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의 심판/제5부

蠻鬼 朴春琴 一黨의 罪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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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민족반역자 중에도 朴春琴처럼 잔악무도한 놈은 없다. 또한 그가 영도하는 大義黨처럼 직접 동포를 살해코자 덤벼들던 친일단체는 없었다. 그 인물에 그 단체라 철두철미 일본제국주의의 충실한 走狗로서 조선민족혼을 문자 그대로 말살하려 하였다. 그 뿐이랴. 百折不屈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계속하는 혁명투사 及 항일인민대중을 몸서리치게도 대규모적으로 학살하려고 든 것이다. 실로 그들의 兇謀는 천인이 공노할 바이며 그들 무리를 거족적 분노로 철저히 숙청하여야 할 것이다.

듣건데 大義黨 당수 朴春琴이 방금 일본에 도피중이라 하는데 일본은 고사하고 미국에 있더라도 잡아와야 할 것이다. 여기에 本紙는 땅에 떨어진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하여 또한 민족적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朴春琴 일파의 兇惡無比한 음모사건 전모를 백일하에 공개하는 바이다. 응당 냉엄한 민족의 심판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1. 朴春琴 一派의 兇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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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議院 議員인 朴春琴은 1891년(明治 24년)에 慶尙南道 密陽에서 탄생하였으나 천성이 잔인하기 그 比類가 없어 왜놈의 술집에 심부름꾼으로 있을 때 싸움 잘하기에 유명하였다. 사람을 치기가 마치 짐승에 대하는 것 같고 어떻게 참혹하게 때려 치는지 눈뜨고서는 차마 보지를 못하였다 한다. 그러니만큼 언제나 불량배들의 두목이었으며 日本에 가서는 ‘노가다’로 그의 蠻勇은 사방에 떨치었다. 그러한 朴春琴이라 1923년 9월 日本 關東震災 당시 자기의 야욕을 위하여서는 수천 수만의 가련한 同族을 눈 하나 꿈쩍이지 않고 학살시켰던 것이다. 결국 同族虐殺의 功勞로 代義士가 되고 보니 氣高萬丈하여 朝鮮에 와서는 각지로 돌아다니며 갖은 惡行을 감행하였다. 그러다가 太平洋 戰爭이 일어나자 처음엔 日本이 世界를 집어 꺾을 듯하더니 달수를 거듭하고 해가 갈수록 日本의 戰勢가 불리하여졌다. 매일 들어오는 소식이 玉碎뿐임에 朴春琴은 점차 日本의 실력과 장래에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래 무식한 그는 터무니도 없는 倭神 天照大神과 日本이 神國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음으로

“절대 日本은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神國인 日本이 망할리가 있을라구....”

자기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하여 日本을 위하여서는 자기 몸 하나는 그다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이렇듯 朴春琴의 日本에 대한 忠誠이 더욱 두터워짐에 따라 日本을 打倒하려 하고 祖國의 光復을 위하여 血鬪를 계속하고 있는 革命鬪士及 抗日民衆을 그냥 두었다가는 큰일날 상 싶었다. 그리하여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칠 殘忍無道한 兇計를 꾸미기 시작하여 軍官當局과 비밀리에 會合을 거듭하고 마침내 朝鮮 內外 抗日 反戰朝鮮民衆 30만명을 학살할 것을 下請負맡아 關東震災때 在日同胞를 죽창으로 학살시켰던 극악무쌍한 잔인성을 충분히 발휘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朴春琴은 朴興植 李光洙 李聖根 金東煥 辛泰嶽 金敏植... 등과 共謀하여 가지고 大義黨 組織에 착수하였다.

2. 그들의 兩面作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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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春琴은 뜻대로 일이 진행됨에 극히 만족하였으나 그러나 發黨시키기까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 것과 둘째로 戰勢가 불리하여짐에 日本의 敗亡이 멀지 않음을 깨달음인지 被動的으로 움직이던 자들이 얼른 大義黨 組織에 參加 않을 뿐더러 도리어 시골로 逃避하는 자들이 속출하였다는 것과 셋째로 大義黨 組織에 裏面으로 領導하고 있는 군관 당국자들이 黨首問題에 있어서 朴春琴이의 수차에 亘한 自己 出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黨首로는 李光洙를 내세우고 顧問格으로 사실상의 實權은 朴春琴이 쥐고 있으라고 朴에게 內命하였다. 朴春琴은 자기가 黨首되지 못함을 不滿히 여기면서도 그가 절대로 믿고 있는 군관 당국의 명령이라 할 수가 없어서 그때 思陵에 가 누워있는 李光洙를 수차 찾았으나 李光洙는 朴春琴의 마음을 짐작하는지라 그 춤에 나서지 않고 자기는 자기 대로의 길을 밟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李光洙와 朴春琴와의 兩派에 分裂은 大義黨 組織을 더디게 하였으며 8. 15직전 1945년 6월 하순에 發黨式을 거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陣營의 具成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 의아스러운 점은 大義黨 외에 大和同盟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 兩 團體의 중심인물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에 흉악한 조직적 계획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표면에서 활약하는 데는 大和同盟을 응용하고 이면에서 활약하는 데는 大義黨을 앞세우자는 소위 兩面作戰인 것이다. 말하자면 大和同盟은 표면에서 비교적 평화적으로 社會政策 部面을 담당하고 大義黨은 이면에서 抗日 反戰 朝鮮民衆 30만 명을 학살코자 직접적 행동을 취할 暴力 殺人團體인 것이다. 실로 이 朴一派의 잔인무도하고 대규모적인 흉모에는 새삼스래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만약 8. 15가 오지 않고 전쟁이 더 계속되었더라면 수만의 同胞가 그들 朴一派의 흉모의 희생으로서 쓰러졌을 것이다.

3. 大和同盟의 正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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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和同盟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이지만 그 정체를 폭로하는 바이다. 大和同盟 역시 朴春琴 一派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며 大義黨의 姉妹黨이라 하겠다. 大義黨과는 趣旨를 달리하여 표면에서 必勝體制 確立 內鮮一體 促進을 목표로 하는 大和同盟은 1945년 日本의 戰勢가 바야흐로 불리하여 가는 2월 11일에 결성된 것이며 그 綱領과 陣營을 소개하면 如左하다.

綱 領

1. 皇道公民 鍊成.

1. 決戰體制의 强化(특히 學兵 勤勞推?에 置重).

1. 內鮮 同胞의 精神的 團結을 促進.

1. 增産 供出 責任의 完遂.

役 員

<理事長> 尹○昊

<理 事> 朴春琴 李聖根 李光洙 孫永穆 奏學文 姜炳順

<審 議員> 張稷相 朴興植 李忠榮 李源甫 金東進 鄭然基 崔準集 朱○翰 高元勳 李升雨 金思演 金信錫 金晟鎭 趙○植 金東煥 盧聖錫 洪承均 崔鼎? 等

4. 朴春琴 一黨의 最後發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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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春琴을 중심으로 한 兇惡無比한 殺人鬼들의 날뛰는 양은 실로 末世紀的 壯觀이었다. 日本의 戰力이 점차 崩壞되어 최후의 운명이 닥쳐옴에 그들 무리는 日本의 敗亡時의 事態에 불안과 공포를 느꼈으나 그래도 日本의 실력을 믿는 모양이어서 기울어지는 戰勢를 소위 神機로 돌리려고 미친 狂이처럼 각지에 쏘다니며 大義黨 寄附金을 강요하고 準戒嚴的 暴力政治下에 신음하는 우리 靑壯年을 强制 動員시켜 學兵 徵兵 徵用 報國隊 등으로 몰아 넣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곤봉 등으로 無數 毆打하고 혹은 경찰에 인도하여 잔인한 고문을 감행하고 혹은 나이 찬 자식 사랑하는 남편 오빠의 장차 오고야 말 운명에 눈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가련한 婦女의 貞操를 권세를 방패로 徵用 徵兵가기를 면해 준다는 대가로서 강요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徵用 徵兵 등으로 위협하며 강간하고 혹은 講演 등으로 日本을 위하여 피를 흘리라고 절규하며 朝鮮 人民 大衆을 죽음터로 몰아넣기에 눈코 뜰 사이가 없으니 실로 이 惡鬼들에 희생이 된 동포는 不知其數였다. 이러한 天人共怒할 죄악을 감행한 朴春琴 一黨은 李光洙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1945년 6월 25일 府民館에서 大義黨 結成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흉악무비한 大規模 虐殺計劃機關인 大義黨의 結成은 日帝의 야만적 폭압 하에서 죽지 못해 사는 朝鮮 人民大衆을 더욱 한층 공포에 전전긍긍케 하였으며 실로 이 大義黨의 최후 발악은 日帝 末期의 특징적인 것이었다.

여기에 大義黨의 正體를 폭로하는 데 있어 그 趣旨書와 綱領 及 陣容을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大義黨 趣旨書 要旨

戰局은 바야흐로 皇國이 興廢를 결정할 위기에 직면하였으니 이 위기를 神機로 돌리는 데는 국민의 결사적인 決意와 奮鬪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들 半島 2천 6백만 동포는 皇國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 몸과 가정에 사로잡힘이 없이 小義를 던지고 오직 忠君愛國이라는 大義에 살아야 할 것이다.(以下 略)

大義黨 綱領

1. 吾等은 먼저 恐懼修省 自己로 하여금 大義의 德器가 될 것을 期함.

1. 吾等은 널리 同志를 구하여 大義에 순할 굳은 團結을 지을 것을 期함.

11. 吾等은 皇道의 本義에 기하여 국민사상을 통일하여 戰力增强과 國土防衛의 任務에 취할 것을 期함.

1. 吾等은 指導者가 아니다. 국가에 대하여는 병졸이며 동포에 대하여는 一 忠僕이 될 것을 期 함.

1. 吾等은 모든 非決戰的 事象에 대하여는 斷然 이를 분쇄하여 必勝態勢의 완벽을 期함.

大義黨 陣容

<黨首> 朴春琴

<委委員> 李聖根 李光洙 金東煥 孫永穆 朴興植 李在甲 朱○成 朱○翰 高元勳 李源甫 金信錫 金東進 金敏植 鄭然基 李升雨 金思演 辛泰嶽 曺秉相 等(以下 未調査)

5. 朝鮮民族魂은 不死身 亞細亞民族憤激大會場 爆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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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소화 20년) 7월 24일 오후 6시부터 서울 府民館 大講堂에서 大義黨 주최인 亞細亞民族 憤激大會가 개최되었다. 7월 24일이라면 날씨로 보아 한참 무더워 가만히 앉았어도 진땀이 줄줄 흐르고 홋 것을 입고도 더워서 괴로운 때이지만 서울 府民館에는 남녀노소 할것 없이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문이 메일 만치 超滿員이었다. 이 군중들은 오늘도 점심을 굶고 저녁에 죽 한 그릇 먹었을 뿐이다. 또 그만한 고통이라면 참아볼 餘地나 있겠지마는 거의 다 召集令狀 徵用의 通知를 받은 자나 모두 닥쳐올 운명에 가슴을 조리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日帝의 무자비한 억압 하에서 살래야 살 수 없고 견딜래야 견디기 어렵고 아이들은 배고파 울며 밥달라 조르고 召集令狀은 내리고 노인만 제외하고는 성한 사람이나 병신이나 할 것 없이 徵用으로 다 끌려가니 마음을 놓고 살지 못하던 때라 항상 怨讐 日本이 망하기만 渴望하던 朝鮮 人民大衆은 日本이 어느 정도로 싸우고 있으며 언제쯤 日本이 망할 것인가를 日帝의 충실한 走狗輩들이 연설을 통하여 점쳐 보려고 물밀 듯이 모여든 것이다. 이를 朴春琴 一黨은 어디까지나 大義黨의 趣旨에 찬성하며 日本을 위하여 決死奉公함에 더위를 무릅쓰고 몰려든 것으로 인정하고 지극히 만족감을 느꼈으리라.

大會는 먼저 소위 國民儀禮에 이어 李聖根의 開會辭가 있었고 다음에 倭人 渡邊豊日子를 議長으로 추천한 후 大日本 陸海軍 將兵에 대한 感謝 電文을 一線에 電送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그電文의 내용은 如左하다.

““” “亞細亞民族憤激大會를 개최함에 당하여 大日本 帝國 陸海軍 將兵 各位의 御奮戰에 대하여 深甚한 謝意를 表하고 아울러 亞細亞 民族解放이 一日이라도 속히 오기만 기원하는 바이다.”

다음에 各 演士의 연설이 있었는데 즉 亞細亞 民族 大同團結의 必要性 丁元幹(中), 王道文化의 偉大性과 國父의 豫言鄭維芬(中), 新興 滿洲帝國과 王道政治 董春田(滿洲), 亞細亞 民族의 自由와 責任 高山虎雄(日本), 亞細亞 民族의 解放 朴春琴(日本) 등이다. 그리하여 各 演士들이 大氣焰을 올리며 강연회가 최고조에 달할 즈음 오후 9시 10분 안팎으로 사람이 꽉 찬 府民館에 돌연 會場을 振動하는 폭음이 들리며 폭탄 두 개가 연속 폭발되어 會場은 별안간에 一大 修羅場으로 변하고 大義黨 黨員 한 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왜놈과 朴春琴 一黨의 肝膽을 서늘케 하였으며 不死身 朝鮮民族의 義氣를 만천하에 宣揚하였다. 이에 당황한 日帝는 憲兵 警察官을 총 동원시켜 범인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大義黨 黨首 朴春琴은 私財로 5만원을 내놓아 범인 체포에 晝夜를 가리지 않고 비상한 노력을 하였으나 사건은 五里霧中으로 들어간 채 죄없는 靑壯年 4백여 명이 피의자로 검거되어 잔인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진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얼마 없어 곧 역사의 날 8. 15를 맞이하게 되어 朝鮮은 해방되었던 것이며 朴春琴 一黨의 흉악무비한 대학살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朝鮮 人民大衆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府民館에 폭탄을 던진 鬪士들은 과연 누구인가? 문제의 鬪士들은 趙文紀 康潤國 柳萬秀의 三 청년으로 일찍이 東京으로 가 있는 동안 産業戰士라는 美名下에 온갖 侮辱과 갖은 虐待를 받아 日帝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東京에서 大韓革命靑年團이라는 秘密結社를 組織하여 罷業과 怠業 等으로 日帝의 무자비한 폭압과 血鬪하다가 祖國에 돌아와서는 親日走狗들의 날뛰는 양을 보다 못해 親日 走狗輩들의 암살계획을 세우고 우선 그들의 무리가 主催하는 강연회부터 때려부술 목적으로 京義線 水色에 있는 軍需工場에서 ‘다이나마이트’를 구해다가 폭탄을 만들어 처음에는 舞台에 裝置하여 舞台에 있는 親日 走狗輩들을 爆殺하려 하였으나 그러면 前面에 앉아 있는 선량한 人民에게까지 불똥이 튀어 애매하게 죽을까 염려하여 생각 끝에 便所와 舞台로 들어가는 입구에다 장치하여 이 會合을 두둘겨 부셨던 것이다.

이는 日帝의 야만적 폭압에 대한 朝鮮 人民大衆의 英雄的 抗爭의 一片貌이며 이 사건을 통하여 朝鮮 民族魂이 아직도 健全하다는 것이 全世界에 널리 알려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