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인도의 사상/인도의 정치·경제사상

카우틸랴의 국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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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utilya-國家主義

<카우틸랴 실리론(實利論)>은 정치와 외교와 군사의 지침서로서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것은 3세기경에 바라문의 학자에 의하여 편찬된 것인 듯하지만, 그 중에는 카우틸랴(전 4세기 후반∼전 3세기) 자신의 주장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

카우틸랴는 마우리아 왕조의 창시자인 찬드라굽타(재위 전316 ?∼전297 ?)를 도운 재상이다. 이 책은 국왕즉국가(國王卽國家)라는 주장을 기본으로 저작된 것이다. 그가 최고 목적으로 생각한 국가라는 것은 국왕이나 혹은 국왕의 이익에만 한정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영토를 확장하며 어떻게 하면 국왕의 이익을 증대하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다. "인민에게 기초를 두지 않은 국왕은 쉽게 멸망한다"고 하지만, 인민은 다수 수단으로서의 의의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서민 천명의 손실보다도 지도자 한 사람의 손실이 더 큰 손실이다. 그는 왕이 소유하는 비책(秘策)을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국왕은 정치의 법식을 좇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적인 정치에 의하여 왕국과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는 일이 된다. 동맹 체결을 해야 할 가능성이 있을 때는 타국과 동맹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외교에 관한 많은 일을 교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방(友邦)을 우리 편으로 삼기 위해서는 역시 무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군대의 양성과 성곽을 쌓는 일에 힘을 경주해야 할 것을 역설하고, 또 전승(戰勝)을 거두기 위하여 준수해야 할 많은 규칙을 서술하여 선전(宣戰)·진주(進駐)·정전(停戰)에 대한 여러 가지 교시(敎示)를 주고 있다. 그러나 무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국내 정치기구의 개혁과 경제력의 충실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참으로 실행력이 있는 인물을 대신으로 등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관리가 중심이 되어서 일체의 사업을 수행시키도록 하였다. 카우틸랴의 인생관은 공리주의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실리(實利)야말로 가장 주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법도 애욕(愛欲)도 실리에 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화(財貨)는 일체의 사업을 달성시킨다"고 했다. 그의 학문론에 의하면 학문으로서는 철학과 베다학과 실업학과 정치학의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철학을 독립의 학문으로서 인정한 것은 그가 최초이다. 그렇지만 학문의 학문된 보람은 이들 네 가지 종류에 의하여 법과 실리를 아는 데에 있다고 한다.

아소카왕의 정치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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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oka王-政治理想

아소카왕(재위 전274 ?∼전232 ?)은 부조(父祖) 이래의 방침을 좇아서 집권적 통일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한 다음, 다시 동남 인도의 칼링가 지방을 정복하여 그 영토를 확장하였다. 특히 경제·교통에 관한 모든 정책의 실시에 노력하여 비상한 열의로서 수행하였다. 그는 자기의 정치이상을 민중에게 철저히 알리기 위하여 영내(領內) 각지에 많은 돌기둥을 세우는 한편, 국경 지방에는 절벽의 석면(石面)을 연마(硏磨)하여 각각 조칙(詔勅)의 문장을 새겨 넣어 거기에 자기의 결의를 표명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마음으로부터 왕에게 공명(共鳴)하여 협력할 것을 원했다. 그는 전쟁에 의하여 많은 무죄한 민중이나 짐승과 육축을 살상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자기의 열렬한 종교적 신념을 토로함으로써 정법(正法)의 이상을 높이 앙양하였다. 그는 전세계의 인간이 준수해야 할 보편적인 이법(理法)이 있음을 확신하여 이것을 법(法 다르마)이라고 불렀다.

이 법은 국적·민족·종교의 여하를 묻지 않고 세계 속의 어떠한 인간도, 어떠한 시대에도 해와 달이 존재하는 한 지켜야 할 영원의 이법(理法)이다. 정치라는 것은 세인(世人)의 이익·안락을 도모하는 것인데, 그 이익 안락은 현세(現世)에 속하는 것과, 피안(彼岸)의 세계에 속하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 있다. 국왕이라 하더라도 일체 중생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정치는 <채무(債務)의 반환(返還)> 즉 보은 행위(報恩行爲)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에 귀의(歸依)하고 있었으나 종래 일반 인도인이 신봉하고 있던 제사·주법(呪法)은 의의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 불교에 귀의할 것을 권장하였으며 부질없는 살생과 수축의 거세(去勢)를 금지하였다. 빈한한 사람들을 위하여 시혜(施惠)의 집을 설립하였다. 인간을 위한 병원을 설립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가축과 짐승을 위한 병원까지도 세우고 곳곳에 약초(藥草)를 재배시켰다. 변경의 이민족(異民族)을 보호하였으며, 죄수들에 대해서도 자주 은사(恩赦)를 베풀었다. 또 불교의 선포(宣布)에 노력하였으며 사탑(寺塔)의 건립과 보수에 힘을 경주하고 부처와 관계가 있는 토지에는 기념탑이나 석주(石柱) 등을 세우고 스스로 순례를 행하였다. 또 전설에 의하면 왕자 마힌다가 실론에 파견되었다고 하며, 그후 실론은 전통적·보수적 불교의 일대 중심지가 되었다. 아소카는 이와 같이 열렬한 불교신자였지만 결코 다른 여러 종교를 배척하는 일이 없었다. 자이나교·바라문교·아지비카교 등의 모든 종교마저도 똑 같이 보호하고 원조하면서 모든 종교의 제휴를 권장하였다. 일반 국민에 대해서는 사회인으로서의 정당한 도덕적 실천을 권하고, 관리에 대해서는 국민의 이익과 안락을 도모하고, 법에 따라 재판과 처벌을 행하여 공평해야 할 것을 훈시하였으며 관용과 형벌의 경이(輕易)를 존중하였다. 멀리 소아시아·그리스·이집트에도 사절(使節)을 파견하여 법에 의한 정치 이상을 전하게 하였다.

법전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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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典-思想

기원 후의 사회 변동에 적응하고 이전의 씨족사회에 있어서의 질서유지의 기준으로 되어 있던 <율법경(律法經)>(달마 수트라)이 새로 확대 개편됨으로써 <마누 법전(法典)> 등의 대법전이 제작되었다. 굽타왕조 시대 및 그 전후에는 여러 가지 법전이 제작되었으며, 또 정치적 논서(論書)(예컨대 <카우틸랴 實利論>)가 완성되었다. 이런 것이 실질적으로는 그 이후 개정(改訂)되는 일이 없이 적어도 이슬람 교도의 침입까지는 일종의 표준이 되어 있었다. 당시의 국가에 있어서는 주권자인 국왕의 권력은 엄청나게 거대한 것이었다. 당시의 모든 법전에는, 국왕은 두려운 것, 두려워해야 할 것으로 설명되어 국왕의 존엄이 강조되고 있다. 이와 같이 국왕의 전제 행동에 권위를 붙여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전제 군주의 신성시(神聖視)·신비화(神秘化)를 행할 필요가 있었다. 국왕 신성시의 사상은 굽타왕조 시대 및 그 이후에 있어서 절정에 달하였다. 당시 성립한 여러 법전(<나라다> <부리하스파티>등)은 국왕 신성시의 이유로서 국왕은 세계를 수호한다고 하는 사명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혹은 왕이 과거에 종교적인 고행(苦行)을 닦았기 때문에 그 공덕에 의하여 국민의 주인으로 탄생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견해는 불교나 자이나교에서도 점차로 용인되었다.

불교의 사회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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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社會思想

불교는 인간사회의 계급적 구별에 반대하여 인간은 모두 평등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혈통·문벌·재산을 과시하여서는 안 된다. 바라문도 덕행이 높아야만 비로소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한다. 모든 인간의 평등은 현실 사회에 있어서는 용이하게 실현되기 어려우나 불교 교단의 출가수행자들 사이에서는 철저히 현실화되고 있었다. 출가하기 이전의 세속적인 계급적 신분 구별은 전부 소멸하여 모두 한결같이 석자(釋子)가 된다. 교단에 있어서의 석차(席次)는 출가 이래의 수행 연수(法臘)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었다(臘次). 그래서 원시불교의 교단에는 상하 모든 계급에서 참가하고 있었다. 국가 문제에 관해서는 국왕은 원래 국민이 선출한 것이라고, 당시의 불교도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국왕은 국민에 대하여 지극히 강포하여 힘으로 민중을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불교도는 국왕의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선 출가자의 사이에서만 완전한 이상적 사회(승가)를 만들어 그 정신적 감화를 토대로 하여 일반사회의 개혁을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가를 전연 무시하여 사회이상을 실현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의 문제로서는 끝끝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국가의 지도를 문제로 삼게 되었다. 고타마는 밧지족(族)의 공화제정치를 상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교 교단의 운영방식은 공화정치를 모방한 것이었다. 국가는 법을 실행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 있어서는 제왕(帝王)은 살아 있는 신이라고 하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일단 승인하였으나, 그것을 비유적 의미로 해석하여 국왕의 신성(神性)을 국왕으로서의 의무의 실행에서 구하였고 국왕의 출신 혈통(血統) 등도 무시해야 할것이라 가르쳤다. 국왕이라 하여도 한 개의 인간이며, 죽음의 운명을 면치 못하며 지옥(地獄)이 문책하는 고통을 받는다고 했다. 국가도 영원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다. 진실한 지혜 <般若波羅密>의 진리를 국가의 활동 중에 구현함으로써 비로소 국가가 번영한다. 국왕은 10선(善)을 인간 속에서 실현되도록 정치를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생명이 있는 모든 생물의 이익·안락을 도모하는 일이다. 정치는 자비심에 의하여 공평하게 실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체적인 방책으로서는 우선 다른 나라들에 대하여 평화적·우호적 태도를 보존하여 국토의 안전을 도모하여 산업의 진흥을 기약하고, 특히 조세(租稅)의 경감과 빈민과 고독한 사람들에 대한 시여(施與)를 강조하였다. 그런가 하면 후생시설에 대한 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국왕은 치안을 유지하여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나, 형벌은 악인을 교육하여서 선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형이나 신체를 상하게 하는 형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밖에 빈한한 사람이 범한 죄에 대해서는 형벌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인도 불교문화의 우리나라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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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度佛敎文化-傳來우리나라의 인도와의 관계는 선사시대(신석기·청동기)의 바위조각에서 어떤 관련성이 인정될 수도 있지만, 본격적으로 문화관계를 맺은 것은 불교문화의 전래 때부터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해진 공식적인 연대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이며 이를 전후하여 삼국 모두 불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 당시의 인도문화는 굽타문화 초기단계 내지 그 이전 단계인 쿠샨조의 문화로 간주되고 있다. 고구려에는 처음 순도(順道)가 들어오고 그 다음 아도(阿道)가 들어왔다. 이들은 간단한 문맥으로 보아 인도 내지 서역승려일 가능성이 짙다. 순도의 경우 중국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다가 고구려로 온 것으로 표현하고 있고 아도는 일반적으로 인도 승려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에는 인도의 쿠샨문화가 직접적으로 전해졌거나 또는 중국을 거쳐 간접적으로 전해졌거나간에 어떤 형태로든 4세기에는 전해졌다가고 볼 수 있다.

백제에는 384년(침류왕 2)에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불교를 전파하였는데 마라난타는 인도승 아니면 서역승이 분명하다. 그가 인도승이었다면 인도문화를 직접적으로 백제에 권하였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 뒤 겸익(謙益)이라는 백제승려가 바다를 통하여 인도에 다녀오면서 불경을 가져와 72권을 역경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우리나라 승려가 인도에 직접 순례가서 인도문화를 전래해왔던 것으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승려가 인도에 간 최초의 예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도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을 모시고 왔으므로 인도문화를 직접 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와는 달리 불교가 공식적으로 공인된 것은 훨씬 뒷날인 527년(법흥왕 14)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약 1세기 앞서 5세기초에 불교가 신라에 처음 전래되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아도 또는 묵호자(墨胡子) 등으로 불리던 인도승 또는 서역승이 전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인의 특징인 묵호자로 이해하였다는 것을 분명히 인도의 승려가 신라에 전도하였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전래 초기에는 인도승려들이 압도적으로 우리나라에 전도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불교문화 특히 쿠샨조말 내지 굽타문화가 직접적으로 전해진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후 인도의 불교문화는 계속 전래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요동성에 아육왕(阿育王)탑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인도의 아소카(Asoka)왕이 직접 만든 탑으로 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