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기술·통신/한국의 과학기술/현대 이전의 과학기술/삼국시대의 과학기술
삼국시대의 과학기술
편집三國時代-科學技術
중국 대륙과 인접하고 있던 고구려와,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백제, 반도의 동쪽에 치우쳐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 이들 삼국의 과학기술은 그들이 처한 지리적 위치에서 비롯되는 정치적·문화적 영향을 받아 발전하였다. 따라서 삼국의 과학기술은 일찍이 중국의 한대문화(漢代文化)를 받아들여 한국적인 것으로 개량하고 변형하여 발전하였다. 또한 번영한 삼국의 과학기술은 일본에 전래되어 천문학, 토목건축, 금속공예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의 과학기술을 지도하게 되었다.
고구려, 백제에서 발전한 토목건축기술은 현존하는 신라의 석굴암(石窟庵)에서 완성의 정점에 도달하였고, 기원전 49년에서 기원후 908년에 이르는 약 1,000년 간의 천체관측기록은 고대과학사상 가장 훌륭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 삼국인들은 회전축을 이용한 각종 동력기계를 만들어 쓸 줄 알았고, 한국산(産) 인삼과 우황(牛黃)은 약재(藥材)로서 당시에 벌써 중국과 일본에서 알려져 있었다.
삼국시대의 천문학
편집三國時代-天文學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는 천상(天象)을 국가와 왕자(王者)의 안위(安危)를 내다보기 위한 점성적(占星的)인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일·월식(日·月蝕)의 예언은 곧 국가적 권위를 백성들에게 과시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하늘의 현상에 대한 민감성은 천문학을 발전시키는 주요인이 되었다. 기원전 108년 한사군(漢四郡) 설치 이후 중국 한대문화(漢代文化)의 유입에 따라 삼국에는 중국의 우주관인 개천설(蓋天說)과 혼천설(渾天說)이 들어와서 4·5세기경에는 삼국의 천문학 속에 토착화되었다. 그것은 먼저 고구려, 다음에는 백제와 신라에서 그 영향이 발견된다. 고구려의 여러 고분(古墳)에 그려진 일월성신도(日月星辰圖)와 그 구조의 특징에서, 특히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에서 제1차적 개천설, 즉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적 상징을 찾을 수 있다.
첨성대
편집瞻星臺
경주의 반월성(半月城)의 동북쪽에는 병 모양의 구조를 가진 석축건조물이 서 있는데, 그것이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이다. 신라 선덕여왕 16년(647)에 건립된 높이 9.108m의 이 천문대는 밑지름이 4.93m이고 윗지름이 2.85m이며 대석(臺石)으로부터 높이 4.16m되는 곳에 정남(正南)을 향하여 1변의 길이 약 1m의 정방형의 창문이 있다. 이 천문대는 그 구조가 상징하는 바 중국의 전통적 논천설(論天說)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의거하여 축조되었으리라고 해석되고 있으며, 27단으로 이루어진 것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임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건물이 세워져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었으리라는 생각과, 개방식 '돔'으로서의 관측대라는 견해도 나왔다. 그러나 천상(天象)의 이변(異變)이 있을 때 외에는 이러한 목적을 위한 상설 천문대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이 천문대는 어느 방향에서나 같은 모양을 가짐으로써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일구(日晷)를 측정하여 시간을 헤아릴 수 있으므로 4계절과 24절기를 확정할 수 있다. 정남(正南)으로 열린 창문은 사람이 사다리를 걸쳐 놓고 오르내리는 데도 쓰였지만, 춘·추분(春·秋分)에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이 창문을 통하여 태양광선이 바로 대(臺) 안의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출 수 있는 위치에 열려 있다. 그러므로 동·하지(冬·夏至)에는 창문 아래 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분점(分點)과 지점(至點) 측정의 보조역할도 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와 같이 절기의 정확한 측정에 의하여 역법(曆法)을 바로 잡기 위한 측경(測景)을 목적으로 설립된 규표(圭表), 즉 측경대로서 일구를 측정하는 천문대일 뿐 아니라, 신라 천문관측의 중심지로서의 의의도 컸다. 그것은 신라 천문관측에서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고, 동서남북 4방위의 표준이었다.
경주 첨성대는 직접적으로는 백제 천문대의 영향을 받아서 그와 비슷하게 축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축조 연대에는 많은 백제의 건축기술자들이 초빙되어 황룡사(皇龍寺) 9층탑 등이 건립된 시기이며, 그로부터 얼마 후인 675년에는 백제 천문학자들의 영향과 직접 지도 아래 일본에도 점성대(占星臺)가 설립되었다는 사실에서 볼 때 백제에는 이미 같은 음(音)으로 불리는 천문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제 천문대도 주비의 법(法)에 의하여 세워진 측경대였을 것이며, 그것이 신라에 영향을 주어 첨성대가 되었고 일본에 건너가서 점성대가 되었으며, 백제와 신라의 천문대는 당(唐)에 자극을 주어 723년에는 주공측경대(周公測景臺)의 재건(再建)을 보게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시대의 토목·건축기술
편집三國時代-土木·建築技術
석굴암
편집石窟庵
경북 월성군(月城郡)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다. 불국사(佛國寺)를 재흥(再興)한 김대성(金大成)이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신라 토목건축의 대표적인 걸작이며, 그 기묘한 구조와 축조기술의 비범함은 우리나라 고대 토목·건축기술의 정화라 하겠다. 기술사적 견지에서 볼 때 석굴암의 축조기술은 그 기하학적 축조계획과 그 속에 깃든 천문학적·불교적 사상의 표현으로 특징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특징은 고구려의 고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우리는 먼저 고구려 고분의 영조기술(營造技術)을 살펴봄으로써 그 상호관련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들 고분들엔 정방형(正方形)을 기조(基調)로 하는 구축법(構築法)이 많이 쓰이고 있으며, 하부(下部)는 넓고 상부는 차차 좁게 석재(石材)를 쌓아 올려 마치 피라미드식(Pyramid式)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상부를 좁혀서 천정을 구축하는 데는 정방형의 각 변의 2등분점을 연결하여 새로운 정방형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썼거나, 1변을 대략 3등분하여 8각형을 만들어 나가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 또 천정에 그려진 방위를 나타내는 그림(四神圖)이나 성수도(星宿圖) 등으로 고구려 고분들이 수학적·천문학적 영향을 실증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기하학적 기본 구성법은 백제의 건축지(建築址)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토목·건축물은 기본적 구성 조건으로 정방형을 사용하였다.
삼국시대의 이러한 정방형 기본 구성법은 후기부터 점차 원형(圓形)·구면(球面)·6각형 및 8각형의 도입으로 변형되어 갔는데, 그 하나는 첨성대의 건조법(建造法)이고, 대표적인 것은 통일신라에 들어서서 건조된 석굴암에서 찾을 수 있다. 원(圓)의 기본 구성법은 먼저 백제에서 시작되어 신라에 전승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그러한 실증적 유물을 백제 5층탑(扶餘 定林寺址 五層塔)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원(圓)과 정방형의 대각선으로 구성된 설계법에 따라 축조되었다. 이러한 건조기술이 석굴암에서 완성의 정점(頂点)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그것이 정방형·원형·구면·3각형·6각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성법을 자유로이 조화시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었다는 데 있다.
삼국시대의 불상 주조 기술
편집三國時代-佛像鑄造技術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사이의 금속공예 기술은 최근 원자력연구소에서 실시한 코발트(Co) 60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이용한 여러 가지 불상과 성덕왕신종(聖德王神鍾) 등의 투과촬영 결과로 더욱 확실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금속공예물의 내부구조와 주조방법을 쉽게 알 수 있게 되어, 그들의 주조기술의 높은 수준을 실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고구려 시대(6세기)에 주조된 연가(延嘉) 7년명(銘)의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국보 119호)은 두부(頭部) 중앙과 동체에 공간이 있으나, 불순물이나 기포(氣泡)와 같은 것이 없는 훌륭한 주물(鑄物)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주조된 소불상(小佛像)들은 대개 두부와 동체 내부에 내형(內型)을 지지하기 위한 구멍 몇 군데가 메워진 흔적이 있고 철정(鐵釘)이 들어 있다. 국립박물관 소장의 미륵보살반가상(彌勒菩薩半跏像, 국보 78호)은 신라시대(7-8세기)에 주조된 높이 80cm의 중형 불상인데, 그것은 두부와 동체를 따로 주조한 후에 연결 용접하는 훌륭한 기술을 썼다. 내부는 철심(鐵芯)과 못으로 내형(內型)을 지지하고 주조하였는데, 그 솜씨는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실증하는 것이었다. 주형(鑄型)으로는 대체로 섬세하고 부드러운 선을 잘 살리기 위한 것은 납형(蠟型)을 쓰는 일이 많았다. 6세기에 일본에 건너가 불상 주조기술을 지도한 백제의 주사(鑄師)에 의하여 전해져 계승된 납형은, 밀랍(蜜蠟)에 송진(松脂)을 녹여 섞은 것으로 원형(原型)을 만들어 주입구(注入口)나 납(蠟)의 유출구를 붙여 거기에 주형토(鑄型土)를 가는 분말〔細粉末〕에 점토즙(粘土汁)을 섞어 칠하고 볕에 말려서 불에 구운 후 납을 벗기면서 붉은색〔紅色〕으로 구워내고, 그리고 그 토형(土型)의 공동(空洞)에 용동(鎔銅)을 주입하여 주조하는 방법이었다.
신라의 주조기술
편집新羅-鑄鍾技術 8세기에 신라는 범종(梵鍾)을 주조하는 데 주력을 기울여 거작(巨作)이 몇 개 나타났다. 경덕왕(景德王) 13년(754)에는 이상택하전(里上宅下典)으로 있던 장인(匠人)에 의하여 황룡사(皇龍寺) 대종이 주조되었는데, 무게 497,581근(斤), 높이 1장(丈), 두께 9촌(寸)의 거대한 것이었다. 현존하는 봉덕사 대종(奉德寺大鍾, 聖德王神鍾, 높이 333cm, 직경 227cm)은 혜공왕(惠恭王) 6년(770)에 황동(黃銅) 120,000근 이상을 써서 주성(鑄成)한 것이며, 오대산(五臺山)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鍾)은 높이 167cm, 직경 91cm로 놋(鍮) 3,300량(兩)을 써서 성덕왕(聖德王) 24년(725)에 주조(鑄造)된 것으로, 이 두 대종은 신라 주종 기술을 대표하는 최대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특히 종신(鍾身)의 좌우에 양주(陽鑄)된 비천상(飛天像)은 금속공예의 극치라고 할 만큼 우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것은 이 종들이 예술적으로 극치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범종(梵鍾)의 생명인 소리의 아름답고 은은한 멋을 갖도록 한 화학적 조성(組成)의 일정함이다. 주조기술에 있어 합금(合金)과 용융의 기술은 고도에 달하여 거의 기포(氣泡)를 찾아볼 수 없는 일정한 성분조성을 가졌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