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한국의 연극/창 극/창극〔서설〕

唱劇〔序說〕 창극은 선행예술인 판소리사의 쇠잔기(衰殘期), 즉 개화 후에 형성된 민속악극(民俗樂劇)이다. 판소리는 어느 것이나 한 사람의 광대(廣大)가 부르기에 광대는 1인다역(一人多役)으로 자문자답하며, 작중인물이 되기도 하고 관찰·설명하는 제3자가 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창극은 판소리를 개편해서 다인다역(多人多役)의 형식을 취하는 판소리의 본질과는 어긋나는 것이다. 구비예술(口碑藝術)의 단계에 있었던 판소리를 집성(集成)하여 부동문학(浮動文學)에서 고정문학(固定文學)으로 고정시킨 사람은 19세기 중엽의 신재효(申在孝)였다. 신재효는 판소리 작가로서 또한 판소리 이론가·교육가로서 전래(傳來)하는 열두 마당의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개산(改刪)하여 남겼는바, 그 중 5가(五歌)가 판소리의 고전(古典)으로 지금까지 전승(傳承)되고 있다. 판소리는 종래엔 타령(打令)·극가(劇歌)·구극(舊劇)·창극(唱劇) 등의 명칭으로 불리었고 광복 후에는 국극(國劇)이라고도 불렀다. 그 중 창극은 1908년 궁내부(宮內府) 직할인 원각사(圓覺社)의 개관으로 재래의 판소리에 배역과 분창형식(分唱形式)을 도입, 1932년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에 이르는 동안 형성되었고 이 시절부터 창극을 구극(舊劇)이라 했다. 창극의 형성에 있어서 외부적인 영향-주로 일본을 매체로 한 서양 근대극-을 인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영향을 수용할 만한 여지는 이미 신재효의 정리에 의하여도 나타났으니 신재효는 <춘향가>에서 배역의 분창형태를 의도했고 또 여자광대를 양성하기도 했다. 1902년 12월 우리나라 최초로 황실극장격인 협률사(協律社)가 개장(開場)되어 기생·광대·무동(舞童)의 연예를 상연시켰는데, 그 주요 레퍼토리는 광대들의 판소리와 기생들의 각종 가무였다. 협률사와 원각사 이후 1914년경까지 협률사 일행은 <춘향타령>이나 잡가(雜歌)를 가지고 지방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명창 송만갑 일행도 1914년경 지방 순회공연을 하였다. 1910년대의 초창기를 지나 성장기에 해당하는 20년대에 주목할 수 있는 활동은 광무대(光武臺)·장안사(長安社)·연흥사(延興社) 등에서의 창극이라기보다 입체창(立體唱) 비슷한 것으로 명창의 독창이 주가 되고 민요아가(民謠雅歌)도 곁들인 토막극으로 <춘향가>의 한 토막을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 사이에 광월단(光月團)·대동가극단(大同歌劇團)이 광무대 등에서 창극공연을 한 바 있으나 1933년의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가 발족될 때까지 별 진전 없이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본격적인 창극운동이 일어난 것은 1930년 조선음률협회(朝鮮音律協會)의 조직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의 결성 이후부터이다. 이 때의 중심인물은 송만갑·이동백(李東伯)·정정렬(丁貞烈)·김창룡(金昌龍) 등이었고 중견과 소장으로 오태석(吳太石)·김연수(金演洙)·강장원(姜章沅)·김초향(金楚香)·박녹주(朴綠珠)·김소희(金素姬) 등이 있어, 창극의 재건과 개혁, 그리고 부흥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조선성악연구회 산하단체인 창극좌(唱劇座)는 제1회 공연으로 <배비장전(裵裨將傳)>을 공연한 이래 광복 전까지 존속하면서 상업극단이 화려하던 시절에 이에 참여했다. 창극좌의 공연에 이르러 판소리 형식의 잔재인 도창(導唱)·방창(傍唱) 및 겸역(兼役) 등을 청산하고, 무대미술에도 진전을 보여 창극형식이 확립되었다고 보겠다. 그 후 이들은 화랑(花郞)과 합동하여 조선창극좌를 만들었으니 그들의 레퍼토리는 판소리 5가와 고대소설 및 각색사극(脚色史劇) 그리고 신파창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상업주의 연극의 영역에서 창극은 만족할 만한 예술적 진전을 보이지 못해 저속한 복고주의적(復古主義的) 취미에 영합하는 기미마저 있었다. 조선성악연구회의 발족 이후 상업극단에 참여한 창극은 광복 전까지 10여년간 그 성숙기를 맞이하였고 광복과 더불어 조선성악연구회의 후신으로 조선창극단이 발족했으며, 1946년에는 창악인을 총망라한 국극(國劇) <춘향전>을, 이듬해에는 <대심청전>을 공연하였다. 이 해에 또한 국악원 산하의 국극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족출(簇出)했고, 이들 단체에서 공연한 작품으로는 <선화공주(善花公主)> <논개(論介)> <옥중화(獄中花)> <해님과 달님> 등이 있어 창극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대부분 분산되고 그나마 명맥을 이어 오던 몇몇 단체마저 국산영화 붐 이후 상업극단으로서의 존립도 어렵게 되었다. 오늘날 창극은 국립극장 산하의 국극단(國劇團)만이 연 1∼2회의 공연을 갖고 연극으로서의 국극정립화를 시도하고 있는 바, 여기에는 전승의 민속극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문화적 배려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李 眞 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