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조선전기의 사상/조선전기의 과학사상
조선전기의 과학사상〔槪說〕
편집조선전기의 과학은 고려 귀족문화 속의 과학과 기술의 전통을 이어 받아 새로운 중앙집권적 봉건왕조의 건설을 위한 의욕적인 노력에 의하여 형성되고 발전하였다. 태종의 과학문화 정책을 이어 받은 세종의 봉천권민(奉天權民)하는 교육·문화 정책과 과학·기술 정책은 조선왕조의 과학을 한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진보의 황금시대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역사 발전이라는 큰 흐름에서 볼 때, 원(元)과 고려를 거쳐 내려온 아라비아 과학의 강한 영향과 더불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꺼져 가던 이슬람교도의 과학기술의 빛을 물려 받아 15세기 과학의 역사를 밝힌 극동의 등불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도도히 흐르던 중국 과학문명의 그늘에서도 언제나 창조적 전통을 잃지 않던 한반도의 과학문명이 이때처럼 그 뚜렷한 발전으로 세계사의 무대에까지 등장한 때는 따로 없었다. 농본국(農本國)으로서의 조선왕조 전기의 과학은 또 불교 중심의 문화가 유교 중심의 그것으로 변화하면서 유교로써 봉건사회의 지배이념을 확립하려는 노력과도 연결되고 있다. 그러기에 이 시기에 있어서의 과학과 기술은 지배자가 백성을 다스리고 먹이는, 이른바 양민(養民)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농정이념(農政理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전기의 과학기술은 또, 이론적인 연구와 원리적인 과학보다도 경험적 연구와 실제적인 기술적 현상을 더 추구하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책적으로 선발된 학자들에 의한 이론적 연구도 병행 추진되었다. 그들은 조선왕조에 있어서의 과학의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중국과 고려의 모든 과학기술 유산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집대성하기에 힘썼다. 그들의 시도는 특히 태종·세종 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과학기술에 있어서의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경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천문·역학과 기상학
편집天文·曆學-氣象學
이 분야의 업적은 천체관측과 기상관측 기계의 제작과 시설의 정비, 관측 제도의 완비와 자주적 역법체계(曆法體系)의 확립을 위한 노력으로 찾아볼 수 있다. 1432년(세종 16)에 건립되기 시작하여 1438년(세종 22)에 완성된 경복궁(景福宮)의 천문대는 새 왕조의 밝은 앞날을 위한 '제왕(帝王)의 학(學)'으로서의 천문학의 중심지로서, 또 조선 천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세종은 이 사업을 위하여 이미 세종 3년에 동래현(東萊縣) 관노(官奴)로 있던 장영실(蔣英實)을 중국에 파견하여 천문관측기에 관한 연구를 해오도록 하고, 세종 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이순지(李純之)에게 특명으로 수학과 천문학을 연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1433년에는 제일 먼저 혼천의(渾天儀)가 완성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 우주관인 혼천설(渾天說)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동양천문학의 기본적인 천문관측(天文觀測) 의상(儀象)이다. 경복궁 천문대에는 또 간의(簡儀)와,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 및 각종 해시계와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 등의 관측기들이 설치되었다. 이 관측기들은 정인지(鄭麟趾)·정초(鄭招)·이순지(李純之) 등이 이론(理論)을 연구하고 이천·장영실 등이 실제 제작을 감독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에 앞서 1396년(太祖 4)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천문도가 돌에 새겨졌는데 그것은 고대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에 전해내려온 천문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며, 천(天)의 정치를 표방하는 조선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표상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에 서운관(書雲觀)을 중심으로 천체관측을 철저하게 한 까닭도 이러한 천문사상에서 그 국가적 필요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확한 역법(曆法)의 계산을 위한 노력에도 드러나고 있다. 달력은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천체운동을 예견함으로써 왕자(王者)의 권위를 백성에게 과시할 수 있다는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서도 중요시되었다. 이 일을 위해서 이순지와 김담(金淡)의 공헌이 컸다. 그들은 1440년을 전후한 10년 동안에 경복궁 천문대의 관측을 바탕으로 하여 조선왕조의 자주적 역법 체계를 세웠다. 그들은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과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의 두 천문표(天文表)를 비롯한 9종의 역학(曆學) 저서와 그때까지의 중국 천문학을 역사적으로 개관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썼다. 조선초기의 과학자들은 자연현상을 열심히 관측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수량적으로 측정하는 과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측우기(測雨器)의 발명은 과학적인 방법으로 농업기상을 파악하려던 조선인(朝鮮人)의 생각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다.
지리학
편집地理學
조선초기의 지리학은 새 왕조의 건국이라는 정치·사회적 배경과 함께 그 경제적 요인과 직결됨으로써 조선왕조의 절실한 요망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함께 얽혀 있었다. 하나는 신라말부터 내려오던 풍수지리(風水地理)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행정적·국가적인 국가이익을 바탕으로 하는 실제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인문지리적(人文地理的)인 것이다. 풍수지리설과 그 사상은 태조 때에 성했으나 태종에 의하여 엄격하게 규제됨으로써 주춤하였고, 그 뒤 세종 때에 발전된 지지(地誌)의 편찬 사업과 실측지도 제작사업으로 지리와 지형의 이론과 명당(明堂) 선택의 방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지
편집地誌 편찬은 1414년(세종 6) 변계량(卞季良)이 시작하여 1422년에 맹사성(孟思誠)과 윤회(尹淮) 등이 완성한 <신찬 8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에서 비롯된다. 이 지리지는 그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로서 간행되어 조선 인문지리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1426년(세종 18)부터 정척(鄭陟)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측지도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그후 완성된 정척과 양성지(梁誠之)의 <동국지도(東國地圖)>는 우리나라 실측지도의 모체(母體)가 되었고, 지도제작의 바탕이 되었다. 양성지는 그 뒤 세조 때에 지지(地誌)와 지국(地國)을 만들었는데, 성종 18년(1487)까지 노사신(盧思愼)·김종직(金宗直) 등은 양성지의 <8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대본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완성 간행하여 우리나라 관찬지지(官撰地誌)의 쌍벽을 이루었다.
의학과 농업
편집醫學-農業
1433년 유효통(兪孝通)과 노중례(盧重禮)는 조선에서 생산되는 약재에 의한 의약처방들을 집대성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저술하여 조선의학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다. 이것은 중국 의학의 영향과 전통하에 있던 우리나라 약학에 독자적 의약학 수립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그것은 또 1442년경부터 시작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445년에 완성된 365권의 이 방대한 의약백과사전은 그때까지의 동양 의약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것으로, 그후 조선 의학발전의 근간이 되었고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약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대하여 16세기에 완성된 또하나의 의학백과사전인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은 도교(道敎)의 사상적인 영향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또 다른 특색이 있다. 1429년 정초(鄭招)와 변효문(卞孝文)은 그 당시 조선에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던 이른바 실험적이고 경험적인 농사 기술을 집약하여 <농사직설(農事直設)>을 편찬했다. 이 농서(農書)는 우리의 농법을 살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어서 그후 조선 농학의 발전에 크게 영향을 미쳐 조선 농서의 주축을 이루었다. 조선전기의 농서에는 이 밖에 강희맹(姜希孟)의 <금양잡록(衿陽雜錄)>이 있고 숙종 때의 실학자 박세당(朴世堂)의 <색경(穡經)>과 홍만선(洪萬選)의 <山林經濟)>는 농업관계의 박물지라고 할 수 있다.
장영실
편집蔣英實
조선초의 과학자. 기생(妓生) 소생으로 동래현(東萊縣) 관노(官奴) 출신. 과학적인 재능이 뛰어나 1423년 왕의 특명으로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가 되어 노예신분을 벗었다. 세종 14년 중추원사(中樞院使) 이천을 도와 간의대(簡儀臺) 제작에 착수하고 각종 천문의(天文儀)의 제작을 감독하였다. 1434년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 자격루(自擊漏)를 제작, 그후 천체관측용 대소간의(大小簡儀), 휴대용 해시계, 태양의 고도(高度)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였다. 특기할 것은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測雨器)와 수표(水標)를 발명한 것이다.
이순지
편집李純之 ( ? ∼1465)
조선 세종 때의 천문학자·수학자. 자는 성보(誠甫), 시호는 정평(靖平). 142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역법(曆法)을 연구하여 간의규표(簡儀圭表)·태평현주(太平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 등의 제작에 협조하였다. 원래 성격이 치밀하여 산학(算學)·천문·음양(陰陽)·풍수(風水) 등 여러 방면에 능통했고, 김담(金淡)과 함께 쓴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 남아 있다. 그밖의 저서로 <천문유초(天文類抄)> <교식추보가령(交食推步假令)> <선택요략(選擇要略)> 등이 있다.
정초
편집鄭招 ( ? ∼1434)
조선 세종 때의 중신. 자는 열지(悅之), 시호는 문경(文景), 태종 5년에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를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다. 세종의 명으로 정인지 등과 함께 간의대(簡儀臺)를 만들었으며, <농사직설(農事直設)>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 <3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의 편찬을 주재하고 역법(曆法)도 교정하였다.
이천
편집(1376∼1451) 조선초의 무관·과학자. 호는 불곡(佛谷), 시호는 익양(翼襄). 태조 2년에 별장(別將)에 임명된 후 무과(武科)에 급제, 세종 18년에는 평안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야인을 정벌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그는 성품이 정밀하여 화포(火砲)·종경(鍾磬)·규표(圭表)·간의·혼의·주자(鑄字) 등을 감장(監掌)하여 만들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편집天象列次分野之圖
조선초에 석각(石刻)된 천문도(天文圖). 태조 4년(1396)에 고대로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의 천문사상을 돌에 새겨넣은 것으로 여기에는 권근(權近)의 <논천(論天)> 기사가 있다. 그는 이 기사에서 논천6가(論天六家)의 학설, 즉 중국 고래의 전통적 우주관에 대한 학설을 열거하고 있는 바, (1) 장형(張衡)의 혼천설(渾天說) (2) 주비(周碑)의 개천설(盖天說) (3) 선야(宣夜)의 설 (4) 우희(虞喜)의 안천설(安天說) (5) 요신(姚信)의 흔천설(昕天說) (6) 우용(虞聳)의 궁천설(穹天說) 등이다. 그에 의하면 이 중에서 정통(正統)은 혼천설이고, 개천설 등의 기타 학설은 '호기순이(好奇徇異)'의 설로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중국 후한(後漢)대까지 남아 있던 우주관은 개천설과 혼천설이고, 이것이 역시 신라·고려에 그대로 받아들여져 조선에까지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담
편집金淡 (1416∼1464) 조선전기의 과학자·수학자. 자는 거원(巨源)이며, 호는 무송헌(撫松軒), 시호는 문절(文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천문에 뛰어나 집현전정자(集賢殿正字)로 있다가 간의대(簡儀臺)에서 활약, 세종 15년에 왕명으로 원나라 수시력(授時曆), 명나라 대통력(大統曆)을 참작, 이순지와 같이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엮었고, 회회력(回回曆)을 얻어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엮었다. 저서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편집世宗實錄地理誌
<세종실록>에 실린 우리나라 지리지. 세종 14년에 변계량(卞季良)·맹사성(孟思誠)·윤회(尹淮) 등에 의하여 완성된 <신찬 8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를 바탕으로 하고 각도의 지리지를 춘추관(春秋館)에서 종합하여 단종 2년(1454)에 완성한 것이다. 도별로 1권씩 8권 8책으로 되어 있으며 지리·역사·산업·군비·교통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간결하게 서술된 창조적인 지리서로 뒤에 만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연원이 되었다. 그러나 지리적인 사실만 나열하고 그 원인을 밝히지 않은 것이 흠이다.
양성지
편집梁誠之 (1415∼1482)
조선전기의 문신. 역사학·지리학에 밝았다.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송파(松坡), 시호는 문양(文襄). 세종 23년 과거에 급제, 훈구파의 중진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참여하였으며, 단종 1년에는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 다음 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편찬, 1455년(세조 1년)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 1463년에는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였다. 그는 서적의 보존·간행에 힘써 10조의 상소를 한 적도 있고,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1481년에는 <동국여지승람>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1481년 서적의 인간(印刊)·수장(收藏)에 대해 12조의 건의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동국지도
편집東國地圖
조선 세조 때 만든 우리나라 지도. 1463년에 정척(鄭陟)·양성지(梁誠之) 등이 왕명을 받아 작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지도이다. 각 도의 수령에게 명해 그 지방의 위치, 산맥의 방향, 도로의 이수(理數), 인접군과의 접경(接境) 등을 상세히 그려 올리게 하여 이를 종합해 만든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편집東國輿地勝覽
성종 때 우리나라 지리서. 성종 때 명나라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수입되자 왕이 노사신(盧思愼)·양성지·강희맹(姜希孟) 등에 그것을 참고하고, 세종 때의 <신찬 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지리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들은 성종 12년(1481)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에 다시 증산(增刪)·수정하여 35권을 간행하였다. 그 후 연산군 5년에 개수(改修)를 거쳐 중종 25년(1530)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전55권 25책으로 각도의 지리를 수록하였는데 그 첫머리에 도별 전도를 싣고, 도의 연혁·풍속·묘사(廟社)·능침(陵能)·궁궐·관부(官府)·학교·토산(土産)·효자·열녀·성곽·산천·누정(樓亭)·사사(寺社)·역원(驛院)·교량(橋梁) 및 명현(名賢)의 사적(事蹟), 시인(詩人)의 제영(題詠) 등을 실었으며, 이행 등의 진전문(進箋文), 서거정(徐居正) 등의 서문, 김종직(金宗直) 등의 발(跋)이 수록되어 있다.
유효통
편집兪孝通
조선 세종 때의 의학자. 자는 행원(行源)·백원(百源). 태종 8년에 급제, 세종 때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1431년 노중례(盧重禮)와 약용 식물을 정리한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과 한약방문으로 된 의서 <향약집성방>을 편찬하였다.
노중례
편집盧重禮
조선 세종 때의 의학자. 부인병과에 능통했으며, 세종 5년에는 김을현(金乙玄) 등과 중국에 가서 약재(藥材)에 관한 일을 문의했고, 1431년 유효통과 함께 <향약채집월령>을 편찬, 식물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하여 널리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443년에는 <신증향약집성방>을, 1444년에는 <태산요록(胎産要錄)>을 편찬, 의학계에 공헌하였다.
향약집성방
편집鄕藥集成方
세종 13년(1431)에 권채(權採)·유효통(兪孝通)·노중례·박윤덕(朴允德) 등이 <향약제생집성방>등 재래의 의서를 참고하여 편찬, 세종 15년(1433)에 완성한 것. 이 책의 특징은 (1) 병증(病症)·약방문(藥方文)·침구법(鍼灸法)·향약본초(鄕藥本草)·포제법(暑製法) 등을 집대성하였다. (2) 모든 병을 대강문(大綱門)·소목(小目)으로 분류하였으며, (3) 각 강문과 조목에 해당되는 병론(病論)·방약을 출전과 함께 일일이 논거하였다는 것, (4) 분류방법에 있어 주로 병증을 중심으로 한 병문(病門)과, 인체의 부위(部位)를 중심으로 한 과문(科問)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의방유취
편집醫方類聚
세종∼성종 년간에 편찬된 한방의학의 백과사전. 세종 때 김예몽(金禮蒙), 저작랑(著作郞), 유성원(柳誠源) 등이 왕명을 받아 의방(醫方) 수집·편찬에 착수, 동왕 27년에 365권을 편성, 이를 다시 266권 264책으로 축소 간행하였다. 이후 성종 8년에 한계희(韓繼禧)·임원준(任元濬) 등이 30부를 인출하였다. 이 책에서는 병문(病門)이 <향약집성방>보다 세분되어 근대 임상의학의 각 분과들이 거의 포함되어 있으며, 각문에 병론을 들고 약방들을 출전의 연대순으로 열기하였다. 이 책은 외래지식인 한방의학을 우리 의학으로 동화시키고, 독자적 의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상실된 중국의 고전의방서(古典醫方書)들을 고증하는 데
지보(至寶)가 된다.
허준
편집許 浚 (1546∼1615)
조선 중기의 의학자. 자는 청원(淸原). 명의로 이름을 떨쳐 선조(宣祖) 때 내의(內醫)가 되었고, 광해군 2년(1610) 16년간의 연구 끝에 25권의 방대한 의서(醫書)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완성하였다.
동의보감
편집東醫寶鑑
조선·중국의 의서를 모아 집대성한 한의학의 백과사전. 1596년 선조의 명으로 허준(許浚) 등이 찬집에 착수, 왕이 내준 내장방서(內臟方書) 960권을 고증, 1610년(광해군 2)에 완성, 1613년에 간행하였다. 내용중 내경(內經)편은 주로 장기(臟器)들의 질병, 정신·혈액병을, 외형(外形)편은 머리속서부터 수족·골(骨)·근(筋)·맥(脈)에 이르기까지의 외과 질환을, 잡병(雜病)편은 진단학(診斷學) 분야의 질병, 부인과·소아과 등을, 탕액(蕩液)편은 약리학(藥理學) 등을 각각 다루고 근세 임상학 각과의 내용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이 책은 종래의 방서(方書)가 체위(體位) 중심 서술인데 대하여, 주로 증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임상가들이 손쉽게 고금의방(古今醫方)을 열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책은 중국·일본 등지에서 수차 번역 출판되었다.
농사직설
편집農事直設
농사기술을 해설한 농법서(農法書). 세종이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1429년에 편찬한 것으로, 각도 농부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우리 풍토에 적절한 농법을 기술하였다. 내용은 10항목으로 분류되어 종자와 토양 다루는 법, 각종 작물의 재배법을 간결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농서의 효시로서 또 중국과 다른 우리 식의 편 자주적 저서로서 농업기술의 변천을 살피는 데 좋은 사료가 된다.
금양잡록
편집衿陽雜錄
성종 때의 강희맹 (姜希孟) (1424, 1483)이 만년에 퇴경(退耕)하면서 그 곳의 사정을 중심으로 농사 전반에 대하여 서술한 책. 벼·보리·콩 등 여러 곡식의 모양 구별과 파종시기, 농가의 짤막한 이야기 등을 다루고 있으며 신속편찬의 <농가집성(農家集成)>속에 수록되어 있다.
색경
편집穡經
숙종 때 실학자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과수·원예·수리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기술한 농서(農書). 특히 과수·축산·원예·수리·기후에 중점을 두어 언급한 것으로 농촌생활에 토대를 둔 박물학(博物學)의 학풍을 이룬 저서이다.
홍만선
편집洪萬選 (1643∼1715)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 자는 사중(士中), 호는 유암(流巖), 현종 7년에 진사시에 합격,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다. 행실이 근엄하고 당쟁에 초연해서 완인(完人)이라고 불리었고, 농예(農藝)·의약·구황(救荒)에 관한 저서 <산림경제>로 실학사상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산림경제
편집山林經濟
숙종 때 실학자 홍만선(洪萬選)이 농민을 위하여 일상생활에 알아두어야 할 일을 기술한 책. 농림축잠(農林畜蠶), 식품가공 및 저장, 의료 기타 제반사항을 수록한 종합적인 농서로 일종의 박물지(博物志)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 농업사·임업사·축산사·자연과학사의 좋은 자료이며, 당시의 산업·과학기술의 수준을 측정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뒤에 영조 42년 유중림(柳重臨)이 16권 12책의 증보판을 내었고, 순조 때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의 바탕이 되는 책이다.
한국역사 속의 수학
편집韓國歷史-數學
서양의 피타고라스 정리가 동양에서는 그보다 더 빠르거나 적어도 동일한 시대로부터 구고법(勾股法)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다는 것은 과학상식에 속하고 있다.
2500년 전의 한나라 책으로 밝혀진 <9장 산술>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학책으로 넓이 계산, 부피, 제곱, 제곱근, 방정식, 직각삼각형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수준은 지금의 중학생 교과서 정도이다. 신라는 이 책을 교과서로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9장의 제목이 '구고(勾股)'이다. 이 장의 첫문제를 보자 "구(밑변 3자, 고(높이) 4자일 때 현(弦:빗변)은 몇 자인가." 해답은 5자로 되어 있고 풀이는 '구와 고를 각각 제곱하여 합한 다음 그 제곱근을 얻으면 된다'고 되어 있다.
서양인이 신이 창조한 우주의 원리와 사물이 이치를 설명하는 방향으로 수학을 사용하였다. 행성의 배열을 기하도형의 배열에 맞추어 생각해서 그 속에서 신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는 프톨레마이오스가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이러한 수학정신을 통해 논리적이고 이상적인 기하학과 여러 정리가 발달하였던 것이다.
반면 동양은 같은 하늘에 대해서도 그 근본원리를 해석하려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변화를 서술해내는 것에 중심을 두었다. 이로인해 복잡한 수식을 계산해내는 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달력의 발달이 그 좋은 예이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의 수학은 어떠했을까?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삼국시대부터 산학(算學)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는 전문적인 기술인을 양성하기 위해서이거나 정신수양을 위해서였다. 적어도 실학파 학자들이 과학문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605년 중국어로 발간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은 기하학이 거의 없다시피 한 동양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우리나라의 실학파 학자들도 이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고, 이규경은 이 책을 '정신수양에 좋은 약'이라고 칭찬했다. 이렇듯 실학사상의 확대에 힘입어 산학도 발전하게 되어 수학자로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게 된 사람도 있다.
홍정하와 유수양은 1713년에 조선에 사절로 온 청나라 수학자 하국주와 수학문답을 갖게 된다. 주로 구고해법에 관한 것으로, 정사변형의 한변의 길이가 10척일 때 그 부피는 얼마인가 하는 류의 문제를 20가지 정도 필담으로 나눈다. 홍과 유는 그들이 내는 문제를 척척 대답한 반면 청의 수학자는 우리측에서 낸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이로인해 청인들은 조선의 산학수준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산학을 학문의 일부로 인식하게 되고 이후 근대수학에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마와 사상의학설
편집李濟馬-四象醫學說
조선 말기 한의학자. 자는 무평(務平혼), 호는 동무(東武). 본관은 전주(全州). 함흥(咸興) 출생이다. 어려서부터 <경사자집(經史子集)> 등의 유교서적을 비롯하여 의약과 복서(卜筮)에 능통했으며, 무인이 되기를 원해 군사관계 서적도 많이 읽었다. 1888년(고종 25) 군관직에 등용되었으나 곧 사퇴했으며, 92년에는 경상남도 진해현감으로 나가 관기(官紀)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혼란의 조선 말에 독특한 의학설로 동양의학을 진보시킨 이제마는 새로운 약제와 치료법을 구하기 위해 생체실험을 실증된 이론을 내세운 이로도 유명하다.
이제마는 한 주막의 처녀에게서 태어났다. 이제마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비몽사몽인 때에 주모가 꾀를 내어 자신의 딸을 들여보낸 것이다. 처음부터 이제마의 출발은 신분에서부터 순탄하지 못했기에 그 성격도 사회에 대한 불평, 반항으로 거칠고 매서웠다. 그의 이름은 부친이 꿈에 제주도에서 온 명마란 계시를 받고 제마(濟馬)라 지었다 한다. 성장시기부터 차별과 불만으로 시작하는 그는 구역질 병으로 거의 일생을 고생했고 이는 그가 의술에 관심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의학과 철학의 연계로 질병치료를 꾀한 사상의학의 기본원리가 되는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서는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와 직관으로 통찰하여 독특한 체질에 대한 연구를 설명하였다.
이제껏 한의학에서 병의 증세가 비슷하면 일관된 처방을 내리는 모순을 본 이제마는 주역의 태극설인 태양(太陽), 소양(小陽), 태음(太陰), 소음(小陰)의 4상(四象)을 사람 몸에 적용하여 저마다 특이한 체질과 성격, 심리상태, 체구의 형태를 분류하여 약을 처방한다는 사상의학을 정립하였던 것이다.
그는 양생론(養生論)에서는 선악과 술, 여자, 재산, 권력이 목숨과 관계되고 있으며 어진 것을 미워하고 능력을 질투하는 것이 천하의 다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 하였다. 또 어진 것을 좋아하고 착함을 즐기는 것이 천하의 큰 약이 되는 것이라며 실천 도덕설을 가르쳤다.
이제마는 고을 수령의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서자신분에다 관북출신으로 입신의 길이 험하고 또 세상의 비리에 염증을 느끼어 의학연구에만 몰두하는 외길을 걸은 조선말의 명의였다.
그의 사상의학은 환자의 체질을 치료방법에 중요한 요인으로 삼고 의술을 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병리생리학, 실험 병리학, 치료의학, 예방의학 면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도 한의학의 한 유파로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