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문화·민속/세계의 연극/서양의 고전극/엘리자베스 왕조의 연극

엘리자베스 왕조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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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王朝-演劇

엄밀히 말하면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1558-1603) 기간 중의 연극이나, 넓은 뜻으로는 다음 왕조인 제임스 1세(1603-25)와 찰스 1세(1625-49)의 시대도 포함하며 청교도(淸敎徒)에 의한 극장폐쇄(1643)까지의 영국 연극에 대한 총칭이다. 여기서는 영국 최초의 극장 창설(1576) 이후의 실질적인 엘리자베스 왕조의 연극을 중심으로 약 60년간의 연극에 대해 개설하기로 한다.

편의상 제1기-셰익스피어 이전, 제2기-셰익스피어의 시대, 제3기-셰익스피어 이후로 크게 나눈다면, 제1기는 키드(T.Kyd, 1557-95)를 비롯하여서 말로(C.Marlowe, 1564-93), 릴리(J.Lyly, 1554-1606)등의 이른바 '대학 수재들'(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극작가들)이 대표하는 1580-90년대 즉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상승 발전기이며, 제2기는 셰익스피어를 중심으로 벤 존슨(B. Jonson, 1572?-1637), 보먼트(F. Bea­umont, 1584-1616), 플레처(J. Fletcher, 1579-1625)가 활약한 1590-1610년대의 전성기, 제3기는 '자코비안 드라마(제임스 왕조 연극)'의 주도자인 웹스터, 포드, 매신저로 대표되는 1610-30년대의 쇠퇴기, 또는 퇴폐기라고 할 수 있겠다.

엘리자베스 왕조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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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王朝第一期

<고보더크> 이후 유행했던 세네카풍 유혈비극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 토머스 키드의 <에스파냐 비극(The Spanish Tragedy)>(1587)이다. 이것은 복수의 테마, 망령, 연쇄적 살인, 광기, 극중극의 효과적 사용 등이 <햄릿>의 원형(原型)을 생각케 하며 셰익스피어의 비극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특히 마스턴이나 웹스터 등 일련의 비극에 계승되었다. 키드와 전후하여 극단(劇壇)에 등장했던 말로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탬벌레인 대왕>을 비롯하여 <포스터스 박사> <말타섬의 유태인> <에드워드 2세>등 개성적인 비극을 잇달아 발표하여 셰익스피어의 선구자로 천분을 발휘했다. 특히 웅대한 여운(餘韻)을 지닌 정열적인 무운시(無韻詩)를 구사하여 극적 효과를 올렸다. <탬벌레인 대왕>은 유럽·소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무대로 하여 초인형(超人型)의 영웅을 배치한 스케일의 크기와 신선한 박력등으로 엘리자베스 왕조의 사람들을 압도하고 영국 르네상스 연극을 대표하는 획기적인 작품이 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2세>나 <말타섬의 유태인>의 바라바스와 같은 성격창조로 셰익스피어의 성격 비극에 영향을 미치는 등 엘리자베스 왕조 비극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한편, 희극의 분야에서는 <알렉산더와 캠퍼스피> <엔디미온> 등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보티첼리를 상기시키는 풍순(豊醇)하고 우아한 세계를 창조해 낸 릴리가 주로 궁정귀족을 위해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이 때문에 늘 일반대중의 기호를 만족시키는 극단의 주류에서 벗어난 고독한 존재였으며, 셰익스피어 초기의 희극이나 낭만희극뿐 아니라 18세기를 거쳐 현대에까지 흐르고 있는 영국 연극의 전통의 하나인 하이 코미디(高級喜劇)의 선구자로서 공적을 남겼다.

이 밖에 <파리스의 규탄>(1581), <노처(老妻)의 이야기>(1590) 등으로 서정적 목가적이거나 공상적인 낭만희극의 세계에 유머와 풍자를 교묘하게 묘사를 한 조지 피일(1558?-1596), <제임스 4세>(1594), <수도사 베이컨과 수도사 번게이>(1591) <광기(狂氣)의 올란도>(1594) 등으로 희극, 비극, 환상, 감상이 기묘하게 혼합된 세계를 묘사한 로버트 그린(1558?-1592)이 셰익스피어의 선구자로서 주목되고 있다.

엘리자베스 왕조 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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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王朝第二期

1592년부터 1596년까지의 사이에 제1기에서 활약했던 극작가들이 잇달아 사망하거나 또는 릴리처럼 극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남과 동시에 셰익스피어는 명실공히 극단의 왕자로서 20년 가까이 군림하여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을 융성기로 이끌었다. '기질희극'이라는 독창적인 세계를 확립시킨 벤 존슨과 희비극의 장르에서 성공한 보먼트, 플레처를 제외하고 다른 극작가들은 제각기의 분야에서 활약하면서도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빛 앞에서는 그림자 구실밖에 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질희극의 걸작 <각자는 각자나름>으로 두각을 나타낸 벤 존슨은 또한 셰익스피어가 비극에 전념한 17세기 초두에 <볼폰> <연금술사(鍊金術師)> 등 인간의 어리석음과 악덕·탐욕 등의 천박함을 통렬히 폭로한 사실적인 풍자희극에서 독특한 날카로움을 보였다. 고전주의적 입장에 선 그는 낭만주의 경향이 짙은 당시의 극단에서 고립되는 반면 왕정 복고기의 풍속희극에서 선구적 역할을 다한 이색적인 존재였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것으로는 앞서 말한 희비극 이외에 토머스 데커(T.Dekker, 1570-1632)의 <구두가게의 휴일>(1600)과 같은 사실적인 시민희극의 걸작, 토머스의 헤이우드(1575-1633)의 <온정으로 살해당한 여자>(1603) 같은 가정비극의 원형이 탄생했다는 것과 또한 존 마스턴(1575-1634)의 <안토니오의 복수>(1600), 조지 채프먼(1560-1634)의 <비슈이 담보어의 복수>(1610) 등 세네카풍 복수비극이 계속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엘리자베스 왕조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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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王朝第三期

전기(前期)와 겹쳐서 복수비극의 계통에 속하는 작품-존 웹스터(J.Webster, 1580-1634)의 <백마(白魔)>(1611-12), <멜피 공작부인>(1614), 시릴 터너(1575-1620)의 <복수자의 비극> <무신론자의 비극> 등이 속출했으며 잔인한 살인, 죽음과 퇴폐로 가득찬 일련의 공포비극으로 대표되는 이 시기는 셰익스피어의 은퇴와 함께 엘리자베스조 연극이 쇠퇴의 경향을 띠고 있음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이 퇴폐적 무드는 1620-30년대에 최고조를 이루어 광적인 정열과 병적인 정신상태를 다룬 존 포드(1586-1639)의 <상심(傷心)> <가엾도다, 창부(娼婦)>(1633)를 비롯하여 필립 매신저(1583-1640)의 <순교의 처녀>(1620) <로마의 배우>(1626), 토머스 미들턴(1580-1627)의 <바뀐 아이>(1622), 제임스 셜리의 <매국노>(1631), <추기경>(1641) 등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 한편 희극의 분야에서 매선저의 <구채신반제법(舊債新返濟法)>(1621-2) <도회의 여자>(1632), 셜리의 <재원(才媛)>(1628), <쾌락을 좇는 여자>(1635) 등이 존슨식 풍자희극에서 후대의 풍속희극에의 계보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주목되나 몇 해 후의 극장 패쇄령과 함께 엘리자베스 왕조의 연극도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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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Lyly(1554-1606)

옥스퍼드 대학 출신. 소설 <유퓌즈>(1578)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에는 소위 '유퓌즘'의 화려한 문체를 특색으로 하는 산문희극 7편과 운문극(韻文劇) 1편을 창작. 일상생활을 다룬 사실적인 <봄비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고대 신화·전설에서 취재한 시적 환상의 세계, 낭만적인 분위기를 기조로 하면서 <알렉산더와 캠퍼스피> <사포와 파오>(1584), <엔디미온>처럼 엘리자베스 여왕 찬미를 뜻한 우의적(友誼的)인 궁정희극, 에스파냐왕 필리페 2세에 대한 풍자를 깃들인 <마이다스>(1588-90), 서정으로 가득찬 목가극풍의 <갈라디아>(1588) 등 다채로운 작품이 있다. 이러한 희곡은 변장의 기교나 우아한 대화, 세련된 말에 의한 산문의 매력 등으로 당시 운문이 전성했던 극계에 신선미를 가져다 주는 동시에 사실주의·고전주의·낭만주의를 하나로 융합시킨 독특한 희극을 확립하고 있다.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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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opher Marlowe(1564-1593)

셰익스피어보다 2개월 전에 켄트주의 캔터베리에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 재학시절부터 극작에 뜻을 두어 23세 때 <탬벌레인 대왕>의 성공으로 일약 극단의 총아가 되었으나 한편 무신론자라 하여 위험시되고, 정치사상의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스파이 사건에 휩쓸리는 등 기구한 생애를 살았으며, 29세의 젊은 나이에 뜻하지 않은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학생시대의 습작으로 생각되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에서 미완의 서사시 <히어로와 리앤더>를 남기고 급사하기까지 극작기간은 겨우 6, 7년이며 희극의 수도 7편밖에 되지 않으나 모두가 강렬한 개성으로 가득 찬 이색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있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에서 취재한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를 비롯, 독일 전설의 최초의 극화이며 도덕극의 전통을 계승한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적 생애>, 세네카풍 유혈비극의 잔혹한 무드, 마키아벨리즘, 멜로드라마적인 희극의 각 요소를 교묘하게 내포한 <말타섬의 유태인>을 거쳐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는 <에드워드 2세>에 와서는 영국 연대사극(年代史劇)의 장르를 개인의 성격에까지 높여 극작가로서 놀라운 진보를 보였다.

말로의 가장 큰 특색은 <탬벌레인 대왕>이 대표하고 있듯이 청춘의 정열을 비극적으로 노래하는 무운시(無韻詩)의 매력과 극적 박력을 지닌 웅장함에 있으며 또 개인의 내부에 깃들인 무한한 욕망 ―― 예컨대 정복욕(<탬벌레인>)·지식욕(<포스터스 박사>)·물욕(<말타섬의 유태인>) ―― 을 추구함과 동시에 운명이나 자아(自我)와의 내적 갈등을 힘차게 묘사하여 개성 존중의 신시대 정신을 고취했다는 점이다.

단명했기 때문에 극작가로서는 셰익스피어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중세 연극의 좁은 테두리 안에서 영국 연극을 해방시키고 근세 르네상스 연극의 확립에 기여한 공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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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iam Shakespeare(1564-1616)

영국 워릭셔의 스트랫퍼드 온 에이번에서 태어났다. 1564년 4월 26일의 수세(受洗) 기록 이후, 1582년 앤 해더웨이와 결혼, 1583년의 장녀 출생, 1585년의 남녀 쌍둥이 출생 기록 이외에는 정확한 전기적(傳奇的) 자료가 없으며, 소년시대 및 런던의 극단에 등장하기까지의 공백기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다.

비교적 고정된 정설(定說)에 의하면, 부친 존은 피혁·직물업 등을 하는 상인으로, 윌리엄이 어렸을 때에는 상당한 재산도 있고 시정(市政)에도 참여하는 유력자였으나, 13세경부터 가산이 기울어지기 시작, 그래머 스쿨(대학 진학자를 위한 중학교)을 중퇴, 결혼 후 늦어도 80년대 후반에는 런던의 극단에 참여하여 배우 겸 극장 전속 작가의 수업을 거치고 나서, 92년경(로버트 그린의 저서에 셰익스피어의 대두를 암시하는 언급이 있다)부터 극작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여 17세기 초엽까지 전성시대를 이룩함과 동시에 극장도 경영, 재산을 모은 뒤 1610년경에 고향으로 은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으로서 남아 있는 것은 비극(10)·희극(13)·사극(10)·로맨스극(4) 등 모두 합쳐서 37편이다. 작품은 모두 창작연대가 명확하지 않으나 E.K. 체임버즈의 추정(推定)을 근거로 20여년이나 되는 그의 극작 기간을 대강 다음과 같은 4기로 분류할 수 있다.

제1기 (1590-1595) ―― 초기의 사극·희극 시대.

제2기 (1595-1600) ―― 원숙한 사극·희극 시대.

제3기 (1600-1608) ―― 위대한 비극·문제극 시대.

제4기 (1608-1612) ―― 만년의 로맨스극 시대.

셰익스피어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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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kespeare 第一期

우선 <헨리 6세>의 3부작, <리처드 3세>의 사극과 병행하여 세네카풍 복수비극 <타이투스 안드로니쿠스>에서 출발하여 이 시기의 기조(基調)는 플라우투스풍의 <실수연발이>, 이탈리아 코믹풍의 <사랑의 헛수고>등 젊은 정열을 발산시키는 경쾌하고 밝은 희극의 세계에 있다. 전체적으로 고전극의 영향이나 말로, 릴리 등 선배의 영향을 받아 엇비슷한 것이 많으며 습작기의 영역에서 완전히 탈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침 페스트의 대유행으로 인한 극장 폐쇄기(1592-94)와 겹쳐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 <루크리스의 능욕>(1594) 등 일련의 서사시를 발표, 극작가로서 대성하기 전에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확립시킨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1기말에서 제2기에 걸쳐서는 그린, 말로, 키드, 피일 등 선배의 죽음이 계속되고 릴리도 사실상 극작의 붓을 놓기 시작한 시기였으므로 라이벌이 없어진 셰익스피어는 행운의 극작가로서 자기 길을 걷게 된 셈이며, 초기 낭만비극의 걸작 <로미오와 줄리엣>은 바로 이 무렵에 탄생, 천재 극작가로서의 편린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 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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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kespeare 第二期

전기(前期)의 희극세계가 더욱 확대되어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과 같은 현실과 몽환(夢幻)의 세계가 융합한 아름다운 서정적 작품에서 <헛소동> <뜻대로 하세요> <12야(夜)>로 목가적 분위기나 희비극적 요소가 가민된 낭만희극의 걸작이 속출하는 한편,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의 후기 사극도 등장, <햄릿>의 싹이 엿보이는 <리처드 2세>나 폴스타프의 개성창조, 극작술의 진보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재능이 훌륭하게 개화하여 인기 독점의 시대에 이른다.

셰익스피어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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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kespeare 第三期

희극의 계통으로서는 <윈저의 쾌활한 아낙네들>(폴스타프에 마음이 흡족해진 여왕의 요청으로 <사랑하는 폴스타프>를 테마로 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기(前期)까지의 발랄한 명랑함이 자취를 감추고 '다크 코미디(어두운 희극)'라고 불리는 문제 희극 3편, 즉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비극'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끝이 좋으면 다 좋지> <이척보척(以尺報尺)>밖에 없으며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등의 4대 비극을 중심으로 '로마극'이라고도 하는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 <코리오러너스> 등 위대한 비극들이 집중적으로 창작되던 시대이다.

제2기에서 제3기에의 이 커다란 변화는 양친의 죽음을 포함한 신변의 불행뿐만 아니라 여왕의 만년과 죽음을 둘러싼 사회정세의 불온, 정치·종교상의 혼란으로 인한 음모사건(예컨대 1601년에 있었던 에세크 백작의 반란과 처형) 등에도 원인이 있겠으나, 이러한 비극은 '개인'의 성격비극인 동시에 '국가'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는 우주적 규모를 지닌 장대함으로까지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채프먼, 마스턴 등 신진작가들의 대두와 벤 존슨의 눈부신 활약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그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셰익스피어의 창작력은 뛰어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 제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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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kespeare 第四期

당시 희비극의 장르에서 인기가 절정이었던 보먼트와 플레처에게 자극을 받아 쓴 것이 <심벨린> <겨울밤 이야기> <태풍> 등 일련의 로맨스극이다. 집안의 이산(離散), 오랜 세월의 방랑을 거친 재회, 화해, 속죄를 테마로 하는 희비극의 세계는 파란으로 가득찬 20년 창작생활의 종막답게 폭풍 뒤의 고요와도 흡사한 안정된 기분으로 통일되고, 인생의 희비·명암의 전부를 보아온 작자의 달관된 심경마저 엿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는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다면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의 위대함은, 고전작가를 비롯하여 선배와 후배들의 여러 가지 요소를 흡수하면서, 뛰어난 재능과 정교한 극작술로써 모든 장르를 완성하고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점에 있다. 특히 르네상스적 인간상의 한 전형인 폴스타프의 활약으로 성공한 <헨리 4세>, <헨리 5세>에서의 사극과 희극의 융합, <리처드 2세>나 <로마극>에서의 사극과 비극의 융합은 각각 그린과 말로에게서 그 싹을 볼 수 있다고는 하나 다른 누구에게서도 달성될 수 없었던 영역이었다. 엘리자베스 왕조 연극의 위대한 완성자로서 영국 연극 뿐 아니라 세계 연극의 발전에 공헌한 공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 하겠다.

벤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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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 Jonson(1573?-1637)

런던 태생. 경제적 사정도 있고 해서 웨스트민스터를 졸업한 후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으나 캠딘 교장의 뛰어난 교육으로 자기 자신도 자부했듯이 셰익스피어나 '대학수재'들보다도 뛰어난 학식과 깊은 교양을 갖춘 지식인으로서 활약했다.

배우수업을 한 뒤 40년 가까운 창작생활을 통해 희극·희비극·풍자극·비극·가면극 등 다방면에 걸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코미디 오브 유머즈(氣質喜劇)'의 창시자, 또는 일련의 풍자희극의 걸작으로 제임스 1세 시대의 대표적 극작가가 되었으며 영국의 연극사상에 이채를 띤 바 있다.

<각자는 각자 나름>(1598)이 대표하는 '기질희극'은 인간의 4체액(血液·粘液·黃膽汁·黑膽汁)의 배합으로 결정되는 기질――예컨대 점액질·담즙질 등――에서 생겨나는 각양각색의 성격을 유형화하고 그것들의 충돌이나 상호작용을 희화화(戱畵化)한 것이나, 셰익스피어 희극과는 그 취향을 달리하는 신기함으로 당시 크게 인기를 획득했다. 그 후 <신시아의 향연>이나 <엉터리시인>(1601)으로 데커와 싸움이 끊이지 않고 극계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서도 반감을 사게 되어, 한때 비극 ―― <세자누스>(1603)로 옮겼으나 끝내 좋은 평을 받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아 <검은 가면>(1604) 이후 20여년 동안 궁정 가면극의 제1인자로서 군림했으나 그의 본령은 신랄한 비판정신에 바탕을 둔 풍자희극 분야에 있으며, <볼폰(여우)>(1606), <연금술사(鍊金術師)>, <에피신(침묵의 여자)>(1609) ―― 엇갈리는 줄거리의 흥미를 가진 코믹적 요소도 있다 ―― 등의 걸작이 크게 성공하였다.

후기의 대표작 <바돌로뮤의 시장>(1614)은 당시 런던에서 열렸던 정기 시장(定期市場)을 무대로 펼쳐지는 시정생활(市井生活)을 사실적으로 그린 파노라마풍의 대작으로 호평을 받았으나 그 이후로 가면극 이외는 부진하여 찰스 1세 시대의 작품도 실패작이 많다. 그의 입장은 셰익스피어, 말로 등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흘러넘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당시의 주류에 대하여 삼일치의 법칙을 준수하는 고전주의로서 고립되어 있었으나 왕정복고기(王政復古期)의 풍속희극을 거쳐 와일드 몸, 카워드 등 현대 풍속희극과 결부되는 영국 정통희극의 전통을 이끈 공적은 크다고 하겠다.

보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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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 beaumont(1584-1616),

플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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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Fle­tcher(1579-1625)

합작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던 당시, 특히 희비극 분야에서 활약한 명콤비로서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부른다. 1설에 의하면 50편 이상이나 합작했다고 하나 현존하는 작품은 6-7편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필라스터>(1609), <처녀의 비극> <왕으로되 왕이 아니다>(1610-11)의 3편이 영국 연극의 고유한 장르를 완성시킨 낭만적 희비극의 대표작으로서, 셰익스피어의 낭만극에 영향을 미친 공적과 함께 높이 평가된다.

보먼트가 견실하고도 남성적인 외향성을 나타내고 있음에 대하여 플레처는 섬세하고 기교적인 목가극의 세계에서 묘미를 발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레처는 셰익스피어(<헨리 8세>)를 비롯하여 매신저와의 합작도 많았다.

엘리자베스 왕조의 극장 구조와 상연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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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王朝-劇場構造-上演形態

당시의 극장에는 근대 극장과는 다른 특수한 구조를 지닌 '공설극장'과 근대극장과 흡사한 '사설극장'의 두 종류가 있다.

공설극장은 원래 극장 대신으로 사용하였던 여관의 안뜰에서 발전한 것으로, 전체의 구조는 바깥쪽이 거의 원형과 비슷한 다각형(8각형-6각형)을 이루고 안뜰의 연장인 마당의 중간쯤까지 튀어나온 무대와 그것을 둘러싼 3층 건물의 관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반 관람석에 해당하는 마당은 노천(露天)으로, 말하자면 옥외극장인 셈이었다.

최대의 특징은 무대 구조에 있으며, 앞·중간·뒤의 3개 부분으로 된 넓은 1층의 무대와 내부 무대의 윗부분에 있는 2층을 필요에 따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입체적 기능을 지녔다.

무대 중앙과 내부 무대 사이의 간막이 구실을 하는 막 이외에는 관람석과 무대를 차단하는 막이 없으며, 예컨대 독백이나 대사를 읊을 때도 관람석과 가장 가까운 무대 전방에서 직접 관객에게 지껄이는 식의 친근감을 자아낼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막을 올리거나 내리는 등의 장치 및 대규모의 무대장치도 없기 때문에 장면의 전환이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또한 수시로 내부 무대와의 간막이 막을 제거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동시에 무대 전부를 사용하거나 셋, 혹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사용할 수 있는 등, 유동성과 유연성이 있는 연출도 가능했다. 그리고 마당은 서서 관람하는 자리이므로 무대의 높이도 구경하기에 알맞도록 꾸며졌고 소도구를 두는 장소로도 이용됐던 무대 밑에는 망령(亡靈) 등의 출입구로서 오르내리는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 조명장치 같은 것은 없고, 오후 2시부터 백주의 햇볕 아래 상연되므로, 시간·장소의 암시나 정경 묘사 등은 모두 대사에 의존해야만 했으며, 관객이 상상력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풍부한 레토릭, 음악적인 말이 중요한 요소를 차지하며, 또한 호화로운 의상이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입장료는 마당의 일반석이 1페니, 앉아서 볼 수 있는 상석도 3펜스라는 낮은 요금으로 일반 대중을 위한 극장이었다.

한편, 사설극장은 궁정이나 귀족의 대저택에 있는 홀의 연장이며, 고정된 좌석이 완비된 장방형의 옥내극장으로서 주로 겨울철에 이용되었고, 인공조명·대도구·막의 사용 등 근대극장의 원형과 흡사한 것이었다. 입장료도 공설극장의 몇 배(6펜스에서 2실링 반)나 비싸고 귀족이나 동 상류계급을 위한 극장이었기에 레퍼토리도 낭만희극이나 로맨스극이 많았다.

대표적인 극장으로서는 공설극장에서 시어터 극장(1576년에 제임스 버비지가 세운 영국 최초의 극장), 글로브 극장(1599), 로즈 극장(1587), 포튠 극장(1600) 등이 있었고 사설극장으로는 블랙플라이어즈 극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왕조의 극단과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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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zabeth王朝-劇團-俳優

헨리 8세의 치하 때부터 각지에 극단이 있어 지방 순회공연을 했으나, 배우는 가장 비천한 직업의 하나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수단으로서 당시의 극단은 모두 귀족의 보호를 받았으며, 그 보호자의 관직(官職) 이름을 정식으로 붙이는 것이 상례였다.

1580년대의 대표적 극단인 '퀸즈 멘(여왕극단)'을 대신하여 90년대부터 17세기 초엽에 걸쳐 2대 세력을 떨쳤던 극단으로는 '로드 체임벌린즈 멘(宮內長官극단)'과 '로즈 애드미럴즈 멘(해군대신극단)'이 있었다 (모두가 페스트의 유행으로 인한 극장폐쇄·극단해산의 공백기간 후인 1594년에 결성되었다). 전자는 셰익스피어가 소속한 극단으로 시어터 극장과 글로 극장을 본거지로 삼았으며 또한 겨울철에는 블랙플라이어즈 극장까지 병용하여 셰익스피어의 거의 전작품은 물론, 벤 존슨, 보먼트, 웹스터 등의 작품도 상연했다. 1603년에 제임스 1세가 즉위하여 킹스 멘(國王一座)으로 개칭, 계속해서 왕실의 보호 아래 전성을 누렸으나 단장 리처드 버비지(1567-1619)가 사망하자 해산했다.

셰익스피어 자신은 간부 배우로서 참여, <햄릿>의 망령역이나 존슨의 <각자는 각자 나름>에 출연한 기록도 있다. 버비지는 극장의 창설자 제임스 버비지의 아들로 1548년경부터 주연 배우로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으며, 리처드 3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의 비극 주인공 등 거의 모든 배역을 맡아 당대에 으뜸가는 비극배우의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는 성격묘사의 연기력으로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 연기자였다.

한편, '로드 애드미럴즈 멘'은 대흥행주인 필립 헨즈로와 그의 사위 에드워드 알렌(1566-1626)을 중심으로 하는 극단으로 로즈 극장, 포튠 극장을 무대로 하여 주로 말로의 작을 상연했다. 알렌은 위스터 백작의 극단에 소속했었으나 후에 헨즈로의 인정을 받고 1592년경부터 단장격으로 활약, 탬벌레인, 포스터스, 바라바스 등의 인기배역으로 버비지와 어깨를 겨루는 일류 비극배우로서 명성을 떨쳤다.

당시의 희극배우로는 궁내장관 극단에 소속된 윌리엄 캠프와 로버트 어밍의 두 사람이 피터, 터치스턴, 페스테 등의 어릿광대 역을 능숙하게 해내어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당시는 아직 여배우가 없었으며, 여자 역은 변성기 이전의 소년배우(주로 성가대 출신의 소년배우 극단에 소속)가 맡아 상연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