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승만 박사 영결식 허정 전 대통령권한대행 조사
불초 허정은 우남 선생의 영정 앞에 엎드려 통곡합니다. 1965년 7월 19일 저녁 7시 35분-이역만리 하와이로부터 선생이 운명하신 비보가 날아든 시각입니다.
이 무슨 청천 벽력같은 부음입니까. 국보간난(國步艱難)한 이 시국에 이 나라 백성들을 뒤로 두고 홀홀이 떠나시더니 하늘도 무심하고 땅도 너무 매정스럽습니다.
민족의 거성이 떨어진 순간, 온 누리는 대한민국의 국부이시며 아시아의 지도자요 20세기의 영웅이신 우남 선생의 장서(長逝)하심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호랑이도 죽을 때는 제굴을 찾아가 죽는다던데, 하물며 나는 여생이 얼마 남지도 않았거늘 언제나 그리운 고국땅에 돌아가서 묻히리.....’
연전 하와이의 병상에서 몽매불망 그리시던 조국을 생각하며 눈물지으시던 그 말씀 아직도 귓전에 선하게 들려오는 듯합니다. 슬프다 선생이여,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시던 조국이언만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이제 유명을 달리해서 넋만이 환국하시다니, 이를 두고 인생 무상이라 하오리까. 다시금 옷깃을 여미고 선생의 생전 발지취를 더듬어 추억하므로써 영결사(永訣辭)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선생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확립자이십니다. 비록 몇몇 사람들의 불민한 과오로 하여, 국부로써 만민의 추앙을 받는데 흠을 끼치기는 했을망정, 일제의 질곡에서 광복된 조국을 반공․반탁․자유․민주의 독립국가로 창건하여 국기(國基)를 공고한 반석 위에 세우신 그 위대한 업적은 한국의 근대사를 길이 빛낼 것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고 하시던 말씀은 바로 선생의 민족적 지도 이념이셨고 오늘과 내일에도 그대로 적용될 우리의 살길입니다. 이 지도 이념은 신탁통치 반대 투쟁과 좌우합작 분쇄의 원동력이 되었고 공산 오랑캐를 물리치는 저항력이 되었으며 일치단합으로 조국 재건에 매진하는 활력소가 되고 있습니다.
선생은 불요불굴 강력한 지도자였습니다. 민국(民國)이 서고 선생이 영도하시던 12년간은 일취월장 새로워지는 것이 있었고, 서정백기(庶政百機)와 민생은 안정으로 굳어져 갔습니다. 오늘날 내우외환이 겹치는 정치 세태를 목도할 때마다 선생의 체온이 아쉬운 줄을 느낍니다. 좀더 연부역강하셔서 이 민족의 삶의 등불이 되어 주셨더라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는 것이 부질없는 환상만은 아닐 것입니다.
고금왕래에 인간으로서 결점과 과오가 없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선생 역시 한 세기를 살고 가신 인생이었습니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았지만, 선생이 쌓으신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감히 말하거니와 광복과 건국의 공훈, 그리고 반공 애국하시던 그 지도 이념에는 어느 누구도 이론을 걸 사람이 없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선생은 민의를 존중하는 정치인이었습니다.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선생은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 이라고 하시면서 깨끗이 권부(權府)를 물러나시지 않았습니까.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시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 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시고 하야하심은 선생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인들 그 당시엔 마음의 타격을 안받았을 리 만무합니다. 반생을 살아온 하와이에 가서 잠깐 정양하고 돌아오겠노라는 말씀을 듣고 행정수반이던 나로서는 단독 결단을 내려 그곳으로 떠나시게 했던 것입니다. 1960년 5월 29일, 일요일 새벽이었다고 기억됩니다. 김포 공항에서 CAT 전세기로 떠나기 직전, 선생은 비행기 속에서 나에게 마지막으로 ‘아이크가 오기 전에 돌아오겠노라’ 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때 신문들은 ‘구질서의 거대한 1인이 조국을 등진 날’이나 ‘침묵과 눈물로써 하늘에 작별했다’ 고들 썼습니다.
국회에서는 ‘범인을 도피시켰다’는 이유로 나를 문책하려는 움직임마저 있었기에 나로서는 염량세태, 인심의 야박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선생이 물러선 뒤, 혼란해진 여건 아래서 과정(過政)을 맡은 나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 과업을 완수하겠다’ 는 생각으로 3개월 동안 내각책임제인 ‘새 질서’의 산파역을 수행하면서도 언제나 선생의 치국대도(治國大道)를 본받으려 했었지만, 감히 범인이 따르기 어려움을 체감했습니다.
12년 집권하는 동안, 선생을 ‘한국의 호랑이’니 ‘늙은 타이거’로 불리어졌었지만, 내가 아는 우남은 지나치게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춘풍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고 20~30세나 어린 연하자에게도 반드시 공대를 하며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육친이라도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의 말이라도 곧이 듣는 성미였습니다. 조크를 잘 하기도 으뜸이었지만 ‘고집장이’로도 유명했습니다. 직접 담화(直接談話)를 쓰지 아니하고 장관을 해임할 때도 ‘그 동안 수고했으니 좀 나가서 쉬게’ 하는 식으로 둘러서 얘기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어리둥절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부드럽고 자애롭고 유모어 센스가 풍부한 어른이면서도, 한번 화를 내시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했습니다.
국내 여론을 살피고 바른 소리를 들으려고 무척 애를 쓰셨지만, 선생 내외분은 영어에 능통한 반면, 우리말이 서툴러서 국내 신문을 잘 읽지 못하여 다소 민정(民情)에 어두웠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소위 ‘인의 장막’이란 것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되도록 여러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옳은 사람 뽑겠다는 일념에서 인물천거함(人物薦擧函)까지 설치한 적이 있었지만 좋았던 아이디어에 비겨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진언을 받으면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고 즉석 결단으로 실천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 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 놓고 연후에 진부를 가려내는 수가 적잖았습니다. 흔히 선생을 두고 ‘독재자’라고도 했지만, 미국에서수학하신 선생은 독재자는커녕 분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였습니다.
오히려 우유부단한 면까지 없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몸가짐은 서구식 신사이면서도 시대감각이 다르고 사고방식이 고전적이어서 제왕처럼 군림하는 자세를 지녔던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을 뿐입니다. 인덕(仁德)으로 선정(善政)하려 한 것은 좋았지만, 군주나 제왕처럼 군림하는 것은 환영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면 좋은 일, 궂은 일, 착한 일, 잘못된 일이 모두가 다 흘러간 과거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설움과 허전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무딘 붓을 놓거니와 인자하신 그 모습, 구천에서 재회할 때까지 명복을 누리소서.
출처
편집- 한국일보 1965년 7월 20일자 특별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