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한국의 신극/신극의 연혁

신극의 연혁〔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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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劇-沿革〔槪說〕

우리나라의 신극사에서 한 가지 주목되는 사실은 해방 전까지의 경우 신문학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10년을 하나의 주기로 하여 발전의 고비를 넘겨 온 사실이다.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의 숨가쁜 서구화·근대화의 개체발생적인 몸부림의 자취를 여기서도 느낄 수 있겠다.

초창기의 신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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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創期-新演劇

190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옥내 상설극장이요 또 황실극장격인 '협률사(協律社)'가 개장(開場)되어 기생·창우(倡優)·무동(舞童) 등의 연예(演藝)를 구경시키는 한편, 기생과 창우(倡優)의 관리기관 노릇을 겸하였다. '협률사'의 주요 레퍼토리로는 광대들의 판소리와 기생들의 각종 가무가 상연되었으며, 1906년 봄까지 존속되었으나 '율사오인(律社誤人)'이라 하여 식자층의 비난을 받아 오다가, 봉상부제조(奉常副提調) 이필화(李苾和)의 상소(上疏)로 4월에 이르러 혁파(革罷)되고 말았다.

'협률사'의 뒤를 이어 최초의 신연극장(新演劇場)으로 개장된 '원각사(圓覺社)'는 당시 <대한신문> 사장이요, 신소설 작가였던 국초(菊初) 이인직(李人稙)이 '아국 연극(我國演劇)을 개량하기 위하야' 신연극을 시작할 목적으로 궁내부의 허가를 얻어 전 '협률사' 자리에 1908년 7월 26일 창설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신연극인 '소설연극'을 당장에 상연할 수는 없어, 이인직이 자작 소설 <은세계(銀世界)>를 각색하여 연습시키는 한편, 그 경비 충당을 위하여 초기의 '원각사'는 '협률사'의 그것과 다름없는 재래 연예의 레퍼토리로 영업적 흥행을 계속하였다.

'원각사'의 개장 후 약 3개월이 지난 11월 13일에야 우리나라 신연극의 첫 상연 작품인 <은세계>가 공연되었다. 이른바 신소설 연극광고는 그 이듬해인 1909년 7월까지도 2-3차례 보이나, 공연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하였던 것 같다. 정치(政治)소설 <은세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신연극(新演劇) <은세계(銀世界)>도 일본의 이른바 <소시시바이(壯士芝居)>라고 하던 초기 신파극과 같은 것으로, '정치사상의 계몽을 도(圖)하고자' 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인직의 이와 같은 신연극의 시연(試演)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고 원각사의 주요 레퍼토리는 대부분이 '아국(我國)에 고유하던 각종 연예'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화용도(華容道)> 등 판소리를 주로 하고 기생의 각종 무용을 상연하였다.

초기의 신파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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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新派劇團

한국 신연극사의 제2기에 해당하는 이 10년간은 신파극으로 시종한 시기이다. 우리나라 첫 신파극단인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일행은 1911년 늦가을 <불효천벌(不孝天罰)>이란 한 편의 연극으로 창립공연의 막을 올렸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구정 초를 기하여 '연흥사(延興社)'에서 제2회 공연을 가졌는데, 일반에게는 이때가 처음 데뷔한거나 다름없었다. 이때의 레퍼토리는 <육혈포강도(六穴砲强盜)> <군인의 기질> <친구의형 살해(親仇義兄殺害)> 등이었고, 이 중에서 제일 환영받은 것은 <육혈포강도>였다. 이 작품은 나중까지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혁신단'의 2회 공연보다 약 한달반 뒤인 1912년 3월 29일부터 윤백남(尹白南)과 조중환(趙重桓)의 '문수성(文秀星)이 제1회 공연을 '원각사'에서 가졌다. 이때 윤백남이 포부를 갖고 상연한 것은 일본 신파극의 베스트 텐의 하나인 가정비극 <불여귀(不如歸)>였다.

신파극 초기의 세 사람의 극계 대표자로 임성구·윤백남·이기세(李基世)를 손꼽는데, 그 중 이기세는 일본 도쿄(京都)신파의 거두 시즈마(靜間小次郞)의 문하에서 2년간 제대로 신파극을 배운 사람으로 귀국 후 1912년 11월 3일에 '개성좌'에서 '유일단(唯一團)' 창립공연으로 번안극 <처>를 상연하였다. '유일단'은 그 후 <불여귀(不如歸)> <자기의 죄(罪)> <장한몽> <비파성(琵琶聲)> <상사련(相思憐)>과 <혈(血)의 누(淚)> <오호 천명(嗚呼天命)> <단장록> 등의 주요 레퍼토리로 서울과 지방 순회공연을 계속하며 1914년 말까지 존속하였다.

근대극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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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劇-胎動

3·1 운동이 일제의 무력으로 좌절되자, 한국민족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광범위한 근대적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광수(李光洙)는 이러한 근대적 자각과 그에 뒤따르는 고민을 1917년 1월에 이미 처녀 희곡 <규한(閨恨)>(單幕 <학자광(學之光)> 11호)으로 발표한 바 있다.

지상에 발표된 최초의 희곡은 조중환(趙重桓)의 희극(喜劇) <병자삼인(病者三人)>이며, 이 작품은 세 사람의 신여성(여교사·여의사·여교장)과 공처가인 세 사람의 남편들을 등장시켜, 소극풍(笑劇風)으로 엮은 일종의 사회 풍자극이다. 그러나 근대극을 개인의식에 눈뜬 근대시민사회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본다면 춘원의 <규한(閨恨)>에서 비로소 우리나라의 근대문학은 최초의 희곡다운 희곡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두번째 희곡 <순교자(殉敎者)>(1막, 1920년) 역시 3·1 운동을 전후한 민족 수난의 절박한 체험으로 뒷받침되어 있어 가작임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신극운동은 1920년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에 현철(玄哲)이 예술학원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1921년 7월에는 '동우회순회연극단(同友會巡回演劇團)'이 모국방문 공연을 가졌다. 이어 이기세의 '예술협회'가 시연(試演)을 가졌다.

1920년대에 들어서 소개된 외국 작가들은 셰익스피어, 입센, 톨스토이, 스트린드베리, 체호프, 그레고리 부인, 던세니 경, 쇼, 와일드, 투르게네프, 오닐, 채펙, 위고, 마이아펠스타 등 다수의 서양 근대의 극작가들이며, 또 대부분의 경우 중역(重譯)이나 번안극으로 소개되었다. 이러한 근대극 작품의 영향 속에서 많은 모방작과 아직은 서투른 창작극들이 습작되었다.

1910년대의 신파극에서 개화·계몽사상을 주된 주제로 볼 수 있었다면 제1차 세계대전 후 3·1운동을 겪은 1920년대는 근대적 자각, 즉 자유와 평등사상, 특히 개인의 권리를 묵살해 오던 봉건적 유교사상에 대한 비판, 남녀평등의 주장, 자유연애와 정조관념에 대한 새로운 윤리와 일제에 대한 저항 등 그 주제에 있어 보다더 구체화되고 진전되었음을 볼 수 있다.

도쿄 학생들의 토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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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留學生-土月會

'동우회(同友會) 순회연극단'의 뒤를 이어, 1923년 7월 4일부터 8일까지 도쿄 유학생들의 '토월회(土月會)' 제1회 공연이 조선극장에서 개막되었다. 동인은 김복진(金復鎭)·김기진(金基鎭)·이서구(李瑞求)·박승희(朴勝喜)·박승목(朴勝木)·이제창(李濟昶)·김을한(金乙漢) 등으로 이들은 여름방학의 귀성(歸省)선물로 연극을 준비하였는데, 그때 그들의 생각으로는 대중을 깨우치려면 강연회 같은 것보다 연극이 가장 좋은 방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1회 공연의 레퍼토리는 유젠 피로트 원작인 <기갈(飢渴)>(전 1막), 안톤 체호프 원작 <곰>, 구도덕에 대한 항거를 그린 박승희(朴勝喜) 작의 <길식(吉植)>(전 1막), 버나드 쇼의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였나>(전 1막) 등 대부분 서양 근대의 단막극으로, 사실적인 무대장치와 자연스러운 대사와 스토리 등에서 재래의 신파의 티가 없는 청신한 맛을 느낄 수 있었으나, '토월회' 제1회 공연은 가지가지의 에피소드와 '은그릇에 설렁탕 담은 것 같다'는 일반의 평과 함께 결국 500원의 빚을 남긴 채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당초에 동우회 연극단의 경우처럼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한 번만 공연한다고 했다. 그러나 제1회 때 실패한 연극의 설분(雪憤)도 해야겠고 무엇보다 급한 것은 부채를 갚아야 하는 일이었으므로 제2회 공연을 준비하게 되었다. 제2회 공연 후로 '토월회'가 전문극단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의 하나가 이러한 데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토월회'를 주도한 박승희의 연극에 대한 의욕이었다.

'토월회' 제2회 공연 레퍼토리는 톨스토이 작 <부활>(전 4막), 마이아펠스타 작 <알트 하이델베르크>(전 5막), 스트린드베리 작 <채귀(債鬼)>와 제1회 때 평이 좋았던 쇼의 작품을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오로라>라고 하여 재상연하였다. 이 모두가 거의 일본에서 상연된 바 있는 작품들로 그 중 주요 레퍼토리 두 개는 사랑을 줄거리로 한 것이며, 예술성보다는 대중성이 더 많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제2회 공연을 계기로 '토월회'는 창립동인들의 대부분이 탈퇴하고, 박승희 혼자만이 남아 '토월회'를 재정비하여 신극운동 단체인 전문극단으로 바꾸어 이끌고 나갔다. 이후 '토월회'는 예술 반, 영리 반의 2원(二元)의 길을 걸으면서, 1925년 3월부터는 1년간 '광무대(光武臺)'를 전속극장으로 사용하고, 이때 박승희의 첫 희곡 <춘향전>으로 15일간이란 장기공연기록을 세웠다. 또 그는 물려받은 충청도의 300석지기 땅을 그 기금으로 해 전기를 마련하였으나 그의 젊은 정열과 함께 연극을 위하여 고스란히 소모되고 말았다. 1925년 11월 이후 '토월회'는 지방순회공연을 시작하였고, 1933년 2월 이후는 '태양극단(太陽劇團)'으로 개편되면서 1940년까지 존속하였다.

1925년까지의 '토월회'가 당시의 신파극계에 준 연극의 충격과 영향은 자못 큰 바가 있어, 모순 덩어리인 극단에 사실적인 무대장치·의상 등을 보여주었고 자연스러운 일상 회화식의 대사와 연기, 그 위에 작품 내용을 고증하여 사실적으로 연출함으로써 비로소 사실적인 신극을 소개하게 되어, 이때부터 극계 전반이 구치다데(口立)가 아닌 상연대본을 쓰게 되었다.

1923년에 시작한 춘강(春崗) 박승희의 극단생활은 1946년까지 만 23년간이나 계속되었고, '토월회'에서만도 180여 회나 신작공연을 하였으며, 그의 손으로 쓰여진 극본은 200여 편이나 된다. 이 중에는 번역과 창작 등이 섞여 있다.

그러나 그의 희곡집 하나 간행되지 못한 채 그 많은 작품들은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말았다. '토월회'를 거친 연극인으로는 복혜숙(卜惠淑)·석금성(石金星)·서월영(徐月影)·이서구(李瑞救)·박진(朴珍)·원우전(元雨田) 등의 여러 사람을 들 수 있다.

'토월회'의 주요 레퍼토리의 몇 가지를 들어보면, <사랑과 죽음> <카르멘> <장한몽> <지장교(地藏敎)의 유래> <이내 말슴 드러보시오> <희생하는 날 밤> <춘향전> <심청전> <무정> <개척자> <데이아보로> <산송댱> <농중조(籠中鳥)> <사(死)의 찬미(讚美)> <아리랑 고개> <고향> <의사 윤봉길> 등이 있다.

1920년대의 연극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누면 '취성좌(聚星座)'를 위시한 이른바 개량신파극단과 '토월회'와 그 아류인 신극단체, 그리고 경향극단체(傾向劇團體)들이다. 이 여러 극단과 그 사이를 왕래한 연극인들의 이합집산은 어수선하다고 할 정도였다.

극예술연구회의 신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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劇藝術硏究會-新劇

신극 확립의 시대적 여망에 따라서 1931년 7월 8일 '극예술연구회'가 발족하였다.

'극예술연구회'의 창립동인으로는 김진섭(金晋燮)·유치진(柳致眞)·장기제(張起悌)·정인섭(鄭寅燮)·조희순(曺喜淳)·최정우(崔珽宇)·함대훈(咸大勳) 등과 극계의 선배로 윤백남(尹白南)과 홍해성(洪海星)을 참가시켜 12명이 있었으나 윤백남은 자주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의 창립 취지는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 극단의 사도(邪道)에의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을 수립하려는 목적'이라고 하였다. 사업내용으론 관중, 특히 학생의 교도, 배우의 양성과 기성극계의 정화에 주력하고 신극의 수립에 필요한 일체의 사업을 기획한다고 하여, 8월에 제1회 하기 극예술연구회를 개최하여 22명의 연구생을 강습시켰고 11월 8일에 '극연(劇硏)'직속 극단인 '실험무대'를 조직하여 20명의 연구생을 모집하였으며 강연회도 가졌다. 한편 기성극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동인들에 의한 기성극단과 학생극 공연론을 지상에 발표하였다.

1932년 5월 4일부터 3일간 '극연' 직속인 실험무대 제1회의 시연(試演)을 '조선극장'에서 가졌다. 상연작품은 고골리의 <검찰관(檢察官)>(함대훈 역, 5막)으로, 홍해성이 연출하고 연구생과 함께 동인들 대부분이 출연하였다. 당시의 극평(劇評)은 대성공적인 것이었으며, '토월회' 제1회 공연 이래 만 10년만에 보는 최대의 수확이요, '극도로 침체되고 문란해진 작금의 조선극단에 다만 한줄기의 청신한 공기를 주입'했다는 극평을 보더라도 최대의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극예술연구회'의 공연활동을 크게 3기로 나눌 때 제1기는 주로 도쿄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귀국한 홍해성이 연출을 담당한 1932년 5월부터 1934년 12월까지로 보며, 그간의 8회 공연 중 '조선극장'에서 3회, 나머지는 모두 공회당(公會堂)에서 공연하여 소극장(小劇場) 공연으로 시종하였는데 레퍼토리는 번역극이 주였고 홍해성에 의해 쓰키지 소극장(築地小劇場)의 영향이 도입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제2회 이후의 주요 상연작품은 어빙 작 <관대한 애인>(1막), 그레고리 부인의 <옥문(獄門)>(1막), 괴오링 작 <해전(海戰)>, 체호프의 <기념제>(1막), <벚꽃동산>(4막), 유치진의 <토막(土幕)>(2막), <버드나무 선 동리의 풍경>(1막), 피란델로의 <바보>(1막),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법정장면), 입센의 <인형의 집>(2막), 르누아르의 <빨강머리>(1막)이며, 1934년 4월에는 기관지 <극예술>을 창간하였으며, 회원도 42명으로 늘었다.

제2기는 홍해성이 '동양극장'으로 옮긴 뒤 주로 유치진이 연출을 전담한 1935년 11월부터 1938년 2월까지로 보며 모두 11회 공연으로 그 경향이 홍해성의 북구 계통의 근대극과 고전 등이 구미의 희곡으로 바뀌었고, 특히 번역극에서 창작극으로 중심을 옮겼다. 또 대극장인 부민관(府民館)으로 진출하면서 끝내는 소극장운동의 순수성을 견지하지 못한 점은 있었으나 소인극(素人劇) 단체에서 전문 극단으로 성장하였음을 말할 수 있다.

제2기의 주요 상연작품들은 이무영(李無影)의 <한낮에 꿈꾸는 사람들>(1막), <무료 치병술(無料治病術)>(1막), 유치진의 <제사(祭祀)>(1막), <자매(姉妹)>(3막), <부활>(5막 6장), 골드워디 작 <승자와 패자>(1막 3장), 이광래(李光來) 작 <촌선생(村先生)>(3막), 이서향(李曙鄕) 작 <어머니>(1막), 전한(田漢) 작 <호상(湖上)의 비극>(1막), 쇤헬 작 <신앙과 고향>(3막), 헤이워드 부처 작 <포기>(3막), 슈니츨라 작 <눈먼 동생>(1막) 등이며, 유치진의 <토막(土幕)>을 필두로 이 시기에 우리의 현대 희곡문학이 확립되었다.

제3기는 1938년 4월 극단 '극연좌'로 개칭하여 공연한 때부터 1939년 5월 해산되기까지의 시기로 본다. 이 시기엔 도쿄학생예술좌 출신인 신인연기자의 <뻐꾹새>, 맥스웰 앤더슨의 <목격자>(3막 5장), 오데츠의 <깨어서 노래부르자>(3막 4장), 빌드락의 <상선(商船) 테나시티(3막 4장)> 등이며, 발족 후 만 1년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때 '극연' 뿐만아니라 점고(漸高)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제2기 이후 연출가로서, 특히 극작가(劇作家)로서 주도하였던 유치진이 그의 창작활동에서 현실생활에 대한 심각한 메스를 더 이상 가하지 못하고 그의 초기 리얼리즘 작품의 예봉(銳鋒)을 꺾었다는 것은 한국 리얼리즘 연극의 성장의 측면에서는 중대한 갈림길이 아닐 수 없었다.

1931년 9월에 발족한 이래 1939년 5월까지 만 8년간 '극예술연구회'는 갖은 꾸짖음과 칭찬 속에서 견디어 왔으나 그에 대한 비난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극연은 ① 사상적으로 중간파라는 것, ② 비전진적이라는 것, ③ 해외문학파의 연장이라는 것, ④ 번역 위주라는 것, ⑤ 부업적이라는 것, ⑥ 연기자의 생활보장이 없고 공연 수가 적다는 것과 말기에는 흥행극단과 다를 바 없이 대중에게 영합하려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 등이다. 한편 업적으로는 ① 창립 이래 양심적 태도로 공연을 계속하여 해외의 희곡과 우수한 창작극 상연을 시도하였으며, ② 사실주의·표현파·풍자극 등 각 유파의 것을 상연하여 소개하였고, ③ 일반에게 연극이론과 실제를 터득시키려고 연극강연 등을 실시하고, ④ 흥행극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 것 등을 들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1930년대의 본격적인 신극, 즉 현대극은 '극예술연구회'에 의하여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토월회'가 한국 신극사에서 일본 신극사의 쓰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 이전에 예술좌가 맡았던 신극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맡았다면,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운동은 쓰키지소극장의 본격적인 신극운동에 비교하여 말할 수 있겠고, 사실 1920년대 '토월회(土月會)'의 신극운동을 1930년대에 이르러 계승·발전시킨 것이 '극예술연구회'라고 할 수 있겠다.

상업극단의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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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業劇團-全盛期

1930년대의 연극을 당시의 극평가(劇評家)들은 흥행극·좌익극(左翼劇)·연구극(硏究劇)·학생극으로 분류하였는데, 1936년 이래로 심화되는 세계위기와 암흑의 전쟁시대로 접어들면서, 좌익극은 물론 '극예술연구회' 등의 이른바 연구극도 거세되고 1935년 11월에 개관한 '동양극장'을 위시한 상업극단의 흥행극 일색으로 기울어졌으며, 고등신파(高等新派)로 자처한 그들은 또다시 민중의 좌절감과 절망을 신파의 눈물로 달래면서 암흑기를 맞이하였다.

1930년대에 경향 각지에서 일어난 경향(傾向)극단들은 대구의 가두극장(街頭劇場), 개성의 대중극장, 해주(海州)의 연극공장(演劇工場), 함흥의 동북극장(東北劇場), 평양의 마치극장(뒤의 明日劇場), 서울의 청복극장(靑服劇場), 우리들 극장, 이동식 소형극장, 극단 메가폰, 극단 신건설 등이며, '낭만좌'도 이 계열에 든다. 이들은 대체로 지방순회공연을 주로 하였고 일경(日警)의 탄압으로 야전적(野戰的)인 활동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토월회' 공연을 소(小)부르주아적 신극운동이라 하고, '극 예술연구회' 연극을 예술지상주의의 반동적 부르주아 연극이며, 형식주의적이며 심미주의적 연극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경향극(傾向極)은 일본의 좌익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의 탄압 이외에도 내부적인 이유로 그 연기나 연출에 있어 정치주의적이며 기계주의적 편향으로 치달렸고, 질적 향상을 갖지 못한 한계점이 있었다. 내외의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연극운동은 좌절되고 송영(宋影)의 경우처럼 1930년대 후반에 대부분 상업연극인으로 전락되는 등, 광복과 더불어 한때 성하였던 좌익극 단체의 주류 멤버들로 돌아왔다.

한편 상업극단들로는 '동양극장' 이전의 '조선연극사' '연극시장(演劇市場)' '신무대(新舞臺)' '태양극장(太陽劇場)' '황금좌(黃金座)' 등이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50여 극장을 순회하였고, 평양 중심의 '희락좌(喜樂座)', 원산의 '조선연극호(朝鮮演劇號)'가 중앙 진출을 하였으며, 또 지방순회를 주로 한 현성완(玄聖完) 일행의 '형제좌(兄弟座)'도 있었다.

이 밖에 극연동인합평(劇硏同人合評)의 대상에도 올랐으나 단명하였던 '중외극장' '명일극장(明日劇場)' '문외극장(門外劇場)', 그리고

'명일극'의 후신인 '춘추극장(春秋劇場)', 극단 '서울무대' 등이 명멸하였다.

1935년 11월 1일 개관한 동양극장은 이때 국내 유일의 연극전문극장으로, 전속 극단 '청춘좌' '동극좌(東劇座)' '희극좌(喜劇座)'를 두고, 단원에게 월급제(月給制)를 실시하여 유능한 직업배우와 연출가·극작가들을 집결시켰다. 나중에 '희극좌(喜劇座)'를 '동극좌(東劇座)'에 병합하여 '호화선(豪華船)'을 만들었고, '청춘좌'와 '호화선' 두 극단이 서울과 지방에서 번갈아 가면서 흥행을 계속하였고 멀리 북만주 지방까지 순회하였다.

주요 연기자론 '청춘좌'에 박제행(朴齊行)·서월영(徐月影)·심영(沈影)·황철(黃澈)·김선초(金仙草)·차홍녀(車紅女)·지경순(池京順)·김선영(金鮮英) 등이 있었고 '호화선'엔 변기종(卞基鍾)·송해천(宋海天)·하지만(河之滿)·전경희(全景希)·석와불(石臥不)·김원호(金元浩)·손일평(孫一平)·최영순(崔英順), 연구생엔 김승호(金勝鎬)·한은진(韓銀珍), 아역(兒役)엔 엄미화(嚴美花)·조미령(趙美鈴) 등이 있었다. 또 전속 극작가에 박진(朴珍)·이서구(李瑞求)·이운방(李雲芳)·송영(宋影)·임선규(林仙圭)·김건(金健)·최독견(崔獨鵑)·김영수(金永壽), 연출엔 홍해성(洪海星)·박진·안종화(安鍾和) 등이 있었다. 그들이 담당한 주요 레퍼토리는 최독견의 <승방비곡(僧房悲曲)> <사(死)의 찬미> <여인애사(女人哀史)>, 이운방(李雲芳)의 <국경의 밤> <항우와 우미인(虞美人)> <흥부전> <정의의 복수> <검사와 사형수> <장한몽> <단종애사>, 임선규(林仙圭)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애원십자로(愛怨十字路)> <비련초(悲戀草)> <유랑삼천리>, 이서구의 <어머니의 힘> <눈물>, 김건(金健)의 <장화홍련전> <김옥균전>, 송영의 <추풍(秋風)>, 송영 각색 <무정>, 김영수 각색 <사랑>, 박진 각색 <황진이> 등이다. 이 밖의 주요 상업극단으로는 '아랑(阿娘)' '고협(高協)' '성군(星群)' '국민좌(國民座)' '조선예술좌(朝鮮藝術座)' '인간좌(人間座)' '중앙무대(中央舞臺)' '성극좌(成劇座)' '인생극장(人生劇場)' '화랑원(花郞苑)' '낭만좌(浪漫座)' 등과 기타 많은 극단들이 명멸하였고, 1933년 5월에 창립한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산하의 '창극좌(唱劇座)'와 그 밖의 창극단도 상업극단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일제의 연극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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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演劇統制

1940년 12월에 결성된 일제의 통제기관 '조선연극협회'에는 대소 극단을 합하여 30-40개에 달하는 당시의 극단 중에서 아홉 단체만이 회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극작가협회도 따로 결성되었다. 다시 이듬해 7월에는 23개로 가맹단체가 증가되었다. 1942년 7월 일제는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예협회'를 통합, '조선연극 문화협회'를 발족시키고 연극통제를 강화하여 이른바 '국민연극' 수립이라는 명목으로 연극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이동극단을 순회시켜 침략전쟁 완수와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촉진시켰다.

광복 후의 신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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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後-新劇

한국연극계는 일제시 본의 아니게 반민적인 연극활동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던 암흑기를 지나 8·15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오랜 악몽에서 깨어나기가 바쁘게 조국분단이 가져 온 비극에서 좌우익 투쟁이란 또 하나의 시련의 와중으로 휩쓸리고 말았다. 광복과 더불어 온 혼란의 틈을 타서 좌익계열은 9월 15일에 이미 '조선연극동맹' 산하에 인민극장(人民劇場)·극단 청포도·15극장·극단 동지·혁명극장·서울예술극장·조선예술극장 등을 편성하여 좌익운동과 신탁통치 지지운동에 찬성하고 나섰다.

한편 우익진영의 극단으로는 10월에 조직된 '민족예술무대'뿐이었으며, '조선 연극동맹'과 대결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으나 그 영향력은 당시 너무나 미약하였다.

1946년 2월 26일부터 개막된 <서울신문사>와 '조선연극동맹' 공동주최의 3·1절 기념 연극대회는 '조선연극동맹' 산하의 극단 일색이었다. 이 해 5월 23일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던 '극예술연구회'가 재건의 모임을 가졌는데 대표에 유치진, 총무부에 함대훈(咸大勳)·이용규(李用圭), 사업부에 서항석·이웅(李雄), 출판부에 김광섭(金珖燮)·최영수(崔永秀)를 각각 선정하였다. 같은 해 8월에 '무대예술연구회'가 제1회 시연회를 배재학교 강당에서 가졌고, 광복 기념공연으로 '민예(民藝)'와 '낙랑극회(樂浪劇會)'에서 각각 공연이 있었다.

1947년 3·1절을 기하여 '연극동맹' 주최, 낙랑극회·자유극장·혁명극장·무대예술연극회 등의 합동 공연으로 <태백산맥(太白山脈)>(함세덕 작)을 상연하고 문화극장·민중극장·예술극장의 합동공연으로는 <위대한 사랑>(조영출 작)을 상연하였다. 이때가 좌익계열의 공연으로는 가장 기세를 올리던 때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경향은 차범석(車凡錫)의 말대로 대개 회고적이며 감상적인 사극(史劇)이 아니면 현실폭로나 정치상황의 변천에서 오는 민족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 태반이었다.

한편 민족진영에서는 '조선연예문화협회'가 발족되고 '극예술원'에서 유치진 작 <조국>(2막)을 공연하였으며, 5월 11일부터는 '극예술협회'의 창립공연으로 유치진 작 <자명고(自鳴鼓)>(5막)의 막을 올렸다. 이때 비로소 그간 좌익극단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한 극계에 좌우익 양진영 극단의 세력균형이 얼마간 잡히게 되었다. 1947년 광복절을 기해 '연극동맹' 산하 4개극단에서 공연을 가진 데 맞서, '극예술협회'에서도 유치진 작 <비화(悲話)>를 공연하였다. 11월엔 문총 산하에 '한국무대예술원'이 결성되어, '반민족적 반동연극 배격태세'를 확립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선거기를 맞이하여 벌였던 문화계몽대의 지방 순회공연은 큰 공적이었다.

1948년 6월에 문교부가 주최한 전국 연극경연대회에는 '동방예술좌'(<백일홍 피는 집> <호동> <이향>), '극협(劇協)'(<검둥이는 서러워>), '청춘극장'(<백제성>), '새별'(<태극기 밑에서>), '예문사 가극부(藝文社歌劇部)'(<금단의 화원>), '백민(白民)'(<설랑과 가실>), '신청년'(<혈맥)>), '백조(白鳥)'(<흘러가는 인생선>), '태평양'(<꿈꾸는 처녀>) 등 10개 극단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기해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의 종식과 함께 좌우익 투쟁의 혼란기도 지나, 이듬해 10월 18일에는 대통령령 제195호로 국립극장 직제가 공포되고 동월 29일 중앙국립극장장에 유치진이 결정되었다. 새해 1950년 1월에는 신극인의 행동단체를 총망라하여 '신극협의회'를 결성하고 '신협'과 '극협(劇協)'의 두 개 전속극단을 계약하여 격일제로 공연하기로 하였다. 중앙국립극장 개장 공연은 신협이 유치진 작의 <원술랑>(5막 7장)을 이화삼(李化三)·허석(許碩) 연출로 하여 4월 30일부터 막을 올렸다. 이어 6월 6일부터 15일까지 <뇌우(雷雨)>(4막)를 유치진 연출로 상연하여 공전의 성황을 거두고 19일까지 연장 공연한데 이어 다시 31일까지 연장 관객 5-6만 명을 동원하였으나 이러한 연극중흥의 불길도 6·25전쟁으로 일시에 꺼지고 말았다.

이 밖에 특기할 만한 것은 1948년 10월 3일 시공관에서 창립공연을 가진 '여인소극장'의 활동이다. 박노경(朴魯慶) 주도하에 이화여대 출신 20여명의 여인들만으로 구성된 '여인소극장'은 수델만의 <고향(故鄕)>(4막)을 창립공연으로 상연하고, 6·25전쟁으로 중단될 때까지 전후 7회의 공연을 가졌다.

또 1949년 10월 18일부터는 '한국연극학회' 주체 제1회 전국남녀대학 연극경연대회가 개최되어 이때의 참가자들이 대부분 환도 후의 동인제 극회(同人制劇會)의 주요멤버들이 되었고, 오늘날 극계의 중견층을 이루고 있다.

6·25전쟁 후의 신극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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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二五戰爭後-新劇界

6·25라는 미증유의 전쟁을 겪고 9·28 수복이 되자 그 해 10월 15일 '무대예술추진회'가 모였고 11월 들어 '무대예술원'에서 조건(趙健)의 <돌아온 사람들>, 김영수 작품의 <혈맥(血脈)>, 김석민의 <청춘전선(靑春戰線)>으로 수복 후의 첫공연을 가졌다. '신극협의회'에서는 유치진 작 <자명고>를, '중앙무대'는 조건 작 <운명의 그날>, 극단 '신영'이 <최후의 밤> <서부 전선>을 각각 공연하였으나, 1·4후퇴로 다시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피난 중에도 '신협'은 2월 초에 대구 문화극장에서 계속 공연한 후, 10월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대구에서 공연하여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신협은 주도적인 극단으로서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여러 지방을 순회 공연하며, 일선과 병원 위문공연도 하는 등, 꾸준한 공연을 계속하여 전쟁 중에 정신적 양식에 굶주린 관객에게 환영받았다.

그들의 레퍼토리를 보면, 사르트르의 <붉은 장갑>, 유치진 작 <원술랑> <별> <자명고> <개골산(皆骨山)> <불꽃> <처용의 노래>, 셰익스피어 작 <오셀로> <멕베스>, 몰리에르 작 <수전노>, 오영진(吳泳鎭) 작 <맹진사댁 경사>, 앤더슨 작 <목격자> 그리고 <뇌우(雷雨)> 등이다.

'신협'다음으로 활발한 공연을 계속한 것은 극단 '신청년'이며, 그외 '상록극회(常綠劇會)' '극단 파도' '신진' '예술협회' '극협' '청춘극장'과 그 밖에 5-6개 극단이 창립 또는 부활되었다.

이 시기에 상업극단 중 악극단(樂劇團)과 창극단(唱劇團)이 차차 성하여 신파적인 눈물로 민중의 기호에 영합하게 되고 신극은 일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1953년 2월 13일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개관되고 휴전 후 상경하는 시민들이 많아지자 '신협'은 1954년 상경하여 8월에 서울에서 유치진 작 <별>을 갖고 첫 공연을 가졌다. 그 후 '신협'은 <자매>의 공연까지 모두 20여 편을 상연하는 등 피난 중의 구차한 환경 속에서도 제법 무게있는 작품을 상연하여 극단(劇團)의 면모를 홀로 유지하여 왔으나 일종의 침체기에 빠졌다. 그러나 1955년 3월 유치진 작 <자매>를 '시공관'에서 상연하면서부터 차차 침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시작하고, 오약(吳若) 작 <인수지간(人獸之間)>, T. 월리엄스 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진 오닐 작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 이태환(李泰煥) 작 <계월향>, 입센의 <민중의 적>, 임희재(任熙宰) 작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밀러 작 <세일즈맨의 죽음>, 오영진(吳泳鎭) 작 <풍운(風雲)> 등 주목할 만한 공연을 갖고, 신인작가 임희재(任熙宰)와 신인 연출가 김규대(金圭大)를 배출했다.

'신협' 이외의 극단으로는 '극협(劇協)' '공연극장' '신청년(新靑年)' '배협(俳協)' '민극(民劇)' 등이 그나마 신극활동을 계속하였다.

동인제 극회로 주목할 만한 것은 '테아트르 리블'로 연대 졸업생과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1953년 '영리를 떠난 순수한 실험무대를 가져보자는 의도'에서 부산을 출발, 시구르욘손 작 <사랑을 위하여>(4막)로 창립공연을 갖고 환도 후 밀러 작 <세일즈맨의 죽음>(3막), 오닐 작 <지평선 너머>(3막 6장) 등을 공연하였다.

제작극회(制作劇會)는 거의 대학극회 출신의 신진연극인(新進演劇人)들의 집결체로, 참된 현대극 양식을 제작하려는 의도에서 1956년 홀워시 홀 작 <사형수>(1막)로 창립공연을 가졌다. 그들이 상연한 주요작품은 막스 할베 작 <청춘>(3막), 윌리엄스 작 <유리동물원>(2부 7장), 오스번 작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3막 5장), 차범석 작 <공상도시(空想都市)>(3막), <불모지>(1막), 김경옥 작 <제물>(2막), 김자림(金玆林) 작 <돌개바람>(1막), 박현숙(朴賢淑) 작 <사랑을 찾아서>(1막) 등이다. 1961년 4월 제10회 공연으로 차범석 작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4막)을 상연한 후로는 그 전성기가 지난 느낌이었다. 제작극회는 5년간의 활동을 통하여 환도 후의 신극 침체기를 홀로 지켜온 감이 있으며, 전기의 동인 극작가 외에 오사량(吳史良)·허규(許圭) 등 중견 연출가와 연기자 및 연극학자를 배출하였다.

1957년 6월에 대구에 있던 '국립극장'이 명동의 '시공관'으로 옮기고, 전속극단으로 정비하였으며, 다시 1962년에는 '중앙국립극장'이 공보부에 이관되면서 재출발하였고, 한편 드라마센터가 같은 해에 개관되었다. 그동안 '제작극회' '원방각(圓方角)' '8월극장' '실험극장' '동인극장' '횃불극회' '신무대' '실험극회' 등이 1959년 공보부가 마련한 소극장 '원각사'에서 1961년까지 공연을 계속하였다.

1962년 이후 60년대의 신극은 중앙국립극장과 드라마센터 극장 등 두 곳을 중심으로 '국립극단' '신협' '실험극장' '산하(山河)' '민중극장' '자유극장' '동인극장' '광장' '드라마센터' '가교(架橋)' '성좌(星座)' '여인극장' 등 몇 개의 주도적인 전문극단이 공연을 계속하며 연극 중흥을 다짐하였다. <李 杜 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