三層石塔 유형문화재 제19호. 횡성군 갑천 중금리 484번지. 갑천면 중금리에서 탑둔지로 불리는 곳의 밭 가운데 동서로 약 8m의 거리를 두고 삼층석탑 2기가 서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밝힐 수 없으나 기단면석의 팔부중상과 옥개석 등 각 부분의 조각 수법과 와편들로 미루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며 횡성댐 수몰로 인해 망향의 동산으로 이전된다.

상동리 석불좌상·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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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洞里石佛坐像·三層石塔유형문화재 제20호. 21호. 횡성군 상동 495-1. 석불좌상은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불상이다. 뚜렷하게 솟은 육계, 촘촘한 나발의 머리칼,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 등은 신라 전성기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또한 당당한 가슴과 잘룩한 허리, 통견한 불의의 유려한 옷주름 등은 이상적 사실미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대좌는 8각연화좌인데 하대는 묻혀 있고, 상대는 앙련을 새겼으며, 중대의 8각간선에는 안상을 새긴 전형적인 9세기 불상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석탑은 기단부가 땅속에 묻혀 있는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인데, 기단부는 1탱주가 새겨진 면석의 일부와 갑석만 보일 뿐이어서 불확실하지만 당시의 보편적인 예로 보아 이중기단으로 생각된다. 사분원과 각형받침 위에 있는 삼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장중한 편인데 큼직하고 높은 1층탑신에 비해 급격히 줄어든 2층 탑신과 듬직하고 원만한 옥개석 등에서 신라 하대 석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읍하리 석불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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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石佛坐像 유형문화재 제22호. 횡성읍 읍하리 58-1 소재.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원래는 공근면 상동리(성덕사지로 추정)에 있던 것인데 일제 시대 때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좌상은 52.5cm 높이의 기단 위에 놓여 있으며 광배에는 보기드문 연화무늬와 2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풍수원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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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堂 유형문화재 제69호.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097 소재. 풍수원 성당은 한국인 신부가 지은 한국 최초의 성당이고,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1907년 신자들의 손에 의해 직접 지어진 본 성당은 9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재하며, 1920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성채현양대회 때면 전국에서 1,500여 명이 넘는 신도들이 찾아온다.

심곡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및 복장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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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木造阿彌陀三尊佛坐像-伏藏遺物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양구군 양구읍 송청리 산 11번지 소재. 조선 숙종 42년(1716)에 제작된 문화재. 조선시대 후기 불교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정확한 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복장발원문을 동반하고 있어 우리나라 불상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며, 본존불뿐만 아니라 동시에 조성된 대세지·관세음보살을 협시보살로 함께 구비하고 있다.

갑둔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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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三層石塔 인제군 남면 갑둔리 598번지 소재. 탑의 건립 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높이는 2층 옥개와 3층 탑신을 제외하고 2.18m로서 소실된 부분을 복원하더라도 약 2.5m 규모를 넘지 못한다.이러한 규모는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삼층석탑에 비하여 작은 규모에 해당하는 것이다. 특히 기단부에서 하층 기단의 간략화, 양식화와 상류기단 중석의 높이에 비한 폭의 외소함 등은 전형적인 석탑 양식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계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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寒溪寺址 강원도 기념물 제50호. 인제군 북면 한계리 90-1~4번지에 위치하였으며 인제군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한계사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으나 수차에 걸쳐 큰 화재를 입어 북면 용대2리 지금의 백담사로 자리를 옮겨가고 남은 터가 한계사지이다. 1984년 강원대학교 조사반에 의해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도자기, 토제품, 석제품, 금속제품이 다수 발견되어 강원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석탑과 돌사자상이 남아 있다.

청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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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澗亭 유형문화재 제32호. 고성군 사성면 청간리 81번지 소재.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미상. 산록에 위치하여 성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청간천과 만경청파가 넘실거리는 기암절벽 위에 팔각지붕의 중층누정으로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관동팔경 중 수일경으로 손꼽힌다. 조선조 중종 15년(1502)에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정자의 건립은 그 이전으로 추측된다. 1884년 갑신정변에 소실되었다가 1928년 재건하였고, 1980년 정자를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청간정의 현판은 이조 현종 때 우암 송시열이 좌상으로 재직시 이곳에 들러 친필로 썼고, 그 후 1953년 고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현판이 현재까지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