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부인의 가정생활
내가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 마침 고우(古友: 崔麟(최린)의 별호) 선생이와 계셔서 유력한 사람의 소개로 통변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 삼인이 시외 기차를 타고 약소국민회 부회장 살레 씨 댁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은 경성서 영등포 갈 만한 거리의 별장 많은 곳이라 씨의 댁도 살레 씨 장인이 돌아갈 때에 준 별장이라 합니다. 대문에서 줄을 잡아당기니 미리 약속한 터이라 살레 씨가 친히 나와 문을 엽니다. 문을 들어서니 좌우로 수목이 울창하고 잔디 위에는 갖은 꽃이 다 피어 있고 개소리 닭소리가 모두 납니다. 단아한 양옥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수수하고도 점잖은 부인이 마중을 나와서 책이 산같이 쌓이고 갖은 골동품, 각국 국기를 모아놓은 서재로 인도합니다. 양씨 사이에는 정담(政談)이 있은 후 살레 씨는 일본에 두 번 갔다 온 감상중 앵화(벚꽃)와 일본 여자와의 자태가 좋더란 말, 조선에 한 번 갔다 온 감상 중 칼춤 추는 것을 볼 때 칼같이 무서운 물건을 춤으로 예술화한 것은 그만치 조선 민족이 선량하고 평화스러운 것을 알겠습디다 하는 말을 재미있게 들었는데, 씨는 특히 조선에 호감이 있었고 동정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1919년 사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프랑스여자참정권운동회 회원으로 가정에 충실한 현처양모요, 사회상 견실한 활동가입니다. 이날 놀고 가서 그 후 한 번 다시 갔을 때 프랑스 가정에 가 있기를 원하였더니 두말 아니하고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기뻐서 곧 이사를 하였습니다. 때에 부군은 독일 베를린에 가 있을 때입니다. 이래 3개월 동안 살레 씨 가족과 기거,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이 집 가족은 50여 세 된 살레 씨, 40여 세 된 부인, 18세, 16세 된 딸 7세 된 아들, 나, 여섯 식구이었습니다. 집은 목재로 실용적일 뿐입니다. 아래층은 서재겸 응접실과 식당이 있고 살레 씨가 여행 중에 수집한 남양(南洋) 산물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2층에 올라가려면 내 방이 있고, 딸의 방이 있고, 부부 방이 있으며, 목욕실, 화장실이 있습니다. 3층에는 재봉실이 있고, 유아실이 있어, 벽, 의자, 책상, 책장 모두가 진홍색으로 꾸미어 색의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딸들이 먼저 일어나 보리죽과 차를 갖다 주면 자리 속에서 먹고 나서 세수를 하고 살레 씨는 회장 혹 학교로, 부인은 자기 사무소로, 딸들은 중학교로, 나는 연구소로 나가면 종일 집은 7세 된 남아와 개가 보고 있습니다.
저녁 때 돌아오면 개가 먼저 짖고 어린애가 3층에서 들창문을 열고 “누구요?” 하는 것은 과연 사랑스럽습니다. 점심은 보통 날은 벤또(도시락)를 싸가지고 가고 일요일이나 제일(祭日)은 여 고인(女雇人)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해만 주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납니다.
저녁 밥상에는 가족이 늘어앉습니다. 내 자리는 언제든지 주빈석, 살레 씨 우편에 앉게 됩니다.
살레 씨는 친절하게,
“마담 김, 오늘 그림 잘되었습니까?”
하면 부인은 얼른,
“그럼요, 오늘 그려왔는데 썩 잘되었던걸요. 비씨에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지요.”
이렇게 화제가 시작되면 남편은 친구들과 지내던 이야기, 부인은 동무들과 일하던 이야기, 딸들은 길에서 보던 이야기를 손짓, 발짓, 코짓, 눈짓을 하며 흉내를 내면 가족들은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고 때로는 내 서투른 불어가 동문서답하는데 깔깔 웃게 됩니다. 이럴 때마다 살레 씨는 내가 무참히 여길까봐 시치미 딱 떼고 눈을 내리뜨고 웃음을 참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고 때때로 웃을 때가 있습니다.
저녁 밥 후에는 혹 정원으로 산보도 하고 혹 피아노를 치고 춤을 추기도 합니다. 나도 주인이나 부인과 짝하여 춤을 추고 좋아하면 주인 부부는 퍽 좋아했습니다. 또는 라디오를 듣기도 하다가 부인이 시계를 보고 “시간이다” 하면 딸들과 나와 아들은 주인 부부에게 키스로 인사하고 다 각각 방으로 돌아가고 부부는 서재실에 남아 있습니다. 하룻저녁은 궁금하기에 부엌에 물을 떠먹으러 가는 체하고 서서 보았습니다. 부부는 비둘기같이 붙어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속살거리는지 재미가 깨가 쏟아질 듯하였습니다. 그날 지낸 일을 서로 고해 바치는 것 같습니다. 그들 앞에는 그날 신문의 여러 가지가 놓여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어디로 보든지 화락한 가정이었습니다.
특별히 부인의 가정생활을 말씀하면 아양보양하고 앙실방실하고 오밀조밀하고 알뜰살뜰한 프랑스 부인 중에는 점잖고 수수하고 침착하나 어딘지 모르게 매력을 가진 부인이니, 강약이 겸비하여 물샐틈없이 규례(規例)가 꼭 째이게 살림살이를 하고 염증이 나지 않고 신산스럽지 않은 생활이 즉 예술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편에게 다정스럽게, 자식들에게 엄숙하게, 친구에게 친절하게, 노복에게 후하게, 가축에게 자비스럽게 구는 데는 감복하지 않을 수 없고, 더욱이 가풍이 학자의 생활인 만치 질소(質素)하고 자치제이라 주인 이하 어린이까지 세숫물도 자기가 떠다 하고 밥 먹고 난 그릇까지 다 각각 부엌에 내다 놉니다. 때때로 떼아트르, 오페라, 시네마 초대장이 오면 개에게 집 잘 보라고 부탁하고 문을 닫아 걸고 구경을 갑니다. 구경을 다하고 오다가 카페에 들어가 차나 음식을 먹고 돌아옵니다. 어린이는 좋아서 껑충껑충 뛰면 어머니는 그 뺨에 키스하고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내 옆으로 와서 가만히, “조선 어린이들도 저렇지요.” 합니다. 나는 떠듬떠듬하는 말로 “위 라무의미쇼즈(예, 꼭같습니다)”하고 깔깔 웃었습니다. 딸 둘은 컴컴한 길가에서(시외인 고로) 지금 본 연극을 흉내내며 서로 붙잡고 춤을 춥니다. 살레 씨는 손뼉을 치며, “트레비안 트레비안(잘한다, 잘한다)” 합니다. 이같이 이가정의 공기는 언제든지 명랑하고 유쾌합니다.
부인의 사회적 생활을 잠깐 말씀하면, 부인은 매달 잡지 신문에 기고할 뿐 아니라 여자 참정권에 대한 책도 저술하였습니다. 그 신문 잡지책에 사인한 것만 보고 감복하였을 뿐이요, 내용을 읽을 줄 모른 것이 큰 유감이었나이다. 부인은 집회 연회에 자주 출입이 있었는데 야회복을 입고 나서는 반드시 내 방에 와서,“내 모양이 어떻소”하고 옆으로 살짝 돌아서며 애교를 부릴 때에는 온몸이 으쓱해지도록 집어삼키고 싶었습니다. 반드시 부부 동행이며 돌아올 때는 우스운 장난감을 사가지고 와서 식탁에 놓고 가족들을 웃깁니다. 이론 캐기 좋아하는 내가 만일 언어를 능통할진대, 소득이 많았을 것이나 임의로 못한 것이 큰 유감이외다.
끝으로 자녀교육에 대한 말씀을 하면, 대개 파리 여자들의 의복은 값싼 감으로 아이를 묘하게 하여 입히니 그 고안(考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집 딸들도 일요일에는 마루바닥에 의복감을 펴놓고 외투를 말라 지어 입고 나선다든지 모자를 만들어 쓰고 나서면 어느 상점에서 사 온 것이나 지지 않아서 파리 여자는 우선 자기가 생긴 모양을 알아가지고 제 체격, 제 얼굴과 조화 있게 해 입어도 사람 그것이 즉 예술품인 것은 루이 14세의 진수(眞髓)가 프랑스 국민성에 꼭 박혀 있게 된 것이외다. 어린 아들과 동갑인 여아가 옆집에 있습니다. 아이들 노는 것을 가보니 울타리를 뚫고 자리를 펴고 이쪽 아이는 이쪽에서 저쪽 아이는 저편에 앉아 손과 입이 왔다 갔다 할 뿐인 것을 볼 때 과연 인가 도덕(隣家道德)이 심한 것을 알겠습디다. 이 남아는 명년 봄이 고등소학교 입학기라 하여 준비로 매일 한 시간씩 어머니가 국어 독본을 가르치는데 옆 집 여아도 같이 배웁니다. 시간이 되면 반드시 정문으로 들어와서 반드시 정식으로 인사하는 것을 볼 때 이상스러이 보입디다. 그리고 남아는 어렸을 때부터 남자란 관념을 넣어주어 조석으로 밥상 볼 때, 식기를 나눠 놓는 것, 딸들이 식기를 씻으면 행주질 치는 것, 추운 아침에도 층층대 걸레질을 치게 합니다.
그리고 가축은 개, 닭, 토끼, 고양이 등이니 부인은 아침마다 일어나는 대로 모이를 주고 쓰다듬고 키스하고 병이 나면 안타깝게 어루만지고 합니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연하장을 하여 안부를 알고 이번에도 연하장이 길게 왔는데 한 번 조선 구경을 오겠다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