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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의 대종교 신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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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향

나도향羅稻香(1902~1926)소설가. 본명은 경손, 호는 도향, 필명은 빈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한 뒤 일본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하였다. 1922년 『백조』의 창간호에 소설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여 문단에 등장하였다. 이상화·현진건·박종화 등과 함께 백조파라는 낭만파를 이루었다. 이듬해 동아일보에 장편 「환희」를 연재하여 19세의 소년 작가로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이 때부터 작품 경향을 바꾸어 자연주의적 수법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1925년 『여명』 창간호에 「벙어리 삼룡」을 발표하였는데, 우리나라 근대 문학사상 가장 우수한 단편 중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날카로운 필치로 많은 작품을 써서 천재 작가로 알려졌으나 25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작품에 「뽕」 「물레방아」 「별을 안거든 울지나 말걸」 등이 있다.

나석주羅錫疇(1892~1926)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에서 출생하였으며, 1915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에서 4년 간 군사훈련을 받은 후에 귀국하여 항일 공작원으로 일하였다. 3·1 운동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해 보냈으며, 황해도 평산군 상월면 주재소의 일본인 경찰과 면장을 죽이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경무국 경비원으로 있다가 허난성 한단군관학교를 졸업했다. 한때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고 김 구의 의열단에 들어갔다. 1926년, 대표적인 착취 기관인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파괴할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자, 곧이어 동양척식회사로 가서 사원들을 사살한 후, 을지로에서 경찰과 접전하여 마지막 한 발로 자결,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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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이 글을 지은 나옹화상의 비문

나옹懶翁(1320~1376)고려 공민왕 때의 승려. 속성은 아, 호는 나옹이다. 20세 때 승려가 되어 전국의 명산 대찰을 찾아 돌아다녔다. 1347년, 원의 연경으로 건너가 이름 높은 승려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고 인도의 지공 선사의 법을 이어받았다. 공민왕 때 왕명으로 내전에서 설법하고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가사와 법복을 하사받았으며 왕사에 봉해졌다. 지공·무학과 함께 3대 화상의 한 사람이다. 1376년, 우왕 때 왕명을 받고 밀양의 영원사로 가다가 여주의 신륵사에서 죽었다. 이 색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에 남아 있다.

나운규羅雲奎(1904~1937)영화 제작가·배우. 우리 나라 영화계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호는 춘사이며 함북 회령에서 출생하였다. 1926년 일본인 관리하의 '조선 키네마사'에 연구생으로 입사하여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하였다. 1926년 「아리랑」을 제작함으로써 우리 나라 영화계의 선구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나운규 자신이 각본을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겸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 이후 영화계의 중심이 되어 많은 작품을 내고 한국 영화의 새로운 개혁을 시도하여 공헌하였다. 작품으로 「금붕어」 「들쥐」 「벙어리 삼룡」 「오몽녀」 등이 있다.

나운영羅運榮(1922~1993)작곡가.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 고등음악학교 본과를 마치고, 동교 연구과를 수료하였다. 모로이 사부로에게 작곡학을 배웠다. 중앙대·서울대·숙명여대·연세대·전남대·목원대 등의 교수를 지냈다. 한국 현대음악회장·한국 현대음학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그동안 수차례의 신곡 발표회 및 작품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96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는 『화성학』 『대위법』 『작곡법』 등이 있다.

나 철羅喆(1864~1916)대종교의 교조. 호는 홍암, 아명은 인영이며 전라남도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이에 분개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대신들을 암살하려다가 붙잡혀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특사로 풀려났다. 1909년 1월 15일 중광절에 서울에서 대종교의 교리를 포교하였다. 1916년 구월산에 있는 삼성사에 들어가 일본의 폭정을 통분해한 끝에 동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