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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대한 애국부인회 회장이 되었으나 비밀 조직이 탄로되어 3년형을 받고 복역중 병보석으로 나와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파크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원산의 마르다 윌슨 신학원 교사로 재직중, 1945년 병으로 사망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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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의 초상화

김만중金萬重(1637~1692)조선의 작가·문신. 자는 중숙, 호는 서포, 본관은 광산이다. 김익겸의 유복자로 어머니 윤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현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판서를 역임하였다. 1689년 남인의 재등장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문학사상 획기적인 작품인 「구운몽」을 저술하였다. 이것은 한문체의 가사에 불만을 품고, 순 우리글로 쓴 것으로서 국문학사상 높이 평가되는 작품으로 인간의 부귀영화는 모두 일장춘몽이라는 것이 그 주제이다. 게일은 이를 영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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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의 「구운몽」

김말봉金末峰(1901~1961)여류 작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정신여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도지샤 여자 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중외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28년 결혼을 한 후 1933년 중앙일보에 처녀작인 단편소설 「망명녀」를 발표했고, 1935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밀림」을, 1936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찔레꽃」을 발표함으로써 대중소설 작가의 지위를 얻었다. 해방 후에는 사회 개선 운동에 앞장서서 박애원을 경영하는 한편, 많은 장편소설을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했다. 한국 예술원 위원, 한국 문학가협회 대표위원을 역임했고, 작품으로는 「화려한 지옥」 「푸른 날개」 「생명」 「화관의 계절」 등이 있다.

김명원金命元(1534~1602)조선의 정치가. 자는 응순, 호는 주은, 본관은 경주이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1589년, 선조를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하려 했던 '정여립의 반란'을 수습하였다.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로서 서울을 지키다가 패퇴하였으며, 평양마저 함락되자 순안에 주둔하면서 왕의 행궁을 잘 지켰다. 정유재란 때에는 유도대장으로 공을 세운 후 우의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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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김명환金命煥(1913~1989)명고수. 전남 곡성 출생. 아호는 일산(一山)이며, 20세기 후반에 우리나라에서 판소리의 북장단을 가장 오래 공부한 고수에 속한다. 전라남도 옥과에서 명창 장판개에게 판소리와 북을 사사했고, 20세 때부터 박판서·김정문·김봉학에게 전문적으로 북을 배웠다. 김명환은 고법뿐만 아니라 판소리 이론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는데, 임방울·이동백·송만갑·정응민과 같은 당대 최고의 판소리 명창들에게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197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 고법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김명환은 "고생을 하는 일이 있어야 예술이 나오지 생활이 풍부한 사람한테서는 안 나온다"라는 고통을 통한 참예술론을 폈으며, 평생을 이 예술론으로 일관했다.

김 반金泮조선 초의 학자. 자는 사원, 호는 송정, 본관은 강릉이다. 정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40년간 재직하면서 많은 명사들을 배출하였다. 김 구·김 말과 함께 '경학 3김'이라 불리었다. 만년에는 강서에서 빈곤하게 지내다가 죽었다.

김방경金方慶(1212~1300)고려의 명장. 자는 본연, 본관은 안동이며 신라 경순왕의 후예이다.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몽고군이 침입하자 위도에서 이를 막았다. 1270년 배중손 등이 삼별초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자, 추토사의 명을 받고 그 무리를 쳤다. 이듬해에는 몽고군과 합세하여 탐라에서 계속 항거중인 삼별초의 남은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고 시중에 올랐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한 후, 원이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으로 출정하여 쓰시마 섬을 친 다음, 일본 본토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1278년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모함으로 귀양갔다가 풀려나왔다. 1281년 원이 다시 일본을 정벌하려 할 때 출정하였으나, 태풍을 만나 큰 손해를 입고 돌아왔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증되었다.

김백봉金白峰(1927~ )여류 무용가. 평남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의 고등 여학교에서 배운 후, 4년 동안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을 배웠다. 1953년 서울에 김백봉 무용 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54년 한국예술무용연구소를 세웠다. 1958년 동남아 친선 예술사절단으로 순회 공연을 했고, 서울예술고등학교 강사·한국 무용가협회 이사·국제 극예술협회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1964년 경희대 부교수, 1966년 경희대 무용과 과장을 지냈으며, 서울시 문화상과 캄보디아 문화 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창작 작품으로는 무용극 「우리 마을의 이야기」, 그랜드 발레 「비련」, 창작 무용 「지효」 등이 있다.

김범문金梵文(?~825)신라의 반역자. 헌덕왕 때에 반란을 일으켰던 김창헌의 아들이다. 825년, 고달산의 산적 수신 등 백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켜 북한산주를 치다가 패하여 죽었다.

김범우金範禹(?~1787)조선 정조 때의 천주교 순교자. 1785년, 이 벽·이승훈·정약전·정약용·정약종 등이 김범우의 집에 모여 설교하다가 발각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양반들이어서 성명을 밝히지 않아 징계로 풀려났으나, 주인인 김범우만 잡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