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띠어라 노다가게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재재봉봉에
아들 딸 날라고 백일기도두 말게우,
타관객리 나슨 손님을 괄세두마라.

이것은 강원도 아리랑의 일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그땅의 냄새를 맡을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산천이 수려하고, 험준하니만치 얼뜬 성 내인 범을 연상하기가 쉽습니다. 마는 기실 극히 엄숙하고유창한 풍경입니다. 우리가 건실한 시인의 서청시를 읽는거와같이 그렇게 아련하고 정다운 풍경입니다. 멀직멀직이 내뻗은 늠늠한 산맥이며, 그 앞을 빙글뱅글 휘돌아 나리는 맑은 냇물이 곱고도 정숙한 정서를 빚어놈니다.

배경이 이러므로 그속에 묻혀진 생활 역 나른한 그리고 아리잠직한 분위기가 떠돕니다. 첩첩이 둘러싼산록에 가 여기 집 몇채, 그리고 그 바닥에서 오고가고 먹고사는 그 생활동정이 맛치 한폭 그림을 보는것같습니다.

이래도 잘 모를실듯 싶으면 오뉴월 염천에 늘어지게 밭 갈고 있는, 황소뿔에 가 졸고 앉었는 왕파리를 잠간 생각하십시요.

강원도의 여성, 하면 곧 이 가운에서 밥 ㅈ고, 애기 낳고, 물 ㄱ고 하는 그 안악네의 말입니다.

여기에 또 이런 노래가 있읍니다.

논밭전토 쓸만한건 기름방울이 두둥실,
게집애 쓸만한건 직조간만 간다네.

교통이 불편하면 할스록 문화의 손이 감히 뻗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문화의손에 농격되지 않는 것에는 생활의 과장이라든가 또는 허식이라든가, 이런 유령이 감히 나타나질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타고난 그인물까지도 오묘한 기교니 근대식 화장이니, 뭐니하는 인공적 협잡이 전혀 없읍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그대로 툽툽하고도 질긴 동갈색 바닥에 가 근실한 이목구비가 번듯번듯이 서루 의좋게 놓였읍니다.

다시 말슴하면 싱싱하고도 실팍한 원시적 인물입니다.

아 하, 그럼 죽통에 틀어박은 도야지 상이 아니냐고 의심하실 분이 게실지 모릅니다. 허나 그것은 업청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일색이란 결코 퇴폐기적 심신으로 기함한 중병환자의 용모가 아닌 동시에 근대 미용술과 거리가 멀다고 곧 잡아 추물이라 할건 아닙니다. 그럴래서는 어느 여성이고 미용사의손에서 농간을 좀 당하고, 그리고 한 달포동안 지긋이 굶어보십시요. 어럽지않게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매가 날씬한것이 바람만건듯 불면 고대로 호룩 날을듯한 미인이 될게 아닙니까.

그러나 이 땅의 안악네가 가진 그것은 유현한자연비랄가 혹은 천래부봉의 순진미라 하는것이 옳을듯합니다. 외양이란 대개 그 성격을 반영하나봅니다. 그들의 생활에는 허영이라는 사가 일절 없읍니다. 개명한 사람의 처신법과같이 뚫어진 발굼치를 붉은 낯이 치마끝으로 가린다든가, 혹은한자 뜯어볼수 없는 외국서적을 옆에 끼고 그러잖어도 좋을듯 싶은 용기를 내어 큰 거리를 활보한다든가, 하는 이런 어려운 연극을 도시 모릅니다. 해여진 옷에 뚫어진 버선, 혹은맨발로 칠떡칠떡 돌아다니며 어디 하나 끄릴데 없는 무관한 표정입니다.

하기야 그들이라고 이런 작난을 하주 모른대서야 억설이 되겠지요. 때로는 검붉은 얼골에 분때기를 칠해서 마치 풀집 대문간에 광고로 매달린 풀바가지같이 된다든가, 허지 않으면 먼지가 케케 앉은 머리에 왜밀을 철떡 어려서 우리 안의 도야지 궁둥이를 맨든다든가, 이런 일이 더러종종 있읍니다.

허나 이걸가직 곧 허영이 들떴다고 보기는 좀 아깝습니다. 말슴하자면 어쩌다 이 산속에 들어오는 버덩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어찌 되나, 나두 한번 해보자는 호기심에서 더지나지 않을게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갑갑한 산중에서만 생활하야 왔기 때문에 언제나 넓직한 버덩이 그립습니다.

아주까리 동백아 흐내지마라
산골의 큰 애기 떼난봉난다

동백꽃이 필라치면 한 겨울동안 방에 가처있든 처녀들이 하나 둘 나물을 나옵니다. 그러면 그들은 꾸미꾸미 외따른 곳에 한덩어리가 되어 쑥덕공론입니다. 혹은 저히끼리만 들을만치 낮윽낮윽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 노래라는것이 대개 잘살고 못사는건 내분복이니버덩의 서방님이 그립다는 이런 의미의 장탄입니다. 우리가 바닷가에 외로히섰을때 바다넘어 저편에는 까닭없이 큰 기쁨이 있는덧싶고, 다스러운 애정이 자기를 기다리는것만 같아야 안타깝게도 대구 그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산골의 안악네들은 넓은 버덩에는 그 무엇이 자기네를 기다리는것만 같하야 그렇게도 동경하야 마지 않는것입니다. 네가두 날만치나 생각을 한다면 거리거리 로중에 열녀비가 슨다.

교양이라는 놈과 인연이 먼만치 무뚝뚝한 그들에게는 예의가 알배 없읍니다. 우선 길을 가시다 구갈이 나시서든 우물두덩에서 물을 푸고 있는 안악네에게 물 한그릇을 청해 보십시요. 그는 고개도 돌려보는 법없이 물 한바가지 뚝 떠서 무심히 내댈것입니다. 그건 고만두고 물을 다 자신 뒤에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그 바가지를 도루 내놔보십시요. 역시 그는 아무대답도없이 바가지를 턱받아 제물만 푸기가 쉽습니다.

그렇다 하드라도 예의를 모르는 식충이라고 속단하서서는 도리어 봉변하시고 맙니다. 입에 붙은 인사치레로만 간실간실 살아가는 간배에 비한다면 무뚝뚝하고 냉담하야 보이는 그들과 우리는 정이 들기가쉬울겝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떠주고, 먹고, 하는것은 의례히 또는 마땅히 있을 일, 그무에가 고맙겠는가, 하는 그 태도입니다.

그건세로이 남편이 먼길에서 돌아와 보십시요. 그래도 인사 한마디 탐탁히 없는 그들입니다. 이럽쎄, 저럽쎄, 하는 되우 늘어진 그들의 언어와, 굼뜬 그 동작을 종합하야 보시면 어쩌면 생의 권태를느낀 사람의 자타락으로 생각되기가 쉽습니다. 허나그런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에 집착한 열정이 틀진 도량을 나이, 그것의 소치일지도 모릅니다. 일언이폐지하고 다음의 노래가 그걸 소상히 증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네팔짜나 내팔짜나 잘먹구 잘입구 소라반자 미다지 각장장판 샛별같은 놋요강 온앙금침 잔모벼개에 깔구덮구 잠자기는 삶은 개다리 뒤틀리듯 뒤틀렸으니, 웅틀붕틀 멍석자리에 깊은 정이나 드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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