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극왕 바그너

가극이란 말은 영어로 오페라란 말을 번역한 것인데, 배우들이 무대위에서 연극을 할 때에 그네들이 하는 말을 음악에 맞추어서 노래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훌륭하고 찬란한 의복을 입은 남녀 배우는 굉장히 많은 사람 의 오케스트라에 맞추어서 노래도 부르고 춤추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극의 배우는 보통 연극의 배우들과 달라서 반드시 노래를 잘하는 음악가라야 되 며 또 가극에는 어떠한 말을 할 때든지 그것을 말로 이야기하게 된 것입니 다. 그런데 이 가극이란 것은 옛날부터 서양에 있어서 여러 음악가들이 가극 의 곡조를 만든 것이 수없이 많이 있읍니다마는 이것을 개량하고 완성시켜 서 훌륭한 예술을 만들 사람은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와그너」란 음악 가입니다.

「와그너」란 그 사람의 성이요, 그의 이름은 「리챠드」입니다. 그는 지금 으로부터 120여년 전인 1813년 5월 22일 독일이란 나라 라이프찌히란 큰 도회지에서 탄생했습니다. 마침 그때는 불란서의 큰 영웅 「나폴레옹」이 독 일을 쳐들어와서 함부로 두드려 부수고 난 바로 뒤이므로 「라이프찌히」란 곳에는 고약한 병이 많이 유행하여 「와그너」의 아버지는 이 아들이 생겨 난 지 반년도 채 못되어서, 몹쓸 병으로 죽어버렸읍니다.

본시 넉넉지 못한 살림에 그 어머니는 칠남매나 되는 여러 자식을 데리고 살아 나갈 길이 아득하여 생각다 못해 그 이듬해에는「까이엘」이라고 하는 희극배우에게로 다시 시집을 갔읍니다.

「와그너」는 새로 얻은 의붓아버지를 따라서 가끔씩 연극장에 가서 구경 을 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몹시 재미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다가 「트레 스텐」이란 곳으로 온 집안이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거기 있는 연극장에서 는 그때 가극 작곡가로 유명한 「베버」란 사람의 가극을 상연하고 있었으 므로 아버지와 함께 이것을 가서 본「와그너」는 젖꼭지를 뗀 지 얼마 되지 도 않은 아이였지마는 가극이란 것에 대단한 흥미를 느끼게 되어 그 곡조를 피아노로 연습하기 시작하여 기어코 책을 덮어 놓고도 다 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에나 재주가 있어야 되지마는, 그러나 끝까지 부지런히 해 가는데 성공이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와그너」의 이같은 열심이 필경에는 그로 하여금 세계의 유명한 가극 작곡가를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자기가 특별한 흥미를 느끼는 일에 열성을 다하여 공부하고 연구하면 누구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깊이 믿어야 됩니다.「와그너」의 음악 재주가 비범한 것을 깨달은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곧 음악 공부를 시키기 시작했읍니다. 그러나「와그너」는 웬일인지 자기가 좋아하는 곡조만 연습하고 선생이 가르쳐 주는 것은 도무지 공부하 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그의 선생은 「너같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놈이 음악 가가 다 무엇이냐. 일찌기 집어 치는 것이 옳지……」하고 나무란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까지도, 「이 애는 음악가가 되기는 틀린 모양이니 미술가나 만들어 보지」하고 와그너에게 그림공부를 시켰읍 니다. 그러나 「와그너」는 그것도 역시 하지 않았읍니다.

「처음부터 훌륭한 임금님의 그림이나 그리라고 하면 몰라도 눈깔이나 코배 기 같은 것을 그리라고 하니 그까짓 것을 누가 해」 하고는 붓과 종이를 집 어 던졌읍니다.

그러나 「와그너」는 그림에 취미가 없는 것도 아니요, 재주가 없는 것도 아니었읍니다. 그 증거로 그는 큰 다음에 여러 가지 가극을 작곡하였을 때, 무대장치에 대한 그림을 전부 자기가 지휘해서 그리게 했는데, 그것들은 말 할 수 없이 훌륭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와그너」는 어렸을 적부터 여러 방면으로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읍니다.

음악에 대해서는 물론 남보다 훌륭한 천재를 가졌으니 여기에 한 가지 재 미있는 이야기가 있읍니다.

어떤날 유명한 가극 작곡가「베버」가 그의 아버지「까이엘」을 찾아왔는 데「베버」란 사람은 키가 작고 다리가 굽고, 또 코는 말코에다가 커다란 안 경까지 걸치고 몸에 잘 맞지도 않는 양복에다 술주정뱅이처럼 비틀걸음을 걷는 그의 모양이 퍽이나 우스웠읍니다. 그래서「와그너」의 누이가 이 꼴을 보고, 「저게 무슨 음악가야, 저따윈 보기도 싫더라.」하고 소근거리니까 「와그너」는 눈을 흘기며,「그래뵈도 저이는 세계에서 그중 유명한 음악가 라고. 두고보면 누님도 알 날이 있지」하고 말했습니다. 이때에 그의 나이가 겨우 7살이었으니 7살된 어린애가 얼마만큼이나 음악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는 이 말 한 마디를 듣고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읍니까?

이렇게도「와그너」는「베버」의 가극을 좋아해서 밤마다 부모 몰래 가극 장에 가서 베버의 음악을 듣고는 밤늦게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 어머니와 함께 가극장에 갔다가 그는 훌륭한 음악에 너무나 감동이 되어 흑 흑 느껴 운 일까지 있읍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하도 이상스러워서,

「별안간 울기는 왜 우니? 어린애처럼 그렇게 울면 다시는 안 데리고 올테 야」하고 나무랜 적도 여러 번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와그너」는 어머니의 팔에 매달려서,

「어머니, 나 돈 일전만 줘.」하고 졸랐읍니다. 어머니가,「돈은 무엇해?」하 고 걱정을 하면,「곡조 그리는 종이 한장 사올 테야. 「베버」의 음악을 베 낄려고 그래.」하고 말했읍니다. 어린애의 마음 속에 베버의 음악이 얼마나 깊은 인상을 뿌리박아 주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운명은 이 어린애에게 또다시 찾아왔읍니다.「와그너」가 겨우 8살 되던 해에 의붓아버 지마저 죽어버리자 그 어머니는 또다시 여러 남매를 데리고 살 길을 찾아서 헤메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다행히 그 근처에 살던 아저씨 한분이 계셔서「와그너」만은 그 아 저씨가 데려다 기르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그곳 소학교에 입학을 했다가 그 이듬해에「트레스텐」에 있는 어떤 교회 학교에 전학을 했습니다. 그때에 「와그너」의 나이는 11살 이었는데, 마침 그의 동무 아이가 병으로 죽어버 리자「와그너」는 그 동무를 생각하는 노래를 지어서 선생님께 바쳤더니 이 것이 대단히 잘 되어서 우등의 점수를 받고 이 소문은 그 학교 안에 퍼졌읍 니다.

「와그너」는 음악뿐이 아니라 문학에도 뛰어난 재주를 가져서 13살 때에는 희랍의 옛글을 번역하여 선생을 놀라게 한 일도 있읍니다. 그리하여 음악과 미술과 문학에 특별한 천재를 가진 그는 필경 이 세 가지 재주를 한데 뭉쳐 서 세계의 가곡을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자리에까지 끌어 올렸습니다. 그 뒤 에 그는 라이프찌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미학을 연구하는 동안에도 음악을 잊어본 일이 없더니 열 여덟에 「베토벤」의 음악을 흉내내서 큰 곡조를 지 어 보고, 그후 두어 해가 지나서 다시「교향곡」이란 큰 곡조를 두 개나 지 어서 차차 작곡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와그너」의 소원은 보통 작곡가가 되겠다는데 있지 않고 훌륭한 가극을 작곡하겠다는 것에 있 었으므로 처음으로 가극 한 개를 지어 보았읍니다. 그때 그의 누이 중 한 사 람이 가극배우로 있었는데 「와그너」가 지은 가극을 보자,「이런 싱거운 것 을 무엇에 써」하고 밀쳐버리자 와그너는 조금도 낙망하지 않고 그것을 찢 어버린 후 언제든지 훌륭한 가극을 지어 보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두째번 가극을 한 개 지어 가지고 누이를 찾아가서 그의 소개 로 가극장에서 일보는 무대감독에게 이것을 보이자 그 남자는,「이런 싱거운 것은 소용없소」하고 그 역시 밀쳐버렸읍니다. 먹을 때 먹지를 않고, 잘 때 자지를 않으면서 작곡한 이 가극이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자「와그너」는 몹 시 낙망했읍니다마는 곧 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서 기어코 성공하고야 말겠 다는 불같이 뜨거운 결심을 가지고 다시 세째번 가극을 작곡했습니다. 그때 에「와그너」는 다행히도 어떤 시골 연극장의 무대감독이 되어 있었으므로 자기의 세째번 작품을 이 연극장에서 상연시켰다가 아주 실패를 당하여 큰 손해를 보게 되었으므로 그는 그만 무대감독이란 일자리도 떼이고서 이곳저 곳으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읍니다. 그때에「와그너」의 나이는 23살이었읍니다. 그의 처지를 가엾게 생각해 주는 어떤 여배우가 있어서 「와그너」는 그와 결혼을 하기는 했으나, 혼자 몸으로 살 수가 없는 어려운 처지에 아내까지 맞이한 그는 여러 곳을 구걸하다시피 떠돌아다니다가 어떤 시골 조그만 극장에 음악감독으로 들어가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월급이라고 는 너무도 적어서 역시 가난한 생활에 쪼들려 지내면서도 여기서 다시 자기 의 작품을 상연시켜 보려고 애를 쓰더니 반년이 채 지나기 전에 그 극장이 망해 버리자「와그너」는 또다시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던 끝에 러시아란 나라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러시아란 나라는 독일만치 음악이 왕성 하지 못했던 까닭에 독일 음악가「와그너」는 여기서 무던히 대접을 받게 되어 리가라는 동네에 있는 연극장에 음악감독으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월급 도 꽤 많이 받았읍니다. 그러나「와그너」는 갑자기 큰 부자나 된 듯 싶어서 훌륭한 집을 얻어 들고 밤마다 그의 아내와 함께 마차를 타고 연극장에 왔 다갔다 하며 바로 어떤 귀족 못지 않게 지냈읍니다. 그 까닭에 한편으로는 빚이 자꾸 늘어갈 뿐이더니 이태 뒤에는 그 연극장에서나마 쫓겨나게 되자 할수없이 밤중에 자기 아내를 행랑어멈처럼 변장을 시켜 가지고 독일로 달 아나려다가 러시아 병정에게 붙잡혀서 욕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작은 배 한 척을 얻어가지고 간신히 불란서로 도망해 버린 일까지 있읍니다.

이같이 신산스러운 생활을 하는 중에는 온갖 고생을 다 겪은 그의 아내는 30년 동안이나 자기 남편을 쫓아다니면서 여러가지로 위로도 해주고 남편의 시중을 들기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더니 필경은 병으로 인하여 자기의 사 랑하는 남편의 성공을 본 지도 몇 날 되지 않아서 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 았읍니다.

불란서로 건너간「와그너」는 거기서도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다시 영국으 로 건너갔다가 또다시 불란서로 건너왔다가 하는 동안에 밥을 굶은 적도 여 러번이었으며 옷을 헐벗은 때도 많이 있었읍니다. 그래서「와그너」는 너무 도 고생스러운 끝에 필경은,

「아아, 음악을 해서는 살 수가 없구나. 도적질이라도 해 보자」하고 아주 실망 낙담한 끝에 도적놈이 되어 볼 생각까지 한 일이 있었읍니다마는, 그는 또다시 마음을 굳게 먹고,

「그렇다. 나는 역시 음악가다. 이왕 작곡을 할 바엔 조그만 것들을 많이 쓰 는 것보다 한 개를 쓰더라도 굉장히 큰 가극을 작곡하자.」하고는 「리엔 치」라고 하는 유명한 가극을 쓰기 시작하여 27살에 이것을 완성시킨 후, 29살 때에는 그의 고향인 트레스덴에서 이 가극이 상연되어 굉장한 환영을 받고 여기서「와그너」는 단번에 세계적 대 작곡가가 되어 트레스덴의 대궐 안에서 음악대장 노릇까지 하게 되었읍니다.

그후부터「와그너」는 순풍에 돛을 달은 배와 같이 작곡하는 족족 크게 성 공하여 세상에는 그의 이름이 날로날로 높아갈 뿐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리엔치」를 작곡하여 크게 환영을 받고 대궐의 음악대장까지 된 것으로 만족하였더라면 몇 날 못 가서 그의 이름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지마는 그 는 결코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흔이란 늙은 나이로 죽는 날까지도 좀더 위대한 작품을 써보려고 끊이지 않고 애쓰고 노력한 결과 그 는 과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가극 작곡가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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