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사상/통일신라시대의 문예사상
통일신라시대의 문예사상〔槪說〕
편집통일신라의 문학사상은 한 마디로 말해서 현묘(玄妙)의 도(道) 또는 풍류(風流)라고 하겠다. 이 말은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고승(高僧) 각훈(覺訓)이 쓴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오는 말이다. 이 글을 보면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르되 풍류라 실은 3교(三敎)를 포함하여 군생(群生)을 접화(接化)하였으니, 말하자면 들어서는 집에서 효성을 다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라고 함은 노사구(魯司寇, 공자의 뜻이요, 무위(無爲)함에 처(處)하여 말이 없는 가르침을 행함은 주 주사(周柱史, 노자)의 종(宗)이요,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의 교화(敎化)이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衆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라 하였으니, 그 '풍류'란 곧 유교·도교·불교의 요소들이 기조가 되어 있고, 이 3교가 종합 조화된 것이라 하겠다. 우리 겨레는 위에서 든 세 가지 외래사상이 들어오기 전에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과 같은 고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고유신앙 위에 다시 외래사상인 유·불·도교가 어울렸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외래사상들이 그 원산지에서의 상태를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토착신앙과 접합(接合)되면서 변질된 상태로 발전하였다는 뜻이 되겠다. 이를테면 신라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였을 때에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순교자의 피를 징험(徵驗)한 연후에야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곧 외래사상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어서 우선 비판하고 반발하는 능력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증명한 설화(說話)라고 하겠다. 이렇게 토착신앙과 불교가 접합된 사상체계가 바탕이 된 문학작품으로 우리는 희명(希明)의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월명사(月明師)의 <도솔가(兜率歌)>, 광덕(廣德)의 <원왕생가(願往生歌)>, 융천사(融天師)의 <혜성가(慧星歌)>와 같은 축도적(祝禱的)인 성격을 띤 향가작품을 들 수 있겠고, 처용랑(處容郞)의 <처용가(處容歌)>나 신충(信忠)의 <원가(怨歌)>에서 주력적(呪力的)인 능력을 찾아볼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는 그 수사의 묘에 있어서나 숭고한 시정신에 있어서나 현존 향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역시 주력성을 띠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문학작품에 주력적인 능력을 인정하게 된 것은 곧 불교가
극락 정토(淨土)라는 내세관을 강조함으로써 상층 귀족들이 영화를 구한 현실의 호화를 내세에까지 누릴 수 있는 보장을 불전(佛前)에 귀의하는 것으로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한편 유교사상은 그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종교적인 요소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실천적인 정치사상이었던 것이 우리땅에 들어와서는 종교적인 요소를 띤 문화형태로 바뀌어져 역대로 공자묘(廟)가 섰고, 공자의 위패(位牌)가 하나의 우상으로 화하였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이라는 정치적인 윤리관이 변하여 절대적인 교리처럼 되어버렸으며, 그러기 때문에 문학상에 있어서도 그러한 덕목(德目)들이 종교적인 명목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충담사의 <안민가(安民歌)>가 군(君)·신(臣)·민(民)을 부(父)·모(母)·자(子)로 비유하여 치국(治國)의 원리를 깨우쳤는데, 그것이 바로 유능한 향가시인인 승려의 손으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줄로 안다. 즉 이 노래를 짓게 된 동기가 경덕왕(景德王)이 귀정문(歸正門) 누상(樓上)에서 영복승(榮服僧)을 기다렸는데 그 영복승이 바로 충담사였고, 영복승을 기다린 것은 5악(五岳)과 3산(三山)의 제신(諸神)이 가끔 궁정에 나타나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3월 3일에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 앞에 차를 끓여 바치고 돌아오는 충담사를 왕이 불렀다는 일련의 설화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토착신앙과 불교와 유교가 융화된 상태를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이상은 주로 향가작품을 대상으로 살펴보았거니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비롯한 문헌들에 실려 있는 설화문학에서도 우리는 토착신앙과 외래사상이 접합된 많은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이제 일일이 그 예를 들지 않겠으나, 화랑(花郞)이나 명장 또는 충(忠)·효(孝)·열(烈)에 관한 설화에는 유교적인 요소를, 불사(佛寺)의 연기설화(緣起說話) 또는 명승(名僧)의 전기(傳記)설화에는 불교적인 요소를, 이변(異變)·예언(豫言)·기사(奇事)에 관한 설화에는 도교적인 요소를 반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독립하여 하나의 설화를 이룬 것이 아니라 서로 얽히고 설켜서 하나 하나의 설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통일신라의 문학사상은 갖가지 요소들이 융합 조화되어 이루어졌으되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토착신앙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만큼 주체성을 잃지 않았다고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설화문학이 문자상에 기록될 때에는 한문문학으로 정착되었으나 시가문학(詩歌文學)의 경우에는 그 표기의 체계가 한시문(漢詩文)이 아닌 향가문학 즉 이두식(吏讀式)인 표기방법을 취했던 것이다. 왕성한 한문문학의 세력을 꺾고 고유어를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이 창안되고 연마되어 비록 한자일망정 모든 불편을 극복하여 우리의 노래를 문자상으로 창작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통일 신라의 문학사상이 지녔던 주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게 하는 바이다.
월명사
편집月明師
신라 경덕왕 때의 중 혹은 화랑. 향가(鄕歌) <도솔가(兜率歌)> <산화가(散花歌)> <제망매가(祭亡妹歌)>의 작자. 시작(詩作)에 관련된 여러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그의 작품속에 나타난 사상을 간추리면 (1) <도솔가>는 왕명에 따라 미륵불에게 바쳐진 것으로 당시 성행하였던 미륵신앙을 말해주고, (2) <제망매가>는 죽은 누이를 슬퍼한 것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과 정토(淨土)사상을 보여주며, (3) <산화가>는 전하지 않으나 산화가 범패(梵唄)를 부르며 꽃을 뿌리는 불교 재식(齋式)인 점으로 보아 역시 당시 불교음악의 보급을 말해 준다.
충담사
편집忠談師
신라 경덕왕 때의 중. 향가 <안민가(安民歌)><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의 작가. 그의 작품에 나타난 사상은 (1) <안민가>에서 유교적인 군(君)·신(臣)·민(民)의 관계와 국가의 중요성, 각 신분이 각각 자기의 본분에 충실하면 나라가 태평하게 된다는 유교적인 윤리관을 말해주고 있고, (2) <찬기파랑가>에서는 죽은 화랑을 추모하되 순수 정렬한 마음씨를 찬미하고 있다.
최치원
편집崔致遠 (857∼ ? )
신라말의 학자. 호는 고운(孤雲)·해운(海雲). 경문왕 9년에 당나라에 유학,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 등의 벼슬을 하고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에는 당장(唐將)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당시의 표장(表狀)·서계(書啓)·경문 등을 작성했으며, 885년에 귀국, 새로운 학문으로 국정을 쇄신하려 하였으나, 국정의 문란을 통탄, 외직(外職)을 청원하여 지방 태수(太守)로 전전하다가, 진성여왕 7년 견당사(遣唐使)에 임명되었으나 도적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동왕 8년 시무(時務) 10여조를 상소·시행케 하고 아찬이 되었으나 난세(亂世)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 문묘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저서로 <계원필경(桂苑筆耕)>등이 있고, 각지에 고승(高僧)들의 비문(碑文) 수편이 남아 있으며, 특히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 화랑도를 해설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1) 당시 당나라에서 훌륭한 신문학을 배운 진보적인 사상가로 골품제의 한계에 부딪친 국정의 개혁을 꿈꾸었던 것 같다. (2) 유교·불교·도교를 상호배척하는 대립적인 사상으로 보지 않고, 이들을 종합 수용하는 가운데 화랑도의 민족사상을 발전시키려 했던 것 같다. (3) 정치·교육·예의에 있어서는 유학의 역할을 크게 인정하면서도, 세속을 떠난 자연·인생·운명 등에 대해서는 불교·도교 쪽에 많이 기울어졌다. (4) 따라서 그는 중국 신학문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전통적인 민족 교유의 풍속·종교·사상 등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야문화
편집伽倻文化
서기 전후 무렵부터 신라에 병합되는 562년까지 경상남북도 서북지역에 존재하던 국가들을 통틀어 가야(가야연맹)라 한다. 경기도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마한지역에 백제로 통합되고, 경주를 중심으로 진한지역이 신라로 통합된 반면, 변한지역은 끝내 통합되지 못한 채 가야연맹으로 남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가야사는 백제사·신라사에 비해 내용이 매우 모호하고 <삼국유사> <삼국사기> 일본의 <일본서기> 등에 단편적인 기록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 경상남도 해안지대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이 지역의 사회통합이 진전되어 변한 소국들이 나타났다. 2∼3세기에 변한 지역은 김해의 가야국을 중심으로 전기 가야연맹을 이룬다. <삼국유사>에 실린 수로왕 신화는 이 시기에 상황을 그린 것이다.
경상남도 해안지대는 풍부한 철산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좋은 해운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어 이를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예맥·한·낙랑·왜 등과 활발한 무역을 했다.
벼농사를 비롯한 농경문화와 조개 채취를 비롯한 어로문화를 저변으로 발전하던 전기 가야문화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복속하고, 4세기 말에는 광개토왕의 군대가 낙동강 하류까지 침입함으로 인해 쇠퇴기를 맞게 된다.
고구려의 침입으로 발전의 기틀이 꺾이고, 그 세력범위도 축소된 가야지역은 5세기 들어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중심이 해안지방이 아닌 내륙지방으로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내륙지방은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지 않은 데다가 해안의 선진문화가 파급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세기 초 백제와의 싸움에서 패한 데다가 문화전수를 앞세운 백제와 왜가 가야를 제쳐두고 독자적으로 교역을 하게 됨으로써 이전의 무역 중개지로서의 성격은 희석되고 토착 농경에 기반을 둔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영위하게 된다.
중국의 우수문화를 낙랑을 통해 직접 들여오던 예전과는 달리 서로 대치관계에 있는 백제·신라를 통하자니 자연 낙후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국력의 약세를 의미했다. 결국 562년 신라에 병합이 된다. 김유신과 우륵·강수는 가야의 유민으로 신라에 귀화한 사람들이다. 김유신 일가는 수로왕의 9대손으로 진골 대접을 받았고, 우륵은 신라에 가야금을 전했다. 강수는 유학에 능해 무열왕대에 중국과의 외교문서 해독 및 작성을 담당했다고 한다.
신라의 세 여왕
편집新羅-女王
신라엔 골품이란 특수한 신분제도가 있어 그 신분에 준하여 벼슬 상승에 한계가 정해졌다. 후세에 찾기 힘든 여왕이 셋이나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 신분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善德女王, ? -647) 역시 성골이란 특수한 왕족을 배경으로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와 백성에 의해 왕으로 옹위되었다.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선덕여왕은 안과 밖의 정치를 무난히 소화해 냈다. 선덕여왕에 관한 일화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먼저 당 태종이 모란꽃을 그려 그 씨와 함께 보낸 적이 있었다. 여왕은 그림을 보자마자 "아름답기는 하나 향기가 없겠구나"라고 하였다. 씨를 심어보니 정말 향기기 없었다. 여왕은 "꽃 옆에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음은 당연한 이치지만 이는 당 태종이 내가 남편 없음을 업신여긴 것이리라"고 하여 신하들을 놀라게 하였다.
선덕영왕은 당의 문화를 적극 수입하며 당군으로 백제를 협공하기도 하였지만 당은 결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당 태종은 여왕이 무능하여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받는 것이라 비난하였다. 이에 비담과 염종이 왕을 업신여기고 모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즉, 여왕은 선정을 베풀지 못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해 진압은 되었지만 어쨌든 그해 선덕여왕은 16년간의 재위를 끝으로 죽고 말았다.
진덕여왕(眞德女王, ? -654) 역시 왕으로서의 재질이 풍부하였다. 몸이 9척이나 되고 손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었다. 이땐 당의 문화가 더욱 침투되어 관제·의복·정치는 물론 풍습까지 그 예속도가 강하였다. 삼국통일의 전초작업을 충실히 하고 당의 대업을 찬양하는 <태평송>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여왕으로 무난한 지위를 지켰던 진덕여왕도 남자 신하와의 마찰은 어쩔 수 없었다.
김부식은 신라가 여왕을 계속하여 받드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음이 천만다행이라며 '빈계지신(牝鷄之晨)'을 인용했다. 빈계지신은 암탉이 새벽에 우는 일을 맡았다는 뜻으로 남편 대신 아내가 집안 일을 다 맡아봄을 비꼬아 이른 말이다. 김부식은 옛문헌에 그런 성어도 전하니 그렇게 하지 않음이 좋으리란 경고를 하였던 것이다. 이 빈계지신은 지금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으로 와전, 비약되어 전하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여왕 진성여왕(眞聖女王, ? -897)은 천성적으로 음흉하고 괴팍하였다. 숙부이자 남편이었던 각간 위홍이 죽자 후궁에 어린 소년을 데려다 놓고 음행을 일삼고 뇌물을 즐기며 정치적·경제적으로 혼란을 야기했다. 당나라의 측전(則天)이나 서태후에 버금가는 여걸이었다. 당연히 조세가 걷히지 않고 관리가 부패하고 도적이 난립하는 혼란이 일어났다. 후백제의 견훤·궁예의 공격을 받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최치원이 시무십조(時務十條)를 건의하기도 했지만 진골 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 개혁안이 시대와 권위에 부딪쳐 시행되지 못하자 신라는 붕괴하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된다.
신라의 여왕들이 왕의 자리에 겪어야 했던 내·외의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존경받기엔 넘어야 할 벽이 많음을 시사한 좋은 예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