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서양의 고전극/유럽의 근대극

근대극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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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劇-槪念

유럽에서의 근대극은 18세기 중엽 이후 19세기에 걸쳐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자본주의가 차차 진전하는 과정에서 신흥 시민계급이 세력을 얻고 근대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시기에 태어난 '시민극(市民劇)'에서 그 단서를 볼 수 있다. 그때까지의 고전주의 연극에서는 '비극'에서 영웅·왕후(王侯)·귀족 들의 불행이나 비참한 사건을 다루고 '희극'에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나 악덕을 그 대상으로 삼아 왔으나, 이윽고 지금까지의 고전주의 연극의 규범에 의한 '비극'도 아니고 또한 '희극'도 아닌 중간적인 장르,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는 희극의 대상밖에 되지 않았던 일반 서민·평범한 사람의 생활을 성실하게 다룬 '시민극'이 태어나게 된다. 넓은 뜻에서의 근대연극은 19세기 후반부터의 사실주의 연극,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두(初頭)에 걸쳐서의 이른바 '근대극' 운동의 시기를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흔히 '근대극'이라고 불리는 것은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두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났으며 이윽고 유럽 각국에 파급되어 갔던 자유극장 운동(自由劇場運動)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예술적 내용을 지향하는 연극 혁신운동을 가리킨다.

근대극의 특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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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劇-特質

이 연극 혁신운동은 ① 해체기(解體期)로 향하는 근대 시민사회에 내포되는 온갖 문제를 소재로 하고, 그것을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는 자연주의 연극 확립의 방향을 지니면서, ② 당시의 극계 인습을 타파하고 희곡을 연극의 기초로 삼아 연출자에 의한 통일 있는 무대를 형상화하려는 예술순화운동의 양상을 띠고, ③ 당시 지배적이었던 연극의 기업화·상품화에 의한 영리주의적인 경향에 대립하여 반(反) 상업주의적 입장에 서고, ④ 또한 대(大)극장주의에 대해 회원제도에 의한 소극장주의의 형태를 취했다. 이와 같은 기본적 성격과 내용을 지니는 근대정신을 반영시킨 연극혁신운동을 흔히 '근대극'운동이라고 부른다.

연극의 상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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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劇-商品化

19세기 연극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자유방임 정책이 적용되어 연극 흥행의 면허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차차 연극이 기업화되어, 상업극장이 융성해짐으로써 '연극의 상품화'라는 현상이 유럽각국에 현저해졌음을 들 수 있다.

연극 흥행의 면허 철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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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劇興行-免許撤廢

영국에서는 두를리 레인 극장과 코벤트 가든 극장의 두 극장이 면허 독점의 대극장이었으며 본격적인 희곡의 상연을 허락받고 있었으나, 1843년에 흥행독점 철폐 법안이 의회를 통과한 이후 음악희극(音樂喜劇) 등을 상연하고 있던 소극장의 활동도 자유로워졌으며, 극장 수도 차차 증가했다.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으로 한때 흥행이 자유로워졌으며 나폴레옹 1세가 테아트르 프랑세즈를 관영극장으로서 보호했고, 파리에서는 4개 극장에 한정시켜 독점권을 주었다. 후에 나폴레옹 3세 시대에 들어와, 1864년에 겨우 연극흥행의 자유를 얻기에 이르렀다.

독일에서는 각지의 영주(領主)가 극장을 갖고 그곳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나 프랑스 희극 등이 상연되고 있었다. 옛날에는 바이마르 궁정극장(宮廷劇場)에서의 괴테처럼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효과를 올려 온 곳도 있었으나 이러한 궁정극장의 대부분은 영주의 개인적 취미에 지배되고 있었다. 1869년에 북독일연방에서 연극흥행의 자유가 인정되고 이윽고 독일 전토에 걸쳐 상업극장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상업극장의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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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業劇場-增加

유럽 각국에서의 연극흥행의 면허 철폐와 자유화에 의해 각국에 상업극장이 급격한 증가를 보였음은 자본주의의 진전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였으나, 한편 경제적인 효율을 높이기 위해 객석이 많이 차지하는 대극장을 건설하게 되었으며, 그와 함께 연극의 전문지식을 갖지 못한 극장 지배인이나 기술이 없는 아마추어 출신의 배우들이 많이 배출되게 되었다.

수석배우 제도와 스타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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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席俳優制度-star system연극의 기업화·상품화에 따라 관객에게 영합(迎合)한 저속한 연극이 제공되고 또한 수석배우(首席俳優) 제도(액터 매니저 시스템)가 확립됐다. 이윽고 배우장(俳優長)을 중심으로 한 스타의 인기에 중점을 두는 연극을 상연하게 되어 특정 스타의 배역만을 강조한 스타 중심주의(스타 시스템)가 횡행했다. 수석 배우는 자기 매력을 과시하기 위해 희곡을 멋대로 고쳐 쓰고 연극의 내용과 관계없이 자기 중심의 연출을 하거나 과장된 연기로 관객의 눈을 끌려고 했다. 19세기 중엽부터는 이탈리아의 그랜드 오페라의 영향도 받아 장치나 의상은 차차 화려해지고 연출방법도 고정화·형해화(形骸化)하여 예술적인 내용이 없는 흥미 위주의 연극이 유행하게 됐다. 수석배우 제도와 스타 시스템에 의한 상업극장의 융성은 한편으론 투기적인 불안정을 항상 지니며, 흥행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하나의 무대가 크게 히트하면 그것을 되도록 장기흥행하려는 롱런 시스템(long-run system)이 생겨났으며, 이익을 보증하는 것, 즉 레퍼토리도 통속성을 노리는 천박하고 안이한 각본으로 이루어지고, 배우도 타성에 젖어 상업연극은 차차 질적 저하를 초래하며 비속화(卑俗化)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상업극장뿐만 아니라 궁정극장이나 국립극장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연극의 상업화에 수반하여 생겨난 여러 가지 폐단과 타락에 도전하여 인습을 타파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연극 혁신운동이 곧 19세기 말에 일어난 유럽의 근대극운동이었다.

웰 메이드 플레이의 성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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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made play-盛行

19세기 연극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지녔던 상업극장에서 연극의 상품화와 결부되어 자주 상연되었던 것이 소위 '잘 만들어진 연극(well-made play)'이었다. 대표적인 작가는 프랑스의 외젠 스크리브(Eugene Scribe, 1791-1861)로서 50년 동안의 극작생활에서 400여 편이나 되는 방대한 양의 각본을 썼으며, 사상적으로 새로운 맛은 없고 대부분 형식적인 인물의 구성과 교묘하게 엮어진 극 편성, 재치가 흐르는 대화 등의 잔재주가 능숙한 각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19세기 중엽까지의 프랑스 극단(劇壇)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경향은 순식간에 유럽 전토로 번졌으며 스크리브 직계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빅토리안 사르두(Victorian Sardou, 1831-1908)나 풍속극을 쓴 에밀 오지에(Emile Augier, 1820-89), <춘희(椿姬)>의 작가 뒤마 피스(Dumas Fils, 1824-95) 들에 의해 19세기 후반의 극단도 상투적인 풍속극이 유행하기에 이르렀다.

근대극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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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劇-成立

이와 같은 '잘 만들어진 연극'의 성행과 스타 시스템에 의한 상업극장의 타락에 대하여 인간의 보다 진실한 모습과 적나라한 생활을 무대에 반영시키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에는 산업자본의 발달에 수반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성숙과 생물학(生物學)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과학의 발달, 잇단 발견과 발명에 의한 기술의 급속한 진보 등으로 과학정신이 싹트기 시작했고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인 견해가 차차 보급되기 시작했다.

콩트의 실증주의 정신은 환경을 중시하는 텐의 과학적인 문학 연구의 방법으로 계승되어 생물진화의 사실을 밝힌 다윈의 <종(種)의 기원>이 1859년에, 클로드 베르나르의 <실험의학 연구 서설(實驗醫學硏究序說)>은 1865년에 발표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자연주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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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主義演劇

이러한 근대정신으로 배양되어 문학 면에서는 플로베르, 졸라, 공쿠르, 도데, 모파상 등 자연주의 작가가 나타나 과학적 실증주의의 입장에서 유전(遺傳)이나 환경에 따라 결정되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희곡도 썼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는 자연주의 연극의 창조자가 되었다. 졸라는 소설 <테레즈 라캥>을 각색 상연하여 스스로 그 실험에 힘썼으며, 1881년에는 <연극에서의 자연주의> 2권을 발표했다. 그는 연극이 "현실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검토된 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성격과 환경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선인형(善人型)·악인형(惡人型)의 뚜렷한 유형적 등장인물을 배격하고, 현실 사회에 사는, 과학적으로 분석되고 허위가 없는 인간의 모습을 무대에서 추구했던 것이다. 졸라를 비롯한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의 희곡은 거의 성공하지 못했으나 프랑스에서 자연주의 희곡의 대표작이 된 것은 앙리 베크(Henry Becque, 1837-99)의 <까마귀떼>(1882)였다.

근대 시민비극의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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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市民悲劇-傳統

근대 시민사회에서의 절실한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린 희곡은 이미 19세기 전반(前半)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었다. 예컨대 독일에서 뷔흐너(Georg Buchner, 1813-1837)의 <보이체크>(1836)가 그 선구를 이루었으며 헤벨(Christian Friedrich Hebbel, 1813-1863)의 <마리아 막달레나>(1844)나 그 영향을 받은 루트비히(Otto Ludwig, 1813-65)의 <세습 산림 관리인>(1850) 등에서 사실적인 시민비극의 싹을 볼 수 있다. 또 러시아에서는 그리·보예도프(Aleksandr Sergeevich Griboedov, 1795-1829)의 <지혜의 슬픔>(1824)이나 오스트로프스키(Aleksandr Nikolaevich Ostr­ovskii, 1823-86)의 <뇌우(雷雨)>(1859)가 있다.

자연주의 희곡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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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主義戱曲-確立

시민생활 속에 비극을 정착시킨 사실주의 시민비극의 전통은 노르웨이의 뛰어난 극작가 입센(Henrik Ibsen, 1828-1906)에 의하여 근대극의 가장 유력한 장르로서 확립되었다. 입센은 초기에 노르웨이의 전설이나 역사에서 취재한 낭만주의적인 희곡을 썼으며 스크리브나 헤벨의 기법에서도 영향을 받았으나 <청년동맹>(1869), <사회의 기둥>(1877)을 비롯하여 <인형의 집>(1879), <유령>(1862), <민중의 적> 등에서 지배계급의 부패·타락의 적발, 세속적인 그리스도 교회와의 항쟁, 근대적인 자아(自我)의 각성, 인간성의 해방, 남녀 평등사상의 철저, 과학적인 세계관의 확립, 유전(遺傳)의 영향 등 해체기(解體期)의 시민사회에 내재하는 갖가지 문제를 객관적인 수법으로 날카롭게 묘사했다.

입센과 거의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스웨덴의 작가 스트린드베리(John August Strindberg, 1849-1912)도 <아버지>(1887), <영양(令孃)줄리>(1888) 등에서 자연주의 비극의 높은 수준을 제시했으며, <어둠의 힘>(1880)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 1828-1891)나 <해가 뜨기 전>(1889), <쓸쓸한 사람들>(1891), <방직공(紡織工)>(1892)의 하우프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에 의해 자연주의 희곡의 도달점이 제시되었다.

근대극의 드라마투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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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劇-Dramaturgie

이러한 자연주의 희곡에서는 시민이나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면서 그 생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포착하고 희곡의 행위가 전시대(前時代)처럼 살인·복수와 같은 외면적 행동으로서 과장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행동, 내면적 행동으로서 리얼하게 표현되었다. 따라서 운문(韻文)의 사용을 그만두고 보다 사실적으로 하기 위해 산문(散文)을 사용하고, 신변의 제재(題材)를 흔히 쓰이는 말로 쓰고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독백이나 대사를 추방했다. 또한 입센이 부활시킨, 막이 오를 때에는 이미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과거의 사건이 등장인물에 큰 힘을 미친다고 하는 리트로스펙티브한 수법(回顧破裂方式)도 근대극의 드라마투르기로서 유력한 것이 되었다.

반자연주의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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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自然主義戱曲

그러나 입센이나 하우프트만의 희곡이 만년에 이르자 차차 상징적·신비적 경향을 띠어 왔듯이 자연주의의 기계적인 결정론(決定論), 과학 만능주의에 반발하여 19세기 말에는 메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 1862-1949)를 비롯한 반자연주의 작가들이 출현하게 된다. 환경이나 유전에 의해서 좌우되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드라마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 내부에 드라마의 근원을 탐구하는 시도가 꾀해지는 것이다. 메테를링크나 안드레예프(Leonid Nikolaevich Andreev, 1871-1919), 스트린드베리의 이른바 <꿈의 희극>에서 그 구체적 예를 볼 수 있다.

또한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 속에서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나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의 탐미적(耽美的)인 정조극(情調劇)이 태어났다. 입센에 의해서 확립된 근대 희곡은 이러한 신비주의·상징주의·유미주의의 작가들을 포함하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서의 유럽 각국의 자유극장 운동과 결부되어 다방면에 걸쳐 다채롭게 꽃피고, 나아가서는 쇼나 체호프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각국의 근대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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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의 근대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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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國-近代劇運動

19세기 후반부터 대두한 새로운 희곡의 출현을 배경으로 그 희곡의 상연을 통하여 새로운 연극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선 프랑스에서 생겨났으며, 독일·영국·러시아로 번져 나갔다.

앙투안의 자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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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ine-自由劇場

프랑스에서는 당시 가스 회사의 평범한 사원이었던 앙투안(Andre Antoine, 1857-1943)에 의해 1887년에 '자유극장(Theatre Libre)'이 창설되었다. 앙투안은 소년 시절부터 연극에 흥미를 갖고 회사에 근무를 하는 한편 '세르크르 고로와'라는 아마추어 극단에서 배우로서 사실적인 연기의 창조에 노력해 왔다. 그는 졸라 문하의 젊은 작가들과 사귀어 공쿠르나 졸라의 후원을 얻어 당시의 극단 풍조에 불만이 많은 동지들과 함께 '자유극장'의 창설공연을 하여 호평을 얻었다. 레퍼토리는 졸라의 소설을 각색한 <작 다므르> 등 1막물 4개이며 연기자는 상점에 근무하는 노동자나 양장점의 여직공 등 아마추어 배우들이었다. 앙투안은 졸라의 자연주의 연극론과 함께 '생(生)의 단편(斷片)'을 무대에 실현시켜 '움직임에 의한 생명'의 극보다도 '생명에 의한 움직임'의 극을 지향해야 한다는 장 줄리앙(Jean Jullien, 1854-1919)의 연극론에 공명하여, 종래의 과장된 몸짓이나 낭랑하게 읊는 연기술(演技術)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인생의 진실한 모습을 무대에 재현시키려고 노력했다. 무대에서는 관객석 앞에 제4의 벽은 없다 해도 실제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도록 요구하고 '앙투안의 등(背)'이라고 비유된 객석에 등을 돌린 연기도 여기서는 승인되었다. 또한 소도구 등도 무대에 직접 실물을 갖고 나왔으며 의상도 흔히 일상생활에서 쓰는 것을 사용했다. 이처럼 지나친 사실주의, 연극에서의 허구의 현실과 실인생의 현실을 혼동한 점 등으로 차차 매너리즘에 빠졌으나 당시의 침체하고 형식화된 극계에 큰 충격을 주고, 보다 진실한 연극의 실현에 힘쓴 그의 공적은 위대하다. '자유극장'은 톨스토이의 <어둠의 힘>, 입센의 <유령> <들오리>, 스트린드베리의 <영양 줄리>, 하우프트만의 <방직공> 등의 상연으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당시의 극단에서는 햇빛을 보지 못했던 자기 나라 신진작가(新進作家)들의 새로운 희곡을 계속해서 상연했음도 경시할 수 없다. 이러한 작가에는 포르토=리슈(Georges de Porto-Riche, 1849-1930), 외젠 브뤼(Eugene Brieux, 1858-1932), 프랑수아 드 퀴렐(Fran

ois de Curel, 1854-1928), 조르주 쿠르틀린(Georges Courteline, 1858-1929) 들이 있었다. '자유극장'은 예약회원을 모집하여 그 경제적 기초를 굳히려 했으나 경영은 극히 곤란하여 부채(負債) 때문에 1894년에는 앙투안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1896년에는 마침내 폐장(閉場)하고 말았다.

폴 포르의 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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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Fort-藝術劇場

1890년에는 시인 폴 포르(Paul Fort, 1872-1960)에 의해 반(反)자유극장의 운동으로 '예술극장'이 태어났으며 메테를링크의 상징극 등이 상연되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예술극장은 또 뤼네포(Lugne-Poe, 1869-1940)의 손으로 옮겨진 뒤 얼마 후에 활동을 중지했다.

마이닝겐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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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iningen劇團

독일에서는 19세기 중엽 이후에 하인리히 라우베나 프란츠 딩겔시타트가 연출을 담당했던 부르크 극장에서 역사적 사실주의 연극(寫實主義演劇)에의 길이 열려 있었으나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은 소도시 마이닝겐의 궁정극단으로서, 이는 마이닝겐공(公) 게오르크 2세(Herzog Georg Ⅱ. von Meiningen, 1826-1914)가 이끄는 '마이닝겐 극단(Die Meiningen)'이었다. 마이닝겐 공은 보덴시테트에게 관리를 맡겼던 궁정극장을 1870년에 스스로 주재하여 연출가 루트비히 크로네크(Ludwig Chronegk, 1837-91)의 조력을 얻어 1874년부터 1890년에 걸친 17년 동안에 독일 국내를 비롯한 유럽각지의 36개 도시에 셰익스피어, 실러, 입센 등의 작품으로 순회공연을 하여 2,694회의 상연을 가졌다. 역사가이며 화가이기도 했던 마이닝겐공(公)은 사극(史劇)을 상연함에 있어서 장치·의상의 사실(史實)을 고증하고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을 만들어냈다. 연기도 스타 시스템을 부정, 각자에게 제각기의 역할을 주었으며 특히 군중 장면의 연출에 뛰어났었다. 마이닝겐공이라는 한 사람의 통솔자를 통해 앙상블이 이루어진 무대를 창조했던 것이다. '마이닝겐 극단'이 각국의 젊은 연극인에게 준 영향은 크다고 하겠으며, 앙투안을 비롯하여 아챠, 스타니슬라브스키도 이 극단의 순회공연에 의해 근대극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오토 브람의 자유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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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 Brahm-自由舞臺

독일에서는 1870-1880년에 걸쳐 입센, 뵈른손, 스트린드베리, 톨스토이 등이 소개되면서 겨우 자연주의 연극에의 관심이 높아졌다.

앙투안의 '자유극장'이 와서 공연한 바도 있고 하여 '자유극장'을 모범으로 하여 오토 브람(Otto Brahm, 1856-1912)이 중심이 되어 '자유무대'(Freie B

hne)가 창립된 것은 1889년의 일이었다. 창립공연으로는 입센의 <유령>을 상연하고 이어 하우프트만의 처녀 희곡 <해가 뜨기 전>을 다루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우프트만은 이 상연으로 일약 자연주의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또한 <평화제(平和祭)> <쓸쓸한 사람들>이 다루어졌다. 한편 톨스토이, 스트린드베리, 베크 등 외국작가의 근대희극도 소개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회원제도를 취하고 있던 '자유무대'는 1894년에 브람이 '독일극단'을 주재했기 때문에 그 활동은 끝났으나 다음해인 1895년에는 할베의 '친근극장(親近劇場)', 그 다음해에는 브라이프트로이와 알베르티의 '독일무대'가 태어나는 등 독일에서의 근대극운동이 활발해졌다. 또한 독일에서는 예술적으로 뛰어난 내용의 연극을 값싼 입장료로 대중에게 제공하는 관객조직 '민중무대(Volksb

hne)'의 운동이 일어났으며 1890년에는 빌레 박사에 의해 '자유 민중무대'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운동들은 영리적인 연극 흥행에 대항하는 조직으로서 주목을 끌 만한 것이었다.

그라인의 독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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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in-獨立劇場

영국에서는 1870년대의 초기에 에드먼드 고스나 윌리엄 아처에 의하여 입센이 소개되었으며 또한 대륙에서의 연극 혁신운동이 소개되고 영국에서도 자유극장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때마침 그라인(Jacob Thomas Grein, 1862-1935)은 1891년, 앙투안의 '자유극장'을 모방하여 런던에서 '독립극장'(The Independent Theatre)을 창설, '자유무대'와 같은 <유령>으로 막을 올렸다. 이 창립공연은 찬부(贊否) 양론이 격렬하게 대립하여 한때 '독립극장'의 존속(存續)마저 위험시되었으나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부도덕 작가(不道德作家)라는 평가를 받았던 입센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쇼의 처녀 희곡 <홀아비 집>은 1893년에 '독립극장'에서 상연되고 그 성과에 자신을 가진 쇼는 이후 <워렌 부인의 직업>, <악마의 제자>, <인간과 초인> 등 잇따라 희곡을 써서 영국 근대 극작가의 제1인자가 되었다. 쇼와 함께 활약했던 작가로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배리(S.J.M. Barrie, 1860-1937), 골즈워디(John Galsworthy, 1867-1933) 등을 들 수 있다.

무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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舞臺協會

'독립극장'은 예약회원 제도를 취하기는 했어도 경영은 곤란했으며 1897년에 활동은 정지되었다. 이 '독립극장'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 휄렌의 제창으로 1899년에 창립된 '무대협회(The Stage Society)'이다. 후에 법인(法人) 조직이 되었지만 쇼나 그랜빌=베이커가 참여하여 직업배우의 재교육을 행했으며 레퍼토리 시스템을 채용, 쇼를 비롯한 자기 나라 작가의 여러 작품이 잇따라 상연되었다.

모스크바 예술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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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kva 藝術劇團

러시아에서는 19세기에 그리보예도프, 고골리, 오스트로프스키 등에 의해서 근대 사실극에의 과정이 준비되었으나 1882년에 흥행면허가 철폐되고 연극계는 한때 활발한 상황을 보였다. 1886년에는 톨스토이의 <어둠의 힘>이 나타났으며 이윽고 입센도 소개되어 각국의 자유극장 운동의 영향 아래 차차 새 기운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스타니슬라프스키Konstantin Stanislavsky, 1863-1938)와 네미로비치=단첸코(Vladimir Nemirovich-Da­nchenko, 1858-1943) 등에 의해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조직된 것은 1898년의 일이었다.

스타니슬라프스키와 단첸코는 연기과잉 연극이나 스타 시스템의 폐해(弊害), 그릇된 연출이나 안이한 장치 등, 지금까지의 연극계 인습을 철저하게 비판하여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생활 속에 예술을, 예술 속에 생활을'이란 표어 아래 사실적인 연기로 자기 배역에 충실하려는 배우의 예술을 창조했다. 제1회 공연을 레프 톨스토이의 <황제 표도르>로 장식했으며, 또한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의 <갈매기>의 압도적인 성공으로 '모스크바 예술극단'과 창작가 체호프는 굳게 맺어졌다. 그 후에도 체호프는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을 이 극단에 제공했다. 또한 '모스크바 예술극단'은 <밑바닥>의 작가 고리키(Aleksei Maksimovich Gorki, 1868-1936)도 발견해 냈다. 뛰어난 자기 나라 작가와 결부된

내면적인 연기창조의 방법인 스타니슬라프스키 시스템을 확립시켰으며, 각국의 자유극장 운동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과를 올린 것이 '모스크바 예술극단'이라 하겠다.

아일랜드 국민연극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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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eland 國民演劇運動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에서는 그 독립운동과도 관련을 지니면서 새로운 국민연극 수립의 운동이 일어났다. 1899년에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1865-1939)와 그레고리 부인(Lady Gregory, 1852-1932)은 에드워드 마틴, 조지 무어와 함께 '아일랜드 문예극단'(The Irish Literary Theatre)을 창설, 예이츠의 <캐슬린 백작부인>을 상연하여 더블린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3년 후에는 발전적 해산을 하여 1902년에 페이 형제가 예이츠를 회장으로 추대하여 '아일랜드 국민연극협회'를 탄생시켰다. 다음 해의 런던 공연을 계기로 호니만 여사의 자금 제공을 받아 애비 극장(Abbey Theatre)을 재건하고, 이후 '아일랜드 국립극단'이 됐다. 예이츠, 그레고리 부인 외에 민족성이 풍부하고 시정이 넘치는 극시인 싱(John Millington Synge, 1871-1909)의 출현으로 아일랜드 국민연극운동은 일약 근대극운동의 독자적인 성격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일랜드 극단'에 의한 1910년대의 미국 순회공연은 미국에서의 소극장운동에 신선한 자극을 주기도 했던 것이다.

연출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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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出-確立

이렇게 해서 프랑스의 '자유극장'에서 발단한 근대극운동은 짧은 기간 사이에 각국으로 번져갔으며, 희곡 존중의 정신이 중시되고 스타 시스템에 대한 앙상블이 잡힌 무대창조에 유념(留念), 희곡·배우·장치·의상·조명 등 각 분야의 무대에 있어서의 통솔자로서 연출자가 태어났음은 근대극운동의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극장내의 예술적 통솔자로서 독립된 기능을 갖는 '연출의 확립'은 이미 마이닝겐공(公)이나 앙투안, 브람 등에 의하여 그 선구적인 작업이 이루어져 왔던 셈이다. 고든 크레이그(Edward Gordon Craig, 1872-1966),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에 의하여 더욱 명확한 무대예술의 창조이념과 연출자의 역할이 인식되게 되었다. 이 밖에도 그랜빌 바커(Harley Granville-Barker, 1877-1946), 스타니슬라프스키, 단첸코 등이 연극사에 남긴 역할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극장기구의 개혁이나 기계와 기술의 발달에 따르는 무대설비의 현저한 진보로 연출자의 작업은 더욱 복잡해지고, 근대극장은 무대기구의 구사(驅使)로 극장예술을 더욱 발전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근대극 운동은 완성되어 이윽고 제1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하여 유럽 각국에 선풍처럼 일어나는 현대연극의 다채로운 활동을 준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작가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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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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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lai Vasilievich Gogol (1809-52)

러시아의 극작가. 젊었을 때 배우를 지망했으나 성공하지 못해 문학에로 전환했으며, 초기 작품이 푸슈킨에게서 높이 평가받았다. 고골리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극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검찰관>은 1836년에 궁정극장에서 황제를 앞에 두고 초연되었으며, 황제의 호평을 받아 검열에서 상연금지가 되는 것을 모면한 작품이다. 시골의 정치를 테마로 하여 러시아 관리의 부패상을 날카롭게 풍자, 묘사한 이 작품 때문에 고골리는 격심한 공격의 대상이 되어 결국 러시아에서 떠나게 되었다. 1847년에 또 하나의 대표작 <결혼>을 쓰고 이듬해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건강을 해친 뒤였다. 고골리의 사실주의 정신이 훗날의 러시아 문학과 연극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뷔흐너, 게오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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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 Buchner(1813-37)

독일의 극작가. 동 시대의 낭만적 경향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은 채 두세 작품만을 남기고 요절한 천재이다. 1930년대에 라인하르트나 오손 웰즈에 의하여 부활 상연됨으로써 높이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대표작 <단톤의 죽음>(1835)은 프랑스 혁명의 거물(巨物)에게 새로운 인간관찰의 눈을 돌려 짧은 장면의 연속이라는 형식을 취한 걸작이다. 미완으로 남겨진 <보이체크>는 그 야릇한 분위기로 20세기의 표현주의 희곡과 흡사한 감마저 느끼게 한다.

헤벨, 프리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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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edrich Hebbel(1813-63)

독일의 극작가. 집이 가난하여 젊었을 때의 고생이 그의 작품에 한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헤벨은 인생의 비극을 인간 개인과 외적(外的) 혹은 내적 힘과의 갈등에서가 아니라 사회의 성립이나 발전과정 속에서 보았다. 그는 즐겨 역사와 전설의 이야기를 다루었고 최초의 희곡 <유디트>(1840)도 구약성서에서 소재를 얻고 있다. 단 하나의 예외는 <마리아 막달레나>(1844)이다. 중산계급의 가정비극이며 근대 사실주의에의 가교(架橋) 구실을 하는 이 작품은 훗날의 입센이나 스트린드베리의 근대비극의 선구로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헤벨의 작품에는 그 밖에도 <헤로데와 마리안>(1850)과 3부작 <니벨룽겐>(1861) 등이 있다.

베크, 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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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Francois Becque(1837-99)

프랑스의 극작가·비평가. 처음에는 유럽에 유행했던 오지에, 뒤마 피스, 사르두 등 이른바 '잘 만들어진 희곡'의 영향 아래 극작을 썼으나 1882년에 현실생활의 충실한 묘사를 내용으로 하는 <까마귀떼>로 프랑스 연극사상 하나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계속해서 쓴 <파리의 여자>(1885)도 베크의 날카로운 인간관찰과 뛰어난 극작술을 나타내는 걸작이다. 베크는 앙투안의 자유극장에 의한 최초의 사실파 극작가로 지목되나 연극을 17세기의 전통으로 되돌리기를 주장하고 <까마귀떼> 이후의 작품에서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으로 돌아갔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오스트로프스키, 알렉산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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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ksandr Nikolaevich Os­trovski (1823-86)

러시아의 극작가. 연극에 전념한 러시아 최초의 작가.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법률을 배웠다. 그를 최초로 유명하게 한 것은 1848년의 <파산(破産)>(후에 <가정사정>으로 改題)이다. 실업한 회사의 간부사원이 허위의 파산 신고를 한다는 줄거리인 러시아판(版) <볼포네>라고도 할 수 있는 희극으로, 검열에서 통과되지 않았으나 원고는 많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었다는 작품이다. 이 작품 외에 <현명한 사람도 넘어질 때가 있다>(1868) 등의 사실적 현대풍자극에서 오스트로프스키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나, 외국에서는 오히려 남편에게 무시당하여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젊은 아내의 비극을 다룬 <뇌우(雷雨)>(1860)가 더 유명하다.

톨스토이, 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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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v Nikolaevich Tolstoi (1828-1910)널리 알려진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러시아 문학의 최고봉에 위치하는 톨스토이는 1850년대에 이미 투르게네프나 오스트로프스키의 영향을 받아 극작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근대 연극사에서 유명하게 한 것은 주로 <어둠의 힘>(1886), <교육의 열매>(1891), <산송장>(1911) 등의 작품이라 하겠다. <어둠의 힘>은 실화에 의거해 러시아 농민의 음산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자연주의 희곡으로 뛰어난 작품이며 러시아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어 프랑스에서 초연했다. <교육의 열매>는 시골 귀족의 무의미한 생활을 풍자한 것. <산송장>은 그리스도교적 자기 희생과 결혼법(結婚法)의 문제를 다룬 희곡으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설 <안나 카레니나>와 <부활>은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각색, 상연한 바 있다.

입센, 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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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k Ibsen (1828-1906)

노르웨이의 극작가·시인. 근대 시민극(市民劇)을 확립한 공적은 너무나 크다고 하겠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항구도시(인구 2천) 시엔에서 태어나고, 유복한 가정이었으나 입센이 8세 때 파산하다시피 되어 15세 때 그림스타라는 조그마한 항구에서 약방 점원이 되었다. 이 그림스타 시대가 입센의 성장기이다. 이 무렵부터 키에르케고르나 볼테르의 작품을 읽었던 모양이다. 20세의 겨울, 입센은 처녀작 <카틸리나>를 썼다. 고대 로마의 혁명아 카틸리나에서 소재를 구한 시극(詩劇)으로서 48년의 프랑스 혁명에 자극을 받았음은 확실하나 작품의 테마는 오히려 빛과 어둠을 상징하는 두 여성에게 동시에 마음이 끌리는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라고 하겠다. 이 테마는 입센의 일생을 일관하고 있다. 이듬해 친구의 원조로 <카틸리나>를 자비출판하여 수도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로 나왔다. 이 해에 쓴 1막물 <전사(戰士)의 무덤>은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상연되었다. 수도에서 입센은 갖가지 저널리스틱한 활동에 종사했으며 조합운동에도 관계하여 자칫하면 검거될 뻔하기도 했다. 이후 입센은 정치적 실제활동에는 일절 참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1851년 가을, 서해안의 중심도시인 베르겐에서 새로 생겨난 국민극장의 무대감독 겸 극작가로 초빙되었다. 여기서의 6년간은 입센의 극작가 수업시대이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1월 2일의 극장 기념일에 상연하기 위한 신작을 써야 할 의무가 부여되고 있었다. 이 시기의 대표작에 <오스트라트의 잉게르부인>이 있다. 흥행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스크리브 일파의 교묘한 줄거리 구성의 수법을 답습하면서 여주인공의 가명(家名)에 대한 집념을 묘사하여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1857년, 입센은 수도의 노르웨이 극장으로 옮긴다. 국민문학운동에 전념해 비외른손과 친교를 맺었으나 경제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로, 알코올 중독이 되어 자살을 꾀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58년에 베르겐에서 사귄 수잔 토레센과 결혼, 이듬해 외아들인 시구르가 태어났다. 수잔이 입센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하겠으며 이 시기에 쓰여진 <헬겔란트의 해적>(1858)이나 <사랑의 희극>(1862)의 여주인공은 그녀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전자는 아일랜드 전설을 소재로 한 신문극이며, 후자는 당시의 연애풍속을 해학적으로 그린 운문극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목사의 희화화(戱畵化)는 보수파로부터의 공격을 야기시켰다. 1862년 노르웨이 극장은 경영난으로 폐쇄당해 몇 번인가 신청한 예술가 연금도 국가로부터 거부당했다. 63년에 주어진 약간의 여비와 뵈른손 등의 원조로 입센은 64년 4월에 조국을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이후 27년 동안을 두고 그는 몇 차례의 짤막한 귀향 기간을 제외하고는 노르웨이에 돌아가지 않았다. 주로 독일과 이탈리아에 머무르며 극작생활에 전념했다. 노르웨이를 떠나기 전에 쓴 <왕위 찬탈자들>(1865)은 셰익스피어적 수법이 엿보이는 역사극으로서 그때까지의 입센 작품 가운데 최고 걸작이다.

이탈리아에서의 입센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빈곤했다. 그러나 65년에 써서 이듬해 덴마크에서 출판된 극시 <브랜드>(Brand)는 덴마크·프로이센 전쟁에 즈음한 노르웨이 국민의 배신행위를 비난한 것이라 하여 청년층을 매혹시켜 순식간에 여러 판을 거듭했다. 이 작품으로 입센은 일약 노르웨이 최고의 시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으나 이를 기회로 종래 보히미안풍이었던 그는 비사교적이며 귀족적인 외관을 갖추게 된다. 그리하여 필적까지 달라진다. 이듬해 67년에 <브랜드>와 한 쌍을 이루는 <페르귄트>가 세상에 나올 것으로 기대했던 사회는 전작(前作)과 전혀 다른 경묘함에 당황하여, 이것은 시가 아니라고 하는 비평가까지 있었다. 입센은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이 작품이야말로 앞으로 노르웨이 시(詩)의 한 기준이 될 것이라고 반박했으며 실제로 오늘날에 와서는 노르웨이 문학의 최고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공상에 잠기며 거짓말에만 능숙한 건달 청년 페르는 청순한 소녀 솔베이를 사랑하나 그녀에게서 피하여 세계를 방황한 끝에 늙은 몸이 되어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5막물의 희극적 극시로서, 노르웨이 민화(民話)를 소재로 충분히 사용하였으며 노르웨이 국민의 초국가의식(超國家意識)에 대한 풍자는 신랄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페르는 <브랜드>의 주인공이었던 순교자적인 브랜드와는 정반대적인, 안이함만을 추구하는 노르웨이 국민의 전형(典型)으로 되어 있으나 작품의 주제는 양쪽이 모두 자기에게 철저하다는 것이 어떠한 것이냐는, 입센의 일생을 일관한 인생문제라고 하겠다. 이러한 극시에는 훗날의 입센 작품이 지니는 요소의 전부가 싹트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페르귄트>는 상연을 위해 쓰여진 것은 아니었으나 1876년의 초연은 그리그의 음악을 곁들일 수도 있고 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뒤에 독일로 옮긴 입센은 운문을 완전히 포기하고 만다. 일반적으로 <페르귄트>까지를 입센의 극작 제1기로 삼으며 이때부터 69년의 <청년동맹(靑年同盟)>에서 시작되는 이른바 사실주의 시민극의 제2기로 들어가는 셈이다(유일한 예외는 2부로 되는 방대한 역사극 <황제와 갈릴레아인>(1873), <사회의 기둥>(1877), <인형의 집>(1879), <유령>(1881), <민중의 적>(1882) 등으로 계속되는 사회문제극은 입센을 유럽 연극의 제1선까지 밀어줬다. 그는 다윈이 대표하는 새로운 과학사상, 졸라가 대표하는 새로운 문학사상에 따르는 가장 급진적인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84년의 <들오리>부터 입센의 사회사상은 차차 예리함을 잃기 시작했으며 오히려 인간의 내면 문제를 탐구해 낸듯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여겨졌다. 65년 여름의 노르웨이 방문중에 소재를 얻은 <로스메르스흘름>(1886)도 정치투쟁을 줄거리로 삼기는 했으나 주제는 남녀간의 심리적 상극(相剋)이라고 하겠다. 계속되는 <바다의 부인(夫人)>(1888), <헤더 가블러>(1890)도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1891년에 입센은 오랜 외국생활을 청산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향 제1작 <건축가 솔네스>(1892)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노(老)예술가의 만년에 볼 수 있는 일련의 자기고백극, 즉 제3기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입센은 상징주의적인 경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조그만 에이올프>(1894),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1896)을 거쳐 마지막의 <우리들 사자(死者)가 눈뜰 때>(1899)는 입센의 일생을 결론짓는 심각한 분위기를 지니는 희곡이다. 입센을 읽기 위해 노르웨이어를 배웠다고 하는 젊은날의 제임스 조이스는 이 작품에 관해서 열렬한 소개문을 쓴 바 있다. 입센 자신은 이를 에필로그로 이름짓고 있으나 낡은 시대와 결별하고 참으로 새로운 극을 지향하려는 의욕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병마(病魔)에 시달려 몇 차례의 발작까지 치른 그는 걸을 수도 없고 집필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1906년 5월 23일, 입센은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치러졌다.

근대극에서의 입센의 사상적·극작기법적(劇作技法的) 영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입센은 단순한 사실극작가(寫實劇作家)나 사회문제 극작가도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 크게 나눈다면 제1기의 낭만주의, 제2기의 사실주의, 제3기의 상징주의로 나눌 수 있겠으나 실제로는 모든 작품이 모든 요소를 포함시키면서 발전해 왔다. 입센도 자기 작품을 전체적으로 하나의 체계를 이룬 것으로서 읽도록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의 사상이 낡았다든가, 극작법의 교묘함이나 다른 것에의 영향을 논할 뿐만 아니라, 입센이 발전시켰던 독자적이면서도 전통적이며 극적인 것을 구명(究明)하고 재평가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하겠다.

스트린드베리, 아우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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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Strindberg(1849-1912)

스웨덴의 극작가이며 소설가·시인. 스트린드베리의 일생을 일관한 불행은 그의 출생에 기인하며,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는 스톡홀름의 중산층 가정에 태어났으나 모친은 원래 호스테스와 가정부(家政婦)를 했던 여자였다. 그는 자신을 '하녀의 아들'이라 불러 하층계급의 피를 이어받았음을 강렬하게, 그리고 거의 고의적으로 계속 의식했었다. 13세 때 모친을 잃고 부친은 곧 재혼했다. 여성에 대한 사랑과 증오의 상극은 이리하여 스트린드베리의 일생을 일관하게 된다.

1867년, 웁살라 대학에 입학, 아버지에게 원조를 받지 않고 자활을 하려고 했으나 좌절, 1학기로 대학을 중퇴했다. 이듬해 가정교사가 되어 들어간 집의 주인인 의사

람 박사(博士)의 영향으로 문학과 과학에의 흥미가 솟았으며, 의학을 배우기 위해 웁살라에 돌아오나 화학 자격시험에 실패, 계획을 포기했다. 그 후 배우가 되려고 연극학교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얼마 후 작가적 재능에 눈 떠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스트린드베리의 최초의 중요작품은 1872년에 쓴 <올로프 신부(神父)>이다. 스웨덴의 종교개혁에서 취재한 이 역사극에는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및 입센의 <브랜드>의 영향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왕립극장이 그 상연을 거부했음은 스트린드베리의 염세적 경향을 더 짙게 했을 뿐만 아니라 권위에 대한 반항을 더욱 강하게 했다.

1874년, 스트린드베리는 왕립 도서관의 직원이 되어 약간이나마 생활의 안정을 얻었다. 이듬해 귀족의 아내 시리 폰에센을 만나자 곧 사랑에 빠져버려 2년 후는 남편과 헤어져 스트린드베리와 결혼했다. 그러나 모두가 격렬한 개성의 소유자인 이들의 사이는 얼마 후 싸움이 그칠 사이가 없게 되었다. 이 동안의 사정은 비록 주관적인 서술이긴 하나 스트린드베리의 자전적 소설 <치인(癡人)의 고백>(1895)에 상세히 나온다. 1879년, 스톡홀름의 예술가 사회를 묘사한 소설 <붉은 방>으로 그는 새로운 사실주의 문학의 기수가 되어 명성을 획득했다. 이어 여배우가 된 아내를 위한 몇몇 희곡도 썼으며, 1883년 아내와 함께 스웨덴을 떠나 이후 16년 동안을 거의 외국에서 보내게 된다.

근대 사실극 작가로서의 스트린드베리의 지위를 확고하게 한 것은 <아버지>(1887), <영양 줄리>(1888)이다. 이 작품들은 졸라의 자연주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쓴 것이나 그 이론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걸작이다. 또한 입센의 <인형의 집>을 풍자한 것 같은 이름의 소설을 포함한 단편집 <결혼>을 1884년에 출판했으나 그 가운데의 1편 때문에 모독죄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 무죄가 되기는 했으나 그의 정신적 타격은 격심했다.

스트린드베리의 여성 혐오는 최초의 결혼생활 중에 쓰인 많은 작품에서 농후하게 나타나며 그것은 여성숭배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1893년인 44세 때 그는 두번째 결혼을 한다. 상대는 젊은 오스트리아의 저널리스트 프리다 울이다. 그러나 결혼은 곧 파탄했다. 이듬해 두 사람은 별거하여 스트린드베리는 파리에서 격렬한 정신적 불안정 상태를 경험한다. 이른바 '인페르노(Inferno)' 시대이다. 그러나 이것은 의학상의 정신착란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定說)이다. 1897년, 스트린드베리는 이혼했다.

인페르노 시대를 탈출한 스트린드베리의 강인한 정신은 다시금 눈부신 창작활동을 하게 했다. <다마스커스로(제1부 및 2부)>(1898)에 계속되는 일련의 상징주의적·표현주의적 작품, 즉 <죽음의 무도(제1부 및 2부)>(1901), <몽환극(夢幻劇)>(1903), <유령 소나타>(1907) 등은 독일 표현주의 연극, 나아가서는 근래의 부조리(不條理) 연극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동시에 <구스타프 바사>(1988)를 필두로 한 몇몇의 뛰어난 역사극, <부활제>(1901), <관을 쓴 신부(新婦)> <백조 공주>(1902)와 같은 청순한 희곡도 썼다.

1901년, 스트린드베리는 노르웨이의 여배우 하리에트 보세와 세번째 결혼을 했다. 재능있는 여배우 보세는 몇몇의 스트린드베리 작품에서 주역을 맡았으나 결혼생활은 이윽고 다시 파국을 맞이하여 3년 후에 이혼한다. 1907년에 유명한 스톡홀름의 '인티마 테아트르'를 창설, 객석 161개의 이 소극장은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마지막 연애 상대는 파니 파르크네라는 19세의 소녀였다. 그는 그녀의 집(그것을 그는 '푸른 탑'이라고 불렀다)에 하숙하고 있었으며 59세와 19세라는 연령 차이를 생각하여 결혼은 단념했다. 마지막으로 쓰여진 작품은 1909년의 운문극 <대가도(大街道)>이다.

주인공인 사냥꾼이 여기저기서 직면하는 에피소드가 연결된 전형적인 방랑극으로 그가 도서관 시대에 중국 도서의 목록을 작성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웠다고 하는 그의 동양연구의 일단을 엿보이게 하는 작품으로 이색적이다.

1912년에 그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립 아카데미는 그의 죽음을 묵시(默視)했으나, 스웨덴 최고의 작가로서 그의 이름은 널리 국민의 존경을 모았다.

성격에 있어서나 작풍(作風)에 있어서도 같은 북구(北歐)의 거장 입센과는 반대의 입장에 서는 스트린드베리는 그 본질을 구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얼핏 보면 혼돈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그의 표현주의 작품에서도 그 저류(低流)에 흐르는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과 내용이라 하겠다.

와일드, 오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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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6-1900)

아일랜드 태생의 극작가. 더블린에서 교육을 받은 후 옥스퍼드 대학에서 배웠다. 태만하기로 유명했으나 고전학에서는 발군의 성적을 나타냈다. 1882년에 미국으로 강연여행을 떠나 희곡을 쓰고 이것이 뉴욕에서 상연되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몇 가지 소설이나 시를 쓰고 또는 비극도 썼으나 와일드의 재능이 발휘된 것은 경묘한 희극의 분야, 즉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1892), <시시한 여자>(1893), <이상적(理想的) 남편>(1895) 등으로, 그 정점을 차지하는 것이 <성실하다는 것의 중요성>(1895)이다. 이러한 작품에서 와일드는 왕정복고기(王政復古期)의 콩그리프가 이룬 희극 작법의 전통으로 되돌아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극 <살로메>는 영국에서 상연이 금지되었으며 1894년에 사라 베르나르에 의해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1895년에 와일드는 동성애 사건으로 2년간의 노동 금고형 처분을 받았다. 그 후 파리에 나왔으나 건강을 해치고 경제적으로도 파탄,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다.

쇼, 조지 버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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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e Bernard Shaw (1856-1950)아일랜드 태생의 극작가이며 비평가.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모친으로부터의 영향으로 음악에 흥미를 가져서 받은 성악 레슨은 후에 연설자가 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학교교육을 받았으나 성적은 거의 최하위, 다만 작문은 뛰어났으며 쇼의 흥미는 문학, 음악, 그래픽 아트 등에 있었다.

1871년에는 더블린의 토지 중개사무소(土地仲介事務所)에 근무, 여러 신문잡지에 투고하고 있었으며, 경제적 이유로 모친이 두 딸을 데리고 런던으로 나와 음악교사가 되자 쇼도 그들 뒤를 따라 1876년에 런던으로 나왔다. 이후 단기간의 에디슨 전화사 근무를 제외하고는 직업을 가진 일이 없었다. 런던의 예술가들과 사귀어 각 신문에 원고를 썼으나 수입이 적어 양친의 도움으로 생활했다. 1879년부터 83년에 걸쳐 5편의 소설을 썼으나 모두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해 그 가운데 4편은 친구의 잡지에 게재되었다.

1882년 9월, 헨리 조지의 연설을 듣고서 쇼는 사회주의로 나아갔다. 마르크스 연구를 비롯, 1884년에 창설 직후였던 페이비안 협회에 참가, 많은 사회사상가와 사귄다. 그 가운데에는 칼 마르크스의 딸 에레아놀 마르크스도 있었다.

1885년부터 98년의 13년 동안 쇼는 신문 잡지의 비평란을 담당하여 주로 음악·미술·연극·문학의 시평(時評)을 했다. 모두가 영국 비평계의 최고 수준을 과시하는 것이며, 특히 1895년에 시작되는 <새터데이 레뷔>에서의 연극비평은 오늘날 모범이 될 만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입센 옹호, 셰익스피어 비판, 당시의 인기작가 피네로(Sir Arthur Pinero) 비판은 다대한 반향을 일으켰다. 쇼의 평론으로는 <입세니즘의 진수(眞髓)>(1891, 1913), <예술의 정기(正氣)>(1895), <완전한 바그너파(派)>(1898) 등이 중요한 것으로 손꼽힌다.

쇼가 극작에 전념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늦다. 1885년부터 쓰기 시작했던 최초의 희곡 <홀아비의 집>은 92년까지 완성되었으며 런던의 로열티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이어 입센 스타일의 새로운 여성을 다룬 <사랑을 섭렵하는 사람>(1893), 근대 매춘기업을 폭로한 <워렌 부인의 직업>(1893)은 모두 극장측에서 상연이 거부되었으나 1894년에 상연된 <무기와 사람>으로 쇼는 극작가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 뒤 <캔디다>(1894), <운명의 사람>(1895), <악마의 제자>(1897),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898), <인간과 초인>(1903) 등으로 쇼는 세계적인 유행작가가 된다. 그러나 예술적으로는 이러한 전기의 작품보다 후기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1913-16)나 <성녀(聖女) 존(Saint Joan)>(1923)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이 정설(定說)로 되어 있다.

쇼의 인물은 거의가 작가의 대변자이며 그 작품은 자기 사상을 진술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는 비난, 혹은 그와 반대로 쇼는 단순한 감상적인 오락작가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적지 않다.

그러나 표면적 사상선전극 및 오락극 내부에 깃들인 참된 아이러니스트로서의 쇼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바버러 소령>(1905)이나 <하트브레이크 하우스>가 지니는 독자적인 희극성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확실히 그가 말했듯이 우선 그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전작품을 적어도 2회 이상은 읽고 그것을 10년 동안 계속해달라"고 쇼는 말한다.

체호프, 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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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러시아의 극작가이며 단편소설가. 타간로크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원래 농노(農奴)였으며 부친은 조그마한 채소가게를 했었다. 체호프는 어릴 때부터 가게를 도와야만 했으며 지방정치와 교회합창에 너무 열중한 부친은 파산, 가족은 학교 때문에 홀로 남은 체호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모스크바로 나왔다. 1879년이 되어 처음으로 체호프는 모스크바의 가족과 합쳤으며 대학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는 의학공부를 하는 한편 페테르스부르크나 모스크바의 잡지에 유머 단편을 써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체호프의 글은 호평을 받았으며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미 신진 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23세 때 걸린 폐결핵(가족과 친척의 대부분이 이 병으로 사망)이 체호프의 건강을 늘 위협하게 된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체호프는 (후에 와서는 그 인격은 존경했어도 그 사상에는 반드시 공명한 것은 아니었다) 시베리아, 사할린에 여행을 계획, 치밀한 준비를 한 끝에 1890년 4월에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사할린섬에 유배된 수인(囚人)들의 비참한 생활은 체호프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는 후에 이때의 기행문을 쓴 바 있다. 7개월 이상이나 걸려 모스크바에 다시 돌아와 1892년, 교외에 저택을 사서 양친·누이동생과 함께 살게 된다. 의사로서 이웃 농부들의 건강을 돌보거나 마을에 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899년,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얄타해(海)를 마주보는 크림으로 옮겼다. 1900년에는 러시아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나 이에 항의하여 자신도 사임, 1904년에 체호프는 폐결핵으로 말미암아 44년의 생애를 마쳤다.

체호프의 만년은 연극, 특히 모스크바 예술극단과의 유대가 강했고, 1901년에 결혼한 올리가 크니페르는 예술극단의 여배우였다.

그러나 체호프는 타간로크 시대에 이미 연극에 흥미를 가졌으며,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이 시기에 장막물(長幕物)의 것 2편, 1막물의 희극 1편을 썼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모스크바에 나와서는 4막물의 것을 써서 상연하려고 꾀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 작품 제목은 알 수 없으나 주인공 프라토노프의 이름으로 불린다)은 19세기 말의 러시아 사회상태를 배경으로 하여 태만한 환경에 반항하면서도 스스로는 아무런 의욕도 갖지 못하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1887년에 쓰여진 <이바노프>는 모스크바 및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기교적으로는 <프라토노프>보다 앞섰으나 아직도 과잉된 극적 효과를 노리는 낡은 수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다음의 <숲의 정(精)> 실패는 체호프의 극작을 한때 멈추게 했으나 이 무렵에 쓰인 1막물에는 <곰>(1888)이나 <결혼신청>(1889) 등 뛰어난 희극이 있다.

체호프의 극작 후기는 1896년의 <갈매기>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바냐 아저씨>(1899), <세 자매>(1901), <벚꽃동산>(1903) 등은 모두 체호프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근대극 가운데 걸작이며 이러한 작품에서 체호프는 일상생활의 무질서를 그대로 무대에 옮긴 듯한, 이른바 극적 행위를 직접적 줄거리로 삼지 않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회화극(會話劇)을 확립했다.

<갈매기>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초연 때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으나 2년 후에 다시 새로 설립된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다루었을 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희극으로서 쓰여진 이 작품을 오히려 비극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 연출가 스타니슬라프스키가 참으로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있다고 체호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 체호프의 작품은 모두 모스크바 예술극단이 상연하게 됐다. <바냐 아저씨>는 앞서의 <숲의 정>을 다시 쓴 것으로서 그 톨스토이즘이나 멜로드라마의 성격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고 있다. <세 자매>는 초연 후 전집에 수록되자 다시 고쳐쓴 바 있다.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체호프의 44세 탄생일에 초연의 막이 올랐다.

체호프의 희곡(주로 후기의 4작품)은 오랫동안 러시아나 외국에서도 작자의 페시미스틱한 인생관을 반영한 러시아 귀족사회에 대한 만가(挽歌)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체호프 자신은 그러한 견해에 거의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작품 안에 작자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칠 정도로 깃들여 있다는 것이 그 후의 정정(訂正)된 해석이다. <세 자매>나 <벚꽃동산>에서 서술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到來)에 대한 전망은 체호프가 죽은 지 얼마 후에 실현된 러시아 혁명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체호프를 다만 비관적인 작가로부터 낙관적인 작가로 그 정의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할 것이다. 얼핏 보면 비극적이며 사진적(寫眞的)인 모방처럼 보이는 이러한 희곡이 사실은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극적 형식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체호프의 작극술(作劇術)을 구명한다는 것이 그를 이해하려는 첫걸음일 것이다.

하우프트만, 게르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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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hart Hauptmann(1862-1946)

독일의 극작가. 슐레지엔의 작은 도시에서 호텔 경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각가에 뜻을 두어 독일과 이탈리아의 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오토 브람의 '자유무대'에 자극을 받아 극작을 시작했다. 처녀작 <해가 뜨기 전>은 1889년에 '자유무대'에서 초연되어 독일 자연주의 연극의 시초를 알렸다. 하우프트만이 입센의 영향을 받았음은 일반적으로 시인하는 바이나, <화해(和解)>(1890)는 <유령>과, <쓸쓸한 사람들>(1891)은 <로스메르스홀름>과 비슷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다. 하우프트만의 최고걸작이라고 불리며 또한 가장 성공한 작품은 그 다음에 쓰여진 <방직공>(1892)이다. 1884년, 슐레지엔 지방에서 실제로 일어난 방직공들의 폭동을 제재로 하는 자연주의극으로서 최초에는 정치적 이유로 인하여 상연이 금지되었다.

자연주의 작가로서 유명해진 하우프트만에게는 그러한 본질적으로 낭만적인 면이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표면화된 것이 <하넬레의 승천(昇天)>(1893)이며 1896년의 <침종(沈鍾)>에 이르러 절정이 된다. <침종>은 <방직공>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성공작이나, 가장 일찍이 그 평가를 잃은 작품이기도 했다. 하우프트만은 자연주의 작품과 반자연주의 작품을 병행시키면서 만년은 혼란스런 시대 양상(樣相) 및 불안정한 자기의 내면생활을 반영시킨 작품을 냈다. 1912년에 노벨 문학상 수상.

슈니츨러,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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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hur Schnitzler(1862-1931)

이른바 빈파(派)의 극작가. 본업은 의사로서, 그의 작품도 마치 진찰실의 의사처럼 냉정한 필치를 느끼게 한다. 대표작 <아나톨>은 1893년에 쓰여졌다. 무책임하고 경박한 멋장이 사내들의 에피소드집(集)이라는 형식의 작품이다. 2년 후에는 더욱 어두운 분위기를 지니는 <연애의 참맛>이 쓰여졌다. 하층계급의 딸이, 장난으로 연애를 하고 있던 귀족 사내가 다른 여자 때문에 결투로 죽은 것을 알자 비관하여 자살한다는 줄거리이다. 슈니츨러의 특징은 경묘하고 감각적인 작품 가운데에서 성(性)의 문제를 뚜렷이 통찰하고 있다는 점이라 하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초록빛 앵무새>(1899)처럼 진실과 허구(虛構)의 문제를 다룬 작품 <베른하르디 박사>(1912)처럼 빈의 병원에서 일어난 반(反) 유태 사건을 다룬 작품도 있다.

메테를링크, 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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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Maeterlinck(1862-1949)프랑스어로 작품을 쓴 벨기에의 극작가·시인. 겐트에서 태어나 겐트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1887년에 파리로 나와 상징주의 시인들과 사귀나 부친의 죽음으로 벨기에로 돌아왔다. 극작가로서의 경력은 1889년의 <왕녀 말렌>에서 시작되나 <침입자>(1890), <맹인(盲人)들>(1890), <7명의 병든 왕녀>, <펠리아스와 멜리장드>(1892), <알라딘과 팔로미드>(1894), <실내>(1894), <틴타질르의 죽음>(1894) 등 자연주의 연극의 반동(反動)이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 말의 신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 계속된다. 이러한 작품의 공통된 특징은 일상생활의 내부에 깃들여 있는 신비적인 것의 정적(靜的)인 표현, 마치 베일로 가려져, 우리들로서는 그 상태조차 알 수 없는 듯한 몽환적 분위기이며 그 밑바닥을 흐르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운명의 힘에 대한 감각이다. 따라서 메테를링크는 즐겨 중세의 이야기를 제재로 했다.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는 그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의 이른바 '정적 연극(靜的演劇:static theatre)'론(論)은 가정 안에 침입해 온 죽음의 감각적 표현인 <침입자>나, 안내인이 죽어 숲속에서 헤매며 절망하는 장님들을 그린 <맹인(盲人)들>이나, 행복한 가정을 안에, 그리고 거기에 슬픈 소식을 갖고 오는 이웃사람을 밖에 두고 아무 것도 지껄이지 않는 실내 인간들의 드라마를 만드는 <실내> 등의 소품에 더욱 명확하게 실현되고 있다. '정적 연극'이란, 사건으로 가득 찬 비극보다도 깊은 진실을 나타내는 일상생활의 비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메테를링크의 연극관으로서, 예컨대 의자에 앉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노인이라 해도, 그가 주변에 있는 모든 신비적인 힘이나 행위를 감각한다고 하면, 그쪽이 애인의 목을 졸라 죽이는 사나이나 승리를 외치는 병사보다도 진실한 인간적 생명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메테를링크를 위대한 신비적 사상가로 부르는 사람은 없으나 그의 연극관이 지니는 새로움은 그 시비(是非)는 차치하고라도 인정해야만 할 것으로, 실제로 다른 것에의 영향은 컸었다.

그러나 1902년의 <몬나 반나>에서는 그의 새로움이 평범한 극적 수법으로 후퇴하고 있다. 세상의 평은 이 작품이나 <파랑새>(1908) 등에서 좋았으며, 예컨대 <파랑새>를 두고 매력적이라는 이상의 찬사를 주는 비평가는 오늘날 드물 것이다.

베데킨트,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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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k Wedekind(1864-1918)

독일의 극작가. 하노버에서 태어났다. 저널리스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서커스의 선전 담당이나 비서가 되면서 곳곳을 여행했다. 1897년, 배우 겸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희곡을 상연했다. <봄이 눈뜰 때>(1891), <땅의 영(靈)>(1895), <판도라의 상자>(1903) 등이 대표작이나, 성(性)의 해방을 지향하여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僞善)을 폭로하는 이러한 작품은 상징적 스타일을 취하고 독일 표현주의 연극의 선구로 간주되고 있다.

예이츠, 윌리엄 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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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utler yeats(1865-1939)아일랜드의 시인이며 극작가. 19세기 말의 아일랜드 연극운동의 주요한 추천자이기도 했다. 1904년에 설립된 더블린의 애비 극장이 초기의 곤란을 극복하고 존속한 것은 예이츠의 작가로서의 재능과 지도자로서의 통솔력이 크게 기여했었다. 그러나 근대극에서의 예이츠의 참된 공헌은 사실주의(寫實主義)로 덮여 있던 연극에 시극(詩劇)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예이츠의 초기의 시극 <심원(心願)의 나라>(1894), <캐슬린 백작부인>(1899), <환영(幻影)의 바다>(1897-1906) 등은 관객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이며, 계속되는 <모래시계>(1903), <왕(王)의 인구(人口)>(1903), <별에서 온 유니콘>(1907)에서는 극적 수법에 진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농민극(農民劇)이나 아일랜드 전설에 의거한 영웅극도 썼다. 만년의 작품에서는 예이츠 시극의 특징인 단순한 표현에 포함되는 사상의 심원(深遠)함이 관객의 지성(知性)과 상상력에 가장 강하게 의존하는 형태로 정점에 이르렀다. <창가에 쓰여진 말>(1934), <연옥(煉獄)>(1938)이 그 대표작이다.

싱, 존 밀링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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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Milington Synge(1871-1909)

아일랜드의 극작가. 더블린 교외에서 태어났다.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한 후 음악을 공부하러 독일에 갔으며, 다시 파리로 간 뒤 문학비평을 쓰면서 몇 해를 보내다 파리에서 예이츠를 만났다. 싱의 재능을 알아차린 예이츠는 그에게 아란섬(Aran Island)으로 갈 것을 권했다. 그 충고를 따라 아일랜드에 돌아와 아란섬 사람들의 생활과 언어를 낱낱이 관찰했다. 이 기록은 후에 <아란섬>(1907)이라 하여 출판되었다. 싱의 극작은 짧은 일생의 마지막 6년동안에 집약되고 있다. 최초의 <계곡의 그늘>(1903)은 1막물의 희극, 다음의 <바다로 달려 가는 사람들>(1904)은 단순한 구성 가운데 섬사람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했던 근대 1막물로서 걸작의 하나이다.

1904년, 싱은 예이츠나 그레고리 부인 등과 함께 더블린의 애비 극장(Abbey Theatre)의 운영위원이 되었다. 희극 <성자(聖子)의 샘>(1905) 및 <서부의 플레이보이>(1907)는 모두 여기에서 상연되었다. 그러나 후자는 아일랜드 국민성에 대한 신랄한 풍자로 인하여 상연에 즈음해서 관객의 폭동을 당하였다. 다음의 <땜장이의 혼례(婚禮)>는 1908년에 출판되었으나, 폭동을 우려하여 상연되지 않았다.

근대 무대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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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代舞臺美術家

19세기 후반의 근대극 확립에 따라 무대 예술은 전등(電燈)의 발명으로 혁명적인 발전을 보인다. 주요한 개혁자는 스위스 태생의 아피아(Adolphe Appia, 1862-1928)와 영국인인 크레이그(Edward Gordon Craig, 1872-1966)이다.

그때까지의 바그너 악극의 무대장치에 불만을 품은 아피아는 배우의 배경으로서 묘사된 장치가 아니라 함께 효과를 내는 입체적인 장치를 구하고,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그림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조명효과를 연구했다. 1899년에 출판된 <음악과 무대미술>에 포함된 아피아의 무대 디자인은 그의 이론을 유감 없이 실현한 것으로서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장치는 수평선을 기반으로 하는 단순함을 취지로 하여 상징성을 중시한 것이다.

유명한 영국 여배우 엘렌 테리의 아들로 태어난 크레이그는 처음에 배우로서 출발했으나 이윽고 무대미술로 옮겨 아피아와 대조적인 수직선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인 디자이너로서, 20세기 무대장치의 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1912년의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상연된 <햄릿>을 위한 장치처럼 크레이그의 독창성은 자주 실현 불가능성을 드러냈다. 그는 또한 배우보다도 작가·장치가를 겸하는 연출가의 절대권력을 주장하는 연극론을 전개, 라인하르트에 이르러 그 이론의 가장 충실한 실현자를 발견해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라인하르트, 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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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本名 Goldmann) Reinhardt(1873-1943)

오스트리아 태생의 배우이며 연출가. 첫무대는 1893년 잘츠부르크에서였으며 이듬해 베를린의 독일 극장으로 옮겨 오토 브람의 지도 아래 노인역(老人役)에서 뛰어난 재질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1903년에 배우를 그만두고, 연출로 옮겼다. 연극의 문학으로부터의 개방을 목적으로 삼아, 고대 그리스를 따르는 배우와 관객의 일체화(一體化)를 지향하여 객석에 무대가 튀어나오게 하거나 극장 이외의 장소에서 무대를 구하거나 했다.

건축적인 장치를 즐겨 사용했으며 군중장면의 처리에 뛰어났던 라인하르트의 연출은 그 장대(壯大)성으로 관객을 압도, 연극의 제식적(祭式的) 요소를 되찾았다. 1910년에 빈에서의 <오이디푸스 왕(王)>, 이듬해의 <기적극(奇蹟劇)>의 상연은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1920년에 잘츠부르크의 연극제를 창시(創始), 호프만슈탈이 번안한 중세 도덕극 <예더먼>을 성당 앞에서 상연했다. 이러한 연출은 연극을 저속화시켰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없으나 그는 동시에 실내극장이나 소극장에서의 면밀하고 뛰어난 연출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