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교육/교육의 이론과 실제/교육의 의미와 목적/교육이란 무엇인가

광의의 교육과 협의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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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義-敎育-狹義-敎育

교육작용은 넓은 의미의 것과 좁은 의미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느 경우나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작용하여 인간이 지닌 소질(素質)과 가능성(可能性)을 가능한 한 전반적으로 발달시켜 보다더 완전한 인간으로, 자기의 전능력을 완전히 발휘케 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재의미나 가치있는 존재로서 일생을 보내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시민·사회인으로서 소속 사회집단, 즉 가정·지역사회·국가·국제사회 등에서 자기의 능력이나 흥미·개성에 적합한 직업인으로서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사회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 공헌하며, 또 서로간에 도우며 일치 협력하여 사회생활을 문화적이며 평화적으로 하는 데서 교육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이상의 교육작용의 두 가지 면은 서로 상호간을 예상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서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개인이 교육에 의해서 보다 완전해지고 자기의 능력을 충분히 발달시키고 또 갖추지 못한다면 그러한 개인들로서 구성된 사회는 문화적인 발전을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인간완성에 필요한 문화 내용을 받을 수도 없으며, 인간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자극이나 암시조차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보다 나은 개인 없이는 보다 나은 사회는 있을 수 없으며, 반대로 보다 나은 사회 없이는 보다 나은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이리하여 교육작용에는 개인형성과 사회형성의 두 측면이 있으며, 더구나 그런 것이 불가분(不可分)으로 결합되고 융합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교육작용에는 넓은 의미의 것과 좁은 의미의 것이 있음을 밝혔지만, 넓은 의미 것이란 크리크(Ernst Krieck)나 페테르센(Peter Petersen) 등이 강조한 것으로, 교육작용을 극히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육작용은 의식적·계획적·계속적으로 해야 되는 것으로 한정되지도 않거니와 또한 연령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 대하여 행하는 것에 한정될 수도 없으며,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사회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필연적으로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이것은 사회가 스스로를 유지하고 발전하기 위해서 자연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 곧 이것을 사회적 기능이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사회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른만이 어린이나 미성년자를 교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나 미성년자도 어른이나 성인을 교육할 수 있다.

매스커뮤니케이션의 교육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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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s communication-敎育作用

과학기술의 진보·발전으로 교통·통신기관이 세계 곳곳에 뻗쳐 있고, 인공위성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순식간에 세계 각곳에 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쇄술의 눈부신 발달로 고속윤전기(高速輪轉機)는 하룻밤에 수백만 부의 신문을 인쇄, 세계 구석구석에 전하고 있다.

또한 TV·라디오·잡지·서적의 보급은 현저하다. 이것이 현대의 이른바 매스컴 현상이다. 사진술이나 녹음·녹화장치(錄畵裝置)의 놀라운 침투력도 역시 그러하다. 이리하여 현대사회의 곳곳에 온갖 보도·선전·광고가 눈부시게 보급되고 사람들은 원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은 채 그때그때의 순간마다 온갖 문화적·사회적 감화와 영향·자극의 한가운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게서 받은 감화·영향·자극은 순식간에 매스컴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온다. 이 무한한 자극·반응의 반복, 이 무수한 순환, 이것이 곧 현대세계의 특색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현대의 사회정세나 특색을 살펴볼 때 크리크나 페테르센이 지적한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기능, 사회현상으로서의 교육작용의 강대함을 잠시도 잊을 수 없다. 이것을 망각, 경시 혹은 무시한다면 현대인은 곧 자기의 개인적 형성이나 사회적 형성도 불가능해지거나 불완전해진다.

그러한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작용이 교사와 아동·학생 등 개인 대 개인의 사이에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에 항상 이루어지며 이런 것이 서로, 교육작용의 주체가 되거나 객체가 된다는 것이 크리크나 페테르센이 주장하는 넓은 뜻의 교육학 입장이며, 이런 입장은 지금까지의 좁은 의미의 교육학에 비해 교육과학적 입장이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의 주장은 이미 보아 온 것처럼 종래의 교육학적인 입장에 결여되어 있던 중요한 교육작용의 일면을 부각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며, 또한 이것이 참으로 교육작용을 구체적이며 전체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공적이 됨을 높이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육작용의 주체와 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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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作用-主體-客體

지금까지 협의의 교육학은 교육작용을 다만 의식적·계획적·계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만 제한시키고 교육작용의 주체를 성숙한 개인이나 성인(成人)에게만 한정시켜 왔지만 구체적 현실에서의 교육작용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그 주체를 개인이나 성인에게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교육작용의 주·객체란 상호간에 교육을 주고받으면서 교육하는 것이지 어느 한편만이 꼭 주체일 수는 없다. 가르치는 자도 배우고, 배우는 자도 또한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교육작용은 그것을 의식적·계획적·계속적으로 실시할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르치려고 하는 아무런 의도나 계획이 없어도 다만 그 사람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물의 견해나 사고방식, 인생에 처하는 태도 등에 관해 깊은 감명을 받고, 우리 자신에게 커다란, 더구나 지울 수 없는 교육적 영향을 받는 경험을 갖는 경우가 있다.

때때로 의식적·계획적인 교육작용이 상대방에 의해 거부되고 반발을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나, 무의식적· 무계획적인 교육방법은 그러한 '일부러 하는 듯한 느낌'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럽게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특히 현대처럼 매스컴이 현저하게 발달하고 교통·통신기관이 구석구석까지 보급된 시대에 있어서는 무의식적·무계획적인 광의의 교육의 강대함을 무시하고서는 교육작용의 본질을 올바르게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광의의 교육작용은 일면 협의의 교육작용이 갖지 않은 다른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사회가 혼란되고 변화가 극심한 시대에 있어서는 그 작용에 그릇되고 불순한 나쁜 작용까지 포함되고 있으며 인간의 전체적·조화적인 형성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때로는 어느 일면에 치우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예컨대 상업선전·TV·영화 등 매스미디어가 전하는 살인장면이나 조숙한 에로를 유발시키는 것, 또는 광고나 선전에 의한 저열한 호기심이나 구매욕 선동, 청소년의 자주성이나 비판력을 빼앗는 것 등 많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협의의 교육 ― 그 예로는 학교가 부여하는 의식적·계획적·계속적인 교육이지만 ― 에 의해서 이러한 영향을 반성케 하고 그것을 시정, 비판토록 하는 훌륭한 내용·풍부한 가치가 있는 내용을 의식적 및 계속적으로 부여하여 광의의 교육의 불순성·편중을 제거하고 보충할 필요가 있게 된다.

개인의 소질과 환경, 그리고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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個人-素質-環境-敎育

교육작용의 본질을 올바르게 또한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질과 환경, 또는 유전과 환경과의 관계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온갖 가능성, 즉 장래에 이룩할 수 있는 여러 능력의 싹을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정신이나 신체는 교육이 장차 형성하게 될 여러 종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싹이나 바탕을 출생 순간에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일찍이 로크가 말했던 것과 같은, 즉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백지가 아니다.

로크의 백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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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ke-白紙說

로크는 인간의 심신을 백지로 비유하여 교육작용 및 환경의 영향은 말하자면 이 백지 위에 기록되고, 이로써 인간의 심신이 형성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사고방식에 의하면 출생시 '무(無)'였던 인간의 심신은 교육작용이나 환경의 영향에 따라 어떠한 '유(有)'로든 형성된다는 것이다. 로크의 이 사고방식은 영국식의 경험론, 즉 인간의 지식·기술·기타 모든 능력은 태어난 후에 주어진 외부의 영향·경험에 의하여 형성되므로 후천적인 영향·자극이 크면 그만큼 인간의 능력은 다면적이며 풍부하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교육작용의 힘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며, 교육작용의 만능성과 강대성을 낙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낙천관이 교육작용의 진상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다음 사실로 알 수 있다.

소질 편중의 교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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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質偏重-敎育觀

같은 그림을 보게 된다 해도 어떤 어린이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함에 비해 다른 어린이는 그것에 강한 흥미를 품어 황홀해진다는 점이다. 또한 이 그림에 아무런 흥미도 갖지 않았던 어린이가 음악의 아름다운 멜로디에는 곧 강한 흥미를 보여 그것에 몰두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인간의 마음은 로크가 말하듯이 백지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그림이나 음악에 대한 가능성·싹을 지닌다든가, 내지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싹이나 그럴 가능성이 있음은 명확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인간이 인간인 한, 음악이나 그림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소질이나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겠다. 다만 어떤 어린이는 이러한 소질이나 가능성이 극히 풍부하고 다른 어린이는 그것이 극도로 적다는 차이뿐이다.

즉 어린이의 소질 속에 외부의 자극이나 영향을 받아들일 바탕이나 가능성 없이는 아무리 뛰어난 교사, 아무리 교묘한 교육방법에 의해서도 아무런 힘도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형성되는 어떠한 힘도 모든 선천적인 가능성·소질로서의 내부로부터의힘과, 외부로부터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교육이나 환경의 작용 및 영향의 상호간의 융합·통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말했듯이 사람이 평생을 계속해서 돌을 상하(上下)로 운동시킨다 해도 한 순간이나마 그 운동을 중지하면 돌은 당장에 상하운동을 하지 않게 된다. 즉 돌에는 상하운동을 받아들일 소질이나 가능성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사람이 돼지에게 아무리 말이나 예의를 열심히 가르친다 해도 돼지는 말을 전혀 익히지 못할 것이며 예의도 전혀 알지 못한다. 돼지에게는 그것들에 대한 소질이나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어린이에게는 다소 늦고 빠른 차이는 있다 해도 말이나 예의를 교육시키면 그것들을 익히고 또한 그것을 더욱 풍부하게 하여 세련시키려 한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이나 펜을 잡는 법을 가르치면 역시 늦고 빠른 차가 있을망정 그것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교육작용이나 환경에 의한 인간형성이 가능한 것은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힘이나 그 작용을 인간 스스로가 내부에서 받아들이고 이에 반응하며 이를 통일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소질과 환경의 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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素質-環境-融合

소질과 가능성의 유발만으로 교육작용이 가능해지고 효과적일 수 있는 이유가 충분히 해명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것들에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일이 꼭 추가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가능성·소질·싹 내지는 유전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 선천적인 힘·경향성·본능·충동 등은 고정된 것, 부동한 것, 완성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은 부드럽고 굴신성(屈伸性)을 지니고 있으며 항상 유동적이며 변화하고 꾸준히 생성(生成)하는 것이며 완전화를 목표로 역동적(力動的)으로 계속 변형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교육작용의 본질을 분명히 하려고 할 때에 의외로 이 점이 망각되고 있음을 우리는 흔히 본다. 예컨대 신교육이라든가, 아동·학생의 자발성이나 자유를 강조하는 교육학자나 교육실천가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교육작용은 어린이의 내부에 잠재하는 기존의 힘을 끌어 내는 것이라든가, 교육작용은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조산작용(助産作用)이라고 하는 주장이 마치 교육작용을 설명하는 가장 훌륭하고 유일한 것인 줄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바로 이 점이다. 이러한 주장이나 사고방식은 앞서 말한 로크의 백지설(白紙說)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교육받는 측의 내면의 힘, 즉 피교육자 개개인의 개인적·주관적인 힘을 과신하고 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교육작용을 어린이의 내부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어린이의 내부의 소질과 가능성이 아무런 지도나 원조·정정(訂定)·개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대로가 이미 완전한 것, 완성된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교육작용은 다만 이미 되어 있는, 가치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으로는 교육작용의 형성적·개선적 의미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전락되고 만다. 더구나 환경이나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역사적인 문화나 이를 담당하고 지탱하는 사회나 역사의 의미와 역할도 역시 동시에 경시 또는 무시당하고 만다. 이것은 교육작용 본질의 해명에 있어서 근본적이며 치명적인 결함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은 내면성(內面性) 편중(偏重) 내지는 어린이의 소질치중의 교육작용에 대한 설명은 교사의 역할, 교육작용의 의미, 객관적·사회적·역사적 문화의 중요성 등을 경시하고 또한 무시하기 때문에 개인주의적·고립주의적 교육관이라고 비판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물론 로크 일파와 같이 후천적·외적인 환경이나 교육작용의 일방적인 강조도 잘못이기는 하나, 앞서 말한 내면적·개인적인 주장의 잘못도 숨길 수는 없다. 참된 교육작용의 본질은 안과 밖, 주관과 객관, 소질과 환경, 이러한 것의 상호 연결 내지는 보합(補合)에 의한 새로운 통일, 융합의 과정, 작용 안에 있다.

유전생물학적 교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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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傳生物學的敎育觀

현대 유전생물학의 최신 연구결과가 제시하는 바에 의하면, 오늘날에 와서 내부의 소질이나 유전이라고 하는 선천적·주관적인 것보다도 오히려 외부의 문화사회나 환경에 의한 후천적 영향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교육작용에 대한 본질을 해명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라고 하겠다. 이런 입장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어린이의 도덕성·언어능력·미의식(美意識)·종교관념 등 보다 높은 문화적 능력은 어린이가 태어나서 그 환경에서 살고 부단한 영향을 받는 후천적 문화환경의 형성력에 의한 정도가 크다고 한다. 물론 유전생물학에 입각한 교육관이지만 어린이의 선천적인 소질 및 유전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교육관은 소질이나 유전인자가 사회적·역사적인 객관적 문화의 후천적 영향에 의해서 내용을 풍부하게 하거나 편중이 제거되고 정정(訂正)·개조되는 과정을 중시하는 점에서 교육작용의 본질을 발견하고 있다.

이로써 교육작용은 지금까지 소질 편중이라고 하는 교육작용을 실제 이하로 과소평가하는 운명론적·비관주의적인 교육관으로부터 해방되어 교육에 의해 사람은 상당한 정도까지 발달하여 개선될 수 있다는 밝은 빛이 교육계에 비치게 된다. 교육작용은 그 힘을 무제한으로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견해로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없었던 용기와 격려를 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존재와 당위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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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在-當爲-統一

교육작용의 본질은 아동·학생이 현재 있는 것, 즉 그들이 현재 놓여 있는 상태나 현재 지니고 있는 능력·지식·기능·덕성(德性) 등을 장차 있어야만 할 것을 목표로 해서 개선하고 재구성하고 발전·향상시키는 작용이다. 왜냐하면 아동·학생 자신의 본성면에서 보면 처음부터 현재 있는 것에서부터 장차 있어야만 할 것으로 향해 꾸준히 전진운동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있어야만 할 것은 전술한 바 어떤 방법으로 또는 어떠한 정도에 있어서 그들의 소질 안에 가능성으로서 있는 것이라 하겠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어떠한 교육작용도 그것이 아무리 뛰어나고 또한 아무리 성실한 교사에 의해 실행된다 해도 아동·학생에게 작용을 미쳐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을 지녀야만 할 것으로 개조하거나 승화시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또한 이 가능성은 유연(柔軟)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환경이나 문화사회의 여러 가치있는 내용을 전달하고 학습시킴으로써 보다 낫고 가치있는 것으로 변화시키고 향상시킬 수가 있다. 여기에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동물의 소질 안에 있는 본능이나 충동은 유전으로서 주어진 고정적 부동(不動)한 것으로서, 그것에 어떤 도덕·예술이나 그 밖의 문화재(文化材)를 부여한다 해도 그것에 의해서 있어야만 할 것으로의 변화·생성은 조금도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이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해서는 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소질은 어디까지나 소질 내지 가능성에 불과하며 그것이 현실로 되기 위해서는 환경이나 문화사회의 문화재를 학습시키고 수용시킨다는 것이 필요하고, 더구나 이 학습이나 수용(受容)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문화재의 질의 정도와 문화재의 범위가 아동·학생의 소질의 질 정도나 수용범위와 알맞게 일치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일치·대응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는 반드시 문화재와 아동·학생 양자에 관해 그들의 질의 정도, 이해의 범위를 설정하고 양자가 무리없이 융합·통일할 수 있게 하는 작용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바로 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 없이는 객관적 문화재와 어린이의 소질과의 결합·통일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교육작용의 필요성을 볼 수 있으며, 이 교육작용에 의해서 어린이들이 지니고 있는 소질은 지녀야 할 이상(理想)의 것으로 향상·진보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양자는 어떠한 관계이며 어떠한 구조를 갖느냐 하는 점이다. 지녀야만 하는 것은 단순히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은 현재를 아무리 자세히 살핀다 해도 여기에서는 결코 그들이 지녀야만 할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녀야 할 것은 결국 어린이들의 그때마다의 어떤 것 안에 또는 지니고 있는 것에 따르지 않고서는 실현되지도 않으며 또한 실현될 장소도 없다. 즉 교육작용은 스스로 실현해야만 할 '있어야만 할 것'을 어린이들의 '있는 것' 가운데에서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어린이들에게 '있는 것' 가운데에는 이미 단순히 '있는 것'을 부정하여 '있어야만 할 것'으로 되려는 가능성이나 노력이 움트고 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교육과 사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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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도적 교육력의 의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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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意圖的敎育力-意圖化사회에 있어서의 무의도적 교육력은 본래 가정생활이나 직업활동·이웃생활, 그 밖에 사회의 여러 활동과 행사에 내재(內在)하는 영향력이나 강화력으로써 관계 대상을 자연스럽게 교도하는 힘이나 교화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생활 가운데서 문화재가 집적(集積)되고 문화가 고도화되며 사회생활이 복잡해짐에 따라 이런 종류의 교육력은 의도화 및 구체화될 필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의도화·구체화는 학교의 교육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교육 방식에 의한 다른 차원에서의 의도화·구체화, 나아가 계속화가 요청된다.

사회교육을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실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무의도적 교육력이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유의화(有意化)된 학원으로써 파악된다. 사회생활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필요한 것으로 여겨져온 어떤 종류의 학습이, 제각기의 생활영역에서 전승적(傳承的)으로 조직화되어 왔던 것과 관계가 있고 흔히 폐쇄적 양식의 것도 많이 볼 수 있으며 생활에 내재하는 사회유전(社會遺傳)의 유의적(有意的) 학습의 전개로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광의의 사회교육의 양상은 학교교육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를 근대적 학교교육의 발생이란 관점(觀點)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양식으로 기획되어 온 이러한 소박하면서도 생활에 밀착된 학습이나 훈련의 구조가 본래대로의 형태로는 효율성을 상실하거나 혹은 본래의 교도력을 상실케 되는 경우를 겪게 되어 의도적으로 전시민에게 개방하고 보급시키는 체계화된 학교교육 방식을 구상(構想)하게 되었다.

다만 이런 학교관(學校觀)은 학교 만능관(萬能觀)으로 될 우려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환언하면 학교라고 하는 교육기관은 무의도적 교육력을 근대적으로 의도화하고 구체화한 유일한 구조로 생각하기 쉬우며, 잘못하면 일생 동안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학습을 조직적으로 제공하는 교육적 기여를 하는 것이 학교교육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갖기 쉽다. 그러나 현대 문명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가 상승되고, 학교교육이 고도로 보급되며, 또 여러 과학의 발달로 부단한 기술혁신마저 있게 되어 생활의 기구(機構)나 양태(樣態)가 복잡해짐에 따라 학교교육 방식에 의한 학습의 의도화와 구체화에는 가능성과 또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하게 되었다.

여기서 학교교육과 더불어 그 한계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부터 사회에서의 학습의 조직화를 지향(指向)하는 새로운 의미에서의 사회교육의 필요성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현대 사회교육은 학교교육의 현대적인 발달과 보급의 실태를 감안하여 협의로 해석해야 하며, 학교교육과는 다른 차원의 무의도적 교육력의 의도화·구체화로서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사회교육은 과거에 있어서는, 학교교육의 행정이 미비하고 교육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에 학교교육을 보충하거나 시민적 교양이 빈약한 계층을 구제하는 한 방식으로 많이 존재했다. 그러나 고도의 문명사회에서 사회교육은 교육기간이 연장되고, 학교보급의 가능성을 계산에 넣어 학교교육방식과 양립하면서 다른 차원의 구상으로 무의도적 교육력을 의도화한 학습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단계라고 하겠다.

달리 말한다면 부단한 사회생활의 변화나 추이(推移) 때문에 여러 가지 실제생활 가운데 내재하는 교도력(敎導力)이 상실·축소·감퇴 변화되어서 무의도적 교육력의 의도화나 구체화의 필요가 있게 된다는 것, 따라서 그 효율화와 현대화를 위해서는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사회교육까지 포함한 교육력의 재편성 내지는 재생산의 요청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학교교육의 한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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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校敎育-限界性

현대생활에서는 학교교육에 위임되는 과제가 증대하고 학습기간의 연장 및 보급을 가져오게 됨과 동시에 그 구상이 생활주의적·생산주의적으로 확대되어 가고 있다. 학교교육의 생활화·민주화 혹은 학교와 사회와의 연속 등의 동향은 이와 같은 학교 위임 증대가 낳은 새로운 자세로 보지 않고서는 현대적인 학교과제의 실천화를 추진시키는 방향이 되지 못하며, 또한 새로운 학교교육의 기점(起點)도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예컨대 학교교육의 생활화의 동향에는 상부상조·자기실현을 위한 지도·여가선용·소비생활의 지식과 기술·실무지식·일하는 태도·근로관(勤勞觀)·의식생활의 개선·진로(進路)지도·정신위생·교통지식 등 광범한 생활 및 생산적인 교도(敎導)계획이나 조언(助言)체제의 정비를 포함하고 있어서 학교교육의 생활중심의 강조와 교사 기능의 질적 변용(變容)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학교보건 담당기구나 직업지도 기구의 설치라든가, 홈룸(home room)·학교행사 및 특별 교육활동의 기능의 중시, 나아가서는 양친의 지도와 양친과 교사의 책임분담을 포함하는 P. T. A.(Parent Teacher Association:師親會)의 발전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사회교육의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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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敎育-特色

사회교육에서는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사회교육의 교육내용(학습활동의 프로그램)은 참가하는 학습자 스스로의 욕구에 응하여 고안되고 또한 부단히 확대되며, 필요에 따라 혹은 학습의 진보에 따라 새로운 프로젝트도 생겨난다. 학습자는 교육과정 구성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지도자·조언자 등 강사를 선택할 자유도 있다. 교육내용도 자유의사로 선택·발전 시킬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또한 지도자나 강사에게는 자격증 등의 제한이 수반되지 않으므로 극히 넓은 실생활의 여러 영역에서 학습내용에 적절한 경험을 가진 자나 숙련가·연구가 등 경험과 지식있는 사람을 활용할 수 있다. 이런 학습의 편익은 누구에게나 또 언제 어디서나 주어지는 유연(柔軟)한 구조에서 전개된다.

이 자주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학습구조나 조건이 사회교육의 특색이 되며, 자발적으로 광범한 학습층을 이 방식의 학습태도로 유인하는 매력으로 생각할 수 있다.

현대 사회교육에서는 지난 날처럼 비형식적인 것보다도 오히려 여러 형식, 예컨대 학급·강좌 등 학교교육 방식에 가까운 것을 찾아 볼 수 있으나 그 외적인 형태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교육은 의도성·구체성·계속성이란 본질에 있어서는 학교교육과는 다른 차원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환언하면 학교교육은 사회승인(社會承認)이란 기준에 입각하기 때문에 세칙화(細則化)된 규제법규(規制法規)에 좌우되는 학습체제를 취해야 할 숙명이 있다. 이에 대해 이와 같은 외적인 기준을 갖지 않는 사회교육은 주로 자기충실(自己充實)과 자아실현·자기안정·문제해결·사회발전·복지달성 등의 '성과'를 중심으로 한 자주적인 평가기준에 입각한 학습활동으로서, 학습의 습득이 '자격'으로 평가되는 것과 같은 기준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학습상의 형태(形態)도 극히 유연하여 학습자의 자발적 학습의사에 의해 다양화 될 수 있다.

사회교육과 학교교육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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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敎育-學校敎育-比較

평생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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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long education

학교교육은 현대 사회생활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교육적인 축도(縮圖)이며, 그것이 사회생활의 변동과 추이(推移)로 학교교육의 과제가 증대하고 생활화되는 경향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대처럼 변화의 추이가 빠르고 문화수준이 높은 시대에 있어서는 학교교육만으로는 실생활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온갖 힘을 미리 부여하거나 육성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학교에서 습득하는 학력이나 능력은 훗날의 실생활에서 전이(轉移)되는 기초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식산활동(殖産活動)에서 차단된 커리큘럼(curriculum:敎育課程)에 의한 교육이므로 특정생활에 들어가기 전의 준비과정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복잡다양하고 유동적인 현대생활을 하는 데 있어 이러한 학교방식만의 기초학력을 응용·활용한다는 것은 불완전한 점이 많은 것이다. 여기에서 실생활과 불가분의 전생활적(全生活的)인 학습이 제2차 학습방식으로 일생을 통해 실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곧 '평생교육' 즉, 평생 계속학습 ― 공비(公費)로 원조하는 사회인이 필요로 하는 교육 ― 이 요청되게 되었다.

물론 학교교육도 평생 계속학습의 일부이며 가장 의도화·구체화된 전형적인 것이다. 그런데 학교교육은 대상으로서의 학습자를 실생활 속에서 추려내거나 실생활에서 차단된 교육기간을 독자적으로 설정해서 행하는 교육형태로서 본질적으로는 사회교육과는 그 차원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국가의 국민에 대한 사회권(社會權)이나 생활권(生活權)의 학습적 보증은 학교교육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학습요구가 국민생활의 안정이나 사회복지에 크게 관계되는 한, 여러 영역에 걸친 생존을 위한 사회활동이 교육적으로 조성(助成) 되고 실증되어야 한다.

미국의 해비거스트(Havighurst)는 전국민에게 중등교육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육행정의 세계적인 동향에서, 특히 최근 20세기에 이르러 고등교육이 학교 교육행정의 대상으로서 설정되어 온 동향을 주시 사회교육의 장래에 관해 언급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즉 학교 교육행정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이 20세기에 받는 조직적인 학교교육의 질이나 양은 그가 무덤에 이르기까지 받아야 할 학습내용과 비교하면 극히 소량화(小量化)하고 있으며, 이 동향은 사회의 문화, 기술수준의 상승, 생활의 복잡화의 추이에 따라 매년 증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들을 것도 없이 학교교육의 의무연한이 연장되고 학교교육 기회가 확대되고 보급된다면, 보다더 긴박하고 필요한 사회성의 학습(평생교육의 입장에서 제2차 학습) 욕구 증대에 대해서도 학교교육과 마찬가지로 공적인 원조와 조성이 강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교육의 학습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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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會敎育-學習性格

사회교육은 시민을 중심으로 오늘의 과제, 생활상의 여러 문제에서 사회인의 욕구를 중심으로 한 학습 테마나 프로젝트가 다뤄지고 문제의식이나 학습의욕을 해결하기 위하여 개별적 혹은 집단적 방법으로 교육적으로 원조화(援助化)되고 그 결과가 생활이나 문제에 비추어 검토되는데, 이는 실생활에의 활용에 의해 평가되는 학습방식을 기조로 한다. 학습활동과 서클 강좌 등 그룹 활동에서는 집단사고의 과정을 통해 의견 및 비판을 다루고, 문제나 테마가 상호 공헌적·교육적인 학습을 통해 해결을 이루고, 생활의 향상·개선 및 안정에 도움이 되는 생활개조적인 것으로 하여 생산고양적(生産高揚的) 학습과정이 그 중핵이 된다. 다시 말해서 학습결과보다 높은 단계에서 다시 실천으로 옮겨지고 생활에 환원되어 학습을 포함한 생활개조 과정 속에서 제각기 가정인·시민으로 유능하고 교양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곧 생활에 부응한 인간개조의 조성작용으로, 오늘날의 이른바 '새마을운동'과 같은 사회생활의 향상이나 지역개발의 기능이 일체화된 학습과정이라고 하겠다. 새로운 사회교육은 시민 상호간에 이루어지는 학습을 원조하는 구상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문제의식이나 학습의 욕구가 적절한 지도 조언이나 학습의 편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 학습성과에 의해서 자기실현과 동시에 생활이 개선·향상되어 가는 생활학습이라는 점이 재확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공적인 원조로 자유롭고 자재로운 학습이 실시되는 것이 사회교육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학교교육과는 대조적이며 학교교육의 생활주의적인 발전의 범위를 초월한 전생활적인 교육방식이며 실생활의 학습적 측면의 방법화라고 할 수 있다.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은 진전(進展)하는 사회에 있어서 시민적·생산적인 교도력의 변용에 직면하여, 상호간에 교육력의 재편성 내지는 학습내용의 새로운 조직화, 독자적인 역할의 분담을 확인해야 할 시점에 입각한다고 하겠다.

평생교육의 구상을 분담하는 두 교육체계는 학습을 구체화하는 방법상의 구조면에서는 '접근'하고 '연속'하는 바가 많으나, 교육상의 본질과 기능의 독자성이라는 면에서는 분명히 '분리'된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일반교육과 직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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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교육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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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般敎育-意義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이란 모든 사람들이 현대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교육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중요한 양측면의 호칭이다. 이 양면의 한계를 엄밀히 하기는 어렵지만 관리상의 목적에서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 편리하다.

일반교육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표현방식을 갖는 인생에 관해서의 이해·해석 및 비판 등 이른바 일반적인 교양에 관한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시민으로서 보다더 지적으로 생활하고 인생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과정의 교육이라 하겠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처음 학교는 교양교육(cultural education)에만 관계해 왔었다. 따라서 오랜 전통적인 학술적 직업(learned profession), 즉 성직자·의사·서사가(書史家) 등의 훈련을 제외한 일반적인 직업활동에 대해서 전문적인 준비를 하는 것은 학교의 기능으로 생각되지 않았었다. 오히려 학교는 정신의 훈련이라든가 정신을 만든다든가 하는 주로 일반적인 정신활동에 중점이 주어져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많은 교사들에게 지지되고 있는 현대적인 교양교육=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의 개념은 르네상스 만년의 그것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이 광범하고 일반적인 승인을 받아오던 교양교육의 의미가 더욱 자유롭게 확대되어 가는 경향이 보인다.

그것은 현대생활의 발달에서 오는 다양화가 과거의 낡은 사고방식을 급속히 타파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예컨대 새로운 시대의 생산자는, 일찍이 일반교육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던 신체적·사회적·경제적 조건 등 여러 요소의 필요를 뚜렷이 인정하게 되었다. 듀이(John Dewey)는 "우리의 교양은 과학·기계 및 산업에서 도피하지 않고 오히려 실천적 성격을 지닌 그러한 것과 대결해야만 한다"라고 하였고, 머길(Walter H. Magill)이 "어떠한 일반교육 계획도 학습의 중요한 일면으로서 직업적인 가치를 포함해야 한다"고 시사하고 있듯이, 과학·생산·기술 및 직업 등 여러 가지 가치를 일반교육 속에 포함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현대의 복잡한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오랜 전통적 교양교육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전문적인 직업교육이나 기술학교까지를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예컨대 광대한 소비물질이 지적으로 소비·실용화되기 위해서는 문화생산에 참가하고 그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또는 정치가 올바르고 능률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일반적 기본적 또는 종합적인 지식·기능을 광범위하게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일반교육의 기능은 놀랄 정도로 확대되어 왔다.

직업교육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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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敎育-意義

직업교육이란 어떤 특정한 직업이 요구하는 지식·기능 및 태도의 습득을 다루는 것으로 그 정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스트럭(Theodore F. Struck)은, "미국의 직업교육은 미국인의생활의 생명력으로서 이것이 미국에서의 근대적 기계문명을 유지하고 있는 요인"이라고 하였다. 다시 그는 "직업교육(voca tional education)이란 일정한 직업에 대해, 전체적이건 부분적이건간에 개인이 이에 적응하는 지식·기능 및 태도를 다루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정의한다. 또 메이스(Arther B. Mays)는 "개인으로 하여금 능률적인 생산이라고 하는 경제적 생활의 여러 요구를 해결토록 하는 것이 직업교육의 역할"이라고 규정하고, 또 마이어스(George E. Myers)는 직업교육의 입장에 입각하면서 "직업교육은 어느 하나의 직업이 현명하건 현명하지 않건 어떤 방법으로 일단 선택된 뒤에 그 직업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직업교육은 특정한 직업상의 지식·기능 및 태도 등과 같이 좁고 특수적이며 전문적인 발달에 기여하는 교육이다.

그런데 과거의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도제적(徒弟的)·기능적·전문적 성격이 너무 짙은 경향이 있었으며, 근년에 다시 이 직업교육의 동향은 다음과 같이 달라졌다.

기계시대에서의 전문화와 표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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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械時代-專門化-標準化

기계시대라고 불려지는 현대생산에 있어서는 전문화(special-ization)와 표준화(standardization)라는 것이 커다란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생산의 범위가 확대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욕구에 도움이 되는 생산의 질(전문화, 양질의 것)과 양(표준화, 규격에 의한 대량생산)이 더욱더 증대된다. 환언하면 생산이 증대될수록 인간의 욕구도 더욱 많아지고 또한 그와 반대로 인간의 욕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생산은 증대하게 마련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의 생산과 인간의 욕구가 평행적으로 증대하면, 생산에 있어서의 전문화와 표준화가 더욱더 심화(深化)·확대된다. 따라서 메이스는 "오늘날 산업교육은 필요한 기능이나 기술적 지식의 단순한 전달 이상의 것을 뜻하게 되었다… 훌륭하게 된 일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 교양적·발전적인 가치를 발견했다"라든가, "현대생활은 이전보다도 더욱 광범한 일반교육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훨씬 집약적인 직업교육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현대의 직업교육은 생산에 있어서의 전문화와 표준화에 수반하여, 특정한 직업에 대한 전문적 교양은 말할 나위도 없고, 그것의 기초가 되고 있는 여러 과학이나 기술에 관한 일반적 원리의 교육을 더욱 광범하게 필요로 하게 되었다.

직업교육의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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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敎育-公共性

현대의 직업교육이 단순히 의사·법률가·교사·목사·건축가처럼 이른바 전문직에 한정되지 않고, 공장 노무자·요리사·간호사·양재사·이발사·미용사·목수 등 모든 직업분야에 관해,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해도 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하겠다. 근년에 와서 각종의 직업학교가 이전에 비해 눈부시게 발달했음은 이것을 여실히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오늘날 이러한 모든 직업교육이 공적 기관에 의해서 공비(公費)로 영위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머지 않아 그것이 언제까지나 사적 기관에 방임되는 일은 적어질 것이며, 차차 공적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높은 전문적 교양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을 위한 교육만이 나라나 사회나 학교 등의 책임하에, 더구나 공비로 실시되면서, 비교적 저급(低級)이라고 하는 실무자를 위한 교육은 경비면에서 개인의 부담이 큰 사적 기관에 위임하여도 된다고 하는 차별·불합리를 민주주의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업교육의 적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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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敎育-適應性

직업교육은 특정한 직업에 대한 훈련을 뜻하나, 그것은 여러 가지로 달라지는 직업이나 산업의 요구에 잘 적응하는 능력을 양성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즉 노동의 유동성에 대응하기 위한 진실한 직업교육은 선택된 어느 특정한 직업에 대한 고정된 교육이 아니라, 유동하는 직업에 적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이어야 한다. 이미 말한 이른바 확대된 일반교육의 배경에 입각한 직업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듀이가 말하는 "자유롭고 교양있는 직업교육"을 뜻하는 것이다.

이 직업에 적응하는 능력의 양성은 예컨대, 기술교육의 기초가 되어야 할 과학교육에서 수행되어야 하며, 이 과학교육은 다만 과학에 관한 서적학습만 가지고는 의미가 없다. 서적학습은 중고(中古)의 지식을 줄 뿐이다. 지적 생활의 궁극적인 기초는 살아 있는 지식의 필요인 것이다. 이 지식을 정말로 살리기 위해서 천연자원이나 공업시설 등의 혜택이 풍부하다는 것은 바람직한 조건이긴 하나, 그것만으로는 우수성을 발휘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본질적인 요인으로서 기능·기술적 지식·활력(에네르기) 및 능률적으로 일을 하려는 의욕 및 능력 등이 필요하다.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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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般敎育-職業敎育-關係

일반교육과 직업교육과의 구별을 인정하여 양자가 제각기 독자적인 목적과 고유한 내용 및 방법을 갖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일반교육이 그 가치에 있어서 직업교육의 그것보다 높다고 하는 편견에 사로잡혀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원래 이 두 개의 교육이 지니는 교육적 가치에 있어서 어느 쪽이 높고 낮으냐는 식으로 평가될 성질의 것은 아니며, 이 양자는 전인형성(全人形成)에 있어서 불가결의 분야를 차지하는 것으로, 오히려 상호간에 보강하면서 제각기의 본질을 더욱더 발휘해야만 할 것이다.

일반교육과 직업교육과의 관계에 관해서 우리나라의 학교체계에 대한 개략을 생각하여 보자. 학교체계는 교육적 성격으로 보아 대강 3단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초학교·중간학교·종국학교이다. 이 3단계의 학교가 지니는 제각기의 주요한 교육적 임무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않고서는 각 학교의 교육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의 중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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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般敎育-職業敎育-重複

일반교육과 직업은 각각 고유의 가치와 영역을 가지면서도 명확한 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양자간 긴밀하고 유기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 즉 중복된 분야가 있다. 확실히 직업의 지식·기능 및 태도의 습득을 도모하는 직업교육은 여러 과학의 일반적·기초적인 원리·법칙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직업교육을 행하는 것은 동시에 일반 교양을 높이는 것이 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일반교육으로서의 국어(國語) 코스에는 그 자체가 고유한 일반적 목적과 가치로서 학습되는 것이 본질이지만, 한편 직업상·산업상 흔히 사용되기 때문에 필요한 말을 하거나 쓰거나 하는 기초적인 능력의 발달을 직업적 가치에까지 높일 수가 있다. 또한 수학의 코스도 마찬가지로 상업이나 산업방면에 널리 적용되는 기본적인 기술이나 방법의 훈련을, 나아가서 사회과(社會科)는 부(富)의 생산·분배 및 산업의 관리에 포함되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관한 기초적인 이해나 인간관계의 발달을, 직업적 가치에까지 동시에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직업 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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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前-敎育

앞에서 말한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의 중복된 면에 관해서의 교육학적 고찰은 앞으로의 일반교육이나 직업교육의 연구에서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전한 일반교육이나 직업교육에 관해서는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검토되어 왔으나 양자의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있는 중복된 면은 장차 새로이 연구·개척해야만 할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루는 '직업 전 교육'(pre-vocational education)도 그 하나의 경우이다.

이 '직업 전 교육'은 말할 것도 없이 사전에 준비를 하는 순전한 직업교육이나 전문교육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일반교육에서 전문적인 직업교육으로 순조롭게 이행(移行)할 수 있는 교량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직업적 방면으로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기본적 능력의 발달을 꾀하거나 광범한 직업 전 계발경험(啓發經驗)을 주거나 직업진로가 거의 결정된 것에 일종의 저도(低度)의 직업교육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초기의 직업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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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期-職業敎育

직업교육은 언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메이스가 "특정의 시기나 학교의 정도에 따라 직업교육의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의 견지에 입각해서 자기가 언제쯤부터 취직해야 하는가, 어떠한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그 직업의 배경, 즉 경제적·사회적·정신적·신체적 견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해야 한다"고 한 것은 원칙적으로 옳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기 위해서는 일반교육이 직업교육에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직업교육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반교육이 끝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전문직(profession)이라거나 비교적 일반교육을 보다 많이 요하는 직업을 위해 준비할 경우에는, 직업준비를 하는 조기(早期)에 일반교육과 직업교육을 동시에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또한 장차 숙련을 요하는 기계적 업무(機械的業務)에 취업하고자 하는 자에게 필요한 전문적 훈련은 기술적 전문직을 장래의 직업으로 정한 자의 직업훈련보다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즉 청소년이 특수한 직업흥미나 적성을 발견하고 시안적(試案的)이긴 하나, 직업선택을 하여 직업준비를 성실하게 시작할 때, 특정한 직업목표를 가진 전문적인 직업교육이 시작되며, 여기에는 아직 일반교육의 성격을 지닌 학습활동도 포함되고 있다. 말하자면 일반교육과의 균형이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전문화시대의 일반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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專門化時代-一般敎育

사회가 산업화됨에 따라 분업시대가 출현했으며, 자기가 맡은 조그만 부분만을 잘하면 전체사회는 잘 움직여 가는 고도의 유기적 조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생활이다. 즉 전문화시대에 사는 우리는 무엇이든지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전공분야는 다시 세분되어 전공인들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일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다. 학문의 사회뿐 아니라 산업계, 기타 일반사회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에 있어서는 전문교육과 일반교육의 문제가 어떻게 관련될 것인가. 근대화의 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전문적 지식과 특수한 기술이 요청되기는 하지만 동시에 일반 기초교육의 필요성이 또한 강력히 요구되는 것이다. 급변하는 사회에는 평균 7년 만 경과하면 새 기계가 나와 새로 바꿔야만 한다. 교육계에서도 이러한 사정이나 변화를 그때그때 따라 가기에는 매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변화한다 해도 그 밑에 깔린 기본적인 것만을 이해한다면 변화에 따라 적절히 응용 또는 조정해 갈 수 있다. 어떤 지식이나 기술 자체를 배우는 것보다 조정력(adjust-ability)과 응용력을 길러두는 것이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매우 긴요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25년간 근대화란 말이 많이 유행하고, 쓸모 있는 일꾼을 요구하고 고등유민(高等遊民)을 비난하는 소리가 날로 높아져 가고 있어 교육내용이나 인력 양성정책에 반성할 바가 많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정부에서나 사회일반에서 실업교육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서이다. 해방 이후 문교부는 줄곧 실업과 인문의 비례를 7:3으로 할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학교설립이나 인가에 있어서도 실업교를 권장하고 인문교를 억제해 왔다. 교육과정에도 실습에 치중함은 물론 실업과목의 비중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사회가 급변하기 때문에 오히려 변하지 않는,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대학에서도 교양과목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인정되어 교양과목의 이수학점 비중을 늘리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하급학교에서는 기초과목의 중시 또는 기초학력의 배양을 역설하고 있고, 각 교과에서도 기본개념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된 것은 당연한 추세라 하겠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이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