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원
때는 정히 오월 중순이라. 비온 뒤끝은 아직도 깨끗지 못하여 검은 구름발이 삼각산 봉우리를 뒤덮어 돌고 기운차게 서서 흔들기 좋아하는 포플러도 잎새 하나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서 있을 만치 그렇게 바람 한 점도 날리지 않는다. 참새들은 떼를 지어 갈팡질팡 이리 가랴 저리 가랴 하며 왜가리는 비 재촉하는 울음을 깨쳐 가며 지붕을 건너 넘어간다.
이때에 어느 집 삼 칸 대청(원문에는 ‘삼간대청’)에는 어린아이 보러 온 6, 7인의 부인네들이 혹은 앉아서 부채질도 하며, 혹은 더운 피곤에 못 이기어 옷고름을 잠깐 풀어 젖히고 화문석 위에 목침을 의지하여 가볍게 눈을 감고 있는 이도 있으며, 혹은 무심히 앉아서 처음 온 집이라 앞뒤를 살펴 보기도 하며, 혹은 살림에 대한 이야기도 하며, 혹은 그것을 듣고 앉았기도 한다. 마루에는 어린애의 기저귀가 두어 개 늘어놓아져 있고 물주전자가 놓여 있으며 물찌끼가 조금씩 남아 있는 공기가 3, 4개 널려 있다. 또 거기에는 앵두 씨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고 큰 유리화대접에 반도 채 못 담겨 있는 앵두는 물에 젖어 반투명체로 연연하게 곱고 붉은빛이 광선에 반사되어 기름 윤이 흐르게 번쩍번쩍한다.
이때에 열어젖힌 뒷문으로 어린애 우는 소리가 사랑으로부터 멀리 들리자 산후의 열기로 인하여 신음하다가 일어나 앉은 아기 어머니는 어푸수수한 머리를 아무렇게나 쪽지어 흑각(黑角: 물소의 검은 뿔, 또는 그것으로 만든 비녀)으로 꽂고 기운 없이 뒷문턱에 기대어 앉았다가 깜짝 놀라 일어서며 사랑으로 나가 아기를 고쳐 안고 들어온다. 아기의 두 눈에는 약간 눈물이 흘러 있고 모기에 물린 자국으로 두어 군데 붉은 점이 찍혀 있다. 어머니 팔에 안기어 오는 기쁨인지 또렷또렷한 눈망울을 굴리어 군중을 둘러보다가 아는 듯 모르는 듯 씽긋 웃는다. 군중의 시선은 모두 이 아기에게 집중하여 있는 중 모두 “아이고, 웃는구나.” 하고 다시 웃을까 하여 어르기도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손을 만져 보기도 한다. 아기는 모르는 체하고 몸을 돌리어 어머니 가슴에 입을 돌리어 젖을 찾는다.
저편 구석에 담배 물고 시름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앉은 부인은 어떻게 보면 거진 사십쯤 되어 보이고 어떻게 보면 겨우 삼십이 넘어 보인다. 어디인지 모르게 귀인성이 있어 보임직한 얼굴에는 얼마만한 고생의 흔적인지 주름살이 이리저리 잡혀진다. 거기다가 분을 좀 스친 모양이라 햇빛에 그을어 꺼무죽죽한 얼굴빛에 겉돌며 넉사 자 이맛전에 앞머리를 좌우 평행으로 밀기름에 재어 붙이고 느짓느짓 땋아 느짐하게 길쭉이 쪽을 지어 은비녀로 꾹 찔러 놓은 것이며 모시 적삼 화장은 길쭉하여 손등을 덮고 설핏한 모시 치마에 허리를 넓게 달아 느직하게 외로 여며 입은 것은 아무리 보아도 서울 부인네가 아닐 뿐 아니라, 어디인지 모르게 고상하게 보이는 것은 예절 있는 양반의 집에서 자라난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여러 부인네들은 아기들 앞으로 와서 어르고 만져 보나 다만 홀로 이 부인만은 아무 말 없이 멀리 건너다보다가 흥 하고 이상한 코웃음을 한번 웃고 눈을 내리깔며 반도 타지 않은 담배를 옆에 있는 재떨이에 놓고 허리를 굽혀 마루 아래 대뜰에다 탁탁 털며 이상하게 슬픈 기색을 띤다. 이 부인은 다시 전과 같이 앉더니 애기가 젖먹는 양을 바라보며,
“흐흥, 그거 보시오. 이렇게 많이들 앉았는 중에 아기 우는 소리를 그 어머니밖에 들은 사람이 없소그려. 그렇게 자식과 어머니 사이에는 끊으려도 끊을 수 없는 애정이 엉키어 있건마는 나 같은 것은…….”
하고 목이 메여 말끝을 아물지 못하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돈다. 군중은 모두 이상히 여겨 왜 그리 서러운 기색을 띠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잠잠히 있고, 그와 동행하여 온 그의 친구 김 부인이 옆에 앉았다가 그를 쳐다보며,
“또 청승이 끌어 나오는군. 아들 둘의 생각을 하고 그러지요.”
한다. 군중의 의심은 더욱 깊어진다.
“아들 둘을 어떻게 하였기에요?”
하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부인은 역시 아무 말 없이 앉았고 김 부인이 또 이 부인을 쳐다보며,
“그 내력을 말하려면 숙향전의 고담이지요.”
한다. 군중에게는 더욱 호기심을 갖게 되고 궁금증을 일으킨다.
“어째서 그래요? 좀 이야기하시구려.”
하는 것이 군중의 청구(請求)이었다. 김 부인은 또 그를 쳐다보며,
“이야기하구려.”
권한다. 그 부인은 역시 잠잠히 앉았더니,
“이것 보십쇼.”
하고 두 손을 내밀며,
“세상에 사주팔자란 알 수 없습디다. 분길 같던 내 손이 이렇게 마디마다 못 박혀 볼 줄 뉘 알았으며 5, 6월 염천까지 무명 고쟁이로 날 줄 뉘 알았으리까(치마를 걷어치고 가리키는 무명 고쟁이는 오동빛이라). 나도 남부럽지 않게 호의호식으로 자라나서 시집가서도 마루 아래를 내려서 본 일이 없었더랍니다. 이래 보여도 나도 상당한 집 양반의 딸이랍니다. 내 내력을 말하자면 기가 막혀 죽을 일이지요.”
이렇게 차차 그의 내력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내 아버지께서는 평양 감사까지 지내시고 봉산(鳳山) 고을도 사시고(군수를 지냈다는 뜻), 안성(安城) 고을도 사셨지요. 우리 백부(伯父)님은 이 판서(李判書)집이시지요. 그리하여 우리 고향(故鄕)인 철원(鐵原)골에서는 우리 친정집 일파(一派)의 세력이 무섭지요. 그러한 집에서 아들 4형제 틈에 고명딸로 귀엽게도 자랐지요. 지금은 갖은 고생을 다 겪어서 이렇게 얼굴이 썩고 썩었지요마는, 내가 열두서너 살 먹었을 때는 색씨꼴도 박히고 빛깔이 희고 얼굴도 매우 고왔었으며 머리는 새까마니 전반 같았지요(여자의 머리채가 숱이 많고 치렁치렁함을 비유하는 말). 그리하여 열 살 먹던 해부터 시골 서울 할 것 없이 재상의 집에서들 청혼들을 해댔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머니는 딸자식 하나 있는 것이 그렇게 원수스러우냐고 하시지요.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아무 말씀 못하십니다. 그러나 딸자식이란 쓸데없어요. 열여섯 살 먹던 해 3월에 기어이 남의 집으로 가게 되옵디다.” “신랑은 몇 살이고요?”
하고 한 부인은 묻는다. “신랑은 열세 살이었댔지요. 우리 시부모되시는 김 판서(金判書)하고 우리 아버지와는 절친한 사이셨지요. 아마 두 분이 술잔을 나누시다가 우리 혼인이 정해진 모양입디다. 그렇게 어머니 떨어지기 싫어서 울면서 80리나 되는 곳으로 시집을 갔지요. 우리 집에서도 없는 것 없이 처해 가지고 갔거니와 그 집에도 단 형제뿐으로 필혼(畢婚: 마지막 혼사)이라 갖은 예물이며 채단이야 끔찍끔찍하였었지요. 시부모님에게 귀염인들 나같이 받았으리까. 말이 시집이지 세상에 나같이 어려운 것 모르고 괴로운 것 모르게 시집살이를 하였으리까. 혼인한 지 삼 년이 되도록 태기(胎氣)가 없어서 퍽도 걱정들을 하시고 기다리시더니 팔 년 되던 해 우연히 태기가 있어 가지고 아들을 낳아 놓으니 그 어른들께서 좋아하시는 것이야 어떻다 말할 수 없었어요. 은(銀) 소반 받들 듯하십디다. 바로 그 해에 우리 바깥양반이 춘천 군청(春川郡廳)에 군주사(郡主事)를 하였었지요. 그럴 동안에 첫애가 세 살을 먹자 또 아우가 있어서 낳으니 또 아들이지요. 밤이면 네 식구가 옹기옹기 앉아서 재롱을 보고 하면 타곳에서 외롭게 지내는 중에도 재미있게 지냈지요. 그러나 내 복조가 그만이었던지 집안 운수가 불길하려 함인지, 둘째 아이 낳던 그 해 동짓달에 일본 설(新正을 가리킴)이라고 하여 연회에 가시더니 밤이 늦어서 들어오시는데 술이 퍽 취한 듯싶습디다. 펴놓은 자리 위에 옷도 벗지 않고 탁 드러누워 머리를 몹시 아프다고 끙끙 앓더니 별안간에 와르르 게우는데 벌건 선지피가 두어 번 칵칵 엉키어 나옵디다그려. 나는 간담이 서늘하여지옵디다.”
여기까지 듣고 앉았던 여러 부인네의 가슴은 졸여지는 모양이라. “그래서요?” 하며 이야기 계속하기를 원하는 이도 있으며, 혹은 “저런, 어쩔까!” 하고 차마 들을 수 없겠다는 것처럼 찌푸린다. 혹은 “아이고, 딱해라.” 한다. 이 부인(李夫人)은 목이 메여 침 한 번을 꿀떡 삼키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한다.
“그때 드러누우신 후로 그 이튿날부터 사진(仕進: 벼슬아치가 정해진 시간에 출근함)이 무엇입니까. 하루에 미음 한 번이나 자시는 둥 마는 둥 하고 담이 점점 성하여져서 벌건 피담을 한 요강씩 뱉지요. 그렇게 걷잡을 새 없이 나날이 병이 중(重)하여 가옵디다그려. 그래서 큰댁에 편지를 한다, 전보(電報)를 한다 하였더니 우리 맏시아주버니께서 다 모아 데리고 가시려고 곧 오셨습디다. 그리하여 우둥부둥 짐을 싸 가지고 불시로 모두 떠나 왔지요. 그러한 일이 또 어디 있었으리까. 큰댁에를 들어서니까 공연히 무슨 죄나 지은 것같이 어른 뵐 낯이 없습디다. 아니나다를까 시어머님되는 마님께서는 나를 보고 어떻게 하다 저렇게 병을 냈느냐고 원망을 하시며 두 내외분은 식음을 전폐하시고 느러누워 계시니 집안이 그런 난가(亂家)가 어디 있으리까. 인삼이며 사슴뿔이며 갖은 좋다는 약은 다 사들이고 용하다는 용한 의원은 멀고 가깝고 간에 데려다가 사랑에 두고 날마다 맥을 보고 약을 쓰나 만약(萬藥)이 무효이라. 돈도 많이 들었거니와 사람의 간장인들 그 얼마나 졸였었으리까. 필경은 그 이듬해 8월 스무하룻날 가서 그 몸을 마치었지요.”
하며 적삼 끈을 집어 두 눈을 씻는다. 군중은 모두 “저런 어쩔까?” 하고 혀들을 툭툭 한다. 이 부인은 한풀이 죽어서 겨우 말끝을 잇는다.
“그러니 스물다섯 살인 꽃 같은 나이에 세상 재미를 다 버리고 죽은 이도 불쌍하거니와 여편네가 30도 못 되어 혼자되니 그 신세야 말할 것 무엇 있겠소. 오죽 방정맞아 보였으리까. 왜 그런지 모든 사람이 이 몸을 모두 박복한 년으로 보는 듯싶어서 어찌 부끄러운지 혼자된 후로는 사람을 쳐다보지를 못하고 지내 왔지요. 친정 오라버니가 보러 오셨는데 하얗게 소복을 하고 보기가 어찌 부끄럽던지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아서 즉시 얼굴을 들지 못하였더랍니다.”
한 부인이 말하되,
“참 옛날 어른이시오. 아 그렇다뿐이에요. 생전 죄인이지요. 어디 가서 고개를 들어 보고 말소리를 크게 내어 보며 목소리를 높여 웃어 보아요. 그러기에 몸을 마친다 하고 과부가 되면 하늘이 무너졌다고 하는가 봐요. 참, 기가 막히지요. 그러나 요사이 과부들은 어디 그럽디까. 벌건 자주 댕기를 아니 드리나, 분들을 못 바르나. 그러니 세상이 망하지 않겠소.”
하며 누었다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담뱃재 떠느라고 허리를 굽히는데 보니, 그의 머리에는 조적 댕기가 드려 있는 것이 이 부인도 과부 중에 한 사람인 듯싶고 말하는 것이 경험한 말 같다.
이 부인은 다시 말을 이어,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 못나서 그랬어요. 그야말로 불행 중 다행으로 아들 형제를 두고 가서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그것들로 위로를 많이 받으시고 나도 그것들에게 의지하게 되었지요. 우리 시아버님께서는 우리 세 식구를 어떻게 불쌍히 여기시는지 살림에나 재미를 붙여 살으라고 하시고, 둘째 아드님 몫으로 지어 두셨던 삼백 석 추수 받는 논과 밭을 내 이름으로 증명(證明)을 내어주시고 큰댁 바로 앞집을 사셔서 분통같이 꾸며서 상청하고 우리 세 식구들 세간을 그 동짓달에 내어주시며 조석으로 드나드시면서 보아주십디다. 살림도 내외가 가져서 해야 이것도 사고 싶고 저것도 사고 싶고 하여 재미가 나지요. 마지못하여 살림에 당한 것을 하나 사면 ‘어디를 가고 나 혼자 이렇게 살려고 애를 쓰나.’ 하는 마음이 생기고 걷잡을 새 없이 설움이 북받쳐 눈물이 앞을 가리우지요. 우리 친정에서는 내가 불쌍하다고 철철이 나는 실과(實果)를 아니 사 보내 주시나, 아이들 옷을 아니 해 보내 주시나, 남편 없이 시아버님께 돈을 타서 쓰니 오죽 군색하랴 하고 일용(日用)에 보태어 쓰라고 돈을 다 보내 주시고 하지요. 아, 참 세월도 빨라요. 살아서 있는 것같이 조석상식(朝夕喪食)을 받들기에 큰 위로를 받고 밤에라도 나와서 마루에 있는 소장(素帳: 궤연 앞에 드리우는 흰 포장)을 보면 집을 지켜주는 듯싶어서 든든하더니 그나마 3년상을 마치고 나니 더구나 새삼스럽게 서러운 마음이 생기고 허수하며 섭섭하기가 말할 길 없습디다. 따라서 죽지 못한 것이 한이지요. 죽지 못하여 살아가는 동안에 한 해 가고 두 해 가서 4년이 되었지요. 그 해 8월에 마루에서 혼자 큰아이 녀석 추석 빔을 하고 앉았으려니까 전부터 우리 큰댁에 드나들면서 바느질도 하고 하던 점동 할머니가 손자를 등에 업고 들어옵디다. 그는 전에 없이 내가 혼자 사는 것이 불쌍하다는 둥 오죽 서럽겠느냐는 둥 하며 무슨 말인지 서울 어느 점잖은 사람이 상처(喪妻)를 하고 젊은 과부를 하나 얻으려고 하는데 그 사람은 문벌(門閥)도 관계치 않고 재산도 상당하며 어쩌고저쩌고 늘어놓습디다. 나는 아마 그냥 그런 이야기를 하나 보다 하고 무심히 들었을 뿐이었지요. 그런 뒤 얼마 있다가 어느 날 또 할멈이 오더니 그런 말을 또 하면서 감히 무엇이라고는 못하고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매우 이상스럽겠지요? 어찌 괘씸스러운지 나 역시 모르는 체하였을 뿐이지요. 아, 이것 좀 보시오. 며칠 뒤에 또 와서는 불고 염치하고 날더러 마음이 없냐고 아니합니까. 내가 누구 앞에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고 악을 쓰니까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납디다. 그런 뒤로는 나는 어찌 분하든지 밤이면 잠이 다 아니 오겠지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업수이여기는 것 같아서 어찌 서러운지 과부되었을 때보다 더해요. 그런데 이거 보세요. 망신살이 뻗치려니까 어렵지가 않겠지요. 도무지 날짜까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마는, 그 해 9월 열이튿날이었어요. 저녁밥을 다 해치우고 안방에서 신선해서 방문을 닫고 어린애 젖을 먹이느라고 끼고 드러누웠으려니까 별안간에 마당에서 우리 큰애 이름 ‘순영아, 순영아.’ 두어 번 부르는 남자의 소리가 나겠지요. 나는 시부(媤父)께서 나오셨나 하고 젖을 떼고 일어서려는데 다시 부르는 소리를 들으니 우리 시부님의 목소리는 캥캥하신데 그렇지가 않고 우렁찬 소리겠지요. 나는 이상스러운 마음이 생겨서 잠깐 문틈으로 내다보았지요. 어스름 밤이라 자세히는 볼 수 없으나 키가 훨씬 큰 사람이 뒷짐을 지고 그 손에는 단장을 휘적휘적 흔들며 안을 향하여 섰는 것이 잠깐 보아도 우리 집 내(內) 사람은 아니옵디다. 나는 불현듯 무서운 생각이 생겨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벌벌 떨며, ‘그 누구신가 여쭈어 보아라.’ 하였지요. 그자는 내 목소리를 듣자 반가운 듯이 마루 끝으로 가까이 오며 천연스럽게 ‘네, 서울서 왔습니다.’ 해요. 나는 다시 떨리는 소리로, ‘서울서 오시다니 누구신가 여쭈어 보아라.’ 한즉 그자는 버쩍 마루로 올라서며, ‘왜 점동 할머니께 들으셨지요. 서울 사는 장 주사라고요…….’ 하며 바로 익숙한 사람에게 대하여 말하듯이 반웃음을 띠며 말하겠지요. 나는 무섭고도 분하여서, ‘나는 그런 사람 몰라요. 그런데 대관절 남의 집 대청에를 아무 말 없이 들어오니 이런 법(法)이 어디 있소.’ 하며 주고받고 할 때에 마침 대문 소리가 나자 우리 시어머니되는 마님이 들어오시는구려.”
군중은 모두 “아이고, 저런 어쩔까.”, “어쩌면 꼭 그때.” 하며 마음을 졸여한다.
“그러니 꼭 그물에 걸린 고기지요. 넘치고 뛸 수 있나요. 그러니 장 주사라는 작자가 밖으로 뛰어나가야 옳겠습니까. 안으로 뛰어들어와야 옳겠습니까. 어쩔 줄을 몰라 그랬던지 방으로 뛰어들어오는구려. 나는 속절없이 누명을 쓰게 되었지요. 시모님께서는 그자의 태도가 수상스러운 것을 보시고 곧 눈치를 채신 모양이라, 방으로 쫓아 들어오시더니 눈을 똑바로 떠 쳐다보시며, ‘웬 사람이냐?’고 하시더니 다시 나의 태도를 유심히 보시는구려. 그러니 그 자리에서 무어라고 말하겠소. 하도 기가 막히는 일이라 아무 말도 아니 나와서 잠잠히 서 있을 뿐이었지요. 원래 괄괄하신 어른이라 곧 내게로 달려드시더니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이 뺨 저 뺨 치시며, ‘이년, 남의 집을 착실하게도 망(亡)해 준다. 생때 같은 서방 죽이고 무엇이 부족하여 밤낮 뭇놈하고 부동을 하며 서방질을 하니? 이년, 그런 뭇서방놈들이 앞뒤로 널렸으니까 네 서방을 약을 먹여 병 내놓았구나. 에, 갈아 먹어도 시원치 않을 년. 내 집에 일시라도 머물지 말고 저놈 따라 나가 버려라. 어서 어서!’ 하는 벼락 같은 재촉이 거푸 나는데 어느 뉘라서 거역할 수 있던가요. 시골이라 앞뒷집에서 큰소리가 나니 남녀노소 물론하고 마당이 미어지도록 구경꾼이 밀려들어 오는구려. 오장을 버선목이라 뒤집어 뵈는 수도 없고 그 자리에서 내가 억울하다 하면 누가 곧이를 듣겠소. 남영 홍씨(洪氏)네 떼라니 순식간에 모여들더니 그년 어서 쫓아내 보내라는 말이 빗발치듯 합디다. 그렇게 원통할 길이 또 어디 있었으리까. 다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나님 맙소사 할 뿐이었지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부모님에게 큰소리 한 마디 들어 보지 못하고 자라났는데 머리가 한 움큼이나 빠지고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멍이 퍼렇게 들도록 어떻게 맞았지요. 이것 좀 보시오(윗입술을 올려치니 간간이 금(金)을 넣어 번쩍번쩍 하는 앞니를 보이면서). 이것도 그때에 어찌 몹시 얻어맞았던지 그때부터 잇몸이 부어서 순색으로 쑤시더니 6달 만에 몽땅 빠지겠지요. 그래서 이렇게 앞니를 모조리(앞니 여섯을 가리키며) 해 박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그 시로 당장에 내쫓겼지요. 아이 둘은 물론 뺏기고요. 쫓겨 나와 갈 데가 있나요. 첫째 남이 부끄러워서 조그만 바닥이라 즉시로 온 성내(城內)에서 다 알게 되었지요. 할 수 없이 우리 친정 편으로 멀리 일가 되는 집을 찾아가서 그 집 행랑 구석 얼음장 같은 구들 위에서 그 밤을 앉아 새웠었지요. 손발이 차다 못하여 나중에는 저려 오고 두 젖이 뗑뗑 불어 아파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사람이 악에 바치니까 눈물도 아니 나오고 인사도 차릴 수 없습디다. 아무려면 어떠랴 하고 발길을 기다려 사람을 보내서 어린아이를 훔쳐 오다시피 했지요. 그 이튿날 늦은 조반 때쯤 되어서 보교(步轎: 정자 모양의 지붕에 사방을 장막으로 두른 가마의 한 가지) 하나가 들어오더니 그 뒤에는 어느 하이칼라 하나가 따라 들어오는데 잠깐 보니 어제 저녁에 내 집에서 방으로 뛰어들어오던 사람 비슷합디다. 나는 그자를 보자 곧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지며 분한 생각을 하면 곧 내려가서 멱살을 쥐고 마음껏 한판 해 내었으면 좋겠습디다. 바로 호기스럽게 어느 실내 마님이나 모시러 온 듯이 날더러 타라고 하겠지요. 어느 쓸개 빠진 년이 거기 타겠습니까. 그러자니 자연 말이 순순히 나가겠습니까. 남에게 누명을 씌운 놈이라는 둥 내 계집된 이상에 무슨 말이냐는 둥 점점 분통만 터지고 꼴만 드러나지요. 보니까 벌써 앞뒤가 빽빽하게 구경꾼이 들어섰구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그곳을 떠나는 것이 일시(一時)가 바쁘게 되었지요. 큰댁 하인(下人) 놈들이 웅기중기 서서 구경하는 양을 보니까 고만 어떻게 부끄러운지 아무 소리가 아니 나오고 부지불각(不知不覺) 중에 아이를 끼고 보교 속으로 피신을 하여 버렸지요. 얼마를 한없이 가서 어느 산골 촌구석 다 쓰러져 가는 초가 앞에다 보교를 놓더니 날더러 내리라고 합디다. 그리고 원수의 그자는 정다이 나를 들여다보며 시장하지 않느냐고 묻겠지요. 참, 꿈인들 그런 꿈이 어디 있으리까. 분한 대로 하면 뺨을 치고 싶었으나 차마 남의 남자에게 손이 올라가야지요. 그리고 다른 곳에 가서까지도 꼴을 들키고 싶지 아니하여서……. 거기서 이럭저럭 근 10여 일이나 지냈지요.”
이제껏 열심히 듣고 앉았던 애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러면 혼인은 언제 했어요. 거기서 했나요.”
하고 묻는 말에 이 부인은 어물어물하며 잠깐 두 뺨이 불그레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아무려면 그 계집 아니라나요. 그러기에 지금이라도 그때 내 살을 그놈에게 허락한 것을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분하지요. 내가 지금만 같았어도 무관하지요. 그때만 해도 안방 구석만 알다가 졸지에 쫓겨나서 물 설고 산 설은 곳으로 가니 그나마도 사람을 배반하면 이년의 몸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날 잡아 잡수 하고 있었지요. 그러기에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내가 목이라도 매서 못 죽었나 싶으지요. 자살도 팔자니까요……. 그리고 장 주사는 서울 집 사 놓고 데리러 오마 하고 떠났지요. 나는 어린애 데리고 거기 며칠 더 있다가 하루는 염치 불구하고 우리 친정을 찾아 나갔지요. 마침 그 동네 사람 하나가 평강으로 간다고 해서 애를 업고 생전 처음으로 50리 걸음을 하여 저녁때 우리 집 문앞에를 다다르니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벌벌 떨려서 차마 대문 안에 발이 들여놓아집디까. 그러나 이를 깨밀어 물고 쑥 들어갔지요. 우리 집에서야 80리 밖의 일을 아실 까닭이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내려오시며 ‘이게 웬일이냐?’고 하시고 오라버니댁들도 뛰어내려와서 아이를 받아 들어가고 야단들입디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진지상에 고기 반찬을 해서 놓으면 꼭 반만 잡수시고 오라범댁들을 부르셔서 ‘이것은 홍집(홍씨 집안에 시집간 여자를 일컫는 말) 누이 주어라. 세상에 부부의 낙(樂)을 모르니 좀 불쌍하냐.’ 하시고 밤이면 잊지도 않으시고 ‘홍집 자는 방이 춥지나 않느냐.’ 하시며 꼭 물으시지요. 그렇게 호강스럽게 그 겨울 동안에 잘 먹고 잘 입고 지냈지요. 그 이듬해 3월 초엿샛날 아침나절이었지요. 건넌방에서 아버지 마고자를 꾸미고 있으려니까 손아래 오라범이 얼굴이 시퍼래져서 건넌방 미닫이를 부서져라 하고 열어젖히더니 퉁명스럽게 내 앞에다가 무슨 전보 한 장을 내어던집디다. 까막눈이라 볼 줄을 아나요. 옆에 앉았던 그 오라범댁더러 좀 보아 달라고 하였지요. 한참 보더니 이상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아이고, 형님. 순영이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이게 누구입니까. 아버님 함자로 왔는데 오늘 온다 하고 서랑(壻郞: 사위) 장필섭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요. 그런 원수가 어디 있으리까. 그러자 별안간에 문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나더니 키는 멀쑥하니 삼팔 두루마기 자락이 너풀거리며 금테 안경을 번쩍거리고 서슴지 않고 중문을 들어서 중청(重聽: 귀머거리)같이 안마당으로 들어오더니 마루 끝에 걸터앉는구려. 우리 어머니는 그만 이불 쓰시고 아랫목에 드러누우시고요. 우리 오빠들은 동네 집으로 피신하고 나는 부엌에 선 채로 오도 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섰으려니까 오라범댁이 ‘형님에게 온 손님이니 형님 나가셔서 대접하시오.’ 하는 권에 못 이길 뿐 아니라, 누구나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억지로 나가서 들어가자고 하여 건넌방으로 데리고 들어갔지요. 아랫목에 하나, 윗목에 하나 섰을 뿐이지 무슨 말이 나오겠습니까. 갈수록 산이요, 물이라더니 죽을 수(數: 운수)니까 할 수 없습디다. 왜 하필 그때 우리 아버지는 사흘 전에 큰댁 제사에 가셨다가 돌아오십니까.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우리 어머니더러 왜 드러누웠냐고 하시겠지요. 어머니는 몸살이 났다고 하십디다. 다시 마루로 나오셔서 다니시다가 댓돌에 벗어 놓은 마른 발막신(앞부리가 넓적하게 생겼는데 거기에 가죽을 댄 마른신, 흔히 잘사는 집의 노인이 신었다)을 보시더니 오라범댁을 부르셔서 이게 웬 남자의 신이냐고 하시는구려. 오라범댁은 마지못하여 어물어물하면서 ‘평강형에게 손님이 왔어요.’ 하지요. ‘홍집에게 남자 손님이 웬 손님이며 남자 손님이면 으레 사랑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거늘 그 방에 들어앉는 손님이 대체 누구란 말이냐?’ 하시더니, ‘홍집 나오라.’고 두어 번 큰소리로 부르시는구려. 나는 그만 겁결에 건넌방 뒷문 밖으로 뛰어나갔지요. 그래서 가만히 섰었으려니까 별안간에 누가 내 뒷덜미를 부러져라 하고 치며 머리채를 휘어잡는구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우리 아버지시지요. 두 말씀 아니하시고 사뭇 아래위로 치시는데 아픈지 만지 하옵디다. 아이구 어머니 살리라고 악을 쓰나 누가 내다보기나 하옵디까. 지금도 장 주사는 그때 나 매 맞은 것을 생각하면 불쌍하다고는 하지요. 이왕 그렇게 되었으니 나를 앞장을 세우고 나서야 옳지요. 자기는 훌쩍 나가서 자동차를 잡아 타고 갔구먼요. 그러니 하인 등쌀에 남이 부끄러워 있을 수도 없거니와 우리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와 오라범댁들에게 왜 그놈을 부쳤느냐고 조련질(못되게 굴어 남을 괴롭힘)을 하시고 나를 내쫓으라고 하시지요. 할 수 없이 그날 저녁에 친정에서까지 쫓겨나서 아이를 업고 정처없이 나섰지요. 우리 어머니는 20리까지 쫓아 나오시며 우시는구려. 길거리에서 그렇게 모녀가 마지막 작별을 하였지요. 그러니 인제야 장가에게밖에 갈 곳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서울이 어디 가 박혔는지, 서울은 어떻게 하여서 간다 하더라도 그자의 집이 어디인지는 알아야지요. 아무려나 빌어먹어도 자식들하고나 같이 빌어먹으려고 40리나 되는 철원으로 가서 길에서 놀고 있는 우리 순영이를 훔쳐 가지고 다시 주막 있던 집으로 왔지요. 우리 집에서 나올 때에 아버지 몰래 어머니가 쌀 판 돈 3원을 집어 주셔서 그것으로 밥값을 치르고 있었으나 그까짓 것 쓰려니까 얼마 되나요. 열흘도 못 가서 다 없어졌지요. 할 수 있나요. 그때부터 그 집 바느질도 하고 아이를 거두어도 주고 하며 세 식구 얻어먹고 지냈지요. 여보 말씀 마시오. 제법 어디 가 더운 밥 한술을 얻어먹어 보아요? 뭇상에서 남는 밥찌꺼기나 해가 한나절이나 되어서 겨우 좀 얻어먹어 보지요. 시골집이라니요. 여편네라도 허리를 못 펴고 다니지요. 단칸방에서 주인 식구 다섯하고 여덟이 자면 평생에 어디가 옷고름 한번을 풀어 보고 다리를 펴고 자 보리까. 알뜰히도 고생도 하였지요. 그나마도 가라면 어쩝니까.”
(또 있소)[1]
주석
편집- ↑ 〈新家庭〉 창간호에는 원래 제2호 목차가 예고되어 있었고, 그 목차에는 나혜석이란 이름 대신 羅晶月이란 이름으로 '규원'을 싣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新家庭〉 제2호는 나온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