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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도교사상〔槪說〕
편집노장사상(老莊思想)과 신선(神仙)사상의 기반 위에 유교와 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신앙을 덧붙여서 형성시킨 일종의 교(敎)로서, 그 창시자는 송대(宋代) 부검전(傅儉傳)의 <운급칠참>에 의하면 후한(後漢) 말 촉(蜀) 지방 사람 장릉(張陵)이라 한다. 그는 촉나라의 작명산(鵲鳴山)에서 수행(修行)하는 도중에 노자(老子)의 시현(示顯)을 받아 <도인(度人)> <북두(北斗)> 등 경서 1,000권을 얻어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선포하였다고 한다.
도교의 성립
편집道敎-成立
한대(漢代)에는 전국기(戰國期)의 사회적 혼란이 통일되고 천하는 평온하여 봉건적 지배계급이 영화를 누리던 시대였다. 그들은 권세(權勢)·치복(致福)·영생(永生)의 욕망이 간절하여 무축(巫祝)과 산천기도(山川祈禱)에 전념하였고, 한편 빈곤한 서민계급도 면액(免厄)·발복(發福)·탈빈(脫貧)을 원하여 무축기도(巫祝祈禱)을 올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러한 사회 풍조 속에서 소위 도사(道士)라는 인물들이 속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무축적 사기술(巫祝的 詐欺術)을 사용하고 기괴한 약품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사용하였으며 그렇게 하여 불사영생(不死永生)의 신선에 도달시켜준다고 한 일종의 약방사(藥房士)들이었다. 멀리 진(秦)나라 때 진시황(秦始皇)도 불로약(不老藥)을 구했다는 말이 있거니와 한무제(漢武帝) 때 이소군(李小君), 소옹(小翁) 등은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신선술(神仙術)은 노장사상의 영생진인(永生眞人)에 그 이론적 근거를 둔 약방사들의 황당한 일종의 장생방(長生方)에 불과하였다. 대중의 치복영생의 욕망을 신선술가(神仙術家)에 의하여 사기(詐欺)당하고 장릉의 천사도(天師道)를 거쳐 도교에 흡수되어 종교화하였다. 한편 한초(漢初)에서 한말에 이르자 관권의 전횡과 부패, 봉건 귀족의 서민(庶民)에 대한 착취, 그리고 지나친 허례·허식을 내세운 유교사상 등은 민생고에 시달리는 당시 서민들을 몹시 괴롭혀 그들의 불만과 반항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장릉은 병고·빈고·압박에 허덕이는 서민을 상대로 민속적 교단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도덕경(道德經)>을 암송하고 죄과를 참회하여 참회문을 천지신명에 바쳤다. 교단조직은 장릉을 천사(天師), 교주를 사군(師君), 교도를 귀졸(鬼卒), 전도사를 제주(祭酒)라고 불렀다. 계율(戒律)은 예를 들면 기만하지 말 것, 죄를 범하지 말 것, 범법자라도 3회까지는 용서할 것 등이었고, 교칙에는 입교자는 5두미(五斗米)를 바칠 것, 각지에 교단의 공관(公館)인 의사(義舍)를 세우고 모든 교도를 공관에서 지내게 할 것, 제주는 일체를 감독하고 교도는 필요 이상을 탐욕하지 말 것 등이었다. 이 교단은 탐관오리가 전횡하던 당시의 관권에 대한 반항을 기도하는 반유교적·반봉건적인 일종의 종교사회를 형성하려는 운동이었으므로 5두미적(五斗米賊)이라고 불리었다. 이리하여 노장사상은 사대부(士大夫) 계급에서 유행할 뿐이었으나 신선술가 또는 장릉 등을 통해 서민계급에 널리 퍼져 일개의 현인(賢人)이요, 지자(智者)에 불과했던 노자의 존재는 갑자기 신격화되어 후한(後漢) 환제(桓帝) 18년에는 고현(苦顯)에 사당을 지어 그곳에 모시게 되었으며, 19년에는 천자(天子)가 친히 제사까지 지내게 되었다. 한편 장릉보다 좀 늦은 시기에 나타나 태평도(太平道)를 표방하던 장각(張角)의 황건적(黃巾賊)이 봉기하였다. 황건은 옛 황제(皇帝) 시대의 간이(簡易)한 정치를 찬양하고 유교적인 관권(官權)에 반항하는 표지이다. 이 태평도는 우길선인(于吉仙人)이 신탁(神託)에 의해서 얻은 영서(靈書) 150권의 태평경(太平經)에서 유래하며 토속종교적이고 반관권적이며 서민적인 점에서 장릉의 5두미도(五斗米道 ― 一名 天師道)와 흡사한 점이 있다. 장각과 우길은 한나라와 오(吳)나라 손책(孫策)과 싸우다 패해 살해되고 황건적도 평정되었다. 장릉의 손자인 장노(張魯)는 난을 피해 촉지방에서 군력을 길러 조조(曹操)와 싸우고 화해를 맺은 후 제후가 되었다. 그 후 그 자손과 도교의 전신인 천사도는 융성하여 오늘날까지 존속하게 되었는데 당시 촉지방의 용호산(龍虎山)은 도교의 본산(本山)이었다. 천사도는 전기(前期) 신선술가(神仙術家)의 불사영생(不死永生)의 무축(巫祝)이 이용된 노장사상과 서민(庶民)의 정치적 반항이 혼합된 정치적이고 토속종교적인 결사(結社)였으나 장노(張魯) 이후에는 정치성을 버리고 순수한 서민적 종교로 정화(淨化)하여 도교(道敎)가 확립되었다.
삼국시대의 도교사상의 전래
편집三國時代-道敎思想-傳來
한국의 도교사상을 취급할 때 언제나 문제되는 것은 한국 고유의 신도(神道) 혹은 풍류도(風流道)와 중국에서 전래된 도교(道敎)와의 관계이다. 즉 한국 도교의 연원을 말할 적마다 <단군신화>를 비롯한 민족 고유의 신앙과 외래 종교로서의 도교와의 사이에 표현상 큰 차이는 발견되지 않으며, 뒤에 양자가 서로 교섭됨으로써 각색되고 개작될 가능성이 보이게 되었다. 특히 뒤에 중국의 도교사상이 음양도참설(陰陽圖讖說)과 함께 널리 보급되자 이미 있었던 우리의 토착사상이 중국 도교의 이론으로 미화되고, 전자의 근원을 오히려 후자에게서 구하려는 사대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기 때문에 혼란이 적지 않았다. 다음에 문제되는 또 하나의 난점은 중국에서 보여진 것과 같은 도불혼합(道佛混合)의 현상이 우리나라에 와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특히 유학이 관학(官學)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고 불교나 도교를 똑같이 탄망(誕妄)한 좌도(左道)로 보는 고려말부터는 도·불이 같은 처지에 있어서 산간 속에 숨은 승려나 하층민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 없이 함께 신앙되는 예가 많았다. 당쟁에서 밀려난 불운한 선비들이나 시정(時政)에 실망한 지식인들의 대다수가 은둔 생활로 옮기면서 대개는 주자학(朱子學) 이외에 도·불을 겸수하였고, 민간에서는 도교와 음양도참사상이 완전히 동류의 것으로 취급되었으며, 국가에서도 정책상으로는 도·불을 탄압하면서도 실제로는 필요에 따라 도·불행사를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 세 가지 점에서 오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한국의 도교사상을 다음과 같이 국한하여 밝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1) 중국 도교의 유입 시기를 대체로 불교와 같은 3∼4세기로 보고 그 이전의 설화는 다분히 도교적인 색채가 있더라도 이를 후세에 윤색한 것으로 취급한다. (2) 신라의 신선사상이나 화랑도에서 볼 수 있는 선인(仙人) 숭배가 통일 이후에 중국 도교와의 교섭으로 융합될 수는 있었어도, 그 본래의 연원은 우리의 고유한 것으로 본다. (3) 한국 단학파(丹學派)의 내력을 말함에 있어 유교·불교·음양도참설과의 혼합현상은 인정하되 후세에 특정인물에 기탁하여 조작된 설화는 해당 인물과는 구별해서 취급한다. (4) 도교사상이 한국에 토착화하는 시기를 대체로 신라 말기로 보고 그 이전의 이적·비화는 구체적으로 도교와 관련된 것만을 취급한다. (5) 도교·불교·음양 사상간의 구별은 그 연원에 따라서 분명히 하되 뒤에 나타난 혼합현상은 그대로 인정하여 꼭 어느 쪽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을 삼간다. 이상 5가지 원칙 하에서 우선 삼국시대의 도교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우리나라에 도교가 유입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유교·불교의 전래와 함께 4∼5세기에는 이미 삼국 전역이 도교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높아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근초고왕 때 장군 막고해(莫古解) 이야기, 신라 진평와 때 중국에 가서 도술을 배우고자 했다는 대세(大世)·구칠(仇柒)의 기록이 이를 입증해 준다고 할 것이다. 또한 6∼7세기경에는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억불양도책(抑佛揚道策)을 썼고, 이에 따라 입국한 당나라 도사 숙달의 포교는 곧 <노자 도덕경>을 비롯한 도교 경전이 보급되었음을 말해 주고, 이 때 고구려 고승들의 신라 망명과 같은 사태는 당시 고구려 사상계의 충격(衝擊)이 적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현재의 기록상으로는 특히 신라에서 민족 고유의 신선사상과 도교의 신선사상을 융합시키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선도성모(仙桃聖母)설화, 옥보고(玉寶高)·우륵(于勒) 같은 악성(樂聖)의 신선설(神仙說), 신라4선(新羅四仙) 설화의 성립, 물계자(勿稽子)의 신선설, 화랑도와 김유신에 관련된 설화 등등 많은 사례에서 이미 신라 고유의 신앙이 도교와 혼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에는 도교사상이 아직 민중 속에 침투하지는 못하였으며 일시 고구려에 있었던 일을 제외하고는 역시 불교의 위세에 압도되어 부분적으로 불교 속에 침투되는 데 그쳤을 뿐 별로 뚜렷할 정도의 현상이나 발전은 없었다.
물계자
편집勿稽子
3세기초 신라의 충신. 내해왕(奈解王) 때 가야를 도와 동해안 8국의 군사를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3년 뒤에 동해안 3국의 내침을 격퇴하는 데 공이 컸어도 아무런 소득도 없이 사체산으로 잠적해버린 그의 고결한 생애에 기탁하여 뒤에 그와 도선(道詵)을 잇는 설화가 생겨났다.
대세·구칠
편집大世·仇柒
6세기경 신라의 선학도(禪學徒). 신라 진평왕(眞平王) 9년에 <신라는 땅이 좁아 살 수 없으니 중국 오·월(吳越)에나 가서 선도를 배우겠다>는 뜻을 세운 대세(大世)와 구칠(仇柒)의 두 친구가 끝내 남해에서 배를 타고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뒤에 이 기록을 근거로 이들을 신라선파(新羅仙派)의 대표자로 하는 단학파의 해석이 나왔다.
신라4선
편집新羅四仙
연대미상. 고신라 때부터 전해온 영랑(永郞)·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詳) 등의 설화적인 네 신선. 외국에서 와서 이적을 행했다는 설, 산수를 방랑하며서 풍월을 읊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어쨌든 4선 신앙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고, 금강산(金剛山) 등 동해안의 명승지 여러 곳에 이들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막고해
편집莫古解
4세기의 백제의 장군. 근초고왕(近肖古王)이 고구려 국가왕(國剛王)의 내침을 태자로 하여금 방위하도록 하여, 태자가 외적을 격퇴하고 다시 추적하려 할 때 도가(道家)의 말을 인용하여 추적을 만류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당시에 <노자 도덕경>이 백제에서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
편집淵蓋蘇文 (603∼665)
고구려 말엽의 재상. 643년(보장왕 2년)에 왕에게 유·불·선(儒佛仙) 3교가 정립해 있어야 하는데 도교만이 없어서 나라가 위태로우니 도교를 들여오자고 상주하여 당태종에게 청하도록 하였다. 당태종이 이에 응하여 숙달(叔達) 등 도사(道士) 8인에게 천존상(天尊像)과 <노자 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주니 그는 불사를 도관(道觀)으로 삼고 도사를 극진히 대우하였다. 일설에는 도사들을 시켜 국내의 명산대천과 수도 평양성의 지세를 돌며 치성(雉城)을 올리게 하고 참설에 따라 용언성(龍堰城)을 증축하였다고도 한다.
숙달
편집叔達
당나라에서 고구려에 온 도사(道士). 고구려의 억불양도(抑佛揚道) 정책에 따라 고구려에 초빙되어 불사(佛寺)에 도관(道觀)을 차리고 도교를 포교하여 전성시대를 이루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