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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문예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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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현대 문예사조가 일정한 의식을 가지고 나타나기 시작한 가장 확실한 연대는 1919년에 청년 문필가들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창조(創造)>의 출현 때부터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라고 볼 수 있는 <창조>가 나오기까지 문학사적인 태동기로, 혹은 그 이념적 선구자로 최남선과 이광수가 문학활동을 하던 1908년 이후를 우리나라 문예사조의 현대적 초창기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되는 국면이 있다. 뿐만 아니라 최남선·이광수의 2인문단 시대가 오기까지 1890년대의 개화운동, 번역문학의 점증, 창가의 발생과 찬송가의 보급, 서양 문예사상의 도입, 신소설 및 번안소설의 등장, 사상·정치·경제 등 사회전반의 개혁과 진보가 이 땅의 신문예사조의 형성과 발전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2인문단 시대의 두 작가가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자세는 (1) 여기(餘技)로서의 문학이거나, (2) 민족운동 내지 민족계몽운동의 수단에 불과하였고, (3) 사회를 개혁하고 지도하려는 이상주의의 도구였으며, (4) 민족혼(民族魂)의 구현을 위한 문화적 자각의 태도로 출발했던 것이다(물론 1920년대 이후 이광수의 문학이 반드시 지적한 조건과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 지적한 <창조> 동인은 최남선·이광수의 계몽주의적 문학태도에 반발하고 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인식과 이해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창조> 동인의 대표격인 김동인(金東仁)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가 있다. "1919년 2월에 필자와 요한과 늘봄, 그밖에 수인의 손으로 <창조> 창간호가 발간되었다. (中略) 이 <창조>가 순전한 문예잡지의 효시(嚆矢)인 동시에 구체적 문예운동의 시초다. 그 때에 조금 눈이 뜬 우리들은 춘원(春園)의 작품이며 사상에 많은 불만과 부족감을 가졌다.……" 김동인은 또한 <춘원 연구>에서 "춘원까지의 문예에 있어서는 소설의 흥미를 그대로 '이야기의 재미'와 '연애 혹은 정사(情事)의 재미'로써 빚어보려한 데 반하여 <창조>에서는 리얼리즘의 실현이야말로 소설의 최고 흥미라 하고 이야기의 재미를 거부하여 버렸다. 이리하여 지금까지의 소설 내용에 대한 정의를 뒤집어 놓는 한편 조선문학이 쓸 문태(文態)를 비로소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동인의 말 중에도 비치는 것과 같이 이광수의 박애사상·계몽사상·인도주의 등의 비미학적 요소가 제거되고 리얼리즘이라는 미학적 레벨에 점차 접근해가기 시작했다. 또한 <창조>에 이어 <백조(白潮)> <폐허(廢墟)> 등 다수의 동인지와 일간지·월간지 등이 창간되고 문학인구가 증가되고 새 이론의 무절제한 수입으로 온갖 신사조가 범람하게 되자 1920년대는 차차 문예사조의 혼란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양상을 당시의 선구적 비평가인 김기진(金基鎭)은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1919년 이후로 신문학계는 정치 장관이었으니 신시류(新詩類), 소설류의 다수한 발표는 각지에 청년단체가 족출(簇出)한 사회현상과 동일한 현상이며 문예이상주의·자연주의·낭만주의·예술지상주의·악마주의·상징주의 등의 조류가 잡연(雜然)히 횡일(橫溢)하여……(中略) 이 수입전성(輸入全盛)의 현상은 '세계의 지식을 광구(廣求)하자'는 청년회 연합회의 장령이 웅변으로 대언(大言)하는 시대적 경향이었다." 김기진은 이어서 20년대의 중심 조류가 된 것이 자연주의였다고 말하고 자연주의의 발생원인이 개인주의와 현실주의적 사상의 대두에서 찾아진다고 말함으로써 20년대 문학이 집단의 문제로부터 개인의 문제, 인간심리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 외에도 퇴폐주의·낭만주의·상징주의는 20년대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는데, 소설에서 주로 자연주의와 낭만주의가, 시에서 퇴폐주의와 상징주의와 낭만주의가 가각 우세했음도 특기할 만한 일이 된다. 독자가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는 외국의 문예사조가 약간의 예외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나(독일의 경우) 대체로 르네상스 이후에 나타난 고전주의를 출발로 해서 낭만주의가 비판적 계승을 하고 그것을 다시 사실주의가 계승하다가 자연주의가 거의 동시에 발생하고 이 무렵에 다시 상징주의와 퇴폐주의·유미주의(唯美主義) 등이 머리를 들다가 주지주의(主知主義)가 계승, 다시 신고전주의·심리주의·실존주의의 순서로 수백년에 걸쳐 발생하거나 소멸된 것을 우리는 불과 수삼년 동안에 필연적인 계승 내지 수용의 태도를 갖지 못한 채 마구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20년대의 문예사조를 혼돈기로 보게 되며, 적어도 한 작가나 한 작품 안에는 두서너 가지의 요소가 뒤섞여 있지 않은 경우란 거의 없을 지경이다. 20년대 문학에서 또 한 가지 전혀 빼놓을 수 없는 문제는 신경향파(新傾向派) 문학의 등장이라고 할 것이다 1923년부터 임정재(任鼎宰)·김기진·박영희 등이 활약함으로써 본격화된 신경향파의 문학론은 백조파의 후기 동인으로 <백조> 동인을 해체시킨 김기진의 맹약(猛躍)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기반이 되어 1924년경부터 1934년경까지 약 10여년 동안 이 나라의 문학을 제패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시대가 오게 된다. 이 시대의 중요 특징은 문단의 프로 문학파와 민족주의 진영(이라고 불러오고 있기는 하나 민족주의 진영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보수파 부르주아적 예술가, 예술지상주의적 순수파 등을 의미한다)이 대립되어 온 것, 중요한 논쟁이 그칠 날이 없었던 것 등을 지적할 수 있겠다. 이 무렵에 절충파라는 것이 있어서 양쪽을 종합 지양하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문학사적으로 보나 그 주장한 내용으로 보나 검토할 만한 가치는 거의 없다. 1934년 김기진과 박영희의 논쟁과 카프 맹원(盟員)에 대한 검거 선풍으로 표면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종결이 오지만 타율적인 정치권력의 힘으로 숨죽인 프로문학은 결국 공산주의 작가 집단의 끈질긴 모태가 되었고, 결국 그들의 대개가 월북(越北)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 무렵의 프로 문학 운동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1935년 김기림(金起林)을 중심으로 쓰여진 시와 시론, 이장희(李章熙)·정지용(鄭芝溶) 등의 시, 이양하(李敭河) 등의 시론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주지주의(모더니즘)의 싹이 보이다가 결국 최재서(崔載瑞)에 의해서 영국의 주지주의 (흄·리처드·엘리엇·리드·헉슬리 등의 문학)가 소개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주지주의 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그 전까지는 주지주의 경향이 있는 김기림 등을 기교파라 불러왔다). 최재서는 주지주의적 비평작업을 통해서 김기림·장만영·이상(李箱) 등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고 주지주의를 이 땅의 문학적 주조로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밖에도 이헌구(李軒求) 등에 의하여 행동주의 문학이 산발적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 무렵부터 일제의 혹독한 문화탄압 정책이 가중되어 대개의 문필가들이 친일(親日)을 하거나 뜻에 없는 현실도피를 일삼거나 침묵을 지키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시기(35년 이후 해방 이전까지)를 우리나라 문학의 암흑기라고 부른다. 물론 이 때에도 약간의 풍자문학(諷刺文學), 경향문학(傾向文學), 인생파문학(人生派文學), 농민문학(農民文學), 역사소설 등이 없는 것은 아니나 문학사의 창조적 기운은 시들고 문예사조적 진전은 전혀 가져오지 못한 채 일제 식민주의자들이 가혹한 관여와 주문에 굴복한 작가가 대부분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문단은 다시 양분, 프로문학가 쪽에서 조선문학가동맹을, 우익측에서 전조선문필가협회를 만들었으나, 이들은 문예사조적 대립이나 갈등에 의해서 분파된 것이 아니라 좌우익의 정치노선에 의해 결별하였으므로 문예사상의 심화와 상관없이 문학에도 정치적 남북분단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해방 이후의 작가들은 목불인견의 추악한 싸움을 계속하다가 남북이 갈라지자 프로측은 북으로 가고 우익측은 남에 몰려 이른바 분단문학기를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분단기의 문학은 먼저 50년대의 전후문학(戰後文學)을 불러왔고 남북 전체의 문학을 한꺼번에 얘기할 수 있는 객관적 풍토를 상실케 했다. 1950년대는 6·25라는 참담하고도 가혹한 겨레의 시련으로부터 시작되어 전후문학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전통과의 급속한 단절, 폐허처럼 무너져내린 기존가치, 도덕적인 방황과 새 질서에의 미망(迷妄), 이런 것들이 뒤범벅이 되어 자유당의 독재정권 밑에서 허덕이다가 흔히 역사의 개안(開眼)이라고 표현되는 4·19에 의해 60년대 문학이 시작된다. 50년대의 전반기가 후기 모더니스트와 아프레게르의 활동에 힘입어 발전했고, 그 후반기가 실존주의 내지 전통의 새롭고 깊은 모색의 시기였다면 60년대의 초기는 좌파 실존주의 내지 행동주의의 문학의 깊은 영향으로 앙가주망 문학론이 사조적 특징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기는 한 마디의 개념으로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울 만큼 사조적 혼란과 복잡성이 나타나지만 20년대적 복잡>성과는 달리 외래사조와 문화의 혼입(混入)에서 기인하는 이유나 조건보다도 한국사회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문화적·정치적·사회적인 여러 조건들 때문에 매우 착잡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낭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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浪漫主義

서구의 낭만주의는 르네상스 이후에 문학사조의 주조를 이루었던 고전주의(Classicism)에의 반동사상으로 나타났다. 고전주의가 지나치게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고 감성을 죄악시함으로써 인간본연의 자세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문인들이 이성 존중보다는 감성존중의 태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서 차차 낭만주의는 이론적 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최초로 '낭만적'과 '고전적'을 대립개념으로 파악한 사람은 F. 실레겔이다. 그리고 세계적인 낭만주의자로는 V. 위고, A. 뮈세, 샤토 브라잉, 라마티느, A. 뷔니, 노발리스, J. 톰슨, E. 영, W.위즈워스, 바이런, 코울리지 등이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낭만주의는 서구에서와 같이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타 문예사조와 함께 20세기초부터 일본을 통하여 혼재된 채로 수입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1920년을 전후해서 나왔던 <폐허> <백조> 등 동인지를 중심으로 싹이 튼 낭만주의는 서구에서와 같이 완전한 낭만주의의 모습을 갖춘 것이 아니라 다만 낭만주의 요소를 내포한 작품들이었다. 또한 낭만적인 요소라 하여도 각양각색이어서 서양적인 것, 퇴폐적인 것, 탐미적인 것 등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현실도피책으로 꿈을 동경하고 이상을 그리워하고 또 내일에의 희망을 안고 현실을 망각하려는 푸념조는 서구의 낭만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파에 속하는 작가들로는 시인 이상화·나도향·박영희·박종화 등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낭만주의를 고수하고 진전시킨 문인(文人)은 한 사람도 없었다.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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寫實主義

작가는 현실을 체험하고 상상력에 의하여 창조한다. 체험없는 상상력은 무의미하지만 상상력이 따르지 못하는 현실체험도 무의미하다. 현실체험을 보다 더 강조하는 것이 사실주의라면 상상력을 더 강조하는 쪽을 낭만주의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요소(상상, 체험)는 어느 시대 어느 경우에나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지만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문학의 내용이 달라질 수가 있다. 사실주의의 특색은 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주고, ②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서 보는 바와 같이 표현의 사실성(寫實性)을 존중하며, ③ 주관을 배제하고 극단적인 객관성을 존중하고, ④ 공상과 환상을 배격하는 데 있다. 플로베르·모파상·고골리 등이 세계적 리얼리스트이다. 이와 같은 서구의 사실주의가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진 것은 1920년대 이후의 일이다. 염상섭(廉尙燮)의 <금반지> <전화>, 현진건(玄鎭健)의 <타락자(墮落者)> <새빨간 웃음> 등이 그 대표적 작품이며, 최서해(崔曙海)·이효석(李孝石)·김유정(金裕貞)의 작품 등이 있고, 우리나라의 사실주의 문학은 이들 산문 문학에 의하여 각성을 가져왔다.

자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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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主義

J.J 루소의 자연귀의적(自然歸依的) 자연주의(Back to nature!)와는 달리 자연과학을 토대로 한 일련의 문학운동을 자연주의라 부른다. 사실주의 문학에 가담했던 에밀 졸라가 <실험소설론(實驗小說論)>을 쓰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과학의 신앙'을 굳게 가지고 형이상적인 문제들까지 과학의 현상으로 파악하려 하였다. 이들은 사실주의와 객관성이라는 점에 일치했으나 사실주의가 사회학적인 측면에 섰다면 자연주의는 보다더 과학적·해부적인 점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자연주의 문학은 이광수(李光洙) 등의 작품이 정치적·사회적 의식이 앞서 그에 의하여 인생과 현실이 편시(偏視)된 데 대해 김동인(金東仁)·전영택(田榮澤) 등 젊은 세대의 반발에서 시작된다. 인생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한 이들은 <창조>지를 무대로 하여,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을, 전영택은 <천재·천치>를 각각 써서 자연주의 문학운동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타난 자연주의가 무르익은 것은 1924년경이었는데, 주로 <개벽> <조선문단> 등 순수문예지를 무대로 하여 염상섭·김동인·현진건 등이 대표적 작가로 활약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3·1운동 실패후의 절망적인 민족적 현실을 엄격하게 관찰하고 해부하려 한 작품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작이다.

상징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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象徵主義

문예사조사에 있어 자연주의 이후는 상당한 혼잡이 초래된다. 즉 여러 형태의 발성(發聲)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 것이다. 이를테면 자연주의 문학에 대한 각양 각색의 반성이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발언을 한 것이 상징주의라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자연주의의 과학적 결정론(科學的 決定論)에 반대하여 상상과 몽환과 상징을 강조하였고 고체와 보들레르를 선구로 삼았다(E.A.포까지).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말라르메를 꼽을 수 있고 위스망, 베르아랭, 마테를링크, 랭보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상징주의는 1920년부터 1924년까지 5년간은 자연주의와 더불어 우리 문예사상 지배적인 조류였는데, 이들 모두 창조(創造)파에 기원하는 것이었다. 곧 <창조> 1호에 김동인의 자연주의적 소설 <약한자의 슬픔>이 실렸을 때 시에서는 주요한(朱耀翰)이 상징파의 영향을 본따서 <불놀이> 3편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또한 1921년에는 황석우(黃錫禹)의 대표적 상징시인 <벽모(碧毛)의 묘(猫)>가 <폐허(廢墟)>에 발표되었고, 변영로(邊榮魯)는 <상징적으로 살자>(1922)라는 시론을 써냈고 그의 시도 언어의 기교를 상징성에 두었다. 우리나라 20년대 낭만주의 이후의 시인들은 대체로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허무·퇴폐·절망이 뒤범벅이 된 문학상의 한 공통적 특질을 의미한다. 다다이즘, 퇴폐주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신도들을 대체로 총괄하는 이 명칭은 우리나라에도 광범위한 영향을 끼쳐 김억(金億)·황석우(黃錫禹)·이상화(李相和) 등의 시인으로 하여금 세기말적인 시를 쓰게 하였다.

주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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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知主義

19세기말의 데카당이 방화한 화재 현장에서 일종의 반성으로 또는 지성과 이성의 회복으로 드러난 것이 주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34년 최재서(崔載瑞)가 T. E. 흄 및 엘리엇, 올더스, 헉슬리 등의 문학작품을 소개함으로써 본격적인 주지주의 문학의 소개작업이 있었고 5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김규동(金奎東), 이봉래(李奉來) 등의 모더니즘 계승운동이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35년 전후의 주지주의 문학 즉 김기림(金起林), 최재서의 문학활동에 더 큰 의의가 있었다.

한국의 실존주의 및 기타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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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實存主義-其他傾向 현상학적인 방법, 특히 기술적 방법(discripted method)에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 철학은 20세기의 작가에게 철학적·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것은 물론, 철학자까지도 그들의 의식 체계를 문학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논리적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실존주의 철학은 쉽게 실존주의 문학으로 번지게 되었고 20세기 전반기를 제압하는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문단 역시 50년대의 전후적(戰後的) 상황 속에서 실존주의를 고스란히 수입함으로써 유형무형의 많은 영향을 끼쳤고 50년대 문학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존주의 이후 서구의 전위문학과 분석주의 이론, 구조주의(構造主義), 신화비평(神話批評) 등 여러 이론이 수입되기는 하였으나 어느것 하나 우리 문단에 정착해서 구체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없다. 60년대 이후는 오히려 한국 신문학사에 대한 여러 가지 반성이 싹터, 전통의 올바른 계승태도와 리얼리즘의 새로운 해석, 참여문학(參與文學)의 문화적·예술적 가치의 탐구 등 기본적인 작가의 자세를 탐구하여 왔다고 하겠으나 분단국의 작가(혹은 문학)가 치러야 할 수다한 부채와 난관을 거의 뚫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말할 수 있다.

동인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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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人雜誌

공통된 주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기획·집필·편집·발행하는 잡지. 동인지라고도 한다. 출판사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발행하는 상업적인 잡지와는 다르다. 이러한 잡지는 학술·사상·정치·문학 등 각 분야에 걸쳐 있으나, 그 중에서도 양적으로 많은 것은 문학분야의 동인잡지이다. 동인잡지는 일반시민층에서 나온 학자·작가들의 집필자가 등장할 수 있는 근대시민사회를 전제로 하여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출판활동이 자본주의적 경영의 대상이 되고나서부터 동인잡지는 잡지출판의 주도적 지위를 잃고 상업출판에 의하여 충족되지 않는 공백을 메우는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18-19세기에 동인잡지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동인잡지의 존재가 재평가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나 미국에서 문명의 기계화에 반항하는 사상가나 작가들이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잡지를 발행함으로써 소수자의 사상 전파에 노력하였다. 예를 들면, 포드가 중심이 된 <잉글리쉬>(1908)와 메리 부처가 중심이 된 <시그나티아>(16) 등이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현대문학(現代文學)의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 전후에 동인지 운동이 활발하였다. 즉, 1919년 2월 도쿄에서 김동인 등이 중심이 되어 <창조>를 발행하였으며, 이것이 동인지의 효시이고 현대문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하였다. 뒤이어 20년 염상섭(廉想涉)·오상순(吳相淳)·황석우(黃錫禹)·남궁벽(南宮璧)·김억(金億) 등이 중심이 되어 <폐허(廢墟)>를 창간하였다. 이들은 낭만주의·이상주의적 경향과 함께 퇴폐적이며 세기말적인 흐름을 띠고 있었으나, 23년까지 2호만을 발행하는 데 그쳤다. 그 후 22년 낭만파에 속하는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박영희(朴英熙)·박종화(朴鍾和)·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 등이 중심이 되어 순문학 동인지 <백조(白潮)>를 간행하였으나 2호 발행에 그쳤다. 그 후 30년에 김영랑(金永郞)·박용철(朴龍喆)이 <시문학(詩文學)>을 창간하였다. 청록파(靑鹿派)인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을 비롯한 김종한(金鍾漢)·임옥인(林玉仁) 등이 활약한 김연만(金鍊萬) 발행의 <문장(文章)>(39-41)이 창간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최재서(崔載瑞)를 중심으로 <인문평론>(38)이 창간됨으로써 <문장>지와 쌍벽을 이루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현대문학의 발전은 동인지가 주도하였다고 볼 수 있다.

60년대의 한국 문예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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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十年代-韓國文藝思想

60년대 한국 사회는 50년대 후반의 전후적(戰後的) 혼돈 상황과도 구별되며, 1960년의 4·19혁명으로 인해 시민의식과 현실의식의 성숙기를 맞게 되었다. 이 60년대 사회의 징후는 학문예술에 반영되어 현실참여(現實參與)의 작풍(作風)이 고조되었다. 60년대 초기에는 김우종(金宇鍾)·김병걸(金炳傑) 등 평론가들에 의해서 문학의 현실참여가 주장 되었고, 그 뒤 참여문학론은 60년대 말엽에 이르러 문단 일부로부터 반발을 받게 되었으니 이 갈 등의 두드러진 사례가 김수영(金洙映)과 이어령(李御寧) 사이의 논전이다. 68년 3월 <조선일보(朝鮮日報)> 지면을 통해 전개된 이 논쟁에서 김수영은 상업주의와 체제 권력의 극대화가 창작의 표현에 속박이 된다고 한 데 반해, 이어령은 참여문학론자들이 문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저울질함으로써 "한국의 문예예술을 위협하는 것은 도리어 문학인 자신일 수도 있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상반된 관점은 이어령이 문학을 상상력의 차원에 국한 시킴에 비해 김수영은 사회 현실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전제하여 문학을 생각한 데서 온 것으로서, 참여와 도피적 순수의 되풀이 이론이 되고 말았다. 다음해인 69년에는 김현·김주연(金柱演) 등에 의해 이른바 '소시민 문학론(小市民文學論)'이 제기되어 '소시민의식과 개성적 인간의 드러냄'이란 것을 정당화하려 하였으나, 객관성 있는 논리가 제시되지 못했다. 같은 해에 백낙청(白樂晴)의 <시민 문학론(市民 文學論)>이 나와 소시민문학론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였고, 문예계의 흐름이 참여문학 내지 현실의식의 문학 쪽으로 접해갔다.

70년대의 한국 문예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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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十年代-韓國文藝思想

60년대에 제기된 참여문학론은 70년대에 들어와 리얼리즘 문학론으로 발전하는 한편 시·소설 등 창작계의 동조를 얻으면서 70년대 한국문학이 전개한 리얼리즘 문학론의 일련의 작업은 한국문예사조사(文藝思潮史)의 흐름 위에서 보더라도 비중이 큰 것으로 보인다. 70년대 리얼리즘론 대두의 직접적 계기는 <사상계(思想界)> 70년 4월호의 좌담 '4·19와 한국문학'이었다. 평론가 구중서(具仲書)·김윤식(金允植)·김현·임중빈(任重彬) 등이 참석한 이 좌담에서 "4·19 이후 성장한 시민의식이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가능케 할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 거론되었다. 한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社會史)>가 이 무렵 번역 소개되면서 19세기 발자크 리얼리즘의 중요성에 관한 원리론이 환기된 것도 한국 70년대 리얼리즘론에 보탬이 되었다. 이 결과 70년대 리얼리즘론은 1930년대 한국 문단의 단편적(斷片的) 리얼리즘론들과 달리 원리론적 작업으로 정착되었다. 리얼리즘론은 동시에 민족문학론을 불러일으켰으며, 또한 세계 문예사조에 비추어 모더니즘은 주목되어야 할 문명사적 문제라는 각성도 제기하였다. 70년대에 있어 리얼리즘→민족문학→모더니즘 극복(구조주의도 모더니즘의 재판으로 봄)→제3세계 문학에의 전망으로 비평정신을 발전시킨 측으로 김병걸(金炳傑)·백낙청(白樂晴)·염무웅(廉武雄)·임헌영(任軒永)·구중서(具仲書) 등이 있다. 한편 소시민 문학 내지 개성적 문학→한국문학→구조주의로 비평정신을 지녀 나아간 측은 김현·김주연(金柱演)·김치수(金治洙)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