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중국의 사상/한·당의 사상

한·당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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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唐-思想

한대로부터 위진남북조 시대를 지나 수당 5대(隋唐 五代)에 이르기까지 약 1천년 동안을 중세(中世)라 한다. 일반적으로 한대에는 경학(經學)과 황로술(黃老術),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노장(老莊)의 현학(玄學), 그리고 수당 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했던 시기로 분류한다. 양한(兩漢) 4백년 간의 통일기에는 선진 시대(先秦時代)와 같은 자유사상이나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같은 독창적인 사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진화(秦火)에 인멸된 나머지를 수립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었으며, 따라서 훈고학이 발달하였다. 그리고 오랜 전쟁의 영향과 정치적 속박을 싫어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노자(老子)의 무위자연 사상이 환영을 받았다. 한초(漢初)에 육가(陸賈:高祖時)와 가의(賈誼:文帝時)는 유학자로서의 식견을 반영하였다. 무제시에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고, 동중서(董仲舒)는 현량대책(賢良對策) 등을 지어 유학사상을 바탕으로 정책을 진계(進啓)하여 유학을 관학으로 확립하였다. 한대에는 음양5행설(陰陽五行說)과 참위재이설(讖緯災異說)이 유행하였으며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전한(前漢)의 동중서와 같은 금문경학자(今文經學者)는 자연주의와 신비주의 사상으로 천인(天人)관계와 사회역사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왕망(王莽)때의 유흠(劉歆)이 무제 말년에 공벽(孔壁)에서 나왔다고 하는 <고문경(古文經)>을 들고 나옴에 따라 금고문(今古文)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금문가(今文家)는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의 입장에서 공자가 고도(古道)에 의거하여 개제(改制)하였다 하여 공자를 소왕(素王)으로 높이고, 고문경(古文經)을 위서(僞書)라 하며 사법(師法)을 변란하는 것이라고 배척하였다. 고문가는 공자는 고도를 좋아하여 '술이부작(述而不作)'한 선도대사(先道大師)라 하며, 고문경은 진화(秦火)의 잔여일뿐 아니라 위서는 무망(誣妄)이라 하여 변척(辯斥)하였다. 그러나 후한말 정현(鄭玄)이 금고문의 제설을 모두 채용하여 경의를 통일함으로써 완화되었다. 한대에는 또한 청정무위(淸淨無爲)를 위주로 하여 도를 닦아 수(壽)를 기르며 신선방술(神仙方術)을 구하는 풍(風)과 현실적으로 형명법술(刑名法術)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대의 대표적 사상가로서는 노장(老莊)의 청정무욕(淸淨無欲)을 말하는 회남자(淮南子), 금문학의 입장에서 천인 관계와 음양설, 유자지학과 재이지변을 말하는 동중서, 유도2가(儒道二家)의 학을 혼합하고 <태현(太玄)>과 <법언(法言)>을 지은 양웅(揚雄)을 들 수 있다. 신비사상으로 차 있던 한대에 있어서 허망(虛妄)을 미워하여 <논형(論衡)>을 지어서 시속을 바르게 하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입론(立論)을 한 왕충(王充)은 특이한 존재라 할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노장의 현학이 풍미하였다. 현학에서 3현(三玄)이라 함은 주역(周易)·노자(老子)·장자(莊子)를 지칭한다. 화란(禍亂)이 따른 어지러운 세태에 성명(性命)을 보존하고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으며,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의사를 가지고 노장의 광달(廣達)한 세계를 좋아하였다. 하안(何晏)의 논어주석과 왕필(王弼)의 주역주석은 모두 도가적 입장에서 유가서(儒家書)를 풀이한 것이다. 특히 왕필은 노자주(老子註)를 한 바 있거니와 그의 주역주(周易註)와 하안의 논어주는 모두 자연주의의 입장에서 한유(漢儒)의 부서재이(符瑞災異)의 설을 교정한 것이었다. 하안은 유무(有無)를 논하고, 왕필은 체용(體用)을 설하며, 곽상(郭象)은 장자를 해(解)하는 등 현학의 학풍이 크게 일어난 것이다. 그 밖에 완적(玩籍)·혜강 등의 죽림7현(竹林七賢)이 나타나서 현언(玄言)을 숭상하고 예법(禮法)의 구애를 받지 않으며 세속을 떠나 자유롭게 처신코자 하는 청담이 성행하였다. 한편 불교는 전한말 후한초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입되어 중국불교사상의 시원(始原)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한대의 불교는 초창기로서 일반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 후 3국시대를 지나 진(晋)에 이르는 동안 불교를 신봉하는 승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사찰의 건립과 불경의 번역 등이 점점 성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교 수용 과정에 있어서 노장사상은, 유교와 대립했던 것과는 달리 불교 이해의 교량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로서 도안(道安)·혜원(慧遠)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노장의 형이상학적 입장으로 불교를 해석했는데 이것을 격의불교(格義佛敎)라 한다. 위진시대로 오면서 사족(士族)간에는 불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청담학파들은 순수 도가사상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노장에 의탁하여 불교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었다. 이와 더불어 도가사상에다 불교적 요소가 가미되어 종교적 성격을 띤 도교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나, 그후 도교는 불교와 더불어 대립하여 논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와 도교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아 형식에 있어서는 교단조직상의 대립을 보였지만 도교는 불교의 교리와 의식을 모방하여 자체의 형태를 정비하게 되었다. 남제(南齊)의 장융(張融)은 '도야여불 두극무이(道也與佛 逗極無二)'라 하여 도·불이 일치함을 설하였으며 북제(北齊)의 안지추(顔之推)는 '내외양교 본위일체(內外兩敎 本位一體)'라 하여 도·불의 융회(融會)함을 강조하여 사회적 공존성을 말하였다. 그 후 유(儒)·석(釋)·도(道) 3교 합일로의 단서를 열게 하였으며, 수(隋)의 문중자(文中子)가 '3교어시호가일의(三敎於是呼可一矣)'라 말한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수·당시대의 학술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성장해 온 불교사상이며 불교의 연구는 이때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구마라습(鳩摩羅什)의 불경한역(佛經漢譯)이나, 도안·혜원·승조(僧肇)·도생(道生) 등의 불교사상을 소승적(小乘的) 불교라 한다면 수·당시대의 불교는 점차 대승적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당대에 이르러 불교의 종파는 그 학설이 전문화하고 심화함에 따라서 제(諸) 종파를 형성하여 10여 종으로 분립하였으며, 종파불교의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그 중에 가장 심오한 철학적 이론을 전개한 것을 든다면 법상(法相)·화엄(華嚴)·천태(天台) 등 3종이 있다. 또한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여 이른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하는 중국 대승불교의 일대 혁신을 이루었다. 이들 사상은 송대 성리학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외에 정토종(淨土宗)도 상류사회에 널리 유행되었으며, 특히 화엄·천태·선종 등은 인도불교와는 다른 중국적 특색을 가진 중국불교라 하겠다. 유학 방면은 당초(唐初)에 국자학(國子學)·대학(大學)·사문학(四門學) 등 학교를 설치하여 학생을 양성하였으며, 공영달(孔潁達)에게 명하여 5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게 함으로써 경서의 해석을 통일케 하였다. 그 후 경서를 석각(石刻)하여 대학 문전에 세웠으니 이른바 석경(石經)이 이것이다. 그리고 당은 6조의 부화(浮華)한 여풍(餘風)을 받아 경서로 인재를 선발하였다. 하지만 사실은 시와 문으로 등용하였다. 그러므로 천하의 학자들이 시문에는 열중하였으나 유학에는 소홀하여 사상적인 깊이는 볼만한 것이 없었다.

후기에 이르러 한유(韓愈)의 배불론(排佛論)은 중국 고유사상의 전통으로서 유교 윤리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것은 송대(宋代) 성리학으로의 전환을 이루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이고의 <복성서(復性書)>는 불교정신으로 유교경전(특히 <중용>과 <易學>을 해석하여 다음의 송대 이학(理學) 형성에 단서를 제공하였다. 한유와 이고는 모두 불교성행 시대에 있어서 유교사상을 계승하여 송대로 연계(連繫)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柳 承 國>

전한시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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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時代-思想

전한시대(기원전206-후7)의 사상은 무제(武帝) 즉위 시대를 경계로 하여 전후 두 시기로 대별할 수 있다. 즉 전반은 아직 전국시대의 여러 학파분립의 여풍(餘風)이 남아 있음에 대하여 후반은 그 중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이 왕조(王朝)의 공인을 얻어서 정치사상의 지배적 지위를 획득하기에 이른다. 진(秦) 시황제(始皇帝)의 천하통일 이전, 그의 유력한 보좌였던 여불위(呂不韋)는 가신(家臣)에게 명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시켰지만, 이것은 여러 학파의 학설을 춘·하·추·동 등으로 배분하여 편집한 것에 불과하였다. 여불위가 실각한 후 권력을 장악한 이사(李斯)는 천하통일 직후에 상주(上奏)하여 유학의 고전 등을 인용하여 진(秦)의 정치 방침을 비난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한편, 의서(醫書)·농서(農書)·점서(占書) 이외는 즉시 불살라버리는 방침을 강행했다(焚書政策). 이로 인해서 중국의 고전 문헌은 대량으로 멸실되었다고 하지만 한편 분서(焚書)를 모면한 서적도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진을 넘어뜨리고 천하를 통일한 한왕조 밑에서는 진의 실패에 비추어 점진적인 정책이 취해졌다. 육가(陸賈)가 법(法)과 형(刑)을 너그럽게 하고 인의(仁義)를 기본으로 한 정치를 하라고 진언한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고조(高祖)가 죽은 뒤 여후(呂后)의 일족이 권력을 잡았을 때에는 건국공신(建國功臣)이 몸을 보존하기 위하여 '무위(無爲)이면서 다스려진다'고 한 <노자(老子)>의 사상을 애호하는 경향이 강하여졌고 문제(文帝) 시대가 되어서도 그의 황후를 비롯하여 <노자>를 애독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지만 한(漢)의 황실의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움직임도 같은 문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대표자는 가의(賈誼)로서 그는 유학의 상하 질서사상을 정치에 적응시켜 제(諸) 왕국의 권한을 줄이려 하였다. 하지만 가의의 눈부신 중앙집권화의 방향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데는 다음의 경제(景帝)를 지나서 무제(武帝) 시대가 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무제의 시대는 동시에 유교의 권위가 확립된 시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유교를 기치(旗幟)로 삼아 무제시대의 중앙집권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입장도 물론 있었다. <사기(史記)>에는 사마천(司馬遷)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유(儒)·묵(墨)·명(名)·법(法)·도(道)·음양(陰陽)의 6가(六家)를 논하여 도가만이 타학파의 위에 서는 우수한 사상이라 말하였고,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편찬시킨 <회남자(淮南子)> 역시 도가사상을 기본으로 하여 잡다한 사상의 정리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무제시대에 있어서 중앙집권을 목ㅍ로 하는 한조(漢朝)에 권위를 부여하는 학설로서 중요한 것은 동중서(董仲舒)의 사상으로 대표되는 유학이었다. 거기서는 한조의 정당성을 논하는 유학 이론-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음양5행설(陰陽五行說) 등-이 모두 공자와 결부되고 있다. 그 위에 5경박사(五經博士)의 설치는 그와 같은 유학의 권위를 관료 사회에 보급시키는 것을 촉진하였다. 선제(宣帝, 재위 전73-전49)와 완제(完帝, 재위 전48-전33) 이후가 되며 외척이나 환관들 사이에서 전개된 권력쟁탈전은 각각 유학이론을 떠받드는 형태로서 행하여지게 되었다. 거기서는 자파의 유학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가끔 신비적인 예언이 <경서(經書)>에 가탁(假託)되어 창작되었다. 참위(讖緯)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유학의 권위와 참위를 충분히 이용하여 마침내 찬탈(纂奪)에 성공한 것이 왕망(王莽)이었다. 또한 한대(漢代)의 황제나 관료는 공적 생활에 있어서는 유학 이론의 신봉자였으나 사적 생활에 있어서는 도가사상에 친하여 불로장수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반 서민도 주술(呪術)이나 미신에 지배되어 무당은 질병 치료나 기타 사회생활의 전면에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회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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淮南子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 -전122)이 식객(食客)으로서 초치한 제파의 학자들에게 명하여 편찬시킨 서적이다. 21편으로 이루어졌는데 전국 제자(戰國諸子)의 학설을 집성한 것인 때문에 사상적 통일성은 약하다. 예컨대 <원도훈(原道訓)>, <숙진훈> 등은 도가의 주장을, <천문훈(天文訓)>, <시측훈(時則訓)>등은 음양가(陰陽家)의 주장을, <주술훈(呪術訓)>은 법가의 주장을, <수무훈(修務訓)>, <태족훈(泰族訓)>등은 유가의 주장을, <병략훈(兵略訓)> 등은 병가의 주장을 각기 채집하여 넣고 있다. <한서> <예문지(藝文志)>에 <회남자(淮南子)>는 <여씨춘추>와 함께 잡가(雜家)의 부문에 들어 있지만, 위에 든 것과 같은 여러 학파의 학설을 단지 아무렇게나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요략편(要略篇)>에 복잡 다양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면서도 더욱이 그것을 포괄하는 통일적인

진리를 파악하려 하고 있다. 만물을 통관하는 이법(理法) 또는 원리로서의 도(道)를 최고로 하는 점에서 <회남자(淮南子)>는 노장사상을 승계하는 도가의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편자인 유안(劉安)은 한고조(漢高祖)의 서자인 유장(劉長)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문제 때에 모반죄로 죽은 뒤 그 영토의 일부를 받아서 회남왕이 되었다. 당시 한의 조정은 제후왕(諸侯王)의 권력을 줄여서 중앙으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무제(재위 전140-전87)의 즉위와 더불어 그러한 정책은 보다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기원전 122년에 이르러 유안도 모반의 음모가 있다는 혐의를 받아 자살하고 나라는 몰수되었다. 한 정부는 그와 같은 중앙집권정책을 군신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추진하려고 하였다. 문학을 애호하는 회남왕의 궁정에 참집하였던 빈객과 학자 중에는 그와 같은 한조(漢朝)의 정책에 반발하는 자가 많았으며 그 때문에 <회남자>와 같은 잡가적인 서적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서(漢書)> 회남왕전(淮南王傳)에는 <내서(內書)> 21편 <외서(外書)> 다수, <중편(中篇)> 8권을 제작했다고 했는데 현존하는 <회남자>는 이 <내서(內書)>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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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賈 (생몰년 미상)

전한(前漢) 초기의 변설가(辯舌家)로 알려져 있다. 전국시대말의 초나라 출신으로 한의 고조(高祖) 밑에서 벼슬하며 그 변설을 인정받아 자주 제후에게 사자(使者)로 다녔다. 특히 남월(南越=현재의 광둥성에 속함)에서 독립한 위타(尉陀)에게 가서 남월왕(南越王)의 인(印)을 주고, 한의 신하로 호칭하게 한 설유의 공을 인정받아 태중대부(太中大夫, 천자의 측근에서 논의를 관장하는 벼슬)에 임명되었다. 그는 또 유자(儒者)를 싫어하는 고조에게 "마상(馬上)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마상에서 다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직언하여, 고금의 정치적 성공과 실패의 원인에 대하여 논술하라는 명령을 받아 <신어(新語)> 12편을 지었다. 고조는 그것을 읽고서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고조의 사후, 여후(呂后)를 중심으로 하는 여씨 일족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육가는 이들과 정면으로 투쟁하는 것을 피해, 남월왕이 보내온 천금(千金)을 다섯 아들에게 나누어 주어 집과 땅을 사게 하고 자기는 열흘마다 다섯 아들의 집을 돌아가며 묵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은퇴를 가장하면서도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과 함께 여씨 일족 타도의 계획을 상의하여 드디어 여씨를 멸망시키고 문제(文帝)를 세우는 계책을 성공시켰다. 문제는 그를 다시 태중대부로 삼아 여후 때부터 제호(帝號)를 부활시키고 있던 남월(南越)에 거듭 사신으로 보내어 그것을 중지시켰다.

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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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語

전한시대의 육가(陸賈)의 저서이다.

한의 고조(高祖)가 <진(秦)>이 멸망한 원인과 한(漢)이 흥한 원인에 대하여 논해 보라는 하명에 응하여 육가가 1편을 바칠 때마다 상찬을 받았다고 하는 책이다. 지금 전해 오는 책의 12편의 수는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육가전(陸賈傳)에서 볼 수 있는 <신어(新語)> 12편과 합치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이 때의 상주(上奏)로서는 적합치 않은 자구도 있다. 어쩌면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육가 23편>이라고 한 것의 잔권(殘卷)이 오늘날의 책 속에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신어(新語)>에는 <무위편(無爲篇)>의 "그 도(道)는 무위(無爲) 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행(行)은 근경(謹敬)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라는 어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무위를 정치의 이상으로 하는 사상이 흐르고 있다. 무위에 의하여 천하가 잘 다스려진 것이 요순(堯舜)의 시대요, 그 반대로 애매하고 까다로운 법령과 엄중한 형벌에 의하여 다스린 진(秦)의 시황제(始皇帝)는 실패하였다. 백성에게 선(善)을 권장하는 데는 상위자(上位者)가 중화(中和)의 덕으로써 자연스럽게 교화하여 가는 것이 좋다고 설파하였다. 이와 같이 육가는 '무위'를 말하는 점에서 도가적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이 행한 것과 같은 법(法)·형(刑)의 만능주의를 배격함을 주안으로 한 것이지 결코 노자류(老子流)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을 궁극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신어(新語)>의 기본적 입장은 유가라고 해도 좋다.

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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賈誼 (전201-전168)

전한 초기의 정치사상가이다. 낙양(洛陽) 출신으로서 18세에 이미 수재의 평판이 높았고, 22세 때에 박사관(博士官)에 임영되었으며 다시 태중대부(太中大夫)에 발탁되었다. 그는 그때 한(漢)의 제도와 역법(曆法)을 개정할 것을 문제에게 진언하였지만 주발(周勃) 등의 수구파 대신의 반대를 받아 25세 때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전출되고 말았다. 그러나 1년 남짓하여 중앙에 소환되고, 문제의 막내 아들인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어 국사에 관하여 누누이 의견을 상주하곤 하였지만 그 치안책은 문제에 의하여 실현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얼마 후 양왕(梁王)의 낙마(落馬)로 인한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병들어 이듬해 33세로 죽었다. 그의 주장은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한 왕조의 권력을 내외로 향하여 강화하는 일에 중심을 두었다. 따라서 국내에서는 한의 황제와 대등하게 행세하는 제 왕국을 분할하여 그의 세력을 삭감하고, 밖으로는 흉노(匈奴)를 회유(懷柔)하여 한의 위세를 높이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것을 가의는 유가적인 이상 밑에서 전개하였다. 그러나 장사(長沙)로 좌천되었을 때 지은 <굴원(屈原)을 조위(弔慰)하는 부(賦)>나, <복조의 부(賦)>에는 세상의 인사에 얽매이지 않고자 하는 도가적 심경이 보인다. 그의 저서로서는 <신서(新書)> 58편이 있다.

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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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書

전한시대의 가의(賈誼)의 저서이다. 지금 전해오는 책은 10권 56편으로 되었는데 이것이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있는 <가의(賈誼) 58편>과 동일한 것인지의 여부는 의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신서(新書)>(특히 그 전반 부분)를 <한서> <가의전(賈誼傳)>에 실려 있는 문제에 대한 상주(治安策)와 대비하여 보면 이 시기의 유교적 관료였던 가의의 사고방식을 대개 찾아볼 수가 있다. 여씨(呂氏)의 난(亂) 후에 문제는 대(代)나라의 왕에서 중앙으로 영접되어 황제가 되었으나, 이복형제인 회남왕(淮南王) 등은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문제에 대하여 군신의 예를 행하지 않았다. 이 사태에 대하여 가의는 강대한 제후 왕국의 영토를 자손에게 분할 상속시키는 일견 온정적인 방법(分國策)을 제창하였다. 이 계책은 문제 시대에는 일부만 실행된 데 불과하였으나 무제(武帝) 시대가 되어 강력하게 추진하게 된다. 가의의 주장은 그와 같은 한 왕조의 중앙집권화 정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지만 그 때문에 그는 수구파 관료한테 배척됐다. 그는 그것을 법률이나 형벌과 같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그는 <과진편(過秦篇)>에서 진(秦)이 2세(世)로 멸망한 원인을 자세히 논하여 인의(仁義)를 돌보지 않고 획득한 천하를 안정시키는 도리를 심득(心得)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어디까지나 인의를 정치의 근본에 놓고 법(法)이나 형(刑)은 보조적 수단에 머무르게 하려고 했다. 이 <과진편(過秦篇)>은 <사기(史記)>의 <진시황 본기(秦始皇 本紀)>의 말미에서 사마천(司馬遷)도 전문을 인용하여 가의의 견식을 칭찬하고 있다. 기타 경제·정치의 구체적인 대책도 이와 같은 유가적 예교론(禮敎論)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컨대 주전권(鑄錢權)을 일반으로부터 정부가 회수(回收)하는 것은 백성을 본래의 농업에 힘쓰게 함으로써 백성이 주조 성분(鑄造成分)의 속임수로 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며, 대신을 일반의 관리나 서민보다도 형벌면에서 우대하는 일은 그들의 명예를 존중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 등을 논하고 있다. 북방 유목국가 흉노(匈奴)에 대해서도 천자(天子)의 덕에 의하여 중국에 귀복(歸服)시키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논한 흉노편(匈奴篇)에 보이는 <삼표오(三表五餌)>의 계책이라는 것은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에서는 다만 그 명칭만이 보일 뿐으로 그 상세한 내용은 오늘날의 <신서(新書)>에 의하는 길밖에 달리 알 수가 없다.

5경박사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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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經博士制度

<역(易)>, <서(書)>, <시(詩)>, <예(禮)>, <춘추(春秋)>의 5경(經)마다 박사관(博士官)을 두어 제자를 양성시켜서 유학의 보급 발달을 도모하는 제도이다. 박사(博士)라고 하는 학관(學官) 자체는 이미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에 설치되어 있었다. 진의 시황제 때에도 다수의 박사가 있었고, 진(秦)의 제도를 받아 이은 한(漢)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한의 문제·경제(景帝)시대(전 2세기 전반)에는 이미 유학에 관하여 <시>, <서>, <춘추>의 3종의 박사관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것을 5경(五經)의 박사에까지 진전시킨 것은 무제(武帝) 즉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였고, 실제로 5경박사(五經博士)가 설치된 것은 건원(建元) 5년(전136)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다시 원삭(元朔) 5년(전124)에는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의 상주를 기본으로 하여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고,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이 취해졌다. 이렇게 하여 유학을 배우는 것이 입신출세에 결부된 결과, 전한말(前漢末)부터 후한(後漢)에 걸쳐 유학은 크게 유행하여 "일경(一經)의 설은 백여 만 가지에 이르고, 대사(大師)의 무리는 천여 명에 이른다"라고 할 정도로 되었다. 그런데 전한시대에 박사관에서 쓰여진 5경(五經)의 텍스트는 한대의 예서체로 개서(改書)된 금문(今文)경(經)이었다. 그러던 것이 무제(武帝)의 말년경에는 전국(戰國)시대의 서체로 쓰여진 고문(古文)경(經)이 각지에서 출현되었다. 이 고문(古文)경은 종래의 금문경에 비교해 편수와 자구에 이동(異同)도 있었지만, 전한말의 왕망이 찬탈(纂奪)을 계획할 때에 고문(古文)경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그가 <고문(古文)>에만 있는 <주례(周禮)>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찬탈의 이론적 무기로 이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여 고문(古文)경(經)을 받드는 학파가 박사관에 세워졌으나, 그의 정권이 전복된 후 후한시대에도 5경(五經)에 대하여 금문(今文), 고문(古文) 양파가 박사관(博士官)의 지위 획득을 둘러싸고 대립을 계속하였다. 전한에서는 금문파가 우세하였으나 후한에서는 고문파가 우세하였다고 한다.

동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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董仲舒 (전176경-전104)

전한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 신도국(信都國) 광천현(廣川縣)출신이다.

젊어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배우고 경제(景帝) 때 박사(博士)가 되었다. 무제는 즉위하면서 전국에서 현량(賢良)과 문학의 선비를 불러서 시무(時務)를 논하였는데 동중서(董仲舒)도 현량(賢良)의 자격으로 의견을 진술하였다. 그는 그때 성인(聖人)은 천명(天命)을 받아서 정치를 행하는 자로 교화(敎化)에 의하여 백성의 본성(本性)을 갖게 하고, 제도에 의하여 백성의 정욕을 절제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화에 있어서는 유학만을 정통적 학문으로 정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주장으로 한나라의 정부는 법가(法家)나 종횡가(縱橫家)의 말을 물리쳐 채택하지 않고 5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는 등 유학의 정신이 정책에 반영하게 되었다. 그는 무제에 대한 상주후에 강도왕(江都王)의 상(相) 대신(大臣)으로 전출되었는데 <춘추(春秋)>의 재이(災異)의 기사를 응용하여 비를 오게도 하고 그치게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동(遼東)의 고조묘(高祖廟)의 화재 등에 대한 말 때문에 일단 사형까지 선고받았으나, 조칙에 의하여 용서되고 이후는 재이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은 같이 <춘추(春秋)>를 익히고 있었으나 학력이 동중서에 미치지 못함을 시기하여 다시 그를 교만하기로 이름나 있는 교서왕(膠西王)의 국상(國相)으로 전출시켰다. 그는 얼마 후에 신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이후 집에 거처하면서 저술과 교수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한(漢)의 조정에서는 처리하기 어려운 사건이 일어나면, 정위(廷尉:司法長官)인 장탕(張湯)은 직접 그의 집에 찾아가 재결 방법을 물었다고 한다. 잔혹한 법률의 집행으로 유명한 장탕과 순수한 유학자인 동중서와의 결부는 일견 기묘하지만, 한대의 정치는 그와 같이 유학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행해졌던 것이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공양동중서치옥십륙편(公羊董仲舒治獄十六篇)>, <춘추결옥이백삼십사(春秋決獄二百三十事)> 등은 동중서의 그러한 시절의 재결집(裁決集)일 것이다. 그의 저서로서 잔존하는 <춘추번로(春秋繁露)>도 전부가 그의 원저(原著)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춘추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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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繁露

전한 중기의 공양학자(公羊學者)인 동중서의 저작이다. 춘추시대의 노국의 연대기(年代記) <춘추(春秋)>의 기술 속에 공자가 은연중 불어 넣은 역사 비판의 정신을 밝히려 하는 것이 공양학(公羊學)인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이 그 근거가 된다. <춘추번로(春秋繁露)>는 <공양전(公羊傳)>에 기준하였고, 때로는 그것을 넘어서 동중서가 그 당시 한왕조(漢王朝)의 정치체제에 철학적 근거를 확립하려 했던 책이다. 번로(繁露)의 명칭은 <한서(漢書)> <동중서전(董仲舒傳)>에는 그 저서의 1편의 이름으로서만 게재되어 있다. 또 동서(同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로서는 <동중서백이십삼편(董仲舒百二十三篇)>, <동중서치옥십륙편(董仲舒治獄十六篇)>만이 게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춘추번로(春秋繁露)> 17권 82편(그 중 3편은 결)은 전부가 동중서의 것은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는 설도 있다. <춘추번로>에 보이는 동중서의 특징적인 이론을 열거하여 본다. (1) 현(賢)과 불초(不肖), 덕(德)과 형(刑), 경(經)과 권(權) 등의 가치의 상하를 절대화하는데, 양(陽)은 귀하고 음(陰)은 천하다고 하는 음양설(陰陽說)을 강조한다. (2) 왕의 독존성을 논술할 경우에 천(天)·지(地)·인(人)의 3(三)을 '一', 즉 도(道)로 관통한 것이라고 하는 것 따위의 억지 문자학(文字學)을 사용하였다. 또 왕은 황(皇)·방(方)·광(匡)·황(黃)·왕(往)과 통하여 천하가 귀왕(歸往)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후한(後漢)의 문자학자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도 채용되어 있다. (3) <춘추(春秋)>의 권위를 숭상하여 춘추는 바로 공자가 한왕조(漢王朝)를 위하여 미리 법을 제정해 준 <대의미언(大義微言)>이라 주장한다. 이 점은 후한의 공양학자(公羊學者) 하휴(何休)에 의하여 삼세이사설·이내외설(異內外說) 등으로 정비되면서 공양학은 더욱 발전되어 간다. (4) 백·적·흑의 삼통순환설(三統循環說)에 의하여 왕조의 혁명과, 그것에 수반하는 역법(曆法)과 복색(服色)의 개정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일면 5행설(五行說)에 기본하여 <토(土)>를 5행의 중추로 삼고 한왕조를 그것에 해당시키고 있다. (5) 천자를 정점으로 하는 3공(三公)·9경(九卿)·27대부(二十七大夫)·81사(八十一士)를 <천지수(天之數)>에 합치한다고 하는 천인상응설(天人相應說)과, 천(天)의 견책(譴責)은 우선 '재(災)'로 나타나고, 이어 하늘의 '이(異)'가 내린다고 하는 재이설(災異說) 등으로 천위(天威)를 강조한다. 동중서, 하휴 등에 의하여 전개한 한대의 공양학(公羊學)은 그후 크게 떨치지 못하였으나, 19세기의 청조 후기의 중국의 위기에 즈음하여 부활되었고, <춘추번로(春秋繁露)>의 주석도 수종류 나왔다. 그 중에서 소여(蘇輿)의 <춘추번로의증(春秋繁露義證)>은 공양가(公羊家)에 편벽되지 않는 입장에서 쓰여졌다.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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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 (전145/135-전90?)

중국 전한 중기의 역사가. 자는 자장(子長), 태사공(太史公)이라고도 한다. 사마천(司馬遷)은 중국 최고(最古)의 체계적 역사서 <사기(史記)>의 작자이다.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한왕조의 태사령(太史令-문서나 曆을 관장하는 관직)이 되어 공무 외에 조상 전래의 가업인 역사 편찬의 일을 부활시키려고 하였다. 그는 아들인 천(遷)에게 어릴 때부터 고문(古文)을 배우게 하고 중국내를 널리 여행케 해서 견문을 넓히게 했으나 역사서의 편찬사업 도중에 죽었다. 부친의 유언을 받은 사마천은 얼마 후 태사령의 직위에 올랐고 한왕조의 개력사업(改曆事業)에 참가하였다. 그러는 한편 그는 전설적인 태고의 5제(五帝) 시대부터 그가 살고 있던 한(漢) 무제(武帝) 시대까지의 통사(通史)를 완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는 중 흉노(匈奴) 정벌에 즈음하여 포로가 된 벗인 장군 이능(李陵)을 무제의 면전에서 변호하였기 때문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를 절제당하는 궁형(宮刑)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치욕을 견디면서 <사기(史記)> 완성의 초지를 관철시켰다. 그는 죽은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무제의 죽음에 전후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저작의 동기나 궁형(宮刑)을 받은 후 환관이 되어 살아 나아가는 심경에 대해서는 <사기(史記)> 말미의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와 친우 임안(任安)에게 보낸 서신(<漢書> <司馬遷傳)>에 실린 <報任安書>)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는 가업을 계승하는 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그 저작의 배경에는 춘추공양학(春秋公羊學)의 역사철학이 있었다. 즉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사건을 기록하는 방법 속에 역사에 대한 정사(正邪)의 비판을 가한 정신을 본받아 사마천도 사장되어가는 정의의 인물이나 사적을 후세에 전하여 그 의의를 현창(顯彰)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저작을 통하여 사마천(司馬遷)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는 일도 역경에 빠진 그의 절실한 소망이었다. 그 점에서 <사기(史記)>에는 후세의 중국의 관선사서(官選史書)에서는 볼 수 없는 일종의 개인적인 감개와 비판정신이 흐르고 있다.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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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

전한(前漢)의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이 부친 담(談)의 유지를 계승하여 완성한 중국 최고(最古)의 기전체(紀傳體)의 역사서이다. 처음에 <태사공기(太史公記)>,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호칭되었으나 위진시대(魏晋時代) 이후 <사기(史記)>로 호칭되었다.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 계 130권으로 된다. 이 중에서 <본기>와 <열전>이 중심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와 같은 사서(史書)의 체재를 기전체(紀傳體)라고 부른다.

후세 중국의 역대 정사는 이 체를 모방하고 있다.

<본기(本紀)>는 황제(黃帝)·요(堯)·순(舜) 등의 5제본기(五帝本紀)로부터 시작하여 하(夏)·은(殷)·주(周)의 각왕조,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항우(項羽)의 각 본기(本紀)를 거쳐서 한(漢)의 고조(高祖) 유방(劉邦) 이하 무제에 이르는 한(漢)의 5대(五代) 황제(皇帝)의 본기(本紀)로 이룬다. 즉 중국 역대의 제왕의 기록으로써 <사기(史記)>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다. <표(表)>는 하(夏)·은(殷)·주(周) 3대의 왕실의 계도(系圖),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의 제후의 재위 연대 대조연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8년에 걸쳐 사투를 계속한 시절의 월표(月表), 한 대(漢代)의 공신(功臣)과 왕후(王侯)의 일람표 등으로 되어 복잡한 본문을 읽을 때 참고로 이용된다. <서(書)>는 예서(禮書)·악서(樂書)·율서(律書)·역서(曆書)·천관서(天官書)·봉선서(封禪書)·하거서(河渠書)·평준서(平準書)의 8편인데, 예(禮)·악(樂)·천문(天文)·역법(曆法)·관개사업(灌漑事業)·경제정책 등의 변천을 조사하여 밝힌 말하자면 문화사적인 부분이다. 이것도 가계(家系), 인물 중심의 본기(本紀), 열전(列傳)류의 공백을 메우는 유용한 부분이다. <세가(世家)>는 서주(西周) 시대로부터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걸쳐서 유력한 제후에 관한 16편과 한대에 와서 책봉된 유씨 일족 및 공신에 관한 12편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외에도 유교의 개조인 공자와 진말(秦末)의 반란의 주창자 진섭(陳涉) 두 사람을 세가(世家)에 넣고 있는 사실은 이례적이다. <세가(世家)>라는 것은 원래 대대로 봉지(封地)와 가록(家祿)을 세습한 가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왕이나 제후 이외에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에 족한 사적(事蹟)을 쌓은 관료나 서민의 전기를 취급한 부분이 <열전(列傳)>이다. <열전(列傳)>은 <사기(史記)> 중에서 분량이 많을 뿐만 아니라 인물을 채택하는 방법에 특색이 있고 문장도 정채(精彩)가 풍부하다. <열전(列傳)>의 첫 머리에 나오는 <백이열전(伯夷列傳)>은 백이(伯夷)·숙제(叔齊)의 고사와 함께 묻혀가는 인물을 기록에 남기고자 하는 사마천의 <사기> 저작의 의도를 말하고 있어 말미(末尾)의 <태사공자서(太史公子序)>와 함께 명편(名篇)으로 손꼽힌다. <열전>에는 전국(戰國)시대부터 한대에 걸친 유력 관료가 많이 취급되고 있다. 군주의 권력을 배경으로 삼아 위세를 뽐내던 재상이나 장군에게는 상당히 비판적인 것을 볼 수 있다. 또 민간의 의협에 찬 태도라든가 선비의 의리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고 잇다. 그런가 하면 서민의 자발적인 이식(利殖) 활동을 긍정하고 있다. 그러한 점이 후세의 유교적 관료의 안목에서는 이단으로 간주되어 <사기>는 때때로 공격을 받았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가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것처럼 오늘날 사마천이 동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양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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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雄 (전53-후18)

중국 전한말(前漢末)의 사상가이며 문장가이며 자는 자운(子雲)이다. 촉군 성도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부터 박식하였으나 말을 더듬었기 때문에 서적만을 탐독하며 사색을 하였다. 30여 세에 비로소 대사마(大司馬)인 왕음(王音)에게 문재를 인정받아 성제(成帝)의 급사황문랑(給事黃門郞:궁중의 諸事를 관장하는 관원)이 되어, 왕망(王莽)과 유흠(劉歆)과 동렬에 있었다. 나중에 궁정 쿠데타로 왕망이 신(新)의 왕실을 일으키매, 노년의 선비로서 대부(大夫)라는 직책에 취임하여 죽는 해까지 머물렀다. 이 점에 대해 송대(宋代) 이후의 절의관(節義觀)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거니와 원래 정세와 함께 부침(浮沈)하면서 일신을 보전하는 말하자면 권력에는 겸유(謙柔)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저술에는 <주역(周易)>을 모방한 <태현경(太玄經)>과 <논어(論語)>를 모방한 <법언(法言)> 등이 있고, 젊었을 때 동향의 선배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사모하여 <우렵(羽獵)>, <장양(長楊)> 등 장문(長文)의 부(賦)와 <해조(解嘲)>,<해난(解難)>의 산문의 사부를 남겨 세론(世論)을 풍자하였다.

그의 사상은 <태현경(太玄經)>에 보이는 것과 같이 당대의 고문가(古文家)에 영향을 준 고풍(古風)적이고 난해한 문체를 사용하였다. 전국시대의 제자(諸子)의 사상가에 비교하여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층에 현저하였던 음양5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한 유교의 신비화에 불만을 품은 그는 <노자(老子)>와 <역(易)>에 의거하여 범신론적인 선진(先秦)시대의 도가의 자연객관을 중시하는 경향을 발전시켰다. <법언(法言)>에서는 원시 유가의 인위적인 도덕 교화의 필요를 말하면서, 선악 양성(善惡兩性)의 인성론(人性論)을 주장하였고 그에 상응하는 합리주의적인 윤리사상을 강조하였다. 또 이 책은 왕망(王莽)의 위선적 성격을 비판하는 곳이 보인다. 그 외에 언어학상 귀중한 <방언(方言)>, <훈찬편(訓纂篇)>을 남겼고, 또 <난개천팔사(難蓋天八事)>의 천문학설을 저작하였다.

태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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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玄經

양웅(楊雄)의 주저(主著)이다. 현(玄)이라는 것은 우주를 통일하는 감각되지 않는 본체(本體)이고, 태(太)는 그 현에 대한 미칭(美稱)이다. 한대의 역학(易學)은 음양2기(陰陽二氣)의 결합운동을 상징적인 형상의 변화로 표시하였으나, 이 책에서는 다시 도가의 도(道=우주의 본체)의 관념을 빌어서 현(玄)이라고 이름한 다음 그것을 2기(二氣)의 통일체로 상정하였다. 이 현(玄)이 만물로 전개해 가는 양상을 세 가지의 상징적인 부호(符號-易에서는 2종류)의 조합과 난해한 찬(贊)(解說文)으로 표현하려 하였는데 다분히 <역(易)>과 <역전(易傳)>의 형식을 모방한 것이다. 사상적으로는 <역전(易傳)>의 음양설과 <노자(老子)>의 천도관(天道觀)에 기본하여 세계의 형성과 변화를 체계화 하였다. 현리편에 의하면, 현(玄)은 음양2기(陰陽二氣)가 혼돈된 분화되지 않은 것의 총체이며, 그것은 2기(二氣)의 결합운동의 전규율(全規律) 그 자체로서 만물 속에 존재하여 상호간을 연계하는 작용을 갖고 있다. 그것은 지(智)·인(仁)·용(勇)·공(公)·통(通)·성(聖)·명(命) 등이라고 하는 한정된 작용을 '명명(冥冥)한 속에'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통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이야말로 대체로 범신론적(汎神論的)인 세계관에 가깝다고 하겠다. 또 현형현(玄瑩篇)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의 도가사상(道家思想)에 있던 '자연에 인순(因循)' 하는 생각을 발전시켜 객관적 정황을 중시하고 주관적 해석을 피하도록 힘쓰고 있다. 이것은 그의 천문이나 역(曆)의 지식의 결과라 하겠다. 그 때문에 이 책은 당시의 정통사상이었던 신비주의적 세계관이나 예언(豫言), 참위설 (讖緯說)에 반대한 후한(後漢)의 환담(桓譚), 왕충(王充), 장형(張衡)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한편 이것은 6조(六朝)의 도가사상의 선구라고도 평가되고 있다.

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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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譚

중국 후한 초기의 사상가. 자는 군산(君山), 패국상(沛國相)의 사람이다.

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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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歆 양웅(楊雄)에게 배워 5경(五經)에 널리 통달하였다. 그러나 부친이 대악령(大樂令)이었던 영향으로 가극을 좋아하여 예의에 구애되지 않고 자주 학자를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왕망(王莽)의 신(新)나라에서는 벼슬하지 않고,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 때에 의랑급사중(議郞給事中)이 되었다. 농업을 중히 하고 상업을 억제하며, 법제의 통일 등 정치개혁에 관한 의견을 황제에게 상신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다시 당시의 국가 권력의 어용학문이며 황제의 신용이 두터운 도참(圖讖豫言說)의 미신을 대담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에 황제의 분노를 사서 참수(斬首)될 뻔하였으나 지방관(地方官)으로 좌천되었다. 그의 <신론(新論)> 29편은 전한(前漢) 육가(陸賈)의 <신어(新語)>, 가의(賈誼)의 <신서(新書)>의 정신을 이어 과거의 사실을 서술하여 시국을 비판한 정치적·사상적 의견을 모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남송 때에 없어졌다. 지금은 청(淸)의 엄가균(嚴可均)의 <전후한문(全後漢文)>에 집록(集錄)되어 있다. 현존의 문장으로 보면 그는 당시의 천인감응사상(天人感應思想)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천(天)의 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치의 잘잘못과 사람의 행불행은 천명이 아닌 인위에 의한다고 했다.

또 정신과 육체를 촛불에 비유하여 육체의 사망은 정신의 소멸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신선방술(神仙方術)의 신비적인 방법에 의한 장수법을 부정하였다. 이 무신론은 이어서 왕충(王充)의 유물사상과 반참위설(反讖緯說)에 영향을 주어 마침내 한대의 지배계급의 신학적 해석학(神學的解釋學)에 대한 격렬한 비판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그가 천문학상에서 혼천설(渾天說)을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후한시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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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時代-思想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의 정권을 약탈하는 데 이용한 부명(符命)의 예언설이나, 광무제(光武帝)가 한실(漢室)을 부흥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활용한 도참(圖讖 = 예언이나 주문에 사용되던 신비적인 언어)은 각기 준거할 곳을 유가(儒家) 경전에서 구하여 권위를 세우려고 하였다. 이미 전한말(前漢末)에는 음양5행설(陰陽五行說)을 원리로 삼는 갖가지 천인감응 사상에 의하여 유가의 경서를 해석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시류의 유자(儒者=今文學者)는 한층 권력에 영합키 위해 공자(孔子)의 저작으로 가탁(假託)한 위서(緯書=秘書)를 만들어 경학(經學)을 신비주의로 감쌌다. 기원후 56년 광무제(光武帝)가 도참(圖讖)을 천하에 공포하고, 장제(章帝)가 79년에 학자를 백호관(白虎觀)으로 모아놓고 5경(五經)의 국정 해석(國定解釋)을 토의시켜 전한(前漢) 이래의 <금문(今文)>학의 우위(優位)를 보증하였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정권에 활용되었던 <고문(古文)> 경학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에 접근하고 있었다. 금(今)·고문(古文)의 차이는 <금문(今文)>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을 근거로 한왕조(漢王朝)의 정책 운용에 적응한 이론을 제공하여 학관(學官=五經博士)을 독점해 오고 있었는데 반하여 <고문(古文)>은 복고주의를 주창하면서 고대 성현의 이상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으로서 5경(五經)을 종합하는 텍스트의 언어해석을 기초로 한 해석학을 확립시켰다. 유흠(劉歆), 가규(賈逵), 반고(班固)와 같은 학자들은 고문의 경전이 도참의 불비를 보강할 수 있는 것이라 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모시(毛詩)> 등을 국가에 공인시키려고 한 운동을 격렬하게 일으켰으나 대개 이 학문의 본령은 민간 사학에서 발휘되었다. 후한(後漢) 때에는 일반적으로 '녹리(祿吏)의 도(道=官吏登用)'가 개방되었으므로 유생들이 다투어 경학을 배워 금고문(今古文)에 능통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분질서를 중하게 보는 계급사상과 그 실천인 예(禮)를 존귀하게 여기는 명절(名節)의 기풍이 넘치게 되었다. 대략 명(明)·장(章)·화(和)의 3제(三帝, 58-105) 시절에 예교 국가(禮敎國家)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당시의 지식인의 언행은 점차로 관료 후보의 예비공작적인 것으로 변해 갔다. 금고문(今古文) 두 학파의 논쟁이 체제교학(體制敎學)의 강화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에 학술의 기운이 사법(師法)을 준수한 전한(前漢)의 일경 전문(一經專門)으로부터 5경 겸학(兼學)으로 진보하고, 다시 금문·고문 양 경학을 겸습하여 절충하고 총합하려고 하는 학자가 나타났다. 가규(賈逵)와 허신 등이 그들이다. 후한말이 되어 하휴(何休, 129-182)는 훈고의 형식에 의하여 춘추학을 완성시켰고, 정현(鄭玄)은 참위설(讖緯說)도 살려가며 금고문의 예학(禮學)을 통합함으로써 위진(魏晋) 이후의 경학의 일대 종주(一大宗主)가 되었다. 국교인 유학이 신비화의 깊이를 더하고 있는 중에 지배권력의 의사를 거슬려서 천인감응의 참위설을 부인하는가 하면 음양오행설을 신봉하는 모든 학설에 대하여 비판의 화살을 돌려댄 지식인들이 출현하였다. 환담(桓譚)에서 시작하는 무신론자의 계열이 그것이다. 그들은 경험주의와 예리한 이성으로 그런 것들에 공격을 가하였다. 왕충(王充)을 필두로 왕부(王符), 중장통(仲長統)이 계속 나왔다. 왕부는 그의 <잠부론(潛夫論)>에서 빈부를 사회적 근원부터 추구하여 유법(儒法) 양면에서 사회비판을 행하였고, 중장통은 <창언(昌言)>에서 신권적인 왕조 순환사관(王朝循環史觀)을 비판하며 지배자의 철학에 각각 준열한 타격을 주었다.

왕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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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充 (27-99경)

중국 후한의 탁월한 사상가. 자는 중임(仲任). 회계군(會稽郡) 상우(上虞:현재의 浙江省에 속함) 사람이다. 신분이 낮은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청년시대 낙양(洛陽)으로 나와 반표(班彪 3-54, 班固의 아버지)에게 배웠는데 가난하여 책을 사지 못하고 가두의 서점에서 읽고 기억하여 백가(百家)의 사상에 통했다고 한다. 이어 현(縣), 군도위(郡都尉), 군 등의 지방 관청에 근무하였고, 공조(功曹)를 역임하며, 훌륭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권력자와 때때로 생각이 맞지 않아 사직하여 향리(鄕里)의 자제(子弟)를 가르쳤다. 60세 때 자사(刺史) 동근(董勤)에게 초빙되어 주종사(州從事)가 되었고, 이어 치중(治中)이 되었으나 62세로 퇴관하여 죽을 때까지 저술에 전념하였다. 주저 <논형(論衡)> 속에 일관된 지식 일반에 대한 비판주의와 실증적 태도는 천(天)의 의지(意志)에 의하여 자연과 사회가 지배된다고 하는 천인감응의 정통사상을 부인하였다. 이 경험적 인식과 거기에 따른 논리적 추론만을 승인하고, 모든 초경험적인 설화(說話)나 역사의 허위를 폭로하려고 한 것은 신비적 해석학으로 화한 어용철학(御用哲學=公羊學 今文學)이나 그것을 옹호한 속류 제관념(俗流諸觀念=讖緯說)에 이론적인 큰 타격을 주었다. 그가 이와 같은 자연과 사회에 대한 유물론적 사상을 갖게 된 근거로는 당시의 천문역법(天文曆法)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과학, 민간의 실증주의적인 해석학(解釋學), 도가의 주관을 배제하는 자연철학 등이 영향을 주었다. 그 외에도 그가 유능한 자질을 소지하고 있으면서 불우한 하급관리의 생애로 시종함으로써 그는 중세 봉건적인 사회기구가 정비됨에 따라 계급관계가 고정되어 사회적 현실과 과학적 진리와의 부조화를 수긍하기 어려웠던 점도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부조(父祖)로부터 받아 이은 의협적(義俠的)인 비타협의 성격도 이러한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크게 영향을 준 것이라 믿어진다. 그러나 봉건체제의 진행 앞에 그의 현실적 역할은 무력한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고고(孤高)한 비판의식은 현(現) 왕조를 불합리하게 옹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당하게 찬미하려고 하는 한편 미래에의 적극적인 활동의지가 부족했다. 따라서 그 자신은 깊은 숙명론에 사로잡힌 채 생애를 끝마쳤으나 중국 중세를 통하여 혁신적 철학의 수립을 그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왕충의 저술로는 이외에 <기속절의(譏俗節義)>, <정무(政務)>, <양성서(養性書)> 등이 있는데 현행의 <논형(論衡)>에 그것들이 종합되어 있다고도 하나 다 현존하지는 않는다.

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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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衡 왕충(王充)의 저작으로 8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형(衡)이라 함은 저울에 달아서 공평하게 중량을 재는 것이다. <논형(論衡)>의 주지는 일체의 허위의 지식을 검토하고 비판하여 공정한 진리를 끌어내는 데에 있었다. 실제로 이 책에는 당시의 주요한 철학 문제(자연관·지식론·인성론·운명론·정치사상)가 전부 포함되는데, 독창성이 풍부한 이론이 전개되고 있다. 자연관(自然觀)에서는 목적론적인 하늘의 의지를 부정하여 천인감응의 신권설에 타격을 주는 한편, 5행 재이사상(五行 災異思想)을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물질적 자연의 고유한 운동을 승인하였고, 나아가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과도한 정치적 간섭을 배격한 도가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상태를 존중하였다. 또 사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여, 사람의 정신 활동도 육체의 생명과 함께 물질적으로 생멸한다는 것을 설명함으로써 환담(桓譚) 이래의 무신론을 철저히 하였다. 지식론(智識論)에서는 선천적으로 아는 신비적 선험주의(先驗主義)를 부정하고 후천적인 학습 경험에 의한 지식의 집적(集積)을 기초로 하여 그것에 기본하는 이성적 판단을 존중하여 당시 유행한 여러 가지의 비합리적인 설화나 전문(傳聞)의 허망성(虛妄性)을 폭로했다. 이것들은 당시의 신비적인 해석학(解釋學)으로 변한 어용유학(御用儒學)과 정면으로 대립하였는데, 공자나 맹자의 언행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송대(宋代) 이후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부터 격렬히 비난받았다. 그의 풍부하고 왕성한 비판주의는 후한(後漢)말 채옹(蔡邕)이 담조(談助-이야기거리)로서 다룬 것과 같이 충분하지는 못하나 역대 지식계급의 지지를 받아 왔으며,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은 것은 유교 교학체제(儒敎敎學體制)가 붕괴한 근대 이후가 된 다음이다.

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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班固 (32-92)

중국 후한의 역사가, 문장가. 자는 맹견(孟堅), 부풍(扶風)의 안릉(安陵) 사람이다. 반고는 전한 말 지방호족(地方豪族)에서 조정에 가까워진 명문 출신이며, 부친인 반표(班彪)는 <왕명론(王命論)>을 저작하여 한왕조를 찬미하였다. 누이인 반소(班昭=曹大家)는 유향(劉向)의<열녀전(烈女傳)>에 주해(註解)를 하고, <여계(女誡)>를 저작함으로써 봉건사회의 여성상을 보여준 것은 유명하다. 동생은 서역에 원정한 무장(武將) 반초(班超)이다. 반고는 부친의 유지를 이어 받아서 난대영사(蘭臺令史-도서·奏事를 관장하는 비서관)가 되어 궁중의 비밀 서류를 살펴가면서 정통사상과 송한주의(頌漢主義) 아래서 전한 일대(前漢一代)의 단대사(斷代史)인 <한서(漢書)>를 20여 년을 소비하여 편찬했다. 또 79년 (建初 4년) 학자를 조정에 모아 유교의 교의(敎義)를 통일시킨 백호관주의(白虎觀奏議)의 토의 내용을 <백호통의(白虎通義)> 라는 이름으로 편집하였다. 이 책은 <한서(漢書)> <5행지(五行志)와> 더불어 한대 지배계급의 지지를 받은 휴상재이(休祥災異)의 예언설(讖緯思想)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는 사부(辭賦)의 작가로서도 <양도부(兩都賦)>를 남기고 있는데 그 내용은 그의 경력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한왕조의 찬미로 채워져 있다.

한서 예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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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藝文志 (80년경 성립)

반고(班固) 편집의 <한서(漢書)> 8지(八志)의 1편. 당시에 존재하던 서적을 기록한 서목(書目)과 그 서적의 적요(摘要)이다. 전한 말 성제(成帝)의 명으로 광록태부(光祿太夫) 유향(劉向) 을 중심으로 중비서(中秘書-궁중 장서)를 정리하는 대사업을 일으켜 선진시대(先秦時代) 이래의 고금의 문헌을 교정하여 편목을 바로 잡았다. 이때 각 서적의 정리 경과를 기록하여 <별록(別錄)>으로 하였다. 향(向)의 사후 아들인 유흠(劉歆)이 이 사업을 계승하여 애제(哀帝) 때에 <7략(七略)>을 지어 서목 분류를 완성함으로써 그 사업을 끝맺었다. <7략>은 그의 해설서인 <별록>과 더불어 중국 최고의 서적 목록이 되었다. 반고의 <예문지(藝文志)>는 <7략(七略)>을 다시 간단하게 하였고, 구성은 6예(六藝)·제자(諸子)·시부(詩賦)·병서(兵書)·수술(數術)·방기(方技)의 6략(六略)으로 하였다. 각 약목(略目)은 부문으로 나누어 당시 존재하던 고금의 서적의 이름과 편권수를 기재하고, 작자와 그 시대 등을 주기(註記)하였다. 약목(略目)과 분문(分門)마다 통합해서 묶은 총론·총서는 전한의 사상 종파의 경향을 서술하였고, 소급하여 선진 전국시대(先秦戰國時代)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사상과 유파의 추세까지 서술하였다. <7략별록(七略別錄)>이 분할되어 <한서(漢書)>의 <예문지(藝文志)>와 <유림전(儒林傳)>에 각각 일부(一部) 수록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예문지>는 유향(劉向) 부자의 분류를 이어받아 국교인 유가풍(儒家風)의 해설을 하지만 전한말에 유행한 방기(方技)·술수(術數) 관계의 서적을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점에서 목록학(目錄學)의 시조인 <7략별록(七略別錄)>과 <예문지>는 문헌의 원류와 학술상의 유래를 아는 데에 귀중한 사료이다. 동시에 전한말의 한왕실 주변의 사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6예(六藝:易·書·詩·禮·樂·春秋)의 유교 경전을 제자10가(諸子十家)로부터 구별하여 존중한 의의는 크다. 한적(漢籍)을 4부 즉 경(經)·사(史)·자(子)·집(集)으로 분류하는 것은 진(晋)의 순욱(荀勖)의 <중경신부(中經新簿)>부터이지만 중세를 통하여 유(儒)·불(佛)·도(道) 3교의 교섭이 있은 뒤에도 서목 분류에 보이는 경서(儒敎經典)의 위치는 체제교학(體制敎學)의 우위를 그대로 반영하여 청말(淸末)까지 변경되지 않았다.

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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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玄 (127-200)

중국 후한 때의 대표적 학자. 자는 강성(康成). 북해국(北海國) 고밀(高密:현재의 산둥성에 속함)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금고문(今古文)의 경학(經學) 외에 천문 역수(天文曆數)에 걸쳐 광범위한 지식욕을 갖고 낙양(洛陽)의 태학(太學=國立大學)에 진학하였다. 뒤에 당시 최고의 학자 마융(馬融)에게 사사(師事)하고 수년 후 향리에 귀환할 때 선생으로부터 "나의 학문은 정현(鄭玄)과 함께 동으로 갔다"고 탄식할 정도로 면학하였다. 유학(遊學) 십여 년에 향리의 학생을 교수하였다. 44세에 당고(黨錮)의 옥(獄) 때문에 그 학문이 금고(禁錮)됨에 문을 닫고, 집에서 연구와 저작에 몰두하였다. 14년 후 해금되면서 하진(何進), 공융(孔融), 동탁(董卓), 원소(袁紹) 등으로부터 초청받았다. 만년에 초청에 응해 대사농(大司農=農商務大臣)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떠나 연구와 교육에 생애를 바쳤다. 전한의 경학은 금문학(今文學)으로서, 일경(一經)을 전공하고 사설(師說)을 엄수하며 공양가(公羊家)를 중심으로 체제교학(體制敎學)이 어용학문으로 변했으나 후한에 이르러 고문학이 진출하여 원문의 이동(移動)을 중시하는 훈고해석의 방법에 의하여 수경(數經)을 겸수(兼修)하는 경향을 보였다. 정현(鄭玄)은 고문을 주로 하고, 금문의 참위설 등도 종합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훈고에 의한 제 경전의 통일적 해석을 완성하여 한당 훈고학의 지표가 됨으로써 경학의 권위를 높였다. 현존하는 <삼례주(三禮註)>, <모시정전(毛詩鄭箋)>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것들은 산일된 제 주석을 집합한 것으로 청(淸)의 원균집(袁鈞輯)의 <정씨일서(鄭氏佚書)>, 공광림(孔廣林)의 <통덕유서소견록(通德遺書所見錄)>, 황석(黃奭)의 <한학당총서(漢學堂叢書)>에서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다. 또 정현의 언행록으로서 제자가 편집한 것에 <정지(鄭志)>가 있다.

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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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肅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학자이자 정치가(195-256)로 자는 자옹(子雍)이다. 회계(會稽:현재의 저장성에서 출생하였다. 왕랑(王朗)의 아들이다. 그의 딸은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가서 진(晋)의 무제(武帝:司馬炎)을 낳았다. 관리로서의 왕숙은 때때로 상소하여 시사(時事)·제도(制度)에 대한 견해를 진술하고 정치활동을 행하여 중령장군(中領將軍), 산기상시(散騎常侍-천자에 봉사하는 중요한 고문관)가 되었다. 당시 학계의 일부에는 양웅(楊雄)의 반신비주의(反神秘主義)를 계승하는 경향이 있었거니와 왕숙도 그 영향을 받아 젊어서 <태현경(太玄經)>의 주석서를 지었다. 사상적으로는 가규(賈逵, 30-101), 마융(馬融, 79-166)의 현실주의적 해석을 좋아했고, 정현의 참위설에 의거한 논리주의적 통일해석을 피했다. 많은 경서에 주석하여 신비적인 색채를 실용적인 해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특히 정현의 예학체계(禮學體系)에 반대하여 <성증론>을 저술하였다. 다만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위작하여 자신의 비판의 근거로 삼은 것은 도리어 정현의 학설의 강력하고 확고함을 증명한 것이 되었다. 이 정(鄭)·왕(王) 양 학의 논쟁은 6조(六朝)를 통하여 학술계에 있어 남북의 대립을 야기시켰다.

3교의 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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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敎-交涉

기원후 3세기 후한(後漢)이 망한 후 당(唐)에 이르는 400년간 중국은 외침과 내부 분열로 정치,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다. 특히 317년 이민족에 쫓겨 정착지인 황하 유역으로부터 양쯔강 연안으로 남하한 것은 중국사상 획기적인 일이다. 언어도 민속도 다른 강남(江南)으로 주 활동무대를 옮긴 그 시대를 위진 6조시대(魏晋六朝時代)라고 부른다. 그 미증유의 변동기에 또한 미증유의 문화 현상이 출현하였다. 사상사상(思想史上), 이른바 3교(三敎)의 교섭이 그것이다. 3교라 함은 유교·불교·도교라는 중국의 3대 종교를 가리킨다. 유교를 종교라 부를 수 있을지는 문제지만 <주례(周禮)> 등에 종교적 의식이나 관념이 꽤 많은 것도 사실이고, 또 두 개의 종교와 대조시키는 의미로서 종교로 취급하여 온 것이 관례로 되었다. 그렇지만 후한 이후에 3자가 비로소 갑자기 출현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그것들이 분명하게 셋으로 구별될 수 있는 정도로 최초부터 대립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말할 나위 없이 그것들은 서로 교섭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세에 유교를 내세우려는 나머지 유교는 사대부(士大夫)라고 하는 지식계급의 것인 데 반하여 도교는 무지몽매한 일반 대중의 미신이고, 불교도 그와 동류의 사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현실생활이란 그 정도로 단순한 것은 아니며, 인간도 또한 그렇게 결벽(潔癖)한 존재는 아니다. 적어도 위진 6조시대만은 그렇지 않았다. 회화나 조각이나 문학작품에서 이 3자는 혼화(混和)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공직(公職)상으로는 유교를 받들지만 집에 돌아가거나 또는 관직에 나아가기 전 젊은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도교나 불교에서 마음의 안정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런 까닭에 당시의 3교 각자의 진실한 자세를 철저하게 알기는 어렵고, 연구상으로도 미개척 분야가 많으며, 특히 도교의 연구는 위와 같은 이유로 소홀히 취급했던 만큼 알지 못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불교의 도래가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 같은 중국 종교의 조직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은 확실하다.

불교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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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傳來

불교가 중국에 어느 때 전해졌는가 하는 문제는 유교·도교와의 교섭을 생각하는 점에서 중요한 문제이지만 제설이 구구하여 아직 결정적인 연대는 알 수 없다. 서방(西方)과의 최초의 교섭은 공식 기록에는 기원전 2세기 전한 무제(前漢 武帝) 때 장건(張騫)이 중앙아시아에 파견되어 진귀한 서역(西域)의 물산을 소개하였다는 이야기가 최초일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서역이나 인도와는 육지로 연속되어 있기 때문에 명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어떤 형태로든지 일찍부터 교섭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고학이나 미술사가 어느 정도 그것을 보여준다. 인도의 아쇼카 왕의 불교 전도로 당시의 서역인(西域人)에 불교는 확실히 알려지고 있었을 것이고, 대상(隊商) 등에 의해 중국에까지 전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일반인의 마음을 잡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불교 공전(公傳)은 후한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10년(서기 67)에 낙양(洛陽)에 전래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갓 설화에 불과하고 사실은 그보다 먼저인 영평 8년(65)에 명제의 이복동생 되는 초왕영(楚王英)이 수도 낙양에서 남방으로 향하여 상당히 떨어진 자기 나라의 팽성(彭城=현재의 江蘇省 銅山에 속함)에서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제가 초왕에게 내린 영평 8년(서기 65) 조서(詔書)에 의하면, 영(英)은 황로(黃老=도교의 신)와 함께 "부도(浮屠:당시는 佛陀를 이와 같이 발음되는 대로 적었다의 인사(仁祠)를 숭상하여 결재(潔齋)하기를 3개월 신(神)과 맹세하였다"고 한다. 어느 학자는 이 3개월을 인도에서 중이 안거(安居)로서 지나는 3개월의 수업 기간으로 해석한다. 만일 그렇다면 당시 벌써 불교가 상당히 알려지고 있던 것이 된다. 최소한 그러한 신앙과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하는 기록은 불교가 그에 앞선 시기에 지식인에게까지 알려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 관한 다른 자료도 강소(江蘇)나 오(吳) 등의 동남 해안 지방에 관한 기술이 많은 것으로 보아 혹은 해로로부터의 전래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어쨌든간에 그 초왕영(楚王英)의 기록에서 주의할 것은 불(佛)과 황로(黃老)를 함께 받들고 있던 일이다. 원래 교통기관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는 처음에 타국의 문화(이 경우는 종교)가 전해질 때는 자기 나라에 이미 존재하는 유사물이나 자국 종교의 이종(異種)이나 분파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측에 무엇인가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때는 설령 이질의 것이라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던 처음에도 그러했다. 불타는 그것을 빌면 행복이 얻어지는 공리의 대상물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외래 종교도 교의(敎義)가 번역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자 비로소 중국인에게 새로운 세계관과 사고 형식을 갖게 하는 것이 되었다. 그 소개를 한 자들은 최초는 서역(西域) 출신자들이었다. 후한말 환제(桓帝) 무렵에 수도인 낙양(洛陽)에 내조(來朝)한 안세고(安世高:파르티아국의 태자)와 지루가참(支婁迦讖:大月氏 출신)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나타난 승려이며, 또한 한역불전(漢譯佛典)을 지은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다만 이 두 사람은 불교경전(佛敎經典)을 역사적 발전의 단계를 좇아서 체계적으로 번역하였던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은 그들 모국의 경전을 대승(大乘)·소승(小乘) 분별 없이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실정이었지만, 이 출발은 그 이후의 중국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불교 신자에게 제일 문제가 된 것은 어떻게 일반 속인과 다른 종교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소위 계율(戒律)의 문제였다. 예컨대 출가 입단(入團)의 의식이 확립되지 않으면 어느 때까지고 중국인 자신은 정식 승려(僧侶)가 되지 못한다. 한인(漢人) 출가(出家)가 공식으로 허락된 것은 4세기 초의 일로서 서역승 불도징(佛圖澄-232-348)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어서 중국 불교교단에 조직된 규율을 확립시킨 것은 그의 제자 도안(道安)이다.

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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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安 (312-385)

동진시대(東晋時代) 중국의 승(僧). 북주(北周)의 도안과 구별하여 미천(彌天)의 도안(道安)이라고도 부른다. 허베이성(河北省) 출신으로 12세에 출가하여 후베이성(湖北省)의 양양(襄陽)에서 15년간 불법강좌를 열었고, 후에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의 고문이 되어 장안(長安)의 오중사(五重寺)에 살았다. 그의 공적은 다음 넷으로 대별된다.

(1) 승니(僧尼)의 의식·규율을 확립하였다. 경전의 강의와 설법의 순서, 불(佛)에의 공양과 수업의 방법, 참회의 의식 등이 그것이다. (2) 그때까지의 중은 출신지나 스승의 이름을 성(姓)으로 하였으나 도안(道安)은 이것을 폐하고 불교는 석존(釋尊)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승은 모두 석(釋)을 성(姓)으로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자신도 축도안(竺道安)을 석도안(釋道安)이라고 고쳤다. (3) 그 때까지의 한역경전(漢譯經典)을 정리하여 목록을 만들었다. (4) 경전의 내용은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3단계로 성립되어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3분과경(三分科經)의 방법은 후세의 규범이 되었다.

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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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義

불교의 교리(敎理)를 노장사상(老莊思想) 등의 중국사상에 적당하게 맞춰서 이해하려고 하는 방법. 예컨대 불교의 반야(般若)의 '공(空)'은 노장(老莊)의 무(無)와 상통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은 태도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으로는 참다운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 도안은 불교는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격의불교(格義佛敎)를 배척하였다.

구마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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鳩摩羅什 (344-413)

약(略)하여 나습(羅什)이라고도 부른다. 인도 이름은 구마라지바(Kumaraj

va). 구자국(龜玆國:현재의 신장성 쿠차에 속함) 출신으로 불교사상가·대번역가이다. 7세에 출가하여 서역(西域), 카슈미르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大乘)을 설파하여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 401년 후 진왕(後秦王)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어 경전의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 역문은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般若)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도교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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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成立

기원전까지의 중국인,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은 인간의 능력을 넘은 그리스도교적인 유일신이라든가 내세라고 하는 것을 상정(想定)하지 않았다. 장생불사(長生不死)는 가장 원하는 바였지만 신(神)에 의탁하여 얻은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의 자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이 세상에, 또는 이 세상의 연장이기도 한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영원히 살면서 이 세상의 즐거움을 계속하여 음미해 나가고자 하는 현세 중심주의에 입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여 중국의 도교는 생겼다. 도교라고 하는 말은 넓게는 정치적 윤리적 규범을 설파하는 유교와 외래의 불교에 대하여, 그런 것 이외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이라든가 음양설이라든가 5행설 및 민간신앙 등의 중국 고래의 신앙 일반을 막연하게 가리키고, 좁게는 후한 이후의 도교교단(道敎敎團)으로 조직화 된 종파체(宗派體)나 그 교의를 의미한다. 어느 쪽이건 그의 중심은 장생불사를 원하는 신선사상에 있다. 그 이론형성으로서 노장 도가(老莊道家)의 사고방식이 응용되었고, 그 위에 불교를 흉내내어 체계화가 시도되고 있다.

그 내용은 복잡하여 이민족의 습속도 들어 있는 것 같고, 관리 지식계급도 많이 신자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교를 한 마디로 '중국 고유의 민족종교'라거나 '일반 민중의 미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설사 미신적인 요소는 많지만 그 신봉자가 실제로 많은 이상 학문으로서 전체적으로 중국인의 사상을 고찰할 경우에는 무시할 수 없다. 그 영향은 한국의 민간신앙이나 음양도참설 베트남의 도교(道敎)에도 미치고 있다. 또 그 연금술이나 의술이 중국 과학사에 남긴 영향도 잊어서는 안 된다. 도교의 시초는 후한 말의 장릉(張陵), 장형(張衡), 장노(張魯)의 소위 3장(三張)부자 3대가 쓰촨성(四川省)에서 설도한 천사도(天師道), 혹은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도 별칭되는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노자(老子)>를 독송(讀誦)하게 하고 호부(護符)로 질병을 치료한다고 하였다. 거의 동시에 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가 일어나 <태평경(太平經)>을 내세워서 한왕조의 타도를 도모하였는데 '황건적(黃巾賊)'이라고도 불려졌다. 후에 천사도(天師道)는 장시성(江西省)의 용호산(龍虎山)에 옮기고 불교를 모방하여 점차로 교단(敎團)의 조직, 교의(敎義), 종교 의례(宗敎儀禮)를 정비하게 되어 불교 교단과의 충돌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불(佛)·도(道)의 우열을 논하는 다툼이 심해져서 3세기부터 석가(釋迦)는 사실상 서역으로 갔던 노자(老子)가 인도에서 재탄생한 것이라든가, 그리하여 노자가 호인(胡人=인도인)을 교화한 것이라고 하는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포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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抱朴子

저자는 4세기 초기 진대(晋代)의 갈홍(葛洪)으로 그의 자는 치천(稚川)이며, 호는 포박자, 호는 또한 그의 서명(書名)이기도 하다.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되어 있다. 갈홍은 외편에서는 유가적 사상에 서서 세상을 비판하고 있으나, 내편에서는 강인한 의지와 학문과 좋은 스승이 있으면 누구이든 강인한 신선이 될 수 있다고 기술하여 선인(仙人)의 도술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원래 선인이 되는 방법에는 크게 나누어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특수한 체조와 호흡법(呼吸法)에 의한 것이요, 두 번째는 불로불사의 금단(金丹)을 먹기도 하고 곡물을 끊이든지 하는, 소위 식양생(食養生)의 방법에 의한 것이다. 이 책에 설명되고 있는 것은 거의가 후자의 술법이다. 선약(仙藥)이나 신선은 깊숙한 산에 있는 것이어서 산에 들어가는 특별한 보행방법과 일시(日時)·방각(方角)과 휴대해야 할 호부(護符)와 거울(鏡)이 필요하다. 그 선약에도 상·중·하의 분별이 있다. 갈홍은 단사(丹砂=水銀과 硫黃과의 화합물)를 재료로 하여 만드는 여러 종류의 금단(金丹)과, 그외의 선약(仙藥=玉·眞珠·芝草·雲母·淡·참깨·국화·송진·삽주 등)을 상세히 들고 있다. 다만 그것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선인(仙人)의 수업의 연월과 능력·신분 등의 상위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이다. 선인에는 '백일승천(百日昇天)'하여 천상에 사는 천선(天仙)과, 명산이나 때로는 일반 시중에 사는 지선(地仙)과, 한 번 죽어서 영혼만 빠져나오거나 시체와 함께 전부 관(棺)에서 빠져나와 대나무 지팡이나 의관만을 남겨 놓고 떠나 선인이 되는 시해선(尸解仙)이라고 하는 3계급이 있고, 또 옥녀(玉女)라고 하는 여자 선인도 있다. 이 3단계의 품격을 상정하는 것은 이미 선진시대로부터 있던 천선(天仙)의 사상이 발달한 것인데, 인간계를 떠난 세계라 하더라도 언제나 인간계의 반영이나 연장을 그 속에서 보는 중국적 미래관이 여기에도 나타나고 있다. 또 영혼과 육체가 서구적으로 분리(分離)되는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초월자가 없더라도 인간은 결국 자력으로 초월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인간에 대한 일종의 낙관주의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갈홍(葛洪)은 이 밖에 <신선전(神仙傳)>의 저자라고도 전해진다.

구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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寇謙之 (363-448)

북조 후위(北朝 後魏)의 도사(道士). 자는 보진(輔眞). 젊어서부터 장노(張魯)의 도술을 배우고, 선인 성공홍(成公興)을 시중들면서 숭산(嵩山)에서 수업하던 중에 태상로군(太上老君)이라고 하는 천신으로부터 천사(天師)의 지위가 수여되었다 한다. 5세기초에 국도(國都) 평성(平城)에 나와 태무제에게 도서(道書)를 봉건하여 제사(帝師)가 되었다. 천사도장(天師道場)을 건립시키고 사당을 제주(諸州)에 두고 연호를 변경하고 태무제를 태평진군(太平眞君)이라고 불러 도교를 국교화하였다. 그의 도교에는 불교의 영향이 크나, 445년 최호(崔浩)의 진언에 의하여 함께 불교 탄압을 단행하고, 시해선(尸解仙)으로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이후 도교 교단은 국가권력과 결부되어 조직적으로 크게 발전한다. 도교라고 하는 말은 태상로군(太上老君)이 그에게 수여했다고 하는 말 속에 처음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청담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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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談-流行

후한말의 부패정치를 공격하는 그룹이 사적 형태로 인물 비평을 행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청의(淸議)' 또는 '청담(淸談)'이라 불렀다. 이 청(淸)은 정치적, 윤리적 의미의 탁(濁)에 반대되는 뜻이 있었다. 3세기에 위(魏)·오(吳)·촉(蜀)이 분립하여 동란(動亂)의 말기에는 종래의 관리채용의 규칙이 무너졌다. 그와 함께 청의(淸議)의 유풍(遺風) 위에서 관리 후보자는 그 출신지에 있어서의 학문이나 품행이 유가적 기준으로 판정된다고 하는 새로운 제도가 생김으로써 인물 비평이 성행하게 되었다. 위진6조(魏晋六朝)만큼 개인이나 지방마다의 인물론이 많이 쓰여진 시대는 없을 것이다. 위진의 귀족사회에서는 학문적인 실력보다도 문벌이나 신분이 앞섰기 때문에 주관적 선고(選考)에 빠지는 폐해가 생겼다. 개인적 인간적 매력이 표준이 되었고, 때로는 용모나 행동의 우아함까지 화제가 되었다. 귀족사회는 그것을 즐기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비평을 주제로 하면서 기타 모든 사물을 '감각적으로 청(淸)하게'하는, 즉 요약컨대 세련된 방법으로 이야기하고 의론한다든지 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그런 것의 교묘함이 인정되어 출세한 예도 적지 않다. 그러한 말은 당시 청언(淸言)으로 불려졌으나 뒤에 청담(淸談)이라는 말로 불리게 되었다. 또는 청론(淸論)·청담(淸譚)이라고도 한다. 결국 담화하는 방법이나 그 내용이 청(淸)이라고 감각되는 것이 중요한 것으로서, 담론(談論)에 사용하는 화제는 어떤 것이라도 무방하여 3교 모든 것이 화제가 되었다. 이 점에서 "청담(淸談)이라는 것은 노장사상(老莊思想)을 대상으로 하는 담론인 것이다"고 하는 종래의 정의는 사실(史實)에 참조하거나 또 논리학적 정의의 방법으로도 잘못되어 있다. 노장 도가(老莊道家)의 문장과 사상이 즐겨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노장사상에는 물욕이 끼지 않고 산뜻하게 기분에 드는 표현, 특히 간결한 용어와 그에 알맞은 제재(題材)가 많았기 때문이다. 후에는 불교도의 의론이나 설계(說戒)의 방법도 가미되어 더욱 유행하였다. 그러나 6조말(六朝末)에 실력에 기본하는 보다 객관적인 관리 선발방법이 시행됨과 동시에 귀족사회가 무너짐에 따라 청담의 유행도 사라졌다. 이 청담(淸談)은 3국 중 위(魏)의 하안(何晏:字는 平叔, 190-249)과 왕필(王弼:字는 輔嗣, 226-249)과의 토론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유(儒)·도(道)에 통달해 있었다. 하안이 "성인(聖人)에게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없다"고 한 데 대하여, 왕필(王弼)은 "성인은 감정 면에서는 상인(常人)과 다름이 없고 상인보다 우월한 점은 정신에 있다"고 반론(反論)을 제기함으로써 그들의 토론에서 이른바 청담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론은 청담을 노장(老莊)으로 보는 후세의 해석 때문이며, 하안은 <논어집해(論語集解)>의 편집자요, 왕필은 <주역주(周易註)>(唐代의 <五經正義>에 들어간다)와 <노자주(老子註)>의 저자로서 다 같이 후세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생긴 전설일 것이다. 또 예로부터 이 청담(淸談)을 즐긴 그룹으로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유명하다. 죽림칠현이란 위(魏)에서 서진(西晋)에 걸쳐 북방에 살던 완적(阮籍), 왕융(王戎), 산도(山濤), 향수(向秀), 혜강,

유령(劉伶), 완함(阮咸)의 7인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들이 한 그룹을 만들어서 반세속적인 생활을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가적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서 사실(史實)에 반대되는 전설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당시의 사상계를 생각하는 자료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 이 전설의 역사적 의미는 7인이 그러한 자유분방한 그룹으로서 생각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사조의 일면과 중국인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된다는 데 있다.

경학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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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學-統一

정현(鄭玄), 왕숙(王肅)이 양한(兩漢)을 통해 논쟁거리였던 경학의 금문(今文)·고문(古文)의 학파를 통합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따라서 유교 경전은 텍스트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훈고학상으로는 도리어 갖가지 해석을 병존시켰으니, 불교의 논의(論議=敎義討論)의 형식에서 힌트를 얻어 한대의 주석을 재해석하는 의소(義疏)학을 유행케 하였다. 왕필과 같이 노장사상(老莊思想=玄學)에 의한 경전 해석도 행해지기 시작했다. 남북조(南北朝)에 접어들면서 북학(北學)은 예법제도를 중심으로 후한(後漢)의 주석을 존중하였다. 반면에 남학(南學)은 위진(魏晋) 이래의 현학(玄學)과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해석을 하는 데 있어서도 그의 부연(敷衍)이 시도되었으나 그 의의를 통달하기에 힘써 간략한 형식을 좋아하는 경향이 짙었다. 경학(經學)은 현학(玄學)의 침투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북학의 학자가 그 한대적(漢代的) 순수성을 보전하여 왔다고 하겠다. 북위의 서준명(徐遵明), 그의 제자 웅안생(熊安生)을 거쳐서 수(隋)의 유작, 유현(劉炫) 등이 당시의 대표적 인물이다. 작과 현(炫)은 다 함께 북인이었지만 남북 양학(南北兩學)의 절충을 도모하였고, 특히 현은 남학계(南學系)로 옮겨 해석 형식도 간략하게 통합하는데 성공했다. 후에 <5경정의(五經正義)>에 의해 남북의 여러 해석이 종합되었을 때 그 대부분은 유현의 말을 채택한 것이라고 이른다. 수당(隋唐) 통일국가의 출현에 의해 경학의 집성이 행해지는 형세였으나 정현의 주해를 주장하는 북학보다는 남학의 스마트한 주해가 보다 많이 사용된 것은 당시의 지식인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외에 북학에서는 요무안(姚文安), 진도정(秦道靜), 심중(沈重), 남학(南學)에서는 뇌차종(雷次宗), 최영은(崔靈恩), 황간(皇侃), 심문아(沈文阿) 등의 이름을 들 수 있다.

안씨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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顔氏家訓

중국 6조시대(六朝時代)의 학자인 안지추(顔之推, 531-590 전후)의 저서 20편이다. 남조(南朝)의 귀족출신으로 양(梁)에서 출생한 안지추(顔之推)는 문인학자로서 이름이 높았으나, 양의 멸망 후 북조의 북제(北齊)·북주(北周)에서 벼슬하였고, 수(隋)의 초기에 소명되어 학사(學士)가 되었다가 얼마 후 병사하였다. 그의 박식은 풍부하고 엄숙한 체험 속에서 확증된 것으로서 가족 단위의 생활과 도덕을 존중하는 온건한 사회사상을 보전하였다. 이 저서는 그가 자손에게 준 훈계(訓戒)이다. 그 내용은 당시의 학술·교양·사상·문학·사회생활부터 언어·잡예(雜藝)까지의 사상(事象)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그 속에는 일관된 개인생활을 위한 생활방법이 기술되고 있다. 그는 타락한 남조 귀족사회를 비판하였고 극단적으로 습속(習俗)을 달리는 현학(玄學:六朝 道家思想)을 배격하였으며, 유교의 상식적인 합리주의를 사랑하여 전변(轉變)하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한 실용 가능(實用可能)의 학문, 이른바 '세상을 건지고 풍속을 이루는'학문을 권장하였다. 이 책의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당시의 사회 묘사는 정사(正史) 이외에 거의 없는 6조(六朝)의 사료(史料)를 보충하는 귀중한 문헌이기도 하다.

5경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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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經正義

당(唐)의 공영달(孔穎達) 등이 칙명으로 제작하여 653년에 천하에 반포한 공인의 경서해석(經書解釋)의 집성(集成)이다. 당의 이세민(李世民=太宗)은 통일국가의 사업으로서 국자감(國子監:국립대학)을 열어서 학술을 일으켰는데 최성시에는 학생 8천을 수용하였다. 신라(新羅)의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도 여기에 입학하였다. 경학(經學:유교교학)을 중심으로 법률·수학 등을 설치하였으나 6조 이래의 남북의 경서 해석의 분파가 많아짐으로써 번잡하게 되자 이것을 통일하려는 계획하에 태종은 안사고(顔師古, 581-645)에게 경문(經文)의 정본(定本)을 정하게 하여 공영달(孔穎達) 등 다수의 학자를 동원하여 <5경의훈(五經義訓)>을 제작케 하였다. 이것이 뒤에 <정의(正義=標準解釋)>라고 개제(改題)되어 공인되었다. 편찬에 참여한 학자의 경향도 있어 결과적으로 남학(南學)의 주석을 많이 채용하였다. <주역(周易)>은 왕필주(王弼註), <상서(尙書)>는 위공안국전(僞孔安國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두예(杜預)의 집해(集解)를 사용하고, <모시(詩經)>, <예기(禮記)>는 남북 공통의 정현(鄭玄)의 주석을 사용하였다.

고종(高宗) 때에는 가공언(賈公彦)이 칙명(勅命)으로 <주례(周禮)>, <의례(儀禮)>의 소(疏=鄭玄의 註의 再註釋)를 저술하여, 합쳐서 <7경정의(七經正義)>라고도 불리었다. 이 완성은 직접 관리시험(明經科)을 통하여 학생의 학문에 제한을 가하였고 또 당 일대(唐一代)는 시문(詩文)으로 시험하는 진사과(進士科)의 합격자를 존중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경학(經學)의 발전은 춘추학(春秋學)의 약간을 제외하고서는 정체되었다. 다만 한당 훈고학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이 책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당 시대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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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時代-思想

유교에서는 태종(太宗) 때 <5경정의(五經正義)>가 만들어졌으나 그것은 과거의 주석류(註釋類)를 집대성한 것뿐이고 사상적으로는 새로운 발전이 없었다. 그러나 도교나 불교는 제실(帝室)로부터의 보호를 받아 왕성하게 되었다. 밀교(密敎)도 그 시절에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불교의 흥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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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興隆

6조말(六朝末)에서 당(唐)에 이르는 기간에는 교판(敎判=敎相判釋)의 상이로 인하여 고승 석학이 배출되었기에, 각 종파가 성립 대성하여 중국 불교의 극성기를 맞게 되었다. 교판 중에서 가장 교묘하고 대표로 여겨지는 것이 6조말의 지의(538-597, 謚는 天台大師, 智者大師)가 세운 '5시8교(五時八敎)'의 설이다. 5시8교(五時八敎)의 설(說)은 석가 일대의 설법의 순서를 다섯 시기로 나누어 생각하였다. 석가는 화엄(華嚴)·아함(阿含)·유마(維摩)·반야(般若)·법화(法華)·열반(涅槃)의 순서로 차례차례 불전(佛典)을 설명해 갔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사람들의 성질과 능력에 따라 교리 내용을 네 종류로 구분하였다. 지의 이전에는 강남(江南)에서 <열반경(涅槃經)>, 북조(北朝)에서 <화엄경>이 중시되고 있었는데 그는 <법화경(法華經)>이야말로 불타의 가르침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이 교판(敎判)은 일체의 차별 있는 현상 그대로의 자태가 진실한 것이요, 현실의 차별을 초월한 곳에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을 달관할 실천방법도 논하고 있는데 이 대승불교의 현실긍정적 이론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를 개조로 하는 천태종(天台宗)이 한국과 일본에 전해지기도 했다. 그 밖에 길장 (549-623, 嘉祥大師)은 용수(龍樹)의 <중론(中論)>, <12문론(十二門論)>과 제파(提婆)의 <백론(百論)>을 바탕으로 3종론(三論宗)을 조직 대성하였다. 법장(613-712, 賢首大師)은 <화엄경>을 최고로 하여 5교10종(五敎十宗)의 교판(敎判)을 세워 화엄종(華嚴宗)의 사실상의 개조가 되었다. 도선(道宣)(596-667, 南山律師)은 사분율(四分律)을 연구하여 율종(律宗)의 대성자가 되었으나, 사학자(史學者)로서도 저명하였다.

그의 저서는 불교사가(佛敎史家)의 필독의 문헌이다. 정토교(淨土敎)는 이미 동진(東晉)의 혜원(慧遠, 334-416)에서 시작되고 있었으나 담란(曇鸞)으로부터 도작(道綽)을 거쳐 고제(高弟)인 선도(善導:613-681, 終南大師)에 이르러 독립 대성되었다. 그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의 구칭 염불(口稱念佛)로 정토왕생(淨土往生)한다고 설파하여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았다. 그 배경에는 당시 왕성하였던 말법사상(末法思想)이 있다.

교상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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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相判釋

불교경전(佛敎經典)은 인도에서의 이론적 발전이나 성립의 역사적 순서와는 관계없이 일시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그들 여러 가지의 경전이 석가(釋迦)에 의하여 어떤 순서로 어떤 가치체계로 설명되었는가를 연구하여 불교 교의를 전체적으로 모순됨이 없이 해석하려고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 해석의 방법을 <교상판석(敎相判釋)> 또는 <교판(敎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해석하는 사람이 신봉하는 경전이나 교의의 입장에 의하여 불교 전체의 해석이 상이한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인도와 달리 중국에 종파가 성립되는 중요한 원인으로 되었다. 근래에는 원전비판에 의하여 그 모든 경전들이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해졌지만 현재의 각 불교 종파는 그들 나름의 해석을 받아들인 그대로의 상태에 있다.

말법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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末法思想

불교에서는 불타(佛陀)의 열반 후에 그 가르침은 3단계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제1단계는 <정법(正法)>의 시대로서 석가의 가르침이 정당하게 계승되어 사람들이 구제되는 시기이다. 제2단계는 정법(正法)과 유사한 <상법(像法)>의 시대이다. 그 후부터는 석가 당시 가르침인 도(道)를 수행, 깨닫는 자는 없게 되고 교법이 잔존할 뿐이다. 이것이 최후의 말법(末法) 시기인 것이다. 각 시기의 연수(年數)에는 이설(異說)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석가의 입멸(入滅)을 기원전 949년이라 하여 말법의 제1년은 남조(南朝) 양(梁)의 승성 원년(承聖元年=552)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그것은 당시 침체된 불교계 사정은 물론 파불사건(破佛事件) 등과 맞물려 말법의 도래가 가까워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전처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가르침과 수행(修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말법에 어울리는 교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그것이 정토교(淨土敎)가 왕성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이 타력(他力)을 강조하는 사상은 자력(自力)을 내세우는 선종(禪宗)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선종(禪宗)은 양대(梁代) 때 보리달마(菩提達摩)에 의하여 처음으로 전해졌다고 하거니와, 당대의 신수(神秀, 605 ?-706), 혜능(慧能)(638-718, 六朝大師)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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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裝 (600/602-664)

당대 초기의 대번역가이자 승(僧)으로 성은 진(陳)이며, 이름은 위(緯)이다. 삼장법사의 호명(呼名)으로 알려졌다. 법상종(法相宗)·구사종(俱舍宗)의 개조(開祖)이다. 불전과 계율과의 의문점을 원전에 대하여 연구하려고 인도에 들어가 17년 후인 645년에 귀국하였다. 가지고 돌아온 불전의 한문 번역에 종사한 것이 만 19년이다. 그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며 그때까지의 역법(譯法)이나 역어(譯語)에 커다란 개혁을 가져왔다.

종래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 부르고, 현장(玄裝) 이후의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른다. 또 그는 대여행(大旅行)의 견문기를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통합 정리하여 태종(太宗)에게 진상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인도나 중앙아시아를 알기 위한 제1급의 사료였다.

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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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敎

6조말에서부터 당(唐)에 걸쳐 불교가 극성기로 향하는 데 따라 밀교(密敎)도 본격적인 발전을 해나갔다. 밀교에서는 불타(佛陀)를 보는 견해가 문제가 되었다. 깨달음을 얻어 성도(成道)한 역사상의 석가는 실상은 우주의 영원불멸의 최고 진리(最高眞理=法)의 가현에 불과하고, 석가의 본신은 법 그 자체인 것, 즉 법신(法身)인 것이다. 그러나 이 법신의 심원한 교설은 일반사람의 능력으로는 깨우칠 수가 없다. 그래서 불타는 가까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모습으로, 때로는 기괴한 모양을 취하여 중생의 구제에 나선다.

또 그 불타의 깊은 깨달음의 경지는 상징적 주술이나 주문(呪文=眞言·陀羅尼)이나 복잡한 절차의 의례에 의해 경험적 인식을 초월하여 신비적·직관적으로 체험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밀교적(密敎的) 경전은 벌써 동진(東晋)의 시초부터 조금씩 번역되고 있었으나, 널리 아시아에 밀교가 유행한 당대 현종(玄宗)의 시기에 이른바 '개원의 3대사(開元 三大士)'에 의하여 본격적인 밀교가 성립되었다. 첫째로 선무외(善無畏, 637-735)로서 제자인 일행(一行)을 조수로 하여 밀교의 근본 경전인 <대일경(大日經)>을 한역(漢譯)하였다. 둘째로 금강지(金剛智, 671-741)는 선무외처럼 인도의 나란타 사원의 학승이었는데, 입조후(入朝後)에는 <약출염송경(略出念誦經)> 등 8부 1권을 번역하였다. 셋째로 불공(不空, 705-774)은 금강지의 제자로서 <금강정경(金剛頂經>을 번역하였다. 이것은 <대일경(大日經)>과 함께 대일여래(大日如來) 중심의 순수 밀교를 대표하는 경전이다. 불공의 문하에는 혜과(惠果, 746-805)가 있었다. 당대(唐代)에는 밀교 외에 서방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서 현교(고대 이란 민족의 종교로서 善·惡 三元敎인 조로아스터교, 拜火敎라고도 한다) 및 3세기 초에 페르시아인 마니에 의하여 시작된 마니교(摩尼敎), 그리스도교의 이단의 일파로 지목되고 있는 경교(景敎, 네스토리우스파)와 회교(이슬람교) 등 서방 세계의 여러 종교가 들어왔다. 그들의 사원도 여러 곳에 세워졌지만 회창(會昌) 5년(845)에 무종(武宗)이 도교 이외의 여러 종교를 탄압한 때를 경계로 하여 차츰 쇠퇴하여 갔다.

도교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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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敎-流行

노자의 성(姓)이 당(唐)의 황제와 같은 이(李)씨인 데서 당대에는 도교를 당실(唐室)의 종교로 삼아 다른 것과 구별하여 크게 비호하게 되었다. 도가와 도교(道敎)와는 일단 다르지만 도교와 노자와의 관계는 오랜 것이다. 4세기에는 노자가 신격화되어 노군(老君)으로 되고, 6세기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되었다. 당에 들어와서는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를 시초로 하여 많은 황제호(皇帝號)를 받아 공자와 불타 양쪽의 스승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도교의 경전(經典)은 정리되어 불경의 대장경(大藏經)을 본받아 도장(道藏)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742년에는 당시 노자의 고제(高弟)라고 되어 있던 장자, 문자(文字), 열자, 경상자(庚桑子)들은 제각기 남화(南華), 통현(通玄), 충허(沖虛), 동허(洞虛)라는 진인(眞人)의 칙호(勅號)를 얻었고, 저서도 승격하여 '진경(眞經)'으로 불렸다. 현종(玄宗)에 이어 무종(武宗)은 광신적으로 도교를 믿어 폐불(廢佛)을 행하였다. 한편 도·불(道佛) 2교간의 이론투쟁은 부혁(傅奕)이 폐불(廢佛)을 상서(上書)한 이래로 격렬함은 더하였고, 항쟁은 유교까지 끌어들여서 3교의 담론(談論)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논쟁을 통하여 사상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경우도 있었음은 주의할 만하다.

당대의 음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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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代-陰陽說

한대에 발달한 음양5행설(陰陽五行說)은 인도의 <숙요경(宿曜經)>이나 밀교와 결부하여 더욱더 복잡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미 수대(隋代)에 5행설의 집대성이라고도 할 만한 소길(蕭吉)의 <5행대의(五行大義)>가 있었지만, 또 천체론(天體論)이나 여러 가지의 점(占)치는 방법을 수록한 구담실달(瞿曇悉達)의 <개원점경(開院占經)>도 나왔다. 세성(歲星=木星)·형혹성(熒惑星=火星)·진성(鎭星=土星)·태백성(太白星=金星)·신성(辰星=水星)의 5성(五星)과 4계(四季)에 대하여 제사지내는 성제(星祭)나 풍백(風伯)·우사(雨師)·오룡사(五龍祠)·조신에 대한 신앙도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는 주금박사(呪禁博士)가 있어 도불이교(道佛二敎)의 비법을 관장하였다.

송학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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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學-先驅者

당(唐) 초의 <5경정의(五經正義)>에 의해 한·6조(漢·六朝)의 경서해석이 통합되면서 이 방면의 사상활동은 급속하게 쇠퇴하였다. 중당(中唐) 이래로 사회 변동이 현저해지고 균전제(均田制)의 파탄과 양세법(兩稅法)의 공포(780)에 의해 한층 계급분화가 심해졌다. 그리고 관리등용제도가 과거제(科擧制)로 정착하는 것과 병행하여 종래의 체제교학(體制敎學)이나 불교신앙(佛敎信仰), 노장사상(老莊思想)의 권위를 비판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道學)은 유교의 전통사상에 의하여 불교나 도가의 사상을 배제하는 것인데, 그 근원은 중당(中唐)에 출현한 한유(韓愈), 이고의 인성론(人性論)이나 정통론(正統論=道統思想)에서 시작된다. 실제로는 단순한 고대 유가사상의 부활이 아니고, 선학(禪學)이나 도가(道家)의 주관유심주의(主觀唯心主義)의 깨달음의 방법을 깊이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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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愈 (768-824)

중국 당대 중기의 정치가·사상가·문장가, 자는 퇴지(退之). 시(諡)는 한문공(韓文公). 하내군(河內郡) 남양(南陽) 출신이다. 798년 진사과에 합격, 36세(803) 때에 감찰어사(監察御使)가 되어 경조윤(京兆尹=長安市長) 이실(李實)의 폭정을 공격하였다가 도리어 연주(連州) 양산현(陽山縣)의 현령(縣令)으로 좌천되었다. 817년 50세 때 지방 군벌인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하여 그 공적으로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819년 천자인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궁중으로 맞아들이려고 하였을 때 반불주의자인 그는 <불골(佛骨)을 논하는 표(表)>를 올려 그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것이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겨우 사형만을 모면한 채 조주(潮州)자사(刺史)로 좌천당했다. 이듬해 헌종(憲宗)이 죽자 국자제주(國子祭酒=大學學長)로 소환되어 점차 관계에 세력을 넓혀 관리의 임면을 관장하는 이부시랑(吏部侍郞)에까지 올랐다.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사상가로서 그는 당시 불교 승려의 특권에 반대하고 봉건적인 일상윤리·사회질서를 중시하였다. 주요 논문 <5원(五原)> 등에 나타난 비교적 조잡한 그의 논리는 후의 송의 정주학(程朱學)의 평가와 일치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귀신을 믿는 중세적인 정명사상(正命思想)으로 군신부자의 신분질서와 동중서류(董仲舒流)의 3등급의 인성론(人性論)을 말한 것인데 그 자신은 맹자(孟子)의 유심주의를 계승하는 것으로 의식하였다.

유종원(柳宗元), 유우석(劉禹錫) 등 동시대의 무신론과 대립한 속류(俗流)의 합리주의적 사상이었다고 하겠다. 다만 송대의 신유학(新儒學)에 필수인 엄숙주의풍의 정통론은 그의 도통사상에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문장가로서의 최대 업적은 산문 문체의 개혁이다. 6조(六朝) 이래의 대구(對句)와 음조(音調)를 중하게 여기는 병려체(騈儷體)에 대하여 고문(古文:漢代 이전의 자유스러운 형식을 표본으로 하는 擬古文)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특히 그의 사상 표명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복고주의(復古主義)와 결부하여 추진되었다. 뒤에 당송8가(唐宋八家)의 필두로서 고문의 대가가 되었는데, 그 이성적이고 감정을 억제하는 경향은 송대 이후의 지식인이 추종하는 바가 되었던 것 같다. 저작에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41권이 있다.

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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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道 한유(韓愈)의 주요 논문. 원(原)이라 함은 물(物)의 본원이며 또 그의 근원을 찾는 일인데 본원의 도(道)의 탐구를 논술한 것이다. 한유(韓愈)는 한대부터 현재까지 도가 및 불교의 이단사상에 의해 유가의 정치원리나 사회도덕인 도(道)가 어지러워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본원의 도에 의하여 인의(仁義)를 내용으로 하는 유교적인 사회·정치사상을 명확하게 하려고 하였다.그 논지(論旨)는 도덕(道德)·인의(仁義)의 정의(定義)에서 시작하여, 도가의 무정부적인 원시생활의 동경이라든가, 불교의 출세간적(出世間的)인 태도를 다같이 봉건사회의 군주신민(君主臣民)이나 부자(父子)의 신분과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인의를 기조로 하는 유가적인 국가질서와 문화주의를 전한(前漢) 초에 성립된 <예기(禮記)> <대학(大學)>편에 의거하여 서술하였고, 요순(堯舜)으로부터 공자, 맹자에 이르는 도통사상(道統思想)으로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송대의 신유학에 영향을 주었다. 한유(韓愈)는 이밖에 <원성(原性)>, <원귀(原鬼)>, <원훼(原毁)>의, 이른바 <5원(五原)>의 논문을 지어 각각 석로(釋老=佛敎·道敎)를 배척하고, 봉건전제의 국가권력을 옹호하였으나 그 논리가 치밀하지는 못했다. 또 중국의 논문에 <원(原)…>의 형식이 유행한 것도 한유의 <5원(五原)>에서 비롯됐다.

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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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대 중기의 사상가. 자는 습지(習之), 시(諡)는 문공(文公)이다. 이당(李唐)의 왕실의 시조인 이고(李暠)의 후예라고 알려졌으나 낮은 신분의 출신이다. 한유(韓愈)에게 고문(古文)의 문체를 배우고, 그의 혈연을 아내로 삼았으며 사상적으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798년(韓愈와 같은 해) 관리시험인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많은 벼슬을 거쳐 산남동도(山南東道) 절도사(節度使)에까지 이르렀다가 죽었다. 사상적으로는 유학에 통하였으나 국가 공인의 <5경정의(五經正義)> 주석에 만족하지 않고, 불교나 노장(老莊)·선학(禪學) 등의 사상도 받아들여 마침내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인성론(人性論) <복성서(復性書)>를 저술하였다. 한편 한유(韓愈)와 공저의 <논어필해(論語筆解)>를 남기고 있고(末完), <맹자(孟子)>와 <예기(禮記)>, <대학(大學)>, <중용(中庸)> 이나 <역전(易傳)>을 들어 순자(荀子) 양웅(楊雄)의 유물론적 경향을 배격하였다. 한당 훈고학의 경전해석이 현성(賢聖)의 마음을 탐구하는 데 우원(迂遠)한 방법이라고 하였으며, 공자, 자사(子思), 맹자에 연결되는 정통론(正統論)을 만들었다. 이것 등은 송의 주희(朱憙)를 시초로 하는 신유학(新儒學)에 의해 <4서(四書)>와 <역전(易傳)>이 주요 경전(經典)이 됨과 동시에 도통사상이 중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산문은 한유(韓愈)의 달의(達意)한 면을 계승하여 평이한 글로 우수한 전장(傳狀=傳記나 行狀)의 글을 남겼다. 저작은 <이문공집(李文公集)> 18권에 담겨 있다.

복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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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性書 이고(李 )의 주요 논문 3편. 인간은 성(性)과 정(情)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데, 선천적으로 평등한 성(性)이 외계의 자극으로 변화하는 것은 각자의 7정(七情=喜·怒·哀·樂·愛·惡·欲)에 의한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정욕의 망사(妄邪)로 인하여 본성(本性)이 어지러워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성인(聖人)의 마음을 깨닫기 위하여 성(性)의 동태(動態)인 정욕을 끊고, 청정(淸淨)한 본성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이 인성론(人性論)은 불교의 진여(眞如)에 가깝고, 또 정욕을 사려(思慮)와 구별하여 그것과 다른 것으로 간주한 점은 천태종(天台宗)의 지관(止觀)법과 근사하다. 또 정(情)·성(性)을 모두 망각하여 적연부동(寂然不動)의 초월적인 절대경지에 달하는 수양방법은 선학(禪學)의 영향이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경지는 '지성(至誠)'이라고 호칭되어 <중용(中庸)>의 사상을 부연시킨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 마디로 유교 교의(敎義)로 불교신앙의 권위에 대신하게 하려 하였다. 이 주관유심주의(主觀唯心主義)의 직각(直覺)에 의한 돈오(頓悟)의 사상은 한당 훈고학의 방법을 의심하였고, 성현에 직접 통하는 길은 공자, 자사, 맹자에서 <중용(中庸)>에 이르는 계열을 추종해야 하는 것이라 하는 도통사상을 낳았다. 송대(宋代) 신유학의 기본적인 윤곽은 대략 여기에 준비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것은 후일의 정치(精緻)한 성리학(性理學)의 선구가 되었다. 이 논문은 한유의 <원성(原性)>과 동일한 기본사상을 갖지만 그 사고는 훨씬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