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이 가득 쌓이고 모래바람 심(甚)한 북(北)쪽 나라 산국(山國)에서 생(生)을 받아, 고요히 어린 때를 보낸 파인(巴人) 군(君)이 그 독특(獨特)한 정서(情緖)로써 설움 가득하고 느낌 많은 고향(故鄕)인 ‘국경방면(國境方面)’서 재료(材料)를 취(取)하야 침통비장(沈痛悲壯)한 붓끝으로 ‘로맨틱’한 서정시(敍情詩)와 그밖에 청춘(靑春)을 노래한 서정시(抒情詩) 몇 편(篇)을, 제작(制作)하여 ‘국경(國境)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지금(只今) 세상(世上)에 보내게 되었으니, 대개 이러한 시작(詩作)은 오직 이러한 작자(作者)의 손을 거쳐서야 비로소 참 생명(生命)을 발현(發現)할 것인 줄 압니다, 더구나 이 표현형식(表現形式)을 장편서사시(長篇敍事詩)에 취(取)하게 되었음은 아직 우리 시단(詩壇)에 처음 있는 일이매 여러 가지 의미(意味)로 보아 우리 시단(詩壇)에는 귀(貴)여운 수확(收穫)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파인(巴人) 군(君)의 시(詩)에는 엄숙한 힘과 부드러운 미(美)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엄숙한 힘은 열렬(熱烈)하게 현실(現實)을 ‘메쓰’하여 마지않으며, 부드러운 미(美)는 다사한 ‘휴먼’의 색조(色調)를 띠어, 높이 인생(人生)을 노래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파인(巴人) 군(君)은 ‘휴머니스트’적(的) 색채(色彩)를 많이 가진 시인(詩人)입니다. 작자(作者)가 인도(人道)의 기사(騎士)로 앞장서서 거화(炬火)를 쥐고 앞장서서 나가며, 맘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용서 없이 가래침을 배앝는 것이 한껏 거룩하다 하겠고, 더구나 무너져 가는 근대(近代)의 문명(文明)에 대(對)하여 꾸짖음과 ‘바로잡음’을 보내며 전원(田園)의 진순(眞純)한 생활(生活)을 찬미(讚美)하는 점(点)에 있어서는 매우 아름다운 일인가 합니다. 이것은 작자(作者)가 잘못입니까, 근대(近代)의 물질화(物質化)한 문명(文明)이 잘못입니까? 아마 여러분은 반드시 슬퍼할 줄 알며 함께 싸울 줄 압니다. 나는 우리 시단(詩壇)에 이러한 용사(勇士) 하나를 보내게 됨을 몹시 기뻐하며, 아울러 이 『국경(國境)의 밤』이 사람의 가슴에 울어지어다 하고 바랍니다.

1924. 12. 13.
안서(岸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