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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육상 연맹 이사 등을 지냈다.

남 이南怡(1441~1468)조선의 장군. 본관은 의령으로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출전하여 용맹을 떨쳤고 건주위를 정벌할 때에도 선봉으로 적진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26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가 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이 들어설 징조'라고 했다. 이것을 엿들은 유자광이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리라. 남자 20세에 나라를 평안히 못하면 후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라고 읊은 시가 유명하다.

남이흥南以興(1540~1627)조선의 장군. 자는 자호, 호는 성은, 본관은 의령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부총관·안주 목사 등을 지냈다. 인조가 즉위하자, 광해군 때에 권세를 휘두르던 자들을 모조리 귀양보냈지만 그만은 제외되었다. 1624년, 이 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연안 부사·평안 병사에 임명되었다. 1627년, 청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안주에서 막다가 패하여 자결하였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남 재南在(1351~1419)조선의 개국 공신. 자는 경지, 호는 귀정, 본관은 의령이다. 이 색의 제자로 진사에 급제하여 좌부대언까지 지냈다. 동생 남 은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에 힘썼다. 1392년 포상을 피하여 지방에 있었는데, 태조가 찾아내어 '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개국 1등 공신으로 중추원 학사에 대사헌을 겸하게 하여 의성군에 봉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 준과 함께 세자를 가르쳤다.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며 경제에 밝고 산술을 잘하여 당시 '남산'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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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삼

남종삼南鐘三(1817~1866)조선 말기의 천주교 순교자. 자는 증오, 세례명은 요한, 본관은 의령이다. 헌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의 벼슬을 지냈으며 왕족의 자녀들을 가르쳤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를 숨겨주었다. 철종 말에 러시아가 침입할 기세를 알고 영국·프랑스와 교섭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꺾고 천주교를 공인받으려 하였으나, 중국에서 유럽인 선교사의 학살 오보가 전해지자 대원군은 갑자기 천주교 탄압을 강행하였다. 그는 이때 외국인 선교사를 숨겨준 것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국내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체포되어 죽었고 이것이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남치근南致勤(?~1570)조선의 무신. 자는 근지, 본관은 의령이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병마절도사·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명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한 제주 목사 김충렬의 후임 목사가 되어 이를 격퇴하였다. 1560년, 한성부 판윤에 승진하였으며 이 해 경기·황해·평안 3도 토포사가 되었다. 1562년 황해도의 의적 임꺽정을 잡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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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온의 필적

남효온南孝溫(1454~1492)조선 생육신의 한 사람. 자는 백공, 호는 행우·추강, 본관은 의령이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낸 일이 늘 마음에 걸려 있던 그는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가 나타나서 아들을 죽인 것을 책하자, 세조가 물가로 옮기게 한 소릉(현덕 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임사홍·정창손의 저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등지고 유랑 생활로 인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 1504년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였다는 것과 소릉의 복위를 상소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되었다. 그가 저술한 『육신전』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간행되었다. 중종 때, 소릉이 복위되면서 원을 풀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추강집』 『사우명행록』 등이 있다.

내물왕奈勿王(?~402)신라의 제17대 왕(재위 356~402). 364년, 왜병이 침입하자 토함산 기슭에 허수아비를 세워 두고 복병 작전으로 이를 물리쳤다. 373년, 백제의 독산성주가 남녀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항복해 오므로 이를 받아들여 6부에서 살게 했다. 381년, 전진의 왕 부견에게 위두를 보내어 교류를 맺고 중국 문물 수입에 힘썼다. 이때부터 고구려를 거쳐 중국 문화가 들어왔고, 한자도 이때부터 사용된 듯하다. 392년, 광개토 대왕의 위력에 눌려 사신과 함께 실성을 볼모로 보냈으며, 이듬해 일본과 말갈의 침입을 받아 서울을 포위당했으나 물리쳤다. 397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세금을 1년 동안 면제해 주었다.

노국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1365)고려 공민왕의 왕후. 일명 보탑실리 공주라고 하며 원 위왕의 딸이다. 1349년, 원에서 공민왕과 결혼하고 공민왕이 즉위하자 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1364년, 아기를 낳다가 병을 얻어 이듬해 죽었다. 왕은 실성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고, 불교 의식으로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화려한 영전도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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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백린

노무현盧武鉉(1946~ )판사·변호사·정치가·제16대 대통령.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였으며, 1966년 부산상고를 졸업하였다. 1975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법 판사를 지냈다. 1981년 시국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인권 변호사로 변신,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88년부터 정치에 참여하여, 제13대·제15대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2002년 최초의 국민 경선제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