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2월 초하룻날
이월(二月) 초(初)하루는 머슴의 설날이라 한다. 남의 논 마지기를 얻어 하거나 밥술 먹는 집의 머슴 노릇을 해서 농노(農奴)의 생활(生活)을 하는 그네들이 일년(一年)에 한 번 먹고 마시고 마음껏 뛰노는 날이 이 이월(二月) 초(初) 하루다.
아침부터 밤이 이슥하도록 아래 윗 마을에서 징, 꽹가리, 새납, 장고 같은 풍물을 불며 뚜드리는 소리가 끊일 사이 없이 들린다. 그네들이 두레를 노는 광경(光景)은 「상록수(常綠樹)」 중(中)에도 묘사(描寫)한 바 있어 략(略)하지만, 아직도 눈이 풀풀 흿날리는 그믐밤, 고등(孤燈)아래서 종이 위에 「펜」을 달리면서, 바람결에 가까이 또는 꿈 속 같이 은은히 들려 오는 그 소리를 들으면 미상불 향토적(鄕土的) 정서(情緖)에 사로 잡히게 된다. 그러나 낮에 그네들이 뛰놀던 정경(情景)을 눈 앞에 그려 보면 다시금 우울증(憂鬱症)이 복바쳐 오르는 것을 억제(抑制)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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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벽(窮僻)한 해변(海邊) 산촌(山村)에 수간(數間) 모옥(茅屋)을 짓고 죄(罪) 없는 귀양살이를 하게 된 후(後)로 다만 고적(孤寂)과 벗을 삼고 지내기 이미 만(滿) 삼년(三年)이나 되었다. 비록 「구아조찰난위청(嘔啞晭哳難爲聽)」일망정,[1] 산가(山歌)와 촌적(村笛)이나마 그리워서, 두렛군들과 얼려 다니며 막걸리 사발도 얻어 먹고, 춤추는 흉내도 내어 보았다.
첫 해에는 누데기를 벗지 못한 머슴군들이 헌털뱅이 패랭이를 쓰고 곤댓짓을 해서 긴 상무를 돌리며, 호적(胡笛)가락 꽹가리 장단(長短)에 요두전목(搖頭轉目)을 하는 것이며, 신명이 나서 개구리처럼 뛰노는 것이 남양(南洋)의 토인부락(土人部落)으로나 들어 찰듯 야만인종(野蠻人種)의 놀음 같이 보였다.
그렇더니 그 다음에는 두레는 농촌(農村) 오락(娛樂)으로 없지 못할 것 같이 생각 되었다. 좀 더 규모(規模)를 크게하고 통제(統制) 있게 놀도록 지도(指導) 장려(獎勵)하고 싶었다. 그러다가 금년(今年)에 와서는 두레를 보는 관점(觀點)이 변(變)해졌다. 조석(朝夕)으로 만나고 사이 좋게 지내던 아래 웃 동리(洞里)가 합(合)하기만 하면 반드시 시비(是非)가 나고, 시비(是非) 끝에는 싸움으로 끝을 마춘다. 그것은 유식(有識) 무식(無識) 간(間)에 두 세 사람만 모여도 자그락거리고 합심(合心) 단결(團結)이 되지 못하는 조선(朝鮮)놈의 본색(本色)이라, 씨알머리가 밉기도 하려니와, 한 편으로 돌이켜 생각하면 가없기가 짝이 없다. 배를 싫건 불린다는 날 집집으로 돌아 다니며 얻어 먹은 것이라고는, 끽해야 두부쪽 콩나물 대가리에 돼지 죽 같이 틉틉한 막걸리 뿐이다.
평소(平素)부터 영양(營養) 부족(不足)에 걸린 그네들은 그나마 걸더듬을 해서 그 술을 마시고, 걸신이 들린 것처럼 그 거친 음식(飮食)을 어귀어귀 걷어 넣는다. 그러고는 온 종일(終日) 뚜드리고 뛰놀면서 온 동내(洞內)를 돌아다니고 나니, 「알콜」 기운은 그네들의 창자(膓子)와 단순(單純)한 신경(神經)을 자극(刺戟)시켜서, 악성(惡性)으로 취(醉)하게 한다. 곤죽이 되도록 취(醉)하고 나니 대소럽지 않은 일에 충돌(衝突)이 되고 평소(平素)의 불평(不平)이 폭발(爆發)되면 유혈(流血)의 참극(慘劇)까지도 연출(演出)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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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는 주막(酒幕)거리에서 그런 광경(光景)을 보다못해서 달려가 뜯어 말렸다. 몇%밖에 아니되는 「알콜」 기운을 이기지 못해서 두눈이 만경을 한 것처럼 개개 풀렸는데 시척 건드리기만 해도 픽픽 쓰러지는 그네들의 육체(肉體)는 흡사(恰似)히 말라빠진 북어(北魚)를 물에다 불려 논 것 같다.
그러나 그네들의 혈색(血色)없는 입은 「우리에게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영향(營養)을 달라!」고 부르짖을 줄 모른다. 자기(自己)네의 빈곤(貧困)과 무지(無智)를 아직도 팔자(八字) 탓으로만 돌릴 뿐.
오오 형해(形骸)만 남은 백만(百萬) 천만(千萬)의 숙명론자(宿命論者)여! 그대들은 언제까지나 그 숙명(宿命)을 짊어지고 살려는가? 중추신경(中樞神經)이 물러앉은채로 그 누구를 위(爲)하여 대대(代代) 손손(孫孫)이 이땅의 두더지 노릇을 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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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백거이의 비파행(琵琶行)에 나오는 구절: 잡되고 시끄러운 소리라 차마 듣기 힘들 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