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 영정
강세황姜世晃(1713-1791)조선의 서화가. 자는 광지, 호는 표암, 본관은 진주이다. 기로소에서 뽑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정조 때에 천추 부사로 베이징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로 서화에 뛰어났다. 글씨는 전서·예서를 비롯한 각 체에 모두 능했고 그림은 특히 산수·사군자 등에 뛰어났다. 그의 화풍은 정 선을 계승한 것으로 담담하면서 격이 있고 개성이 뚜렷하였다. 그는 당시 화단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후원자 또는 추진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서로 『표암집』이 있으며 그림으로 「난죽도」 「산수도」 등이 있다.
강세황의 「산수」
강소천姜小泉(1915~1963)아동문학가. 본명은 용률이며 함경남도 고원에서 출생하였다. 함흥 영생고보를 졸업하였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돌멩이」 「마늘 먹기」 등의 동화와 소년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아동문학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아름답고 무한한 동심의 세계와 착하고 고운 소년 소녀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1963년 문예상을 수상한 후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1965년에 '소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대표작으로 「꿈을 찍는 사진관」 「꽃신」 등이 있다.
강 수强首(?~692)신라의 유학자·문장가. 어려서부터 유학에 뜻을 두어 「효경」 「곡례」 등을 공부하였으며 벼슬길에 오른 후 유명해졌다. 태종 무열왕 때에 당나라에서 온 난해한 국서를 쉽게 해석하고 그 답서를 유창하게 지어 왕의 신임을 얻었다. 재물에 뜻이 없어 집안이 가난하였는데,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져 쌀 1백 석을 하사받았다. 문무왕 때에는 외교문서를 능숙하게 다루어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사찬 벼슬에 올랐다. 신문왕 때에는 처음으로 국학을 세워 여러 박사를 두었으며, 설총과 함께 9경으로써 제자들을 가르쳤다.
강신재
강신재姜信哉(1924~2001)여류 소설가. 서울 출생으로 이화여전을 중퇴했다. 1949년 「문예」 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 그 뒤에 꾸준한 창작 활동으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은 인물을 희화적으로 다루는 특징이 있다. 1959년 한국 문인협회상을 수상했고, 1967년 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장편 「임진강의 민들레」 「파도」 「오늘과 내일」, 단편집 『젊은 느티나무』 『여정』, 수필집 『모래성』 등이 있다.
강우규姜宇奎(1855~1920)독립운동가. 자는 찬구, 호는 일우, 본관은 진주이다. 평남 덕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함경남도 홍원으로 가서 한학에 전념하여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다. 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만주 북간도로 가서 지린성 동화현에 광동학교를 설립하여 동포 교육에 전력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 총독 암살을 결의하고 폭탄을 구입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내외 정세와 총독의 동정을 살피던 중, 하세가와 후임으로 사이토가 임명되어 부임한다는 것을 알고 사이토의 내한 당일 서울역에서 폭탄을 던졌으나, 사상자 37명을 내었을 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수여되었다.
강원상康元相조선 말기의 의사(義士). 1907년, 나인영·오기호 등과 을사 5적의 암살을 계획하던 중, 권중현을 피살하려다가 체포되어 공모자를 밝히라는 혹독한 심문에도 답하지 않고 스스로 혀를 끊었다. 후에 나인영·전덕준 등과 함께 지도로 유배되었다.
강 위가 간행한 『한성순보』
강 위姜瑋(1820~1884)조선의 한학자. 자는 중무, 호는 추금·고환자, 본관은 진주이다. 어려서 민행로에게 배우고, 제주도에 가 있는 김정희를 방문하여 많은 감화를 받았다. 강화도 조약에 참석하였으며, 이후 일본과 청에 왕래하면서, 해외의 실태를 파악하여 국운 회복에 힘썼다. 『황성신문』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며 국문 연구에도 전력하였다.
강재구姜在求(1937~1965)군인. 인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대위로 진급하였다. 1965년, 월남 파병이 결정되자 자원하여 맹호 부대 중대장이 되었다. 출발 전, 홍천 부근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을 실시하는 도중, 부하 사병이 실수하여 수류탄이 중대원 한가운데로 떨어지자, 몸으로 수류탄을 덮쳐 수많은 부하들을 구하고 사망하였다. 육군장으로 장례되었고 소령으로 특진되었다.
강 조康兆(?~1010)고려 초기의 무신. 목종 때 중추원사가 된 후에 서북면 도순검사로 부임하였다. 1009년 김치양이 천추 태후와 통하여 낳은 아들인 목종을 왕위에 앉히고는 정치를 제멋대로 하자, 군사를 이끌고 개성으로 쳐들어가 김치양과 목종을 살해하고 현종을 왕위에 앉혔다. 1010년, 거란의 성종은 '강 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에 쳐들어왔다. 강 조는 거란군에 대항하여 처음에는 이겼으나, 나중에는 사로잡히고 말았다. 거란의 성종은 신하가 되어주기를 권했으나, 거부하자 고문까지 하였다. 끝내 무릎을 꿇지 않자 그를 죽여버렸다.
강필리姜必履(1713~?)조선의 문신. 자는 석여, 본관은 진주이며 전라도 강진에서 출생하였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대사헌을 지냈으며 그 후 동래 부사가 되었다. 당시 통신사인 조 엄이 쓰시마에서 감저(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와 제주 지방에 심게 할 때, 그는 감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