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의 명작이라고 떠드는 작품들도 그것이 처음으로 발표될 당시에는 여 지없는 실패를 당하게 되어, 작곡가들로 하여금 낙담 실망케 하는 일이 비 일비재입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최대 걸작이라고 하는〈悲愴[비창] 심포니〉 가 그러했고, 비제의 명가극〈카르멘〉이 그러했으며, 바그너의 만고의 명 작 〈탄호이저〉가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初演[초연] 당시에 아 주 평판이 좋지 못했던 작품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꼭 같은 불행을 당하고서도, 거기에 재미스런 일화를 남긴 작품이 하나 있으니, 이것은 곧 풋치니의 명가극〈胡蝶夫人[호접부인]〉(나비부인 ― Madame Butterfly) 입니다.

풋치니는 이 가극을 발표하던 당시에 이름이 날로 높아가던 때임에도 불구 하고, 또 이 가극이 결코 범작이나 졸작이 아니었음에도 不拘[불구]하고, 예상 밖의 악평을 받았다는 것은 까닭을 모를 일입니다. 하여간 1904년 2월 27일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스칼라座[좌]에서 이 가극이 처음으로 상연되던 날 밤에, 관객들은 모두 비웃고 욕해서, 그날 밤 이후에는 다시는 이것을 상연할 생각도 못하게 만들었읍니다.

그러나 그 때 제노아에 풋치니 숭배자가 한 사람이 있어서, 이 사실에 대 하여 몹시 분개한 끝에, 마침 市廳[시청]에 가서 자기의 新生女[신생녀]를 출생신고할 때에, 이름을 버터플라이라고 하려고 했읍니다. 시청의 친절한 서기 양반은 이 사유를 듣고서, 실패를 기념하기 위하여, 짓는 이름은 불길 하니 다른 것으로 고쳐 짓는 것이 어떠하냐고 권고했읍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버터플라이로 신고를 하고야 말았읍니다.

이 소문이 풋치니의 기에 들어가자, 그는 이러한 단순한 사실에도 몹시 감 동되어 그 버터플라이란 乳兒[유아]를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 만나 보려고 했읍니다. 약속한 날이 되자 버터플라이나 그의 부모는 물론이요 그의 가족 과 친지들까지 모두 모여들어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풋치니는 후일에 그만큼 많은 객을 한꺼번에 접해 보기는 일생에 처음이라고 말했다 한즉, 이것을 보더라도 버터플라이와 풋치니의 면회식이 얼마나 큰 성황이 었을까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한번 실패한 가극 〈버터플라이〉는 다시는 상연되지 못하리라고만 믿었더 니, 그 후에 작자는 거기다 다소의 개정을 가하여 두 번째 상연했을 때는 비상한 환영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세상에 유명하게 된 것입니다. 가극 〈버터플라이〉도 유명해졌지마는, 갓난 아기이던 버터플라이도 아마 지금 쯤은 훌륭한 귀부인이 되어, 제2세의 귀여운 버터플라이를 탄생시킨 지도 벌써 오래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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