었다. 1958년 문교부 영화 음악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 경희대학교 음대 강사, 1965년에 숙명여대 음대 강사, 같은 해 서라벌예술대학 음악과장에 취임하였다. 1968년 음악협회 부이사장을 겸하였다. 작품으로는 가극 「콩쥐 팥쥐」, 교향시곡 「광복 10년」 교향곡 「성웅 이순신」 등이 있다.
김대성이 중건을 건의한 경주 불국사(왼쪽)와 석굴암
김덕령金德齡(1567∼1596)조선의 의병장. 자는 경수, 본관은 광주이다. 성 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의 광해 분조로부터 호익 장군의 호를 받았으며, 1594년에 의병을 정돈하여 권 율의 휘하에 들어가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곽재우와 함께 여러 차례 왜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 고성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전란 중에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을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의 무고로 옥사하였다. 죽은 후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벽진 서원에 모셔졌다.
김 돈金墩(1385∼1440)조선 초의 천문학자. 본관은 안동이며 고려 김방경의 후손이다.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을 지냈다. 세종의 명으로 김 조와 함께 천체의 현상을 관측하는 간의대, 물시계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보루각을 만들었다. 1434년, 동활자인 갑인자 주조에도 참여하였다.
김동길金東吉(1928~ )수필가·철학가. 평남 맹산 출생. 연세대학 영문과를 거쳐 미국 에반스빌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미국 인디애나 대학 대학원과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미국사를 전공한 후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5년 이후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1980년 동 부총장이 되었다. 1992년 국민당 최고위원이 되고 제14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수상집으로 『길은 우리 앞에 있다』 『대통령의 웃음』 『링컨의 일생』 『하늘을 우러러』 『역사의 언덕』 『어떤 사람이기에』 『김동길전집』 등이 있다.
김동리金東里(1913∼1995)소설가. 본명은 시종이며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였다.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2년 간 공부하고 경신고교로 전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서라벌예술대학 교수·예술원 회원·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초기에는 우리 나라의 토속적 세계나 동양적 신비와 몽환의 세계를 통하여 작품을 전개시켰다. 「무녀도」는 무당과 크리스트교의 대립을, 「황토기」는 억쇠와 득보란 두 장사의 혈투를 그린 작품으로 둘 다 끝장이 나지 않는,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운명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그러나 후기에 와서는 인간적 고뇌를 종교의 세계에까지 승화시킨 「등신불」을 비롯하여, 그리스도와 사반의 대립적인 인간상을 통하여 천상적인 구원과 지상적인 구원의 세계를 그린 장편 「사반의 십자가」 등, 대체로 인간의 구원을 주제로 삼았다. 그는 착실하고 정확한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다. 1955년 자유문학상을, 1958년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저서로 『귀환장정』 『문학과 인간』 『자연과 인생』 『김동리 선집』 등이 있다.
김동명金東鳴(1900∼1968)시인·정치 평론가. 호는 초허이며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하였다. 도쿄 아오야마 학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당신이 만약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이라는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편을 가지고 문단에 등장하였다. 일제 때에는 전원에 묻혀 시를 썼는데, 47편을 묶어 『파초』를 간행하였다. 1947년부터는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과거의 시풍과 서정성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