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조선후기의 철학사상

조선후기의 철학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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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계 성리학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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程朱系性理學-動向

18·19세기, 이른바 조선후기의 철학사상을 대표하는 것은 당시 관학(官學)의 입장에서 모든 통치이념 및 통치원리의 근거를 밝히던 유학 중의 성리학 사상이다. 성리학 중에서도 특히 정주계(程朱系)의 성리학(程朱學)이 이 시기의 철학사상을 대표한다. 한국에서는 성리학의 토착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16세기부터 이미 정주계의 성리학만이 정통을 자처하며 자유롭게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주계의 성리학은 이른바 '사·칠이기해석(四七理氣解釋)'을 둘러싸고 16세기부터 주리(主理)·주기(主氣)파로 대립되었거니와, 18세기에도 그 여맥(餘脈)이 계속 이어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의 본성과 금수(禽獸)의 본성이 서로 같은가, 다른가를 따지면 이른바 '인물성동이론변(人物性同異論辨)'으로 말미암아 호파(湖派)와 낙파(洛派)의 대립이라는 새로운 분파현상이 나타난다. 사람과 금수의 성(性)이 같다는 견해는 낙파가 되고, 다르다는 견해는 호파가 된다. 이 현상은 본성의 문제로부터 발단(發端)되었다는 점에서 4단7정론(四端七情論)을 중심으로, 주로 (情)의 문제에 집중되었던 16 -17세기의 성리학에 비하면 문제의식의 확대 내지 이기론(理氣論)의 새로운 사례(事例)에의 적용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물성동이론변 역시 따지고 보면 이·기 중에서 이에 더 치중하여 성을 말하느냐 기에 더 치중하여 성을 말하느냐 하는 두 가지 경향으로부터 일어난 논쟁이다. 전자의 경향으로부터 낙론(洛論)이 나오고 후자의 경향으로부터 호론(湖論)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칠이기해석(四七理氣解釋)에서 비롯된 과거의 주리론(主理論)은 낙론과 밀착하고 주기론(主氣論)은 호론과 밀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 17세기부터 당쟁과 더불어 문벌의식, 지역의식(嶺南·畿湖)까지 동반하며 심각히 분립되었던 퇴계·율곡학파의 여맥으로서의 주리·주기파의 대립은 이·기중의 어느 하나에 더 치중하는 편향적 경향이 더욱 경화(硬化)된 나머지,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 아니면 기 하나만으로 설명하는 현상을 초래한다. 본래의 이기이원론이 유리(唯理)라는 일원론으로 극단화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두 극단론을 지향하려는 절충파도 없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이미 정주의 것과 거리가 먼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후기의 성리학이야말로 주제면에서 볼 때 중국의 성리학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것이라 하겠다.

양명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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陽明學-發展

다른 한편 같은 유학인 동시에 성리학이기도 한 육(陸)·왕계(王系)의 성리학인 심학(心學) 또는 양명학(陽明學)이 이때(18세기)에 일부 소수의 학자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수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일찍이 16세기 후반(명종·선조)부터는 학자들 간에 양명학이 꽤 논구(論究)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양명학은 정통을 자처하는 정주계의 성리학자들로부터 이단시되어 철저히 배척받은 나머지 부진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욱이 17세기에는 주자의 이론에 조금만 어긋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버리던 때였으므로, 양명학에 호감을 가진 학자들이 좀 있었지만 그것을 처저히 체계있게 연구하지는 못하였다. 당시의 양명학자는 주자학을 표방한 양명학자(陽朱陰王)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세기 후기로부터 18세기 전기에 걸쳐 살았던 하나의 예외자가 나왔던 것이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정제두는 주위의 많은 비난을 무릅쓰고 자신의 양명학 연구를 공개하면서 한 평생을 연구에 바쳤다. 그는 누구보다도 깊이 체계적으로 양명학을 연구한 끝에, 수많은 저서를 저술하여 양명학의 장점을 소개하는 한편, 양명설에 대한 퇴계의 변박(辨駁)에 다시 반론(反論)을 전개함으로써(辯退溪傳習錄辯中新民說) 양명학을 옹호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내 심즉리(心卽理 등이 양명사상이 그에 의하여 올바르게 소개되었고, 오로지 그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양명사상이 새로운 발전을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제두의 양명사상은 그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18세기 당시에도 이광신(李匡臣)·이광사(李匡師)·이영익(李令翊)·이충익(李忠翊) 등 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이들의 연구태도 자체가 정제두보다 소극적이었고, 따라서 그 연구의 깊이 또한 정제두에 미치는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말엽에 와서야 박은식(朴殷植) 같은 학자에 의하여 양명학이 다시 제창되는 것을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실학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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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學運動-展開

주자학 중심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이며 극도로 형이상학화(形而上學化) 함으로써 비생산적인 학문으로 굳어진 성리학에 대한 반동으로 유학 자체 내에서 일어난 사상이 실학(實學)이거니와 실학은 이미 17세기에 상당한 발전을 보던 중이었다. 임란·호란 후에 맞이한 사회위기 및 서양문화의 자극을 받은 조선중기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현실타개 능력의 한계를 절감한 나머지 주자학의 범위를 벗어나는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學)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17세기의 실학은 경세치용을 모토로 공리공론성(空理空論性)을 탈피한, 현실생활에 유용한 사상을 지향하고 있었다. 박세당(朴世堂)의 반(反) 주자적인 경학사상(經學思想)은 바로 당시의 이러한 실학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 경세치용의 실학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필두고 한 수많은 실학자에 의해 만개(滿開)된다. 다른 한편 청(淸)의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일련의 북학론자(北學論者)인 박지원(朴趾源)·홍대용(洪大容)·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들이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모토를 내세움으로써 18세기의 실학은 보다 더 충실한 내용과 성격을 갖추게 된다. 비록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이라는 구호가 실용주의적 성격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은 다 같다고 하더라도 전자가 토지제도 및 행정기구의 개편을 꾀하는데 역점을 둔 실학의 한 측면이라면, 후자는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을 꾀하는데 역점을 둔 실학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 청의 금석학(金石學)·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학은 이제 '실사구시(實事求是)'로 표현되는 실증성을 바탕에 깔고 전개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실학의 주류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위시한 실사구시학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선후기의 반주자적이며 실용적이고 실증적인 실학정신이 특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경학사상과 혜강(惠崗) 최한기(崔漢綺)의 유기론적(唯氣論的) 경험철학에서 총괄적으로 융합되어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구현된다. 다시 말하면 조선후기의 철학으로서의 실학의 기초는 특히 이들의 철학사상을 기다려서야 성숙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퇴계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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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學派

조선 정주계(程朱系) 성리학의 일파로 율곡학파(栗谷學派)에 대립한 학파. 명종 때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간에, 선조 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간에 4단7정논쟁(四端七情論爭)이 일어나 이기설(理氣說)의 쟁점이 분명해지자 이황(李滉)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파가 형성되어 이를 주리파(主理派) 혹은 영남학파(嶺南學派)라 하였다. 4단7정에 대한 퇴계(退溪) 이황의 해석은 '이기호발(理氣互發)'를 전제한 것으로 "4단은 이(理)가 발함에 기(氣)가 따르는 것(理發而理乘之)"이고, 7정은 "기가 발함에 이가 그 기를 타고 있다(氣發而理乘之)"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이(李珥)가 <이(理)의 발(發)>이 있을 수 없음을 전제로 <기발이승(氣發理乘)>만을 옳다고 하자, 논쟁의 초점은 "이가 발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집중되어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趙穆)으로부터 이현일(李玄逸)(1627∼1704)·이재(李栽)로 이어지는 학자들은 각종 형태의 이기논쟁(理氣論爭)을 통하여 퇴계를 옹호하고 율곡의 이론을 반박하였으니, 이들은 대부분 동인(東人-南人)인 영남학자(嶺南學者)들이어서 영남학파라고도 하였다. 이 학파는 19세기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어 이상정(李象靖)(1710∼1781)·이진상(李震相)(1818∼1885)·이항로(李恒老)(1792∼1868) 등이 이에 속하나 철학이론상의 뚜렷한 진전은 기록하지 못하였다.

율곡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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栗谷學派

조선시대 정주계(程朱系) 성리학의 일파. 4단7정 논쟁에 있어 이이(李珥)의 '기발이승(氣發理乘)'설을 지지, 주기론(主氣論)의 방향으로 그 설을 전개해 나간 학파로 주기파(主氣派) 혹은 기호학파(畿湖學派)라고도 한다. 명종 때의 퇴·고논쟁(退高論爭:이황·기대승 간의 논쟁)에서 이미 이황의 주리설에 대한 비판의 싹이 보였고 이것은 선조 때 율·우논쟁(栗牛論爭:이이와 성혼 간의 논쟁)에서 다시 문제되어 "이(理)는 발할 수 없다"는 이이의 주장을 따르는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 등이 이가 발할 수 없음을 계속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황을 지지하는 퇴계학파와의 사이에 오랜 논쟁이 계속되어 당쟁(黨爭)을 더욱 가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송시열·한원진(韓元震)이 이황의 설을 부정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착수한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만 하더라도 50여년의 세월을 소비할 정도였다. 이들은 이발(理發)을 부인하고 기발(氣發)만 인정하므로 기(氣)를 위주로 생각하는 이론이라는 뜻에서 주기론(主氣論)이라 지칭되었다. 이 계통의 학자들은 대체로 기호지방(畿湖地方)의 서인(西人) 학자들로, 율곡학파라는 이름 대신 기호학파라는 이름도 붙게 되었다. 이 주기설(主氣說)의 입장을 가장 극단화시켜 유기론(唯氣論)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임성주(任聖周)의 철학이었고, 19세기에는 임헌회(任憲會)(1811∼1876)가 나와 기일원론을 계승하고 퇴계학파의 이기이원론을 배격하기도 했다.

인물성동이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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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物性同異論辨

18세기 초엽 성리학계에 일어난 철학 논쟁. 일명 호·락분파(湖洛分派)라고도 함. 논쟁의 테마는 사람의 본성(人性)과 금수(禽獸)의 본성(物性)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이른바 '인물성동이'의 문제로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제자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서 발단되어 거의 전 성리학계의 쟁점으로 확대되었다. 이간에 의하면 모든 사물이 생성되는 것은 '본연의 이(理)' 때문이다. 그 이를 <주역>에서는 태극(太極)이라 했고 <중용>에서는 천명(天命)이라 했다고 한다. 인간과 금수는 이 '본연의 이'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점에서 다 같다. 그런데 문제로 삼고 있는 <성(性)>이란 바로 이러한 <리>(性卽理) 이외의 것이 아니다. 주희가 "인간이나 사물이 생겨날 때 타고난 이가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五常之德)와 같은 성(性)"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본원(本源)인 일리(一理)'야말로 인간 및 모든 사물들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과 금수의 성은 그 근본에 있어서 같다고 주장한다. 다만 인간과 금수가 다르다든가 다르게 구별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금수는 인간의 <기(氣)> 또는 기질(氣質)보다 못한 기질을 타고나며, 또한 그 다른 기질로 말미암아 그 본연의 성을 인간의 경우와 같이 충분히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원진 역시 이(理)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과 사물(禽獸)의 이가 다를 것이 없다든가 성과 이가 다르지 않은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선 성이 기와 관계없이 따로 존재하는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성은 어디까지나 태극과 같은 이가 기 속에 섞인 뒤(乘氣之後)의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성을 이라 하더라도 그는 구체적인 사물이라든가 인간으로 현상화된 이후의 이가 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한원진은 인간을 이루는 기와 금수를 이루는 기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간을 이루는 기는 청명(淸明)한 것이고 금수의 기는 혼탁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혼탁한 기에 속한 성과 청명한 기에 속한 성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의·예·지와 같은 성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성으로서 금수의 성과는 다른 오직 인간만의 '본연의 성'이라 단언하였다. 이상과 같이 한 사람(李柬)은 이의 입장에 치중하여서 인물성(人物性)의 상동(相同)을 주장하는 한편, 또 한 사람(韓元震)은 거의 기의 입장에 치중하여 그 상이를 주장할 때, 이들의 스승인 권상하를 비롯한 동학(同學)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매봉(梅峯) 최징후(崔徵厚) 등은 한원진의 주장을 지지하고, 도암(陶庵) 이재(李縡), 이간, 여호(黎湖) 박필주(朴弼周), 관봉(冠峯) 현상벽(玄尙璧) 등은 이간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마침 이간의 설을 지지하는 이재·박필주 등의 집이 낙하(洛下)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론을 낙론(洛論)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한원진·윤봉구·최징후 등의 집이 호서(湖西)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이론은 호론(湖論)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만 이간과 현상벽은 호서에 살고 있었지만 그 주장이 낙하의 주장과 같았으므로 역시 낙론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분립된 양론(兩論)은 마침내 사·칠이기설(四七理氣設)로 대립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학자간에 파당(派黨)을 지어 오래도록 논변(論辨)을 계속함으로써 조선성리학에 이른바 호·락분파(湖洛分派)라는 하나의 특색을 이루었던 것이다.

한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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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元震 (1682∼1751)

조선중기의 학자.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숙종 43년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계(官界)에 진출하였으나 경종 1년에 노론(老論)의 실각과 함께 사직, 영조 1년에 경연관(經筵官)에 뽑혀 진강(進講)하였으나 소론(少論) 배척론을 펴다 탕평책에 어긋난다고 삭직되었다. 영조 17년에 복직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전심하였다. 그는 권상하 문하의 강문8학사의 1인으로 이간(李柬)의 인물동성론을 반대, 인(人)·물(物)의 성이 같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여 인물성동이 논변을 낳게 하였고, 낙론(洛論)에 대립하는 호론(湖論)의 영수로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途說)을 고수하였다. 그는 저서 <남당집(南塘集)> 이외에, <퇴계집차의(退溪集箚疑)> <장자변해(莊子辨解)> <양명집변(陽明集辨)> <선학통변(禪學通辨)> <근사록주설(近思錄註說)> 등 많은 편저를 남겼고, 특히 그가 영조 17년에 저술한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는 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50년만에 완성한 거작(巨作)이었다. 그는 천문(天文)·지리(地理)·병학(兵學)·산수(算數)에도 통달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이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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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柬 (1677∼1727)

조선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공거(公擧), 호는 외암(巍巖)·추월헌(秋月軒),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숙종 때 익위(翊衛)를 지냈을 뿐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인(人)·물(物)의 성(性)은 동일하다는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을 주장하고,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이성론(人物異性論)을 반대하여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을 벌인 끝에 한원진의 호론(湖論)에 대립하는 낙론(洛論)을 형성했다. 순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 시호는 문정(文正). 저서에 <외암유고(巍巖遺稿)> <미발변(未發辨)> 등이 있다.

주자언론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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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言論同異考

1741년(영조 17) 한원진(韓元震)이 지은 6권 3책으로, 주희(朱憙)의 사상에 있어서 전후 이동(異同)한 바를 고증(考證)하여 논(論)한 책. 저자가 그의 스승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만년(晩年)에 착수하여 10조(條)만을 끝낸 채 완성을 하지 못했던 <주자언론동이고>를 계승하여 집필 간행한 것이다. 송시열은 이 책에서 이황의 '이발(理發)' 2구는 대오(大誤)라 지적하여 이(理)는 정의(情意)와 운용(運用)·조작(造作)도 없는 것이며, 이(理)는 기(氣) 속에 있기 때문에 기(氣)가 능히 운용하고 작위(作爲)해야 이(理)도 또한 타고

난다고 하여 이이(李珥)에게 충실하였다. 그러나 <주자어류(朱子語類)>에 기재(記載)되어 있는 '사단이발, 7정기발(四端理發, 七情氣發)'의 2구(二句)를 고통으로 여겨 보한경(輔漢卿)의 기록을 오기라고 단정하고 자기의 주장을 고증(考證)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권1에는 이기(理氣)·음양(陰陽)·천지(天地)·일월(日月)등, 권2는 심(心)·성(性)·정(情)·<대학(大學)>, 권3은 <논어> <중용>, 권4는 <맹자> <역> <서>, 권5는 <시> <춘추> <예> 주자·정자·장자의서 등, 권6은 과거(科擧)·성현(聖賢)·이단(異端) 등으로 되었다. 제1책 첫머리에 한원진의 서(序)가 있고 부록으로 <논맹집주혹문(論孟輯註或問)> 등이 있다.

강문8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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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門八學士

청풍 황강(충북 제천 한서면)에서 강학하던 수암 권상하의 문하 8명을 말한다. 8학사란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외암(巍巖) 이간(李柬),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봉암(鳳巖) 채지홍(蔡之洪), 화암(華巖) 이이근, 관봉(冠峯) 현상벽(玄尙璧), 매봉(梅峯) 최징후(崔徵厚), 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을 말한다. 이들 중에서 한원진·이간이 권상하의 고제(高弟)로서 가장 뛰어난 학자였다. 저 유명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도 이 두 학자로부터 비롯 되었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을 둘러싸고 8학사가 양분 대립된 것이 이른바 호·락분파(湖洛分派)의 시초이다.

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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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縡 (1680∼1746)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한천(寒泉), 김창협(金昌協)의 문인. 숙종 28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며, <단종실록(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숙종 42년에 승지(承旨)에 이르러 <가례원류(家禮源流)>시비가 일어나자 노론(老論) 측에 가담하여 소론(少論)을 통박했고, 동왕 45년 영남균전사(嶺南均田使)로 나가 토지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당한 적도 있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직후에 관직을 은퇴, 인제(麟蹄)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심, 영조 1년에는 이조참판을 지냈다. 동왕 17년에는 예문관 제학, 동왕 19년에는 우참찬(右參贊)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조선 후기 성리학계의 대가로서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에 있어 이간(李柬)의 학설을 지지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湖論)을 반박, 낙론(洛論)의 대표적 이론가로 알려졌으며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산정(刪定)했다. 저서로 <도암집(陶庵集)>, 편서(編書)로 <근사심원(近思尋源)> <존양록(尊攘錄)> <주자어류초절(朱子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 그는 낙론(洛論)을 지지하면서도 유기설(唯氣說)에는 반대하고, "마음을 말함에 기(氣)만을 가지고 단언할 수는 없으며 기가 이보다 승(勝)하면 난(亂)하고 이가 기보다 승하면 치(治)하니" 성현의 말씀의 진실은 '이위기주(理爲氣主)'의 네 글자밖에 없다고 하였다. 즉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이 독단에 빠질 위험성을 경고하고, 율곡의 본의에 따라 온건론을 취하고 주리파와의 절충·타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김창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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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協 (1651∼1708)

조선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숙종 8년에 증광문과에 장원, 관계에 진출하여 지돈령부사(知敦寧府使)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저서로 <농암집(農巖集)> <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4단7정변(四端七情辨)> 등이 있다. 그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 간의 대립에 초연하여 양자를 절충하려는 입장을 취했으나 이기설(理氣說)에 있어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의 입장에 가까웠고 인물성동이논변에 있어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이기설의 절충과 사상가가 여럿 배출되었다.

정제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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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齊斗 (1649∼1736)

조선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백가(百家)에 통달하였고, 숙종 때에 6품(六品)·대성(臺省)·방백(方伯)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전생애의 대부분을 학문 연구에 바쳤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곧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20여세 때부터 양명학(陽明學)에 심취(心醉), 당시 학계와 정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배척당하면서도 우리나라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 그의 이러한 학문은 비판적인 그의 학풍과 함께 신작(申綽)·이광사(李匡師)·유희(柳僖) 등 실학자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양명의 학설 중 제일의(第一義)라고 할 수 있는 '치량지설(致良知說)'의 <양(良)>자는 <지(知)>의 개념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치지'의 <지(知)>가 지식의 <지(知)>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생래적으로 얻은 혜명(慧明)한 선천적 지성을 뜻한다고 했으며, '양지'가 있으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지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가 중요한 것이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귀하다고 했다. 그의 학풍은 우리나라 학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바 그의 학술사상의 본령(本領)은 양명학에 있었다. 그의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設)> <존언(存言)> <서(書)> <성학설(聖學說)> <대학설(大學說)> <중용해(中庸解)> 등이 있다.

임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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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聖周 (1711∼1788)

조선후기의 학자. 자는 중사(仲思), 호는 녹문(鹿門), 청풍 출신. 이재(李縡)의 문인. 저서에 <녹문집(鹿門集)>이 있고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을 주기설이라 할 때 주기설이란 표현은 단순히 "모든 것을 이(理)와 기(氣)로 설명하되 이보다 기에 좀더 치중하여 설명한다"는 의미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기만으로 설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로, 그의 철학설은 주기설이라기보다 유기설(唯氣說)이라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이 우주는 기로 충만되어 있으며, '하나의 기가 모든 현상(許多造化)을 이룩한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이 하나의 기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현상 세계(萬象)야 말로 하나의 기가 수만 가지로 나뉘어진 상태'(氣一分殊)라 한다. 하나의 기가 수많은 종류의 사물을 이루게 되는 것은 기의 승강(升降)·비양(飛攘)·감우(感遇)·응취(凝聚)하는 성질 때문이다. 하나의 기가 이러한 성질로 작용함으로써 대소(大小)·정편(正偏)·강유(剛柔)·청탁(淸濁)한 이른바 천차만별의 사물을 이룬다고 한다. 그의 기의 작용을 '기의 성정(性情)'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또 자연이연(自然而然)한 것으로 본다. 사람들은 기 이외에 따로 이라는 것이 있는 듯이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 도(道)라든가 이는 바로 기의 자연함(此自然處) 이 외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이를 기의 '작용(作用)'의 질서를 보는 것이다. 이를 별개의 실재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기를 가리켜 이'라 하더라도 무방하다고 한다. 여기서 그의 유기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주리론(主理論)에 의하면 악(惡)의 현상은 기 때문이며 선(善)의 현상은 이 때문이다. 선한 본성의 본구(本具)를 믿으며, 그 본성이 또한 선의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주리설이다. 그러나 그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인성(人性)의 선 역시 기 또는 기질(氣質)의 선 때문이며 성(性) 자체가 기질을 고려 않고서는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기의 청탁(淸濁)·편전(偏全)이 인간의 현우(賢愚)를 결정지을 뿐 아니라 선악의 행위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임성주의 유기론(唯氣論)이라 할 수 있는 주기설은 우주관으로부터 심성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고 있다. 그러나 임성주의 사상에 대하여 극력 반대하고 또 혹평한 사람은 오희상(吳熙常)이었다.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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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 (1762∼1836)

조선후기의 학자·문신. 자는 미용(美鏞)·송보(頌甫), 초자(初字)는 귀농(歸農), 호는 다산(茶山)·삼미(三眉)·여유당(與猶堂)·사암(俟庵)·자하도인(紫霞道人)·문암일인(門巖逸人)·철마산초(鐵馬山樵), 천주교 교명은 요안, 광주(廣州) 출신. 정조 즉위년에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이승훈(李承薰)을 통해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유고를 보고 감명을 받아 사숙(私淑)하였고, 동왕 7년에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어 정조를 만나 <중용(中庸)>을 강의 이듬해 이벽(李蘗)을 통해 서학(西學)에 접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동왕 13년에 식년문과 갑과에 급제, 정조와 남인(南人) 영수 채제공(蔡濟恭)의 신임을 받았으나, 이듬해 남인 공서파(功西派)의 탄핵으로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만에 풀려나와, 지평(持平)·수찬(修撰)·경기도 암행어사·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의에 이르렀으나 주문모(周文謨) 사건 때문에 둘째형 약전(若銓)과 함께 연루, 좌천당하였다. 그후 왕명으로 규장각(奎章閣)에 복귀,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가환(李家煥) 등과 함께 편찬사업에 참여했다. 동왕 21년 승지에 올랐으나 천주교 신앙혐의로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사의를 표명, 곡산부사로 있으면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여 치적을 남겼다. 다시 입경(入京)하였으나 계속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정조가 죽은 후에는 장기, 강진(康津) 등지에 유배, 이후 18년간 학문에 몰두하여 실학사상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마과회통(麻科會通)> <대동수경(大東水經)>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 <아언각비(雅言覺非)> 등 실학계통의 것과, <상서고훈(尙書古訓)>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주역심전(周易心箋)> <역학제언(易學諸言)> <논어고금주(論語古今注)> <맹자요의(孟子要義)>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대학회의(大學會議)> <희정당대학강록(熙正堂大學講錄)> <소학보전(小學補箋)> <전례고(典禮考)> 등 경학(經學) 계통의 것들과 그의 문집(文集)을 합쳐 508권에 달한다. 1910년에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 시호는 문도(文度). 그의 경학 연구를 중심으로 철학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정약용의 철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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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哲學思想

(1) 당시 주자학(朱子學)을 절대시하여 이기설(理氣說)·예론(禮論)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學界)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있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漢代) 이후의 오도(誤導)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孔子)·맹자(孟子)의 원시 유학(혹은 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後人)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2) 이이(李珥)·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의 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새 시대의 새 학문을 건설하려고 하면서,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에 접촉하여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3) 그는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考證)·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전연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 (4) 그는 천(天)을 유형천(有形天)가 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5) 그는 천명(天命)을 정치적으로는 인심(人心)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君子)의 사명을 강조하였다. (6) 그는 주자의 천리설(天理說)과 이기설(理氣說)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7) 그는 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과 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 (8) 그는 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性)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의 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9) 그는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지었다. (10) 그는 역리(易理)의 성립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괘(卦)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데 반대하였다. (11) 그는 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성(誠)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12) 그는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자(慈)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사명으로 하였다. (13) 그는 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그는 한대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등 다섯 가지로 지적하고,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최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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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漢綺 (1803∼1879)

조선후기의 학자. 자는 운노(芸老), 호는 혜강(惠崗)·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 순조 2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 전심했다. 그가 살던 19세기 실학의 특색은 경세치용(經世致用)이라든가 이용후생(利用厚生) 대신 금석(金石)·고증학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사조가 주류를 이루던 때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바로 이러한 실사구시의 실증정신을 이어받고 이루어진 것으로서, 조선후기 실학사조의 마지막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실증정신은 우선 실감할 수 없는 이(理)보다는 실감할 수 있는 기(氣)를 택한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서 유기(唯氣)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는 무형(無形)하고 기는 유적(有跡)한 것이어서 그 적(跡)을 따르면 이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유기론의 입장으로부터 그는 공허한 명목(名目)에 얽매이지 않고 알찬 내실(內實)에 착안하는 일종의 유명론(唯名論)의 사상을 싹트게 했다. 즉 그는 "눈(目)이라는 이름과 귀(耳)라는 이름을 서로 바꾼다면 눈을 귀라고 부르고 귀를 눈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지만,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는 바뀌어지는 법이 없다. 귀로 본다고 하며 눈으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보고 듣는 실용에 있어서야 무슨 해(害)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으니, 이 유명론적 사상이 모든 명분론(名分論) 내지 형식주의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반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실리주의(實利主義)·실용주의 나아가 실증을 중요시하는 경험주의도 유명론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결험론을 아래와 같이 피력한다. "종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을 만일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면, 종을 치기 전에 치면 소리가 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주자학에서 말하는 선천적인 이성(仁義禮智)의 능력을 부인한다. 이와 같이 경험에 의한 지식 그리고 어디까지나 실용성이 있는 지식의 확충을 위하여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용을 힘쓰는 자가 결국 이기고 허문(虛文)을 숭상하는 자가 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서양은 서로를 알아야 하며, 알기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고, 서로를 위하여 통상의 길까지 터야 한다는 것을 그는 역설하였다. 사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그의 기(氣)의 형이상학의 귀결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경험론자다운 기의 형이상학이 있다. 그 형이상학은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으니 '대기운화(大氣運化)'론과 '통민운화(統民運化)'론이 그것이다. 전자는 우주·자연에 관한 이론이며 후자는 인간사에 관한 이론이다. 대기운화론이란 우주자체가 기의 운동 변화로 자연의 이법(理法)을 구현하여 간다는 것이며, 통민운화론이란 기수(氣數)에 의하여 인간 또는 인류의 흥망 성쇠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기운화'와 '통민운화'는 궁극에 가서 잘 조화 일치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한다. 결국 '통민운화'가 '대기운화'에 조화 일치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도록 흥망 성쇠를 결정짓는 기수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수 극복의 사상 속에 바로 그의 진보주의적 역사관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예나 지금이 같다 하더라도 예를 버리고 지금을 택하겠다"고 그는 주장했다. 경험지식의 확충, 실리·실용을 위한 문호개방 및 통상론이 모두 이 진보주의적 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겠다. 저서로 <육해법(陸海法)> <추측록> <강관론(講官論)> <기측체의(氣測體儀)> <심기도설(心器圖說)> <지구전요(地球典要)> <인정(人政)>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