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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의 도교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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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사상의 황금시대인 통일신라시대에는 뒤에 이 시대의 뛰어난 인물을 도교적으로 미화시킨 많은 설화가 전하나 대개는 후인의 위작(僞作)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 삼국통일 당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을 비롯해서 고승(高僧)으로 원효(元曉)·의상(義湘), 유학자로 최치원(崔致遠) ·최승우(崔承祐), 술사(術士)로 김암(金巖), 도선(道詵) 등에게 가탁(假託)한 설화가 생겨났고, 특히 김가기(金可紀)·최승우(崔承佑)·자혜(慈惠) 3인의 중국 종남산(終南山) 광법사(廣法寺) 수련설화와 최치원의 청학동(靑鶴洞) 신선설은 해동도교의 연원으로서 후대에 크게 신봉되어 많은 비기(秘記)와 이적(異蹟)의 기록을 낳게 하였다. 그러나 김유신·원효·의상·최치원 등의 것은 후대에 도·불 혼합으로 윤색된 게 분명하고, 최승우의 것은 사실(史實)과 크게 어긋나며, 자혜(慈惠) 등의 것은 현재로서는 고증할 길이 없다. 김암·도선 등의 음양도참설이 도교적인 경향을 띨 수도 있음은 중국의 예를 보아도 무리가 아니겠지만, 역시 그들의 것은 음양도참술 쪽에 치운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 중에서 어느 정도 사실과 일치하는 김가기(金可紀)의 기록은 합당하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에 도교사상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것은 별로 없지만 당시의 정세로 보아 입당구법생(入唐求法生) 간에 도교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였음은 김가기의 예로 짐작할 수 있으며, 신라의 불승들도 진호국가(鎭護國家)를 위하여 토착사상, 음양도참설을 포용하였듯이 도교를 활용하는 데도 인색치는 않았을 것이다. 고신라 설화의 불교·도교적 성격, 황룡사 구층탑의 건축비화, 5악산신(五嶽山神) 숭배 등이 모두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실례들이다. 즉 통일신라시대에는 도교가 승려사회나 유학자들 속에서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연구되었으며 특정인물을 신비화하는 데 많이 원용되었던 듯하다. 그러나 도교가 하나의 뚜렷한 종교로서 인식되어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역시 다음 고려시대로 넘어간 뒤였다.

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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刑璹

8세기경 신라 효성왕(孝成王) 때 온 당나라 사신. 선왕 성덕왕(聖德王)이 돌아간 것을 조문하기 위하여 738년 당의 현종(玄宗)의 명을 받고 오는 길에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등 문서를 갖고 와 효성왕(孝成王)에게 바쳤다고 한다.

김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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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可紀 ( ? ∼859)

신라의 학자·도사. 원성왕(元聖王) 때 당나라에 들어가 빈공과(賓貢科)에 급제, 박식과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때 사신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도술(道術)에 전심, 종남산 자오곡(終南山 子午谷)에 은둔하여 화초와 도리(桃李)를 가꾸면서 <선경(仙經)>과 <도덕경(道德經)>을 공부하였다. 858년 당나라 왕에게 자기는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부름으로 영문대 시랑(英文臺侍郞)이 되어 언제 승천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예언대로 다음해 2월 15일 죽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