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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형극의 연희본〔개설〕
편집韓國人形劇-演戱本〔槪說〕1930년대에 이 방면의 선학(先學) 김재철(金在喆)에 의하여 민속인형극에 대한 최초의 논고가 그의 저서 <조선 연극사(朝鮮演劇史)>에서 다루어졌다. 또한 이 책의 부록으로 <조선인형극 꼭두각시극 각본>이 발표된 것이 꼭두각시놀음의 연희본으로는 최초의 것이다.
그 후 이 놀이가 쇠퇴 일로에 있었던 탓도 있지만 그 후의 새로운 채록본으로는 <노득필(盧得弼) 구술본(口述本)>과 <남형우·양도일 구술본>밖에 발굴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의 채록 연희본들은 8막(幕) 또는 10막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점은 지금이라도 이 놀이가 갖는 독자적 극형식을 감안한 새로운 분석이 내려져야 함을 의미한다.
선학들에 의하여 처음 채록될 당시 어떠한 근거와 경위에 의하여 이러한 결과로 되었는지, 구술자의 증언이나 채록 경위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현재 생존한 구술자들의 구술본(口述本)이나 그 전의 구술본이 내용상으로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전통극의 채록 보존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극'의 극형식상의 독자성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통극을 서구극의 상식적 골격 위에 수용·편입하는 식의 성급한 작업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예는 비단 '덜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초기의 민속극 채록과정에 있어서 등장인물이나 줄거리가 다소 달라지면 그대로 서구극 개념의 막(幕)으로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었다. 끝으로 부언하는 것은 앞으로 철저한 조사를 벌인다면 새로운 연희본의 채록이 가능할 것이라는 점이다. 덜미를 전문적으로 놀아온 남사당패 외에도 일정한 거주지를 가졌던 광대(廣大)나 걸립패(乞粒牌)·산대도감패(山臺都監牌) 또는 지방민 중의 비전문적인 인형극 조종자들에 의하여 덜미의 연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상수 채록본의 구술자 노득필은 남사당패가 아닌 위의 4자 중 하나가 아닌가 한다.
또 다른 예로는 최선묵(崔善默, 1973년 현재 76세)의 증언인데, 그는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이다. 20세를 전후하여 황해도 해주에서 대소 명절이나 초청에 의하여 놀았던 덜미의 조종자로 홍성모(洪性模)·양만고(梁萬高)·오세인(吳世仁) 등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1945년 8·15광복 직후 광복기념으로 해주에서 연희한 바 있다고 전한다.
걸립패 출신의 덜미 조종자로는 현 덜미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는 송창선의 형인 송대선(宋大善)이 있으나 고령으로 직접 연희는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도 채록 발굴작업을 계속한다면 새로운 연희본이 나올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沈 雨 晟>
덜미(꼭두각시놀음) 의 채록본
편집-採錄本 다음에 지금까지의 덜미 채록본을 발표 순서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⑴ 김재철(金在喆) 채록본-전광식(全光植)·박영하(朴永夏) 구술(<조선연극사> 所收). ⑵ 최상수(崔常壽) 채록본 ①-노득필(盧得弼) 구술(<민속학보> 2집 所收). ⑶ 최상수(崔常壽) 채록본 ②-남운용(본명 南亨祐) 구술(<민속학보> 2집 所收). ⑷ 박헌봉(朴憲鳳)·이두현(李杜鉉) 채록본-남운용(본명 南亨祐) 구술(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所收). ⑸ 심우성(沈雨晟) 채록본-남형우(南亨祐)·양도일(梁道一) 구술(중요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男寺黨> 所收). ⑹ 이두현(李杜鉉) 채록본-남형우 구술(<한국가면극> 所收). ⑺ 심우성(沈雨晟) 채록본-남형우·양도일·최성구 구술(<창작과 비평> 1972년 겨울호 所收). 위의 다섯 사람에 의하여 7종의 채록 연희본이 발표된 셈인데, 구술자가 다른 것은 <전광식·박영하 구술> <노득필 구술> <남형우·양도일·최성구 구술>의 3본으로 좁혀진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채록본들은 그 어느 것이나 대사본(臺詞本)에 그치고 있음이 흠이라 하겠다. <沈 雨 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