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후기의 사상/조선후기의 과학사상

조선후기의 과학사상〔槪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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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과학사상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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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代科學思想-特性

원래 우리나라의 과학이라는 것은 전역사 시대를 통하여 현대적 의미에서의 과학을 찾기가 어렵다. 따라서 순수한 과학사상(科學思想)도 찾아보기가 어려운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과학 내지 그 사상은 거의가 기술적 전통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모든 과학적(科學的)인 기술은 실제적인 경험을 통하여 숙련자(熟練者)의 손에서 다음 손으로 구전(口傳), 또는 비전(秘傳)되었을 뿐이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우리나라의 과학자들은 현상(現象)·결과에만 치중하였을 뿐이지 과학적, 이론적인 설명은 등한히 하였다. 천인시(賤人視)하던 공장(工匠)들의 사회적 대우만 보더라도 그간의 사정이 짐작될 것이다. 조선후기에도 이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실학파의 과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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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學派-科學思想

조선조 전기의 세종(世宗)시대를 전후하여 발전하기 시작한 조선의 과학은 후대에 계승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과학은 물론 모든 문화발전은 침체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시대가 경과하고, 사회도 안정됨에 따라 조선조 후기 17,8세기에 이르러서는 서양 학문의 전래와 함께 학문적인 반성과 실제 생활에 유용한 학문 연구가 대두하게 되었다. 즉 이른바 실학파 학자들은 공장(工匠)·기술을 통해 과학으로서의 학문적 발판을 만드는데 힘썼다. 그들은 소위 서학(西學)·북학(北學)을 통하여 근대적 과학기술을 전하여 왔다. 이리하여 재래와 같이 주자학(朱子學)적 사상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목표로 하고, 과학 정신에 입각한 실학 운동을 벌이며, 서양학문을 받아들여 과학적 사고방식에 의한 학문을 추진하였다. 실학의 선구자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수광이다. 그는 중국에 세 차례나 사신으로 내왕하는 가운데 서양의 자연과학적 기술을 최초로 우리나라에 도입하였다. 당시 사회에서는 아직도 미신(迷信)이 유행되어, 벼락(雷)은 죄가 있는 사람에게 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는 "벼락이라는 것은 음(陰)과 양(陽)이 서로 부딪쳐 생기는 기(氣)이며 죄가 있는 자에게 벌로서 떨어진다는 것은 억설이다.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은 그 사람이 우연히 벼락에 맞는 것 뿐이지 벼락이 그 사람을 때린 것은 아니다"<지봉유설> 권1 천문에서 벼락에 대한 비과학적 생각을 비판하였다. 또 달빛이 밝게 비치는 것은 달 자체가 그러한 빛을 내는 것이 아니고, 태양 광선을 받아 그것이 반사되어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였다. 적어도 17세기 전반기만 하여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근대적 과학지식이 빈약하여 정두원(鄭斗源) 일행이 중국에서 망원경·자명종(自鳴鐘)을 가지고 왔을 때만 하여도 김육(金堉)의 말에 의하면 그 운용법을 알지 못하여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때에 이수광이 이러한 벼락에 관한 지식은 자연과학적 사상의 태동이라고도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는 과학의 맹아기(萌芽期)가 된다. 이수광 후에는 실학파의 원조(元祖)라고 칭하는 유형원(柳馨遠)을 비롯하여 이익(李瀷),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등이 나와 사회과학적(社會科學的) 사상에 영향을 주었고, 서학, 북학파의 학자들은 자연과학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隨錄)>에서 당대 사회의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제도를 개혁하기 위하여 동양 제국의 문헌에 그 논거를 두고 정밀한 실증적 태도를 견지하였고, 이익은 '생재(生財)' '전론(錢論)' '과거의 폐(弊)'를 사회과학적으로 논술하였으며, 자연과학적 방면에서는 지전설적(地轉說的) 관찰을 하여 지구가 달보다 크고, 태양은 지구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도 동해에는 조석(潮汐)이 없다고 하고, 그 원인을 "조석은 동남녘 적도(赤道)로부터 올라오는 것인데 일본열도가 만주까지에 닿도록 동남해를 둘러막아서 동해가 한 큰 호수를 이뤘기 때문에 조수가 침입치 못한다"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18세기기 후반에 이르러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약용에 의하여 실용후생(實用厚生)의 사상과 결부(結付)되었다. 정약용은 수원성(水原城)을 축조하는데 참여하여서 기중기(起重機)를 제작하여 물리학적 이론을 응용하였다. 또 그는 박제가(朴齊家)와 함께 종두(種痘)를 시험하여 일반에 보급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저 <마과회통(麻科會通)>에는 이 종두에 관한 자세한 해설이 적혀 있다.

지리학과 지도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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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理學-地圖作成

이러한 실학파의 과학적 사상은 지리학과 지도 작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역사가 사회과학으로서 시간적(時間的)으로 사상(思想)을 다루는데 대하여, 지리학은 주로 자연과학적으로 공간적(空間的)으로 사상을 다루는 차이 뿐인데, 후자의 연구는 전자에 비하여 활발치 못하였다. 그런데 실학파에서는 그들의 주의·주장에 견지에서 지리학에 깊은 관심과 큰 공적을 남겼다. 지리학에서는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또는 <팔역지>), 신경준(申景濬)의 <강계지(彊界志)> <산수경(山水經)> 등이 저술되었는데, 과학적 입장에서 고증학적(考證學的) 방법을 취한 것이 주목된다. 지리학의 발달에 따라 지도작성도 큰 발전을 보았다. 조선조 전기의 대표적인 지도 작성자는 18세기 말에 나타난 정상기(鄭尙驥)이다. 그는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는데, 이제까지의 여러 지도들이 어떤 일정한 측정방식에 의거하지 않은 반상상적인 것들이어서 지형과 지명이 부정확했음을 대폭 수정한 것이 바로 이 지도였다. 그가 죽은 지 약 100년 후에 김정호(金正浩)에 의하여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편찬되였다. 이 지도는 전(全) 한국사를 통하여 가장 세밀하고 가장 실지 지형에 맞고, 가장 과학적으로 작성된 것이라 한다. 김정호는 이 <대동여지도>에 대응하는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저술하여 지도로서의 완벽을 기하였다. 이 지도는 청·일전쟁 때 일본인이 군용(軍用)지도로 대용하였고, 현대의 5만분의 1의 실측지도(實測地圖)가 나오기 전까지는 모두 본 지도를 일반이 사용하였다.

북학파의 과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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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學派-科學思想

그들은 대개 청(淸)나라에 갔던 사신이나 수행원 출신으로 청의 진보된 과학·기술·생활양식·무역·교통기관 등을 우리나라에 수입하여, 우리나라의 빈곤을 구제하고 결함을 시정하자고 주장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당시 서양 천문학에 기초를 둔 우주관에 있어서 김석문(金錫文)이라는 학자는 삼대환(三大丸) 공부설(空浮說)을 주장 하였다고 한다. 홍대용(洪大容)은 사신으로 청에 가서 당시 북경(北京)에 주재하던 독일인 유송령(劉松齡;Hallerstein, Augustinus von)과 포우관(鮑友管;Gogeisl Antonius) 등의 도움으로부터 각종 서양의 문물과 천주당을 시찰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천문·율력(律曆)·산수(算數) 등 자연과학 방면의 가장 새로운 학설을 소개도 하고, 자기 이론을 발표도 하였다. 특히 그가 박지원과 같이 주장한 지구회전설(地球廻轉說)은 과학적 학설로서 주목된다. 이 지구회전설의 영향으로 후일 이민철(李敏哲)과 송이영(宋以潁)에 의하여 천문시계가 제작되었는데, 거기에는 혼천의(渾天儀)의 극축(極軸)에 1일 1회전하는 지구의가 연결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의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가 발표된 지 100년 후의 일이지만 서양에서는 학설로 알려졌을 뿐이지 아직 응용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지구회전설이 천문시계와 연결되었음은 확실히 조선조 후기의 천문학이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발달하였음을 말해 주는 사실이라 하겠다. 이러한 천문학은 19세기 초기에 들어와 남병철(南秉哲) 형제의 <의기집설(儀器輯說)> 및 <추보속해(推步續解)>를 비롯한 많은 과학적 저술을 탄생시켰다. 이보다 먼저 홍대용은 동복(同福)인 석당(石塘) 나경적(羅景績)을 역방하여, 그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혼천의와 후종(候鍾)을 제작하게 하였다. 이런 천문기기는 농수각(籠水閣)이라는 집에 넣어두었는데 이 농수각은 중국에서도 알려졌다고 한다. 그는 또 <주해수용(籌解需用)>이란 수학책을 저술하여 천문학 계산에도 많이 이용케 하였다. 그는 또 일·월식, 무지개, 지남철 등에 관하여서도 주목할 만한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뒤을 이어 북학파에서는 <북학의(北學議)>의 저자 박제가(朴齊家)가 나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비과학적 생활을 검토하며 생활의 과학화를 주장하였다.

과학적인 의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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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學的-醫藥學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의약학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년·병자년의 두 난을 치른 후, 제반사가 시원한 발전을 보지 못하였는데 의학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나 침술(針術)만이 유독 발달되어, 효종(孝宗) 때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영·정조에 들어와서는 임서봉(任瑞鳳)이라는 명의가 나오고 의학상의 명저도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전시대의 의약학의 전성을 면치 못하였다. 조선조 말기에 이제마(李濟馬)가 나와 사상의학설(四象醫學說)을 주장하여, 그 학설과 기술에 있어서 근대 조선의학의 독자적 과학적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또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던 법의학(法醫學)에서는 영조(英祖) 때 구윤명(具允明) 부자가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 대전 상하 2권을 편찬하여 세상에 반포했다. 이 책은 이때까지의 왕여(王與)의 <무원록>이 너무나 조선의 현실에 부적당함을 연구 시정하여 편찬한 것인데 현대 법의학에 비추어보아도 큰 손색이 없는 훌륭한 것이다. 법의학은 이외에도 홍인호(洪仁浩), 홍의호(洪義浩) 형제의 수택본(手擇本)인 <심리록(審理錄)>·<검요(檢要)> 등이 있다. <심리록>은 각도의 형옥(刑獄)·율안(律案)을 편집한 책으로 무원록을 기초로 하여 그 실지 운용과 상항을 예시하였다. <검요>는 그 속편인데 범죄 심리(犯罪審理)방면까지 다룬 독자적인 학설이 주목된다.

실업과 과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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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業-科學思想

실업방면에서는 신속의 <농가집성(農家集成)>이란 농서가 있지만 아직 과학적 저술이라 할 수 없고,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과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는 농촌생할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수립한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은 지금까지의 농서를 초출하여 <과농소초(課農小抄)>를 편찬하여, 농사의 수시(授時)·점후(占候)·수리·택종·경간(耕墾) 등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당대 농업에 공헌이 많았다.

수산관계에는 정약정(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가 있다. 이 저술은 약전이 흑산도(黑山島)에서 귀양살이 할 때 그 여가를 이용하여 다종 다양한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지로 조사 채집하는 동시에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해금(海禽)·충수(蟲獸) 등으로 분류한 수산물 155종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에 대한 사실 관찰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후기 과학사상의 집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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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後期 科學思想-集大成19세기 전반에 들어서자 지금까지 여러 방면의 과학이 독자적으로, 분석적으로 발전한데 대하여 일단 통일·집대성의 기운(氣運)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첫째는 농업 방면에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십육지(林園經濟十六志)>는 이러한 경향의 시도의 하나라 하겠다. 이 저술은 실학파의 학문적 업적을 농정학(農政學) 분야에서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것이다. 그의 과학적 사상과 연구 업적은 그후 뜻 있는 정치가와 학자에 의하여 전승되었고, 그 영향은 금일에도 미치고 있다. 둘째로 모든 학문의 종합으로서 백과사전식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를 들 수 있다. 전자는 원래 영조(英祖)의 명령으로 된 것으로, 정조(正祖) 때 왕명으로 이만운(李萬運)이 이를 다시 보수한 것인데, 상위고(象緯考)·여지고(輿地考) 등 16고, 250권 50책으로 되었다. 후자는 북학파계의 이규경(李圭景)이 실학의 영향을 받아 편찬한 것으로 천문·역법·수리 등, 그 항목만 하더라도 1400여개에 달하여, 현대의 백과사전을 연상케 한다.

현대과학에의 가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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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科學-架橋者

이상에서도 짐작되는 바와 같이 19세기 초기까지만 하여도 주로 이른바 실학파의 학자들에 의하여, 기술적 전통을 통하여 과학사상으로 중시될 만한 사실(史實)도 많지만, 백과사전 식으로 지식을 나열하거나, 지엽말단인 형식만을 모방하려는 감(感)이 없지 않았다. 이에 어떠한 일관된 원리하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실제적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과학적으로 발전시키려는 태도는 최한기(崔漢綺)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대표적 저술은 과학의 각 방면에 걸쳐 <지구전요(地球典要)> <인정(人政)> <기측체의(氣測體義)> 등의 천여 권이 있다. <지구전요>는 그의 자연과학적 사상의 표현인데, 주야의 운행·사시의 순환·지구구원·역법·조석 등에 새로운 지식을 발표하였고, <인정(人政)>은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교민업(敎民業)><안민산(安民産)>을 주장하고, 국정(國政)이 잘 되어야만 백성이 자기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각 산업이 제대로 발달한다고 역설하고, 평민의 농업·수공업·상업의 보호장려와 인재등용(人材登用)에 언급하였다. <기측체의>는 인문과학적 사상의 표현으로서 어느 의미에서 철학의 인식론(認識論) 같은 것이라 하겠다. <신기통(神氣通)>과 <추측록(推測錄)>의 두 편으로 되었는데, 전자는 경험을 통하여 감각기관에 의하여 지각(知覺)이 된다고 말하고, 후자에서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경험한 바를 기초로 하여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지각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철학적·과학적 사고방식은 그의 탁월한 창의적 사색의 결정(結晶)이며 현대 과학사상에 들어가는 가교자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정약용의 과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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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鏞-科學思想

조선후기의 실학자(實學者) 정약용(1762∼1836)이 지리·과학·의학 등의 분야에서 보여주는 진보적인 사상. 그의 저서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 <강역고(彊域考)> <대동수경(大東水經)> <마과회통(麻科會通)> 등에 나타난 그의 과학적 사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는 우리나라 고대의 부족국가, 삼국의 도성(都城), 발해 등의 역사를 지리적으로 일일이 고증(考證)·수정하여 역사지리(歷史地理)에 큰 기여를 하였고, 지리적인 고찰로부터 효과적인 국방책(國防策)을 밝혔다. (2) 그는 수원성(水原城)을 쌓을 때 도르레(滑車)를 이용한 기중기(起重機)를 제작하여 도르레에 관한 물리학적 이론을 실제에 활용하였다. 즉 1구의 도르레를 사용하면 50근의 힘으로 100근의 무게를 들 수 있고, 2구를 사용하면 25근의 힘으로 100근의 무게를 들 수 있다는 이론을 수원성 공사 때 응용하여 4 만량의 비용이 절약되었다고 한다. (3) 그는 마진(麻疹) 관계 약방(藥房)을 총망라해 1800년(정조 24)에 <마과회통(麻科會通)>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 부록으로 <신증종두기법(新證種痘奇法)>을 수록하여 제너(Jenner)의 우두(牛痘)법을 소개하고 상세히 해설하였다.

박제가의 과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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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齊家-科學思想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북학파(北學派)의 대표격인 박제가(1750∼1815)의 주저 <북학의(北學議)> 에 나타난 근대적인 과학사상. (1) 그는 청나라의 북경을 4차나 왕래하면서 그곳에 보급된 서양의 차량·배·건축·산업·의약 등 모든 기구와 시설을 소개하고, 비과학적·전근대적 생활태도를 비판하면서 생활의 과학화를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허문숭고(虛文崇高), 과거의 폐단 등을 개선하고, 석탄의 이용, 철광의 제련, 병·농기의 제작 등을 역설하였다. 외국과의 교섭에 관해서는 외국 선박의 내왕을 이용하여 선진국의 과학·기술 내지 지식을 받아들여 교역의 이(利)를 꾀하고, 견문을 높여 '우물 안 개구리'의 부끄러움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2) 그는 정약용과 같이 서양에서 전래된 종두법(種痘法)을 소개하고 권장하였다.

이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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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重煥 (1690∼ ? )

조선후기의 실학자·지질학자.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 이익(李瀷)의 3증손이면서 문인. 숙종 39년에 과거에 급제, 관계에 나갔다가 1724년 백망옥사(白望獄事)에 관련, 구금되었다가 절도(絶島)에 유배, 3년만에 풀려 나왔다. 이익의 학풍을 계승, 30년간 전국 각지를 방랑하면서 지리·사회·경제를 연구, 실학사상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 <택리지(擇里志)>(일명 <팔역지(八域志)>)가 있다.

택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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擇里志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중환의 인문지리서. 작자가 살 만한 곳을 찾아다니던 끝에 우리나라 8도의 지리·생리(生利)·교통·인심·산수·명찰·거주지 등을 다룬 것으로 영조 8년(1732)에 간행되었다. 원명은 <표연감초세(飄然堪超世)>이나, 이긍익(李肯翊)은 <팔역가거지(八域可居志)>라는 서명(書名)을 붙여 주었고, 일명 <산수록(山水錄)> <팔역지(八域志)> 등으로 불리어졌다. 이전의 다른 지리서(地理書)와는 달리, 참위(讖緯)사상 내지 풍수적(風水的) 지리를 지양한 현대적·과학적 지리서에 가까운 것이다. 즉 현대의 과학적 지리학에서는 첫째 인간과 자연과의 교섭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본서에서는 "인간은 땅의 신령된 소산이다(人傑地靈)"라고 하여 역시 이 점을 중시하였다. 독일의 라첼(F. Ratzel)이 소위 소박적 환경론(素朴的 環境論)을 제창하기 백여년 전 일이다. 둘째 그 방법론에 있어서도 시간을 다루는 역사학이 시대구분을 중시하는 것과 같이 공간을 다루는 지리학에서 지역 구분을 중시하였다. 동서(東西)에 자연적 요소로 조선지형을 구분하였음은 우리나라 지리서에서 처음 발견되는 일이다. 셋째 조선전기의 지리서가 대개 나열식인데 대하여, 여기에서는 어디까지나 땅과 사람의 상관관계에서 종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현대 지리학에서 간과치 못할 것이다.

신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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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景濬 (1712∼1781)

조선후기의 실학자·언어학자·지리학자. 자는 순민(舜民), 호는 여암(旅庵). 학문이 뛰어나고 지식이 해박하여 관직·성률(聲律)·의복(醫卜)·법률·기서(奇書)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고, 고증학적 방법으로 지리학을 개척하였다. 영조 30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계에 나가 제주목사(濟州牧使)까지 되었으나 정조 3년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영조 26년에 지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는 한글에 대한 과학적 연구로 높이 평가되고, 1770년에 <문헌비고(文獻備考)> 편찬에 참가하여 <여지고(輿地考)>를 집필하였으며, <팔도지도(八道地圖)>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를 완성하였다. 그 밖에 수송기관에 관한 <수차도설(水車圖說)> <차제책(車制策)> <논선차비어(論船車備禦)> <병선제(兵船制)> 등과 지리서로 <도로고(道路考)><산수경(山水經)> <강계지(彊界志)> 등도 불멸의 업적에 속한다.

도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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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路考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申景濬)의 저서. 각 도(道)의 이정(理程)을 기록한 책. 서울에서 각 지방에 이르는 대로(大路)와 능·원·묘(陵園墓)의 정로(正路), 8도 각 읍 4지방통로 및 제영(諸營)의 이수(里數)는 물론, 변경지방의 연로(沿路), 역체파발로(驛遞擺撥路), 해로(海路), 봉로(烽路), 교린사행로정리(交燐使行路程里)까지 수록하였다. 부록에 조석(潮汐)이나 풍우를 만났을 때 선로(船路)에 관한 사항 등을 실은 것이 주목할 만하다.

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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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浩 ( ? ∼1864)

조선후기의 지리학자. 자는 백원(伯元), 백온(伯溫), 호는 고산자(古山子). 미천한 가문의 출신으로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 정밀한 지도작성에 뜻을 품고 전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녀 30여 년간 노력 끝에 순조 말년에 <청구도(靑丘圖)> 2첩을 완성했고, 철종 12년에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첩을 완성 교간(校刊)하였다. 또한 <여지승람(輿地勝覽)>의 착오를 정정하고 보궐하기 위해 32권 15책의 <대동지지(大東地志)>를 집필, 이밖에 <지구도(地球圖)>도 제작하였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는 손수 그려 판각하였고, 이를 대원군에게 바치자 고루한 정부에 의해 나라의 기밀을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각판(刻板)은 불태워지고 투옥·옥사하였다.

대동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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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輿地圖

철종 12년에 나온 김정호(金正浩) 작성의 우리나라 지도. <청구도(靑丘圖)>의 자매편으로 그 내용을 보충하고 사용에 편리하도록 분첩절첩(分帖折疊)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 지도는 전 한국사를 통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당시까지의 모든 지도의 장·단점을 취사하여 완성한 것이다. 지도에 표현된 중요한 내용은 전국의 산천·해도·도리·영아(營衙)·읍치(邑治)·성지(城池)·진보(鎭堡)·역참(驛站)·창고(倉庫)·봉수(烽燧)·능침·방리(坊里)·고적 등이다. 이를 지도상에 표현하는데 있어서 10리 축척의 방안(方眼)을 이용하고 있는데 방안의 선을 전혀 나타내지 않고, 다만 밑받침(井間)으로만 이용한 듯하다. 그러므로 제1첩도 첫머리에 방안의 이용을 견본으로 붙이고 있다. 즉 그 1방안은 방10리(方十里), 사선(斜線·대각선)은 14리이고, 한폭의 가로가 8방(합 80리), 세로가 12방(합 120리)이 된다. 그리고 지도상의 도로선상에서 10리 간격으로 점을 찍어 놓아 도로 자체의 이정은 물론 그 주위의 거리도 짐작하게 하였다.

대동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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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東地志

철종 때의 지리학자. 김정호가 엮은 우리나라 지지(地志). 본서는 <청구도(靑丘圖)>의 자매편으로 엮은 것으로 지지적(地志的)인 면을 확대보충하여 32권 15책으로 엮은 것이다. 여기의 참고자료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대동여지승람> <동국문헌> 및 각 주현 읍지(州縣邑志) 기타 내외서적이 광범위하게 취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자 자신의 실지 답사를 통해 얻은 자료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리고 일부이기는 하나 도시의 위치를 경위도(經緯度)로 표시한 것도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김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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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錫文

조선중기의 학자. 자는 병여(炳如), 호는 대곡(大谷),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역학도해(易學圖解)>를 저술했고, 숙종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통천(通川) 군수를 역임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그가 3대환(三大丸) 공부설(空浮說)이라는 지동설(地動說) 중심의 천문학설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삼대환 공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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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大丸空浮說

박지원이 전하는 김석문(金錫文)의 천문학설. 이 학설에 의하면 해·땅(地球)·달은 모두 둥글고 공중에 떠서 회전한다고 되어 있으나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없다.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곡정필담(鵠汀筆談)>에 수록되어 있다.

홍대용의 과학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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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大容-科學思想

홍대용(1731∼1783)은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 북학파의 여러 학자와 친교를 맺었으며 군국(軍國)·경제에 관한 학문에 힘썼다. 1765년(영조 41)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는 숙부의 군관으로 따라가, 북경에서 엄성(嚴誠) 등 학자들과 친교를 맺고, 경의(經義)·성리(性理)·역사·풍속 등에 관하여 토론하였다. 또한 천주교회에 가서 서양문물을 견학하고, 독일인 흠천감정(欽天監正) 할레르슈타인(Hallerstein, Augustinus von;劉松齡)·고가이슬(Gogeisl Antonius;鮑友官)과 면담하였으며, 관상대를 견학, 천문학에 관한 지식을 넓혔다. 귀국후 음보(蔭補)로 관직을 나가 정조 4년에 영주(榮州) 군수에 이르렀다. 그는 종래의 음향5행설(陰陽五行說)을 부정하고 기화설(氣火說)을 주장한 선구자로 지구의 자전설(自轉說)을 설파하여 주목을 끈다. 그는 태양·지구·달을 같은 부류로 보고, 그것이 공중에 떠서 움직이니 지구도 회전한다는 삼환설(三丸說)과 공통된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하늘이 만든 것은 모두가 둥근 것이니 지구도 둥글 것이고, 둥글면 반드시 회전할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에 대지가 회전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으면 물은 썩고, 혹은 죽을 것이니, 현재 지구상에는 수목은 생명을 가지고, 하천은 흐르고 있으니 지구는 반드시 회전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나경적(羅景績)을 역방하여 그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혼천의(渾天儀)와 후종(候鍾)을 제작하게 하였다. 이들 천문기구를 농수각(籠水閣)에 넣어두니 이 농수각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그밖에 그는 <주해수용(籌解需用)>이란 수학책을 저술하여 천문학 계산에 이용케 하였고, 일·월식, 무지개, 지남철 등에 관해서도 주목할 만한 과학적 설명을 시도하였다.

이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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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敏哲 (1613∼1715)

조선중기의 과학자. 영의정 경여(敬輿)의 서자. 인조 24년 아버지가 민회빈(愍懷嬪) 강(姜)씨 변호 때문에 진도(珍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될 때 배소(配所)에 따라가 시중하며,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 천의기(天儀器)를 조립, 효종 1년 아버지가 풀려나올 때까지 과학기술을 터득하였고, 현종 5년에는 왕명으로 측후기(測候器)와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는데, 특히 혼천의 속에 회전지구의(回轉地球儀)를 넣어 지동설(地動說)을 입증하였다. 숙종 5년에는 수차(水車)를 제작하여 관개(灌漑)에 이용케 했으며, 숙종 15년에는 선기(璿璣)·옥형(玉衡)의 제작을 시작하여 2년만에 완성하였고, 그밖에 대(竹)로 만든 물시계까지 발명하였다.

남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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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秉哲 (1817∼1863)

조선후기의 과학자. 자는 자명(子明) 원명(原明). 호는 규재(圭齋)·강설(絳雪)·구당(鷗堂)·계당(桂塘). 현종 3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철종 2년에 승지(承旨), 동왕 7년에는 예조판서, 후에 이조판서 겸 대제학 등 요직을 지냈다.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나 수륜(水輪)·지구의(地球儀)·사시의(四時儀)를 제작하였고, 천문에 관한 여러 기구의 구조, 이법(理法) 및 산법(算法)을 설명한 <의기집설(儀器輯說)>과, 천문학의 해설서 <추보속해(推步續解)>를 저술하였다.

의기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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儀器輯說

철종 때의 문신이며 과학자 남병철(南秉哲)의 저서. 예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천문관측기구의 구조·이법·산법을 설명한 것. 별저에서 천문에 관한 계산을 사호삼각법(斜弧三角法)으로 풀었고, 평의가감법(平儀加減法)도 덧붙여 놓았다.

추보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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推步續解

철종 때의 문신·과학자 남병철의 저서. 중국인 강신수(江愼修)의 <역상고성(曆象考成)>에 의거, 일전(日 )·월리(月離)·교식(交食)과 항성(恒星)을 설명하였다.

구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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具允明 (1711∼1797)

조선후기의 문신·의학자. 자는 사정(士貞), 호는 겸산(兼山). 영조 19년 과거에 급제, 사관(史官)·승지(承旨)·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물러나 영조 34년에 조명정(趙明鼎)·채제공(蔡濟恭) 등과 <열성시장(列聖詩狀)>을 교간(校刊)했고, 정조 15년에는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을 지었다.

증수무원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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增修無寃錄

정조 때의 학자 구윤명 부자가 지은 것. 원나라 왕여(王與)의 것을 주해한 것으로 그 내용을 보면 험법(驗法)과 시장식(屍帳式)을 일일이 논거 예시하여 과학적·실험적으로 논술하였다. 특히 그 관찰이 형율관(刑律官)들의 주관을 피하고, 주로 그 형증(刑證)에 대한 객관성을 찾으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점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 조선본(朝鮮本)은 당시 일본에서도 매우 소중히 여겨, 도쿠가와(德川)막부 시대에는 수차 <무원록>이라는 이름으로 복각하여 실제 재판이나 검증에 많이 적용하였다. 그들의 메이지(明治)시대에는 활자본을 만들어 쓰기도 하였고, 청국에는 역수출되었다고 한다.

홍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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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義浩 (1758∼1826)

조선후기의 문신·학자. 자는 양중(養仲), 호는 담녕(澹寧). 정조 8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참판(參判)·부윤(府尹)을 지냈고 순조 3년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를 다녀와 예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순조 14년에 형조판서로 금주령(禁酒令)에 반대하다가 삭직되었다. 그는 3차나 북경에 내왕하면서 여행기로 <출새성(出塞聲)> 등을 지었고, 8도지리지로 <청구시지(靑邱詩誌)>를 지었으며, 그의 형 홍인호(洪仁浩)와 같이 <심리록(審理錄)> <검요(檢要)>를 지어 법의학과 범죄심리연구에도 업적을 남겼다.

심리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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審理錄

정조 때 문신 홍인호(洪仁浩)·홍의호(洪義浩) 형제가 공편한 저서. 정조가 재위 25년간의 각도 형옥(刑獄)·율안(律案)을 편집한 것으로, 이종의 판례집(判例集)이다. 무원록을 기초로 하여 그 실지 운용과 상항을 예시한 것이 특징으로 순조 초년에 완성되었다.

과농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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課農小抄

조선후기의 실학자 박지원(朴趾源)이 농업기술 및 그 정책에 관하여 기술한 책. 정조 22년 권농정구서윤음(權農政求農書綸音)에 따라 찬진(撰進)한 것. 농업기술면에서 이앙(移秧)·시비(施肥)·농기(農器)·양우(養牛) 등의 문제를, 농업정책면에서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토지소유권 집적의 문제, 경작지 확장의 문제를 주로 취급하고, 그 개혁책으로 한전법(限田法)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당시 보급된 국내·국외의 각종 농서를 비판·종합한 것이다.

서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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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有? (1764∼1845)

조선후기의 실학자·농정가(農政家).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정조 14년에 과거에 급제, 21세에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찬하였고, 현종 4년 이후 판서·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그는 실학에 조예가 깊고 백가서(百家書)에 통달하였다. 1834년에 일본에서 고구마 종자를 들여와 재배시켰고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여 재배법을 알려주었다. 그는 <농대(農對)> <경계책(經界策)> 등을 통하여 영농법개혁을 역설하였고, 만년에는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를 토대로 <임원경제16지(林園經濟十六志)>라는 저술을 남겼다.

임원경제16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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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園經濟十六志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가 지은 일종의 농업백과사전. 일명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임원16지(林園十六志)>라고도 한다. <산림경제>를 토대로 하고 한국·중국의 농서 900여 종을 참고하여 일상생활에서부터 농·공·육예(六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백과사전식으로 엮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총서이다. 일용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많이 수록되어 향리(鄕里)의 농민으로부터 사대부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의 경제사정과 경제정책을 살피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

정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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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若銓 (1758∼1816)

조선후기의 실학자. 자는 천전(天全), 호는 일성루(一星樓)·매심재(每心齋)·손암(巽庵)·연경재(硏經齋), 정약용의 형 정조 14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21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이듬해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하였다. 일찍이 남인계통의 학자로 천주교에 입교, 박해를 받아 흑산도에 귀양갔을 때 여가를 이용하여 근해의 수산 생물을 실지로 조사·채집하는 동시에, 어류(魚類)·패류(貝類)·조류(藻類)·해금(海禽)·충수(蟲獸) 등을 분류하여 155종에 달한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이용 등에 관한 사실관찰을 기록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지어 박물학상 큰 업적을 남겼다.

자산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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玆山魚譜

정조 때의 정약전(丁若銓)이 지은 우리나라 최고의 어류학서(魚類學書). 흑산도 유배생활 때 수산물을 실지로 조사·채집하여 155종에 대한 각 종류의 명칭·분포·형태·습성 및 용도 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기록된 분류는 현대 분류와는 판이한 점도 많다. 이 저술에서 현대에도 관심이 되는 것은 청어와 고등어의 회유(回遊)와 분포에 관한 것인데, 이 조사 기록은 현재의 동해·황해에 회유하여 드나드는 청어, 고등어의 실태와 비교하는데 유일한 자료가 된다.

이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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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濟馬 (1838∼1900)

조선말의 의학자. 자는 무평(懋平), 호는 동무(東武), 함흥 출신. 양반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어렸을 때는 무인(武人)이 되고자 했으나, 사회 현실을 비관, 14∼5세에 방랑을 시작, 만주까지 갔다가 오는 길에 의주(義州)부호 홍씨(洪氏) 서고(書庫)에서 수많은 서적을 섭렵, 한국홍(韓國弘), 기정진(奇正鎭) 등 학자들과 교유,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유랑과 학문을 계속하는 동안, 병약(病弱)하여 의술을 공부하면서 1886년 별선무과에 합격, 무위장(武衛將)을 거쳐 진해현감이 되었다. 1887년 서울에 올라와 저술을 시작, 1894년에 뒤에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으로 간행된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새로운 체계를 확립하였다. 4상(四象)이라 함은 인간의 체질을 태양(太陽)·소양(小陽)·태음(太陰)·소음(少陰)의 4종으로 분류함을 말한다. 이러한 4종의 체질에 따라 의리(醫理)와 약효가 서로 다르므로 시약도 이에 맞는 것을 골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학설은 그때까지의 한방의학의 이론적 구성의 근본이 되는 음양5행설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체질적 차이를 4형으로 나누어, 그 형에 따라 질병치료를 달리한다고 논설하였다. 그러므로 병상(病狀)보다는 체질형에 중점을 두어, 같은 증세의 병이라도 같은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상적(臨床的) 치료방법에 있어서도 양형(陽型)에 속하는 체질에는 온제(溫劑)인 인삼·부자 등의 사용을 금하고, 반대로 음형(陰型)의 체질에는 냉제(冷劑)인 석고·대황·자호 등의 사용을 금한다. 그의 많은 후계자들은 현대에 있어서도 그 학설과 치료법의 과학적 이론확립을 위하여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동의수세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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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醫壽世保元

저자 미상의 의서(醫書).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설을 전하는 책으로 4권 2책. 고종 31년에 저술. 1901년에 간행되었다. 이 사상의학설은 후계자에 의하여 <동의사상신편(東醫四象新篇)>에서도 전개되어 있다.

이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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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萬運 (1736∼ ? )

조선후기의 학자.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묵헌(默軒). 정조 1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그쳤으나 박학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특히 천문·역산(曆算)·지리·명물(名物)에 밝았다고 한다. 정조 6년에 이미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보정(補正)하고, 새로이 7고(七考)를 첨가하여 9년만에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를 완성하였다.

이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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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圭景 (1788∼ ? )

조선후기의 실학자.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五洲)·소운거사(嘯雲居士).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조부 이덕무(李德懋)의 학풍을 계승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을 집대성하였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금 사물에 대한 수백 종의 서적을 탐독하여 정밀한 고증(考證)으로서 천문·역수·지리·풍속·야금(冶金)·초목(草木)·어조(魚鳥) 등 모든 학문을 고정변증(考訂辨證)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를남겼다.

오주연문장전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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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洲衍文長箋散考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지은 일종의 백과전서. 한국·중국 및 기타 외국의 고금 사물에 대하여 천문(天文)·시령(時令)·지리·풍속·관직·문사(文事) 및 기예(技藝)에서 궁실(宮室)·기용(器用)·음식·금수(禽獸) 등에 이르는 모든 분야에 의문이 있거나 오류가 있는 것을 고증한 책. 1400여 개에 달하는 전 항목에 관하여 대소 구별없이, 의의(疑義)가 있는 것이나 고증(考證)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일일이 고증하고, 정정하고, 변증하였다. 어느 항목이고 변증설(辨證說)로서 논구하였음은 이 책의 특색이다. 중국 학자들의 '명물수도의 학(名物數度之學)'에서 영향 받은 듯도 하지만, 그의 학문하는 입장과 과학하는 태도가 잘 반영된

이 책이야 말로 실학의 금자탑이라고 하겠다.

지구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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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球典要

조선말의 실학자·대사상가인 최한기(崔漢綺)의 저서로 1857년 간행. 우주계의 천체·기상(氣象)과 지구상의 자연 및 인문지리를 엮은 책. 신문화에 대한 식견과 학문이 깊은 저자가 우주현상, 지구상의 지리현상을 처음으로 상술한 것으로서 13권 7책이다. 칠요(七曜)·사시(四時)·지구반경차(地球半徑差)·청몽기차(淸蒙氣差)·태양·태음·오성(五星)·교식(交食)·조석(潮汐)·지도(地度)·천도(天度)·해륙분계(海陸分界)가 서술되었고, 다음에 각국의 지리가 상술되었으며, 끝으로 해양론(海洋論)·중서동이(中西同異) 등과 역상도(曆象圖)·제국도(諸國圖)가 있어 과학과 지리 전 분야에 걸쳐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고 있다.

최한기와 서양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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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漢綺-西洋科學

시대의 비운에 휩쓸리지도, 궁핍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지낸 최한기는 영의정을 지낸 바 있는 최항의 후손이다. 그는 동서과학 분야의 장단점을 이해하고 서양의 발전된 사상, 과학을 조선의 구조에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생각으로 일관된 저술을 하였다.

조선의 쇄국은 침체된 무발전의 원인이 됨을 지적하며 개국통상의 필요성을 용기있게 논하기도 했다. 기독교 사상의 침입도 객과 주인의 자리를 현명하게 지키면 오히려 덕이 된다 하였다.

그는 가문이 몰락하고 평범한 향반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벼슬을 지속해 나갈 수 없게 되자 중인들과 어울리며 시야을 넓혀 나갔다.

서울로 무대를 옮긴 후 역관·서자·평민 출신들과 교류하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판각을 돕는 한편 기존의 관념론을 탈피하고 경험철학의 기반을 닸았다.

그가 제시하는 사고의 방법은 경험한 바를 기초로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줄 안다면 누구나 자신의 생활 환경과 습관에 따라 추측하면서 그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추측론이었다.

북경인화당에서 출판되어 중국인 사이에서도 읽혔던 <기측체의(氣測體義)>는 동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을 서양의 발전된 과학기술과 융합하여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기측제의>는 그의 저서 <신기통>과 <추측론>을 합쳐 엮었는데 북경에서 간행된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다. 이 책은 기존의 책과 비교해 특이한 면이 있는데 활자가 호화판이고 체제가 매우 고상하게 편집되어 있다.

<심기도설(心器圖說)>에선 과학서적을 접하며 기구의 개량에 힘썼고, 우주관이나 지구의 자전론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보인 <지구전요(地球典要)> 는 코페르니쿠스의 자전과 공전의 내용을 전하고자 하였지만 중국에 소개된 책을 편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얻으려면 옛 것에만 집착해선 안 되며 저마다의 가치가 있으므로 소중히 하며 인사(人事)의 바른 등용도 촉구했다.

평탄한 생활에서 1천여 권의 책을 집필하며 다복한 삶을 살았던 최한기의 끊임없던 저술활동은 1970년 이후 새로운 시각으로 연구되어 그의 삶을 통해 역사의 배경을 배울 수 있으나 현실에 적용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