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사 (7차 교육과정)/Ⅲ. 통치 구조와 정치 활동
단원의 길잡이
편집정치사는 국가와 사회의 운영을 둘러싸고 벌이는 정치 활동의 역사이다. 정치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정치 활동의 주체인 정치 세력, 정치 세력이 활동하는 틀인 정치 구조, 그들이 정국을 운영해 나가는 구체적인 실상인 정치 운영, 그 운영의 논리인 정치 운영론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또, 정치 활동의 고리가 되는 권력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역사에서 정치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각 시기별로 정치 세력의 존재 형태와 성격, 통치 체제의 정비와 운영, 각 시대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백성의 생활 안정을 위한 정국의 운영 방향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울러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정치 활동은 우리 사회가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해 온 과정이고, 통치 구조의 변화 과정도 당시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들이 노력한 결과로 나타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기원전 | B.C. 57 | 신라 건국 |
B.C. 37 | 고구려 건국 | |
B.C. 18 | 백제 건국 | |
600 | 676 | 신라의 삼국 통일 |
698 | 발해 건국 | |
800 | 828 | 청해진 설치 |
900 | 918 | 고려 건국 |
926 | 발해의 멸망 | |
936 | 고려의 후삼국 통일 | |
958 | 과거 제도 실시 | |
1000 | 1019 | 귀주 대첩 |
1100 | 1135 |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1170 | 무신정변 | |
1200 | 1231 | 몽골의 1차 침입 |
1270 | 개경 환도 | |
삼별초의 대몽 항쟁 | ||
1300 | 1392 | 조선 건국 |
1394 | 한양 천도 | |
1400 | 1485 | 경국대전 완성 |
1500 | 1592 | 임진왜란 |
1600 | 1609 | 기유약조 |
1636 | 병자호란 | |
1700 | 1712 | 백두산 정계비 건립 |
1725 | 탕평책 실시 | |
1776 | 규장각 설치 | |
1800 | 1876 | 강화도 조약 체결 |
1894 | 동학 농민 운동 | |
1897 | 대한제국 성립 | |
1900 | 1919 | 3⋅1 운동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 ||
1945 | 8⋅15 광복 | |
1948 | 대한민국 정부 수립 | |
2000 | 2000 | 6⋅15 남북 공동 선언 |
1. 고대의 정치
편집고대 국가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왕정 체제였다. 왕의 권력은 점차 강화되어 전제화되었고, 귀족들은 왕과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 나갔다. 귀족들은 원래 부족 사회의 족장 출신으로서 소수의 혈연적 특권 계층이고 매우 폐쇄적인 신분이었으므로, 지방 세력이나 다른 세력이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조직한 통치 체제도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아직 관직 체제가 완비되지 않았고, 행정 업무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정국의 운영도 합리성이 부족했고, 힘의 논리가 더 작용하였다. 특히, 영토 확장을 위하여 주변 국가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므로 군사력이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 고구려 전성기인 5세기 광개토 대왕의 정복 활동의 내용과 그 의미를 알아보자.
- 백제의 사비성 천도 이후 6세기 한반도의 정세 변화를 알아보자.
- 신라의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 전제 왕권의 확립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고대의 세계
편집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을 이룬 중국은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중국에서는 주나라가 쇠퇴하면서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기를 겪었다. 진은 이러한 혼란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진은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고, 뒤를 이은 한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서역과 교역을 확대하였다. 특히, 한은 유학을 국가의 이념으로 채택하여 유교주의적 중국 문화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3세기 초 후한이 멸망한 뒤 중국은 다시 분열되어 삼국 시대와 5호 16국 시대, 남북조 시대로 이어졌다. 이 때, 양쯔강 이남 지방의 개발이 본격화되었고, 문벌 귀족이 사회의 지배 세력이 되었으며, 불교가 융성하는 등 귀족 문화가 발달하였다.
6세기 말에 수가 중국을 통일하였으나 무리한 고구려 원정 끝에 멸망하고, 7세기에 당이 건국되었다. 당에서 발달한 한자, 유교, 불교, 율령 체제 등은 우리 나라, 일본, 베트남 등에 전파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을 이루었다.
한편, 인도에는 아리아 인이 남하하여 철기 문화를 보급하고, 브라만 교와 카스트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어 브라만 교에 반대하고 평등을 강조한 불교가 성립하였다. 마우리아 왕조 때 정리된 소승 불교는 동남 아시아로 전파되었고, 쿠샨 왕조 때에 성립한 대승 불교는 간다라 미술과 함께 중국, 우리 나라, 일본으로 전파되어 이들 지역에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 굽타 왕조 시대에는 인도의 민족 종교인 힌두 교가 성립되고, 인도의 고전 문화가 완성되어 인도 문화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강력한 전제 국가가 발전하였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번성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였다. 7세기에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함마드가 이슬람 교를 창시하여 이슬람 문화권이 형성되어 갔다.
서양에서는 지중해 연안을 중심으로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발전하여 서양 문화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리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아테네에서는 시민 중심의 민주 정치가 발전했고, 인간 중심의 문화를 꽃피웠다. 기원전 4세기 말에 그리스가 몰락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가 융합되면서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하였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 말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이어 지중해 전역을 차지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공화정은 혼란을 거듭하다가 기원전 1세기 말에 제정이 성립되어 약 200년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이루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2세기 말경부터 군인 황제 시대의 혼란을 겪고, 사회⋅경제 기반도 흔들려 쇠퇴하기 시작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4세기 말에 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분열되었다(395).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하고(476), 비잔티움 제국은 이후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 등을 종합하여 서양 고대 문화를 완성하였으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특성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또, 넓은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법률이 발전하여 로마법이 성립하였다. 로마 제국 시대에 세계 종교로 성장한 크리스트 교는 로마 문화에 계승된 그리스의 인간 중심 사상과 함께 서양 문화의 2대 조류가 되었다.
4세기부터 6세기 사이에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각지에 국가를 세우고 정착하였다. |
[2] 고대 국가의 성립
편집고대 국가의 성격
편집철기 문화의 보급과 이에 따른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성장한 여러 소국은 그 중에서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 왕국을 이루었다. 왕은 자기 집단 내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다.
이 과정에서 주변 지역을 활발하게 정복하여 영역을 확대하였고, 정복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고,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기 위하여 불교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차례로 건국되었다고 하였으나,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은 일찍부터 중국 문화와 접촉한 고구려가 가장 이르다. |
삼국의 성립
편집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한 것은 고구려였다.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고구려는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 이르러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정복 활동 과정에서 커진 군사력과 경제력을 토대로 왕권이 안정되어 왕위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었고, 통합된 여러 집단은 5부 체제로 발전하였다.
이후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고,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기원전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 내면서 성장하였다.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신라는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되었다(기원전 57).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왕)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왕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또,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한편, 신라 해안에 나타나던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그 후로 신라는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철기 문화를 토대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점진적인 사회 통합을 거쳐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세기경에는 이들 사이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중심이 되어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였다. 이를 전기 가야 연맹이라고 부른다. 연맹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42), 그 세력 범위는 낙동강 유역 일대에 걸쳤다.
가야의 소국들은 일찍부터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가 발달하였다. 또, 풍부한 철의 생산과 해상 교통을 이용하여 낙랑과 왜의 규슈 지방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이 발달하였다.
4세기 초부터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밀려 전기 가야 연맹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몰락하여 가야의 중심 세력이 해체되고, 가야 지역은 낙동강 서쪽 연안으로 축소되었다.
신라의 발전과 왕호 변천 신라에서는 왕의 칭호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왕 등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정치적 군장과 제사장의 기능이 분리되면서 그 칭호가 나누어지게 되었다. 김씨가 왕위 세습권을 독점하게 되면서 왕권의 강화를 표시하기 위해 대군장이라는 의미의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그 뒤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고, 이어 6부를 개편하여 중앙 집권화를 추진하면서 마립간 대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
백제는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알려진 온조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의 하남 위례성에 정착한 후 마한 소국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
[3] 삼국의 발전과 통치 체제
편집삼국의 정치적 발전
편집고구려는 3세기 중반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소수림왕 때에는 율령의 반포, 불교의 공인, 태학의 설립 등을 통해 지방에 산재한 부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체제를 강화하려 하였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의 백제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한편, 신라는 5세기 초에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5세기 말에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백제의 해외 진출 ○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그 후에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진평현)이라 한다. 〈송서〉 ○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 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晉代)에 구려(句麗: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 진평의 두 군을 차지하였다. 〈통전〉 |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한다는 의미이다. |
삼국 간의 항쟁
편집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가야 연맹도 5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6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고,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 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고구려의 왜 격퇴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 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고 하였다. …… 10년(400)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되었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 |
성왕은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였다. |
삼국의 통치 체제
편집삼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5부나 신라의 6부가 중앙의 지배 집단이 되었다. 각 부는 중앙 왕실에 예속되었으나, 각 부의 귀족은 각자 관리를 거느리고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였다. 왕은 여러 귀족 중에서 가장 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나 여러 부의 힘을 통합하여 국가의 동원력을 강화하는 일은 각 부의 귀족으로 구성된 회의체에서 결정하였다.
그 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관등제가 정비되어 각 부의 귀족과 그 아래에 있던 관리들은 왕의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각 부의 부족적 성격이 행정적 성격으로 바뀌어 중앙 집권 체제가 형성되었다.
삼국의 관등제와 관직 체계의 운영은 신분제에 의하여 제약을 받았다. 신라는 관등제를 골품 제도와 결합하여 운영하였다. 즉, 개인이 승진할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골품에 따라 정하고, 일정한 관직을 맡을 수 있는 관등의 범위를 한정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였다.
삼국의 중앙 정치는 고구려의 경우 대대로를 비롯하여 10여 등급의 관리들이 나누어 맡았다. 백제는 왕 밑에 좌평을 비롯한 16등급의 관리가 있어 나랏일을 맡아 보았는데, 그 중에서 상좌평이 최고 책임자였다. 신라는 국가가 발전해 감에 따라 병부와 집사부 등 여러 관서를 차례로 두었다. 또,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은 귀족 회의를 주관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삼국의 중앙 지배층은 정복 지역을 세력의 크기에 따라 성이나 촌 단위로 개편하여 지방 통치의 중심으로 삼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민을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배력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원래 성이나 촌을 지배하던 지방 세력가의 자치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삼국은 뒤에 최상급 지방 행정 단위로 부와 방 또는 주를 두고 지방 장관을 파견하였다. 그 아래의 성이나 군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말단 행정 단위인 촌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않고 토착 세력을 촌주로 삼았다. 삼국의 지방 행정 조직은 그대로 군사 조직이기도 하였으므로 각 지방의 지방관은 곧 군대의 지휘관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 국가의 주민 통치는 본질적으로 군사적 지배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백제의 방령은 각각 700~1200명의 군사를 거느렸고, 신라의 군주는 주 단위로 설치한 부대인 정을 거느렸다. 신라에는 정 외에도 서당이라 불리는 군대가 있었다.
백제의 정사암 회의 호암사에는 정사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나라에서 장차 재상을 뽑을 때에 후보 3, 4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해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가지고 와서 열어 보고 그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 이런 이유로 정사암(政事巖)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
관등제의 의미 관등제는 관리들의 등급을 정한 것으로, 종래의 족장적 성격을 띤 다양한 세력 집단이 왕 아래에 하나의 체계로 조직되어 상하 관계를 이룬 것이다. 고구려는 4세기경에 각 부의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0여 관등을 두었고,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미 6좌평제와 16관등제의 기본틀을 마련하였다. 신라도 법흥왕 때에 각 부의 하급 관료 조직을 흡수하여 17관등제를 완비하였다. |
고구려의 제가 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가 대표적인 귀족 회의체이다. |
삼국은 외형상 중국의 군현 제도와 유사한 지방 조직을 설치했지만, 실제로는 지방관의 수가 많지 않아서 주요 거점만을 지배하는 데 그쳤고, 나머지 지역은 자치를 허용하여 간접적으로 주민을 지배하였다. |
지방관을 보좌하면서 촌락 내의 행정과 군사 실무의 처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4]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편집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편집중국을 다시 통일한 수가 동북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자, 고구려에는 위기감이 점차 높아졌다. 이에,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과 남쪽의 백제, 왜와 연결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면서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수를 건국한 문제와 뒤를 이은 양제는 거듭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요하를 굳게 지켜 문제의 침략을 막아 냈고, 백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온 양제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는 결정적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살수 대첩, 612).
수의 뒤를 이은 당도 고구려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에, 고구려는 국경에 천리장성을 쌓고, 방어 체제를 강화하는 등 당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당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민⋅군이 협력하여 마침내 당군을 물리쳤다(645). 이후에도 고구려는 당의 빈번한 침략을 물리쳤다.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낸 것은 고구려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한반도 침략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
고구려가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647년(보장왕 6)에 16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성으로 북쪽의 부여성(농안)에서 남쪽의 비사성(대련)에 이른다. 연개소문은 이 성곽 축조를 감독하면서 요동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여 정권을 잡을 수 있었다. |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편집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막아 내는 동안 신라는 백제와 대결하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 후 당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김유신이 지휘한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끈 백제의 결사대를 격파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출하였고, 당군은 금강 하구로 침입하였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660).
백제 멸망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부흥 운동은 좌절되었다. 이 때,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하여 쫓겨갔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거듭된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지배층의 권력 쟁탈전으로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동북 아시아의 패권자로 군림하던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668).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한성(황해도 재령)과 오골성을 근거지로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한때 평양성을 탈환하기도 하고, 후에는 신라의 도움을 받으면서 기세를 떨치기도 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복신과 도침의 백제 부흥 운동 근거지로서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군의 거점이었던 성으로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있다. |
신라의 삼국 통일
편집당이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은 백제의 옛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고구려의 옛 땅에는 안동 도호부를 두어 지배하려 하였다. 또, 경주에도 계림 도독부를 두고 신라 귀족의 분열을 획책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였으며,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도 요동성으로 밀어 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외세의 이용과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한 이남의 땅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의 세력을 무력으로 몰아 낸 사실에서 자주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또, 고구려⋅백제 문화의 전통을 수용하고 경제력을 확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5] 남북국 시대의 정치 변화
편집통일 신라의 발전
편집통일 이후 신라는 강화된 경제력과 군사력을 토대로 왕권을 전제화하였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 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모역 사건을 계기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다시 편성하였다. 중앙 정치 기구와 군사 조직을 정비하고, 9주 5소경 체제의 지방 행정 조직을 완비하였다. 또, 문무 관리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귀족의 경제 기반이었던 녹읍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유교 정치 이념의 확립을 위하여 유학 사상을 강조하고, 유학 교육을 위하여 국학을 설립하였다.
왕권이 전제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진골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 반면에, 진골 귀족 세력에 눌려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이들은 학문적 식견을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조언자로 활동하거나 행정 실무를 맡아 보았다.
이렇게 확립된 전제 왕권은 진골 귀족 세력의 반발로 경덕왕 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녹읍이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전이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도 압박을 받았다.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자, 중앙의 귀족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더욱이 그들의 지나친 향락과 사치 생활로 인하여 농민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중시를 경덕왕 때부터 시중이라고 하였다. |
신문왕이 즉위하던 해에 왕의 장인 김흠돌의 모역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많은 귀족이 관련되어 있어서 귀족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이 행해졌다. |
발해의 건국과 발전
편집고구려 멸망 이후 대동강 이북과 요동 지방의 고구려 땅은 당의 안동 도호부가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유민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당에 계속 저항하였다.
7세기 말에 이르러 당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고구려 장군 출신인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 집단들은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 발해의 건국으로 이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었다. 발해는 영역을 확대하여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차지하였다. 비록 그 영역에 말갈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지만,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또는 고려국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사실이라든지, 문화의 유사성으로 보아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 때에는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동북방의 여러 세력을 복속하고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였다. 발해의 세력 확대에 따라 신라는 북방 경계를 강화하였고, 흑수부 말갈도 당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발해는 먼저 장문휴의 수군으로 당의 산둥 지방을 공격하는 한편, 요서 지역에서 당군과 격돌하였다. 또, 돌궐, 일본 등과 연결하면서 당과 신라를 견제하여 동북 아시아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어 문왕 때에는 당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당의 문물을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하고, 신라와도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여 대립 관계를 해소하려 하였다. 발해가 수도를 중경에서 상경으로 옮긴 것은 이러한 지배 체제의 정비를 반영한 것이다. 이 무렵, 발해는 이러한 발전을 토대로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하여 인안, 대흥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9세기 전반의 선왕 때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접할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다. 이후 전성기를 맞은 발해를 중국인들은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그러나 10세기 초에 이르러 부족을 통일한 거란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해 오고, 발해 내부에서도 귀족들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어 발해의 국력이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거란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926).
발해의 상경을 출발하여 동경과 남경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신라에 이르던 교통로를 신라도라 한다. 8세기 전반에 개설된 것으로 추정되나, 자주 이용된 것은 8세기 후반 이후 9세기 전반까지이다. |
남북국의 통치 체제
편집통일 신라는 중앙 집권 체제로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 체제는 집사부를 중심으로 하여 관료 기구의 기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집사부 시중의 지위를 높였고, 그 아래에는 위화부를 비롯한 13부를 두고 행정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의 비리와 부정을 방지하기 위하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두었고, 국립 대학인 국학도 설치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은 9주 5소경 체제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군사⋅행정상의 요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수도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것을 보완하고, 각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였다. 군사적 기능보다 행정적 기능을 강화하여 전국을 9주로 나누고, 주 아래에는 군이나 현을 두어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의 촌은 토착 세력인 촌주가 지방관의 통제를 받으면서 다스렸다. 또, 향, 부곡이라 불리는 특수 행정 구역도 있었다.
한편,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하여 외사정을 파견하였고,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상수리 제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도 체계적으로 정비하였다. 중앙군의 핵심은 9서당이었다. 서당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람은 물론 말갈족까지 포함하여 민족 융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지방군으로는 10정을 두었는데, 9주에 1정씩 배치하고, 북쪽 국경 지대인 한주(한산주)에는 2정을 두었다.
통일 신라의 통치 체제 변화는 중국식 정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로 발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앙 관부의 장관과 주의 도독, 군대의 장군 등 권력의 핵심은 모두 중앙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발해는 왕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집권적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중앙의 정치 조직은 3성과 6부를 근간으로 편성하였다. 정당성의 장관인 대내상이 국정을 총괄하였고, 그 아래에 있는 좌사정이 충⋅인⋅의 3부를, 우사정이 지⋅예⋅신 3부를 각각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인 통치 체제를 구성하였다. 당의 제도를 수용하였지만, 그 명칭과 운영은 발해의 독자성을 유지하였다.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은 5경 15부 62주로 조직되었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5경을 두었고, 지방 행정의 중심에는 15부를 두었으며, 그 아래에 주와 현을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발해의 군사 조직은 중앙군으로 10위를 두어 왕궁과 수도의 경비를 맡겼고, 지방 행정 조직에 따라 지방군을 편성하여 지방관이 지휘하게 하였다. 국경의 요충지에는 따로 독립된 부대를 두어 방어하기도 하였다.
통일 신라에는 위화부(이부), 조부와 창부(호부), 예부, 병부, 좌⋅우 이방부(형부), 예작부(공부) 등이 있어 중국의 6전 제도와 비슷하게 행정을 분담하였다. |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이들을 일정 기간 서울에 와서 거주하게 하던 것으로, 고려 시대에는 기인 제도로 이어졌다. |
신라 말기 호족 세력과 후삼국의 성립
편집8세기 후반 이후,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중앙 귀족들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치열해지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다. 지방 세력들도 왕위 쟁탈전에 가담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농민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농민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초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또는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당에 유학하였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일부 유학생과 선종 승려 등은 신라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견훤은 전라도 지방의 군사력과 호족 세력을 토대로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후백제는 차령 산맥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을 차지하여, 그 지역의 우세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국제적 감각도 갖추었다.
그러나 견훤은 신라에 적대적이었고, 농민에게 지나치게 조세를 수취하였으며, 호족을 포섭하는 데 실패하는 등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서, 처음에는 북원(원주) 지방의 도적 집단을 토대로 강원도,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이어서 예성강 유역의 황해도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그는 세력이 커지자, 송악(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그 후 궁예는 영토를 확장하고 국가 기반을 다져, 국호를 마진(후에 태봉으로 변경)으로 바꾸고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새로운 정치를 추구하였다.
궁예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골품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 제도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계속되는 전쟁을 치르려고 지나치게 조세를 거두어들였고, 죄 없는 관료와 장군을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륵 신앙을 이용하여 전제 정치를 도모하였다. 이에 따라 백성과 신하들의 신망을 잃어 신하들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견훤과 궁예 ○ 견훤은 상주 가은현(경북 문경 가은) 사람으로, 본래의 성은 이씨였는데, 후에 견으로 성씨를 삼았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니, 농사로 자활하다가 후에 가업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 드디어 후백제 왕이라 스스로 칭하고 관부를 설치하여 직책을 나누었다. …… 〈삼국사기〉 ○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이름하였다. …… 선종이 왕이라 자칭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전에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기 때문에 옛 서울 평양은 오래 되어서 풀만 무성하게 되었으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
백성이 경제적인 이유로 토지를 떠나 도적이 되면, 백성을 풀에 비유하여 초적이라 부른다. |
호족은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몰락한 중앙 귀족, 무역에 종사하면서 재력과 무력을 축적한 세력, 군진 세력, 지방의 토착 세력인 촌주 출신 등으로 구분된다. |
심화 과정
편집- 삼국 통일의 의미와 한계
신라의 통일 전쟁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째 단계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 고구려의 전쟁이었다. 660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이듬해부터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는 초기에는 이를 방어하였으나, 내분으로 인하여 결국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둘째 단계는, 신라와 당의 전쟁이었다. 일찍이 신라는 당과 군사 동맹을 맺으면서 적어도 평양 이남의 땅을 자신이 차지한다는 밀약을 맺었으나, 당이 삼국 전체를 수중에 넣으려는 의도를 보이자,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여 함께 당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대동강과 원산만을 잇는 선의 남쪽을 차지하여 불완전하나마 삼국 통일을 이룩하였다.
- 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사 전개 과정에서 가지는 의미와 한계성을 말해 보자.
- 골품제의 모순
설계두는 신라의 귀족 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술을 마시며 각기 그 뜻을 말할 때, “신라는 사람을 쓰는 데 골품을 따져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뛰어난 재주와 큰 공이 있어도 한도를 넘지 못한다. 나는 멀리 중국에 가서 출중한 지략을 발휘하고 비상한 공을 세워 영화를 누리며, 높은 관직에 어울리는 칼을 차고 천자 곁에 출입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621년 몰래 배를 타고 당으로 갔다. 〈삼국사기〉
- 골품제의 모순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영향은 어떠하였는지 조사해 보자.
- 발해사의 이해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이사하였다. …… 대조영은 드디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하여 성을 쌓고 거주하였다. 대조영은 용맹하고 병사 다루기를 잘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와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차 그에게 들어갔다. 〈구당서〉
- 발해가 우리 민족의 국가임을 증명할 수 있는 근거를 자료를 통하여 조사해 보자.
2. 중세의 정치
편집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우리 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 신라 말의 6두품 출신 지식인과 호족 출신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특히, 사상적으로도 유교 정치이념을 수용하여 고대적 성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고려 시대는 외적의 침입이 유달리 많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줄기찬 항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 과거 제도의 실시로 관리 등용이 고대와 비교하여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보자.
- 고려 말 정치 세력의 동향에 대하여 알아보자.
[1] 중세의 세계
편집10세기 초, 중국에서는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흥망하는 가운데 사대부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성장하였다. 5대의 혼란을 수습한 송은 중앙 집권적인 황제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과거 제도를 강화하여 문반 관료 중심의 문치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송은 국방력의 약화로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았고,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다. 이를 극복하고자 한 왕안석의 변법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12세기 초에 여진족의 침입을 받아 북중국을 빼앗기고 강남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쯔 강 이남 지역의 개발이 촉진되어 강남이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발달하였다. 이 시기에 주희가 체계화한 성리학은 중국은 물론, 우리 나라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13세기에는 몽골족이 크게 일어나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아시아의 대부분과 러시아 남부 지역까지 장악하는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동서 문화 교류가 크게 촉진되었다.
일본은 9세기 중엽에 국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이 장원을 소유하고 무사를 고용함으로써 특유의 봉건 제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인도에서는 굽타 왕조가 무너진 후 정치적 분열이 거듭되는 가운데 이슬람 세력이 침투하였다.
한편, 서양은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 서양의 중세 사회는 로마 가톨릭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 그리스 정교 중심의 비잔티움 문화권,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걸친 이슬람 문화권으로 형성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 이후 서유럽 세계 형성의 중심이 된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와 제휴하여 성장하면서 로마 교회를 후원하는 세력이 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9세기에 분열하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유럽 세계에는 고전 문화와 크리스트 교에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된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성장하였다.
서유럽에서는 봉건 제도가 성립되어,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 분권 체제가 이루어졌다. 봉건 제도의 경제적 단위는 귀족과 기사들이 소유한 장원이었다. 장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대체로 부자유 신분인 농노로서, 이들은 장원의 주인인 영주와 토지에 예속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 교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그 주교는 교황이라 불리고, 교단 조직이 형성되었다. 이에, 크리스트 교 중심의 서유럽 문화권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이 서유럽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비잔티움 제국은 약 1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그리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하였으며, 황제 교황주의의 그리스 정교가 발달하였다. 비잔티움 문화는 초기 서유럽 문화의 성장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북동부의 슬라브 사회에 널리 전파되어 동유럽 문화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이슬람 제국은 아프리카 북부를 지배한 뒤, 8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이슬람 문화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북부의 크리스트 교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자 이슬람 세력은 유럽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2] 중세 사회의 성립
편집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편집궁예를 몰아 낸 뒤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다. 태조는 궁예와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 냄으로써 신라인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후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당시 고려에 온 발해 유민 중에는 관리, 장군, 학자, 승려 등이 상당수 있었는데, 태조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임명하여 후삼국 통일에 활용하였다. 특히, 발해의 왕자 대광현을 우대하여 동족 의식을 분명히 하였다. |
태조의 정책과 광종의 개혁 정치
편집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호족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어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태조는 이어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다. 또, 지방 호족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과 기인 제도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한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의욕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자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어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고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으며,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가지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태조가 임금에 대한 신하들의 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지은 책으로, 현재 전하지 않는다. |
956년(광종 7)에 실시한 노비안검법은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불법으로 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기 위한 법이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편집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성종은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으며, 2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 관제도 새로 마련하였다.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로, 유교 사상에 입각한 28조의 개혁안을 성종에게 건의하였는데, 그 중에서 22조가 전해진다. |
성종은 전국의 주요 지역에 12목을 설치하고 목사를 파견하였으며, 지방의 중소 호족을 향리로 편입하여 통제하였다. |
[3] 통치 체제의 정비
편집중앙 정치 조직
편집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 맡았다.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재신과 추밀은 6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렸다. 대간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재신과 낭사로 구성되었다. 재신은 국가의 정책을 심의하고, 낭사는 정치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
군사 기밀을 담당하면서 재신과 함께 국정을 총괄하는 추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선으로 구성되었다. |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령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가지고 있었다. |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
편집지방의 행정 조직도 성종 초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전국을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고, 그 안에 3경, 4도호부, 8목을 비롯하여 군⋅현⋅진 등을 설치하였다. 5도는 상설 행정 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 단위로서, 안찰사가 파견되어 도내의 지방을 순찰하였다. 도에는 주와 군⋅현이 설치되고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북방의 국경 지대에는 동계⋅북계의 양계를 설치하여 병마사를 파견하고, 국방상의 요충지에는 진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군사적인 특수 지역이었다.
중앙에서 지방관이 직접 파견되는 것은 군⋅현과 진까지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현보다 파견되지 않는 속현이 더 많았다. 속현과 향⋅부곡⋅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은 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조세나 공물의 징수와 노역 징발 등 실제적인 행정 사무는 향리가 담당하였다.
향리는 원래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중소 호족 출신이었는데, 집권적 지배 체제의 정비 과정을 통하여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행정 실무자가 되었다. |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편집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이원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 경비와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6위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직업 군인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군적에 올라 군인전을 지급받고 그 역은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군적에 오르지 못한 일반 농민으로 16세 이상의 장정들은 지방군으로 조직되었다. 지방군은 국경 지방인 양계에 주둔하는 주진군과 5도의 일반 군현에 주둔하는 주현군으로 이루어졌다.
관리 등용 제도
편집고려의 관리는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과거는 제술업, 명경업, 잡업으로 나뉜다. 제술업은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업은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잡업은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을 시험하여 기술관을 뽑았다.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가 응시하였다.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한편,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녔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공신과 종실의 자손 외에 5품 이상 관료의 아들, 손자, 사위, 동생, 조카 등에게도 음서의 혜택을 주었다. |
[4]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편집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편집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이었다.
이들 중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문벌 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
한편, 이들은 비슷한 부류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장악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벌 귀족의 성장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 중에서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이들 정치 세력 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문벌 귀족을 비판하면서 정계에 진출한 신진 관리 중에서 왕의 측근 세력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인물은 예종 때의 한안인이다. |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편집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 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 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러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한 왕의 측근 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하였다. 묘청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신채호의 서경 천도 운동 인식 (고려 인종 13년) …… 묘청의 천도 운동에 대하여 역사가들은 단지 왕사(王師 : 왕의 군대)가 반란한 적을 친 것으로 알았을 뿐인데,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가(郎家)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묘청의 천도 운동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이겼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인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다. 만약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
무신 정권의 성립
편집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문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높아졌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폭발한 것이 무신정변이었다(1170).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 나갔으며,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자,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도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고, 더 나아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정국이 안정되면서 최우는 문학적인 소양과 함께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을 등용하여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최씨의 집권으로 무신 정권이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최씨 정권은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 |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였다. |
최씨 정권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정치 기구 |
최우가 집권하면서 설치한 야별초에서 분리된 좌별초, 우별초와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던 병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을 말한다. |
[5] 대외 관계의 전개
편집거란의 침입과 격퇴
편집10세기 초에 통일 국가를 세운 거란(요)은 송과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고려를 침략하였다.
처음에는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993). 그러나 외교 담판에 나선 서희가 거란과 교류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인정받고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에도 거란은 고려와 송의 관계를 구실로 두 차례 더 침략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잘 막아 냈다. 특히, 강감찬은 거란이 세 번째 침략해 왔을 때, 살아 돌아간 거란의 군사가 겨우 수천에 이를 정도로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귀주 대첩, 1019). 고려가 거란의 침략을 계속 막아 내자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수 없었고, 송을 침략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와 송, 거란 사이에는 세력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고려는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북쪽 국경 일대에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6주는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주), 철주(철산), 귀주(구성), 곽주(곽산)이다. |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
편집고려의 동북방에는 한때 말갈이라 불리던 여진족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반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려는 이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면서 회유 정책을 펴서 포섭하고 있었다.
그런데 12세기 초 부족의 통일을 이룬 여진족이 고려의 국경까지 남하하면서 고려군과 자주 충돌하였다. 고려는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 다음, 여진족을 북방으로 밀어 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개의 성을 쌓았다(1107).
그러나 여진족은 그 후에 더욱 세력을 키워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을 건국하였으며,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정에서는 논란이 치열하게 일어났으나,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되었다. |
위치가 함흥이라는 설과 두만강 일대라는 설이 있다. 9성 설치 이후 여진족의 침입이 이어지자, 해마다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려주었다. |
몽골과의 전쟁
편집13세기 초,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변하였다. 몽골이 금을 공격하고 북중국을 점령하자, 고려와 몽골의 접촉도 시작되었다. 고려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일삼던 몽골은, 고려를 방문했던 몽골 사신이 귀국길에 피살된 사건을 구실로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였다. 이로부터 고려는 40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다(1231~1270).
무신 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이 기간에 김윤후가 이끈 민병과 승군이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撒禮塔)의 군대를 물리치는 등 일반 민중의 항쟁이 이어졌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부곡 지역의 주민까지도 몽골에 대항하여 싸웠다.
고려 조정에서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났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 정복하겠다는 처음의 계획을 포기하고, 고려의 주권과 고유한 풍속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고려의 끈질긴 저항이 안겨 준 결과였다.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이들의 항쟁은 몽골에 굴복하는 것에 반발하는 민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몽골과의 전쟁 때 활약한 백성 처음 충주 부사 우종주가 매양 장부와 문서로 인하여 판관 유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골병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성 지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의견상 차이가 있어서 우종주는 양반 별초(兩班別抄)를 거느리고, 유홍익은 노군(奴軍)과 잡류 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였다. 몽골병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께 다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잡류만이 힘을 합하여 쳐서 이를 쫓았다. 〈고려사〉 |
[6] 고려 후기의 정치 변동
편집원의 내정 간섭
편집몽골과 강화한 이후, 고려는 두 차례 실시된 원의 일본 원정에 군대와 물자의 제공을 강요받았다. 또,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자비령 이북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라는 원의 통치 기구가 설립되어 넓은 영토를 빼앗기기도 하였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내정 간섭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한편, 원은 공녀라 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 갔으며, 금, 은, 베를 비롯하여 인삼, 약재 등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원의 내정 간섭으로 고려는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책동으로 인해 정치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로 하고, 6부는 4사로 통폐합되었으며, 중추원은 밀직사로 격하되었다. |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진 사대부의 성장
편집원 간섭기 동안 권문세족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잡아,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하여 신진 관리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의 인사와 농장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 때부터 시도되었으나, 원의 간섭으로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이어 공민왕은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몽골 풍속을 금지하였다. 또,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이러한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친원파 권세가들의 반발로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권문세족을 억누르면서 꾸준히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공민왕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아울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개혁 추진의 핵심인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한편, 공민왕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의 정계 진출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의 향리 자제들로, 무신 집권기 이래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이들 중 일부가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문세족이 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지배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신진 사대부는, 자신들의 기반을 침해하면서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족과 충돌하게 되자,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그들의 비리와 불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고, 과전과 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처지를 해결하기 위해 왕권과 연결하여 고려 후기의 각종 개혁 정치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아직 역부족이었다.
종래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정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성장한 가문 등을 말한다. |
기철은 누이동생이 원 순제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낳자, 기 황후와 원을 등에 업고 친원파 세력을 결집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권세를 부렸다. |
고려 후기에 권문세족들이 토지와 노비를 늘려 국가 기반이 크게 약화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한 특별기구 |
고려의 멸망
편집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문세족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한편, 북쪽에서 홍건적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를 위시한 사대부 세력의 뒷받침을 받아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진포 대첩 ○ 우왕 6년(1380) 8월 추수가 거의 끝나 갈 무렵, 왜구는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진포로 쳐들어와 충청⋅전라⋅경상도의 3도 연해의 주군(州郡)을 돌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나세, 최무선, 심덕부 등이 나서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왜선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 〈고려사〉 |
황산 대첩 ○ 운봉을 넘어온 이성계는 적장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용맹한 아지발도를 사살하는 등 선두에 나서서 전투를 독려하여 아군보다 10배나 많은 적군을 섬멸했다. 이 싸움에서 아군은 1600여 필의 군마와 여러 병기를 노획하였고, 살아 도망간 왜구는 70여 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 |
원 말기에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데서 홍건적이라 불렸다. |
심화 과정
편집- 중세 사회의 성립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려는 정치적, 문화적, 사상적으로 신라 사회에 비하여 질적으로 변화, 발전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고려는 우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지배 세력이 교체되어 폐쇄적인 사회가 보다 개방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 가는 이념도 변화하게 되었으며, 문화의 폭과 질이 크게 높아져 중세 문화를 성립시켰다.
한편, 고려에서는 강렬한 민족 의식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민족 의식은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였다는 자신감과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북방 유목 민족과 항쟁하면서 더욱 성장하였다.
-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을 중세 사회의 성립으로 보는 이유를 분석해 보자.
- 고려가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민족의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당시 국제 정세를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
- 원의 간섭과 고려의 개혁
① 원 간섭기에 고려는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이에 따른 백성의 저항에 대응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충선왕은 토지 제도와 수취 제도에서 발생한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직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이 성장하지 못하였으며, 원의 간섭을 인정한 상태에서 개혁을 통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화하려 한 국왕의 태도 등으로 인하여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충목왕 때에도 권세가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역시 권문세족의 반발과 원의 간섭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② 공민왕 즉위 이후에도 원의 간섭은 여전하였고, 친원파 역시 건재하였다. 공민왕은 친원파를 관직에 기용하지 않는 등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 때마침 원에서 기 황후의 아들이 황태자에 봉해지자, 이러한 추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를 계기로 기철의 권력이 공민왕을 압도할 정도로 커졌고, 그의 일족과 친원파의 정치적 지위가 크게 높아졌다.
- 충선왕과 충목왕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자.
- 공민왕의 개혁이 성공할 수 없었던 국내의 정치 상황을 추론해 보자.
3. 근세의 정치
편집조선은 왕과 양반 관료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왕은 최고 명령권자로서 통치 체제의 중심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에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사대부가 지배층이 되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새롭게 성장한 사림이 16세기 후반 이후 정국을 주도해 나가면서 학파를 중심으로 사림이 분열하여 붕당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 붕당 사이에 서로 비판하며 견제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정치 구조는 권력의 집중을 방지하면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관리 등용에 혈연이나 지연보다 능력을 중시하였고, 언로를 개방하여 독점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였다. 아울러 6조를 중심으로 행정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높이면서 정책의 협의나 집행 과정에서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고려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중세 사회에서 벗어나 근세 사회로 나아갔다.
- 조선 초기 정치 구조의 정비 방향을 알아보자.
- 조선의 정치 체제를 고려와 비교하여 정리해 보자.
- 붕당 정치와 서원의 관계를 알아보자.
[1] 근세의 세계
편집14세기 후반, 중국에서는 명이 건국되어 전통적인 한문화가 회복되었다. 명대에는 강력한 전제 황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발전하였다. 명은 15세기 초 대외적으로 팽창하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국위를 떨쳤다. 이 때부터 중국인이 동남 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 명은 북쪽으로는 몽골족의 침입과 남쪽으로는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구나 16세기 말에는 명의 국력이 더욱 쇠약해졌고, 결국 17세기 중엽에 만주에서 일어난 청에게 중국의 지배권을 넘겨주었다.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이슬람 국가들이 여전히 번성하였다. 오스만 제국은 서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3대륙에 걸친 제국으로 발전하였고, 중앙 아시아에서 건국된 티무르 제국과 이란 지방의 사파비 왕조도 한때 번성하였다. 인도에서는 무굴 제국이 세워져 인도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융합하며 발전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동남 아시아에도 진출하여 오늘날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일대에 이슬람 교가 성행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14세기에 무로마치 막부가 수립되었다가 15세기 중엽에는 전국 시대가 되었다. 16세기 후반에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였으나, 조선 침략에 실패하고 에도에 새 막부가 설치됨으로써 집권적 봉건 제도가 마련되었다. 이 시대에 일본은 평화와 안정을 이루고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서양 문물을 수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여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인도와 동남 아시아가 점차 서양 세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한편, 14세기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동안 서양에서는 중세 봉건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근대 사회와 근대 문화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르네상스, 새로운 항로의 개척과 유럽 세계의 확대, 종교 개혁 등은 바로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큰 움직임이었다.
르네상스는 14, 15세기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16세기에는 유럽 각지에 널리 퍼졌다. 이것은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지성과 감성이 조화된 인간성을 추구하려는 인문주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였다. 특히, 문학과 예술 분야가 두드러지게 발전하였고, 근대 과학이 태동하였다. 이것은 인간 중심적이며 현세적인 근대 문화의 창조 운동이기도 하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항로의 개척은 유럽 세계를 확대시켰다. 그 결과, 유럽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였다. 유럽 각국은 무역과 함께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포르투갈은 주로 동양 무역을 독점하였고, 에스파냐는 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여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였다. 뒤이어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도 앞다투어 해외로 진출하여 유럽 세력은 전세계로 팽창하였다.
무역과 식민 활동의 결과, 유럽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상업 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각국의 절대 왕정들은 중상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6세기에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루터파, 칼뱅파, 영국 국교회 등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성립시켰다. 이에, 중세 크리스트 교 세계의 통일이 무너졌다. 종교 개혁 운동은 사회 개혁 운동이나 민족 운동 등과 연결되어 전개되었으므로 그 영향이 매우 컸다.
한편, 신교의 성립에 자극을 받은 가톨릭 교회의 개혁 운동으로 예수회가 창설되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동양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활동하며 로마 가톨릭을 널리 전파하였다.
[2] 근세 사회의 성립
편집조선의 건국
편집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다른 의견이 존재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대다수의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조의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역성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이로써 이성계는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태조는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다.
초창기의 문물 제도를 갖추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또, 불씨잡변을 통하여 불교를 비판하였으며,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확립시켰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을 통하여 개국 공신 세력을 몰아 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다. 태종은 6조 직계제를 채택하였으며,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또, 양전 사업과 호구 파악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억울한 노비를 조사하여 해방시켰다. 아울러 사병을 없애 왕이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면서 친위 군사를 늘렸다.
온건 개혁파는 비리의 핵심 세력을 제거하고 대토지 사유는 정리하되, 왕조 질서를 파괴하거나 전면적인 토지 개혁에는 반대하였다. 반면, 급진 개혁파는 역성 혁명을 찬성하고, 권세가에 의한 토지 사유를 축소시키려 하였다. |
정도전은 훌륭한 재상을 선택하여,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하여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민을 다스리는 중책을 부여하자고 주장하였다. |
6조에서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안을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제도 |
유교 정치의 실현과 문물 제도의 정비
편집세종은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유교 정치를 실현하였다. 먼저,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두고 집현전 학사를 일반 관리보다 우대하였다. 뒤이어 의정부에서 정책을 심의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정치 체제를 바꿔 왕의 권한을 의정부에 많이 넘겨주고, 훌륭한 재상들을 등용하여 정치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잡게 하였다.
세종은 왕도 정치를 내세워 유교적 민본 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유능한 인재를 널리 발굴하였으며, 청백리 재상을 등용하여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세종 이후 문종이 일찍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곧, 김종서, 황보인 등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이 넘어가자, 수양 대군은 정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통치 체제를 다시 6조 직계제로 고쳤으며, 자신의 활동을 견제하는 집현전을 없앴다. 그리고 경연도 열지 않았으며, 태종 이후 정치 참여를 제한하였던 종친들을 등용하기도 하였다.
성종은 건국 이후의 문물 제도의 정비를 완비하였으며, 경국대전의 편찬을 마무리하여 반포함으로써 이후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어 홍문관을 두어 관원 모두에게 경연관을 겸하게 함으로써 집현전을 계승하였으며, 정승을 비롯한 주요 관리도 다수 경연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경연이 단순한 왕의 학문 연마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왕과 신하가 함께 모여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왕의 하루 새벽 4, 5시경:기상 6시경:왕실 웃어른에게 아침 문안 7시경:아침 식사 8시경:아침 공부(조강) 10시경:아침 조회(조참 또는 상참) 11시경:오전 업무(보고받기, 신료 접견) 정오~오후 1시경:점심 식사 오후 2시경:낮 공부(주강) 오후 3시경:신료 접견 오후 5시경:궁궐 내의 야간 숙직자 확인 오후 6시경:저녁 공부(석강) 오후 7시경:저녁 식사 오후 8시경:왕실 웃어른에게 저녁 문안 오후 10시경:상소문 읽기 오후 11시경:취침 |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
집현전 학사는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였다.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졌다. |
인과 덕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 유교에서 이상으로 삼는 정치 사상 |
[3] 통치 체제의 정비
편집중앙 정치 체제와 지방 행정 조직
편집조선의 중앙 정치 체제는 경국대전으로 법제화되었다. 관리는 문반과 무반의 양반으로 구성되었고, 30등급(18품 30계)으로 나뉘었다. 조선 시대의 관직은 중앙 관직인 경관직과 지방 관직인 외관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경관직은 국정을 총괄하는 의정부와 그 아래에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행정 기관인 6조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6조 아래에는 여러 관청이 소속되어 업무를 나누어 맡음으로써 행정의 전문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한편, 의정부와 6조의 고관이 중요 정책 회의에 참여하거나 경연에서 정책을 협의함으로써 각 관서 사이의 업무를 조정하고 통일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고, 정사를 비판하며, 문필 활동을 하면서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3사의 언론은 고관은 물론이고 왕이라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한 여러 규정이 관행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와 같은 3사의 기능 강화는 권력의 독점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 시대 정치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이 밖에,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리는 의금부,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 서울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한성부, 역사서 편찬과 보관을 담당하는 춘추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 등이 있었다.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고을의 크기에 따라 지방관의 등급을 조정하고, 작은 군현을 통합하여 전국에 약 330여 개의 군현을 두었다. 고려 시대까지 특수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도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키거나 포함시켰다.
나아가, 전국의 주민을 국가가 직접 지배하기 위하여 모든 군현에 수령을 파견하였다. 수령은 왕의 대리인으로, 지방의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수령의 권한을 강화한 반면, 향리는 수령의 행정 실무를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격하시켰다.
한편, 수령을 지휘, 감독하고 백성의 생활을 살피기 위하여 전국 8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였고, 수시로 암행어사를 지방에 보내기도 하였다.
대간(대관, 간관) 대관은 마땅히 위엄과 명망을 우선해야 하고 탄핵은 뒤에 해야 한다. 왜냐 하면, 위엄과 명망이 있는 자는 비록 종일토록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두려워 복종할 것이요, 이것이 없는 자는 날마다 수많은 글을 올린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 천하의 득실, 백성의 이로움과 해로움, 사직의 큰 계획은 직책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재상만이 행할 수 있고, 간관만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니, 간관의 지위는 비록 낮지만, 직무는 재상과 대등하다. 〈삼봉집〉 |
벼슬 등급은 높지 않았으나, 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나중에 판서나 정승 등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
관찰사는 전국 8도에 각각 임명되었다. 관찰사는 감찰권, 행정권, 사법권, 군사권을 가진 중요한 직책이었다. |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
편집조선은 건국 초부터 군역 제도를 정비하고 군사 조직을 강화하였다. 태종 이후 사병을 모두 폐지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양인 남자는 군역을 지게 하였다. 이로써 모든 양인은 현역 군인인 정군과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봉족)으로 편성되었다. 다만, 현직 관료와 학생, 향리 등은 군역을 면제받았으나, 종친과 외척, 공신이나 고급 관료의 자제는 고급 특수군에 편입되어 군역을 대신하였다.
정군은 서울에서 근무하거나 국경 요충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일정 기간 교대로 복무하였으며, 복무 기간에 따라 품계를 받기도 하였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뉘었다. 중앙군은 궁궐과 서울을 수비하는 5위로 구성되고, 그 지휘 책임은 문반 관료가 맡았다. 중앙군은 정군을 중심으로 갑사나 특수병으로 구성되었다.
지방군은 육군과 수군으로 나뉘는데, 건국 초기에는 국방상의 요지인 영이나 진에 소속되어 복무하였다. 그러나 세조 이후에는 진관 체제를 실시하여 요충지의 고을에 성을 쌓아 방어 체제를 강화하였다. 연해 각 도에는 수군을 설치하였다. 수군은 육군에 비하여 힘들고 위험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군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꺼렸다. 조선 초기에는 정규군 외에 일종의 예비군인 잡색군이 있었다.
한편, 군사 조직과 아울러 교통과 통신 체계도 정비되었다. 군사적인 위급 사태를 알리기 위한 봉수제가 정비되고, 물자 수송과 통신을 위한 역참이 설치되어 국방과 중앙 집권적 행정 운영이 한층 쉬워졌다.
간단한 시험을 거쳐 선발된 일종의 직업 군인으로, 근무 기간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
지역 단위의 방위 체제로, 각 도에 한두 개의 병영을 두어 병사가 관할 지역 군대를 장악하고, 병영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설치하여 거진의 수령이 그 지역 군대를 통제하는 체제였다. 수군도 육군과 같은 방식으로 편제되었다. |
서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이 소속되어 유사시에 대비하게 한 예비군의 일종이다. |
관리 등용 제도
편집조선 시대의 관리는 주로 과거와 음서, 천거를 통하여 선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을 뽑는 문과와 무관을 뽑는 무과, 기술관을 뽑는 잡과가 있었다. 문과는,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부정기 시험인 증광시, 알성시 등이 있었다. 문과는 식년시의 경우에는 초시에서 각 도의 인구 비례로 뽑고, 2차 시험인 복시에서 33명을 선발한 다음, 왕 앞에서 실시하는 전시에서 순위를 결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나 진사가 되어야 했으나, 후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무과도 문과와 같은 절차를 거쳐 치러지는데, 최종 선발 인원은 28명이었다. 기술관을 뽑는 잡과도 3년마다 치러지는데, 분야별로 정원이 있었다.
또, 과거를 거치지 않더라도 고관의 추천을 받아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등용되거나 음서를 통하여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거는 대개 기존의 관리를 대상으로 하였고,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 천거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대상도 고려 시대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고, 음서 출신은 문과에 합격하지 않으면 고관으로 승진하기도 어려웠다.
인사 관리 제도도 관직 제도의 정비와 지배층의 증가에 따라 새롭게 정비되었다. 권력의 집중과 부정을 막기 위하여 상피제를 마련하였고, 인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5품 이하 관리의 등용에는 서경을 거치도록 하였다. 아울러 고관이 하급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승진 또는 좌천의 자료로 삼았다. 이로써 조선은 합리적인 인사 행정을 위한 제도가 갖추어져 관료적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천인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으나, 문과의 경우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에게는 응시를 제한하였다. |
문과의 예비 시험인 생원시, 진사시를 말한다. |
가까운 친인척과 같은 관서에 근무하지 않도록 하거나 출신 지역의 지방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제도이다. |
[4] 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편집사림의 정치적 성장
편집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이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사림이라 부른다. 이들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세력을 중용하였기 때문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이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이에 따라, 두 차례에 걸친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의 대부분이 몰락하였다.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기묘사화).
그 뒤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을사사화). 그러나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세조의 집권 이후에 공신으로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이었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관학파의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 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僞勳)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
붕당의 출현
편집선조가 즉위하면서 그 동안 향촌에서 세력 기반을 다져 오던 사림 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로 진출하여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 세력은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게 되었다. 명종 때 이후 정권에 참여해 온 기성 사림은 척신 정치의 과감한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반면에, 명종 때의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새롭게 정계에 등장한 신진 사림은 원칙에 더욱 철저하여 사림 정치의 실현을 강력하게 내세웠다.
두 세력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기성 사림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고, 신진 사림을 중심으로 동인이 형성되었다.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다수의 신진 세력이 참여하여 먼저 붕당의 형세를 이루었다. 반면에,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 가담함으로써 비로소 붕당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후 붕당은 정치적 이념과 학문적 경향에 따라 결집되어 정파적 성격과 학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동인, 서인의 분당 김효원이 알성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 하여 심의겸이 반대하였다. 그 후에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장원 급제하여 전랑으로 천거되었으나, 외척이라 하여 효원이 반대하였다. 이 때, 양편 친지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면서 서로 배척하여 동인, 서인의 말이 여기서 비롯하였다. 효원의 집이 동쪽 건천동에 있고 의겸의 집이 서쪽 정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동인의 생각은 결코 외척을 등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서인의 생각은 의겸이 공로가 많을뿐더러 선비인데 어찌 앞길을 막느냐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 |
[5] 조선 초기의 대외 관계
편집명과 관계
편집조선은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였다. 명과는 태조 때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요동 정벌의 준비와 여진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가 유지된 적도 있었지만, 태종 이후 양국 간의 관계가 좋아지면서 교류가 활발하였다.
조선은 명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사대 정책을 유지하였으나, 명의 구체적인 내정 간섭은 없었다. 매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였고, 그 때 문화적, 경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명에 대한 이와 같은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조공 관계로 맺어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나타난 외교 정책이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졌으므로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
여진과 관계
편집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우선 태조에 의하여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어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후 여진에 대하여 조선은 회유와 토벌의 양면 정책을 취하였다. 조선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켰다. 또, 사절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고,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 때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은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일본 및 동남 아시아와 관계
편집조선은 일본이나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계속된 왜구의 침략으로 폐해가 심해지자 조선은 수군을 강화하고, 성능이 뛰어난 전함을 대량으로 건조하였다. 특히, 화약 무기를 개발하여 선박에 장착하는 등 왜구의 격퇴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침략과 약탈이 어려워진 왜구들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구해 오자, 조선은 일부 항구를 개방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아울러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또, 조선 초에는 류큐, 시암, 자와(자바) 등 동남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도 교류하였다. 이들 나라는 조공 또는 진상의 형식으로 기호품을 중심으로 한 각종 토산품을 가져와서 옷, 옷감, 문방구 등을 회사품으로 가져갔다. 특히, 류큐와의 교역이 활발하였는데, 불경, 유교 경전, 범종, 부채 등을 전해 주어 류큐의 문화 발전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6] 양 난의 극복
편집왜군의 침략
편집15세기에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본인의 무역 요구가 더욱 늘어난 데 대해 조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자,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이나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 같은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조선은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을 강구하였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해 왔다(1592). 이를 임진왜란이라 한다. 전쟁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조선은 전쟁 초기에 왜군을 효과적으로 막아 낼 수 없게 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여 명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3포를 개항한 이후 왜인들은 약조를 지키지 않고 자주 소란을 피웠다. 특히, 1555년(명종 10)에는 왜인이 70여 척의 배를 몰고 전라남도 연안 지방을 습격해 왔다. 이후 일본과의 교류는 일시 단절되었다. |
수군과 의병의 승리
편집왜군은 육군이 북상함에 따라 수군이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려 하였다. 그러나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키고, 왜군의 침략 작전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한편, 육지에서는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면서 그에 알맞은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는 관군에 편입되어 조직화되었고, 관군의 전투 능력도 한층 강화되었다.
농민이 주축을 이루고, 전직관리와 사림 양반, 그리고 승려가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상당수가 관군으로 편입되었다. |
전란의 극복과 영향
편집수군과 의병의 승전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였으며, 관군과 백성이 합심하여 행주산성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이후 명과 경상도 해안으로 밀려난 왜군 사이에 휴전 협상이 이루어졌으며, 조선도 전열을 정비하여 왜군의 완전 축출을 준비하였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 왔다(1597).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다시 후퇴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임진왜란은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내적으로는 왜군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다.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도 부족해졌다. 또,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이삼평을 비롯한 도자기 기술자들은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
광해군의 중립 외교
편집임진왜란을 겪는 동안에 조선과 명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서 압록강 북쪽에 살던 여진족이 후금을 건국하였다(1616).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대내적으로 전쟁의 뒷수습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은 조선은 명의 후금 공격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고, 새롭게 성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맺을 수도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지 말고 상황에 따라 대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호란과 북벌 운동
편집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특히, 정봉수는 철산의 용골산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그 후,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했으나, 결국 청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 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심화 과정
편집- 신진 사대부의 분화
이들은 최씨 정권기부터 학문적 교양과 행정 실무 능력을 겸비하여 자신의 능력에 따라 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무신 정권 붕괴 이후 과거를 통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하나의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던 이들은, 고려 왕조의 폐단을 맹렬하게 비판하며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이성계의 정권 장악과 새 왕조 개창을 둘러싸고 혁명파와 온건파로 분열되었다. 혁명파는 왕조 자체를 교체하려는 역성 혁명파이고, 온건파는 점진적인 사회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였다.
-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세력의 명칭을 말해 보자.
- 온건파와 혁명파가 분열하게 된 배경을 합리적으로 추론해 보자.
- 조선 초기 왕권과 신권의 관계
① 의정부의 서사를 나누어 6조에 귀속시켰다. …… 처음에 왕(태종)은 의정부의 권한이 막중함을 염려하여 이를 혁파할 생각이 있었지만, 신중하게 여겨 서두르지 않다가 이 때에 이르러 단행하였다. 의정부가 관장한 것은 사대 문서와 중죄수의 심의뿐이었다. 〈태종실록〉
② 6조 직계제를 시행한 이후 일의 크고 작음이나 가볍고 무거움이 없이 모두 6조에 붙여져 의정부와 관련을 맺지 않고, 의정부의 관여 사항은 오직 사형수를 논결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므로 옛날에 재상에게 위임하던 뜻과 어긋남이 있고, …… 6조는 각기 모든 직무를 먼저 의정부에 품의하고, 의정부는 가부를 헤아린 뒤에 왕에게 아뢰어 (왕의) 전지를 받아 6조에 내려보내어 시행한다. 다만, 이조⋅병조의 제수, 병조의 군사 업무,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판결 등은 종래와 같이 각 조에서 직접 아뢰어 시행하고 곧바로 의정부에 보고한다. 만약 타당하지 않으면, 의정부가 맡아 심의, 논박하고 다시 아뢰어 시행토록 한다. 〈세종실록〉
③ 상왕(단종)이 어려서 무릇 조치하는 바는 모두 대신에게 맡겨 논의, 시행하였다. 지금 내(세조)가 명을 받아 왕통을 계승하여 군국 서무를 아울러 모두 처리하며, 조종의 옛 제도를 모두 복구한다. 지금부터 형조의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서무는 6조가 각각 그 직무를 담당하여 직계한다. 〈세조실록〉
- ①, ②, ③의 제도 명칭을 말해 보자.
- 각 제도의 실시 목적을 당시 시대 상황과 연관지어 추론해 보자.
- 조선 초기에 이러한 정치 제도상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 배경을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해 보자.
4. 근대 태동기의 정치
편집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일당 전제화의 경향이 나타났다. 영조와 정조는 특정 붕당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기 위하여 탕평 정치를 추진하였다. 탕평 정치는 특정 권력 집단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붕당 정치의 폐단을 모두 없애지는 못하였다.
탕평 정치로 강화된 왕권을 순조 이후 왕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외척을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부정부패가 널리 퍼지고 백성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다. 이에 농민의 광범위한 저항 운동이 전개되었다.
- 강한사는 송시열의 제사를 지내는 사우로, 송시열에 대한 존칭인 대로를 따서 대로사라고도 한다. 송시열과 같은 학자들의 정치적 역할을 알아보자.
-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쌓은 화성은 역사적 의의가 크다. 정조가 왜 화성으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1] 근대의 세계
편집16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근대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즉, 절대 왕정, 시민 혁명,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유럽 세계가 확립되었다.
지방 분권적인 봉건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추구하는 절대 왕정 국가가 성립하였다. 절대 왕정은 관료제와 상비군을 정비하였고, 이를 위하여 중상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식민지 획득에 힘썼다.
절대 왕정에 뒤이은 시민 혁명과 산업 혁명은 근대 사회의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민 혁명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에서 시작하여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은 경제적으로 성장한 근대 시민 계급이 중심이 되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리고 국가 권력을 봉건 세력으로부터 시민에게 넘긴 일련의 정치 변혁으로서,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려는 것이었다.
산업 혁명은 18세기에 자본, 노동력, 자원, 해외 시장을 갖춘 영국에서 시작하여 19세기에는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자본주의 사회를 확립시켰다.
한편,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자연 과학이 발달하였다. 계속적인 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대하였고,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해졌다. 또, 개인주의와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세속적인 인간 중심의 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서양의 근대화는 상대적으로 동양 사회에 위협을 주었다. 산업 혁명이 확산되면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국력을 증강시킨 서양의 열강은 후진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였다. 이에 비하여, 그 동안 번영을 자랑하던 청을 비롯한 아시아의 전통 왕조들은 내부적인 취약성으로 인하여 점차 쇠약해져 새로운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서양 열강의 아시아 침략은 전에 볼 수 없었던 위협으로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만들어 원료의 공급지와 상품 시장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열강의 도전에 직면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는 각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과 함께 개혁을 통하여 자강을 달성하려는 개화 운동을 추진하였다. 중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 운동과 양무 운동,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인도의 세포이 항쟁과 스와라지 운동 등은 그러한 움직임이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각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서양 열강에 마침내 복속되어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다만, 일본만은 서양 열강과 타협하여 적극적인 근대화 정책을 추진한 결과,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끼이게 되었다.
아시아 여러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도 근대적 제도의 도입과 산업화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근대화의 길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로의 편입 과정이었기 때문에, 동양의 근대화는 여러 면에서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2] 통치 체제의 변화
편집정치 구조의 변화
편집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면에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3사의 기능이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비변사는 16세기 중종 초에 여진족과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한편, 3사의 언론 기능도 변질되어 3사는 각 붕당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도 하였다. 3사는 공론을 반영하기보다는 상대 세력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자기 세력의 유지와 상대 세력의 견제에 앞장서고 있었다. 아울러 이조와 병조의 전랑들도 중하급 관원들에 대한 인사권과 자기 후임자를 스스로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기 세력을 확대하고 상대 세력을 몰아 내는데 앞장섰다.
임진왜란 이후 전⋅현직 정승을 비롯하여 공조를 제외한 5조의 판서와 참판, 각 군영 대장, 대제학, 강화 유수 등 국가의 중요 관원들로 확대되었다. |
군사 제도의 변화
편집5위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조선 초기의 중앙군은 16세기 이후 군역의 대립제가 일반화되면서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어이없는 패전을 경험한 조정에서는 새로운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왜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적인 편제와 군사 훈련 방식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의 군병은 삼수병으로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장기간 근무를 하고 일정한 급료를 받는 상비군으로서, 의무병이 아닌 직업 군인의 성격을 가진 군인이었다.
훈련도감에 이어 대외 관계와 국내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군영이 더 설치되었다. 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국방력 강화를 명분으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등이 설치되었고, 숙종 때에 금위영이 추가로 설치되어 17세기 말에는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지방군의 방어 체제도 변화하였다. 조선 초기에 실시되던 진관 체제는 많은 외적의 침입에는 효과가 없었다. 이에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제승방략 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임진왜란 중에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을 복구하고 속오법에 따라 군대를 편제하는 속오군 체제로 정비하였다.
속오군은 위로는 양반에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편제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향촌 사회를 지키다가 적이 침입해 오면 전투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양반이 노비와 함께 속오군에 편제되는 것을 회피함에 따라 상민과 노비들만 남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조총에 대항하기 위하여 기존의 활과 창으로 무장한 부대 외에 조총으로 무장한 부대를 만들었다. 이에 훈련도감은 포수, 사수, 살수의 삼수병으로 편제되었다. |
유사시에 필요한 방어처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앙에서 파견되는 장수가 지휘하게 하는 방어 체제 |
[3] 붕당 정치의 전개와 탕평 정치
편집붕당 정치의 전개
편집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후,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은 서인과 남인 등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고, 결국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에 의해 몰락하였다(1623).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서인과 남인은 모두 학파적 결속을 확고히 한 정파들이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이후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었다.
붕당 정치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조정에서 어떤 정책을 논의할 경우, 각 붕당은 그 정책이 이론적으로 타당한지 검토하고,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하면서 토론을 벌였다. 이렇게 수렴된 여론을 공론이라 하는데, 공론이 중시되면서 합좌 기구인 비변사와 언론 기관인 3사의 기능이 중시되었다.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산림이 출현하였고, 서원이나 향교가 지방 사족의 의견을 모으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붕당이 적극적으로 내세운 공론도 백성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효종과 효종비가 죽은 후, 새 어머니였던 인조의 계비가 적장자에 준하는 상복을 입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이다. 차남으로 왕위를 이은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 심각한 정치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
붕당 정치의 변질과 탕평론의 대두
편집숙종 때에 이르러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이러한 환국을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함에 따라,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정치 권력은 점차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었으며, 언론 기관이나 재야 사족의 정치 참여가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졌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해졌다.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이 제기되었다.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붕당 정치의 폐해 신축⋅임인년(1721, 1722) 이래로 조정에서 노론, 소론, 남인의 삼색(三色)이 날이 갈수록 더욱 사이가 나빠져 서로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모함하니, 이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치게 되어 하나의 싸움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당색(黨色)끼리는 서로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대체로 당색이 처음 일어날 때에는 미미하였으나, 자손들이 그 조상의 당론을 지켜 200년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굳어져 깨뜨릴 수 없는 당이 되고 말았다. …… 근래에 와서는 사색(四色)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예부터 저마다 지켜 온 의리는 쓸모 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사문(斯文:유학)을 위한 시비와 국가에 대한 충역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리니 ……. 〈택리지〉 |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에,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
서인이 남인을 역모로 몰아 정권을 독점한 경신환국(1680)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편집탕평 정치는 영조 때 자리잡았다. 영조는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그리고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서 인식되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다.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군역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균역법을 시행하였고(1750),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속대전을 편찬하여 법전 체계도 정리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온 척신과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그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도 중용하였다.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하는 초계문신 제도를 실시하고, 규장각을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다.
한편,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더 나아가 수원으로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을 세워 정치적⋅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또,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정조의 문물 제도 정비 정조는 민생의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썼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通共政策)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 전통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였다.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
탕평은 서경에서 나온 말로, 임금의 정치가 한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는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
[4] 정치 질서의 변화
편집세도 정치의 전개
편집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가 죽은 후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세도 정치기에는 붕당은 물론, 탕평파와 반탕평파 같은 정치 집단 사이의 대립적인 구도도 없어지고, 중앙 정치를 주도하던 정치 집단은 소수의 가문 출신으로 좁아지면서 그 기반이 축소되었다.
권력 구조에서도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다.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세도 정치의 폐단
편집19세기의 세도 정권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향촌에서는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가지고 조세를 거두도록 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관직이 매매되는 등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더구나 자연 재해가 잇따라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지고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부당한 수탈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세도 정치의 폐단 가을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 처와 자식에게 “요즘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이야기를 하여도 나랏일에 대한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고을에서 보내 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만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또 어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고 말한다. 이름 있는 관리들이 말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하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려 마지않았다. 〈목민심서〉 |
[5] 대외 관계의 변화
편집청과 관계
편집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이 왕래하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에 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 장려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조선 사신은 귀국 후에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후 학자들 중에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1712).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일본과 관계
편집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7). 한편 동래부에 다시 왜관을 설치하고,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
한편, 일본은 조선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 에도 막부의 쇼군(將軍)이 바뀔 때마다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조선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에서는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한편, 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이래 우리의 영토였으나, 일본 어민이 자주 이 곳을 침범하여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그 후에도 일본 어민의 침범이 계속되자,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울릉도에 군을 설치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독도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심화 과정
편집- 조선 후기 사회의 근대적 요소
근대 사회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참정권이 전제되는 민주 정치가 구현되는 사회를 말한다. 참된 민주 정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가 신장되고 국민 각자가 공동체 구성원의 하나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사회 각 계층이 평등한 사회를 뜻한다. 평등 사회의 출현은 지난날의 사회 체제를 붕괴시키고 피지배층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여 자유로운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을 뜻한다. 즉, 산업 활동이 다양해지고 활발해지면서 누구나 자유로이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풍부한 자본력과 전문적 경영 방식에 의하여 생산력의 증대가 추구되는 사회를 말한다. 사상적으로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합리화의 추구를 뜻한다. 즉, 절대적인 가치 체계에 의한 불합리한 구질서에서 인간을 해방시켜, 개인의 존엄성과 개인적 경험을 존중하는 사회를 말한다.
- 조선 후기에 나타난 근대적 요소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사상적인 측면에서 조사해 보자.
- 조선 후기 사회에서 자율적, 주체적으로 이룩되었던 근대적 요소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알아보자.
- 붕당 정치의 올바른 이해
① 타율적 권위에 의존하여 자기를 주장하는 정신은 독립성이 없고, 그 곳에서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는 당파적 성격이 길러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유력한 권위 아래에 모이고, 혹은 특수한 사회 결합에 의존하여 당파를 맺는 것은 조선의 두드러진 국민성으로서, 정치, 사회의 대립에서부터 다 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붕당의 다툼은 스스로의 생활 의식의 대립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자학의 원리, 특히 예론에 따른 일종의 의존적 대립인 까닭에 종합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때는 없고, 언제까지나 의미 없는 대립으로서 성과 없는 항쟁을 계속한다. 그 항쟁의 길이에 있어서는 세계적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사 개설〉
② 붕당 정치는 상대 세력과의 공존을 특색으로 하여 학파에 토대를 두고 형성된 각 붕당 사이의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즉, 붕당 정치는 공론에 입각하여 몇 개의 붕당이 공존하면서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정치 체제이다.
- ①과 같은 주장의 목적이 무엇이며,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자.
- ②를 참고로 ①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써 보자.
5. 근⋅현대의 정치
편집조선 사회는 안에서 성장하고 있던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후 정부와 각계각층에서는 근대화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제는 강압적인 식민 통치를 통하여 우리 민족을 지배하였다. 이에 맞서 우리 민족은 국내외에서 무장 독립 투쟁,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독립 외교 활동 등을 벌여 일제에 줄기차게 저항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투쟁과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에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남북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어 갔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주의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 6월 민주 항쟁 등으로 민주주의가 점차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냉전체제가 해체되면서 민족 통일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 개항 이후 근대적 개혁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나라를 빼앗긴 원인이 무엇인지 토론해 보자.
- 일제 식민 지배 아래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 운동의 내용과 그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자.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을 정리해 보자.
[1] 근⋅현대의 세계
편집제국주의 국가 간에 식민지 확보 경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뒤늦게 쟁탈전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등은 영국, 프랑스 등을 상대로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1914). 제1차 세계 대전은 중립을 지키던 미국이 연합국측에 가담하고, 독일의 대공세가 실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또,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전제 정치에 항거한 노동자와 농민이 제정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191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에서 경제 공황이 일어났는데(1929), 이는 유럽과 아시아 등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로 사회 불안이 심화되자, 독일에서는 나치즘,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일본에서는 군국주의와 같은 전체주의가 대두하였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군비 확장과 대외 침략 정책을 통해 경제 공황을 극복하려 하였고,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냉전 체제가 시작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독립한 많은 나라들은 제3세계를 형성하여 미국과 소련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채택하였다. 1990년대 이후에는 냉전 체제가 해체되면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였고, 체제나 이념보다는 자국의 국익을 위주로 한 세계 질서로 재편되고 있다.
[2] 개화와 주권 수호 운동
편집흥선 대원군의 정책
편집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세도 정치에 저항하는 민중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이 침략해 오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1863)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왕조의 위기를 극복하고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즉,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경복궁 중건, 비변사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 회복, 대전회통 편찬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붕당의 근거지로 인식되어 온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는 동시에, 농민 봉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삼정을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노력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하게 유지하였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
개항과 개화 정책
편집1873년에 고종의 친정으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면서 개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움직임 속에서 일본은 한반도 침략을 노리며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나라의 문을 열었다(1876). 강화도 조약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 및 다른 두 곳을 개항해야 했으며, 일본에 치외법권과 해안 측량권 등을 내준 점에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어서 조선 정부는 미국과 조약(1882)을 맺은 뒤,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양 열강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들 조약 역시 치외법권과 최혜국 대우를 규정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개항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을 두고 침략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정책을 전담할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고,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일본과 청,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 신식 문물을 배우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개화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고 피해를 입은 구식 군인, 하층민 등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다(1882). 이에,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서울에 들어온 청의 군대는 일시 집권한 흥선 대원군을 청으로 잡아갔다.
정식 명칭은 조⋅일 수호 조규이고, 병자 수호 조약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에 이어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 조선 양곡의 무제한 유출 등을 규정한 통상 장정을 맺었다. |
통상, 항해 조약 등에서 한 나라가 가장 유리한 대우를 상대국에도 부여하는 것 |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운동 |
갑신정변
편집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조선 내정에 대한 간섭과 경제 침략을 강화하였다. 이에 반발한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적 개화 세력은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1884).
이들은 청과의 의례적 사대 관계를 폐지하고, 입헌 군주제적 정치 구조를 지향하면서, 인민 평등권과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 지조법을 실시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혜상공국을 폐지하여 자유로운 상업의 발전을 꾀하였다.
하지만, 개화파 정권은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는 갑신정변 추진 세력의 정치⋅군사적 기반이 약했고, 민중의 지지 속에 정변을 성공시키기보다는 외세에 의존하는 방법을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최초의 정치 개혁 운동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갑신정변 이후, 조선 정부는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세력 확장에 불안을 느낀 영국은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였다(1885). 이렇듯 열강의 조선 침략이 격화되자, 조선 주재 독일 외교관인 부들러나 개화파 지식인 유길준 등은 조선을 중립국으로 하자는 논의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 때의 14개조 정령의 일부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게 하며, 종래에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6. 각 도의 환자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갑신일록〉 |
토지에 부과하는 세금을 생산량 기준이 아니라 토지 가격에 따라 부과하는 방식. 종래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려는 방안으로, 일본에서 실시된 것을 수용한 것이었다. |
보부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 |
동학 농민 운동
편집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삼정의 문란, 근대 문물의 수용, 각종 배상금 지불, 일본의 경제적 침투 등으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은 팽배하였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층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욕스럽고 포악함에 봉기한 이후,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세우며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정부와 농민군은 전주에서 폐단이 많은 정치를 개혁하기로 합의하였다. 특히 농민군은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이를 실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을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톈진 조약을 빙자하여 우리 나라에 파견된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하고,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전통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는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비록 당시의 집권 세력과 일본 침략 세력의 탄압으로 실패하였지만,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전주 화약 이후 동학 농민군이 내정을 개혁할 목적으로 전라도 53개 군에 설치한 민정 기관. 한 사람의 집강과 그 아래에 서기, 성찰, 집사, 동몽 등의 임원을 두었다. |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편집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일본은 조선에 대한 간섭을 유지하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1894).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갑오개혁, 1894).
갑오개혁에서는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고 왕권을 제한하였으며, 신분제를 철폐하고, 각종 폐습을 타파하였다. 또, 은본위 화폐 제도와 조세 금납화를 실시하고, 탁지아문이 국가 재정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등의 삼국 간섭으로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 틈을 타서 명성 황후가 러시아와 연결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켰다(명성 황후 시해 사건, 1895). 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단발령 등을 실시하였다(을미개혁).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전통적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농민층의 개혁 요구도 일부 반영한 개혁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가장 절실한 과제였던 군사적 개혁이나 농민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다.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의 의병은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고, 농민층이 가담하여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홍범 14조의 일부 조항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 외척의 내정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의 관할에 속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구한국 관보〉 |
초정부적 심의 기구로, 이곳에서 심의, 통과시킨 의안을 국왕이 재가하면 국법으로 시행하였다. |
갑오개혁이 추진되던 1894년 12월 12일, 개혁 추진의 의지를 밝히며 고종이 종묘에서 반포한 글 |
한반도와 만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요동 반도를 포기하도록 만든 사건 |
독립 협회와 대한제국
편집일본의 침략과 급진적인 갑오⋅을미개혁의 실시로 대부분의 국민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었다. 또,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화 세력의 개혁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고(아관 파천, 1896), 개화파 정부는 무너졌다. 이후 고종은 단발령 철회, 의병 해산 권고 조치 등을 단행하였다.
아관 파천으로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광산, 삼림 등에 대한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재필 등은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서구의 자유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으며,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
독립 협회는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통하여 민중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권⋅민권 사상을 고취시켜, 광범한 사회 계층의 지지를 받는 단체로 발전하였다. 또,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자유 민권 등을 달성하려는 정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그런데 독립 협회의 활동은 의회의 설립과 서구식 입헌 군주제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보수 세력과 대립하였다. 독립 협회는 보수 세력이 동원한 황국 협회의 방해를 받았고, 결국 3년 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약 1년 만에 환궁한 후, 자주 독립의 근대 국가를 세우려는 국민적 열망과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국제 여론에 힘입어 대한제국을 수립하였다(1897).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대한제국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라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대한국 국제를 제정하여 황권을 강화하였다. 또,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지계를 발급하고, 상공업 진흥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책은 집권층의 보수적 성향과 열강의 간섭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관⋅민이 힘을 합하여 전제 황권을 견고하게 할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의 자문을 받아 다수의 의견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독립신문〉 |
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보수 세력은 이들에게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게 한 다음, 이를 빌미로 독립 협회를 해산하였다. |
대한제국 정부가 조세 수입을 늘리고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1898년에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토지를 조사하여 토지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 |
일제의 국권 침탈
편집일제는 제1차 영⋅일 동맹(1902)을 체결하여 국제적 입지를 강화한 후,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싸고 러시아를 선제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러⋅일 전쟁, 1904). 대한제국은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적으로 체결하여 정치적 간섭과 군사적 점령을 꾀하였다. 그리고 이에 의거하여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여 외교, 재정 등 각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어 한국 내정을 간섭하였다.
일제는 미국과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영국과는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을 발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하였다(1905).
일제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군대마저 해산하고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1907). 그리고 전국적인 의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법권과 경찰권을 빼앗은 다음,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1910).
한편,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울릉도에 딸린 섬이었던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킨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시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의 일방적인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독도는 역사적 사실로나 국제법상으로 대한제국을 계승한 우리의 영토이다.
또, 일제는 청에서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얻어 내는 대가로 간도 지방에 대한 관리 권한을 청에 넘겨주었다. 19세기에 이르러 토문강 위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조선과 청 사이에 문제가 있었다. 결국, 간도는 우리의 외교권이 불법적으로 상실된 상태에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간도 협약(1909)에 따라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간도 협약 제1조 일⋅청 두 나라 정부는 토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수(石乙水)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 제3조 청 정부는 이전과 같이 토문강 이북의 개간지에 한국 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승인한다.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 표시한다. 제5조 토문강 이북의 한국인과 청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 구역 안에 있는 한국 국민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청 정부가 청 국민의 재산과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 제6조 청 정부는 앞으로 길장 철도(吉長鐵道)를 연길 이남으로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에서 한국의 철도와 연결할 수 있다. 〈순종실록, 1909. 9. 4.〉 |
을사조약은 제2차 한⋅일 협약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무력적인 강압 속에서 이에 동조한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이 찬성하여 체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조약의 과정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고, 고종이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은 성립될 수 없다. |
간도 협약에 따라 일제는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 주었으나, 최근 토문강과 두만강이 별개의 강이라는 각종 자료가 발굴되고 있다. 이에 따라 간도의 귀속 문제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
항일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
편집일제의 주권 침탈에 대해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와 을사 5적을 규탄하고, 조약 폐기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
의병 전쟁도 을사조약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이 때,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 비해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과 평민 의병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의병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908). 이를 계기로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 운동이었다.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과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하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한편, 여러 종류의 사회단체도 설립되어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정치 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에서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비밀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으나,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정치적, 군사적으로 예속된 상태에서 전개되어 항일 투쟁의 성과면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지만, 민족 독립 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한 자강회 취지서 무릇 우리 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의 여하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대한이 종전에 자강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스스로 우매함에 묶여 있고 국력이 쇠퇴하여 마침내 오늘의 위기에 다다라, 결국 외국인의 보호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강의 도에 뜻을 다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 자강의 방법을 생각해 보면, 다름 아니라 교육을 진작함과 식산흥업에 있다.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면 백성의 지혜가 열리지 못하고, 산업이 늘지 못하면 국부가 증가하지 못한다. 〈대한 자강회 월보〉 |
1911년, 일제는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배일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려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조작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중심 인물 105인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
[3] 민족의 수난과 항일 민족 운동
편집일제의 식민 정책
편집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식민 통치를 강행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여 일본에 완전하게 ‘동화’시키려 하였다.
1910년대에 일제는 무단 통치를 행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빼앗고, 독립 운동을 탄압하였다. 또, 일제는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즉결 심판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이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에 불과하였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경찰 수와 장비 등 경찰력은 오히려 강화하였다. 또, 일제는 소수의 친일 분자를 키워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족 운동가들도 회유하는 한편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철저히 탄압하였다.
1930년대에 일제는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1940년대에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면서 인적⋅물적 자원의 수탈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말살하려는 황국 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 황국 신민 서사 암송,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 일본 제국주의는 1932년 무렵부터 침략 전쟁을 확대해 가면서, 점령 지구에서 “군인들의 강간 행위를 방지하고, 성병 감염을 방지하며, 군사 기밀의 누설을 막는다.”라는 구실로 우리 나라와 중국, 타이완 및 점령 지역의 10만~20만 명에 이르는 여성을 속임수와 폭력을 통해 연행하였다. 이들은 만주, 중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과 일본, 한국 등에 있는 점령지에서 인권을 박탈당한 성적 행위를 강요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귀국하지 않은 피해자 중에는 현지에 버려지거나, 자결을 강요당하거나 학살당한 경우도 있다. 운 좋게 생존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사회적인 소외와 수치심, 가난, 병약해진 몸으로 인해 평생을 신음하며 살아가야 했다. 〈한국 정신대 문제 대책 협의회 교육 자료 1〉 |
조선 총독은 일본군 현역대장 또는 대장 출신자 중에서 임명되었고,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
내는 일본, 선은 조선을 가리킨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으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화도 민족 차별을 정당화하는 명분에 불과하였다. |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한다.”는 내용이다. |
3⋅1 운동
편집우리 민족은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 지배를 받았으나, 광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1910년대 국내에서는 많은 항일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국외에서는 만주와 연해주 등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강점 이후 일제의 무단 통치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던 민족 지도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제창된 민족 자결주의와, 도쿄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에 고무되어 독립 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고, 국내외에 독립을 선언하였다(1919. 3. 1.).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 운동은 학생, 종교인, 상인, 노동자가 참가하면서 점차 지방 도시로 확산되었고, 뒤이어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차츰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식민 통치 기관, 친일 지주 등을 습격하는 무력적인 저항 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또, 3⋅1 운동은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와 연해주, 미국, 일본 등지에서도 국외 동포에 의해 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온갖 무력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탄압하였다.
3⋅1 운동은 전 민족이 참여한 대규모의 독립 운동으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한 차원 높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또,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과 자신감을 가지게 하고, 국내외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세계 약소 민족의 독립 운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일제의 3⋅1 운동 탄압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일제는 헌병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까지 긴급 출동시켜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정주, 사천, 맹산, 수안, 남원, 합천 등지에서는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화성 제암리에서는 전 주민을 교회에 집합, 감금하고 불을 질러 학살하였다. ……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만 명이며, 일본 군경에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당한 사람은 15,850명, 체포된 사람은 45,306명이었고, 헐리고 불탄 민가가 715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대한민국 임시 정부
편집3⋅1 운동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고, 국민 국가 건설을 효과적으로 준비할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서울과 연해주, 상하이에 각각 정부가 조직되었고, 마침내 이를 통합하여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 9.).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민주 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채택하였다. 임시 정부는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 분립 헌정 체제를 갖추었다.
초기의 임시 정부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민족 독립 운동을 조직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하는 중추 기관의 역할과 임무를 담당하였다. 또, 연통제와 교통국 등을 통하여 독립 운동 자금 모금과 정보 수집에 기여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임시 정부는 애국 공채를 발행하고,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주권을 대표하는 정부로 기능하였다. 이와 아울러 일제 강점기에 독립 운동을 통할하는 중심 기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임시 정부가 국내의 독립 운동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비밀 연락 조직으로,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
임시 정부의 통신 기관.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
국내외 항일 민족 운동
편집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경제 발전과 교육 진흥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하자는 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지자 일제는 친일파를 육성하는 한편, 민족주의 세력을 회유하여 민족 운동을 약화시켰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은 자치 운동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적인 세력과 비타협적인 세력으로 대립하였다.
한편, 192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활발해지면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한 신간회가 조직되었다(1927). 신간회는 자치론의 확산을 우려한 비타협적 민족주의 인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민족 협동 전선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강연회를 열어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기회주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실시와 생활 개선 등을 주장하고, 노동 쟁의나 소작 쟁의, 동맹 휴학 등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민중 계몽 활동과 일제의 차별 교육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개별적인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되어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1926).
또, 한⋅일 학생 간의 충돌 사건을 계기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다(1929).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3⋅1 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국권을 빼앗긴 후에 애국 지사들은 간도와 연해주 지방에 집단 거주지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항일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먼저 각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고, 청소년에게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에는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군 등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이에, 독립군 부대들은 연해주의 자유시로 옮겨 갔으나, 적색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자유시 참변). 이후 독립군은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조직하였다. 이 가운데 참의부는 임시 정부가 직할하였다.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군은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들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에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또,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거를 일으켜 민족의 독립 의지를 고취하고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활동하거나, 김원봉의 의열단, 김구의 한인 애국단에서 활동하면서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본인 고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이봉창과 윤봉길이었다.
한편, 1937년에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위협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는 각처에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임시 정부가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후 한국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으로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다. 또, 미국과 협조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밖에, 만주의 일부 조선인들은 1930년대에 항일 유격대를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함께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계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얻어 조선 의용대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조선 의용대에서 분화된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은 조선 의용군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문(1941. 12.) 우리는 3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 영, 미, 소, 캐나다,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이 일본을 격패케 하고 동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며, 이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 단위로서 추축국에 선전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인 한국에 있어서의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하에 조성된 창춘 및 난징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 처칠 선언의 각 조를 견결히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여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축원한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
-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 |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이 간도 일대에서 동포 1만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개소를 불태운 사건 |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재만 동포의 자치 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자체의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여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
- 강우규:사이토 총독에 폭탄 투척(1919) - 김익상: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1921) - 김상옥: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1923) - 나석주: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 투척(1926) - 이봉창:도쿄에서 일본 국왕에 폭탄 투척(1932) - 윤봉길:상하이 훙커우 공원 일본 전승 축하식에서 폭탄 투척(1932) |
[4] 대한민국의 성립과 발전
편집광복 직후의 국내 정세
편집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는 일본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 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준비해 왔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규정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한편, 사회주의 계열인 중국 화북 지방의 조선 독립 동맹이나 만주 지역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단체, 그리고 국내의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 건국 동맹도 각각 민주 공화국 건설을 위한 원칙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광복의 감격과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자주 독립 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군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소의 분할 점령과 함께 우리 민족도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하기 시작하였다.
좌우의 대립은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격화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이에,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안에 찬성한 좌익이 대립하게 되어, 결국 자주 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임시 정부의 한국 독립당에서 일본의 패망에 대비하여 조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를 채택하여 1941년 제정, 공포한 것이다. |
한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미⋅영⋅중⋅소 4개국이 한반도를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하겠다는 방안 |
대한민국의 수립
편집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 문제 등으로 결렬되었다. 이런 가운데 이승만 등 우익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고, 중도 세력은 미군정의 후원하에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였다.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후, 한반도 문제는 유엔에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소련이 이에 반대하자, 유엔 소총회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다. 분단을 우려한 김구, 김규식 등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 등과 평양에서 남북 지도자 회의를 개최하였지만 실패하였다(1948. 4.).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비밀 선거인 5⋅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정신과 건국 이념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1948. 8. 15.). 이로써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 국가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국가 건설은 많은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정부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어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순천 10⋅19 사건 등이 일어났다.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국면을 극복하고 사회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반공 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농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제헌 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1948. 9.).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소극적 태도로 친일파 처벌은 좌절되었다.
한편, 북한에서는 소련의 지원하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어 토지 개혁,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을 단행하였다. 이후,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북한에서도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다(1948. 9. 9.).
제주도에서 벌어진 단독 선거 반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만 명의 인명 피해가 일어난 사건 |
제주도 4⋅3 사건의 진압 출동 명령을 거부한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 일대를 점령한 사건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파 처단을 요구하는 국민적 열망이 고조되어 1948년 8월, 헌법 제101조에 의거, 국회에 반민족 행위 처벌법 기초 특별 위원회(반민 특위)가 구성되고, 9월 22일, 법률 제3호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통과되었다. |
6⋅25 전쟁
편집이승만 정부는 출범 초기에 좌익 게릴라 활동, 실업과 물가 폭등 등으로 어려움에 처하였다. 더욱이 미군이 철수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북한, 중국, 소련의 동맹 관계가 굳건해지는 등 국제 정세도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하에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남침을 감행하였다.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는 다시 바뀌어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이후,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국군 사이에 휴전 회담이 진행되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3년간 계속된 6⋅25 전쟁으로 우리 민족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쟁 고아, 이산 가족이 발생하였으며, 전 국토가 초토화되어 대부분의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남북 사이에는 불신과 적대 감정이 높아져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었다.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편집6⋅25 전쟁의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발췌 개헌을 강행하였고, 이후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장기 집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집권 연장을 위하여 노골적인 부정 선거를 자행하였고, 이에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마침내 국민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터지면서 4⋅19 혁명이 일어났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내각 책임제와 양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헌법으로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장면 내각은 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과 계속되는 시위에 시달렸다. 그러나 경제 개발 계획을 세우는 등 개혁 정책을 추진했지만, 박정희 등 군부 세력의 정변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1961. 5. 16.).
군부 세력은 비상 계엄하에서 헌정을 중단시키고,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반공 강화와 민생 안정 등을 표방한 혁명 공약을 발표하고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군에 복귀하지 않은 채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였고, 이를 토대로 헌법 개정과 대통령 선거 등을 거쳐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1963).
박정희 정부는 조국 근대화 실현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고, 경제 개발 정책을 추진하면서, 일본의 사과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시민, 학생들의 격렬한 반대를 억누르고 한⋅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1965). 또,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 베트남전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1967년 선거에서 재선된 박정희는 3선 개헌을 강행하였고(1969), 1972년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였으며,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10월 유신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민주적 헌정 체제를 부정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면서 장기적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유신 체제를 부정하고 헌법을 비방하거나 개정을 요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긴급 조치를 잇따라 발표하였다. 그러나 양심적 지식인, 학생, 종교인 등은 이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은 10⋅26 사태로 피살되었고,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하였다(1979).
이후, 국민은 민주화를 요구하였으나, 12⋅12 사태로 군사권을 장악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이를 억압하였다. 신군부 세력은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시작된 5⋅18 민주화 운동도 무장 군인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5⋅18 민주화 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신군부 세력은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전두환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면서 언론 통폐합, 삼청 교육대 등으로 인권을 유린하기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여당이 주장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골자로 하고, 야당이 주장한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발췌, 절충하였다. |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횟수 제한 없이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다는 내용의 개헌안이 국회 표결 결과 1표 차이로 부결되었으나, 이틀 후에 반올림(사사오입)을 내세워 통과시켰다. |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 특히,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는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여 박정희의 영구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
1980년 5월, 신군부의 집권 기도에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광주에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의 과잉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이에 시민군이 결성되어 계엄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많은 시민과 학생이 희생되었다. |
6월 민주 항쟁과 민주주의의 발전
편집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하에서도 계속된 민주화 요구는, 1987년 박종철 고문 사망 사건과 4⋅13 호헌 조치를 계기로 6월 민주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직선제 개헌을 비롯하여 광범위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정부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고, 여야 합의에 의해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권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신군부 출신의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 및 소련, 중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고, 유엔에 남북한이 함께 가입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는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채 통치 기간 중에 발생한 부정과 비리로 국민적 지지를 제대로 얻지 못하였다.
1993년에 성립된 김영삼 정부는 공직자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등을 법제화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노력하였다. 또,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신군부 세력을 법정에 세우고, 5⋅16 군사 정변 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집권 말기에 국제 경제 여건의 악화와 외환 부족으로 인하여 경제적 위기를 겪었다.
1998년에 성립된 김대중 정부는 외환 위기 극복 및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을 천명하였고, 남북 평화 정착을 위한 적극적인 대북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2000년 6⋅15 남북 정상 회담을 실현하였고, 남북 경제 협력의 활성화와 금강산 관광, 이산 가족의 상봉이 이루어졌다.
2003년에 성립된 노무현 정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 등을 국정 목표로 제시하였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선진 일류 국가의 건설을 위하여 잘사는 국민, 따뜻한 사회, 강한 나라를 추구하며, 섬기는 정부, 활기찬 시장 경제, 능동적 복지, 인재 대국, 성숙한 세계 국가를 국정 지표로 삼고 있다.
전두환 정부는 1987년 4월 13일에 담화문을 발표하여 국민이 열망했던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민주화 요구를 외면하고, 사회 혼란을 구실로 대통령 간선제의 헌법을 고수하려 하였다. |
북한의 정치
편집북한에서는 6⋅25 전쟁을 거치면서 김일성이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 등을 숙청하면서 권력 기반을 한층 강화하였다. 이 시기에 북한은 전후 복구와 자립적 민족 경제 확립을 목표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중공업과 경공업을 모두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농업 분야에서는 협동화를 통해 생산력을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한⋅미⋅일 안보 체제 구축과 중⋅소 분쟁 등 국제 정세의 악화로 위기에 놓인 북한은 군수 산업 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아울러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를 강화하기 위해 주체 노선을 강조하였다. 대남 정책에서는 남북 연방제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지만, 한편으로 무장 군인을 남파하는 등 무력 도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7⋅4 남북 공동 성명 직후 헌법을 개정하여 국가 주석이 행정 및 군사 분야의 최고 지도자로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 주석제를 도입하였다(1972. 12.).
1980년대에 들어서는 김정일이 당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후계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1993년에는 김정일이 국방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1994년에 김일성이 사망한 후 권력을 승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0년대 북한 경제는 전반적으로 침체되어 갔다. 특히, 1990년 이후에 심각한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어, 외국에서 식량 원조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홍수 등 자연 재해의 발생, 외부 원조의 감소, 에너지 자원의 부족, 사회 간접 자본 낙후, 자립 경제 고수, 주체 사상과 수령 유일 체제의 비합리성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북한은 외국 기업과의 합작과 자본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정치의 자주, 경제의 자립, 국방의 자위 |
통일을 위한 노력
편집광복 이후 통일 국가의 수립이 좌절되면서 민족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는 일은 우리 민족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 정책과 북한의 적화 통일 정책으로 남북한 사이에는 통일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4⋅19 혁명 직후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 협상론, 남북 교류론 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통일 논의는 그 후의 남북한 대립 등으로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냉전 체제의 완화, 남한의 경제 발전 등 국내외 여건의 변화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남북 교류를 제의하고, 남북 간에 이산 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적십자 대표의 예비 회담을 열었다. 또,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동시에 발표되었다(1972). 이 성명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내세운 것으로, 이후 통일 논의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남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과 북한의 고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 방안이 제시되었으며, 남북한의 이산 가족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1985. 9.).
1990년대에 들어와 급격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남한의 적극적인 북방 외교 정책이 추진되었다. 남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 체육의 교류도 이루어졌다. 곧이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고(1991. 12.),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이 채택되기도 하였다. 한편, 민간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통일 노력이 전개되어 평화 통일을 위한 논의가 활성화되었다.
1998년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정부와 민간 차원의 교류가 크게 확대되었다. 마침내 평양에서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2000). 또, 금강산 관광과 경의선 연결,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등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노무현 정부도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2007년 평양에서 정상 회담(10. 2~4)을 가져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하였다
2008년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 정책을 표방하였다.
6⋅15 남북 공동 선언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
1972년 7월 4일에 발표된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간 합의 문서. 이를 계기로 국내외적인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곧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여 유일 지도 체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
심화 과정
편집- 한국 민주주의의 시련과 발전
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을(서울 대학교 문리대 학생회 4월 혁명 제1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지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 보라 !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추(鐵鎚)하에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② 우리는 이제 3선 개헌을 강행하여 자유 민주에의 반역을 기도하는 어떤 명분이나 위장된 강변에도 현혹됨이 없이 헌정 20년간 모든 호헌 세력들의 공통된 신념과 결단 위에서 전 국민의 힘을 뭉쳐 단호히 이에 대처하려 한다. 집권자에 의해서 자유 민주에의 기대가 끝내 배신당할 때, 조국을 수호하려는 전 국민은 요원의 불길처럼 봉기할 것이다. 우리는 날로 그 우방을 확장시키고 있고, 선악의 대결과 진부(眞否)의 결전에서 용솟음치는 결의를 가지고 있다.
자유 국민의 조국은 영원하다.
영원한 조국을 가진 국민은 용감하다.
전 국민이여 ! 자유 민주의 헌정 수호 대열에 빠짐없이 참여하라.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
③ 6⋅10 대회 선언문
오늘 우리는 전세계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디딘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 호헌 조치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호헌 반대 민주 헌법 쟁취 운동 본부〉
- ①, ②, ③의 선언문이 나온 배경과, 이후 우리 나라 정치의 변화 과정을 알아보자.
- ③을 비롯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운동을 통해 탄생한 오늘날 헌법의 특징을 조사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