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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964년 대한체육회 시설분과위원 등을 역임하고, 1970년 일본 오사카 엑스포 70 만국박람회 한국관의 설계를 담당하기도 했다. 대표 작품으로는 「자유센터」 「왕양빌딩」 「우석대학 부속병원」 「엑스포 70」 「만국박람회 한국관」 등이 있다.

김수로왕金首露王(?~199)가야국의 시조(재위 42~199). 김해 김씨의 시조. 42년, 가야국의 북쪽 귀지봉에서 6개의 금알이 든 상자가 있었는데, 그 6개의 금알이 사람이 되어 6가야국의 왕이 되었다. 수로는 이중에서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수장 구도간들이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워 대가락이라 하였으며, 후에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비로 맞았다. 업적도 많았고, 158세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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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김수영金洙暎(1921~1968)시인. 서울에서 태어나 연희대 영문과를 수학하였다. 작품은 모더니즘에서 차츰 생활적 경향으로 바뀌었다.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1957년 한국 시인협회 작품상을 수상하였다. 수유리에 시비가 세워졌다. 「달나라의 장난」 「풀」 등 많은 시가 있다.

김수장金壽長(1690~?)조선의 문인. 자는 자평, 호는 노가재이며 벼슬은 기성서리를 지냈다. 김천택과 함께 영조 때 국문학의 일인자로 이름을 떨쳤다. 만년에는 서울 화개동의 자기 집을 노가재라 부르고, 제자들을 모아 가곡의 창법과 악기 연주법 등을 가르쳤다고 하며, 시조의 창작과 가창으로도 유명하였다. 그의 시조 117수가 들어 있는 『해동가요』를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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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항

김수항金壽恒(1629~1689)조선의 문신. 자는 구지, 호는 문곡, 본관은 안동이다. 18세 때 사마시에 장원하였으며, 23세에 알성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 중시에도 급제하여 통정·자헌 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그는 서인으로서 1660년에 자의 대비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기년설(만1년)을 주장하여 남인파를 눌러 윤선도 등을 귀양가게 하였다. 그 후 이조판서·좌의정을 지내고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80년 남인들이 정권을 잃게 되자, 영의정이 되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당쟁이 잠잠해지고 조정의 기강이 유지되었으나,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유배되어 처형되었다. 저서에 『문곡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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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김수환金壽煥(1922~ )종교인. 경북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도쿄 쇼치 대학 철학과를 중퇴하고 카톨릭 신학부를 졸업한 뒤 천주교 신부가 되어 경북 안동교회 주임신부가 되었다. 카톨릭 시보사 사장·천주교 마산 교구장·천주교 주교 등을 거쳐, 1968년 천주교 서울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가 대주교가 승품되었다. 이듬해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김순남金順男(1917~1983?)작곡가. 서울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음악 작곡가로 알려져 있으나, 월북 작곡가여서 작품 연주가 금지되었다가 1988년에 해금되었다. 경성사범학교 음악부 연습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고등음악학교 작곡부에서 작곡을 공부했다. 도쿄고등음악학교 기악부에서 공부하며 일본현대작곡가연맹이 주최한 음악회에서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했다. 1946년 당시 북한의 국가로 쓰였던 「인민항쟁가」를 작곡했고, 1948년 좌익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했다. 평양국립음악학교 작곡학부장, 조선 음악동맹 부위원장 따위를 지냈고, 모스크바 음악원에 유학하기도 했다. 1953년부터 반동 음악가로 지목돼 모든 활동을 금지당했으나, 1964년에 복권되었다. 김순남은 음악에 민족성을 담았고, 사실주의 내용에 맞는 표현 기법을 사용했으며, 전통 장단과 음계를 사용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에는 가곡집 『산유화』(1947)와 『자장가』(1948)가 있으며, 피아노 소나타와 실내악곡이 많다. 그 밖에 관현악곡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 교향곡 「태양 없는 땅」과 같이 정치색이 짙은 작품도 있다.

김승옥金承鈺(1941~ )소설가. 일본 오사카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생명연습(生命演習)」이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등장하여, 1965년 단편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받았으며, 1977년 「서울의 달빛 0장」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밖의 작품으로 「무진기행」 「내가 훔친 여름」 「다산성」 「60년대식」 등이 있으며, 단편집에 『서울, 1964년 겨울』 등이 있다.

김시민金時敏(1544~1592)조선의 무신. 자는 면오, 본관은 안동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 판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 목사가 되어 사천·고성·진해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영남우도 병마절도사로 특진되었으며, 금산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 해 겨울, 바다로부터 적의 대군이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자 14일간의 격전 끝에 왜적을 물리치고 성을 순시하다가, 시체 속에 숨어 있던 한 왜병의 총탄에 맞아 중상을 입어 죽었다. 그 후 진주에 충민사라는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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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의 초상화

김시습金時習(1435~1493)조선의 생육신 중 한 사람.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본관은 강릉이다. 5세 때 이미 『대학』 『중용』을 익혀 신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 주었다. 1445년 21세 때 수양 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리를 듣고 세상을 비관하여 책을 불사르고 승려가 되었다. 양주의 수락·수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