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은다리 곁으로서

해가 바뀌매 응당 여러 사람의 속에「또 한 해가 왔구나」하는 생각이 또 한 번 났겠읍니다.

올에 그런 것처럼, 지난해에 그런 것처럼, 늘 그리하는 것처럼, 얼른 작 정하기를 갈 해가 가고 올 해가 온 것이지 하고 말았을 것이외다. 해나 별 도 마땅히 공중에 떠 있을 것이 떠 있는 것이요, 빛과 뜨거움도 마땅히 그 리로서 나올 것이 나오는 것이요, 地水風火(지수풍화]의 動靜(동정]과 飛潜 [비잠] 動植[동식]의 生息[생식]도 마땅히 그럴 것이 그러는 것인 줄 바로 깨닫고 얼른 아는 듯하는 우리의 일이매, 이 한 해가 가고 또 한해가 왔다 하는 일도 그쯤만 알고 그만둠이 괴이치 아니하외다.

무엇을 당하여서든지「그렇구나」하고 바로 깨닫는다든지,「그럴 것이 지」하고 얼른 알아 주는 것같이 세상에 두려운 것은 없읍니다. 이 한 마디 말은 족히 천하의 모든 어려움을 부정하는 膽勇[담용]이 있으며, 족히 천하 의 온갖 무서움을 制服[제복]하는 權能[권능]이 있으며, 이 한 마디 말이면 모를 것이 없으며, 못할 것이 없나니, 이 한 마디 말 앞에는 무론 부지런‧ 애씀 等[등]은 아주 필요와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외다. 한마디 말이 이러한 勢威[세위]를 가졌으니,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어디 있사오리까.

이러한 直覺[직각]으로 이렇듯 速斷[속단]하여 버리려면 편하기야 하지요 마는, 그러한 勢威[세위]의 무서움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그러한 結果[결 과]외다. 얼른 알고 쉬 알매 ─ 실상은 그런 듯하매 깊이 省察[성찰]이 없 고, 따라서 바로 감각함이 없고, 따라서 문득 奮發[분발]하고 문득 更新[갱 신]하여, 그리하여 끊임없이 새 목숨을 創造[창조]하여 가는 힘과 하여 갈 기회가 없읍니다. 얼른 말하면, 그의 생애에는 아무 향상과 아무 作新[작 신]이 없고, 오직 퇴영과 위축이 있을 뿐이외다.

해가 간다 온다 하여 新舊[신구]가 大換[대환]하는 일이 무론 시간 자체 로야 아무 근거가 없을 것이지요마는, 무궁한 시간에 유한한 생명으로 달려 지내는 사람 되어서는 시간에 對[대]한 觀念[관념]을 분명히 하는 데 여기 지나는 필요가 없을 것이외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시간 그것이 便是[변시] 생명 아니오니까. 一寸[일촌] 의 시간은 곧 생명의 一寸[일촌]이요, 一尺[일척]의 시간은 곧 생명의 一尺 [일척]이 아니오니까. 一年[일년]을 一尺[일척]이라 하면, 그 百尺[백척]이 곧 우리의 一生[일생]이니, 生老病死[생로병사]와 城住壞空[성주괴공]이 오 직 그 동안에 있는 것이외다그려. 생명의 伸縮[신축]과 생활의 有意味[유의 미] ‧ 無意味[무의미]가 인생의 大事[대사]가 아니면 모를지로되, 만일 여기 서 더 지나는 일이 없다 하면, 시간의 거래 관계야말로 생명을 사랑하고 생 명을 意味[의미] 있게 하려는 이의 가장 정신을 차릴 일이오리다.

세월이 아까운 것이요, 아껴야 할 것이야 다시 두 말이 있을 것 아니지요 마는, 이른바 아낀다 함은 어찌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 오고가는 데 대 하여 분명한 의식과 똑바른 견해를 가짐이라 하노이다. 세월이 오는지 가는 지 모르는 이야말로 시간의 큰 낭비자가 될까 하나이다. 오면 어떻고 가면 어떤 줄이야 오고 가는 줄이나 안 뒤 일이니까, 더 말하잘 것 없읍니다.

세상을 가만히 보면, 이 의식이 분명하고 견해가 똑바른 이가 과연 없읍 니다. 입으로 옮겨서는 아는 듯하고, 바로 걱정을 분분히 하는 것 같아서는 매우 세월을 아끼고 사랑하는듯하지마는 참으로 뜻있게 세월 그것의 가치와 勢力[세력]을 인식하여 말려야 말 수 없는 情[정]으로 생명을 熱愛[열애]하 는 이는 과연 흔치 아니합니다.

한 해가 바뀌는 것은 인생으로서 보는 시간상 가장 중요한 토막이외다.

시간에 대한 사랑의 深淺[심천] 여하를 시험하는 데 이 新舊相換[신구상환] 하는 즈음에 處[처]하는 心事[심사]를 봄이 또한 捷利[첩리]한 방도일까 하 나이다. 생명의 토막토막을 가볍게 여긴다든지, 한 토막 한 토막의 관계를 모르고 지낸다든지 하는 이가 어찌 한 생명을 사랑한다 하며, 참 생명 사랑 할 줄을 안다 하오리까.

해가 바뀜을 단순하게「한 해가 왔구나」하고만 말 것이 아니외다. 갈 것 이 가고 올 것이 온 줄로만 알고 말 것이 아니외다. 이 동안에 어리던 이가 자라고, 젊던 이가 늙고, 盛[성]하던 것이 衰[쇠]하고, 存[존]하던 것이 亡 [망]하는 것이외다. 運會[운회]란 것도 이것의 모임이요, 劫[겁]이란 것도 이것의 모임이외다. 눈 얼음에 눌린 것도 움이 이 동안에 나고, 비바람에 떨꼈던 것도 싹이 이 즈음에 트입니다. 죽은 것이 살힘도 이 틈에 장만하 고, 넘어졌던 것이 설 짬도 이 사이에 얻는 것입니다. 榮枯[영고]와 消長 [소장]의 물레바퀴가 이리도 돌고 저리도 돌며, 이리도 돌려지고 저리도 돌 려집니다. 웃음이 울음되고 설움이 기쁨 되는 微妙[미묘]한 사슬이 무론 다 해와 함께 바뀌며 오고가고 하는 것이외다. 인류의 역사가 시계일 것 같으 면, 해의 바뀜 ─ 한 해 한 해 신구가 相替[상체]함은 分刻[분각]을 가리키 는 바늘입니다. 시계가 時刻點[시각점]과 時刻針[시각침]으로써 시계 노릇 을 하는 셈으로 역사는 이 해가 자꾸 바뀜으로써 冊張[책장]이 늘어가 뜻있 는 그릇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또 한 해가 왔구나」할 때에 뜻있게 살려하는 이는 그만만 하고 말 수 없읍니다 자기의 목숨이 . 뜻 있도록 하였으면 한 해 만큼 더 있게 되는 토 막이요, 뜻 없도록 하였어도 그만큼 더 없이 되는 토막이니, 冊張[책장] 하 나를 아주 젖히는 자리에 도무지 五不關[오불관]할 용기가 어디로서 나오리 까.

해 바뀌는 목장이는 묵은 해에 대하여는 묵은 때 씻는 浴槽[욕조]외다. 한 해 길 오는 동안에 건 살과 쐰 먼지와 앉은 때를 더러운 줄 알고 거북한 줄 아는 이는 한번 그 속에 들어서지 아니할 수 없읍니다.

깨끗하기를 기약하는 마음이 많으면 많이 씻을 것이요, 적으면 적게 씻을 것이요, 없으면 아주 그저 지내오리다. 이른바 씻는 이는 곧 「한 해가 왔 구나」하고만 말지 아니하는 이, 곧 지난 해의 뉘우침이 있는 줄 알고, 또 한 고칠 줄 아는 이외다.

해 바뀌는 목장이는 새해에 대하여는 새힘을 길러 내는 원천이외다. 한 해 길 갈 다릿심도 올리고, 신발도 장만하고, 봇짐도 꾸릴지니, 이리하는 힘은 온전히 그 샘에서 떠내는 것이외다. 가장 힘이 있고자 하는 이는 가장 큰 힘을 그리로서 길어 낼 것이요, 작게 힘이 있으려 하여도 작게라도 길어 내야 할 것이요, 오직 아무 생각과 일이 없으려 하는 이만 이 샘에서 아무 뜨고 푸고 함이 없으오리다. 길어 낸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새 希望[희 망]을 實現[실현]할 만한 決心[결심]과 定力[정력]이외다. 이른바 길어 내 는 이는 곧 「한 해가 왔구나」하고만 말지 아니하는 이, 곧 한 해를 온전 히 바람 ‧ 희망 있게 하고, 또 바람 속으로만 지낼 決心[결심]을 하는 이외 다.

묵은 뉘우침이 새해에 걸치지 아니하게하고 새해의 바람이 泡風[포풍] 幻 影[환영]에 돌아가지 아니할 만한 自信力[자신력]을 가지면, 한 해의 온 것 이 그에게 있어서는 徒爾[도이]치 아니한 것이외다. 그리하여 一寸[일촌]의 생명은 一寸[일촌]만큼 뜻있게 하고, 一尺[일척]의 생명은 一尺[일척]만큼 뜻있게 하여 須臾[수유]라도 뜻 없게 아니하고 찰나라도 뜻 없게 아니하면 그는 시간 ─ 생명을 사랑한다고도 할 것이요, 사랑할 줄을 안다고도 할 것 이외다. 시간의 왕래는 深意[심의]와 진미를 능히 안다 할 것이외다. 그 생 애에는 省察[성찰]과 감각과 奮發[분발]과 更新[갱신]이 서로 因[인]이 되 고 서로 果[과]가 되어 우주의 대본에 합일하는 생명이 늘 활발히 뛰놂을 보오리라.

여기까지 쓰매, 밤이 벌써 열 두 시라, 방안에는 갓넣은 煖爐[난로]의 석 탄이 이마를 온이로 삶으려는 듯하고, 옆에서 요란히 바둑 두는 이의 고대 로 놓아두라 하는 다짐 소리는 한참 잦으며, 밖에는 보름 가까운 달이 찬 일기의 助勢[조세]를 얻어 쌀쌀하게도 밝은데, 「만쥬노 호야호야」를 외는 소리가 다리 위로 지나갑니다.

(十二[십이]월 二七[이칠]일 夜[야])

<一九一五年[일구일오년] 새별 一月號[일월호] 第十六卷[제십육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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