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동양의 사상/동양의 근대 교육사상/일본의 근대화와 교육

일본의 근대화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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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近代化-敎育

막부(幕府) 말(末)에서부터 1868년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이르기까지 일본에는 이미 많은 학교가 설치되어 전국적으로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 학교는 각각 설립이념을 달리하는 두 가지 유형의 학교로 나뉜다. 하나는 근대 무가사회(武家社會)의 지도층이었던 무가(武家)가 개설한 지배계층을 위한 번교(藩校)와, 또 다른 하나는 재력을 가진 서민(庶民)들의 자녀를 위하여 주로 독·서·산(讀書算)을 가르치는 사소옥(寺小屋)이었다. 이러한 두 유형의 학교가 제도적으로 하나로 통일된 것은 1872년에 공포된 학제에서 비롯된다. 이 학제는 근대적 국가를 교육을 통해서 실현코자 한 통일적국민교육제도의 발족을 의미하였다. 이 학제의 근본이념은 다음과 같은 조문이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① 입신(立身)과 치산(治産)을 위해서는 '수신개지(修身開智)하여 재예(才藝)를 장(長)케' 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하여 학문을 전수하는 곳이 학교이다. ② 이러한 학문은 '공리허담(空理虛談)'을 일삼고 실천에 보탬이 되지 못했던 봉건적 교학(敎學)이 아니요, 일상의 언어와 서·산(書算)을 비롯하여 관리·농·상·공 기타 모든 직업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어야 한다. ③ 이러한 학문은 입신에 필요한 '재본(財本)'이기 때문에 신분계급을 묻지 않고 모든 인민이 접해야 하며, 따라서 '읍(邑)에 불학(不學)의 호(戶)가 없고, 가(家)에 불학의 사람이 없도록' 기(期)해야 한다. ④ 학교교육은 각인의 입신치산(立身治産)에 필요하므로 그 비용은 관에 의존하지 않고 인민 스스로가 부담해야 한다.

이상이 학제 공포의 취지인데, ①과 ②는 후쿠자와(福澤諭吉)의 <학문의 권장>에 나타난 공리주의 내지 실학주의 교육관으로, 입신치산을 꾀하는 개인주의적 인간상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것으로 바로 이 '학제'가 근대 서구사회의 개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고 단정하면 잘못이다. 이 학제 자체는 실은 부국강병을 위하여 인민의 재예(才藝)를 개발·동원하자는 데 당초의 목적이 있었고, 또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서구의 체제를 모방하자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이런 '위로부터의' 혁명은 결과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불과 100년에 아시아의 후진국에서 세계의 대국(大國)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큰 원인은 교육체제의 정비를 비롯한 위로부터의 여러 개혁을 관민(官民) 모두가 합심하여 협력·수행한 데 있다.

이런 개혁을 통해 일본은 한 걸음씩 근대화해 갔는데,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반봉건적 잔재와 국수주의적(國粹主義的) 성향과, 동양에 이미 진출해 있던 서구세력의 견제·조절 등의 과정에서 야기되는 숱한 과제를 풀어야만 했다. 그들은 이런 과제를 국가 지상주의적 시점에서 해결해 나갔다. 그 과정은 메이지시대의 계몽국가기, 다이쇼 시대의 자유내실기(自由內實期), 쇼와(昭和) 전기(1945년까지)의 국수 침략기(國粹侵略期), 쇼와 후기의 경제 발전기로 특정지을 수 있다.

학제반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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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制頒布

1872년에 단행된 이 학제의 반포는 가장 중요한 시책 중의 하나였다. 이 학제의 기본이념은 부국강병으로 외국세력과 비견·대항할 수 있는 힘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국가는 식산흥업(殖産興業) 및 국민개병(國民皆兵)정책을 수행해야 했고, 이런 시대적 과제를 풀기 위하여 근대적 교육제도를 확립해야만 했었다.

일본 근세의 중요한 교육기관인 '번학교(瀋學校)'와 '사소옥(寺小屋)'은 무사와 서민과의 차별적 계급관념 및 신분질서(身分秩序)에 의한 이원적인 것이며, 따라서 복선적(複線的)인 학교였다. 물론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이미 이런 두 유형의 학교가 차츰 접근을 하고는 있었지만, 이것이 교육의 기회균등의 원칙에 의하여 공교육(公敎育)의 개념으로 제도적인 통일로서 국민교육제도로 일원적·단선적으로 정비되려면 비약적 개혁을 필요로 했는데, 이것이 곧 새 학제반포였다. 이리하여 사·농·공·상의 신분계층이 없어지고 봉건적 교육에서 근대적 교육에의 혁명적 전환이 일어났다.

이 학제의 교육이념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1872년에 발표된태정관(太政官)의 포고에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① 입신출세주 의와 공리주의, ② 후쿠자와의 <학문의 권장>의 정신에 흐르고 있는 지식주의, ③ 사민평등(四民平等), 교육의 기회균등, ④ 학비 개인주의 등이다. 이 이념 위에 교육을 권장함으로써 '읍에 불학(不學)의 호(戶)가 없고, 가(家)에 불학의 사람이 없기'를 기(期)하고, 이런 교육을 통해 개발된 힘을 부국강병이란 지상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흡수하자는 것이었다.

이 '학제'는 전부 109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내용을 간추려 보면 ① 전국을 8개 대학구(大學區)로 나누고, 각 대학구에는 32개 중학구(中學區)를 두고, 이 중학구에는 각각 210개의 소학구(小學區)를 둔다. 따라서 인구 600명에 대하여 1소학교를 갖게 된다. ② 학비조달·지출관계는, 교육을 받음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은 인민 자신들이니 학비는 인민 스스로가 부담해야 한다. 따라서 소·중학교를 경영하는 데 필요한 경비는 민비의존(民費依存) 원칙으로 한다. ③ 이런 소·중학교 행제(行制)를 감독하는 관리를 현(縣)에 두고 감독·지도한다는 것 등이다.

학제반포에서의 교육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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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制頒布-敎育內容

제1단계는 번역교과서의 시대로, 미·영·불의 영향이 강한 개화·계몽적 성격이 지배적이며, 구미의 선진문화를 섭취하는 데 온힘을 다했다. 제2단계는 일본의 실정과는 먼 번역교과서에 반발하고, 그 반동으로 불교주의적인 윤리를 기축으로 한 교과서시대인데, 그 전형적인 예는 <소학수신서>(1883)의 서두에 나오는 '효는 덕의 근원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다. 제3단계는 검정교과서제도가 채택되고, 국가주의적 경향이 뚜렷하게 전면에 나타나고, '교육칙어'(1890)가 교과서의 대강을 결정하게 되어 내셔널리즘 육성이 교육의 모든 곳에 반영되었다. 제4단계는 제1기 국정교과서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시대로서, 1902년의 교과서사건을 계기로 하여 국정교과서제가 채택되어 국가주의적·동양도덕적 사상이 농후하게 담긴 국정교과서가 1904년부터 전국 소학교에 채택되었다.

제5단계는 제2기 국정교과서시대로서, 가족적 국가관이 교과서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고, 천황을 국가적 통일의 상징으로 정상에 세우는 제국주의적 국체가 정립·고취되었다. 이와 같이 메이지시대의 교육이념은 교과서 내용의 변천과정에서 보듯이 계몽개화시를 거쳐 내셔널리즘·제국주의의 교육으로 국수화해 간다. 이렇게 서양을 본따, 교육을 통해서 양성된 국력은 국가의 기본적 자세가 그릇되었기 때문에 '동양 속의 서양'이 되어, 조선의 국권 강탈에서 전형적으로 보듯이 동양이면서도 동양을 침략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하였다.

다이쇼시대의 자유화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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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正時代-自由化-敎育

교육을 통해서 배양된 국력을 동원하여 청일 및 러일전쟁이란 국운을 건 싸움에 이기고 또 한국을 병합하고, 제1전에도 이긴 일본은 자신을 갖고 내실을 기하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이리하여 소위 '다이쇼(大正)데모크라시'시대가 온다. 정당내각이 출현하며(1918), 도시계획법이 공포되며(1919(, 최초의 노동절 행사인 메이데이 행렬이 우에노(上野)공원을 수놓으며(1920), 건강보호법(1922)·은급법(恩給法;1923)이 공포되며, 미터법이 실시된(1924), 그야말로 자유 내실의 시대가 온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는 독일에서 발생한 합과교수(合科敎授)의 이념이 도입되어 이상주의적 자유와 이상주의적 창조가 주창되는가 하면, 이와 동시에 미국에서 발생한 듀이의 직업교육론의 이념이 도입되어 경험적·감각적 자유와 창조, 그리고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자발적 사회참여의 이상을 노래하였다. 메이지시대의 교육이 획일적인 일제교육이며 수동적 교육이었다면, 다이쇼시대교육은 개성적 교육이며 활동적 교육이었다. 오바라(小原國芳)의 전인교육론이 화려하게 등장하여 교육에 있어서이 문예부흥을 주도한 시기도 바로 이 무렵이다.

제1차대전 후의 신흥 중산계급의 발흥은 고등교육의 기회확대를 촉진시켰다. 나카하시(中橋) 문상(文相)은 고등교육기관 확장 6개년계획을 수립하여 29개의 전문학교, 17개의 고등학교를 창립·증설시켰다.

또 여자중등교육의 확장·충실에도 힘써, 1932년에 257개교였던 고등학교가 5년후인 1937년에는 529개교로 증가되어 거의 배가 되었고, 특히 주목할 것은 1935년 남·여 중학교의 수가 거의 비슷하였던 것이 그 후에는 도리어 여학교가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와 경제적 호경기 속에서 여자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도쿄여자대학이 창설되어, 1901년에 창설된 사람의 니혼여자대학, 그리고 도쿄·나라(奈良)의 여자고등사범과 더불어 여자고등교육의 발전에 공헌하고 또한 여자의 사회적 신분향상 및 여자교육의 진흥 자체에도 큰 이바지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한계가 있었다. 국가는 이런 자유에 제동을 걸기 위하여 임시교육회의(1917-1919)를 열고, "우리 제국은 현재에는 병화(兵火)의 참독(慘毒)을 입지 않고 있지만, 아직 전후 문제처리로 다난(多難)한 즉, 교육의 마당에서 한층 국체의 정화(精華)를 선양(宣揚)하고, 자강(自彊)의 방책을 확립하며, 더욱 호국의 정신에 투철한 충량한 신민(臣民)을 육성해야 할 것이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도덕교육 면에서는 황실 중심의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입각한 애국적 정신의 배양에 힘써야 한다면서 메이지시대의 국가중심사상을 재천명했고, 여자교육면에 있어서는 '여자고등교육은 민족번영에 해가 있다'면서, 임신이 가장 성한 21세-22세의 여성의 혼기를 여자대학 관계로 늦추는 일은 '민족의 번식'을 저해한 일이라고 회의를 품는 학자도 나타났다.

이처럼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수명은 짧았고, 한계성 또한 있었는데, 그 원인은 이것이 중산층·지식층만의 자유와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새 사상은 결국 보수적인 지도자들이 그리는 이상적 국민상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고, 더구나 천황체제를 파괴하는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국가의 지도층에 불어 넣게 되어 결국은 치안유지법(1925)의 공포를 보게 되었다. 새 질서, 새 가치의 창출과정에 따른 일시적 혼란을 일본은 언제나 이렇게 전체주의적 방식으로밖에 극복하지 못하였다.

쇼와 전기의 독재화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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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前期-獨裁化-敎育

제1차대전 후의 호경기는 불과 5·6년밖에 유지되지 못했고, 쇼와(昭和) 연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심한 경제적 불황을 극복해야만 했다. 1929년 월가(街)의 주식 폭락에서 비롯한 세계경제공황은 일본까지도 그 와중(渦中)에 밀어 넣었다. 소작쟁의도 1928년의 2,053건에서 1933년의 4,000건으로 급증하였고, 실업자는 30만을 넘어 노동쟁의가 잇달았으며, 좌익사상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하였다. 또한 유한(有閑)·유식(遊食)의 도(徒)는 더욱 사치·향락생활에 탐닉하게 되었고, 일반민중의 생활불안은 찰나적인 향락을 좇는 데카당스를 낳게 하였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국가로선 대내적으로는 독재 및 외국침략의 길이었다.

제2차대전 패전까지의 일본을 쇼와 전기라 부른다면 이 쇼와 전기의 교육은 독재와 침략에의 시녀적 봉사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계에서의 파시즘의 진행은 1935년의 교학쇄신평의회, 1937년의 교육심의회의 답신으로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이 답신에 의거해서 제4기 국정교과서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신민의 도' 및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을 가다듬게 하는 것으로 온통 채워졌으며, 종래의 국가주의적 교육에 철학적 기초를 다듬어 '신국(神國)'의 개념을 불어넣고, 나라를 위해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옛 무사·군인들의 이야기로 메워진 것이었다.

소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 제1과는 군국 일본 무사의 죽음의 상징인 '벚꽃' 노래가, 그리고 제2과는 군인들의 전쟁터에서의 '행군'이 수록되어 있었다. 교사에게 5개월 간의 단기복무 병역혜택이 주어졌는데 제대할 때, "너희들은 오늘 하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만기제대한다. 오늘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지만 군복을 벗어도 마음의 군복은 벗어서는 안 된다"는 훈시를 받았다. 교사 역시 하사관 대우의 군인 역할을 교육계에서 수행하였던 것이다.

교육심의회는 또한 소학교의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게 했고, 그 교육목적을 '환국의 도(道)를 따라 초등보통교육을 실시하고, 국민의 기초적 연성(練成)을 수행'토록 바꾸게 했다. 이러한 군국독재화 교육에 반대하여 관(官)과 상사(上司)의 눈을 속이면서 자유교육·평화교육·향토교육·생활교육을 실시코자 하는 교육운동도 일부 전개되었으나 조직적인 것이 되지 못했으며, 그 힘도 약했기 때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군국일본은 중일전쟁·미일전쟁을 일으키며 멸망의 길을 자초하게 되었다.

쇼와 후기의 산업화와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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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後期-産業化-敎育

패전 후 30년 간의 교육은 5기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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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期

1945년에서 1946년까지로서 구교육체제를 불식한 신교육의 전주기(前奏期)이다. 전시 중의 군국주의·제국주의 교육을 불식하기 위하여 수신·지리·역사 교육을 폐지하고, 군국주의 앞잡이 노릇을 한 교원을 추방하고, 군국주의적 교재를 버리기는 했으나 아직 어떤 이념 정립이 되지 못하여 엉거주춤하면서 점령군이 초청한 미국 교육사절단의 권고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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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期

1947년에서 1949년까지의 신교육 건설기, 즉 6·3·3·4제의 발족기이다. 이 무렵의 일본 교육은 미국 교육사절단의 다음과 같은 권고의 선에서 실시된 것이다.

(1) 교육이념면에서는 중앙집권적 교육제도, 관료적 교육행정, 특권계급을 위한 학교조직, 획일적 주입교육 등을 시정하고,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을 바탕으로

민주주의 교육을 실시할 것.

(2) 국어교육면에서는 한자를 전폐하고, 음표식(音標式) 표현법을 채용하며, 로마자 서식(書式)을 가르칠 것.

(3) 교육행정면에서는 지방분권제를 채택하며, 교육행정을 일반행정에서 독립시킴으로써 각지방 자치체 수준에서 각각 교육위원회를 가질 것.

(4) 학제면에 있어서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단선형(單線型)의 6·3·3·4제를 채택하고, 의무교육 연한을 9년으로 연장하며, 남녀공학을 원칙으로 할 것.

(5) 교육방법면에 있어서는 지식 전달 중심의 획일적 교수법을 시정하고, 학생의 개성을 신장하며, 민주적 사회성을 배양할 것.

(6) 고등교육면에 있어서는 고등교육의 임무는 '자유로운 사상, 대담한 탐구, 민중을 위한 행동'에 있는 바, 고등교육기관에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또 일반국민에의 개방성을 보장할 것 등이다.

제2기는 이런 권고를 전적으로 받아들여 시행코자 할 단계였으나, 교사·교원·시설·교재의 부족과 '새교육'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이런 이념이 현장에까지 충분하게 퍼지지 못한 시기이다.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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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期

1950년에서 1952년까지의 교육에 있어서의 우선회(右旋回)의 시대이다. 한국 전쟁 전후를 경계로 하여 점령군의 정책 자체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이에 따라 방공적 교육정책과 애국심·도덕심 육성의 교육이 운위(云謂)되기 시작했다.

제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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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期

1953년에서 1965년까지의 교육 체제의 정비기이다. 새교육이념·방법·체제 중에서 일본에 맞는 것은 뿌리를 내리고, 그렇지 못한 것은 도태됨으로써 보수(保守) 및 혁신(革新)간의 조화가 잘 이루어진 때이며, 드물게 보는 안정의 시대였다. 그러나 일본의 비약적인 경제적 성장은 보수세력으로 하여금 '미국에서 얻어 온 것'에 대한 비판을 낳게 하였고, 일본에 가장 알맞은 새로운 것을 모색케 하고, 교육이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색케 하여 경제대국(經濟大國)으로서의 교육의 '산업화'를 모색케 하였다.

제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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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期

'기대되는 인간상'과 '후기 중등교육의 확충·정비에 대하여'라는 중앙교육심의회의 답신이 나온 1966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라 할 수 있다. 전통을 가꾸며, 동양적·일본적 가족관의 좋은 점을 지키고 즐기는 인간상이 기대되며, 또 고등학교를 유별화·다양화하여 현대산업화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교육을 효율화하며, 산업협동 이념도 많이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념은 그대로 중앙교육심의회의 또하나의 교육개혁안인 "금후에 있어서의 학교교육의 종합적인 확충·정비를 위한 기본적 시책에 대하여"(1971)라는 답신에 그대로 계승된다. 이런 답신에 의해 제1교육개혁(1872)·제2교육개혁(1947)에 이어 제3교육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명분은 '탈공업사회(脫工業社會)'에 대비하기 위한 교육의 정비라 하지만 실은 교육의 '산업화'의 인상이 짙다.

일본 근대교육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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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近代敎育-展開

일본의 교육은 메이지유신 이래 국민대중을 위한 의무교육제도(국민학교 6개년)와 국가·산업지도자 양성을 위한 엘리트 코스의 교육기관(제국대학과 관립고등전문학교)이라는 복선형의 학교체계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는 신헌법의 공포, 교육기본법의 제정(1947)에 의해 민주주의의 교육이념에 의거한 '6·3제'의 학교제도가 발족하였고, 국민학교·중학교 9개년의 의무교육을 기초로 한 초등·중등·고등교육을 일관하는 단선형의 학교체계가 확립되었다. 그리고 지방교육위원회의 설치, 사회과 교육이나 특별교육활동(홈룸·클럽·학생회 등)을 중시하는 등, 교육의 민주화가 추진되었다. 오늘날은 고등학교 진학자가 전국 평균 94%에 이르고, 대학 진학자도 여자를 포함해서 증가하여 동일 연령 청년층의 약 37%가 대학(단대)생이라는 단계에 있다. 한편 국민의 교육 요구의 확대에 부응하여, 산업계와 문교행정의 입장에서 능력주의에 입각한 '후기 중등교육의 다양화' '고등교육제도의 개혁'이 발표되었고, 또 국민교육의 이념으로서 '일본의 전통'이 강조되었으며 전후 신교육의 전환이 시도되었다.

교육방법의 현대화, 목적별 대학의 설치 등을 포함하는 <금후 학교교육의 종합적 확충정비를 위한 기본적 시책에 대해서>라는 교육개혁구상이 발표되었다. 교육의 민주화는 국민 사이에 새롭게 교육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PTA(사친회)·민간교육연구단체·교원조합 등의 조직이 발달하였으며, '국민의 교육권인가? 국가의 교육권인가?'에 관한 논의도 관심을 끌었다. 일본의 교육은 오늘날 평생교육의 시대에 들어섰고 사회교육도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이미 사회교육법(1949)·도서관법·박물관법에 의해 공민관·도서관·박물관·청년의 집 등의 시설, 사회교육주사(主事)·사서(司書)·학예원(學藝員)·공민관주사 등의 전문직원의 확충정비가 국가 또는 지방공공단체의 책임으로 추진되고, 청년학급·부인학급·성인학급·가정교육학급 등이 보급되었다. 최근에는 통신교육, 각종 학교, 전수학교, 기업내 교육이나 문화 센터도 발전하였으며, 방송대학이 82년에 발족하였다. 또 지역주민과 시민의 공해·소비문제·부인문제의 학습활동과 대학공개강좌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