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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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prose><center><big>조선상고사</big>
=제 1 편 총론=
朝鮮上古史
 
==제1장. 역사의 정의(正義)와 조선사의 범위==
 
[[글쓴이:신채호|신채호]]</center>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이렇게 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깊이 팔 것 없이 얕이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英).로(露:러시아).법(法:프랑스).미(美) 등을 비아라고 하지마는 영.로.법.미 등은 저마다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하며,무산(無産)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하지마는,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제 붙이를 아라 하고.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__NOTOC__
이뿐 아니라, 학문에나 기술에나 직업에나 의견에나, 그 밖의 무엇에든지 반드시 본위(本位)인 아가 있으면 따라서 아와 대치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쉴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조선상고사/제1편|제1편: 총론]]
 
* [[조선상고사/제2편|제2편: 수두시대]]
아나, 아와 상대되는 비아의 아도 역사적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개의 속성이 있어야 한다.첫째, 상속성(相續性)이니, 시간에 있어서 생명의 끊어지지 아니함이요, 둘째, 보편성이니, 공간에 있어서 영향의 파급이다. 그러므로 인류 아닌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하거나 혹은 전연 없어서 상속적. 보편적이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역사의 조작(造作)은 인류에게만 주어졌다.
* [[조선상고사/제3편|제3편: 삼조선분립시대]]
 
* [[조선상고사/제4편|제4편: 열국의 쟁웅시대]]
사회를 떠나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마는 그 아의 범위가 너무도 약소하여 역시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되므로 인류에게 있어서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되는데, 한사건으로 두가지 속성인 상속,보편의 강양을 보아 역사의 재료가 될 만한 분량의 크고 작음을 정하게 된다.
* [[조선상고사/제5편|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 [[조선상고사/제6편|제6편: 고구려의 쇠미와 북부여의 멸망]]
이를테면 김석문(金錫文)은 300년 전에 “지원설(地圓說)”을 창도(唱導)한 조선의 학자이지마는 이를 후루노의 지원설과 똑같은 역사적 가치를 쳐주지 못하는 것은, 저편은 그 학설로 인하여 신대륙을 발견한다 하였지마는 이편은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 [[조선상고사/제7편|제7편: 고구려·백제 두 나라의 충돌]]
 
* [[조선상고사/제8편|제8편: 남방 여러 나라의 대 고구려 공수동맹]]
정여립(鄭汝立)은 400년 전에 군신강상설(軍臣綱常說)을 타파하려한 동양의 위인이지마는 그를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한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라 할수 없음은, 당시에 다소간 정여립의 설에 영향을 입은 검계(鈐 禾+契)나 양반살육계(兩班殺戮 禾+契:다무력폭동단체)등의 번갯불이 한 번 번쩍한는 것 같은 행동이 없지는 않았으나 결국 루소 이후의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는 비길 수 없기 때문이다.
* [[조선상고사/제9편|제9편: 삼국혈전의 시작]]
 
* [[조선상고사/제10편|제10편: 고구려와 수의 전쟁]]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고, 아를 없애어 비아에 공헌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묵은 자취만 끼친다. 이는 고금 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라,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의 통성(通性)인데 번번이 예기와 어긋나서 승리자가 안 안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인가?
* [[조선상고사/제11편|제11편: 고구려와 당의 전쟁]]
 
* [[조선상고사/제12편|제12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기는 것이지마는,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민족 즉 아가 출현한 뒤에 조선민족과 상대되는 묘족(苗族:중국귀주성등지에 있는 미개인족)이며 지나족(支那族)등 비아가 있었을 것이니, 이는 선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지나족 등 비아의 상대자가 없었더라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운다, 삼경(三京)을 만든다, 오군(五軍:전.후.좌.우.중의 다섯군단)을 둔다 하는 등 아의 작용이 생기지 못하였을 것이니, 이는 후천적인 것에 속하는 것이다. 정신의 확립으로 선천적인 것을 호위하며 환경의 순응으로 후천적인 것을 유지하되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부족하면 패망의 구렁에 빠진다.
 
유태의 종교나 돌궐(突厥:몽고 중앙 아시아에 있던 유목민족)의 무력으로도 침륜(沈淪)의 화를 면치 못한 것은 후자(後者)가 부족한 까닭이며,남미(南美)의 공화(共和)와 애급(埃及:이집트) 말세의 학문의 융흥(隆興)으로도 쇠퇴의 환(患)을 구해내지 못한 것은 전자(前者)가 부족한 까닭이다. 이제 조선사를 서술하려 함에 있어 아(우리)의 단의로 잡아,
 
(가) 우리의 생장 발달의 상태를 서술의 첫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1) 최초 문명의 기원이 어디서 되었는가.
2) 역대 강역(彊域)의 신축(伸縮)이 어떠하였었던가.
3) 각 시대 사상의 변천이 어떻게 되어왔는가.
4) 민족적 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하고 어느 떄에 가장 쇠퇴하였는가,
5) 여진(女眞).선비(鮮卑).몽고(夢古).흉노(匈奴)등이 본래 우리의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고 분리된 뒤에 영향이 어떠하였는가.
6) 우리의 현재의 지위와 부흥 문제의 성부(成否)가 어떠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며.
 
(나) 우리의 상대자인 주위 각 민족과의 관계를 서술의 둘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1) 우리에게서 분리된 흉노.선비.몽고와, 우리 문화의 강보(襁褓)에서 자라온 일본이 우리의 큰 적이 되어 있는 사실과,
2) 인도는 간접으로, 지나는 직접으로, 우리가 그 문화를 수입하였는데, 어찌하여 그 수입의 분량을 따라 민족의 활기가 여위어 국토 의 범위가 줄어졌는가.
3) 오늘 이후는 서구의 문화와 북구의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문화 사상의 노예가 되어 소멸하고 말 것인 가, 또한 그를 잘 씹고 소화하여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서술하여 위의(가).(나) 두 가지로 본사(本史)의 기초로 삼고,
(다) 말과 글 등 우리의 사상을 표현하는 연장의 날카롭고 둔함은 어떠하고 그 변화는 어떻게 되었으며,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없는 폐물이 되었지마는 고대에는 확실히 한 민족의 흥망 성쇠의 관건이었는데, 우리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하였으며,
 
(마) 학술.기예 등 우리의 천재를 발휘한 부분이 어떠하였으며,
 
(바) 의.식.주 형편과 농.상.공의 발달과 땅의 분배와 화폐의 제도와 그 밖의 경제조직 등이 어떠하였으며,
 
(사) 인민의 이동과 번식과 또 강토의 신축을 따라 인구의 많아지고 줄어듦이 어떻게 되었으며.
 
(아) 정치제도의 변천이며
 
(자) 북벌(北伐:북쪽나라를 쳐서 故土를 회복)진취의 사상이 시대를 따라 나아가고 물러선 것이며
 
(차) 귀하고 천하고 가난하고 부유한 각 계급의 압제(壓制)와 서로 대항한 사실과 그 성해지고 쇠해진 대세며,
 
(카) 지방자치제가 태고적부터 발생하였는데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이 사라진 원인과 결과며,
 
(타) 외세의 침입에서 받은 거대한 손실과 그 반면에 끼친 다소의 이익과,
 
(파) 흉노.여진 등이 한번 우리와 분리된 뒤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의문이며,
 
(하) 옛날부터 문화상의 창작이 적지 아니하나, 매양 고립적. 단편적이 되고 연계적.계속적이 되지 못한 괴이한 원인 등을 힘써 참고하면서 논술하여 위의(다).(라)이하 여러 문제로 본사(本社)의 요목(要目)을 삼아서, 일반 역사를 읽는 이로 하여금 조선의 면목의 만의 하나라도 알게 하려고 한다.
 
==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짓는 것이요, 역사 이외에 무슨 딴 목적을 위하여 짓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으로 사회의 유동상태를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고 혹은 달리 고칠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의 상을 그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리자면 모습이 괴걸(魁傑)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姜邯贊)을 그리자면 몸집이 왜루(矮陋)한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일 이것과 저것을 억제하고 드날릴 마음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 그리면 화가의 본분에 어긋날 뿐 아니라 본인의 면목도 아닐 것이다. 이와같이 사실 그대로 영국사(英國史)를 지으면 영국사가 되고 노국사(露國史)를 지으면 노국사가 되며, 조선사를 지으면 조선사가 되는 것인데, 기왕에 조선에 조선사라 할 조선사가 있었더냐 하면 수긍하기 어렵다.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箕子朝鮮에서 高麗 까지의 역사)을 짓다가 개연히 내란의 잦음과 외적의 출몰이 동국(東國:우리나라)의 고사(古史)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으나, 나로서 보건대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적의 전쟁에서 보다, 곧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하면 역사란 머리에 쓴 말과 같이 시간적 공간적 발전으로 되어오는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곳[地],사람[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 것인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됨은 박(朴),석(昔),김(金) 세 성과, 동산 고헌촌(突山古墟村) 등 여섯 부(部)의 사람[人]으로써뿐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그곳[地]과 고구려,백제와 한 시대인 때[時]로써 신라가 된 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 2천 년 전인 왕검(王儉)과 같은 연대이거나 더 내려와서 2천 년 뒤인 오늘과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지(聖智)와 육부(六部) 사람들의 질직(質直)과 계림(鷄林:慶州)의 땅을 가졌을지라도 당시의 신라와 똑같은 신라가 될수 없으며 또 신라의 위치가 유럽에 놓였거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그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의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명백한 이치인데 기왕의 조선의 역사가들은 매양 그 짓는 바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 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 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成川) 혹은 영변(寧邊)에 갖다놓으며, 안시성(安市城:만주 遼東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龍岡)혹은 안주(安州)에 갖다놓으며, 아사산(阿斯山:단군이 國部를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을 만들며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의 강릉군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땅의 빙거(憑據)가 없는 역사를 지었다. 더 크지도 말고 더 작지도 말라고 한 압록강 이내의 이상적 강역을 획정(劃定)하려 하며(我邦彊域考), 무극(無?) 일연(一然) 등 불자(佛子)가 지은 역사책(三國遺事)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시대에부터 인도의 범어(梵語)로 만든 지명'인명이 가득하며, 김부식(金富軾) 등 유가(儒家)가 적은 문자(三國史記)에는 공자'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三國) 무사의 입에서 경전(經典)의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워지고, 삼국사(三國事:중국 역사책의 하나) 열전에 있는 여러 백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永郞)'술랑(述郞)'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 등 네 대성(大聖)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지나를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崔致遠)만 세세히 서술하였으며, 여사제강(麗史堤綱)에 원효(元曉)'의상(義湘) 등 여러 철인들의 불학(佛學)에 영향된 고려 일대의 사상의 어떠함은 볼 수 없고, 왕 태조(王太祖)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崔凝)이 통일 이후에 그가 올렸다는 간불소(諫佛疎)만 적혀 있다.
 
이와 같은 허다한 때[時]의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려 하며, 심한 경우에는 사람[人]까지 속여 신라의 금왕(金王)을 인도의 찰제리종(刹帝利種:왕족)이라 하며(三國遺事), 고구려의 추모왕(鄒牟王)을 고신씨(高辛氏:五帝의 한 사람)의 후손이라 하며(三國史記),게다가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觀家臺)의 책들을 공자의 도(道)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버렸다.
 
이두형(李斗馨:조선 正租때 사람)이 말하기를, “근일의 어느 행장(行狀)과 묘지명(墓誌銘)을 보든지, 그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端嚴)하고 덕성은 충후(忠厚)하며, 학문은 정주(程朱:중국의 程子와 朱子 또 그들의 性理學)를 조종으로 삼고 문장은 한유(韓柳:중국의 문장가 韓愈와 柳宗元)를 숭상하여 거의 천편일률(千篇一律)이니,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개인 전기(傳記)의 실상을 잃은 데 대한 개탄일 뿐이지마는,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春秋)의 부월(斧鉞)아래에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의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文弱) 편소(偏小)에 스스로 만족한 이조 당대의 사람들이 그러한 주관으로 상고지리(上古地理)를 그리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東北國:渤海)이나, 고려나 이조-5천 년 이래의 모든 조선이 거의 한도가니로 부어낸 것같이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의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의 고금을 좇아 국민사상이 갈린 금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크롬웰이 화가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 그 왼쪽 눈 위의 혹을 빼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고 나를 그리려면 나의 본 얼굴로 그리라고 하였으니, 이말은 화가의 아첨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상을 잃을까 함이었다.
 
조선사를 지은 기왕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은 매양 조선의 혹을 베어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네들이 쓴 안경이 너무 볼록하므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버리고 어디서 수없는 정말 혹을 가져다가 붙여놓았다. 혹 붙인 조선사도 기왕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고로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기왕에 있는 기록이 그와 같이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의거하여 바른 조선사를 짓겠는가? 사금(沙金)을 아는 사람이 모래 한 말[一斗]을 일면 좁쌀만한 금을 하나 얻거나 혹은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하나니, 우리의 문적(文籍)에서 사료를 구하기가 이같이 어려운지라, 혹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우선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파서 많은 발견이 있어야 하고, 금석학(金石學).고전학(古錢學).지리학.미술학.계보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은데, 그도 그러하거니와 현금에는 우선 급한 대로 있는 사책(史策)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함이 급무인가 한다
 
==제3장 구사(舊史)의 종류와 그 득실의 약평(略評)==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류를 찾는다면 신지(神誌)부터 비롯되겠는데, 신지는 권벽(權擘:선조 때 사람)의 응제시(應製蒔:임금의 명에 의해 지은 시)에서 단군 때 사관(史官)이라고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로소 보건대 단군은 곧 수두[蘇塗] 임금이요, 신지는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수두 임금의 수좌(首佐)인 벼슬 이름 신치[臣智]이니 (蘇塗와 臣智의 자세한 것은 思想史에 보임), 역대의 신치 들이 해마다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과 산천지리의 명승과 후세 사람의 거울 삼을 일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후세의 문사들이 그 노래를 혹은 이두문(吏讀文)으로 편집하고 혹은 한자의 오언시(五言詩)로 번역하여 왕궁에 비장하였으므로 신지비사(神誌秘詞) 또는 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에 와서는 저작자의 성명을 알 수 없는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 등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일연유사뿐인데 그 전하고 전하지 아니하는 원인을 생각하건대 김부식, 일연 두사람만의 저작이 우수하여 전해진 것이 아니라, 대개 고려 초엽부터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고 나아가 북쪽의 옛땅을 회복하자는 화랑의 무사가 한 파를 이루고, 사대(事大)로 국시(國是)를 삼아서 압록강 안에 구차히 편안하게 있을 것을 주장하는 유교도(儒敎道)가 한 파가 되었다.
 
두파가 대치에서 논전을 벌이기 수백 년만에 불교도 묘청(妙淸)이 화랑의 사상에다가 음양가(陰陽家)의 미신을 보태어 평양에서 군사를 일으켜서 북벌을 실행하려다가 유교도 김부식에게 패망하고, 김부식은 이에 그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삼국사기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동.북 두 부여를 떼어버려 조선문화가 유래한 곳을 진토(塵土) 속에 묻고 발해를 버려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초개(草芥)속에 던지고 이두문(吏讀文)과 한역(漢譯)의 구별에 어두워서 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곳이 몇 군데가 된 것이 많으며, 내사(內史)나 외적(外籍)의 취사(取捨)에 홀려서 앞뒤가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이 많아 거의 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불행히 그 뒤 얼마 안 가서 고려가 몽고에 패햐여 흘필렬(忽必烈:쿠빌라이)의 위풍이 전국을 놀라게 하여 황궁(皇宮)이니 제궁(帝宮)이니 하는 명사(名詞)들이 철폐되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이로부터 만일 문헌에 독립자존(獨立自存)에 관한 것이 있으면 일체 꺼려 피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때라 허다한 역사 저서 중에서 유일한 사대사상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에 딸려 있는 삼국유사만이 전해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당대의 사승(史乘)을 말한다면, 고려 말엽에 임금과 신하들이 고종(高宗)이전의 나라 형세가 강성하던 때의 기록은 더욱 몽고의 꺼리고 싫어함에 걸릴까보아 두려워서 깍아버리거나 고치고, 오직 말을 낮추고 후한 예폐(禮幣)로 북쪽 강대국들에게 복종하여 섬기던 사실만을, 혹은 부연하고 혹은 지어내서 민간에 퍼뜨렸다. 이러한 기록들이 곧 이조의 정인지(鄭麟趾)가 찬술한 고려사(高麗史)의 원전이 되었고, 이조 세종(世宗)이 비상하게 사책(史冊)에 유의하였으나, 다만 그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와 아버지인 태종(太宗)이 호두재상(虎頭宰相) 최영(崔塋)의 북벌군 중에서 모반하여 사대(事大)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으므로 권근(權近).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朝鮮史略),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을 편찬하게 함에 있어 몽고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조선의 각종 실기에 의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고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한 글과 위조한 고사에 의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사업을 마치고, 정작 전대(前代:고려)의 실록은 민간에 전해짐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奎章閣) 안에 비장해두었는데 임진왜란의 병화(兵火)에 죄다 타버렸다. 그 뒤에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자리를 빼앗고, 만주 침략의 꿈을 품고서 강계(江界)에 둔병(屯兵)을 경영하다가,
 
1) 자기네 태조의 존명건국(尊明建國)의 주의에 충돌되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간하는 일이 분분하고,
2) 지나 대륙에 용맹하고 억센 명나라 성조(成祖)가 있어 조선에 대한 감시가 엄중하고,
3) 마침내 명나라 사신 장영(張寧)이 엄중히 둔병의 이유를 힐문하므로,
 
세조의 그 무(武)를 숭상하고 공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조선 문헌의 정리를 자임(自任)하여 불경을 간행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외에 사료의 수집에도 전력하여 조선 역대 전쟁사인 동국병감(東國兵鑑)과 조선 풍토사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고(동국병감은 文宗때, 여지승람은 成宗때 편찬), 그밖에도 허다한 서적을 간행하였으니 비록 큰 공헌은 없으나 얼마간 공적은 있었다 할 것이다. 선조(宣祖).인조(仁祖) 이후에는 유교계에 철학.문학의 큰 인물이 배출되고 사학계도 차차 진보되어 허목(許穆)의 단군.신라 등 각세기(世紀)가 너무 간략하기는 하나 왕왕 독특한 견해가 있으며, 유형원(柳馨遠)은 비록 역사에 관한 전문 저서가 없으나, 역대 정치제도를 논술한 반계수록(磻溪隋錄)이 또한 사학계에 보탬이 적지 않았으며,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설(東國地理說)이 비록 수십 줄에 지나지 않는 간단한 논문이지마는 일반 사학계에 큰 광명을 열어서 그 뒤 정약용(丁若鏞)의 강역고(彊域考)며, 한진서(韓鎭書)의 지리(地理)며,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木)에 실린 강역론(彊域論)이며, 그 밖의 조선 역사 지리를 설(設)하는 사람은 모두 한 선행의 그 간단한 지리설을 부연하였을 뿐이다.
 
나로서 보건데, 그 지리설 중에 삼한과 조선을 분리함이 범엽(范曄:後漢書의저자)이 전한 동이열전(東夷列傳)의 지리를 설명함에는 족하나, 이로써 조선 고대 3천 년 동안의 지리를 단정하여, “동국(東國)은 옛날부터 한강 이남을 삼한(三韓)이라 하고 한강 이북을 조선이라 하였다.” 라는 결론을 내렸음은 너무도 맹목적이요, 무단적 (武斷的)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생이 삼신(三神) .삼경(三京) .삼한(三韓). 삼조선(三朝鮮).의 연락적 관계와 발조선(發朝鮮). 발숙신(發肅愼). 부여조선(夫餘朝鮮). 예맥조선(濊貊朝鮮). 진국(震國). 진번조선(眞番朝鮮). 진한(辰韓). 마립간(麻立干). 마한(馬韓). 모한(慕韓) 등이 동음이역(同音異譯)임을 몰랐으므로 이 같은 큰 착오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이열전에 보인 삼한의 위치는 선생이 비로소 간단명료하게 분석해서 밝혀 기왕에 역사의 기록만 있고 역사의 연구는 없었다고 할 만한 조선사학계에서 선생이 처음으로 사학의 실마리를 열었다 해도 좋을 것이다.
 
안정복은 평생을 열사 한 가지에만 노력한, 5백 년 이래 유일한 빈한한 선비로서 서적의 열람이 부족하여 삼국사기 같은 것도 그 늘그막에야 겨우 남이 베낀 틀린 글자가 많은 것을 얻어보았으므로 그가 저술한 동사강목에 궁예(弓裔)의 국호를 마진기(摩震紀)라 한 웃음거리를 남겼으며, 지나의 서적 중에서도 참고에 필요한 위략(魏略)이나 남제서(南濟書)를 같은 것이 있음을 몰라서 고루한 구절이 적지 아니하다.
 
게다가 시대에 유행하는 공구(孔丘:孔子)의 춘추(春秋)며, 주희(朱憙:朱子)의 강목(綱目)의 웅덩이에 빠져 기자본기(箕子本紀) 아래 단군과 부여를 덧붙이로 하였으며, 신라 마지막 판에 궁예와 왕건을 참주(僭主)로 한 망발도 있고 너무 황실 중심의 주의를 고수하여 정작 민족 자체의 활동을 무시함이 많았었다.
 
그러나 연구의 정밀하기로는 선생 이상 가는 이가 없었으므로 지지(地志)의 잘못의 교정과 사실의 모순의 변증(辯證)에 가장 공이 많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유혜풍(柳惠風)의 발해고(渤海考)는 대씨(大氏3백 년 동안 문치(文治)와 무공(武功)의 사업을 수록하여 1천여 년이나 사학가들이 압록강 이북을 베어버린 결함을 보충하였고 이종휘(李鍾?)의 수산집(修山集)은 단군 이래 조선 고유의 독립적 문화를 노래하여 김부식 이후 사학가의 노예 사상을 갈파하였는데, 특별한 발명과 채집(採集)은 없다 하더라도, 다만 이 한 가지만으로도 또한 영원히 남을 일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는 오직 지나. 일본 등의 서적 가운데 보이는 우리역사에 관한 문자를 수집하여 거연히 방대한 저술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삼국사(三國史)에서 빠진 부여. 발해. 가락(駕洛). 숙신(肅愼) 등도 모두 한 편의 세기(世紀)를 구성하였으며,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없는 저근(姐瑾). 사법명(沙法名). 혜자(慧慈). 왕인(王仁) 등도 각각 몇 줄씩의 전기(傳記)가 있고 궁중어(宮中語). 문자. 풍속. 등의 부문이 있다.
 
게다가 그의 조카 한진서(韓鎭書)의 지리속(地理續)이 있어서 뒷사람들의 고증의 수고를 덜어주었으니 또한 역사학에 두뇌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다만,
 
1) 너무 글자 사이에서 조선에 관한 사실을 찾다가 민족 대세의 관계를 잃었으니 곧 부루(夫婁)와 하우(夏禹)의 대 국제교제로 볼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주신(州愼)의 창수사자(蒼水使者)와 2천 년 동안 흉노와 연(燕)과 삼조선(三朝鮮)이 혹은 화의하고 혹은 싸운 전후 큰 일들을 다 빠뜨렸고,
 
2) 유교의 위력에 눌려 고죽국(孤竹國)이 조선족의 갈래임을 발견치 못하는 동시에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성명을 빠뜨렸고,
 
3) 서적의 선택이 정확하지 못하였으니, 진서(晉書)의 속석전(束晳傳)에 의하면, “우(禹)임금이 백익(伯益)을 죽이고,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을 죽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이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진본(眞本)이요, 현존한 죽서기년은 가짜인데, 이제 그 가짜를 그대로 기재하였으며, 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릉서(武陵書)는 당나라 사람의 위조인데, 그대로 신용하여 인용하였고, 이 밖에 지나인이나 일본인이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서 우리 나라를 속이고 모욕한 것을 많이 그대로 수입하였으니, 이것이 그 책의 결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조 일대의 일을 적은 역사로 말하면, 내가 일찍이 정종조(正宗朝) 한때의 기록을 엮은 수서(修書)라는 아주 잔글자로 쓴 2백 권의 거질(巨帙)을 보았었고, 만일 관서(官書)인 국조보감(國朝寶鑑), 조야첨재(朝野僉載) 등을 비롯하여 허다한 개인 저술의 역사서까지 친다면 몇 백의 수레에 찰 것이다.
 
이 태조(李太祖) 이하의 사실을 적은 역사로는 조야집요(朝野輯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 몇몇 책을 대강 훑어본 이외에는 자세히 다 읽어본 것이 없으므로 아직 그 낫고 못함을 말하지 못하거니와, 대개 열에 일고여덟이 사색(四色)의 당쟁사(黨爭史)임은 단언할수 있을 것이니 아, 이조 이래 수백 년 동안의 조선인의 문화사업은 이에 끊어졌도다.
 
이상에 열거한 역사서를 다시 말한다면 대개가 정치사요, 문화사에 해당하는 것은 몇이 못 됨이 첫째 유감이요,
 
정치사 중에서도 동국통감, 동사강목 이외에는 고금을 회통한 저서가 없고, 모두 한 왕조의 흥하고, 망한 전말로 글의 수미(首尾)를 삼았음이 유감이요,
 
공구의 춘추(春秋)를 역사의 절대적인 준칙으로 알아 그 의례를 본받아서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억누르기를 위주하다가 마지막에는 자기나라까지 비방하는 편벽된 논란을 벌임이 셋째 유감이요,
 
국민의 자감(資鑑)에 이바지하려 함보다 외국인에게 아첨하려 한 의사가 더 많고(李修山 일파를 제하고) 자기 나라의 강토를 조각조각 베어주어 마지막에 가서는 건국 시대의 수도까지 모르게 만들었음이 넷째 유감이다.
 
우리의 사학계가 이와같이 눈멀고, 귀먹고, 절름발이 등 온갖 병을 죄다 가져서 정당한 발달을 얻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너무 자주 내란과 외환(비교적 오래 편안했던 이조 일대는 제하고)과 자연의 재난이 잦았던 것은 그만두고라도 인위(人爲)의 장애를 이룬 것을 들건대,
 
(1) 신지(神誌) 이래의 역사를 비장해두는 버릇이 역사의 고질이 되어 이조에서도 중엽 이전에는 동국통감, 고려사 등 몇몇 관에서 간행한 책 이외에는 사사로이 역사를 짓는 것을 금하였으므로 이수광(李?光)은 내각에 들어가서야 고려 이전의 비사(秘史)를 많이 보았다 하였고 이언적(李彦迪)은 사벌국전(沙伐國傳)을 지어가지고도 친구에게 보임을 꺼려했다. 당대 왕조의 잘잘못을 기록하지 못하게 함은 다른 나라에도 간혹 있거니와, 지나간 고대의 역사마저 사사로이 짓거나 읽는 것을 금함은 우리 나라에만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를 읽는 이가 별로 없었고,
 
(2) 송도(松都)를 지나다가 만월대(滿月臺)를 쳐다보라. 반쪽의 기와가 남아 있는가? 한 개의 주초가 남아 있는가? 막막히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이 아닌가?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의 아버지뻘로 멀지 않은 고려조의 대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설도 없이 어찌 이와같이 정(情)이 없는 빈터만 남았는가?
 
이와 똑같은 예로서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아볼 수 없으며, 평양에서 고구려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이에서 나오는 결론은 뒤에 일어난 왕조가 앞의 왕조를 미워하여 역사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파괴하고, 태워버리기를 위주한 것이다. 신라가 일어나매 고구려.백제 두 나라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고, 고려가 되매 신라의 역사가 볼 것이 없게 되었으며, 이조가 대신하메 고려의 역사가 볼것이 없게 되어 매양 현재로서 과거를 계속하려 아니하고 말살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역사에 쓰일 자료가 박약해졌으며,
 
(3) 현종(顯宗)이, “조총(鳥銃)의 길이가 얼마나 되오?”하니, 유혁연(柳赫然)이 두 손을 들어,
“이만합니다.”하고 형용하였다. 기주관(記注官:기록을 맡은 관리)은 그 문답한 정형(情形)을 받아쓰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유혁연이 그를 돌아보며,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相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어, ”자, 남짓이 하고 이만합니다,“고 대답하였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라고 쓰지 못하느냐?” 하고 구짖었다, 숙종(肅宗)이 박태보(朴太輔)를 친히 문초하는데, “이리저리 잔뜩 결박하고 뭉우리돌로 때려라.”하니, 주서(注書) 고사직(高司直)이 서슴없이,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여 돌로 때려라(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라고 썼다 그래서 크게 숙종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들이 궁정의 한 가화(佳話)로 전하는 이야기이지마는, 반면에 남의 글로 내 역사를 기술하기 힘듦을 볼 것이다. 국문이 늦게 나오기도 했지마는, 나온 뒤에도 한문으로 저술한 역사만 있음이 또한 기괴하다. 이는 역사 기록의 기구가 부족함이요,
 
(4) 회재(晦齋:李彦迪)나 퇴계(退溪:李滉)더러 원효나 의상의 학술사상(學術史上) 위치를 물으면 한 마디의 대답을 못 할 것이요, 원효와 의상에게 소도(蘇塗:솟대)나 내을(奈乙:박혁거세의 탄생지)의 신앙적 가치를 말하면 반분의 이해를 못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조의 인사들이 고려 시대의 생활의 취미를 모르며, 고려나 삼국의 인사들은 또 삼한 이전의 생활의 취미를 모를 만큼 반식(飯食). 거처(居處). 신앙. 교육 등 일반 사회의 형식과 정신이 모두 몹시 변하여 오늘의 아메리카 사람으로 내일 러시아 사람됨과 같은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는 역사 사상의 연락이 끊어짐이라, 어디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구명할 동기가 생기랴? 이상 몇 가지 원인으로 하여 우리의 역사학이 올바르게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3백 년 동안 사색(四色)의 당파 싸움이 크게 국가에 해를 끼쳤다 하지마는, 당론이 극렬할수록 제각기 나는 옳고 저는 그르다는 것을 퍼뜨리기 위하여 사사로운 기술이 성행하고 당의 시비가 매양 국정에 관계되므로 따라서 조정의 잘잘못을 논술하게 되어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사사로운 저작의 금지가 깨뜨려져서 마침내 한백겸. 안정복. 이종휘. 한치윤 등 사학계에 몇몇 인물이 배치되었음도 그 결과이다.
 
혹 어떤 이는, “사색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가릴 수가 없어서 가장 역사의 난관이 된다.”고 하지마는, 그들의 시비가 무엇인가 하면 아무 당이 이조의 충신이니, 역적이니, 아무 선생이 주자학의 정통이니 아니니 하는 문제들뿐이라,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서릿발 같은 칼을 휘둘러 임금의 시체를 두 동강이 낸 연개소문을 쾌남아라 할 것이요,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여 명륜당(明倫堂) 기둥에 공자를 비평한 글을 붙인 윤백호(尹白湖)를 걸물(傑物)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만 냉정한 두뇌로써 회재.화담(花潭:徐敬德). 퇴계.율곡(栗谷:李珥) 등의 학술상 공헌의 많고 적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자학의 정통이 되고 안 됨은 희담(戱談)이 될 분이요, 노론(老論).소론(少論).남인(南人).북인(北人)의 다툼은 그 정치상에 미친 영향의 좋고 나쁨을 물을 뿐이며, 이조의 충성된 종 되고 못 됨은 잠꼬대에 지나지 않을 뿐이요, 개인의 사사로운 덕의 결점을 지적하여 남의 명예를 더럽히고 혹은 애매한 사실로 남을 모함하여 죽인 허다한 사건들은 그 반면에 있어서 당시 사회 알력의 나쁜 습속으로 국민과 나라를 해친 일종의 통탄할 사료가 될 뿐이다.
 
만일 시어머니의 역정과 며느리의 푸념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일에 낱낱이 재판관을 불러 그 굽고 곧음을 판결하려 한다면 이는 스펜서의 이른바 이웃집 고양이 새끼 낳았다는 보고 같아서 도리어 이로써 사학계의 다른 중대한 문제를 등한히 할 염려가 있으니, 그냥 던져둠이 옳다. 그리고 빨리 지리 관계라든가, 국민생활 관계라든가, 민족의 성쇠라든가 하는 큰 문제에 주의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것을 구하여 조선 사학계의 표준을 세움이 급무 중의 급무라 생각한다.
 
==제4장 사료의 수집과 선택==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디서 무엇으로 어떻게 우리의 역사를 연구하여야 하겠느냐 하면 , 그 대답이 매우 곤란하나, 우선 나의 경과부터 말하고자 한다. 이제부터 16년 전에 국치(國恥:한일합방)에 발분하여 비로소 동국통감(東國痛鑑)을 읽으면서 사평체(史評體)에 가까운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지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지상에 발표하고, 이어서 수십 학생들의 청구에 의하여 지나식(支那式)의 연의(蓮義)를 본받은 역사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대동사천녀사(大東史千年史)란 것을 짓다가, 두 가지 다 사고로 인하여 중지하고 말았었다.그 논평의 독단(獨斷)과 행동의 대담하였음을 지금까지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니와, 그 이후 얼마만큼 분발하여 힘쓴 적도 없지 아니하나 나아간 것이 촌보(寸步)쯤도 못 된 원인을 오늘에 와서 국내 일반 독사계(讀史界)에 호소하고자 한다.
 
1) 옛 비석의 참조에 대하여
 
일찍이 사곽잡록(四郭雜錄:저자미상)을 보다가 “신립(申砬)이 선춘령(先春領)아래에 고구려 옛 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申砬聞先春領下有高句麗舊碑), 몰래 사람을 보내 두만강을 건너가서 탁본(拓本)을 떠왔는데(潛遣人 渡豆滿江 模本而來), 알아볼 만한 글자가 3백여 자에 지나지 않았다(所可辨識者 不過三百餘字).그 글에 황제라고 한 것은 고구려왕이 스스로를 일컬은 것이요(其曰皇帝 高句麗王自稱也), 그 상가(相加)라고 한 것은 고구려의 대신을 일컬은 것이었다(其曰相加 高句麗大臣之稱也).“고 한 일절이 있음을 보고 크게 기뻐서, 만주 깊은 산중에 천고(千古) 고사(故事)의 이빠진 것을 보충할 만한 비석쪽이 이것 하나뿐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해외에 나간 날부터 고구려 발해의 옛 비석을 답사하리라는 회포가 몹시 깊었었다.
 
그러나 해삼위(海參威:브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로프스크를 왕래하는 선객들에게 그 항로 중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석혁산악(錫赫山嶽)에 우뚝 서 있는 윤관(尹瓘, 혹은 蓋蘇文)의 기공비(紀功碑)를 보았다는 말이며, 봉천성성(奉天省成)에서 간접으로 이통주(伊通州)를 유람하였다는 사람이 그 고을 동쪽 70리에 남아 있는 해부루(解夫婁:夫餘의 왕)의 송덕비(頌德碑)를 보았노라는 이야기며, 발해의 옛 서울에서 온 친구가 폭이 30리인 경박호(鏡泊湖:古史에는忽汗海)의 앞쪽(북쪽)에 미국 나이아가라 폭포와 겨룰 만한 1만 길 비폭(飛瀑)을 구경하였다고 하는 말이며, 해룡현(海龍縣)에서 나온 나그네가 죽어서 용이 되어 일본의 세 섬을 가라앉히겠노라고 한 문무대왕(文武大王:신라)의 유묘(遺廟)를 예배하였다는 이야기 등이 나에게는 귀로 들을 인연만 있었고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다.
 
한번 네댓 친구와 동행하여 압록강 위의 집안현(輯安縣), 곧 고구려 제2의 환도성(丸都成)을 얼씬 보았음이 나의 인생에 기념할 만한 장관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여비가 모자라서 능묘(陵墓)가 모두 몇인지 세어볼 여가도 없이 능으로 인정할 것이 수백이요, 묘가 1만 내외라는 억단(臆斷)을 하였을 뿐이었다. 마을 사람이 주는 댓잎 그린 금척(金尺)과 그곳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박아서 파는 광개토왕 비문을 값만 물어보았으며(깨어진 그 땅 위에 나온 부분만), 수백의 왕릉 가운데 천행으로 남아 있는 8층 석탑, 사면이 네모진 광개토왕릉과 그 오른편의 제천단(祭天壇)을 붓으로 대강 그려서 사진을 대신하였고 그 왕릉의 넓이와 높이를 발로 재고 몸으로 견주어서 자로 재는 것을 대신하였을 뿐이었다
 
(높이 10길 가량이고, 아래층의 둘레는 80발인데, 다른왕릉은 위층이 파괴되어 높이는 알 수 없고 그 아래층의 둘레는 대개 광개토왕과 같음). 왕릉의 위층에 올라가 돌기둥이 섰던 자취와 덮은 기와의 남은 조각과 드문드문 서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보고 후한서(後韓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금은과 재백(財帛)을 다하여 깊이 장사지내고, 돌을 둘러 봉하고 또한 소나무, 잣나무를 심는다(高句麗人金銀財帛 盡於厚葬 環石爲封 亦種松柏).”고 한 아주 간단한 문구의 뜻을 비로소 충분히 해석하고, ‘수백 원만 있으면 묘 하나를 파볼 수 있을 것이요, 수천 원 혹은 수만 원이면 능 하나를 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수천 년 전 고구려 생활의 활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인데.’ 하는 꿈 같은 생각만 하였다. 아! 이와 같은 천장비사(天藏秘史)의 보고(寶庫)를 만나서 나의 소득이 무엇이었던가? 인재(人材)와 물력(物力)이 없으면 재료가 있어도 나의 소유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하룻동안 그 외부에 대한 어설픈 관찰만 이었지마는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의 어떠함이 눈앞에 살아 나타나서 그 자리에서 “집안현을 한번 봄이 김부식의 고구려사를 만번 읽는 것보다 낫다,” 하는 단안을 내렸다.
 
그 뒤 항주(杭州) 도서관에서 우리 나라 금석학자 김정희(金正喜:秋史)가 발견한 유적을 가져다가 지나인이 간행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을 보니, 신라말 고려초의 사조(思潮)와 속상(俗尙)의 참고가 될 것이 많았고, 한성의 한 친구가 보내준 총독부 발행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도 그 조사한 동기의 어떠함이나 주해의 억지로 끌어다 붙인 몇몇 부분만을 제외하면, 또한 우리 고사 연구에 도움될 것이 많았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우리 한미한 서생(書生)의 손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사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2) 각 서적의 호증(互證)에 대하여
 
① 일찍이 고려 최영전(崔塋傳)에 의거하건대, 최영이 말하기를, “당나라가 삼십만 군사로 고구려를 침범하여, 고구려는 승군(僧軍) 삼만을 내어 이를 대파하였다.” 고 했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 중에 이 사실이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면 승군이란 무엇인가 하면,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재가(在家)한 화상은 가사도 입지 아니하고 계율도 행하지 아니하며,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고 맨발로 걷고, 아내를 가지고, 자식을 기르며, 물건의 운반, 도로의 소제, 도랑의 개척, 성실(城室)의 수축 등 공사(公事)에 복역하며, 국경에 적이 침입하면 스스로 단결하여 싸움에 나서는데, 중간에 거란(契丹)도 이들에게 패하니, 그 실은 죄를 지어 복역한 사람들로서, 수염과 머리를 깍았으므로 이인(夷人:오랑캐)이 그들을 화상이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에서 승군의 면목을 대강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력이 어디서 비롯하였느냐 하는 의문이 없지 않다.
 
통전(通典).신당서(新唐書)등 이름있는 책에 의하면, 조의선인이라는 관명(官名)이 있었고, 고구려사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고구려 재상)를 연나조의라 하였고, 후주서(後周書)에는 조의선인을 예속선인이라고 하였으니, 선인(先人) 선인(仙人)은 다 국어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고, 조의 혹 백의(帛衣)란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이른바 조백으로 허리를 동이므로 이름함이다.
 
선인(仙人)은 신라 고사(故事)의 국선(國仙)과 같은 종교적 무사단(武士團)의 단장이요, 승군(僧軍)은 국선 아래 딸린 단병(團兵)이요, 승군이 재가한 화상(和尙)이라 함은 후세 사람이 붙인 별명이다.
 
서긍이 외국의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이것을 보고 그 단체의 행도을 서술함에 있어서, 그 근원을 물으니 복역한 사람이라는 억측의(名詞)를 말해준 것이다.
이에 고려사로 인하여 삼국사에 빠진 승군을 알게 되고, 고려도경으로 인하여 고려사에 자세치 않은 승군의 성질을 알게 되고 통전. 신당서. 후주서와 신라의 고사 등으로 인하여 승군과 선인(先人)과 재가의 화상이 같은 단체의 무리임을 알게 되었으니, 다시 말하면 당나라의 30만 침입군이 고구려의 종교적 무사단인 선인군(先人軍)에게 크게 패하였다는 몇십 자의 약사(略史)를 6,7가지 서적 수천 권을 뒤진 결과로써 비로소 알아낸 것이다.
 
②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안시성(安市城)에서 화살에 맞아 눈이 상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후세 사람이 매양 이것을 역사에 올리는데,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정관은 당나라 태종의 연호)에도,“어찌 현화(玄花:눈)가 백우(白羽)에 떨어질 줄 알았으리(那知玄花落白羽).”라고 하여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였으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지나인의 신구당서(新舊唐書)에서는 보이지 않음은 무슨까닭인가?
 
만일 사실의 진위를 묻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또는 버렸다가는 역사상의 위증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당나라 태종의 눈 상한 사실을 지나의 사관(史官)이 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 해답을 구하였다.
 
명(明)나라 태종(太宗)이 거란을 치다가 흐르는 화살에 상하여 달아나 돌아가서, 몇 해 후에 필경 그 상처가 덧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송사(宋史)나 요사(?史)에는 보이지 아니하고, 사건이 여러 백 년 지난 뒤에 진정이 고증(考證)하여 발견한 것이다.
이에 나는 지나인은 그 임금이나 신하가 다른 민족에게 패하여 상하거나 죽거나 하면 그것을 나라의 수치라 하여 숨기고 역사에 기록하지 않은 실증을 얻어서 나의 앞의 가설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나인에게 국치(國恥)를 숨기는 버릇이 있다 하여 당나라 태종이 안시성에서 화살에 맞아 눈을 상하였다는 실증은 되지 못하므로, 다시 신구당서를 자세히 읽어보니, 태종본기(太宗本紀)에 태종이 정관(偵觀) 19년 9월에 안시성에서 군사를 철수하였다 하였고, 유박전(劉泊傳)에는 그 해 12월에 태종의 병세가 위급하므로 유박이 몹시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으며, 본기(本紀)에는 정관 20년에 임금의 병이 낫지 아니하여 태자에게 정사를 맡기고, 정관23년 5월에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죽은 원인을 강복(綱目)에는 이질(痢疾)이 다시 악화한 것이라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痛鑑)에는 요동에서부터 병이 있었다고 하였다.
 
대개 높은 이와 친한 이의 욕봄을 꺼려 숨겨서, 주천자(周天子)가 종후(鄭侯)의 화살에 상했음과 노(魯)나라의 은공(隱公).송공(昭公) 등이 살해당하고 쫓겨났음을 춘추(春秋)에 쓰지 아니하였는데, 공구(孔丘)의 이러한 편견이 지나 역사가의 버릇이 되어, 당나라 태종이 이미 빠진 눈을 유리쪽으로 가리고, 그의 임상병록(臨床病錄)의 기록을 모두 딴 말로 바꾸어놓았다.
 
화살의 상처가 내종(內腫:몸 속으로 곪음)이 되고 눈병이 항문병(肛門病)으로 되어 전쟁의 부상으로 인하여 죽은 자를 이질이나 늑막염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해놓은 것이다. 그러면 삼국사기에는 어찌하여 실제대로 적지 않았는가? 이는 신라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미워하여 그 명예로운 역사를 소탕하여 위병(魏兵)을 격파한 사법명(沙法名)과 수군(隨軍)을 물리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도리어 지나의 역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전해졌으니(을지문덕의 이름이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은 곧 김부식이 지나사에서 끌어다 쓴 것이므로 그 논평에, ”을지문덕은 중국사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했음), 당태종이 눈을 잃고 달아났음이 고구려의 전쟁사에 특기할 만한 명예로운 일이라 신라인이 이것을 빼버렸음이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태종의 눈 잃은 일을 처음에 전설과 목은집(牧隱集)에서 어렴풋이 찾아내어 신구당서나 삼국사기에 이것을 기재하지 않은 의문을 깨침에 있어서ㅡ 진정의 야산묵담(兩山墨談)에서 같은 종류의 사항을 발견하고, 공구의 춘추(春秋)에서 그 전통의 악습을 적발하고, 신구당서, 통감강목(痛鑑綱目) 등을 가져다 그 모호하고 은미(隱微)한 문구 속에서 첫째로 당태종 병록(이질 등)보고가 사실이 아님을 갈파하고, 둘째로 목은의 정관음(貞觀吟:당태종의 눈 잃은 사실을 읊은 시)의 신용할 만함을 실증하고,
 
셋째로 신라 사람이 고구려 승리의 역사를 말살함으로써 당태종의 패전과 부상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빠지게 되었음을 단정하고 이에 간단한 결론을 얻으니 이른바, ‘당태종이 보장왕(寶藏王)3년(서기644)에 안시성에서 눈을 상하고 도망하여, 돌아가서 당시 외과 의사의 불완전으로 거의 30달을 앓다가, 보장왕 5년에 죽었다. ’라는 것이었다. 이 수십자를 얻기에도 5,6종 서적 수천 권을 반복하여 읽어보고 들며 나며 혹은 무의식중에서 얻고 혹은 무의식중에서 찾아내어 얻은 결과이니 그 수고로움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다.
 
승군(僧軍)의 내력을 모르면 무엇이 해로우며 당태종이 부상한 사실을 안들 무엇이 이롭기에 이런 사실을 애써서 탐색하느냐 할 이가 있겠지만, 그러나 사학(史學)이란 것은 하나하나를 모으고 잘못 전하는 것을 바로잡아서 과거 인류의 행동을 여실하게 그려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깨쳐주는 것이니, 승군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다만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만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뒤따른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과 강감찬의 거란을 격파한 군대의 주력(主力)이 다 무엇이었던지 모르고, 따라서 삼국에서부터 고려까지의 1천여 년 군제상(軍制上) 중요한 점을 모를 것이며, 당태종이 눈을 잃고 죽은 줄을 모른다면 안시성 전국(戰局)이 속히 결말이 난 원인을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신라와 당나라가 연맹하게 된 배경이요, 당나라 고종(高宗)과 그 신하가 모든 희생을 돌아보지 않고 고구려와 흥망을 겨룬 전제(前提)요, 백제와 고구려가 서로 손을 맞잡게 된 동기이던 것을 모를 것이다. 그러나 위에 든 것은 그 한두 예일 뿐이고, 이 밖에도 이 같은 일이 얼마인지를 모를 것이니, 그러므로 조선사의 황무지를 개척하자면 도저히 한두 사람의 힘으로 단시일에 완결시킬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3) 각종 명사(名詞)의 해석에 대하여
 
우리 나라는 고대 후에니키 인이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가져다 알파벳을 만든 것처럼 한자를 가져다가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그 초창기에는 한자의 음을 딴 것도 있고 혹은 그 뜻을 딴 것도 있으니, 삼국사기에 보이는 사람의 이름으로는, ‘소지(疎智), 일명 비처(毘處)’라 함은 빛의 뜻이 소지가 된것이고 음이 비처로 된 것이요, ‘소나(素那), 일명 금천(金川)’이라 함은 뜻이 금천, 음이 소나로 된 것이요, ‘거칠부(거漆夫), 일명 황종(荒宗)’이라 함은 ‘거칠위’의 음이 거칠부, 뜻이 황종으로 된 것이요, ‘개소문(蓋蘇文), 일명 개금(蓋今)’은 ‘신’ 의 음이 소문, 뜻이 금으로 된 것이요,
 
‘이사부(異斯夫), 일명 태종(笞宗)’은 ‘잇위’의 음이 이사부, 뜻이 태종(訓蒙子會에 笞를 ‘잇’으로 읽음)으로 된 것이다. 지명(地名)으로는 ‘밀성(密城), 추화(推火)라고도 함’ 은 ‘밀무’의 음이 밀성, 뜻이 추화로 된 것이요, ‘웅산(熊山) 공목달(功木達)이라고도 함’은 ‘곰대’의 뜻이 웅산, 음이 공목달로 된 것이요, ‘계립령(鷄立領), 일명 마목령(麻木領)’이라 함은 ‘저름(겨릅)’의 음이 계립, 뜻이 마목으로 된 것이요, ‘모성(母城), 막성(莫城)이라고도 함’은 ‘어미’ 의 뜻이 모, 음이 막으로 된 것이요, ‘흑양(黑壤), 금물노(今勿奴)라고도 함’은 ‘거물라’의 ‘거물’의 뜻이 흑, 음이 금물로 된 것이요, 양과 노는 다 ‘하’의 음을 취한 것이다.
 
관명(官名)으로는 ‘각간(角干)을 혹은 발한(發翰)이라함’은 ‘불’의 뜻이 각, 음이 발로 된 것이고, 간(干)과 한(翰)은 다 ‘한’의 음을 취한 것이나, 불한은 군왕(郡王)을 일컬음이요, ‘누살(薩)을 혹 도사(道使)라 함’은 ‘라’의 뜻이 도, 음이 누로 된 것이고, ‘살’의 뜻이 사, 음이 사로 된 것이니, ‘라살’은 지방장관을 일컬음이요, ‘말한’ ‘불한’, ‘신한’은 삼신(三神)에서 근원한 것인데, 뜻으로는 천일(天一).지일(地一).태일(太一)이 되고, 음으로는 마한.변한.진한으로 된 것이요, ‘도가’,‘개가’,‘크가’,‘소가’,‘말가’는 다서 대신의 칭호인데, ‘도.개.크.소.말’등은 뜻으로,‘가’는 음으루 저가(猪加).구가(狗加).대가(大加).우가(牛加).마가(馬加)로 된 것이다.
 
이같이 자질구레한 고증이 무슨 역사상의 큰 일이 되는가? 이것은 자질구레한 듯하나 지지(地誌)의 잘못도 이로써 바로잡을 수 있고, 사료의 의혹도 이로써 보충할 수 있으며 고대의 문학에서부터 모든 생활 상태까지 연구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해모수(解募漱)와 유화왕후(柳化王后)가 만난 압록강이 어디인가? 지금의 압록강이라 하면 당시 부여의 서울인 합이빈(哈爾濱)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다른 곳이라면 달리 또 압록이 없어 그 의문을 깨뜨리지 못하였더니,첫 걸음에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비에 지금의 압록강을 아리수(阿利水)라 하였음을 보고 압록의 이름이 아리(阿利)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
 
두 번째로 요사(遼史)에 ‘요흥종(遼興宗)이 압자하(鴨子河)를 혼돈강(混同江)이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 것을 보고 ‘압자(鴨子)가 곧 ‘아리’인즉, 혼돈강 곧 송화강(松花江)이 고대의 북압록강(北鴨綠江)인가?‘ 하는 가설을 얻었고, 다음에 동사강목(東史綱目)고이(考異)에, ’삼국유사의 ‘요하(遼河) 일명 압록(鴨綠)’과 주희의 여진이 일어나 압록강에 웅거하였다.‘고 한 것을 들어 ’세 압록(鴨綠)이 있다,‘고 하였음을 보고 송화강이 고대에 한 압록강이었음을 알고, 따라서 해모수 부부가 만난 압록강이 곧 송화강임을 굳혔다.
 
마한전(馬韓傳)에 ‘비리(卑離)’를 건륭제(乾隆帝)의 삼한정류(三韓訂謬)에는 만주의 패륵(貝勒:패리)과 같은 관명(官名)이라고 하였으나, 나는 생각하기를 삼한의 비리는 삼국지리지(三國地理志)백제의 부리(夫里)이니, 비리나 부리는 다 ‘울’의 취음(取音)이요, 도회(都會)의 뜻이다. 마한의 비리와 백제의 부리를 참조하면, 마한의 벽비리(壁卑離)는 백제의 파부리(波夫里)요, 여래비리(如來卑離)는 이릉부리(爾陵夫里)요, 모로비리(牟盧卑離)는 모량부리(毛良夫里)요, 감해비리(鑑奚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理)요, 초산도비리(楚山途卑離)는 미동부리(未冬卑離)요, 고랍비리(古臘卑離)는, 고막부리(古莫夫里)니, 비록 이 음과 저 뜻이 이역(異譯))이 있기는 하나 그 대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조선이 관중(管仲)과 싸우던 때에 지나 산서성(山西省)이나 영평부(永平府)에 비이(卑耳)의 계(谿)를 두었으니, 비이는 비리 곧 ‘울’의 번역이다. 이에서 조선 고대의 ‘울’이 곧 산해관(山海關)서족까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질구레한 고증이 역사상의 큰 일이 아니지마는 도리어 역사상의 큰 일을 발견하는 연장이라 하겠다. 만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훈몽자회(訓蒙字會), 처용가(處容歌), 훈민정음(訓民正音) 등에서 옛 말을 연구하고, 삼국유사에 씌어있는 향가에서 이두문의 용법을 연구하면 역사상 허다한 발견이 있을 것 같다. 필자가 일찍이 이에 유의한 바 있었는데, 해외에 나간 뒤로 부터는 한 권의 책을 얻기가 심히 어려워서,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또한 얻어볼 수 없었다.
 
4) 위서(僞書)의 판별과 선택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고대에 진귀한 책을 태워버린 때(이조 太宗의 焚書같은)는 있었으나 위서를 조작한 일은 별로 없었으므로,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삼일신고(三一神誥)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辨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 책은 각 씨족의 족보 가운데 그 조상의 일을 혹 위조한 것이 있는 이외에는 그다지 진위의 변별에 애쓸 필요가 없거니와, 우리와 이웃해 있는 지나. 일본 두 나라는 예로부터 교제가 빈번함을 따라서 우리 역사에 참고될 책이 적지 않지마는 위서 많기로는 지나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니, 위서를 분간하지 못하면 인용하지 않을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용하는 착오를 저지르기 쉽다.
 
그렇지마는 그 가짜에 구별이 있다.
하나는 가짜 중의가짜이니, 예를 들면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진본이 없어지고 위작이 나왔음을 앞에서 이미 말하였거니와, 옛날 사학가들이 늘 고기(古記)의, ‘단군은 요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섰다(檀君 興堯竝立戊辰).’고 한 글에 의하여 단군의 연대를 알고자 하는 이는 항상 요 임금의 연대에 비교 하고자 하며 요 임금의 연대를 찾는 이는 속강목(續綱目:金仁山저술)에 고준(考準)한다.
그러나 주소(周召: 周公과 召公)의 공화(王이 달아나고 주공과 소공이 의논하여 정치를 행한 14년)이전의 연대는 지나 역사가의 대조(大祖)라 할 만한 사마천(司馬遷)도 알지 못하여, 그의 사기(史記)연표에 쓰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그보다도 더 요원한 요 임금의 연대랴. 그러므로 속강목은 다만 가짜 죽서기년에 의거하여 적은 연대이니, 이제 속강목에 의거하여 고대의 연대를 찾으려 함은 도리어 연대를 흐리게 함이다.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전(尙書傳)에, ‘구려 한맥(句麗?貊)’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고구려와 삼한이 지나의 주무왕(周武王)과 교통하였음을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사기(史記)공자세가(孔子世家)에,“안국(安國)이 지금의 황제의 박사(博士)가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安國爲今皇帝博士蚤卒).”고 하였으니, ‘지금의 황제’는 무제(武帝)이다. 무제를 '지금의 황제‘하 한 것은 사마천이 무제가 죽어서 무제라는 시호를 받은 것을 못 보았기 때문이고, 안국을 ’일찍 죽었다.‘고 한 것은 사마천이 생전에 안국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안국은 사마천보다 먼저 죽고 사마천은 무제보다 먼저 죽었음이 명백한데 , 상서전에는 무제의 아들인 소제(昭帝)시대에 창설한 금성군(金城郡)이란 이름이 있으니, 공안국이 그가 죽은 뒤에 창설된 지명을 예언할 만한 점쟁이라면 모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하면 상서대전이 위서(僞書)임이 또한 분명하고 거기 기록된 구려. 한맥 등도 자연 명백해질 것이다.
 
다음은 진짜 중의 가짜인데, 이것을 다시 둘로 나누면,
① 하나는 본서의 위증(僞證)이니, 초학집(初學集), 유학집(有學集)등은 전겸익(錢謙益)이 저술한 실제로 있는 것이지마는, 그 글 가운데 씌어 있는 우리 나라에 관한 일은 대개 전겸익의 위조요, 실제로없는 것이 많으니, 이런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나라 역사에 그것을 반박할 확고한 증거들이 있거니와 , 만일 우리 역사의 반박할 재료가 없어지고 저네의 거짓 기록만 유전(流轉)된 것이 있으면 다만 가설의 부인만으로는 안 될 것이니 어찌하면 옳을까?
옛날에 장유(長維)가 사기(史記)의,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武王封箕子干朝鮮).”고 한 것을 변정하는데, 첫째로 상서(尙書)에, “나는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한 말을 들어 기자가 이미 남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무왕의 봉작(封爵)에, “기자가 조선으로 몸을 피하였다(箕子避地朝鮮).”고 한 것을 들어 반고(班固)는 사기를 지은 사마천보다 성실하고 정밀한 역사가로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기자의 봉작설을 빼버리고 봉작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을 내렸으니, 이는 인증(人證)이다.
 
삼국 이후 고려 말엽 이전(몽고 침입 이전)에 우리 나라 형세가 강성하여 지나에 대하여 전쟁으로 맞설 떄에도 저에게 보낸 국서에 우리를 낮추어 한 말이 많이 있었거니와, 그들은 다른 나라가 사신을 보내면 반드시 내조(來朝:조공왔다)라고 썼음은 지나인의 병적인 자존성에 의한 것이니, 이는 근세 청조(淸朝)가 처음 서양과 통할 때 영(英).로(露) 등 여러 나라가 와서 통상한 사실을 죄다 “모국이 신하를 일컫고 공물을 바쳤다(某國稱臣奉貢).”고 썼음을 보아도 가히 알수 있는 일이니, 그네의 기록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된다.
 
또 지나인이 만든 열조시집(列朝詩集), 양조평양록(兩朝平讓錄) 등 시화(詩話) 가운데 조선 사람의 시를 가져다가 게재할 때에 대담하게 한 구절 한 줄을 고쳤음을 볼 수 있으니, 우리의 역사를 적을 때에도 자구를 고쳤었음을 알 것이다. 그리고 몽고의 위력이 우리 나라를 뒤흔들 때, 우리의 악부(樂府).사책(史冊)을 가져다가 황도(皇都).제경(帝京).해동천자(海東天子). 등의 자구를 모두 고친 사실이 고려사에 보였으니, 그 고친 기록을 바로잡지 못한 삼국사. 고려사 등도 지나와 관계된 문제는 실제의 기록이 아님을 알 것이다.
이것은 사증(事證)이다.
 
연전에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歷史輯略)과 장지연(張志淵)의 대한강역고(大韓彊域考)에 , 일본의 신공여주(神功女主) 18년에 신라를 정복했다는 것과, 수인주(垂仁主) 2년에 임나부(任那府)를 설치하였다는 것을 모두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그대로 따다가 적고 그 박식함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신공 18년은 신라 내해왕(柰解王) 4년(서기 199년)이요, 내해왕 당년에는 신라가 압록강을 구경한 이도 별로 없었을 테인데, 이제 내해왕이 아리나례(阿利那禮:압록강)을 가리키며 맹세하였다 함이 무슨 말이며, 수인주는 백제와 교통하기 이전의 일본의 임금이니, 백제의 봉직(縫織)도 수입이 안 된 때인데, 수인주 2년에 임나국(任那國) 사람에게 붉은 비단[赤絹] 2백 필을 주었다 함은 어쩐 말인가?
 
이 두가지 의문에 답하기 전에 그 두 사건의 기사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증(異證)이다. 이렇게 고인의 위증(僞證)을 인(人)으로 사(事)로 또 이(理)로 증명하여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은 거짓임을 알 것이다.
 
② 후세 사람의 위증이니, 원서에는 본래 거짓이 없었는데 후세 사람이 문구를 보태어 위증한 것이다. 마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 하여, 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남사(南史), 북사(北史) 등에 보인 조선에 관한 사실을 가져다 자기네에게 유리하도록 안사고(顔師古) 등으로 하여금 곡필(曲筆)을 잡아 고치고 보태고 바꾸고 억지의 주를 달아서, 사군(史郡:樂浪.臨屯.眞番.玄?)의 연혁이 가짜가 진짜로 되고, 역대 두 나라의 국서가 더욱 본래대로 전해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러한 증거는 본편 제2장 지리연혁(地理沿革)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가짜가운데 진짜니, 마치 관자(管子)같은 것은 관중(管仲)의 저작이 아니고 지나 육국(六國) 시대의 저작인 위서(僞書)이나 조선과 제(齊)의 전쟁은 도리어 그 실상을 전한 자이니, 위서로서도 진서(眞書)이상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할 것이다.
 
5) 만(滿). 몽(蒙). 토(土) 여러 종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이다.
 
김부식은 김춘추(金春秋). 최치원(崔致遠) 이래의 모화주의(慕華主義)의 결정(結晶)이니,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에
“고주몽(高朱蒙)은 고신씨(高辛氏:고대 중국 5제의 한 사람)의 후예다”
“김수로(金首露)는 금천씨(金天氏:皇帝의 아들 少昊)의 후예다“
“진한(辰韓)은 중국 진인(秦人)이 동래(東來)한 것이다” 하여, 말이나 피나 뼈나 교나 풍속이 한가지도 같은 것이 없는 지나족을 동종(同宗)으로 보아, 말살에다 쇠살을 묻힌 어림없는 붓을 놀린 뒤로 그 편벽된 소견을 간파한 이가 없었으므로, 우리 부여의 계(族系)가 분명치 못하여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를 캄캄한 구석에 둔 지가 오래였다.
 
언제인가 필자가 사기(史記) 흉노전(匈奴傳)을 보니, 삼성(三性)의 귀족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 있음이 고려나 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과 같고, 무기일(戊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으며, 왕공(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고, 벼슬 이름 끝 글자에 치라는 음이 있음이 신지(臣智)의 지(智)와 한지(旱支)의 지(支)와 같으며, 후(后)를 알씨(閼氏)라 함이 곧 ‘아씨’의 번역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생겼다.
 
인축(人畜). 회계(會計)하는 곳을 담림혹은 대림이라 함이 ‘살임’의 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나고, 휴도(休屠)는 소도(蘇塗)와 음이 같을 뿐 아니라, 나라 안에 대휴도(大休屠)를 둔 휴도국(休屠國)이 있고, 각처에 또 소 휴도가 있어서 더욱 삼한의 소도와 틀림이 없었다.
 
이에 조선과 흉노가 3천 년 전에는 한방 안의 형제였다는 의안(疑案)을 가져 그 해결을 구하다가, 그 뒤에 건륭제(乾隆帝)가 명하여 지은 만주원류고(滿洲源流告)와 요(遼). 금(金). 원(元) 세 역사의 국어해(國語解)를 가지고 비교하여보았더니, 비록 그 가운데 부여의 대신 칭호인 ‘가(加)’를 음으로 풀이하여 조선말 김가 이가 하는 ‘가’와 같은 뜻이라 하지 않고 뜻으로 주석하여 가(家)의 잘못이라 하였으며, 금사(金史). 발극렬(勃極烈)을 음으로 맞는 신라의 불구래(弗矩래內)에 상당한 것이라 하지 않고 청조(淸朝)의 패륵(貝勒:패리)의 동류라 한 것 등의 잘못이 없지 아니하나, 주몽(朱蒙)이 만주어(滿洲語) ‘주림물’ 곧 삼림의 뜻이라 하고, 삼한의 벼슬 이름의 끝자 지(支)가 곧 동몽고(東蒙古)의 중을 만나 동몽고 말의 동.서.남.북을 물으니 연나.준나.우진나.회차라고 하여, 고려사의, “도부를 순나라 하고(東部曰順那),서부를 연나라 하고(西部曰涓那), 남부를 관나라 하고(南部曰灌那), 북부를 절나라 하고(北部曰絶那)”고 한 것과 같음을 알았다.
 
또 그 뒤 일본인 조거용장(鳥居龍欌)이 조사 발표한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 종족의 현행하는 말로 같은 것이 수십 종(이에 나의 기억하는 바는 오직 貴子를 ‘아기’라, 乾醬을 ‘메주’라 하는 한두 가지뿐임)이 있음을 억단(臆斷)을 내렸고, 지나 24사(史)의 선비.흉노.몽고등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그 종교와 풍속의 같고 다름을 참조하고, 서양사로써 흉노의 유종(遺種)이 토이기(土耳其:터키).흉아리(匈牙利:헝가리) 등지로 옮겨간 사실을 고열(考閱)하여, 조선. 만주. 몽고. 토이기 네종족은 같은 혈족이라는 또 하나의 억단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 억단의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조선의 고어뿐 아니라 만주어. 몽고어. 등도 연구하여 고대의 지명. 벼슬 이름의 뜻을 깨닫는 동시에, 이주(移住)하고 교통한 자취며, 싸우고 빼앗은 자리며, 풍속의 같고 다른 차이며, 문야(文野:문명과 야만)의 높고 낮은 원인을 구명하고, 그 밖에 허다한 사적의 탐구와 잘못된 문헌의 교정 등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겠다.
 
이상의 다섯 가지는 재료의 수집과 그 선택 등의 수고로움에 대하여 나 자신의 경력을 말한 것이다. 조선. 지나. 일본 등 동양 문헌에 대한 대 도서관이 없으면 조선사를 연구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은 국내에 아직 십분 만족하다 할 도서관은 없으나,그러나 동양으로는 제일이고 또 지금에 와서는 또 조선의 소유가 그 외부(外部)의 곳집이 되고 또 서적의 구독과 각종 자료의 수집이 우리같이 표랑생활 중에 있는 한사(寒士)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요, 게다가 새 사학에 상당한 소양까지 있다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으나, 지금까지 동양학(東洋學)에 위걸(偉傑)이 나지 못 함음 무슨 까닭인가.
 
저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자가 백조고길(白鳥庫吉)이라 하지마는, 그가 저술한 신라사(新羅史)를 보면, 배열. 정리의 새로운 형식도 볼 수 없고 한두 가지 발명도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좁은 천성(天性)이 조선을 헐뜯기에만 급급하여 공평을 결함으로 인한 것인가?
조선사람으로서 어찌 조선 사학이 일본인으로부터 개단(開端)하기를 바라리요 마는 보장(寶藏)을 남김없이 가져다가 암매(暗昧)중에 썩임을 개탄하고 아까워하지 않을 수 없다.
 
==제5장 역사의 개조에 대한 우견(愚見)==
 
역사 재료에 대하여 그 없어진 것을 채우고 빠진 것을 기우며, 거짓을 제거하고 헐뜯은 것을 밝혀서 완전하게 하는 방법의 대략을 이미 말하였거니와, 편찬하고 정리하는 절차에 있어서도 옛날 역사의 투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근일에 왕왕 새로운 체제의 역사를 지었다는 한두 가지 새 저서가 없지 아니하나, 그것은 다만 신라사.고려사. 하던 왕조 독립의 식을 고쳐 상세(上世).중세(中世).근세(近世)라 하였고,
권1, 권2라 하던 통감(痛鑑).분편(分編)의 이름을 고쳐 제1편, 제2편이라 하였으며, 그 내용을 보면
 
재기(才技).이단(異端)이라 하던 것을 예술이라 학술이라 하여 그 귀천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요, 근왕(勤王)이라 한외(外:외적을 막음)라 하던 것을 애국이라 민족적 자각이라 하여 그 신구(新舊)의 명사(名詞)가 다를 뿐이니, 털어놓고 말하자면 한장책(韓裝冊)을 양장책(洋裝冊)으로 고쳤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나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우리 역사의 개조 방법의 대강을 말하자면,
 
1) 그 계통을 찾을 것이다.
 
구사(舊史)에는 갑(甲)대왕이 을(乙)대왕의 아버지요 정(丁)대왕이 병(丙) 대왕의 아우이니 하여 왕실의 계통을 찾는 외에 다른 곳에서는 거의 계통을 찾지 않았으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공중에서 거인이 내려오고, 평지에서 신산(神山)이 솟아오른 듯하여, 한 편의 신괴록(神怪錄)을 읽는 것 같다.
 
역사는 인과의 관계를 밝히자는 것인데, 만일 이와 같은 인과 이외의 일이 있다 하면 역사는 하여 무엇하랴. 그것은 지은 사람의 부주의에 의한것이요, 본질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구사에는 그 계통을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찾을 수 있으니, 삼국사기, 신라사에 적힌 신라의 국선(國仙)이 진흥대황(眞興大王) 때부터 문무대왕(文武大王)때까지 전성하여, 사다함(斯多含) 같은 이는 겨우 열 대여섯 살의 소년으로 그 제자의 수가 지나의 대성(大聖) 공구와 겨루게 되었고,
 
이밖에 현상(賢相).양장(良將).충신.용사가 모두 이 가운데서 났다(삼국사기에 인용한 金大問의 설)고 하였으나, 그 동안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고 성식(聲息)이 아주 끊어져서, 국선 이전에 국선의 개조(開祖)도 볼 수 없고, 국선 이후 국선의 후계자도 볼 수 없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갔으니, 이것이 어찌 신라의 신괴록이 아니랴?
 
고기(古記)에서 왕검이 국선의 개조임을 찾으매, 고구려사에서 조의(衣)선인(先人) 등을 알 것이며, 고려사에서 이지백(李知白)이, “선랑(仙郞)을 중흥시키자.”고 한 쟁론과, 예종(睿宗)이, “사선(四仙)의 유적을 영광스럽게 하라.”하고, 의종(毅宗)이, “국선의 복로(伏路)를 다시 열라.”고 한 조서를 보매, 고려에까지도 오히려 국선의 유통(遺統)이 있었음을 볼지니 이것을 계통을 찾는 방법의 한 예로 든다.
 
2) 그 회통(會通)을 구할 것이다.
 
회통이란 전후.피차의 관계를 유취한다는 말이니, 구사에도 회통이라는 명칭은 있으나 오직 예지(禮志), 과목지(科目志)-회통의 방법이 완미하지 못하지만-이 밖에는 이 명칭을 응용한 곳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사건이든지 홀연히 모였다가 홀연히 흩어지는 구름과도 같고, 돌연히 불다가도 그치는 선풍(돌개바람)과도 같아서 도저히 붙잡을 수가 없다.
 
고려사 묘청전(妙淸傳)을 보면, 묘청이 일개 서경(西京:평양)의 한 중으로서, “평양에 도읍을 옮기고 금국(金國)을 치자.” 하매, 일시에 군왕 이하 많은 시민의 동의를 얻어서 기세가 혁혁하다가, 마침내 평양에 웅거하여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인종(仁宗)더러 대위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협박장 식의 상소를 올렸는데 반대당의 수령인 한낱 유생 김부식이 왕사(王師)로서 와서 문죄(問罪)하니, 묘청이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하고 부하에게 죽었으므로 묘청을 미친 자라고 한 사평(史評)도 있지마는, 당시의 묘청을 그처럼 신앙한 이가 많았음은 무슨 까닭이며, 묘청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패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고려사의 세기(世紀)와 열전(列傳)을 참고하여 보면 태조 왕건이 거란(契丹:뒤의遼)과 국교를 끊고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하다가 거사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 후예 되는 임금 광종(光宗).숙종(肅宗) 같은 이는 다 태조의 유지를 성취하려 하였고, 신하에도 이지백(李知白).곽원(郭元).왕가도(王可道) 같은 이들이 열렬하게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다 실행치 못하고 윤관(尹瓘)이 군신이 한마음으로 두만강 이북을 경영하려는 창끝을 약간 시험하다가 너무 많아서 그 이미 얻은 땅의 구성(九城)까지 금(金)의 태조에게 다시 돌려주니 이는 당시 무사들이 천고에 한되는 일로 여겼다.
 
그 뒤에 금의 태조가 요(遼)를 토멸하고 지나 북방을 차지하여 황제를 일컫고 천하를 노려 보았다. 금은 원래 백두산 동북의 여진(女眞)부락으로서 우리에게 복종하던 노민(奴民:高麗圖經에, “여진은 종으로 고려를 섬긴다(女眞奴奉高麗).”고 하였고, 고려사에 실린 金景組의 국서에도, “여진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삼았다(女眞以高麗爲父母之邦)”고 하였음)이었는데 갑자기 강성해져서 형제의 위치로 바뀌었다(고려사에 실린 金景祖의 국서에, 형 大金皇帝가 글을 아우 고려왕에게 보낸다(兄大金皇帝致致書于弟高麗國王).“고 하였음). 이에 나라 사람들 가운데 좀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모두 국치에 눈물을 뿌렸다.
 
묘청은 이러한 틈을 타 고려 초엽부터 전해오는 ”평양에 도읍을 정하면 36나라가 조공온다(定都平壤三十六國來朝).“하는 도참(圖讖)을 가지고 부르짖으니, 사대주의의 편벽된 소견을 가진 김부식 등 몇몇 사람 이외에는 모두 묘청에게 호응하여, 대문호인 정지상(鄭知常)이며, 무장(武將)인 최봉심(崔逢深)이며, 문무가 겸전(兼全)한 윤언이(尹彦?:尹瓘의 아들)등 이 모두 북벌론을 주창함으로써 묘청의 세력이 일시에 전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묘청의 하는 짓이 미치고 망령되어 평양에서 왕명도 없이 나라 이름을 고치고 온 조정을 협박하니, 이에 정지상은 묘청의 행동을 반대하였고, 윤언이는 도리어 주의가 다른 김부식과 함께 묘청 토벌의 선봉이 되었다. 이것이 묘청이 실패한 원인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출정하기 전에 정지상을 죽이고 묘청을 토벌한 후에 또 윤언이를 내쫓아서 북벌론자의 뿌리를 소탕해버렸다.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이로 하여 조선이 쇠약해질 터전이 잡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참고하여 보면, 묘청의 성패한 원인과 그 패한 뒤에 생긴 결과가 본명하지 않은가. 이로써 회통(會通)을 구하는 한 예를 보인 것이다.
 
3)심습(心習)을 제거할 것이다.
 
영국 해군성(海軍省)의, “세계 철갑선(鐵甲船)의 비조(鼻組)는 1592년경의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이다.”라고 한 보고가 영국사에 실려 있는데, 일본인들은 모두 당시 일본 배가 철갑(鐵甲)이요, 이순신의 것은 철갑이 아니라면서 그 보고는 틀린 것이라고 반박하고, 조선의 집필자들은 이것을 과장하기 위하여 그 보고를 그대로 인용해서 조선과 일본 어느 나라가 먼저 철갑선을 창조하였는가를 논쟁하게 되었다.
 
일본인의 말은 아무런 뚜렷한 증거가 없는 위안(僞案)이라 족히 따질 것이 없거니와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설명한 귀선(龜船)의 제도를 보건대, 배는 널빤지로 꾸미고 철판으로 꾸민 것이 아닌 듯 하니, 이순신을 장갑선의 비조라고 함은 옳으나, 철갑선의 비조라 함은 옳지 않을 것이다. 철갑선의 창조자라 함이 보다 더 명예가 되지마는, 창조하지 않은 것을 창조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진화(進化)계급을 어지럽힐 뿐이다. 가령 모호한 기록 중에서 부여의 어떤 학자가 물리학을 발명하였다든가, 고려의 어떤 명장(名匠)이 증기선을 창조하였다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신용치 못한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옳지 않기 때문이겠다.
 
4) 본색(本色)을 보전할 것이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국선(國仙) 구산(瞿山)이 사냥을 나가서 어린 짐승이나 새끼 가진 짐승을 함부로 낭자하게 죽였는데, 주막의 주인이 저녁 밥상에 자기의 다리살을 베어놓고, 공(公)은 어진 이가 아니니 사람의 고기도 먹어보라고 하였다.”고 한말이 있다. 이는 대개 신라 당시에는 영량(永郞).술랑(述郞) 등의 학설이 사회에 침투되어 국선 오계(五戒)의 한 가지인, ‘살상은 골라서 하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이 다 실행하던 때이므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사람의 고기도 먹으리라는 반감으로 주막의 주인이 이렇게 참혹하게 무안을 준 것이다. 그것이 수십자에 지나지 않는 기록이지마는, 신라 화랑사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고구려사 미천왕기(美川王記)에,
“봉상왕(烽上王)이 그 아우 돌고(固)가 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여 죽이니,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美川王의 이름)이 겁이나서 달아나 수실촌(水室村) 사람인 음모(陰牟:당시 부호의 이름인듯)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음모가 밤마다 기와와 돌을 집옆의 늪에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하라 하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하였다.
을불은 견디다 못 하여 1년 만에 달아나서 동촌(東村)사람 재모(再牟)와 소금장수가 되어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 짐을 강동(江東) 사수촌사람의 집에 부렸다.
한 노파가 외상으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한 말쯤 주었더니, 그 후에 또 달라고 하므로 이를 거절하였는데 노파는 앙심을 품고 몰래 짚신 한 켤레를 소금 짐 속에 묻었다가 을불이 길을 떠난 뒤에 쫓아와서 도둑으로 몰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발하여 짚신 한 켤레의 값으로 소금 한 짐을 빼앗고 매질까지 한 뒤에 놓아 보냈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도 불과 몇 줄 안 되는 기록이지마는 또한 봉상왕 시대의 부호의 포학과 시민과 수령의 사악한 행위를 그린 약도이니, 그 시대 풍속사의 일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고려사는 아무 맛 없는, ‘어느 임금이 즉위하였다’, ‘어느 대신이 죽었다.’ 하는 등의 연월이나 적고, 보기좋은 ‘어느 나라 어느 나라가 사신을 보내왔다.’ 하는 등의 사실이나 적은 것들이요, 위의 3), 4) 두 절과 같이 시대의 본색을 그린 글은 보기 어렵다. 이는 유교도의 춘추필법과 외교주의가 편견을 낳아서, 전해내려오는 고기를 제멋대로 고쳐서 그 시대의 사상을 흐리게 한 것이다.
 
옛날 서양의 어느 역사가가 이웃집에서 두 사람이 다투는 말을 역력히 다 들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 남들이 말하는 그 두 사람의 시비는 자기가 들은 것과는 전연 달랐다. 이에, ‘옛날부터의 역사가 모두 이 두 사람의 시비와 같이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자기가 저술한 역사책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탐보원이 들어다가 보고하고 편집원이 다시 교정하고 그러고도 잘못이 생기는 예가 있는 신문.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의 신문이 이러하다 하면 을의 신문은 저렇하다 하여, 어느 것을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으니,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학가가 자기의 좋아하고 싫어하는대로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으랴?
그리고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 우(禑)의 목을 베고 그 자리를 빼앗을 때, 후세 사람이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죄를 나무랄까 하여 백방으로 우는 원래 왕씨의 왕통을 잇지 못할 요망한 중 신돈의 천첩 반야의 소생이라 하고, 경효왕(敬孝王:慕愍王?)이 신돈의 집에서 어떻게 데려왔다느니, 반야가 우를 궁인 한씨소생으로 정하는 것을 보고 통한하여 울부짖어 우니 궁문도 그 원통함을 알고 무너졌다느니 하여 아무쪼록 우가 신씨임을 교묘하게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는 오히려 송도 유신들이 있어 굴 속에 숨어서까지 우의 무함당함을 절규하였으므로, 오늘날 사학가들이 비록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오히려 우가 왕씨요, 신씨가 아님을 믿는 이도 있다. 또 왕건이 궁예의 장군으로 궁예의 은총을 받아 대병을 맡게 되자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어 객사케 하고 또한 신하로서 임금을 죽였다는 죄를 싫어하여 전력을 집중하여 궁예를 죽여 마땅한 죄를 구하였으니,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인데, 왕이 그를 5월5일에 났음을 미워하여 버렸더니, 궁예가 이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서 도둑을 쳐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어느 절에서 벽에 그려진 헌안왕의 상까지 칼로 쳤다.'고 하였고,
 
다시 확실한 증거를 만들고자, ‘궁예가 나자 헌안왕이 엄명을 내려 궁예를 죽이라고 하여 궁녀가 누각위에서 아래로 내던졌는데, 유모가 누락 아래에서 받다가 손가락이 잘못 아이의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그 유모가 데려다가 비밀히 길렀는데, 10살이 되자 장난이 몹시 심하므로 유모가 울면서 말하기를, 왕이 너를 버리신 것은 내가 차마 버려둘 수 없어서 데려다 길렀는데, 이제 네가 이렇듯 미치광이 짓을 하니 만일 남이 알면 너와 내가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궁예가 이 말을 듣고 울며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그 후에 신라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군사를 모아 큰 뜻을 성취하리라 하고 도둑의 괴수 양길에게로 가서 후한 대우를 받고 군사를 나누어 동으로 나아가서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가령 위의 말이 다 참말이라면 이는 궁예와 유모의 평생 비밀일 것인데, 그것을 듣고 전한 자가 누구이며, 가령 궁예가 왕이 되어 신라의 형법(刑法)밖에 있게 된 뒤에 스스로 발표한 말이라 하면, 그 말한 날짜나 곳은 적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하여 데리고 말할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부모를 부모라 함은 나를 낳은 은혜를 위함인데, 만일 나를 낳음이 없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있는 부모야 무슨 부모이겠는가?
 
궁예가 헌안왕의 아들이라 하더라도 만일 사관(史官)의 말과 같이 그가 세상에 나오던 날 죽으라고 누각 위에서 내던진 날로부터 아버지라는 명의가 귾어졌으니, 궁예가 헌안왕의 몸에 칼질을 하여도 아비를 죽인 죄가 될 것 없고 신라의 서울과 능(陵)을 유린한다 할지라도 조상을 모욕한 논란이 될 것 없거늘 하물며 왕의 그림을 치고 문란한 신라를 혁명하려 함이 무슨 큰 죄나 논란이 되랴마는 고대의 좁은 논리관으로는 그 두 가지 일, 헌안왕의 초상과 신라에 대한 불공(不恭)만 하여도 궁예는 죽어도 죄가 남을 것이니, 죽어도 죄가 남을 궁예를 죽이는 데야 무엇이 안 되었으랴? 이에 왕건은 살아서 고려 통치권을 가지고 죽어서도 태조문성(太祖文聖)의 존시(尊諡)를 받아도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고려 사관이 구태여 세달사(世達寺)의 한 비렁뱅이 중이던 궁예를 가져다가 고귀한 신라 왕궁의 왕자로 만듦인가 한다.
 
제왕이라 역적이라 함은 성패의 별명일 뿐이요, 정론이라,사론이라 함은 많고 적은 차이일 뿐인데, 게다가 보고 들은 데 잘못이 있고, 쓰는 사람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생각이 섞이지 않았는가?
 
사실도 흘러가는 물과 같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이미 간 사실을 그리는 역사를 저술하는 이도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그 써놓은 것을 가지고 앉아서 시비곡직을 가리려는 역사를 읽는 이가 더욱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가? 아니다, 역사는 개인을 표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사회를 표준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의 성이 왕(王)인가? 신(辛)인가를 조사하여 바로잡느니보다 다만 당시의 지나에 대하여 선전(宣戰)하고,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 함이 이루어질 일인가? 실패할 일인가, 성패간에 그 결과가 이로울까 해로울까부터 정한 후에 이를 주장한 우와 반대한 이성계의 시비를 말함이 옳을 것이고, 궁예의 성이 궁(弓)인가 김(金)인가를 변론하는 것보다, 신라이래 숭상하던 불교를 개혁하여 조선에 새 불교를 성립시키려 함이 궁예 패망의 도화선이니, 만일 왕건이 아니더면 궁예의 그 계획이 성취되었을까? 성취되었다면, 그 결과를 확인한 뒤에야 이를 계획하던 궁예와 대적하던 왕건의 옳고 그름을 말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개인으로부터 사회를 만드느냐? 사회로부터 개인을 만드느냐?’ 이는 고대로부터 역사학자들이 논쟁하는 문제다. 이조 전반기의 사상계는 세종대왕의 사상으로 지배되고, 후반기의 사상계는 퇴계산인(李滉) 사상으로 지배되었다.
 
그러면 이조 5백 년 동안의 사회는 세종,퇴계가 만든 것이 아닌가? 신라 후기로부터 고려 중엽까지의 6백 년 동안은 영랑,원효가 각기 당시 사상계의 한방면을 차지하여 영랑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원효의 사상이 물러나고 원효의 사상이 성해지는 때에는 영랑의 사상이 물러나서 일진일퇴 일왕일래로 갈아들어 사상계의 패왕이 되었으니, 6백 년 동안의 사회는 그 두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가?
 
백제의 정치 제도는 온조대왕이 마련하여 고이대왕(古爾大王)이 마무리하였고, 발해의 정치 제도는 고제(高帝)가 마련하여 선제(宣帝)가 마무리하였으니, 만일 온조왕과 고이왕이 아니었더라면 백제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고제와 선제가 아니었더라면 발해의 정치가 어떤 형식으로 되었을는지 또한 모를 일이다.
 
삼경(三京)오도(五都)의 제도가 왕검과 부루(夫婁)로부터 수천 년 동안 정치의 모형이 되었으니, 이로써 보면 한 사람의 위대한 인격자의 손끝에서 사회라는 것이 되어지는 것이고, 사회의 자주성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다시 한편으로 살펴보자. 고려 말엽에 불교의 부패가 극도에 이르러 원효종은 이미 쇠미해지고 임제종(臨濟宗)에도 또한 뛰어난 이가 없고, 다만 10만 명의 반승회(飯僧會:중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임)와 백만 명의 팔관회(八關會:천신에 제사 지내어 나라와 왕실의 태평을 빌고 온갖 놀이도 즐기는 모임)로 제물과 곡식을 낭비하여 국민이 머리를 앓을 뿐 아니라, 사회는 이미 불교 밖에서 새로운 생명을 찾기에 급급하였다. 이에 안유(安裕).우탁(禹倬)이며 정몽주가 유교의 목탁을 들었고. 그 밑에서 세종이 나고 퇴계가 났으니, 그러면 세종의 세종됨과 퇴계의 퇴계됨이 세종이나 퇴계 그 자신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함이 옳지 않을까?
 
삼국 말엽, 그 수백 년 동안에 찬란히 발달한 문학과 미술의 영향을 받아 소도천군(蘇塗天君)의 미신이나 율종소승(律宗小乘)의 하품(下品)불교로는 영계(靈界)의 위안을 줄 수가 없어서 사회가 그 새 생명을 찾은 지가 또한 오래이므로 신라의 진흥대왕이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다 여러 교종 통일의 새로운 안을 내놓으려 한 일이 있었다. 그 때에 영랑이 도령(徒領)의 노래를 부르고 원효가 화엄(華嚴)의 자리를 배풀었으며, 최치원이 유도에서 불도로 불도에서 선도로 바꾸는 신통한 재주를 보이니 이에 각계가 갈체하여 이 세 사람을 맞았다. 그러니 영랑이나 원효나 최치원이 다 본인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요, 사회가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이에 따라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원효는 신라 그때에 났기에 원효가 된 것이요, 퇴계는 이조 그때에 났기에 퇴계가 된 것이다. 만일 그들이 희랍 철학의 강단에 났더라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되지 않았을까? 프랑스나 독일의 현대에 났더라면 베르그송이나 오이켄이 되지 않았을까? 나파륜(拿破崙:나폴레옹)의 뛰어난 재주와 큰 계략으로도 도포 입고 대학(大學)읽던 시절에 도산사원(陶山書院)부근에 태어났더라면, 물러가 송시열이 되거나 나아가 홍경래가 되었을 뿐이 아니었을까?
 
크고 작은 분량으로 그와 같이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면목이 아주 달라졌을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논조가 여기에까지 미쳤으나, 개인은 사회라는 불무에서 이루어질 뿐이니, 개인의 자주성은 어디에 있는가? 개인도 자주성이 없고 사회도 자주성이 없으면 역사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것을 볼 때 개인이나 사회의 자주성은 없으나 환경과 시대를 따라서 자주성이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조선이며 만주며 토이기며 헝거리가 3천 년 전에는 다 뚜렷한 한 혈족이었다. 그러나 혹은 아시아에 그대로 있고 혹은 유럽으로 옮겨가서 대륙의 동서가 달라지고, 혹은 반도 혹은 대륙으로 혹은 사막 혹은 비옥한 땅으로, 혹은 온대 혹은 한대로 분포하여 땅의 멀고 가까움이 다르고, 목축이나 농업, 침략이나 보수 등으로 생활과 풍속이 해와 달을 지내는 대로 더욱 간격이 생겨서 각자의 자주성을 가졌다. 이것이 곧 환경을 따라 성립한 민족성이라 하는 것이다.
 
같은 조선으로도 이조 시대가 고려 시대와 다르고, 고려 시대는 또 동북국(東北國:渤海.滅貊등)과 다르고, 동북시대는 삼국과 같지 아니하며, 왕검. 부루 시대와도 같지 아니하다. 멀면 1천년의 전후가 다르고, 가까우면 1백 년의 전후가 다르니, 지금부터 이후로는 문명의 진보가 더욱 빨라서, 10년 이전이 홍황(鴻荒:오랜 옛날)이 되고, 1년 이전이 먼 옛날이 될는지 모르는 일이니, 이것이 이른바 시대를 따라 성립하는 사회성(社會性)이다.
 
원효와 퇴계가 시대와 경우를 바꾸어 났다 하면, 원효는 유자(儒者)가 되고 퇴계는 불자(佛者)가 되었을는지 모르는 일이거니와, 도양(跳揚)발달한 원효더러 주자(朱子)의 규구(規矩)만 삼가 지키는 퇴계가 되라 한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충실하고 용졸(庸拙)한 퇴계더러 불가의 별종(別宗)을 수립하는 원효가 되라 한다면 이도 또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니, 왜냐하면 시대와 경우가 인물을 낳는 원료 됨과 같으나 인물이 시대와 환경을 이용하는 능력은 다르기 때문이다.
 
민족도 개인과 같이 어느 곳 어느 때에 갑이라는 민족이 가서 그 성적이 어떠하였으니, 을이라는 민족이 갔더라도 마찬가지 성적을 이루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 대개 개인이나 민족이 두 가지 개성이 있으니, 그 하나는 항성(恒性)이요, 다른 하나는 변성(變性)이다, 항성은 제1의 자주성이요, 변성은 제2의 자주성이니 항성이 많고 변성이 적으면 환경에 순응치 못하여 절멸(絶滅)할 것이요, 변성이 많고 항성이 적으면 나은 자에게 정복당하여 패할 것이니, 늘 역사를 회고하여 두 가지 자주성의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평균하게 하여, 그 생명이 천지와 한 가지로 장구하게 하려면 오직 민족적 반성에 의하는 수밖에 없다.
 
5) 역사의 개조에 대한 두 가지 결론
 
역사의 개조에 대한 나의 우견으로 이상에 의하여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지었으니,
①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② 사회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이,“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 하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行義)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주(尊周: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한 구석에서 정통이 다 모엇하는 것이냐.”하며 공자. 주자의 역사 필법을 반대하니,
 
그의 제자 신극성(辛克成)등은, “이는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의 부식(?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 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이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 자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허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모두 불 속에 들어갔다.
이는 곳①에 속하는 것이다.
 
최치원이 지나 유학생으로 떠나갈 때 그의 아버지가, “10년이 되어도 과거를 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여 하나의 한문 졸업생이 되는 것을 바랐을 뿐이었고, 최치원이 돌아와서, “무협(巫峽)첩첩한 봉우리를 헤치고 중원에 들어가 급제하여 벼슬에 놀기3년, 금의로 동국에 돌아왔다.” 하고 노래하여 또한 스스로 하나의 한문 졸업생 되었음을 자랑하였다.
 
그 사상은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에만 있는 줄로 알고 신라에 있는 줄은 모르며, 학식은 유서(儒書)나 불전(佛典)을 관통하였으나, 본국의 고기(古記) 한 편도 보지 못하였으니, 그 주의는 조선을 가져다가 순 지나화하려는 것뿐이고, 그 예술은 청천(靑天)을 백일(白日)을 대하며, 황화(黃化)로 녹초(綠草)를 대하는 사륙문(四六文:네 글자와 여섯 글자를 기본으로 하는 한문 문체의 하나)에 능할 뿐이었다.
 
당시 영랑과 원효의 두 파가 다 노후하여 사회의 중심이 되는 힘을 잃고, 새 인물에 대한 기대가 마치 굶주린 사람이 밥을 구함과 같았으니 그래서 대선생의 칭호가 한낱 한문 졸업생에게로 돌아가고 다음에는 천추(千秋)의 혈식(血食:나라에서 제사를 지냄)까지 그에게 바쳐, 고려에 들어와서는 영랑과 원효 두 파의 자리를 마주 대하게 되었다. ‘때를 만나면 더벅머리도 성공한다.’ 함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니, 이는 ②에 속하는 것이다.
 
어찌 학계뿐이랴. 모든 사업이 그러하니, 기휜(箕萱)과 양길(梁吉)도 한때에 크게 펼처짐은 신라 말엽의 안정되지 않은 판국에서 일어남이요, 이징옥(李澄玉)이나 홍경래가 거연히 패망함이 이조의 안정되어 있는 판국에서 그리 된 것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말하기를, “나도 중국의 육조(六朝:後漢이 망한 뒤에 일어난 吳.東晋.宋.濟.梁.陳의 여섯 왕조)나 오계(五季:後五代, 곧 唐과 宋 사이 53년 동안에 일어났다 사라진(後粱.後唐.後晋.後漢.後周의 다섯왕조)를 만났더라면 돌림천자는 얻어 했겠다.”고 하였다.
 
임백호 같은 시인에게 육조.오계의 유유(劉裕:南宋의 武帝).주전충(朱全忠:後粱의 太祖) 같은 도둑의 괴수와 같이 되어 돌림천자나마 돌아오게 할 위력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지나의 천자를 경영하려면 한. 당의 치세보다 육조.오계의 난세가 더 쉬울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의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이것을 부연하고 이것을 확장할 뿐이니, 인물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미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버리므로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가 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안정되지 않은 사회의 인물은 반드시 창조적.혁명적 남아라야 할 듯하나,
 
어떤 때에는 꼭 그렇지도 아니하여, 작은 칼로 잔재주를 부리는 하품의 재주꾼(최치원같은)으로서 외국인의 입을 흉내내서 말하고 웃고 노래함이 그럴듯하여 사람들을 움직일 만하면 거연히 인물의 지위를 얻기도 하나,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恒性)을 파묻어버리고,변성(變性)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요, 인물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제 2 편 < 수두 > 시대 =
 
==제 1 장 고대 총==
 
1. 조선 민족의 구별
 
고대 아시아 동부의 종족이 1,우랄 어족 2, 지나 어족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는데 , 한족 ( 漢族 ) ·묘족 ( 苗族 ) ·요족 ( 요族 ) 등은 후자에 속 한 것이고 , 조선족 ·흉노족 등은 전자에 속한 것이다 . 조선족이 분화 ( 分化 ) 하여 조선 ·선비 ·여진 ·몽고 ·퉁구스 등 종족이 되고 , 흉노족 이 이동하고 분산하여 돌궐 ( 突厥 : 지금의 新疆族 ) ·흉아리 ( 匈牙利 : 헝가리 ) ·토이기 ( 土耳其 : 터키 ) ·분란 ( 芬蘭 : 핀란드 ) 족이 되었다 .
 
지금 몽고 ·만주 ·토이기 ·조선의 네 종족 사이에 왕왕 같은 말과 물건 이름이 있음은 몽고 ( 大元 ) 제국 시대에 피차의 관계가 많아서 받은 영향도 있으려니와 , 고사를 참고하면 조선이나 흉노 사이에도 관명 ( 官名 ) ·지명 ( 地名 ) ·인명 ( 人名 ) 의 같은 것이 많으니 , 상고 ( 上古 ) 에 있어서 한 어족이었던 분명한 증명이다 .
 
2. 조선족의 東來
 
인류의 발원지에 대해 1, 파미르 고원 2, 몽고 사막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 아직 그 시비가 확정되지 못하였으나 , 우리의 옛 말로서 참고 하면 왕성 ( 王姓 ) 을 ‘해 ( 解 ) ’라 함은 태양에서 뜻을 취한 것이고 , 왕호 ( 王號 ) 를 ‘불구래 ( 弗矩內 ) ’라 함은 태양의 빛에서 뜻을 취한 것이며 ,
 
천국 ( 天國 ) 을 환국 ( 桓國 ) 이라 함은 광명 ( 光明 ) 에서 뜻을 취한 것이니 , 대개 조선족이 최초에 서방 파미르 고원 혹은 몽고 등지에서 광명의 본원지를 찾아 동방으로 나와 불함산 ( 不咸山 )-- 지금의 백두산을 해와 달이 드나드는 곳 , 곧 광명신 ( 光明神 ) 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알아 그 부근의 토지를 ‘조선 ( 朝蘇 ) ’이라 일컬으니 , 조선도 옛날의 광명 이라는 뜻이다 . 조선은 후세에 이두자 ( 更讀字 ) 로 조선이라 썼다 .
 
3. 조선족이 분포한 ‘아리라’
 
우리의 옛 말에 오리를 ‘아리’라 하고 , 강을 ‘라’라고 하였다 . 압록 강·대동강 ·두만강 ·한강 ·낙동강과 만주 길림성 ( 吉林省 ) 의 송화강 ( 松花江 ), 봉천성 ( 奉天省 ) 의 요하 ( 遼河 ), 영평부 ( 永平府 ) 의 난하 ( 난河 ) 등을 이두자로 쓴 옛 이름을 찾아보면 , 아례강 ( 阿禮江 ) ·아리수 ( 阿利水 ) ·욱리하 ( 郁利河 ) ·오열하 ( 烏列河 ) ·열수 ( 列水 ) ·무열하 ( 武列河 ) ·압자하 ( 鴨子河 ) 라 하였으니 , 아례 ·아리 ·욱리 ·오열 ·열 ·무열은 다 ‘아리’의 음역 ( 音譯 ) 이고 , 압자 ( 옛날에 오리를 아리라 함 ) 은 ‘아리’의 의역 ( 意譯 ) 이요 , 강 ·하·수는 다 ‘라’의 의역이다 . 위의 여러 큰 강들은 다 조선족의 조상이 지은 이름이다 .
 
조선 고대의 문화는 거의 이 큰 강들의 강변에서 발생하였으므로 삼 국지에도 , ‘고구려는 큰 물을 의지하여 나를 만들어 산다 ( 句麗作國依 大水而居 ). ’라고 하였다 .’나라’는 옛 말의 ’라라’이니 , 라라는 본래 진도 ( 津渡 ), 곧 ‘나루’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국가를 가리키는 명사가 된 것이다 .
 
고대 지명의 끝에 붙은 나 ( 那 ) ·라 ( 羅 ) ·노 ( 如 ) ·루 ( 婁 ) ·누 ( 누 ) · 양 ( 良 ) ·양 ( 浪 ) ·양 ( 穰) ·양 ( 壞 ) ·강 ( 岡 ) ·양 ( 陽 ) ·아 ( 牙 ) ·야 (야) 동은 다 ‘라’의 음역이고 , 천 ( 川 ) ·원 ( 原 ) ·경 ( 京 ) ·국 ( 國 ) 등은 거의 ‘라’의 의역이며 , 두 가지가 다 ‘라라’의 축역 ( 縮譯 ) 이니 , 강이 어렵 ( 漁獵 ) 자원이 되고 , 배를 교통하는 편의가 있으므로 상고 문명이 거의 강변에서 발원한 것이다.
 
4.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夫餘
 
원시 인민이 강의 물고기와 산과들의 짐승과 풀 ·나무의 열매 같은 여러 가지 천산물 ( 天産物 ) 로 양식을 삼다가 인구가 불어남에 따라 그 천산물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하여 목축업과 농업이 발생하였다 . 농업은 대개 불의 힘을 이용하여 초목을 태워서 들을 개척한 뒤에 발생하였으므로 옛 말에 야지 ( 野地 ) 를 ‘불’이라 하였다 .
 
불의 이용의 발견은 한갓 농업을 유발하였을 뿐 아니라 불로 굴을 태워서 맹수도 죽이고 , 그 가죽을 녹여 옷과 신을 만들고 , 진흙을 구 워 성벽을 쌓고 , 쇠를 달구어 기구를 만들고 그 밖에 생활의 일용에 모든 편의를 주어 사람의 지혜를 개발하였으므로 , 근세의 일반 사학가들이 고대 불의 이용의 발견을 곧 근세의 증기 ·전기의 발견과 같은 사회 생활의 대혁명을 일으킨 대 발견이라고 한다 . 동서를 물론하고 고대의 인민들이 다 불의 발견을 기념하여 그리스의 화신 ( 火神 ) ·프 러시아의 화교 ( 火敎 ) ·지나의 수인씨 ( 燧人氏 ) 등 전설이 있고 , 우리 조선에는 더욱 불을 사랑하여 사람의 이름을 ‘불’이라 지은 것이 많으니 , 부루 ·품리 ( 稟離 ) 등이 다 불의 음역이요 , 불이라 지은 지명도 적지 아니하여 , 부여 ( 夫餘 ) ·부리 ( 夫里 ) ·불내 ( 不耐 ) ·불이 ( 不而 ) ·국내 ( 國內 ) ·불 ( 弗 ) ·벌 ( 伐 ) ·발 ( 發 ) 등이 다 불의 음역이다 .
 
고기 ( 古記 ), 고사기 ( 古事記 ) 등을 참고하면 조선 문화의 원시 ‘수 두’의 발원이 거의 송화강가의 합이번 ( 哈爾賓 : 만주 하얼빈 ) 부근인데 , 합이빈은 그 고대의 부여이다 . 그러니 송화강은 조선족이 처음으로 근거한 ‘아리라’요 , 합이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야지 ( 野地 )곧 ‘불’이요 , 그 이외의 모든 부여 ·부리동은 연대를 따라 차례로 개척된 야지 --불이다 .
 
==제 2 장 단군 왕검(檀君王儉)의 건국==
 
1. 조선 최초의 일반 신앙의 단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족이 각 ‘아리라’에 분포하여 각 ‘불’을 개척하는 동시에 한 커다란 공동의 선앙이 유행하였으니 이른바 단군 이다 .
 
원시 인민은 우주의 형상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지식이 없었으므로 가상적으로 우주에 신이 있다 정하고 모든 것을 신의 조작으로 돌려 신을 숭배하는 동시에 각기 천연 환경을 따라 혹은 모든 물건을 다 신 으로 인정하여 이를 예배하고 , 혹은 모든 물건 위에 한 신이 있다 하여 이를 예배하였으니 , 이것이 이른바 종교요 원시 시대 각 민족 사회에 각기 고유한 종교를 가진 실재 ( 實在 ) 이다 .
 
조선족은 우주의 광명 ( 제 1 장 참고 ) 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 태백산 ( 太白山 ) 의 숲을 광명신 ( 光明神 ) 이 살고 있는 곳으로 믿었는데 , 그 뒤 인구가 번식하여 각지에 분포하매 각기 그 살고 있는 곳에 숲을 길러서 태백산의 숲을 모상 ( 模像 ) 하고 , 그 숲을 이름하여 ‘수두’라 하였으 니 , 수두란 신단 ( 神檀 ) 이라는 뜻이다 . 해마다 5 월과 10 월에 백성들이 수두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는데 , 한사람을 뽑아제주 ( 祭主 ) 를 삼아서 수두의 중앙에 앉허고 하느님 천신 ( 天神 ) 이라 이름하여 여러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수두의 주위에 금줄을 매어 한인 ( 閔人 ) 의 출업을 금하였다 .
 
전쟁이나 그 밖의 큰 일이 있으면 비록 5 월과 10 월의 제사 지낼 시기가 아니라도 소를 잡아 수두에 제사 지내고 , 소의 굽으로 그 앞에서 길흉을 점쳤는데 , 굽이 떨어지면 흉하다 하고 붙어 있으면 길하다고 하였으니 , 이것은 지나의 팔패 (八卦 ) 음획 양획 ( 陰劃陽劃 ) 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
 
강적이 침입하면 수두 소속의 부락들이 연합하여서 이를 방어하고 가장 공이 많은 부락의 수두를 첫째로 받들어 신수두’라 이름하니 , ‘신’은 최고 최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그리고 그 밖의 각 수두는 그 아래 딸려 있었으니 , 삼한사 ( 三韓史 ) 에 보이는 ‘소도 ( 蘇塗 ) ’는 ‘수두’ 의 음역이고 , ‘신소도 ( 臣蘇途 ) ’는 ‘신수두’의 음역이요 , 진단구변국 도 ( 震檀九變局道 ) 에 보이는 ‘진단 ( 震檀 ) ’의 진은 ‘신’의 음역이고 , 단 ( 檀 ) 은 수두의 의역이요 , 단군은 곧 ‘수두 하느님’의 의역이다 . 수두 는 작은 단〔小檀 〕이요 , 신수두는 큰 단〔大檀〕이니 , 수두에 단군이 있었으니까 수두의 단군은 작은 단군〔小檀 君〕이요 , 신수두의 단군은 큰 단군〔大檀 君〕이다 .
 
2. 큰 단군 , 왕검이 창작한 신설(神說)
 
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 “환군제석 ( 桓君帝釋 ) 이 삼위 ·태백 ( 三危 ·太白 : 둘 다 산 이름 ) 을 내려다보고 널리 인간 세상에 이익을 끼칠 만 한 곳이라 하여 , 아들 웅 ( 雄 ) 을 보내 천부 ( 天符 ) 와 인 ( 印 ) 세 개를 가 지고 가 다스리게 하였다 . 웅은 무리 3 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 神 檀 樹 ) 아래에 내려와서 신시 ( 神市 ) 라 일컬으니 , 이른바 환웅천왕 ( 桓雄天王 ) 이다 . 웅은 풍백 ( 風伯 ) ·우사 ( 雨師 ) ·운사 ( 雲師 ) 를 지휘하여 곡식〔穀〕 ·명 ( 命 ) ·병 ( 病 ) ·형벌 ( 刑罰 ) ·선 ( 善 ) ·악 ( 惡 ) 둥 세상 의 360 여 가지 일을 다스렸다 . 이때 곰 한 마리 범 한 마리가 있어 한 굴 속에 살면서 사람이 되기를 빌었다 . 웅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 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백날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양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범은 그대로 하지 못하고 , 곰은 삼칠일 동안 그대로 하여 여자가 되었다 . 그러나 결혼할 남자가 없으므로 매양 신 단을 향해 아이 가지기를 원하므로 웅이 남자의 몸으로 가화 ( 假化 ) 하여 이와 결혼해서 단군 왕겸 ( 檀君王檢 ) 을 낳았다 .”고 하였다 .
 
그러나 ‘제석 ( 帝釋 ) ’이니 ‘웅 ( 雄 ) ’이니 ‘천부 ( 天符 ) ’니 하는 따위가 거의 불전 ( 佛典 ) 에서 나온 명사이고 또 삼국사에 초기의 사회에도 여성을 매우 존중하였다고 했는데 , 이제 남자는 신의 화신이고 , 여자는 짐승의 화신이라 하여 너무 여성을 낮게 쳤으니 , 나는 이것이 순수한 조선 고유의 신화가아니요 , 불교 수입 이후에 불교도의 점철 ( 點綴 ) 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그러나 평양 ( 平壞 ) 의 옛 이름이 왕검성 ( 王檢城 ) 이요 , 신라의 선사 ( 仙史 ) 에도 , “평양은 선인 왕검의 집 ( 平壞者仙人 王檢之宅) ”이라고 했 고 , 위서 ( 魏書 ) 에도 , “지난 2 천 년 전 단군 왕검이라는 이가 있어 아사달 ( 阿斯達 ) 에 나라를 세우고 ,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乃往二千載 前 有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하였으니 , 그러면 조선 고대에 단군 왕검을 종교의 교조로 받들어왔음은 사실이고 , 왕검을 이두자의 읽는 법으로 해독하면 ‘임금’이 될 것이니 , 대개 ‘임금’이라 이름한 사람이 당시에 유행한 ‘수두’의 미신을 이용하여 태백산의 ‘수 두’에 출현하여 스스로 상제 ( 上帝 ) 의 화신이라 일컫고 조선을 건국하였으므로 , 이를 기념하여 역대 제왕의 칭호를 ‘임금’이라 하고 , 역대 서울의 명칭도 ‘임금’이라고 한 것이다 .
 
‘선인왕검 ( 仙人王檢 ) ’이라 함은 삼국 시대에 수두 교도의 단체를 ‘선배’라 일걷고 , 선배를 이두로 선인 ( 仙人 ) 혹은 ‘선인 ( 先人 ) ’이라 기록한 것이고 선사 ( 仙史 ) 는 곧 왕검의 설교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다 . 후세에 유 ·불 양교가 서로 왕성해지면서 ‘수두’의 교가 쇠퇴하고 , 선사도 없어져서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 지나의 고서 굴원 ( 屆原 ) 의 초사 ( 楚辭 ), 사마천 ( 司馬遷 ) 의 사기 ( 史記 ),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에 여기저기 보이는 것으로써 오히려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
 
사기의 봉선서 ( 封禪書 ) 의 삼일신 ( 三一神 ) 이란 천일 ( 天一 ) ·지일 ( 地 一) ·태일 ( 太一 ) 인데 , 그 중에 태일이 가장 존귀하고 , 오제 ( 五帝 : 동 서남북중 다섯 방향의 신 ) 는 태일의 보좌 ( 補佐 ) 라 하였으며 , 진시황 본기 ( 奏始皇本紀 ) 의 천황·지황 ( 地皇 ) ·태황 ( 泰皇 ) 가운데 태황이 가 창 존귀하다고 하였으며 , 초사에는 동황태일 ( 東皇太一 ) 이란 노래 이름이 있고 , 한서예문지 ( 漢書藝文志 ) 에는 태일잡자 ( 太一雜子 ) 라는 책 이름이 있으니 , 삼일신 ( 三一神 ) 과 삼황 ( 三皇 ) 은 곧 고기에 있는 삼신 ( 三神 ) ·삼성 ( 三聖 ) 등의 유이다 .
 
삼일신을 다시 우리의 옛 말로 번역하면 천일 ( 天一 ) 은 ‘말한’이니 상제 ( 上帝 ) 를 의미하는 것이요 , 태일은 ‘신한’이니 신은 최고 최상이 라는 말 , 신한은 곧 , ‘하늘 위 하늘 아래에 하나이고 둘이 없다 ( 天上 天下獨一無二 ). ’는 뜻이다 . 말한·불한·신한을 이두로 마한 ( 馬韓 ) · 변한 ( 弁韓 ) ·진한 ( 辰韓 ) 이라 적은 것이고 , 오제 ( 五帝 ) 는 돗가·개 가·소가·말가·신가 등 다섯 ‘가’ 곧 오방신 ( 五方神 ) 을 가리킨 것 이다 .
 
차례로 말하면 말한이 불한을 낳고 불한이 신한을 낳았으나 권위( 權位 ) 로 말하면 .신한이 신계 ( 神界 ) 와 인계 ( 人界 ) 의 대권 ( 大權 ) 을 모 두 차지하여 말한과 불한보다 고귀하므로 삼일 중에서 태일이 가장 고 귀하다 하는 것이고 , ‘오제 ( 곧 5 가 ) 는 곧 태일의 보좌이다 . ’라 하였으 니 , 신가가 다섯 가의 수위 ( 首位 ) 임은 ‘신’의 어의 ( 語義 ) 로 말미암아 명백하니 , 거북〔龜〕의 삼신 ·오제는 곧 왕검이 만든 전설이다 .
 
3. ‘신수두’의 삼경·오부(三京 ·五部)제도
 
대단군 ( 大樓君 ) 왕검이 이에 삼신 ( 크神 ) ·오제 ( 五帝 ) 의 신설 ( 神說 ) 로 우주의 조직을 설명하고 , 그 신설에 의하여 인간 세상 일반의 제도 를 정하매 , 신한·말한·불한·의 세한을 세워 대단군이 신한이 되니 신한은 곧 대왕 ( 王 ) 이요 , 말한과 불한은 곧 좌우의 두 부왕 ( 副王 ) 으 로 신한을 보좌한다〉
 
삼경을 두어 세 한이 나뉘어 머무르고 세 한의 아래에 돗가·개 가·소가·말가·신가의 다섯 가를 두고 전국을 동 ·서 ·남 ·북 ·중 다섯 부 ( 部 ) 에 나누어 다섯 가가 중앙의 다섯 국무대신이 되는 동시 에 , 다섯 부를 나누어 다스리는 다섯 지방장관이 되고 , 신가는 다섯 가의 우두머리가 된다 .
 
전시 ( 戰時 ) 에는 다섯 부의 인민으로써 중 ( 中 ) ·전 ( 前 ) ·후 ( 後 ) ·좌( 左 ) ·우 ( 右 ) 의 오군 ( 五軍 ) 을 조직하여 신가가 중군대원수 ( 中軍大元 師 ) 가 되고 , 그 밖의 네 가가 전 ·후 ·좌 ·우의 네 원수가 되어 출전 한다 .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는 윷판이 곧 다섯 가의 출진도 ( 出陣圖 ) 이니 ,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 그렴 가운데 도 ( 刀 ) ·개 ( 介 ) ·걸 ( 乞 ) ·유 ( 兪 ) ·모 ( 毛 ) 는 곧 이두 글자로 쓴 다섯 가의 칭호이니 , 도는 돗가요 , 개는 개가요 , 유는 옛 음에 소’니 소가요 , 모는 말가요 , 걸은 신가 니 , 걸로 신가를 기록함은 그 의의를 알 수 없으나 부여 시대에 견사 ( 犬使 ) 라는 관명 ( 官名 ) 이 있으니 , 대개 견사는 신가의 별칭이므로 결 은 곧 견사의 견 ( 犬 ) 을 의역한 것이 아닌가 한다 .
 
돗〔猪〕 ·개〔犬〕 ·소〔牛〕 ·말 〔馬〕 등 가축들로 오방 ( 五方 ) 의 신의 이름을 삼는 동시에 , 이로써 벼슬 이름을 삼은 수렵 시대가 지나고 농목 ( 農收 ) 시대가 된 증적 ( 證跡 ) 이다 .
 
==제 3 장 수두의 홍포(弘布)와문화의 발달==
 
1.부루의 서행(夫婁의西行)
 
고기 ( 古記 ) 에 이르기를 ,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 ( 夏禹 ) 를 도산 ( 塗山 ) 에서 만났다 .”고 하였고 , 또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 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 “당요 ( 庸寶 ) 때에 9 년 동안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 우 ( 禹 ) 가 8 년 동안이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 남악 ( 南嶽) ·형산 ( 衝山 ) 에 이르러 흰 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 ( 玄夷 ) 의 창수사자 ( 蒼水使者 ) 라 일걷고 , 우에게 말 하기를 , 구산 ( 九山 ) 동남쪽의 도산 ( 逢山 ) 에 신서 ( 神書 ) 가 있으니 , 석달동안재계 ( 齋戒 ) 하고 그것을 꺼내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 ( 五行通水 ) 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 이에 주신 ( 州愼 ) 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 ( 井田 ) 을 제정하고 , 율도량형 ( 律度量衡) 의 제도를 세웠다 .”고 하 였다 .
 
현이 ( 玄夷 ) 는 당시 조선의 동 ·남 ·서 ·북 ·중 오부를 남 ( 藍 ) ·적( 未 ) ·백 ( 白 ) ·현 ( 玄 : 黑 ) ·황 ( 黃 ) 으로 별칭했는데 , 북부가 곧 현부 ( 玄部 ) 이니 지나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 ( 玄夷 ) 라고 한 것이요 , 창수 ( 蒼水 ) 는 곧 창수 ( 擔水 ) 이고 , 주신 ( 州愼 ) ·숙신 ( 肅愼 ) ·직신 ( 稷愼 ) 혹은 식신 ( 息愼 ) 으로 번역되었으니 ,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의 창수사자이니 , 이때 지나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 데 , 단군 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 ( 滄海 使者 ) 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를 보고 , 삼선오제교 ( 三神五帝敎 ) 의 일부분인 오행설 ( 五行說 : 水火金土木 ) 을 전하고 치수 ( 治水 ) 의 방 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 ( 禹 ) 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지나에 전포 ( 傳布 ) 하였으며 , 정전과 율도 량형도 또한 지나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 그 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 . ’고 하였는가 ? 신성 ( 神聖 ) 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함이니 , 이는 상고에 흔히 있는 일이다 .
 
2. 기자(箕子)의 전래
 
하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으로 왕이 되어 국호를 하 ( 夏 ) 라 하고 , ‘수 두’의 교를 흉내내어 도산에서 받은 신서 ( 神書 ) 를 홍범구주 ( 洪範九疇 )라 이름하여 신봉하였는데 하가 수백 년 만에 망하고 상 ( 商 ) 이 뒤를 이어 또한 수백 년만에 망하고 주 ( 周 ) 가 일어나서는 주무왕 ( 周武王 ) 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은 ( 股 ) 의 왕족 기자 ( 箕子 ) 가 새로 홍범구주를 지어 무왕과 변론하고 조선으로 도망하니 , 지금 상서 ( 尙書 ) 의 홍범 ( 洪範 ) 이 곧 그것이다 .
 
홍범편 ( 洪範篇 ) 가운데 , “초일 ( 初一 ) 은 오행 ( 五行 ) 이요 , 차이 ( 次 二 ) 는 경용오사 ( 敬用五事 ) 요 , 차삼 ( 次三 ) 은 농용팔정 ( 農用八政 ) 이요 , 차사 ( 次四 ) 는 협용오기 ( 協用五紀 ) 요 , 차오 ( 次五 ) 는 건용황극 ( 建用皇極 ) 이요 , 차육 ( 次六 ) 은 예용삼덕 (乂 用三德 ) 이요 , 차칠 ( 次七 ) 은 명용계의 ( 明用稽疑 ) 요 , 차팔 ( 次八 ) 은 염용서정 ( 念用庶徵 ) 이요 , 차구 ( 次 九 ) 는 향용오복 ( 嚮用五福 ) ·위용육극 ( 威用六極 ) 이다 . 첫째 오행은 일은 수 ( 水 ), 이는 화 ( 火 ), 삼은 목 ( 木 ), 사는 금 ( 金 ), 오는 토 ( 土 ) 요 , 둘째 오사 ( 五事 ) 는 일은 모 ( 貌 ), 이는 언 ( 言 ), 삼은 시 ( 視 ), 사는 청( 聽 ), 오는 사 ( 思 ) 요 , 셋째 팔정 ( 八政 ) 은 일은 식 ( 食 ), 이는 화 ( 貨 ), 삼은사 ( 祝 ), 사는사공 ( 司空 ), 오는사도 ( 司徒 ), 육은사구 ( 司寇 ), 칠은 빈 ( 賓 ), 팔은 사 ( 師 ) 요 , 넷째 오기 ( 五紀 ) 는 일은 세 ( 歲 ), 이는 월 ( 月 ), 삼은 일 ( 日 ), 사는 성진 ( 星辰 ), 오는 역수 ( 歷數 ) 요 , 다섯째 황극 ( 皇極 ) 은 황건기유극 ( 皇建其有極 ), 여섯째 삼덕 ( 三德、 ) 은 일은 정직 ( 正直 ), 이는 강극 ( 剛克 ), 삼은 유극 ( 柔克 ) 이요 , 일곱째 계의 ( 稽疑 ) 는 택건립복서인 ( 擇建立卜筮人 ) 이요 , 여덟째 서징 ( 庶徵 ) 은 우 ( 雨 ) ·양 ( 暘 ) ·오 ( 오 ) ·한 ( 寒 ) ·풍 ( 風 ) 이요 , 아홉째 오복 ( 五福 ) 은 일은 수 ( 壽 ), 이는부 ( 富 ), 삼은강녕 ( 康寧 ), 사는 유호덕 ( 攸好德 ), 오는 고종명 ( 考終命 ) 이요 , 육극 ( 六極 ) 은 일은 흉단절 (凶短折 ), 이는 질 ( 疾 ), 삼 은 우 ( 憂 ), 사는 빈 ( 貧 ), 오는 악 ( 惡 ), 육은 약 ( 弱 ) 이다 .”라고 하였는 테 , 이러한 문구는 곧도산 ( 塗山 ) ·신서 ( 神書 ) 의 본문이고 , 그 나머지 는 기자 ( 箕子 ) 가 연술 ( 演述 ) 한 것이다 . 천내석우 홍범구주 ( 天乃錫禹 洪範 九疇) 는 곧 기자가 단군을 가리켜 천 ( 天 ) 이라 하고 단군으로 부터 전수받은 것을 천이 주었다고 함이다 .
 
이는 ‘수두’의 교의에 단군을 하늘의 대표로 보기 때문이고 ,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상 ( 商 ) 이 주 ( 周 ) 에게 망하는 동시에 상의 국교 인 ‘수두’교가 압박을 받으므로 고국을 버리고 수두교의 조국으로 돌 아온 것이다 .
 
한서 ( 漢書 ) 에 거북이 문자를 등에 지고 낙수 ( 洛水 ) 에서 나왔으므로 우 ( 禹 ) 가 홍범 ( 洪範 ) 을 연술하였다 했지마는 , 역 ( 易 ) 의 계사 ( 擊辭 ) 에 ,“황하 ( 黃河 ) 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 ( 洛水 ) 에서 글씨가 나와 , 성인이 이것을 본받았다 ( 河出畵 洛出書 聖人則之 ). ”라 하여 분명히 하도 ( 河圖 ) 낙서 ( 洛書 ) 가 다 역괘 ( 易卦) 지은 원인임을 기록하였는데 , 이제 낙수 거북의 글씨로 인하여 홍범을 지었다고 함은 어찌 망령된 증명이 아니랴 ( 위 일절은 淸儒 毛奇齡의 설을 채택함 ).
 
오월춘추에 의거하여 홍범 오행이 조선에서 전해간 것으로 믿음이 옳고 , 또 초사 ( 楚辭 ) 에 의거하여 동황태일 ( 東皇太一 ) 곧 단군 왕검을 제사하는 풍속이 호북 ( 湖北 ) ·절강 ( 浙江 ) 등지에 많이 유행하였음을 보면 , 대개 하우가 형산에서는 하늘에 제사하고 , 도산에서는 부루에 게서 신서를 받은 곳이므로 가장 ‘수두교’가 유행한 지방이 된 것 이다 .
 
3. 흉노의 휴도(休屠)
 
‘수두교’가 지나 각지에 퍼졌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 사기 , 흉노전에 의거하면 , 흉노도 조선과 같이 5 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 는데 , 천제를 형상한동인 ( 銅人 ) 을‘휴도 ( 休屠 ) 라 불렀으니 , 곧 ‘수두’ 의 번역이요 , 휴도의 제사를 맡은 사람을 휴도왕 ( 休掉王 ) 이라하여 또 한 단군이라는 뜻과 비슷하며 , 휴도에 삼룡 ( 三龍 ) 을 모시니 , 용은 또 한 신을 가리킨 것이다 . 삼룡은 곧 삼신이니 , 흉노족도 또한 ‘수두교’ 를 수입하였음이 의심없다 .
 
고대의 종교와 정치가 구별이 없어 종교상의 제사장이 곧 정치상의 원수이며 , 종교가 전파되는 곳이 정치상의 속지 ( 屬地 ) 이니 , 대단군 이래 조선의 교화가 지나 ·흉노 등의 각 민족에 널리 퍼졌음으로 언하 여 정치상 강역 ( 疆域 ) 이 확대되었음을 볼 것이다 .
 
4. 漢字의 수입과 이두문(吏讀文)의 창작
 
조선 상고에 조선글이 있었다는 사람이 있으나 , 이는 아무 증거가 없는 말이니 최초에 쓴 것이 한자일 것은 틀림없다 .
 
한자가 어느 때 수입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 대개 땅이 지나와 이어 져 있어서 두 민족은 기록 이전부터 교통이 있었을 것이니 , 한자의 수입도 기록 이전의 일이었음이 명백하다 .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도산에서 우에게 금간옥첩 ( 金簡玉牒 ) 의 글을 가르쳐주었는데 , 이 글 자는 곧 한자였을 것이니 , 조선이 한자를 익혔음이 이미 오래 되었음 을 볼 것이다 .
 
그 뒤에 한자의 음 혹은 뜻을 빌려 이두문을 만들었는데 , 이두문은 곧 조선 고대의 국문이라고 할 수 있다 . 고대에는 ‘국서 ( 國書 ) ’ , ‘향 서 ( 獅書 ) ’ 혹은 ‘가명 ( 假名 ) ’이라 일걷고 고려조 이후에 비로소 이두문이라 일컬었으나 , 이제 통속 ( 通俗 ) 의 편의를 위하여 고대의 것까지 이두문이라 하거니와 , 흔히 이두문을 신라 설총 ( 韓聽 ) 이 지은 것이라 고하지마는 설총 이전의 옛 비석 ( 진흥왕 巡狩碑 따위 ) 에도 가끔 이두 문으로 적은 시가 ( 詩歌 ) 가 있으니 , 설총 이전에 만든 것임이 의심 없다 .
 
그러면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일까 ? 임금을 왕검이라 번역하여 왕 ( 王 ) 은 그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임’으로 읽고 검 ( 檢 ) 은 그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전부를 취하여 ‘금’으로 읽으며 , ‘펴라’를 낙랑 ( 樂浪 ) 이라 번역하여 낙 ( 樂 ) 은 글자의 뜻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펴’로 읽고 , 랑 ( 浪 ) 은 글자의 음에서 소리의 처음 절반을 취하여 ‘라’로 읽은 것이 곧 이두문의 시초니 , 적어도 이제부 터 3천 년 전 --기원 전 10 세기경에 이두문이 제작된 것 같다 .
 
그림〔圖繪〕이 진보하여 글자 文字가 되고 형자 ( 形字 ) 가 진보하여 음자 ( 音字 ) 가 됨은 인류 문화사의 통칙이니 , 형자인 한자를 가져다가 음자인 이두문을 만듬은 페니키아 인이 이집트 형자의 편방 ( 偏 傍 : 글 자의 한 부분 ) 을 따라서 알파벳을 만듬과 같은 예로 볼 만한 문자사상 의 한 진보라 할 것이요 , 후세의 거란문〔契丹文〕 ·여진문 ( 女直文 ) 이 모두 이두문을 모방한 것이므로 인류 문화에 도움을 준 공덕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 다만 그 모자라고 유감스러운 점은 a.자음 모음을 구별하지 못함이니 , 예컨대 ‘가’는 자금 ‘ㄱ’과 모음‘ ㅏ ’의 음철 ( 音綴 ) 이요 , ‘라’는 자음 ‘ ㄹ’과 모음‘ ㅏ ’의 음철인데 , 이를 구별치 아니하여 한 음철이 한 글자가 되어 ‘가’를 ‘加’ 혹‘家’로 쓰고 , ‘라’ 는 ‘良’ 혹은 ‘羅’로 써서 음자 ( 音字 ) 의 수효가 너무 많으며 , b. 음표 ( 音標 ) 를 확정하지 못함이니 , 예컨대 백 ( 白 ) 자 한 자를 ‘백활 ( 白活 ) ’ 이라 쓰고는 ‘발’로 읽고 , ‘위백제 ( 爲白齊 ) ’라고 쓰고는 ‘살’로 읽으 며 , ‘이 ( 矣 ) ’자 한 자를 ‘의신 ( 矣身 ) ’이라 쓰고는 ‘의’로 읽고 , ‘교의 ( 敎矣) ’라 쓰고는 ‘대’로 읽어 아무런 준직 ( 準則 ) 이 없으며 , c. 상음 하몽 ( 上音下蒙 ) 의 이치를 획청 ( 劃淸 ) 하지 않음이니 , 예컨대 ‘달이’를 ‘월이 ( 月伊 ) ’라 쓰지 않고 ‘윌리 ( 月利 ) ’라 써서 ‘달이’로 읽으며 , ‘바람이’를 ‘풍이 ( 風伊 ) ’라 쓰지 않고 ‘풍미 ( 風味 ) ’라 써서 ‘바람이’로 읽어서 , 언어의 근간 ( 根幹 ) 과 지엽 ( 技葉 ) 이 서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
 
그러므로 이두문으로 적은 시나 글은 물론이요 , 인명이나 지명이나 관명 같은 것도 오직 같은 시대 , 같은 지방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의하여 서로 해득할 뿐이고 , 다른 시대 , 다른 지방사람은 입을 벌릴 수가 없으니 , 문자가 사회 진화에 도움된다 함은 저 사실과 사상을 이에 전 달해주기 때문인데 , 이제 이 같은 곤란이 있어 갑 시대 , 갑지방의 기록을 을 시대 , 을 지방에서 해득하지 못한다면 어찌 문화 발전의 이기 (利器 ) 가 될 수 있으랴 ? 그런데 옛날 사람이 이두문을 쓴 지 1 천여 년 동안에 그 미비한 점을 개정하지 못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
 
당시에는 늘 적국의 외환 ( 外愚 ) 으로 인해서 정치상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일체 글을 적국 ( 敵國 )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이 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실한 글을 쓴 것이고 삼조선 (三朝鮮) 이 무너지자 여러 나라가 병립하매 한조선 안에도 서로의 적국이 많아서 한 명사나 한 동사나 한 토거리를 더욱 가지각색으로 써서 동부여 사람이 북부여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며 , 신라 사람이 고구려의 이두문을 알지 못하였으니 , 그러므로 이두문의 그같이 불통일하고 불확정한 방식 으로 되었음이 학적 재지 ( 才智 ) 가 부족하여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정치상의 장애로 말미암은 것이다 .
 
5.신지(神誌)의 역사
 
전사 ( 前史 ) 에 단군 때에 신지 ( 神誌 ) 라는 사람이 있어 사관 ( 史官 ) 이 됐다 하였으나 , 사실은 신지는 곧 ‘신치’의 번역이요 , ‘신치’는 ‘신크 치’의 약자요 , ‘신크치’는 ‘신가’의 별칭이요 , ‘신가’는 앞에서 말한 다섯 가의 수석 ( 首席 ) 대신이니 , ‘신치’ 곧 ‘신가’가 늘 ‘신수두’의 제일 ( 祭日 ) 에 우주 창조의 신화와 영웅 ·용사 등이 행한 일과 예언 , 유 의 , 경계하는 이야기를 노래하여 역대로 예가 되었는데 , 후세에 문사 ( 文士 ) 들이 그 노래를 거두어 한 책을 만들고 , 그 벼슬 이름 ‘신치’로 책 이름을 한 것이니 , 이른바 신지가 곧 그것이다 . 이제 신지의 원서가 없어져서 그 가치의 어떠함을 알 수 없으나 , 그 책 이름이 이두문 으로 지은 것이니 , 그 내용의 기사도 이두문으로 기재한 것일 것이다 .
 
고려사 김위제전 ( 金謂 傳 ) 에 신지비사 ( 神誌秘詞 ) 의 ‘여칭추극기 ( 如秤錘極器 ) ·칭간부소량 ( 秤幹扶蘇樑 ) ·추자오덕지 ( 錘者五德地 ) . 극기백아강 ( 極器百牙岡 ) ·조항칠십국 ( 朝降七十國 ) ·뇌덕호선정 ( 賴德 護神精 ) ·수미균평위 ( 首尾均平位 ) ·흥방정태평 ( 興邦定太平 ) ·약폐삼 유지 ( 若廢三 諭地 ) ·왕업유쇠경 ( 王業有衰傾) ’의 1O 구를 싣고 , 부소량 ( 扶蘇樑 ) 은 지금의 송도 ( 松都 ), 오덕지 ( 五德地 ) 는 지금의 한양 , 백아 강 ( 百牙岡) 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였다 . 그러나 송도 ·한양 ·평양은 고려의 삼경 ( 三京 ) 이고 , 단군의 삼경은 하나는 지금의 합이빈이니 , 고사에 부소갑 ( 扶蘇岬) ·비서갑 ( 非西岬 ) 혹은 아사달 ( 阿斯達 ) 로 기록 한 것이고 , 하나는 지금의 해성 ( 海城 ) ·개평 ( 蓋平 ) 등지이니 , 고사에 오덕지 ( 五德地 ) ·오비지 ( 五備地 ) ·안지홀 ( 安地忽 ) 혹은 안시성 ( 安市 城 ) 으로 기록한 것이고 , 또 하나는 지금의 평양이니 , 고사에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혹은 평양 ( 平穰 ) 으로 기록한 것 이다 .
 
이두문 읽는 법에 부소 ( 扶蘇 ) ·비서 ( 非西 ) ·아사 ( 阿斯 ) 는 ‘ 아 스’로 읽고 , 오덕 ( 五德 ) ·오비 ( 五備 ) ·안지 ( 安地 ) 안시 ( 安市 ) 는 ‘아리’로 읽고 , 백아강 ( 百牙岡 ) ·낙랑 ( 樂浪 ) ·평원 ( 平原 ) ·평양 ( 平穰) 은 ‘펴 라’로 읽는 것이니 , 위의 비사 1O 구는 이두문의 신지를 한시로 번역한 것이다 .
 
대개 삼국 말엽에 한학 ( 漢學 ) 이 흥성하여 한학자들이 전에 이두문 으로 기록된 시와 글을 한시와 한문으로 번역함을 시도하였으니 ( 최치 원의 鄕藥雜詠 향약잡영 따위 ), 신지의 한시 번역도 그 한 예이다 . 어찌하여 비 사 ( 秘詞 ) 라 일컬었는가 ? 고대의 역사 종류를 성서 ( 聖書 ) 라 하여 대 궐 안에 비장해두어 민간에 유행함을 허락하지 아니한 때문이다 . 신 지와 신지비사 따위가 어찌하여 하나도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였는가 ?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 왕궁의 비장이 불에 타고 신라의 것이 겨우 전하여 고려조까지도 왕궁에 한 벌이 있어 이조에 와서 는 이를 서운관 ( 書雲觀 ) 에 두었었는데 , 역시 이조 임진왜란의 불에 타 버린 것이다 .
 
6. 조선의 전성시대
 
기원전 10 세기 경으로 부터 그 뒤 약 5,6 백 년 동안은 대 단군 조선의 전성시대이다 . 수문비고 ( 修文備考 ) 에 고죽국 ( 孤竹國 : 지금의 永平府 ) 은 조선종 ( 朝鮮種 ) 이라 하였는데 백이 ( 伯夷 ) ·숙제 ( 寂齊 ) 형제는 고 죽국의 왕자로서 왕위 상속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지나의 주 ( 周 : 지 금의 陝西省 ) 를 우람하다가 주무왕 ( 周武王 ) 에게 격렬히 비전론 ( 非戰論 ) 을 주장하였으며 , 고대 지나의 강회 ( 江淮 ) 지역에 조선인이 많이 옮겨가 살아서 숱한 소왕국을 건설하였는데 , 그 중 서어왕 ( 徐偃王 ) 이 가장 두드러지게 일어나서 인의 ( 仁義 ) 를 행하여 지나국으로부터 조공 을 받았다 .
 
이상은 조선의 본국과 정치적 관계가 없는 식민 ( 殖民 ) 중의 한두 호 걸의 행동이거니와 , 기원전 5,6 세기경에 불리지 ( 弗離支 ) 라는 사람이 조선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직예 ( 直匠) ·산서 ( 山西 ) ·산동 ( 山東 ) 등지를 정복하고 , 대현 ( 代縣 ) 부근에 한나라를 세워 자기의 이름으로 나라 이름을 삼아 불리지국 ( 弗離支國 ) 이라 하니 , 주서 ( 周書 ) 의 ‘불령 지 ( 弗令支 ) ’와 사기의 ‘이지 ( 離支 ) ’가 다 불리지국을 가리킨 것이다 . 불리지는 또한 그가 정복한 지방을 그 성 ‘불 ( 弗 ) ’의 음으로써 지명을 지었으니 , 요서 ( 遺西 ) 의 ‘비여 (肥如)나 산동 ( 山東 ) 의 ‘부역 ( 鳧繹 ) ’이 나 , 산서 ( 山西 ) 의 ‘비이 ( 卑耳 : 管子라는 책에 보임 ) ’가 ‘불’의 번역 이다 .
 
상고에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가 다 땅이 연이어져 있었고 , 발해는 하나의 큰 호수였는데 , 발해의 발 ( 渤 ) 도 음이 ‘불’이고 , 또한 불리지가 준 이름이니 , 불리지가 산동을 정복한 뒤에 조선의 검은 원숭이 〔 〕 ·담비〔짧〕 ·여우〔孤〕 ·삵〔狸〕 등의 털가죽옷과 비단 등 직물을 수출하여 발해를 중심으로 하여 상업이 크게 떨쳤었다 .
 
7. 조선의 쇠약
 
기원전 7 세기 말에 조선이 고죽 ( 孤竹 ) 을 의거해서 불리지국 ( 弗離支國 ) 과 합하여 연 ( 戀 ) 과 진 ( 晉) 을 치니 , 연과 진이 제 ( 齊 ) 에 구원을 청 하였다 . 이때 제의 환공 ( 桓公 ) 이 어진 재상 관중 ( 管仲 ) 과 이름난 장수 성부 ( 城父 ) 를 얻어 지나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 조 ( 曺 ) ·위 ( 衛 ) ·허 ( 許 ) ·노 ( 魯 ) 등 10 여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연을 구원하고자 태행산 ( 太行山 ) 을 넘어 불리지국을 격파하고 , 연을 지나서 고죽과 싸워 이겼으므로 조선은 후퇴하여 불리지의 옛 땅을 다 잃었다 .
 
지나인이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보전 ( 保全 ) 함을 얻었으므로 공구씨 (孔丘氏 : 孔子 ) 가 관중의 공을 칭찬하여 , “관중이 피발 ( 披髮 ) 좌임 ( 左 ) 을 징계하였다 .”고 하였는데 , 피발은 조선의 머리 땋은 것을 가리킨 것이고 , 좌임은 조선의 왼쪽으로 여미는 옷깃을 가리킨 것이다 .
 
《관자 ( 管子 ) 》에 대략 이 전쟁의 결과를 적었는데 , a) 지나의 문자가 부과 ( 浮誇: 부화하고 과장함 ) 가 많으며 , 이러한 대외 전쟁에 더욱 심하고 , b)《관자 》 는 관중의 저작이 아니라 전국시대 ( 戰國時代 ) 말엽에 어떤 사람이 지은 것이므로 , 직접 눈으로 본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다만 그 대체만 말하였다 . 그러나 이 전쟁에서 조선이 서북 지방을 잃어 오랫동안 쇠약에 빠져 었었던 것은 가릴 수 없는 사실이다 .
 
8. 단군 연대의 고증
 
전사 ( 前史 ) 에는 단군 왕검 1220 년 후에 기자 ( 箕子 ) 의 왕조선을 기재 하였으나 , 기자는 기자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 기원전 323 년경 에 이르러 그 자손이 비로소 불조선왕이 되었으니 , 이는 제 2 편 제 2 장 에 기술하겠거니와 , 이제 사실 ( 史實 ) 을 따라 기자조선을 삭제한다 . 또 전사에 단군이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구월산 ( 九月山 ) 으로 옮기고 , 그 자손에 이르러서는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고 하지마는 이도 또한 근거없는 망령된 말이다 .
 
무릇 구월산에 도읍을 옮겼다 함은 고구려사에 초록 ( 抄綠 ) 한 위서( 魏書 ) 의 ,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檀君王檢 立國阿斯達 國號朝鮮 ). ”고 한 구절로 인하여 , 아사 ( 阿斯 ) 를 음이 아흡〔九〕에 가깝고 , 달 ( 達 ) 은 음이 달〔月〕과 같다 하여 마침내 구월산을 아사달이라고 하는 것이지마는 , 구월산은 황해도 문화현 ( 文化縣 : 지금의 信川那 ) 에 있는 산인데 , 문화현의 옛 이름이 궁홀 ( 弓忽 ) 이요 , 궁홀은 이두문의 ‘궁골’로 읽을 것이니 , 궁골에 있는 산이므로 궁골산이라 한 것으로서 , 마치 개홀 ( 皆忽 : 音 개골 ) 에 있는 산 이므로 , 개골산〔金剛山〕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언데 , 어찌 궁골산을 구월산이라 와전하였으며 , 구월산을 아홉달산으로 억지 해석을 하여 아사달산 ( 阿斯達山 ) 으로 망령되게 증거하니 ,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 니랴.
 
아사달은 이두문에 l ‘ 아스대’로 읽는 옛 말 소나무를 ‘ 아 스’라 하고 , 산을 대라 한 것이니 , 지금 합이빈 ( 哈爾濱 ) 의 완달산 ( 完達山 ) 이 곧 아 사달산이다 . 이곳은 북부여의 옛 땅이니 , 왕검의 상경 ( 上京 ) 이요 , 지 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의 고허 ( 古噓) 인 ‘아리티’가 중경 ( 中京 ) 이요 , 지금의 평양 ‘펴라’가 단군의 남경 ( 南京 ) 이니 , 왕검 이래로 형편을 따라 삼경 중 하나를 골라 서울로 한 것이다 . 그러나 그 본 도읍은 북부여의 땅 ‘ 아스대’인데 , 이제 그 자손이 기자를 피하여 북부여로 갔다 함이 어디에 닿은 소리인가 ? 그러므로 이 설을 채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
 
또 전사에는 단군의 원년 ( 元年 ) 무진 ( 戊辰 ) 을 당요 ( 唐堯 ) 25 년이라 하였지마는 , 지나도 주소 ( 周召) 공화 ( 共和 : 기원전 841 년 ) 이후에야 연대를 기록하게 되었으니 어찌 당요 25 년인지를 알수 있으랴 ? 그러므로 단군 기원을 확실하게 지적하지 아니한다 . 고기 ( 古記 ) 에 단군의 나이에 대해 1,048 세 혹은 1,908세l 등의 설이 있으나 , 이는 신라 말엽에 ‘신수두’를 진단 ( 震檀) 으로 , 환국 ( 桓國 ) 을 환인 ( 桓因 ) 으로 고쳐서 불전 ( 佛典 ) 의 말로 조선 고사를 농락한 불교도들이 , 인도 고전의 3 만 년 , 3 천 년 , 5 백 년 등 장수를 했다는 불조 ( 佛祖 ) 의 기록을 본받아서 만든 말이라 , 한 마디의 반박도 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
 
이조 초에 권근 ( 權互 ) 이 , “대를 물려 얼마나 되었던가 , 해를 거듭하 여 천 년이 지났네 ( 傳世不知幾 歷年會過千 ). ”라는 시를 지어 이를 번안하였는데 , 이는 다만 불가 ( 佛家 ) 의 허황한 말을 바로잡았다 할 수 있으나 , 또한 단군의 시말 ( 始末 ) 을 모르는 말이다 .
 
옛날 2 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으니 , 고구려 건국 전 2천 년이 단군 왕겸의 원년이요 , 삼국 중엽까지도 ‘신 수두’를 받들어 ,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주권 ( 半主權 ) 을 가져 그 처음 에서 끝까지 2 천 몇백 년이 될 것인데 , 어찌 1 천 년만으로 헤아리랴 . 그러나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대왕과 대단군이 함께 서서 교정 ( 敎政 ) 분립의 싹이 시작되었으므로 본편은 이것으로 끝맺는다 .
 
=제 3 편 삼조선(三朝鮮)분립시대 =
 
==제 1 장 삼조선의 총론==
 
1. 삼조선 명칭의 유래
 
종래의 각 역사책에 삼조선 분립의 사실이 빠졌을 뿐 아니라 , 삼조 선이라는 명사까지도 단군 ·기자·위만의 세 왕조라고 억지 해석을 하였다 .
 
삼조선은 신·불 ·만 삼한의 분립을 말한 것이니 , `신한'은 대왕 ( 大王 ) 이요 , 불·말 두 한은 부왕 ( 副王 ) 이다 . 삼한이 삼경 ( 三京 ) 에 나뉘어 있어 조선을 통치하였음은 이미 제 1 편에서 말하였거니와 , 삼조선은 곧 삼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곳은 신조선이라 하고 , 말한이 통치하는 곳은 말조선이라 하고 , 불한이 통치하는 곳은 불조선이라 하였다 . 신·말·불 삼한은 이두문으로 진한 ( 辰韓 ) ·변한 ( 弁韓 ) 이라 기록된 것이고 , 신·말 ·불 삼조선은 이두문으로 진 ( 眞 ) · 막 ( 莫 ) · 번 ( 番 ) 삼조선이라 기록된 것이다 . 똑같은 신·말·불의 음역 ( 音譯 ) 이 어찌하여 하나는 진·마·변이라 하고 또 하나는 진·막·번이라 하여 같지 아니한가 ? 이는 남북의 이두문의 용자 ( 用字 ) 가 달랐기 때문이거나 혹은 지나인의 한자 음역이 조선의 이두문의 용자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 조선에는 고전 ( 古典 ) 이 거의 다 없어졌으므로 삼조선의 유래를 찾을 길이 없으나 , 지나사 ( 支那史 ) 에는 왕왕 보인다 . 사기 ( 史記 ),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한 것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한 것이고 , 주 ( 註 ) 에 “번 ( 番 ) 은 일에 막 ( 莫 ) 으로도 쓴다 ( 畵一作莫 ). ”고 하였는데 , 번자를 막자로 대신하면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 된다 . 진막조선은 신·말 두 조선을 함께 말함이니 , `진막번조선 ( 眞莫番朝鮮 ) ' 혹은 그대로 써서 신·말·불 삼조선을 다 말하지 않고 , 혹은 막자를 빼어버리고 `진번조선 ( 眞番朝鮮 ) '이라 하거나 혹은 번자를 빼어버리고 `진막조선 ( 眞莫朝鮮 ) '이라 기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 이는 지나인이 외국의 인 명·지명 등 명사를 쓸 때에 매양 문예 ( 文藝 ) 의 평순 ( 平順 ) 을 위하여 축자 ( 縮字)를 쓰는 버릇으로 그렇게 쓴 것이다 .
 
목천자전 ( 穆天子傳 ) 의 한 ( 韓 ) 은 신한을 가리킨 것이요 , 관자 ( 管子 ) 의 `발조선 ( 發朝鮮 ) '과 대대례 ( 大戴禮 ) 의 `발식신 ( 發息愼) '은 불조선 을 가리킨 것이요 , 오직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기이외에는 다른 책에 보이는 것이 없다 .
 
2. 삼조선의 위치와 범위
 
한 ( 韓 ) 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왕이란 뜻이니 , 삼한이란 삼조선을 나누어 통치한 세 대왕을 말함이고 , 삼조선이란 삼한 곧 세 왕이 나누어 통치한 세 지방임은 물론이어니와 , 그 세 도읍의 위치와강역 ( 疆域 ) 의 범위도 기술할 수 있을까 ?
 
삼한의 도읍은 1) 제 1 편에 말한 `아스라' ----지금의 합이빈 , 2) `알티' ----지금의 개평현 ( 蓋平縣 ) 동북쪽 안시 ( 安市 ) 옛 터 , 3) `펴 라' ----지금의 평양 , 이 셋이다 . 삼조선이 분립하기 전에는 신한이 온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이 되고 , 불·말 두 한이 그 부왕 ( 副王 ) 이었 으므로 , 신한이 `아스라'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말·불 두 한은 하나 는 `펴라'에 , 하나는 `알티'에 머무르고 , 신한이 `알티' 혹 `펴라'에 머물러 있을 때는 불·말 두 한은 또한 다른 두 서울을 나누어 지키다가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는 삼한이 각기 삼경 ( 三京 ) 의 하나를 차지하고 , 조선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때의 삼한이 차지한 부분을 상고하건대 , 만주원류고 ( 滿洲原流考 )에 , “한서지리지에 요동의 번한현 ( 番汗縣 ), 지금의 개평 등지가 변한 ( 弁韓 ) 의 고도 ( 古都 ) 이다 .”라 했는데 , 번한과 변한이 음이 같으니 개평 동북쪽의 `알티'가 불한의 옛 서울일 것이다 .
 
삼국유사 ( 三國遺史 ) 에 , “마한(馬韓 ) 은 평양의 마읍산 ( 馬邑山 ) 으로 이름한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 마한으로 인하여 마읍산이 이름을 얻은 것이요 , 마읍 ( 馬邑 ) 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은 아니나 , 마한은 곧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남쪽으로 옮겼음이 사실이니 , 평양 곧 `펴라'가 ( 말한 ) 의 옛 서울일 것이요 , 신한은 비록 상고할 곳이 없으나 `알티'와 `펴라'의 두 서울이 불·말 두 한을 나누어 점령하였으니 , `삼한'이 합이빈 곧 `아스라'에 도읍하였을 것이 의심없다 .
 
이에 삼조선의 강역의 윤곽도 대개 그릴 수 있으니 , 지금 봉천성 ( 奉天省 ) 의 서북과 동북 ( 開原 이북 , 興京 이동 ) 과 지금 길림 ( 吉林 ) ·흑룡 ( 黑龍 ) 두 성 ( 省 ) 과 지금 연해주 ( 沿海州 ) 의 남쪽 끝은 신조선의 소유이고 , 요동반도 ( 遼東半島 : 開原 이남 , 興京 이서 ) 는 불조선의 소유이며 , 압록강 이남은 말조선의 소유였다 . 그러나 전쟁의 세상에 고정된 강역이 있을 수 없으니 , 시세를 따라 삼조선의 국토가 많이 늘었다 줄 었다 하였을 것이다 .
 
3. 기록상 삼조선을 구별할 조건
 
이제 역사를 읽는 이들이 귀에 서투른 `신조선' , `불조선' `말조선' 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이미 놀랄 것인데 , 하물며 전사 ( 前史 ) 에 아무 구별없이 쓴 `조선 ( 朝鮮 ) '이란 명사들을 가져다 구별하여 , 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신조선이라 하고 , 을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불조선이라 하고 , 병의 역사에 쓰인 조선을 말조선이라 하면 믿을 사람이 누구랴 ? 그러나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고구려 본기 ( 本紀 ) 에 동·북 두 부여를 구별치 않고 다만 부여라 씌었고 , 신라 본기에는 크고 작은 등 다섯 가야 ( 加耶 ) 를 구별치 않고 다만 가야라 씌어 있으니 , 만일 전사 ( 前史 ) 에 구별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여 그대로 구별치 아니하면 두 부여사나 다섯 가야사 ( 加耶史 ) 의 본 면목을 회복할 날이 없을 것이 아닌가 ? 하물며 삼조선의 분립은 조선 고사에 있어서 유일한 큰 일이니 , 이를 구별치 못하면 곧 그 이전에 대단군 왕검의 건국의 결론을 찾지 못할 것이요 , 그 이후에 동북 부여와 고구려·신라·백제 등의 문화적 발전 서론 ( 緖論 ) 을 얻지 못할 것이니 , 어찌 습견 ( 習見 ) 에 젖은 이의 두뇌에 맞추기 위해 삼조선의 사적 ( 事蹟 ) 을 구별하지 않으랴 ?
 
삼조선의 사적 ( 史的 ) 재료는 오직 사기 ( 史記 ), 위략 ( 魏略 ), 삼국지 ( 三國志 ) 등 지나사 ( 支那史 ) 뿐이지만 저 지나사의 저작자들이 그들의 유전적인 교오병 ( 驕傲病 ) 이 있어서 , 조선을 서술할 때에 조선 그자체 를 위하여 조선을 계통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오직 자기네와 정치적으로 관계되는 조선을 서술하였고 , 그나마도 왕왕 피차의 성패와 시비를 뒤바꾸어 놓았음이 그 하나요 , 조선의 나라 이름 ·지명 등을 기록 할 때에 왕왕 조선인이 지은 본디의 명사를 쓰지 않고 자의로 딴 명사를 지어 , 동부여 ( 東扶餘 ) 를 불내예 ( 不耐濊) 라 하고 , 오열홀 ( 烏列忽 ) 을 요동성 ( 遼東省 ) 이라 하는 따위의 필법 ( 筆法 ) 이 많음이 그 둘이요 , 조선은 특수한 문화가 발달하여 왔는데 , 매양 기자 ( 箕子 ) 나 진 ( 奏 ) 나라 유민에게 공을 돌리려 하여 허다한 거짓 증거를 가짐이 그 셋이다 . 그러므로 사마천이 사기를 지을 때에 연 ( 燕 ) 의 멸망이 오래지 않았으니 연과 삼조선에 관계된 사실의 상고할 만한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 한무제 ( 漢武帝 ) 가 조선의 일부분이요 , 삼경 ( 三京 ) 의 하나인 `알티'의 문화고도 ( 文化故都 ) 를 점령하였으니 , 고대의 전설과 기록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기의 조선전 ( 朝鮮傳 ) 은 조선의 문화적 ·정치적 사실을 하나도 쓰지 않고 , 오직 위만 ( 衛滿 ) 과 한병 ( 漢兵 ) 의 동침 ( 東侵 ) 을 썼을 뿐이니 , 이는 조선전이 아니라 위만의 소전 ( 小 傳 ) 이요 , 한나라의 동방 침략의 약사 ( 略史 ) 이다 . 위략 , 삼국지 등의 책은 관구검 ( 母兵檢 ) 이 실어간 고구려의 서적으로 재료를 삼았으나 또한 그 폐습의 심리를 가지기는 마찬가지였다 .
 
그러면 무엇에 의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인 조선들을 가지고 이것 이 신조선이니 , 말조선이니 , 불조선이니 하는 구별을 내릴 것인가 ? 사기 조선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 ( 朝鮮 ) 이라 쓰는 대신에 신조선은 동호 ( 東胡 ) 라 일컬어서 흉노전에 넣었다 .
 
그러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 ( 遺事 ) 를 ,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초출 ( 抄出 ) 하고 ,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의 기록을 교정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조선은 지나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지나사의 필두에 오른 일은 적으나 , 마한 ( 馬韓 ) ·백제 ( 百濟 ) 의 선대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 이로써 삼조선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것이다 .
 
4. 삼조선 분립의 시초
 
대단군 ( 大檀君 ) 의 정제 ( 定制 ) 에는 비록 삼한이 있어 삼경에 나뉘어 머물렀으나 , 신한은 곧 대단군이니 제사장으로서 겸하여 정치상의 원수가 되고 , 말·불 두 한은 신한을 보좌하는 두 부왕에 지나지 않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안는 나라의 체제를 확립하였으므로 삼조선이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 삼한이 분립한 뒤 삼조선이란 명사가 생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삼한이 어느 시대에 분립하였는가 ? 사기에 보인 진막벌조선은 전연시 (全燕時 ) 곧 연의 전성 시대라고 하였는데 , 연의 전성 시대는 지나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이고 , `발조선 ( 發朝鮮 ) '을 기록한 관자 ( 管子 ) 는 관중 ( 管仲 ) 이 지은 것이 아니고 전국시대의 위서 ( 僞書 ) 이며 , `발숙신 ( 發肅愼 ) '을 기록한 대대례 ( 大戴禮 ) 는 비록 한인 ( 漢人) 대승 ( 載勝 ) 이 지은 것이지마는 , 발식신 ( 發息愼) 운운 한것은제인 ( 齊人 ) 추연 ( 鄒衍 ) 이 전 한 것인데 , 추연은 전국시대의 인물이다 .
 
신·말·불 삼조선의 명사가 이같이 지나 전국시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 삼조선의 분립은 곧 지나 전국시대의 일이요 , 지나 전국시대는 기원전 4 세기경이니 , 그러면 기원전 땅 4세기 경에 신·말·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겠다 .
 
신조선은 성이 해씨 ( 解氏 ) 니 , 대단군 왕검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 불조선은 성이 기씨 ( 箕氏 ) 니 기자 ( 箕子 ) 의 자손이라 일컬은 자이고 ,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니 그 선대의 연원은 알 수 없으나 , 왕부 ( 王符 ) 의 잠부론 ( 潛夫論 ) 에 , “한 ( 韓 ) 의 서쪽도 역시 성이 한 ( 韓 ) 인데 위만 ( 衛滿 ) 에게 토벌당해 바다 가운데로 옮겨가 살았다 ( 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 ). ”고 하였으니 , 한서 ( 韓西 ) 는 대개 말조선에 딸린 곳이므로 , 말조선은 성이 한씨 ( 韓氏 ) 인가 한다 .
 
위략 ( 魏略 ) 에 , “기자 ( 箕子 ) 의 후손 조선후 ( 朝鮮候 ) 는 주 ( 周 ) 가 쇠해지고 연 ( 燕 ) 이 자존 ( 自尊 ) 하여 왕이 되서 동쪽으로 땅을 공략하려고 하는 것을 보고 ,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일컫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배후에서 쳐 주실 ( 周室 ) 을 높이려고 하다가 대부례 ( 大夫禮 ) 가 간하여 그만두고 대부례로 하여금 연을 설득하여 연은 공격하지 않았다 ( 箕子之後朝鮮候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候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 以尊周室 大夫禮 諫之乃止 使禮西說燕以之止 不攻 ). ”고 하였는데 , 위략은 곧 서양의 백인종인 대진 ( 大秦 ) ·로마 ( 羅馬 ) 까지도 중국인의 자손이라 기록한 가장 지나식의 자존적 ( 自尊的 ) 병심리 ( 病心理 ) 를 발휘한 글이니 , 그 글의 전부를 덮어놓고 믿을 수는 없으나 `신한' , `불한'을 당시 조선에서 진한·마한·변한으로 음역한 이외 에 `신한'은 혹 의역하여 `진왕 ( 辰王 ) ' , `태왕 ( 太王 ) '이라고 하였으니 ( 다만 辰王의 辰은 음역 ) `신한'은 한자로 쓰면 조선왕 ( 朝鮮王 ) 이라 하였을 것이요 , `말한' , `불한'은 의역하여 좌보 ( 左輔 ) ·우보 ( 右輔 ) 라 하였으니 , 한자로 쓰면 조선후 ( 朝鮮候 ) 라 하였을 것이므로 기자가 이 때에 `불한'의 지위에 었었으니 조선후라 일컬음이 또한 옳다 .
 
`불한' 조선후 기씨가 신한' 조선왕 개씨를 배반하고 스스로 `신 한'이라 일컬어서 삼조선 분립의 판국을 열었는데 , `불한'이 `신한'을 일컬은 것이 연(燕)이 왕을 일컬은 뒤요 , 연이 왕을 일컬은 것은사기 에 주 ( 周 ) 에 신정왕 ( 愼王 ) 46 년 , 기원전 323 년이니 신 ·말·불 삼조 선의 분립이 기원전 4 세기 경임을 확증하는 것이고 , 대부례는 대개 `불한'의 유력한 모사 ( 謨士 ) 니 , `불한'을 권하여 `신한'을 배반하고 역시 `신한'이라 일컫게 하고 , 연과 결탁하여 동 ·서 두 새 왕국을 동맹하게 한 이가 또한 대부례이니 대부례는 삼조선 분립을 주동한 중심 인물일 것이다 .
 
삼조선 분립 이전에는 `신한'이 하나였는데 , 삼조선이 분립한 뒤에 는 `신한'이 셋이 되었다 . 곧 신조선의 `신한'이 그 하나요 , 말조선의 `신한'이 그 둘이요 , 불조선의 `신한'이 그 셋이니 , 곧 대왕 ( 大王 ) 이 라는 뜻이다 .
 
==제 2 장 삼조선분립 후의 신조선==
 
1. 신조선의 서침(西侵)과 燕 ·趙 ·秦(연·조·진)의 장성(長城)
 
삼조선이 분립한 뒤 오래지 않아서 신조선왕 모갑 ( 某甲 ) 이 영특하고 용감하여 마침내 말·불 두 조선을 다시 연합해 지금의 동몽고 ( 東蒙古 ) 둥지를 쳐서 선비를 정복하고 연을 쳐 우북평 ( 右北平 )---- 지금의 영평부 ( 永平府 ) 와 어양 ( 漁陽 )---- 지금의 북경 ( 北京 ) 부근과 , 상곡 ( 上谷 )---- 지금의 산서성 ( 山西省 ) 대동부 ( 大同府 ) 등지를 다 차 지하여 불리지 ( 弗離支 ) 의 옛 땅을 회복했다 . 연왕 ( 燕王 ) 이 크게 두려워서 세폐 ( 歲輪 ) 를 신조선에 바치고 신하를 일걷고 태자를 보내서 볼모를 삼게 하였는데 , 모갑이 죽고 모을 ( 某乙) 이 왕이 된 뒤에는 연의 태자가 돌아가서 연왕이 되어 장군 진개 ( 秦開 ) 를 왕자라 속여서 볼모로 보냈다 . 모을이 그 속임수를 깨닫지 못하고 진개의 민첩하고 지혜로움을 사랑하여 가까이 두었다 .
 
진개는 나라의 모든 비밀을 탐지해가지고 도망해 돌아가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 신조선을 습격 , 신 ·말 ·불 세 나라의 군사를 깨뜨리고 서북 변경 , 곧 전자에 신조선 왕 모갑이 점령한 상곡 ·어양·우북평 등지를 빼앗고 나아가 불조선의 변경을 습격해 요서 ( 遼西 )--- 지금 의 노룡현 ( 盧龍縣 ) 과 , 요동 ( 遼東 )--- 지금의 요양 ( 遼場 ) 부근을 함락시켜 , 상곡 ·어양·우북평 ·요서 ·요동의 5 군을 두고 , 2 천리 장성을 쌓아 조선을 막으니 , 사기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 “연의 전성시대에 일찍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 全燕時嘗略屬眞番 朝鮮 ). ”고 한 것과 흉노열전에 , “연의 어진 장수 진개 ( 秦開 )가 호 ( 胡 ) 에게 볼모가 되어 호가 깊이 믿었는데 , 돌아와서 동호 ( 東胡 ) 를 습격하여 깨뜨리니 , 동호는 1 천여 리를 퇴각하였다 . 연이 또한 장성을 쌓고 조양 ( 造陽 ) 에서부터 양평 ( 襄平 ) 에까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군을 설치하였다 ( 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東胡 東胡却千餘里 燕亦築長城 自造陽 至襄平 置上谷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 ). ”고 한 것과 위략에 ,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 ( 滿潘汗 ) 에까지 이르렀다 ( 燕乃遺將 秦開 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潘汗 ). ”고 한 것이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 . 그러나 진개가 볼모로 갔던 신조선이 아니므로 , 사기에는 이를 흉노전과 조선전 두 곳에 나누어 기록하였고 , 위략에는 비록 조선전에 기록하였으나 , 진개의 볼모되었던 사실을 쓰지 아니하였다 . 만반한은 조선의 역사 지리상 큰 문제이므로 다음 장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
 
이때 지나 북쪽의 나라로서 조선을 막기 위하여 장성을 쌓은 자는 연 한 나라뿐 아니다 . 조 ( 趙 : 지금의 直匠省 서쪽 절반과 河南省 북쪽 끝과 山西省 ) 의 무령왕 ( 武靈王 ) 의 장성 ( 지금 山西의 북쪽 ) 이 또한 조선과 조선의 속민 ( 屬民 ) 인 담림 ( 澹林 ) ·누번 ( 樓煩 ) 등 때문에 쌓은 것이고 , 진 ( 秦 : 지금의 陝西省 ) 소왕 ( 昭王 ) 의 장성은 의거 ( 義渠 를 토멸 하고 흉노를 막기 위하여 쌓은 것이지마는 , 의거는 원래 조선 종족으로 지금의 감숙성 ( 甘肅省 ) 에 옮겨가서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 농사가 발달하여 문화가 상당히 발달되었고 병력이 강하여 진 ( 秦 ) 을 압박하였다 . 진의 선태후 ( 宣太后 : 秦始星의 高祖母 ) 는 절세의 미인이었는데 , 의거가 진을 토멸할까 두려워서 의거왕을 꾀어 간통하여 두 아들을 낳게 하고는 의거왕을 불러다 쳐 죽이고 , 두 아들까지 죽여버려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
 
2. 창해역사(滄海力士)의 철퇴와 진시황의 만리장성
 
신조선이 연 ·조와 격전을 벌이는 동안에 진이 강성해져서 마침내 한 ( 韓 ) ·위 ( 魏 ) ·조 ( 趙 ) ·연 ( 燕 ) ·제 ( 齊 ) ·초 ( 楚 ) 등 지나의 여러 나라를 다 토멸하니 , 한인 ( 韓人 ) 장량 ( 張良 ) 이 망국의 한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구원을 청하였다 . 왕 모병 ( 某丙 ) 이 장사 여씨 ( 黎氏 ) 를 소개해 주어 , 진시황의 순행 ( 巡幸 ) 을 기회하여 120 근 철퇴를 가지고 양무현 ( 陽武縣 ) 박랑사 ( 博浪沙 ) 가운데서 그를 저격하다가 잘못 부거 ( 副車 ) 를 부수고 성공치 못하였다 .
 
사기에 장량이 창해군 ( 滄海君 ) 을 보고 장사를 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 어떤 이는 창해를 강릉 ( 江陵 ) 이라 하고 , 창해군을 강릉의 군장 ( 郡長 ) 이라고 하며 , 장사 여씨를 강릉 출생이라 하였지마는 , 창해는 동부여의 딴 이름이고 , 동부여 두 나라는 1) 북갈사 ( 北曷思 : 지금의 琿春 ) 2) 남갈사 ( 南曷思 : 지금의 咸興 ) 에 도읍했으니 , 창해는 이 두 곳 중의 하나요 , 강릉이 창해라는 설은 근거없는 말이다 .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동북쪽의 조선과 서북쪽의 흉노를 염려하여 옛날의 연 ·조 ·진의 장성을 연결하여 건축하는데 , 전 지나의 인민을 동원하여 부역에 종사하게 하고 장군 몽념 ( 寒恬 ) 으로 하여금 30 만 군사를 거느려 감독케 해서 동양 사상 유명한 이른바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
 
기원전 210 년에 진시황이 죽고 , 이세 ( 二世 ) 가 즉위하매 , 이듬해에 진승 ( 陳勝 ) ·항적 ( 項籍 ) ·유방 ( 劉邦) 등 혁명 군웅이 봉기하여 진을 멸망시켰다 . 이두산 ( 李斗山 ) 이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 “진 ( 秦) 의 위력이 태고 이래로 짝이 없도록 팽창하여 , 만성 ( 萬成 : 모든 사람 ) 이 바야 흐로 시황을 천신 ( 天神 ) 으로 우러러보는데 , 난데없이 벽력 같은 철퇴가 시황의 혼백을 빼앗고 , 여섯 나라 ( 한 ·위 ·조 ·연 ·제 ·초 ) 의 유민의 적개심을 뒤흔들어 놓았으므로 , 시황의 시체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진을 멸망시키려는 깃발이 사방에 날렸으니 , 이는 창해역사의 공이 아니랄 수 없다 .”고 하였다 .
 
3. 흉노 모돈(冒頓)의 동침(東侵)과 신조선의 위축
 
지나의 항적 ·유방 등의 8 년 동란이 계속되는 사이에 신조선왕 모정 ( 某丁) 이 서쪽으로 출병하여 상곡 ( 上谷 ) ·어양 ( 漁陽 ) 등지를 회복 하고 , 지금의 동부 몽고 일대 선비의 항복을 받아서 국위가 다시 떨치더니 , 그 자손의 대에 마침내 흉노 모돈 ( 冒頓 ) 의 난을 만나 국세가 도로 쇠약해지고 말았다 .
 
흉노는 제 1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과 어계 ( 語系 ) 가 같고 , 조선 과 같이 `수두'를 신봉하여 조선의 속민이 되었었는데 , 지금의 몽고 등지에 흩어져서 목축과 사냥에 종사하였다 . 천성이 침략을 즐겨 자주 지나의 북부를 짓밟고 , 신조선에 대하여도 배반과 귀부 ( 歸附 ) 가 무상하였는데 , 기원전 200 년경에 두만 ( 頭曼) 이 흉노선우 ( 匈奴單于 : 흉노 大酋長의 호 ) 가 되어 , 맏아들 모돈 ( 冒頓 ) 을 미워하고 작은 아들〔小子〕을 사랑하다가 모돈에게 죽고 모돈이 대신 선우가 되었다 .
 
신조선왕은 그가 사납고 음흉함을 모르고 자주 물건을 요구하였는 데 , 모돈은 짐짓 그 환심을 사기 위해 신조선왕이 천리마를 구하면 그 는 자기가 사랑하는 말을 주고 , 신조선왕이 미인을 구하면 그는 그의 알씨 ( 閼氏 : 선우의 妻妾 ) 를 주니 , 신조선왕은 더욱 모돈을 믿어 사자 를 보내서 두 나라 중간의 천여리 구탈 ( 脫 ) 을 신조선의 소유로 달라고 하였다 .
 
구탈이란 당시 중립 지대 빈 땅을 일컫는 말인데 , 모돈이 이 청구를 받고는 크게 노하여 , “토지는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이것을 달라하느냐 .” 하고 드디어 사자를 죽이고 전 흉노의 기병을 모두 내어 신조선의 서쪽인 지금의 동부 몽고 등지를 습격하여 주민을 유린하고 선비를 수없이 학살하였다 . 신조선은 퇴각하여 장성 밖 수천 리의 땅을 버리고 선비의 남은 무리들은 선비산 ( 鮮卑山 )---- 지금의 내외 흥안령 ( 興安嶺 ) 부근으로 도주하니 , 이로부터 신조선이 아주 미약하여 오랫동안 이웃 종족과 겨루지 못하였다 . 엄복 ( 嚴復 : 淸末의 학자 ) 이 말하기를 , “흉노를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는 야만족이니 , 어찌 토지는 나라의 근본이란 말을 내었으랴 ? 이는 한갓 사마천의 과장된 글이 될 뿐이다 .”라고 하였다 . 그러나 사기 , 한서 등을 참고해 보면 , 흉노가 음산 ( 陰山 ) 의 험한 목을 빼앗긴 뒤엔 그 지방을 지나는 자가 반드시 통곡하였다 하고 , 연지 ( 燕脂 ) 가 생산되는 언지산 ( 焉支山 ) 을 빼앗긴 뒤에는 슬픈 노래를 지어 서로 위로하였으니 , 흉노의 토지 수요 ( 需要 ) 가 비록 문화적 민족과 같지 못하다 하더라도 아주 토지에 대한 관념이 없다 함은 편벽된 판단인가 한다 .
 
==제 3 장 삼조선 분립 후의 불조선==
 
1. 불조선의 西北境을 빼앗김
 
불조선이 신조선과 합작하다가 연에게 패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했으므로 여기에서는 다만 그 잃은 땅이 얼마나 되는가를 말하고자 한다 . 위략에 , “진개 ( 秦開 ) 가 그 서쪽을 공격하여 땅 2 천여 리를 빼앗아 만반한에까지 이르렀다 ( 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播汗爲界 ). ”고 하여 , 선유 ( 先儒 ) 들은 조선과 연의 국경을 지금의 산해관 ( 山海關 ) 으로 잡고 , 진개가 빼앗은 2 천여 리를 산해관 동쪽의 종선 ( 從線 ) 2 천여 리로 잡아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찾으려고 하였지마는 이는 큰 착오요 억지 판단이다 .
 
사기나 위략을 참조해보면 , 진개가 빼앗은 토지가 분명히 상곡에서 부터 요동까지이니 만반한을 요동 이외에서 찾으려 함은 옳지 못하다 .
 
한서지리지에 의거하면 요동군현 ( 遼東郡縣 ) 중에 `문 ( 汶 ) ·번한 ( 番汗 ) '의 두 현이 있으니 , 만반한은 곧 이 문번한이다 . 문현 ( 汶縣 ) 은 비록 그 연혁이 전해지지 못하였으나 , 번한 ( 番汗) 은 지금의 개평 등지 이므로 문현도 개평 부근일 것이니 , 반만한은 지금의 해성 ·개평 등의 부근일 것이다 . 그런데 이제 만반한을 대동강 이남에서 구하려 함은 무엇에 의거함인가 ? 대개 만반한은 진개가 침략해왔을 때의 지명이 아니고 , 후세 진 ( 秦) 나라 때 혹은 한 ( 漢 ) 나라 때의 명칭임을 , 위략의 저작자가 이를 가져다가 진개 침략 때 두 나라의 국경을 입증한 것일 것이며 , 번한 ( 番汗 ) 은 `불한'의 옛 서울 부근임으로 하여 이름한 것일 것이다 .
 
사기의 1 천여 리는 신조선이 잃은 땅만 지적한 것이요 . 위략의 2 천 여 리는 신 ·불 두 조선이 잃은 땅을 아울러 지적한 것이니 , 상곡 ·어양 일대는 신조선이 잃은 땅이요 , 요동 ( 遙東 ) ·요서 ( 遙西 ) ·우북평 ( 右北平 ) 일대는 불조선이 잃은 땅이다 . 만반한은 사군 ( 四郡 ) 연혁의 문제와 관계가 매우 깊은 것이니 , 이 절 ( 節 ) 은 독자가 잘 기억해두어 야 한다 .
 
2.불조선과 秦·漢(진·한)과의 관계
 
연왕 ( 燕王 ) 희 ( 喜 ) 가 진시황에게 패하여 요동으로 도읍을 옳기니 , 불조선이 지난날 연에 대한 오래된 원한을 잊지 못하여 진과 맹약하고 연을 토벌하였는데 , 얼마 안 가서 진시황이 몽념으로 하여금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 불조선이 진과 국경을 정하는데 , 지금의 헌우란 ( ) 이남의 연안 수백 리 땅엔 두 나라의 백성이 들어가 사는 것을 금했다 . 사기의 이른바 고진공지 ( 故秦空地 ) 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 위략에 의거하면 이때에 불조선왕의 이름을 `부 ( 否 ) '라 하였으나 위략과 마찬가지로 관구검이 실어간 고구려의 문헌으로 자료를 삼은 삼국지와 후한서의 동이열전 ( 東夷列傳 ) 에는 부 ( 否 ) 를 기록하지 아니하였으니 , 위략에서 신조선 말엽의 왕 곧 동부여왕 ( 東扶餘王 ) 이 된 부루 ( 夫婁 ) 를 부 ( 否 ) 로 와전함인가 하여 여기에 채용하지 아니한다 .
 
기원전 200 여 년경에 기준 ( 箕準 ) 이 불조선왕이 되어서는 진의 진승·항적 ·유방 ( 漢高祖 ) 등이 모반하여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상곡 ·어양 ·우북평 등지의 조선 옛 백성과 연 ( 燕) ·제 ( 齊 ) ·조 ( 趙 ) 의 지나인들이 난을 피하여 귀화하는 자가 많은지라 , 기준이 이들에게 서쪽의 옛 중립 공지 ( 空地 ) 에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 한고조 유방이 지나를 통일하자 기준이 다시 한과 약조를 정하여 옛 중립 공지는 불조선의 소유로 하고 , 헌우란으로 국경을 삼았다 . 사기 조선전 에 , “한 ( 漢 ) 이 일어나니 물러나 패수 ( 浿水 ) 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至浿水爲界 ). ”고 하고 , 위략에 , “한이 일어나자 노관 ( 盧) 으로 연왕 (燕王) 을 삼고 , 조선은 연과 패수를 경계로 하였다 ( 乃漢以盧爲燕王 朝鮮興燕 界於水 ). ”고 한 것 ( 先儒들이 는 浿의 잘못이라 했으므로 이를 쫓는다 ) 이 다 이것을 가리킨 것이니 , 대개 불조선과 연이 만반한으로 경계를 정했다가 이제 만반한 이북으로 물러났으니 , 두 책의 패수 ( 浿水 ) 는 다 헌우란을 가리킨 것임이 분명하다 . 선유들이 왕왕 대동강을 패수라고 고집함은 물론 큰 잘못이거니와 , 근일 일본의 백조고길 ( 白鳥庫吉 ) 등이 압록강 하류를 패수라고 하니 또한 큰 망발 이다 . 위의 패수에 관한 논술은 앞 절의 만반한과 다음 절의 왕검성과 대조하여 볼 것이다 .
 
3. 衛滿(위만)의 반란과 불조선의 南遷(남천)
 
기원전 194 년에 한 ( 漢 ) 의 연왕 ( 鮮王 ) 노관 ( 盧) 이 한을 배반하다가 패하여 흉노로 도망하고 , 그의 무리 위만 ( 衛滿 ) 은 불조선으로 들어와 귀화하니 , 준왕 ( 準王 ) 이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관 ( 博士官 ) 에 임명해서 패수 서쪽 강변 ( 옛 중립 공지 ) 수백 리를 주어 그곳에 이주한 구민 ( 舊民 ) 과 연 ·제 ·조의 사람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
 
위만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만들어 더욱 조선과 지나의 망명 죄인을 데려다가 결사대를 만들어 , 그 병력이 강대해지자 , “한나라 군사가 10도 ( 道 ) 로 침략해 들어온다 .”는 거짓 보고를 준왕에게 보고하고 준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 들어와 왕을 시위하기를 청하여 허락을 얻어가지고 정병으로 달려와 기준의 서울 왕검성을 습격하니 , 준왕이 항거해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좌우 궁인 ( 宮人) 을 싣고 패잔한 군사로 바닷길을 쫓아 마한의 왕도 ( 王都 ) 월지국 ( 月支國 ) 으로 들어가서 이를 쳐 깨뜨리고 왕이 되었는데 , 오래지 않아 마한의 여러 나라가 함께 일어나서 준왕을 토멸하였다 .
 
왕검성은 대단군 ( 大檀君 ) 제 1 세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삼은 것인데 , 대단군의 삼경 ( 三京 )---- 지금의 합이빈과 지금의 평양과 앞서 말한 불한의 옛 도읍인 지금의 개평 동북쪽 이 세 곳이다 . 왕검성이란 이름을 가졌었을 것이니 , 위만이 도읍한 왕검성은 곧 개평 동북쪽 이다 . 한서지리지의 , “요동군 ( 遼東郡 ) 험독현 ( 險瀆縣 : 註에 滿의 도읍이라 했다 ) ”이 그것이요 , “마한의 왕도는 지금의 익산 ( 益山 ) 이다 .” 라고 하나 , 대개 잘못 전해진 것이다 . 다음 장에서 논술할 것이다 .
 
==제 4 장 삼조선 분립 뒤의 말朝鮮==
 
1. 말조선의 遷都(천도)와 馬韓으로의 改號
 
말조선의 처음 도읍이 평양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거였거니와 , 그 뒤 ( 연대는 불명 ) 에 국호를 말한〔馬韓〕이라 고치고 , 남쪽의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겨 불조선왕 기준에게 망했다 . 그 천도한 원인이 무엇인지 전사 ( 前史 ) 에 보인 것이 없으나 , 대개 신 ·불 두 조선이 흉노와 지나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서 북방의 풍운 ( 風雲 ) 이 급하매 , 말조선왕이 난을 싫어하여 마침내 남쪽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천도하는 동시에 모든 침략주의를 가진 역대 제왕들의 칼 끝에서 빛나던 `조선'이라는 명사는 외국인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바라 하여 , 드디어 말조선이란 칭호를 버리고 , 지난날에 왕호 ( 王號 ) 로 쓰던 `말한'을 국호로 써서 이두 로 마한 ( 馬韓 ) 이라 쓰고 , 새로 쓰는 왕호인 `신한'은 이두로 진왕 ( 辰王 ) 이라 써서 `마한국 ( 馬韓國 ) 진왕 ( 辰王 ) '이라고 일컬었다 . 똑같은 `한'이란 명사를 하나는 음을 따서 한 ( 韓 ) 이라 하여 국호로 쓰고 또 하나는 뜻을 따서 왕이라 하여 왕호로 씀은 , 문자상 국호와 왕호의 혼동을 피한 것이다 . 국호를 마한이라 쓰는 동시에 왕조는 한씨 ( 韓氏 ) 가 세습하여 국민들이 한씨왕의 존재만 아는 고로 , 기준이 그 왕위를 빼앗고는 국민의 불평을 누그러뜨리기 위하여 본래의 성 기씨 ( 箕氏 ) 를 버리고 한씨 ( 韓氏 ) 로 고친 것이다 .
 
삼국지에 , “준 ( 準 )- - - 달아나 바다로 들어가서 한 ( 韓 ) 의 땅에서 살며 한왕 ( 韓王 ) 이라 이름하였다 ( 準- - - 走入海 居韓地 號韓王 ). ”고 하였고 , 위략에는 ,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 나라에 머물러 있는 자는 성을 한씨라 하였다 ( 準子及親 留在國者 冒姓韓氏). ”고 하였다 .
 
월지국을 전사 ( 前史 ) 에는 백제의 금마군 ( 金馬君 : 지금의 益山 ) 이라고 하였지마는 , 이것은 속전 ( 俗傳 ) 의 익산군 마한 무강왕릉 ( 武康王陵 ) 이라는 것을 인하여 무강왕을 기준의 시호 ( 諡號 ) 라 하고 , 부근 미륵산 ( 彌勒山 ) 의 선화부인 ( 善化夫人)의 유적을 기준의 왕후 선화 ( 善花 ) 의 유적이라 하여 , 마침내 기준이 남으로 달아나서 금마군 ( 金馬 郡) 에 도읍하였다고 한것이다 . 그러나 무강왕릉은 딴 이름이 말통대왕릉 ( 末通大王陵) 이요 , 말통은 백제 무왕 ( 武王 ) 의 어릴 때 이름 ( 무왕의 이름은 `마동'이니 삼국유사의 薯童은 그 의역이고 , 고려사 지리지 의 末通은 그 음역 ) 이요 , 선화는 신라 진평대왕 (眞平大王 ) 의 공주로서 , 무왕의 후 ( 后 ) 가 된 아이고 , 백제를 왕왕 마한이라 함은 역사에 그 예가 적지 아니하니 , 이따위 고적은 한갓 익산 ( 益山 ) 이 백제의 옛 서울임을 증명함에는 부족할뿐더러 , 마한 50 여국 중에 윌지국과 건마국 ( 乾馬國 ) 이 있으니 , 건마국이 금마군 ( 金馬郡) 곧 지금의 익산일 것이므로 , 월지국 ----마한의 옛 서울은 다른 나라에서 찾음이 옳다 . 그 확실한 지점은 알 수 없으나 마한과 백제 ( 백제 건국 13 년 ) 의 국경이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州 ) 이니 , 월지국이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
 
말한이 비록 국호가 되었지마는 , 그 5,6 백 년 후에도 오히려 왕호 ( 王號 ) 로 쓴 이가 있다 . 신라의 눌지 ( 訥祗 ) ·자비 ( 慈悲 ) ·소지 ( 炤智 ) ·지증 ( 智證 ) 네 왕은 다 `마립간 ( 麻立干 ) '이라 일컬었는데 , 눌지 마립간 ( 訥祗麻立干 ) 의 주에 , “마립은 말 ( 말뚝 ) 이다 ( 麻立也 ) ”라 하 였으니 , 궐 ( ) 은글자뜻이 `말'이므로 , 마립 ( 麻立 ) 의 `마 ( 麻 ) '는 그 전성 ( 全聲 ) 을 취하여 `마'로 읽고 , `입 ( 立 ) '은 그 초성 ( 初聲 ) 을 취하 여 ` 己 '로 읽고 , `간 (干) '은 그 전성을 취하여 `한'으로 읽는 것임이 명백하므로 마립간은 곧 `말한'이요 , 말한을 왕호로 쓴 증거이다 .
 
2. 樂浪과 南三韓의 對峙(낙랑과 남삼한의 대치)
 
마한이 월지국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그 옛 도읍 평양에는 최씨 ( 崔氏 ) 가 일어나서 그 부근 25 국을 통속하여 한 대국이 되었으니 , 전사 ( 前史 ) 에 이른바 낙랑국 ( 樂浪國 ) 이 그것이다 . 낙랑이 이미 분리되매 , 마한이 지금의 임진강 이북을 잃었으나 오히려 임진강 이남 70여국을 통솔하더니 , 오래지 아니하여 북방에서 지나와 흉노의 난리를 피하여 마한으로 들어오는 신·불 두 조선의 유민이 날로 많아지므로 , 마한이 지금의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1 백여 리 땅을 떼어 신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자치계 ( 自治: 고대에 모임을 계라 하였음 ) 를 세워서 이름을 `진한부 ( 辰韓部 ) '라 하고 , 낙동강 연안 오른편의 땅을 얼마간 떼서 불조선의 유민들에게 주어 또한 자치계를 세워서 `변한부 ( 井韓部 ) '라 일컬었다 . 변한에는 신조선의 유민들도 섞여 살았으므로 변진부 ( 井辰部 ) 라고도 일컬었다 . 이것이 남삼한 ( 南三韓 ) 이니 마한이 구태여 진·변 두 한을 세운 것은 또한 삼신 ( 三神 ) 에 따라 삼의 수를 채운 것이다 .대단군 왕검의 삼한이 중심 주권자가 되고 말·불 두 한은 좌우의 보상 ( 輔相 ) 이 되었는데 , 이제 남삼한은 말한 곧 마한이 가장 큰 나라 , 곧 종주국이 되고 , 신한 곧 진한과 불한 곧 변한이 두 작은 나라 ( 소속국 ) 가 된 것은 , 그 이주민의 계통을 쫓아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거니와 , 삼한이 다 왕을 `신한'이라 일컬어서 ( 이를테면 마한의 왕은 말한 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 진한의 왕은 신한나라의 신한이라 하고 , 변한의 왕은 불한나라의 신한이라 하였음 ) 신한이 셋이 되니 , 대개 앞의 것 ( 신한 셋 ) 은 삼조선 분립 이후에 세 신한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며 , 진·변 두 한의 두 신한은 자립하지 못하고 대대로 마한의 신한이 겸해 가져서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었으니 이는 남삼한의 창례 ( 創例 ) 이다 .
 
삼한은 우리 역사상에 비상히 시비가 많은 문제로 되었지마는 종래의 학자들이 다만 삼국지 삼한전(三韓傳)의 삼한 곧 남삼한을 의거하여 , 그 강역의 위치를 결정하려 할 뿐이고 1) 삼한의 명칭의 유래와 , 2) 삼한의 예제(禮制)의 변혁을 알지 못하여 , 비록 공력은 많이 들였으나 북방 원유(原有)의 삼한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 남삼한과의 상호 관계도 명백히 알아내지 못하였다 .
 
3. 樂浪 25 국과 南三韓 70 여국
 
낙랑의 여러 나라로 역사에 보인 것이 25 이니 , 조선 ( 朝鮮 ) · 감한( 감邯 ) · 패수 ( 浿水 ) · 함자 ( 含資 : 貪資라고도 함 ) · 점선 ( 점蟬 ) · 수성 ( 遂城 ) · 증지 ( 增地 ) · 대방 ( 帶方 ) · 사망 ( 駟望 ) · 해명 ( 海冥 ) · 열구 ( 列 口 ) · 장잠 ( 長岑 ) · 둔유 ( 屯有 ) · 소명 ( 昭明 ) · 누방 ( 鏤方 ) · 제해 ( 提奚 ) · 혼미 ( 渾彌 ) · 탄렬 ( 呑列 ) · 동이 ( 東이 ) · 불이 ( 不而 : 不耐라고도 함 ) · 잠대 ( 蠶臺 ) · 화려 ( 華麗 ) · 야두미 ( 邪頭味 ) · 전막 ( 前莫 ) · 부조 ( 夫租 ) : 沃沮 의 잘못인 듯 ) 등이니 , 위의 25 국은 한서지리지에 한 ( 漢 ) 낙랑군 ( 樂浪郡) 의 25 현 ( 縣 ) 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 이는 한서의 본문이 아니라 ,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려고 할 때에 그 신하와 백성 들의 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조선이 거의 다 지나의 옛 땅임을 위증 ( 僞證 ) 하고자 전대 지나의 역사책 중에서 조선에 관계되는 것틀을 죄다 가져다가 많이 고칠 때 , 조선 고대의 낙랑 25 국을 낙랑군 25 현으로 고쳐 한서지리지에 넣은 것이니 , 이는 제 4 편에서 다시 자세히 논술 하기로 한다 .
 
25 국 중 `조선'과 `폐수'는 다 평양에 있는 나라인데 , 조선은 곧 말 조선의 옛 땅이므로 조선이라 일컬어서 , 낙랑의 종주국이 된 것이고 ,패수는 `펴라'로 읽을 것이니 , 24 속국의 하나이다 . 조선국과 패수국과의 관계를 비유하면 전자는 평양감영 ( 平壞藍營 ) 과 같은 것이요 , 후자 는 이에 딸린 각 고을과 같은 것이다 .
 
`소명 '은 지금의 춘천 ( 春川 ) 소양강 ( 昭陽江 ) 이요 , 불이는 그 뒤에 동부여가 된 것으로 지금의 함흥 ( 咸興 ) 이니 , 낙랑국의 전체가 지금의 평안 · 황해 두 도를 비롯하여 강원도 · 함경도의 각 일부분을 차지한 것이었다 . 삼한의 여러 나라로서 역사에 보인 것이 70 여국이니 , 마한은 애양 ( 爰襄 ) · 모수 ( 牟水 ) · 상외 ( 桑外 ) · 소석색 ( 小石索 ) · 대석색 ( 大石索 ) · 우휴모탁 ( 優休牟탁) · 신분고 ( 臣憤沽 : 臣憤活이라고도 함 ) · 백 제 ( 伯濟 : 伯齊로도 씀 ) · 속로불사 ( 速盧不斯 ) · 일화 ( 日華 ) · 고탄자 ( 古誕者 ) · 고리 ( 古離 ) · 노람 ( 怒藍 ) · 윌지 ( 月支 ) . 치리모로 ( 治離牟盧 : 咨離牟盧라고도 함 ) · 소위건 ( 素謂乾 ) · 고원 ( 古爰 ) · 막로 ( 莫盧 ) · 비리 ( 卑離 ) · 점비리 ( 占卑離 ) · 신흔 ( 臣흔 : 占흔이라고도 함 ) · 지침 ( 支侵 ) · 구로 ( 狗盧 ) · 비미 ( 卑彌 ) · 감해비리 ( 監奚卑離 ) · 고포 ( 古蒲 ) · 치리국 ( 致利鞠 ) · 염로 ( 염路 ) · 아림 ( 兒林 ) · 사로 ( 駟盧 ) · 내비잡 ( 內卑雜 : 內卑離라고도 함 ) · 감해 ( 感奚 ) · 만로 ( 萬盧 ) · 벽비리 ( 벽卑離 ) · 구사오단 ( 臼斯烏旦 ) · 일리 ( 一離 ) · 불미 ( 不彌 : 不離라고도 함 ) · 지반 ( 支半 : 友半이라고도 함 ) · 구소 ( 狗素 ) · 첩로 ( 捷盧 : 첩盧라고도 함 ) · 모로비리 ( 牟盧卑離 ) · 신소도 ( 臣蘇塗 ) · 고랍 ( 古臘 ) · 임소반 ( 臨素半 ) · 신운신 ( 臣雲新 ) · 여래비리 ( 如來卑離 ) · 초산도비리 ( 楚山塗卑離 ) · 일난 ( 一難 ) · 구해 ( 狗奚 ) · 불운 ( 不雲 ) · 불사분야 ( 不斯분邪 ) · 원지 ( 爰池 ) · 건마 ( 乾馬 ) · 초리 ( 楚離 ) 등 54 국을 통솔 하였다 . 비리 ( 卑離 ) 의 여러 나라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 百濟本紀 ) 의 부여와 , 백제지리지 ( 百濟地理志 ) 의 부리 ( 夫里 ) 이니 , 비리는 부여 ----지금의 부여이고 , `감해비리'는 고막부리 ( 古莫夫里 )---- 지금의 공주 ( 公州 ) 요 , `벽비리'는 파부리 ( 波夫里 )--- 지금의 능주 ( 綾州 : 和 順 ) 요 , `신소도'는 신수두 곧 대신단 ( 大神檀 ) 이 있는 곳이니 , 성대호 ( 省大號 , 일명 蘇泰 )--- 지금의 태안 ( 泰安 ) 이요 , `지침'은 지심 ( 支심 )---- 지금의 진천 ( 鎭川 ) 등지요 , `건마'는 금마군 ( 金馬郡)---백제 무왕릉 ( 武王陵 ) 이 있는 곳이다 . 이 밖에도 상고할 것이 많으나 아직 두어둔다 .
 
변한은 미리미동 ( 彌離彌凍 ) ·접도 ( 接塗 ) ·고자미동 ( 古資彌凍 ) ·고순시 ( 古淳是 ) ·반로 ( 半路 ) ·낙노 ( 樂奴 ) ·미오야마 ( 彌烏邪馬 ) ·감로 (甘路 ) ·구야 ( 狗邪 ) ·주조마 ( 走漕馬 ) ·안야 ( 安邪 ) ·독로 ( 瀆盧 ) 등 12 부 ( 部 ) 를 통털어 일컫는 말이다 . 미동 ( 彌凍) 은 `믿'으로 읽으니 , 수만 ( 水灣 ) 이란 뜻이고 , 고자 ( 古資 ) 는 `구지'로 읽으니 , 반도 ( 半島 ) 란 뜻 이고 , 야 ( 邪 ) 는 `라'로 읽으니 , 강 ( 江 ) 이란 뜻이다 . 위의 12 부는 신라 지리지와 가락국기 ( 駕洛國記 ) 에서 그 유지 ( 遺址 ) 를 찾아보면 , `고자미동'은 고자군 ( 古自郡 )--- 지금의 고성만 ( 固城灣 ) 이요 , `고순시'는 고령가야 ( 古寧加耶 )--- 지금의 상주 ( 尙州 ) 와 함창 ( 咸昌 ) 사이에 공갈못〔恭儉池〕이니 , 공갈은 고령가야의 촉음 (促音 ) 이요 , `반로'는 `벌' 로 읽으니 , 별〔星〕이란 뜻으로 성산가야 ( 星山加邪 )--- 지금의 성주 ( 星州 ) 요 , `미오야마'는 미오마야 ( 彌烏馬邪) 로도 써서 `밈라'로 읽으니 , 임나 ( 任那 )--- 지금의 고령 ( 高靈 ) 이요 , `구야'는 `가라'로 읽으 니 대지 ( 大地 ) 라는 뜻으로 지금의 김해 ( 金海 ) 요 , `안야'는 `아라'로 읽으나 , 수명 ( 水名 ) 으로서 지금의 함안 ( 咸安 ) 이다 . 위의 여섯 나라는 곧 뒤에 가라 ( 加羅 ) 여섯 나라 ( 제 4 장 제 2 절 참고 ) 가 된 것이고 , 그 나머지는 자세치 아니하나 대개 그 부근일 것이다 .
 
진한은 기저 ( 己저 : 己抵로도 씀 ) ·불사 ( 不斯 ) ·근기 ( 勤耆 ) ·염해 ( 염奚 ) ·군미 ( 軍彌 ) ·여담 ( 如湛 ) ·호로 ( 戶路 ) ·주선 ( 州鮮 ) ·마연 ( 馬延 ) ·사로 ( 斯盧 ) ·우중 ( 優中 ) ·난미리미동 ( 難彌離彌凍 ) 등 12 부를 통 털어 일컬음이니 , 위 12 부는 오직 사로가 신라인 줄을 알 수 있고 , 그 밖의 각부의 연혁은 알 수 없으니 , 이는 신라 말에 한학자들이 그 명사를 모두 전의 이두자를 버리고 한자로 의역하였기 때문이다 . 그 자세한 것은 제 4 편 제 4 장에서 논술한 것이다 ( 변한 12 부와 진한 12 부는 책에 따라 서로 드나들어 같지 아니함 ).
 
마한이 본래 거의 압록강 동쪽 전부를 차지하였으니 따라서 낙랑· 진한·변한 세 나라가 생겨 지금의 조령 ( 鳥嶺 ) 이남과 임진강 이북을 나누어 차지하였으나 , 진·변 두 한은 이름은 나라로되 설상은 신·불 두 조선의 유민의 자치부 ( 自治部 ) 로써 마한에 대하여 조공과 납세 를 끊지 아니하여 낙랑 같은 적국이 아니었다 .
 
==제 5 장 삼조선 붕괴의 원인과 결과 ==
 
1.三神說의 破정
 
앞의 제 2 · 3 · 4 장에서 대강 서술한 바와 같이 , 신·말·불 삼조선 이 이렇게 한꺼번에 무너져버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 1) 삼한은 원래 천일 ( 天 一 )·지일 ( 地一 )·태일 ( 太一 ) 의 삼신설에 의하여 인민이 `말한'은 천신의 대표로 , `불한'은 지신의 대표로 `신한'은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큰 우주 유일신의 대표로 신앙하여 오다가 말·불 두 한이 신한을 배반하고 각기 스스로 신한이라 일컬어 삼대왕이 나란히 서서 지력 ( 智力 ) 으로 지위를 획득하매 , 일반 사람들이 계급은 자연적·고정적이 아니고 힘만 있으면 파괴할 수도 있고 건설할 수도 있음을 깨 달아서 삼신설을 의심하기에 이르렀음이 그 원인이고 , 2) 역대의 삼한이 한갓 삼신이 미신으로만 인심을 끌어갈 뿐 아니라 , 매양 외구 ( 外寇 ) 를 물리치고 국토를 확장하여 천하가 다 그 위령에 떨게 하였는데 , 이제 삼국의 신하들도 흉노와 지나의 잇달은 침략을 저항하지 못하여 국토가 많이 떨어져 나가매 , 일반 사람들이 이에 제왕도 사람의 아들이요 , 하늘의 아들이 아니므로 그의 성패 흥망도 보통 사람과 같음을 알고 , 삼한의 신엄 ( 神嚴 ) 을 부인함에 이르렀음이 그 가까운 원인이니 , 삼신설의 기초 위에 세운 삼한이므로 삼신설의 파탄이 생긴 이후 에야 어찌 붕괴하지 않을 수 있으랴 ?
 
2.列國의 분립
 
삼신설의 파탄이 생겨 삼한에 대한 신앙이 추락되니 , 이는 확실히 조선 유사 이래의 큰 변국 ( 變局 ) 이었다 . 그러므로 일부 인민들이 신인과 영웅들의 허위를 깨닫고 , 왕왕 자치촌 ( 自治村 )·자치계 (自治 ) 같은 것을 설립하여 민중의 힘으로 민중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시험하였으니 , 기록에 보인 증적은 진한부 ( 辰韓部 )·변한부 ( 弁韓部 ) 같은 것이 그 일종이요 , 그 밖에도 역사책에 누락된 그러한 시험이 많았을 것이다 .
 
그러나 미신을 타파하여 우주 문제 , 인생 문제 등을 올바르게 해결한 학설이 없고 , 사방의 이웃은 조선보다 문화가 낮은 예·선비·흉 노·왜 등 야만족들이라 진화에 도움이 될 벗이 없으며 , 지나는 비록 구원한 문화를 가졌으나 거의 군권 ( 君權 ) 을 옹호하는 사상과 학설뿐 이라 , 그 문자의 수입이 도리어 민중의 진보를 방해하게 되었다 .
 
민중의 지력은 유치하고 옛 세력의 뿌리는 깊이 박혀 었어서 , 이에 제왕의 후예들은 그 조상의 지위를 회복하려 하고 민간의 사납고 용감한 영웅들은 사회의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려 하며 작은 나라는 큰 나라가 되기를 희망하고 , 큰 나라는 더욱 강토를 확장하려 하여 , 혹은 신수두님[大檀君]이라 일컫고 , 혹은 신한〔辰王〕이라 일컬으며 , 혹은 말한[麻立干〕이라 일컫고 , 혹은 불구래〔弗矩內〕라 일컬으며 , 혹은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고 , 혹은 해외에서 떠왔다 하며 , 혹은 태양의 정기로 생겨났다 하고 , 혹은 알 속에서 나왔다고하여 , 전통적 미신 세력에 의지하여 민중을 유혹 혹은 위협하니 구구한 민중 세력의 새싹이라 할 얼마간의 자치 단체가 그 정복을 받아 스스로 사라지고 , 세력 쟁탈 의 싸움이 사방에서 일어나 여러 나라의 쟁웅시대 ( 爭雄時代 ) 를 형성하였다 .
 
= 제 4 편 열국(列國)의 쟁웅(爭雄)시대 =
 
== 제 1 장 열국의총론 ==
 
1.列國의 연대의 正誤
 
삼조선이 무너지고 신수두님 ·신한·말한·불구래 등의 참람 ( 僭濫 ) 한 칭호를 일컫는 자가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 열국 분립의 판국을 만들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열국사 ( 列國史 ) 를 말하려면 전사 ( 前史 ) 에서 열국의 연대를 줄여버렸으므로 이제 그 연대부터 말 해야겠다 . 어찌하여 열국의 연대가 줄어졌다 하는가 ? 먼저 고구려 연대가 줄어진 것부터 말하리라 . 고구려가 신라 시조 혁거세 ( 赫居世 ) 21 년 , 기원전 37 년에 건국하여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8 년 ( 기원 668 년 ) 에 망하니 나라를 누리기를 도합 705 년이라고 일반 역사가들이 적어왔다 .
 
그러나 고구려가 망할 때에 , 9 백 년에 마치지 못한다 ( 不及九百 年 ). ”라고 한 비기 ( 秘記 ) 가 유행했는데 , 비기가 비록 요망한 글이라 하더라도 그 시대에 그 비기가 인심 동요의 도화선이 되었으니 , 이때 ( 문무왕 8 년 ) 에 고구려의 연조가 8 백 몇십 년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 본기 ( 本紀 ) 의 705 년이 의문됨이 그 하나요 , 고구려 본기로 보면 광개 토왕이 시조 추모왕 ( 鄭후王 ) 의 13 세손밖에 안 되는데 광개토왕의 비 문에 , “ 17 세손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에게 전하였다 ( 傳之十七世孫 廣開土境平安好太王 ). ”고 한 문구에 의거하면 광개토왕이 시조 추모왕의 13 세손이 아니라 , 17 세손이다 . 이같이 세대가 빠진 본기라 , 그 705 년 이라고 한 연조는 믿을 수 없음이 그 둘이요 , 본기로써 상고하면 고구 려 건국이 위우거 ( 衛右渠 ) 가 멸망한 지 72 년만이지마는 , 북사 ( 北史 ) 고려전 ( 高麗傳 ) 에는 막래 ( 莫來 ) 가 서서 부여를 쳐 크게 깨뜨리고 이를 복속시켰는데 , 한 ( 漢 ) 의 무제 ( 武帝 ) 가 조선을 토멸하고 사군 ( 四郡 ) 을 둘 때에 고구려를 현 ( 縣 ) 이라고 하였다 . 막래는 해동역사 ( 海東繹史 ) 에 , “모본 ( 慕本 ) 의 잘못인가 ? ” 하였으나 , 막래는 `무뢰'로 읽을 것이니 , 우박〔雹 〕이라는 뜻이고 , 신 ( 神 ) 이라는 뜻이다 .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의 이름 `무휼 (憮恤 ) '과 음이 같을 뿐더러 , 본기에도 동부여를 정복한 이가 곧 대주류왕이니 , 막래는 모본왕 ( 幕本王 ) 이 아니라 대주류왕일 것이요 , 막래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뒤에 한나라 무제가 사군을 설치하였으니 , 고구려 건국이 사군 설치보다 약 백 몇십년 전이 될 것이 의심없음이 그 셋이다 . 고구려 당시의 비기 ( 秘記 ) 와 그 자손 제왕의 건립으로 된 비문이 먼저 분명히 증명하고 , 비록 외국인이 전해 들은 기록이지마는 북사 ( 北史 ) 가또한 증명하니 , 고구려 연대의 백 몇십 년 줄어들었음이 더욱 확실하다 .
 
안순암 ( 安順庵 : 安鼎福 ) 선생이 고구려 족자 ( 族子 ) 인 안승 ( 安勝 ) 을 봉한 신라 문무왕의 말에서 , “햇수 거의 8 백년 ( 年將八百年 ) ”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연조가 줄어 들었음을 일정하였으나 , 실은 8 백을 9 백으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 대개 고구려의 연대를 줄인 뒤에 9 백을 8 백으로 고쳐 고구려의 향국 ( 享國 ) 이 705 년이라는 위증을 만든 것이다 . 어찌하여 고구려의 연대가 줄어들었는가 ? 이는 고대 건국의 선후 ( 先後 ) 로 국가의 지위를 다투는 풍기 ( 風氣 : 鄒牟와 松讓이 서울 세운 앞뒤를 다툰 따위 ) 가 있으므로 , 신라가 그 건국이 고구려와 백제 보다 뒤짐을 부끄러이 여겨 , 두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기록상의 세대 와 연조를 줄여 모두 신라 건국 이후의 나라로 만든 것이고 , 동부여 · 북부여 등의 나라는 신라와 은혜나 원수가 없는 앞선 나라이지만 이미 고구려의 연조를 백 몇십 년이나 줄였으니 , 사실의 관계상 고구려 · 백제의 부조 ( 父祖 ) 뻘인 동부여의 연대와 고구려 ·백제의 형제뻘인 가라 ( 加羅 ) ·옥저 ( 沃沮 ) 등의 나라의 연대까지 줄여버린 것이다 . 그래 서 이제 전사 ( 前史 ) 에 보인 고구려 건국 원년에서 백 몇십 년을 넘어 , 기원전 190 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을 동부여 ·북부여와 고구려의 분립한 시기로 잡고 , 그 이하 모든 나라도 같은 시기로 잡아 열국사 ( 列 國史 ) 를 서술하고자 한다 .
 
2. 열국의 강역 ( 列國의 疆域 )
 
여러 나라의 연대만 줄였을 뿐 아니라 , 그 강역도 거의 다 줄여서 , 북쪽의 나라가 수천 리를 옮겨 남쪽으로 온 것이 한둘이 아니다 . 강역은 또 어찌하여 줄여졌는가 ? 신라 경덕왕 ( 景德王 ) 이 북쪽의 땅을 잃고 , 그 북쪽의 옛 지명과 고적을 남쪽으로 옮김이 첫째 원인이 되고 고구려가 쇠약해져서 압록강 이북을 옛 땅으로 인정하지 못하여 전대 ( 前代 ) 의 지리를 기록할 때에 북쪽의 나라를 또한 남쪽으로옮긴 것이 많음이 둘째 원인이 되어 , 조선의 지리 전고 ( 典故 ) 가 말할수 없이 뒤바뀌어 , 비록 근세의 한구암 ( 韓久庵 : 韓百謙 ) ·안순암 등 여러 선유 의 수정을 거쳐서 얼마쯤 회복이 되었으나 , 열국 시대의 지리는 그 퇴축 ( 退縮 ) 됨이 전과 마찬가지다 . 이제 그 대략을 말할 것이다 .
 
첫째는 부여다 . 신조선이 최초에 세 개의 부여로 나뉘었으니 , 하나 는 북부여이다 . 북부여는 아사달에 도읍하였다 . 삼국지에 “현도의 북 쪽 천 리 ( 玄之北千里 ) ”라 하였으니 , 지금의 합이빈인데 선유들은 지금의 개원 ( 開原 ) 이라고 하였다 . 또 하나는 동부여인데 , 동부여는 갈사나 ( 曷思那 ) 에 도읍하였다 . 대무신왕 ( 大武神王 ) 이 동부여를 칠 때 , `북벌 ( 北伐 ) 한다 . '고 하였으니 고구려의 동북 --지금의 훈춘 ( 揮春 ) 등지가 동부여인데 , 선유들은 지금의 강릉 ( 江陵) 이라고 하 였다 . 다른 하나는 남부여다 .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격파한 뒤에 동부여가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옛 갈사나에 머물렀으니 , 곧 남부여다 . 동 부여는 오래지 않아 고구려에 투항하매 , 국호가 없어지고 남부여는 문자왕 ( 文姿王 ) 3 년 ( 기원 494 년 ) 에 비로소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 동부 여 ·남부여는 곧 함흥인데 , 선유들은 그 강역을 모를 뿐 아니라 , 그 명칭조차 몰랐다 .
 
둘째는 사군 ( 四郡 이다 . 위만 ( 衛滿 ) 이 동으로 건너온 패수가 위략 의 만반한 ( 滿潘汗 ), 한서지리지의 요동군 ( 選東郵 ) 문번한 ( 沈睡규 ), 곧 지금의 해성 ·개평 등지이니 헌우란 ( ) 이 옳다 . 한나라 무제 ( 武帝 ) 가 점령한 조선이 패수 부근 , 위만의 옛 땅이니 , 그가 설치한 사군만 삼조선의 국명과 지명을 가져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것인 데 , 선유들은 매양 사군의 위치를 지금의 평안·강원 ·함경 등 여러 도와 고구려의 서울인 지금의 만주 환인 ( 桓仁 ) 등지에서 찾았다 .
 
셋째는 낙랑국 ( 樂浪國 ) 이다 . 낙랑국은 한 ( 漢 ) 의 낙랑군 ( 樂浪郡 ) 과 각각 다른 , 지금의 평양에 나라를 세운 것인데 선유들은 이를 혼동하였고 , 그 밖에 고구려 ·백제의 초대의 서울과 신라·가라의 위치는 선유들의 수정한 것이 대략 틀림이 없으나 , 주군 ( 州那 ) 혹은 전쟁을 한 지점의 위치는 거의 신라 경덕왕 이후에 옮겨다 설치한 지명을 그 대로 써서 착오가 생겼으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교정하여 열국사를 서술해 나가고지자 한다 .
 
==제 2 장 列國의 分立 ==
 
1. 東扶餘의 分立
 
1) 解夫婁(해부루)의 東遷(동천)과 解幕漱(해모수)의 일어남
 
북부여와 두 동부여와 고구려의 네 나라는 신조선의 판도 안에서 나라를 세웠다 .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 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 시 나누어져서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라는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 부터 위의 세 나라가 되었는지 , 이는 상고할 길이 없거니와 , 신조선이 흉노 모돈 ( 冒頓) 에게 패한 때가 기원전 200년 경이요 , 동 ·북부여의 분립도 또한 기원전 200 년경 이니 , 나중의 설이 혹 근사하지 않을까 한다 .
 
전사 ( 前史 ) 에 동 ·북부여가 분립한 사실을 기록하여 ,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다니며 기도하여 아들 낳기를 구하다가 곤연 ( 鯤淵 : 鏡泊湖 경박호 ) 에 이르러서는 왕이 탄 말이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뒤집으니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는지라 왕이 말하기를 , “이는 하늘이 주신 내 아들이다 .” 하고 데려다 길러서 이름을 금와 ( 金蛙 ) 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 그 뒤 얼마만에 상 ( 相 ) 아란불 ( 阿蘭弗 ) 이 왕에게 , “요사이 하늘이 저에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이 땅에는 장차내 자손으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려고 하니 , 너희들은 동해변의 가섭원 ( 迦葉原 ) 으로 가거라 , 그 땅이 기름져 오곡이 잘 되느니라고 하더이다 .” 하고 서울을 옮기기를 청하므로 , 왕이 그의 말을 쫓아 가섭원으로 천도하여 ,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고 고도 ( 故都 ) 에는 천제 ( 天帝 ) 의 아들 해모수 ( 解募漱 ) 가 오룡거 ( 五龍車 ) 를 타고 , 종자 백여 명은 흰 고니〔白鳥〕를 타고 웅심산 ( 熊心山 , 일명 阿斯山 , 또 일명은 鹿山이니 지금 哈爾濱의 宗達山 ) 에 내려와서 , 채운 ( 彩雲 ) 이 머리 위에 뜨고 음악이 구름 속에서 울리기를 10 여일 만에 , 해모수가 산 아래로 내려와 , 새깃의 관을 쓰고 용광 ( 龍光 ) 의 칼을 차고 , 아침에는 정사 ( 政事 ) 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올라가므로 세상 사람들이 천제의 아들이라 일컬었다 .”고 하였다 .
 
어떤 이는 , “기록이 너무 신화적이라 믿을 수 없다 .”고 하지마는 , 어느 나라이고 고대의 신화시대가 있어 후세 역사가들이 그 신화속에 서 사실을 캐내게 되는 것이다 . 이를테면 , `말이 돌을 보고 눈물을 흘 렸다' `하늘이 아란불에게 내려왔다 . ' 해모수가 오룡거를 타고 하늘 에서 내려왔다 . '고 한 말들은 다 신화이지만 , 해부루가 남의 집 사생 아인 금와를 주워다가 태자를 삼았음도 사실이요 , 해부루가 아란불의 신화에 의하여 천도를 단행한 것도 사실이요 ,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라고 일컫고 고도 ( 故都 ) 에 웅거하였음도 사실이니 , 통털어 말하면 우리 북부여의 분립은 역사상 빼지 못할 큰 사실이다 .
 
다만 우리가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 이것이 북부여인이나 동부여인이 부여의 계통을 서술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 한갓 고구 려인이 그 시조 추모왕 ( 鄒牟王 ) 의 내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 이므로 겨우 해부루 ·해모수 두 대왕이 동 ·북부여로 분립한 약사를 말했을 뿐이고 , 그 이전의 부여 해부루의 내력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 하였음이 그 하나요 , 또한 그나마 고구려인이 기록한 원문이 아니라 신라 말엽의 한학자인 불교승이 개찬 ( 改撰 ) 한 것이므로 , 신가를 고구려의 이두문대로 `상가 ( 相加 ) '라 쓰지 않고 한문의 뜻대로 상 ( 相 ) 이라 썼으며 , `가시라'를 고구려 이두문대로 `갈사나 ( 曷思那 ) '라 쓰지 않고 불경 ( 佛經 ) 의 명사에 맞추어 가섭원 ( 加葉原 ) 이라 써서 본래의 문자가 아님이 그 둘이다 .
 
당시의 제왕 ( 帝王 ) 은 제왕인 동시에 제사장 ( 祭司長 ) 이며 , 당시의 장상 ( 將相 ) 은 장상인 동시에 무사 ( 巫師 ) 요 , 복사 ( 卜師 ) 였으니 , 해부루는 제사장 ---대단군의 직책을 세습한 사람이고 아란불은 강신술 ( 降神術 ) 을 가진 무사와 미래를 예언하는 복사의 직책을 겸한 상가 ( 相加 ) 였다 . 대단군과 상가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지만 , 신조선의 습관엔 내우외환 같은건 물론이요 , 천재지변 같은 것도 그 허물이 대단군에게로 돌아간다 ( 삼국지에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아니하면 곧 그 허물이 왕에게로 돌아가서 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 혹은 마땅히 죽여야 한다 --水早不調 五穀不登 輒歸輒於 或 言當易 或言當殺 ) 고 하였다 .
 
천시 ( 天時 ) 나 인사 (人事 ) 에 불행이 있으면 대단군을 대단군으로 인정치 않고 내쫓았는데 , 이때가 흉노 모돈과 전쟁을 치른지 오래지 않았으니 , 아마 패전의 부끄러움으로 말미암아 인민의 신망이 짧어져서 대단군의 지위를 보전할 수 없으므로 아란불과 모의해 갈사나 --지금의 훈춘 등지로 달아나서 새 나라를 세운 것이고 , 해모수는 해부루 와 동족이며 고주몽 ( 高朱蒙 ) 의 아버지다 . 삼국유사 왕력편 ( 王歷篇 ) 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 대개 해모수가 해부루의 동천 ( 東遷 ) 을 기회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대단군이라 스스로 일걷고 왕위를 도모한 것이고 , 부여는 불 곧 도성 ( 都城 ) 혹은 도회를 일컬음이므로 , 해부루가 동부여라 일컬으매 , 해모수는 북부여라 일컬었을 것이니 , 북부여라는 명칭이 역사에 빠졌으므로 최근 선유들이 두 가지를 구별 하기 위하여 비로소 왕 노릇한 부여를 북부여라 일컬었다 .
 
2) 南北曷思·南北 沃沮의 두 東扶餘의 분립(남북갈사·남북옥저의 두 동부여의 분립)
 
해부루가 갈사나 --지금의 훈춘에 천도하여 동부여가 되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 갈사나란 무엇인가 ? 우리 옛말에 숲을 `갓' 혹은 `가시'라 하였는데 , 고대에 지금의 함경도와 만주 길림의 동북부와 소련 연해주의 남쪽 끝에 나무가 울창하여 수천 리 끝이 없는 대삼림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 이 지역을 `가시라'라 일컬었으니 , `가시라'란 삼림국 ( 森林國 ) 이라는 뜻이다 . `가시라'를 이두문으로 갈사국 ( 曷思國 ) ·가슬라 ( 加瑟羅 ) ·가서라 ( 迦西羅 ) ·아서량 ( 阿西良 ) 등 으로 적는데 ,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지리지에 보인 것이고 , 또 혹`가섭원기 ( 迦葉原記 ) '라고도 하였으니 , 이는 대각국사 ( 大覺國師 ) 의 삼국사 ( 三國史 ) 에 보인 것이다 .
 
지나사에서는 `가시라'를 `옥저 ( 沃沮 ) '라고 적었는데 ,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 의하면 옥저는 `와지'의 번역이고 , `와지'는 만주어의 숲이니 , 예 ( 濊 ) 곧 읍루 ( 輯婁 ) 는 만주족의 선조요 , 읍루가 당시 조선 열국 중 말〔言〕이 홀로 달라서 삼국지나 북사에 특기하였으니 , 우리의 `가시라'를 예족 ( 濊族 ) 은 `와지'라 불렀으므로 지나인들은 예어를 번역하여 옥저라고 한 것이다 . 두만강 이북을 북갈사 ( 北曷思 ) 라 일컫고 , 이남을 남갈사 ( 南曷思 ) 라 일컬었는데 , 북갈사는 곧 북옥저 ( 北沃沮 ) 요 , 남갈사는 곧 남옥저 ( 南沃沮 ) 이니 지금의 함경도는 남옥저에 해당된다 .
 
고사에 남·북옥저를 다 땅이 기름지고 아름답다고 하였으나 , 지금의 함경도는 메마른 땅이니 , 혹 옛날과 지금의 토질이 달랐던 것이 아닌가한다 . 두 `가시라'의 인민들이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업과 어업에 종사하고 여자가 다 아름다우므로 , 부여나 고구려의 호민 ( 豪民 ) 들이 이를 착취하여 어물과 농산물을 천 리 먼 길에 갖다 바치게 하고 ,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다가 비첩 ( 婢妾 ) 을 삼았다고 한다 .
 
해부루가 북 ` 가시라' --지금의 훈춘으로 옮겨가 동부여가 되어 , 아들 금와를 거쳐 손자 대소 ( 帶素 ) 에 이르러 대소가 고구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에게 패하여 죽고 , 아우 모갑 ( 某甲 ) 과 종제 ( 從弟 ) 모을 ( 某 乙 ) 이 나라를 다투어 모을은 구도 ( 舊都 ) 에 웅거하여 북갈사 ( 北曷思 ) 혹은 남동부여 ( 南東扶餘 ) 라 하였는데 , 그 자세한 것은 다음 장에서 말하려니와 지금까지의 학자들이 , a) 동부여가 나뉘어 북동 ·남동의 두 부여로 되었음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만 기록하고 , b) 옥저가 곧 갈사 ( 曷思 ) 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서 갈사를 찾으려 하고 , c)북동 ·남 동의 두 갈사가 곧 남 ·북의 두 갈사 ( 兩加瑟羅 ) 요 , 남북의 두 갈사가 곧 남북의 두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 ·갈사 ·옥저를 각각 다른 세 지방 으로 나누고 , d) 강릉 ( 江陵 ) 을 `가시라' --기슬나 ( 加瑟那 ) 라 함을 신라 경덕왕이 북쪽 땅을 잃은 뒤에 옮겨 설치한 고적인 줄을 모르고 드디어 기슬나가 동부여의 옛 서울이라고 하였다 . 그래서 지리가 문란하고 사실이 흔란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었거니와 , 이제 갈사 ( 曷思 ) ·가슬 ( 加瑟) ·가섭 ( 迦葉 ) 이 이두문으로 다 같이 `가시라'임 을 알고 , 대소의 아우 모갑과 그 종제 모을이 나뉘어 있는 두 `가시라'의 위치를 찾아서 두 `가시라'가 곧 남·북 옥저임을 알고 ,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고구려로 올 때에 `남으로 달아났다 ( 南奔 ). '는 말과 , 주류왕 ( 朱留王 ) 이 고구려에서 동부여를 칠 때에 , `북쪽을 쳤다 ( 北伐 ). '는 말로써 북 `가시라'의 위치를 알아서 위와 같이 정리하였다 .
 
3)北扶餘의 문화
 
북부여의 역사는 오직 해모수가 도읍을 세운 사실 이외에는 겨우 북부여의 별명인 황룡국 ( 黃龍國 ) 이 고구려 유류왕 ( 備留王 ) 본기에 한번 보이고는 다시 북부여에 대한 말이 우리 조선인의 붓끝으로 전해진 것이 없고 , 만일 전해진 것이 있다 하면 다 지나사에서 초록한 것 이다 . 북부여의 서울은 `아스라' --부사량 ( 扶斯樑 ) 이니 , 곧 대단군 왕검의 삼경 ( 三京 )-- 세 왕검성의 하나요 , 지금의 소련령 ( 領 ) 우수리[烏蘇里〕는 곧 `아스라'의 이름이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 그 본래의 땅은 지금의 합이빈이니 , 망망한 수천 리의 평원으로 땅이 기름져서 오곡이 잘 되고 , 종횡으로 굴곡 ( 屈曲 ) 한 송 ( 松 : 古名 아리라 ) 이 있어 교통의 편의를 주고 , 인민이 부지런하고 굳세며 , 대주 ( 大珠 ) ·적옥 ( 未玉 ) 의 채굴과 그림 비단과 수놓은 비단의 직포와 여우 ·삵·원숭이 ·담비 등의 가죽을 외국에 수출하며 , 성곽 ·궁설의 건축과 , 창고 저축의 많음이 다 옛 서울의 문명을 자랑했다 . 왕검의 태자 부루가 하우에게 홍수 다스라는 법을 가르쳤다 운운하는 금간옥첩의 문자도 왕궁에 보관되어 있고 , 신지 ( 神志 ) 라 일컫는 이두문의 역사류며 , 풍월 ( 風月 ) 이라 일컫는 이두문의 시가집 ( 詩歌集 ) 도 대개 이 나라에 수집해 있었다 .
 
해모수 이후에 북부여는 예와 선비를 정복하여 한때 강국으로 일컬어 지다가 뒤에 예와 선비가 반 ( 叛 ) 하여 고구려로 돌아가자 , 국세가 마침내 쇠약해져서 조선 열국의 패권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렸다 .
 
2. 고구려의 일어남
 
1) 鄒牟王(추모왕)의 고구려 건국
 
고구려 시조 추모 ( 鄒牟 : 혹 朱蒙 ) 는 천생으로 용맹과 힘과 활 쏘는 재주를 타고나서 , 과부 소서노 ( 召西奴 ) 의 재산으로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교묘하게 왕검 이래의 신화를 이용하여 , 하늘의 알에서 강생 ( 降 生 ) 하였다 자칭하고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 안으로 열국의 신임을 받아 정신적으로 조선을 통일하고 밖으로 그의 기이한 행적의 이야기를 지나 각지에 퍼뜨려서 그 제왕과 인민들이 교주로 숭배하기에 이르렀으므로 , 신라 문무왕 ( 文武王 ) 은 , `남해에 공을 세우고 , 북산에 덕을 쌓았다 ( 立功南海 積德北山 ). ' 하는 찬사를 올렸고 , 지나 2 천 년 이래의 유일한 공자 반대자인 동한 ( 東漢 ) 의 학자 왕충 ( 王充 ) 이 그 사적을 기록함에 이르렀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기원전 58 년이 출생한 해요 , 기원전 37 년이 그 즉위한 해이지만 , 이는 줄어든 연대라 의거할 것이 못 되고 , 추모 ( 鄒牟 ) 가 곧 해모수의 아들이니 기원전 200년 경 동 · 북부여가 분립하던 때가 출생한 때일 것이고 , 위만과 같은 때 일 것이다 .
 
처음에 아리라〔松花江〕의 부근에 있는 장자 ( 長者 ) 가 , 유화 ( 柳花 ) · 훤화 ( 萱花 ) ·위화 ( 葦花 ) 의 세 딸을 두었는데 , 다 절세의 미인이요 , 유화가 더욱 아름다웠다 . 북부여왕 해모수가 나와 다니다가 유화를 보고 놀라 사랑하여 야합해서 아이를 배었다 . 그러나 이때 왕실은 호족과만 결혼하고 서민과는 결혼을 하지 아니했으므로 해모수가 그 뒤에 유화를 돌아보지 아니하였고 , 서민은 서민과만 결혼하는데 , 남자가 반드시 여자의 부모에게 가서 폐백을 드리고 사위되기를 두 번 , 세 번 간곡히 빌어서 그 부모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고 결혼한 뒤에는 남자가 여자의 부모를 위해 , 그 집의 머슴이 되어 3 년의 고역을 치르고야 딴 살림을 차려 자유로운 가정이 되었으므로 유화의 실행이 발각되매 그 부모가 크게 노하여 유화를 잡아 우발수 ( 優渤水 ) 에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 그러나 어떤 어부가 그녀를 건져 동부여왕 해금와 ( 解金輕 ) 에게 바쳤다 .
 
금와왕이 유화의 아름다운 자색을 사랑하여 후궁에 두어 첩을 삼았는데 , 오래잖아 아이를 낳으니 곧 해모수와 야합한 결과였다 .
 
금와왕이 유화를 힐문하니 유화가 이를 , “해 그림자에 감응하여 낳은 천신 ( 天神 ) 의 아들이고 , 자기가 아무 잘못을 범한 일이 없다 .”고 했다 . 금와왕이 그 말을 믿지 않고 , 그 아이를 돼지에게 먹이려고 우리에 넣어도 보고 말에 밟혀 죽으라고 길에 내던져도 보고 , 산짐승의 밥이 되라 하여 깊은 산속에 버려도 보았으나 , 다 아무 소용이 없으므 로 이에 유화에게 거두어 기르기를 허락하였다 . 그 아이가 자라니 그 또래에서 기운이 뛰어나고 활 잘 쏘기가 짝이 없으므로 이름을 추모 ( 鄒牟 ) 라고 하였다 .
 
위서 ( 魏書 ) 에는 추모를 주몽 ( 朱蒙) 이라 쓰고 , 주몽은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일컬은 것이라고 풀이하였으며 만주원류고 ( 滿洲源流考 ) 에는 , “지금 만주에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릴무얼〔卓琳奔阿〕'이라 하니 , 주몽은 곧 `주릴무얼'이다 . '라고 하였다 . 그러나 광개토왕의 비문에는 주몽을 추모라 하였으며 , 문무왕 ( 文武王 ) 의 조서 ( 詔書 ) 에는 `중모 ( 中牟 ) '라 하고 `주몽'이라고 하지 않았다 . 주몽이라 하였음은 지나사에 전해오는 것을 신라의 문사들이 그대로 써서 고구려 본기에 올리게 된 것인데 추모 · 중모는 `줌' 혹은 `주모'로 읽을 것이니 , 이는 조선어요 주몽은 `주물'로 읽을 것이다 . 이는 예어 ( 濊語 )-- 만주족 시대의 말로 , 지나사의 주몽은 예어를 말한 것이니 , 원류고에 말한 바가 이치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 이 책에서는 비문에 따라 추모 ( 鄒牟 ) 라고 한다 .
 
금와왕이 아들 7 형제를 두었는데 , 맏아들이 대소이다 . 대소가 추모의 재주를 시기하여 왕에게 권하여 죽이려고 하였는데 , 늘 유화의 주선으로 화를 면했다 . 추모가 19 살이 되자 대궐에서 기르는 말 먹이는 일을 맡아보았는데 말을 다 살찌고 튼튼하게 잘 먹였으나 오직 준마 하나를 골라 혀에 바늘을 꽂아놓아 말이 먹지 못해서 날로 여위어 졌다 . 왕이 말들을 돌아보고는 추모의 말 잘 먹인 공을 칭찬하고 , 그여윈 말을 상으로 주었다 . 추모는 바늘을 뽑고 잘 길러서 신수두의 10 월 대제 ( 大祭 ) 에 타고나가 사냥에 참여하였는데 , 왕은 추모에게 겨우 화살 하나를 주었지마는 , 추모는 말을 잘 달리고 활을 잘 쏘아 그가 쏘아 잡은 집승이 대소 7 형제가 잡은 것보다 몇 갑절이 더 많았다 . 이 에 대소는 더욱 그를 시기하여 기어코 죽이려고 음모를 꾸였다 . 추모가 이를 알고 예씨 ( 禮氏 ) 에게 장기들어 표면으로 가정생활에 안심하고 있음을 보이고 속으로는 은밀히 오이 ( 烏伊 ) ·마리 ( 摩離 ) ·협부 ( 父 ) 세 사람과 공모하여 비밀히 어머니 유화에게 작별을 고하고 아내를 버리고는 도망하여 졸본부여 ( 卒本扶餘 ) 로 갔는데 , 이때 추모의 나이 22 살이었다 .
 
졸본부여에 이르니 이곳의 소서노 ( 召西奴 ) 라는 미인이 아버지 연타발 ( 延陀渤 ) 의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서 , 해부루왕의 서손 ( 庶孫 ) 우태 ( 優台 ) 의 아내가 되어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을 낳고 우태가 죽어 과부로 있었는데 , 나이 37 살이었다 . 추모를 보자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였는데 추모는 그 재산을 가지고 뛰어난 장수 부분노 ( 扶芬奴 ) 등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거두어 나라를 경영하여 , 흘승골 ( 升骨 ) 의 산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가우리'라 하였다 . `가우리'는 이두자 ( 吏讀字 ) 로 고구려 ( 高句麗 ) 라 쓰니 , 중경 ( 中京 ) 또는 중국 ( 中 國 ) 이라는 뜻이었다 .
 
졸본부여의 왕 송양 ( 松讓 ) 과 활쏘기를 겨루어 이를 꺾고 이어 부분노를 보내 그 무기고를 습격해서 빼앗아 마침내 그 나라를 항복받고 , 부근의 예족 ( 濊族 ) 을 내쫓아 백성들의 폐해를 없앴으며 , 오이 ( 烏 伊 ) ·부분노 등을 보내어 태백산 ( 太白山 ) 동남쪽의 행인국 ( 荇人國 : 지점 미상 ) 을 토멸하여 성읍 ( 城邑 ) 을 삼고 , 부위염 ( 扶慰) 을 보내어 동부여를 쳐서 `북가시라'의 일부분을 빼앗으니 <광개토왕비문에 , “동 부여의 옛 것이 추모왕의 속민이 되었다 ( 東扶餘 舊是 鄒牟王 屬民 ) ”고 한 것이 이를 가리킴인 듯 >, 이에 고구려가 섰다 .
전사 ( 前史 ) 에 왕왕 송양 ( 松讓 ) 을 나라 이름이라고 하였는데 , 이상 국집 ( 李相國集 ) 동명왕편 ( 東明王篇 ) 에 인용한 구삼국사 ( 舊三國史 ) 를 상고해보면 비류왕 송양 ( 沸流王松讓 ) 이라고 하였으니 , 비류는 곧 부여로 졸본부여를 일컬은 것이므로 , 송양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졸본 부여왕의 이름이다 . 또 추모가 졸본부여의 왕녀에게 장기들었는데 , 왕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고 하였으나 졸본부여의 왕녀 곧 송양의 딸에게 장가 든 사람은 추모의 아들 유류 ( 備留 ) 요 , 추모가 장가든 소서노는 졸본부여의 왕녀가 아니다 . 추모왕을 본기 ( 本紀 ) 에 `동명성왕 ( 東明聖王 ) '이라 하였으나 , 동명 ( 東明 ) 은 `한몽'으로 읽을 것이니 , `한몽'이란신수두 대제 ( 大祭 ) 의 이름 이다 . 추모왕을 신수두 대제에 존사 ( 尊祀 ) 하므로 한몽 --동명이라는 칭호를 올린 것이고 , 성왕의 성 ( 聖 ) 은 `주무'의 의역 ( 義譯 ) 이다 .
 
2) 東扶餘와 고구려의 알력
 
추모왕 다음으로 아들 유류왕 ( 儒留王 ) 이 왕위를 잇고 , 유류왕 다음 에 그 아들 대주류왕 ( 大朱留王 ) 이 왕위를 이었다 .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 琉璃明王 ) 유리 ( 類利 ) 이니 , 유류 ( 儒留 ) ·유리 ( 琉璃 ) ·유리 ( 類 利 ) 는 다 `누리'로 읽을 것으로 세 ( 世 ) 라는 뜻이고 명 ( 明 ) 이라는 뜻이 요 , 대주류왕은 본기의 대무신왕 무휼( 大武神王無恤 ) 이니 , 무 ( 武 ) · 주류 ( 朱留 ) ·무홀 ( 無恤 ) 은 다 `무뢰'로 읽을 것으로 우박〔雹〕의 뜻이고 신 ( 神 ) 의 뜻인데 , 이제 유리 ( 琉璃 ) 와 명 ( 明 ) 은 시호로 쓰고 , 유리 ( 類利 ) 는 왕의 이름을 쓰며 , 무 ( 武 ) 와 신 ( 神 ) 은 시호로 쓰고 , 무홀 ( 無恤 ) 은 이름으로 쓴 건 본기의 망령된 판단이다 . 이제 여기서는 비문을 쫓아 유리 ( 琉璃 ) 를 유류 ( 儒留 ) 로 , 대무신 ( 大武神 ) 을 대주류 ( 大朱留 ) 로 쓴다 .
 
유류왕 때에 동부여가 강성하여 금와왕의 아들 대소왕 ( 帶素王 ) 은 왕위를 이어받자 고구려에게 신하 노릇하기를 요구하고 볼모[質子〕를 보내라고 하여 , 왕이 그대로 하려고 하다가 두 태자를 희생하기에 이르렀다 . 첫째 태자는 도절 ( 都切 ) 인데 , 유류왕이 동부여에 볼모로 보내려고 하였으나 , 도절이 듣지 아니하자 왕이 크게 노했으므로 도절이 울분으로 병이 나서 죽었다 . 둘째 태자는 해명 ( 解明 ) 인데 그는 용맹이 뛰어났었다 . 유류왕이 동부여의 침략을 두려워해 국내성 ( 國內 城 )-- 지금의 집안현 ( 輯安縣 ) 으로 서울을 옮기니 , 해명이 이를 겁약 ( 怯弱 ) 한 일이라 하여 따라가지 아니하였다 . 북부여왕 (北扶餘王 : 본보기의 黃龍國王 ) 이 해명에게 강한 활을 보내어 그 힘을 시험해보려고 하자 해명이 그 자리에서 그 활을 당겨서 꺾어 북부여 사람의 힘 없음을 조롱하였다 . 왕이 이 말을 듣고 해명은 장차 나라를 위태롭게 할 인물이라하여 처음에는 북부여에 보내서 북부여왕의 손을 빌려 죽이려고 하였으나 , 북부여왕이 해명을 공경하고 사랑하여 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 유류왕은 더욱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 해명에게 칼을 주어 자살하게 하였다 .
 
두 태자의 죽음은 혹 대궐 안 처첩들의 질투가 원인이 되기도 하였 겠지마는 그것은 대개 동부여와의 외교상 관계에서 온 것이었으니 , 유류왕이 동부여를 얼마나 두려워했던가를 가히 미루어 알 것이다 . 동부여왕 대소가 여러 번 수만 명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를치다가 다 성공치 못하였으나 , 고구려는 몹시 피폐해져서 동부여왕 대소가 또 사자를 보내 조공을 하지 아니함을 꾸짖자 , 유류왕은 두려워서 애걸하는 말로 사자에게 회답해 보내려고 하였다 . 그러니까 왕자 주류 ( 朱留 : 본기의 無恤 ) 는 이때 아직 어렸으나 , 죽은 해명의 기개가 있어 부왕이 비굴하게 구는 것을 부당하다 하고 스스로 거짓 부왕의 명이라 하여 동부여의 사자에게 금와가 말 먹이는 비천한 직책으로 추모왕을 천대하고 , 대소가 추모왕을 죽이려 한 일들을 낱낱이 들어서 죄를 나무라고 동부여의 임금과 신하의 교만함을 꾸짖어서 사자를 쫓아보냈다 .
 
동부여 대소왕이 사자의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또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침노해왔다 . 유류왕은 왕자 주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매우 노하였으나 , 이제 노경 ( 老境 ) 에 있어 주류를 도절이나 해명처럼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나라의 병마 ( 兵馬 ) 를 모두 주류에게 내어 주어서 나가 싸우게 하였다 . 주류는 생각하기를 동부여는 군사의 수효가 많고 고구려는 적으며 동부여는 마병 ( 馬兵 ) 이고 고구려는 보병 ( 步兵 ) 이니 , 적은 보병으로 많은 마병과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 하고 , 동부여의 군사가 지나갈 학반령 ( 鶴盤嶺 ) 의 골짜기에 복병시켰다가 동부여의 군사를 돌격하니 , 길이 험하고 좁아서 마병이 불편한지라 동부여의 군사가 모두 말을 버리고 산 위로 기어올라갔다 . 주류가 군사를 몰아서 그 전군을 섬멸하고 많은 말을 빼앗으니 , 동부여의 정예가 이 싸움에서 전멸하여 다시는 고구려와 겨루지 못하였다 . 싸움이 지나니 주류를 봉하여 태자로 삼고 , 겸하여 병마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겼다 .
 
3)大朱留王의 東扶餘 정복
 
대주류왕이 학반령의 싸움에서 동부여를 크게 무찌르고 유류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지 4 년에 5 만의 군사로 북벌 ( 北伐 ) 의 싸움을 일으켜서 동부여를 쳐들어갔는데 , 도중에 창을 잘 쓰는 마로 ( 麻盧 ) 와 칼을 잘 쓰는 괴유 ( 怪由 ) 를 얻어 앞잡이를 삼아서 `가시라'의 남쪽에 이르러 진구렁을 앞에 두고 진을 쳤다 . 대소왕이 몸소 말을 타고 고구려의 진을 바로 침범하다가 , 말굽이 진구렁에 빠지자 괴유가 칼을 들어 왕을 베었다 .
 
대소왕이 죽었으나 동부여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대소왕의 원수 를 갚으려고 대주류왕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 마로는 전사하고 괴유는 부상하여 고구려의 사상자가 헤아릴 수 없었으며 대주류왕은 여러번 포위를 뚫고나오려고 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이레를 굶기에 이르 렀다 . 그런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었는 지라 대주류왕이 풀로 사람을 만들어 진 가운데 세워두고 나머지 군사 를 이끌고 사잇길로 도망하였다 . 이물림 ( 利勿林 ) 에 이르러서는 전군 이 굶주리고 피로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으나 , 들짐승을 잡아먹고 간 신히 귀국하였다 .
 
이 싸움은 동부여가 승리하기는 하였으나 대소왕이 죽고 태자가 없어서 대소왕의 여러 종형제가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러워 졌다 . 계제 ( 季弟 ) 모갑 ( 某甲 ) 은 종자 백여 명과 함께 남가시라 ( 南沃沮 ) 로 나와 사냥하고 있는 해두왕 ( 海頭王 ) 을 습격해서 죽이고 , 군사 를 모아 남가시라를 완전히 평정하니 , 이는 남동부여 ( 南東扶餘 ) 이고 , 종제 모을 ( 某乙) 은 고도 ( 故都 ) 에서 스스로 서니 이는 북동부여 ( 北東扶餘 ) 이다 .
 
그러나 그 밖의 여러 아우들이 제각기 군사를 모아 모을을 쳤으므로 모을은 군사 1 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대주류왕은 마침 내 북동부여를 전부 토평하였고 국호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 역사에 보인 갈사국은 곧 남동부여이고 , 동부여는 곧 북동부여이며 , 후한서 , 삼국지 등의 옥저전 ( 沃沮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도 북동부여이고 , 예전 ( 濊傳 ) 에 보인 불내예 ( 不耐濊 ) 는 남동부여이다 .
 
4) 大朱留王의 樂良
 
최씨 ( 崔氏 ) 가 남낙랑을 차지하여 ,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일컬었음은 제 3 편 제 4 장에 말하였거니와 , 그 끝의 임금 최이 ( 崔理 ) 의 대에 이르니 곧 대주류왕이 동부여를 정복한 때였다 . 최이는 고구려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미인 딸 하나를 미끼로 삼아 고구려와 화친하고자 하였다 . 이때 갈사국 ( 曷思國 : 남동부여 ) 의 왕이 그 손녀를 대주류왕의 후궁으 로 바쳐서 아들을 낳았는데 , 얼굴이 기묘하고 풍신이 썩 좋아 이름을 호동 ( 好童 ) 이라고 하였다 . 호동이 외가인 남동부여에 가는 길에 낙랑국을 지나게 되었는데 , 최이가 출행 ( 出行 ) 하다 그를 만나보고 놀라 , “그대의 얼굴을 보니 , 북국 ( 北國 ) 신왕 ( 神王 ) 의 아들 호동이 분명하구나 .” 하고 , 드디어 호동을 데려다가 그 딸과 결혼시켰다 .
 
낙랑국의 무기고에 북과 나팔이 있는데 , 소리가 멀리까지 잘 들리 므로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매양 이것을 울려 여러 속국의 군사를 불러서 적을 막았다 . 호동이 그 아내 최녀 ( 崔女 ) 를 꾀어 , “고구려가 낙랑을 침입하거든 그대가 그 북과 나팔을 없애버리시오 .” 하고 귀국하 여 대주류왕에게 권해서 낙랑을 쳤다 . 최이가 북과 나팔을 울리려고 무기고에 들어가보니 북과 나팔이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 북과 나팔 소리가 나지 아니하니 속국이 구원을 오지 않았다 . 최이는 그 딸의 소행임을 알고 딸을 죽인 뒤에 나가서 항복하였다 .
 
호동은 이런 큰 공을 세웠으나 , 왕후가 적자 ( 嫡子 ) 의 지위를 빼앗길까 두려워 대주류왕에게 호동이 자기를 강간하려 하였다고 참소하여 , 호동은 자살하기에 이르렸다 . 이에 아름다운 남녀 한 쌍의 말로가 다 같이 비극으로 되고 말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 대주류왕 즉위 4 년 여름 4 월에 대소의 아우가 갈사왕 ( 曷思王 : 남동부여왕 ) 이 되었음을 기록하였고 , 즉 위 15 년 여름 4 월에 호동이 최이의 사위가 되었음을 기록하였으며 , 그 해 11 월에 호동이 왕후의 참소로 자살하였음을 기록하였다 . 그러나 갈사왕이 있은 뒤에야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 수 있고 , 또 그런 뒤에야 갈사왕 손녀의 소생인 호동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니 , 설혹 대주류왕 4 년 , 남갈사 건국 원년 4 월에 대주류왕이 갈사왕의 손녀에게 장가 들어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이듬해 정월에 호동을 낳았다 할지라도 , 15 년에는 겨우 11 살의 어린아이니 , 11 살 어린아이가 어찌 남의 남편이 되어 그 아내와 멸국 ( 滅國 ) 의 계획을 행할 수 있었으랴 ? 11 살 난 어린아이가 어찌 적모 ( 嫡母 ) 강간의 참소로 부왕의 혐의를 받아 자살하기에 이르렀으랴 ?
 
동부여가 원래 북갈사에 도읍하였으니 , 소위 갈사왕은 분립하기 전의 동부여를 가리킴이 아닌가하는 이도 있겠지마는 그러면 이는 대소 왕 ( 帶素王 ) 때가 되니 , 대소왕이 그 딸을 대주류왕에게 준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
 
대개 신라 말에 고구려사의 연대를 줄이고 사실을 이리저리 옮겨 고쳤으므로 이같이 모순되는 기록이 생겼거니와 , 대주류왕 20 년이 또 , `낙랑을 쳐서 멸망시켰다 ( 伐樂浪滅之 ). '고 하였으니 , 한 낙랑을 두 번 멸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라 , 호동이 장가 들고 자살함이 다 20 년의 일이 아닌가 한다 . 이상에 말한 북부여 ·북동부여 ·고구려 세 나라는 다 신조선 옛 강토에서 일어난 것이다 .
 
3. 백제의 견국과 마한의 멸망
 
1) 召西奴 女大王의 백제 건국
 
백제 본기 ( 百濟本紀 ) 는 고구려 본기보다 더 심하게 문란하다 . 백 몇십 년의 감축은 물론이고 , 그 시조와 시조의 출처까지 틀린다 . 그 시조는 소서노 여대왕 ( 召西奴女大王 ) 이니 하북 ( 河北 ) 위례성 ( 慰禮城 ) --지금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 그가 죽은 뒤에 비류 ( 沸流 ) ·온조 ( 溫祚 ) 두 아들이 분립하여 한 사람은 미추홀 ( 彌鄒忽 : 지금의 仁川 ) 에 , 또 한사람은 하남 ( 河南 ) 위례홀 ( 慰禮忽 ) 에 도읍하여 비류는 망하고 온조가 왕이 되었는데 , 본기에는 소서노를 쑥 빼고 그 편 ( 篇 ) 첫머리에 비류 ·온조의 미추홀과 하남 위례홀의 분립을 기록하고 , 온조왕 13 년에 하남 위례홀에 도읍하였음을 기록하였으니 , 그러면 온조가 하남 위례홀에서 하남 위례홀로 천도한 것이 되니 어찌 우스갯소리가아니랴 ?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 비류 ·온조의 아버지는 소서노의 전남편인 부여사람 우태 ( 優台 ) 이므로 , 비류 ·온조의 성도 부여요 , 근개루왕 ( 近蓋婁王 ) 도 백제가 부여에서 나왔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는데 , 본기에는 비류·온조를 추모 ( 鄒牟 ) 의 아들이라 하였음이 둘째 잘못 이다 . 이제 이를 개정하여 백제 건국사를 서술한다 .
 
소서노가 우태의 아내로 비류·온조 두 아들을 낳고 과부가 되었다가 , 추모왕에게 개가하여 재산을 기울여서 추모왕을 도와 고구려를 세우게 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추모왕이 그 때문에 소서노를 정궁 ( 正宮 ) 으로 대우하고 , 비류·온조 두 아들을 친 자식같이 사랑하였는데 , 유류 ( 橋留 ) 가 그 어머니 예씨 ( 禮氏 ) 와 함께 동부여에서 찾아오니 , 예씨가 원후 ( 元后 ) 가 되고 소서노가 소후 ( 小后 ) 가 되었으며 , 유류가 태자가 되고 비류 ·온조 두 사람의 신분이 덤받이자식 됨이 드러났다 . 그래서 비류와 온조가의논하여 , “고구려 건국의 공이 거의 우리 어머니에게 있는데 , 이제 어머니는 왕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우리 형제는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 되었다 . 대왕이 계신 때도 이러하니 , 하물며 대왕께서 돌아가신 뒤에 유류가 왕위를 이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차라리 대왕이 살아 계신 때에 미리 어머니를 모시고 딴 곳으로 가서 딴 살림을 차리는 것이 옳겠다 .” 하여 그 뜻을 소서노에게 고하고 소서노는 추모왕에게 청하여 , 많은 금 ·은 ·주보 ( 珠寶 ) 를 나누어 가지고 비류 ·온조 두 아들과 오간 ( 烏干 ) ·마려 ( 馬黎 ) 등 18 사람을 데라고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 .
마한으로 들어가니 이때의 마한 왕은 기준 ( 箕準 ) 의 자손이었다 .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 리의 땅 미추홀 --지 금의 인천과 하북 위례홀 --지금의 한양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을 일컫고 ,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 그런데 서북의 낙랑국 최씨가 압록강의 예족 ( 濊族 ) 과 손잡아 압박이 심하므로 소서노가 처음엔 낙랑국과 친하고 예족만 구축하다가 나중에 예족의 핍박이 낙랑국이 시켜
서 하는 것임을 깨닫고 , 성책을 쌓아 방어에 전력을 다했다 . 백제 본기에 낙랑왕 ( 樂浪王 ) 이라 낙랑태수 ( 樂浪太守 ) 라 기록되어 있는데 , 이것은 백 몇십 년의 연대를 줄인 뒤에 그 줄인 연대를 가지고 지나의 연대와 대조한 결과로 낙랑을 한군 ( 漢郡 ) 이라 하여 낙랑태 수라고 쓴 것이며 , 예 ( 濊 ) 라 쓰지 않고 말갈 ( 靺鞨 ) 이라 썼는데 , 이것은 신라 말엽에 예를 말갈이라고 한 당 ( 唐 ) 나라 사람의 글을 많이 보고 마침내 고기 ( 古記 ) 의 예를 모두 말갈로 고친 것이다 .
 
2)召西奴가 죽은뒤 두아들의 分國과 그 흥망
 
소서노가 재위 l3 년에 죽으니 , 말하자면 소서노는 조선 사상 유일한 여성 창업자일 뿐 아니라 , 곧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건설한 사람이었다 . 소서노가 죽은 뒤에 비류 · 온조 두 사람이 의논하여 , “서북의 낙랑과 예가 날로 침략해오는데 어머니 같은 성덕 ( 聖德 ) 이 없고서는 이 땅을 지킬 수 없으니 , 차라리 새 자리를 보아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 .” 하고 , 이에 형제가 오간 · 마려 등과 함께 부아악 ( 負兒岳 ) --지금 한양의 북악 ( 北岳 ) 에 올라가 서울될 만한 자리를 살폈는데 , 비류는 미추홀을 잡고 , 온조는 하남 위례홀을 잡아 형제의 의견이 충돌되었다 .
 
오간 · 마려 등이 비류에게 간하기를 , “하남 위례홀은 북은 한강을 지고 , 남은 기름진 평야를 안고 , 동은 높은 산을 끼고 , 서는 큰 바다 를 둘러 천연의 지리가 이만한 곳이 없겠는데 ,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려고 하십니까 ? ”라 하였으나 비류는 듣지 아니하므로 하는 수 없이 형제가 땅과 인민을 둘로 나누어 비류는 미추홀로 가고 , 온조는 하남 위레홀로 가니 , 이에 백제가 나뉘어 동 · 서 두 백제가 되었다 .
 
본기에 기록된 온조의 13 년은 곧 소서노의 연조요 , 그 이듬해 14 년 이 곧 온조의 원년이니 , l3 년으로 기록된 온조 천도의 조서는 비류와 충돌된 뒤에 온조 쪽의 인민에게 내린 조서이고 , 14 년 곧 온조 원년 의 , “한성의 백성을 나누었다 ( 分漢城民 ). ”고 한 것은 비류 · 온조 형제가 백성을 나누어 가지고 각기 자기 서울로 간 사실일 것이다 . 미추홀 은 `메주골'이요 , 위례홀은 `오리골' ( 본래는 아리골 ) 이다 . 지금의 습속에 어느 동네이든지 흔히 동쪽에 오리골이 있고 서쪽에 메주골이 있는데 그뜻은 알 수 없으나 , 그유래가 또한오래다 . 그런데 비류의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어 많이 흩어져 달아났지마는 , 온조의 하남 위례홀은 수토가 알맞고 오곡이 잘 되어 인민이 편안히 살아가므로 비류는 부끄러워서 병들어 죽고 그 신하와 인민은 다 온조에게로 오니 , 이에 동 ·서 두 백제가 도로 하나로 합쳐 졌다 .
 
3) 溫祚의 馬韓 襲滅 ( 온조의 마한 습멸 )
 
백제가 마한의 봉토 ( 封土 ) 를 얻어서 나라를 세웠으므로 소서노 이래로 공손히 신하의 예로써 마한을 대하여 ,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 나 노루를 마한에 대하여 , 사냥을 하여 잡은 사슴이나 노루를 마한에 보내고 전쟁을 하여 얻은 포로를 마한에 보냈는데 , 소서노가 죽은 뒤 에 온조가 서북쪽의 예와 낙랑의 방어를 핑계하여 , 북의 패하 (浿河 ) ---지금의 대동강으로부터 남으로 웅천 ( 熊川 )--- 지금의 공주 ( 公 州 ) 까지 백제의 국토로 정하여달라고 해서 마침내 그 허락을 얻고 그 뒤에 웅천에 가서 마한과 백제의 국경에 성책을 쌓았다 .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 “왕의 모자가 처음 남으로 왔을 때에 발 디딜 땅이 없어 내가 서북 백 리 땅을 떼어주어 오늘날이 있게 된 것 인데 , 이제 국력이 좀 튼튼해졌다고 우리의 강토를 눌러 성책을 쌓으 니 , 어찌 의리있는 짓이냐 ? ” 하고 꾸짖었다 .
 
온조는 짐짓 부끄러워하는 빛을 보이고 성책을 헐었으나 , 좌우에게 , “마한왕의 정치가 옳은 길을 잃어 나라의 형세가 자꾸 쇠약해지니 , 이제 취하지 아니하면 남에게 돌아갈 것이다 .” 하고 오래지 않아 사냥한다 핑계하고 마한을 습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 그 50 여국을 다 토멸하고 , 그 유민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주륵 ( 周勒 ) 의 온 집안을 다 목베어 죽이니 , 온조의 잔학함이 또한 심하였다 .
 
기준 ( 箕準 ) 이 남으로 달아나서 마한의 왕위를 차지하고 성을 한씨 ( 韓氏 ) 라 하여 자손에게 전해내려오다가 이에 이르러 망하니 , 삼국지 에 , “기준의 후예가 끊어져 없어지고 마한인이 다시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 準後滅絶 馬韓人 復自立爲王 ). ”라고 한 것이 이것을 말한 것인데 , 온조를 마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지나인이 매양 백제를 마한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 온조는 고구려의 유류 (儒留 ) ·대주류 ( 大朱留 ) 두 대왕과 같은 시대 이니 , 온조 대왕 이후에 낙랑의 침략을 기록한 것이 없음은 대주류왕 이 이미 낙랑을 토멸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
 
==제 3 장 漢武帝의 침략==
 
1. 漢나라 군이 고구려에 패한 사실
 
조선의 남북 여러 나라가 분립하는 판에 지나 한나라 무제 ( 武帝 ) 의 침략이 있었다 . 이것은 다만 한때 정치상의 큰 사건일 뿐 아니라 , 곧 조선 민족 문화의 소장 ( 消長 ) 에도 비상한 관계를 가진 큰사건이었다 . 고대 동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 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지나 이외에 오직 조선뿐이었는데 , 당시에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하였으며 , 지나도 제 ( 齊 ) ·연 ( 熊 ) ·진 ( 奏 ) 이래로 조선에 대하여 방어하고 혹은 침략해왔음은 제 2 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매우 잦았거니와 , 진 ( 奏 ) 이 망하고 한 ( 漢 ) 이 일어나서는 북쪽 흉노의 침략에 시달림을 받아서 한나라 고조 ( 高祖 ) 가 흉노 모돈 ( 冒頓 ) 을 공격하다가 백등 ( 白登 : 산서성 大同府부근 ) 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 ( 歲幣 ) 를 바치고 황녀 ( 皇女 ) 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등 굴욕적 조약을 맺고 , 그 뒤에 그대로 시행하여 고조의 증손 무제 ( 武帝 ) 에 이르렀다 . 무제는 야심이 만만한 제왕이라 , 백 년 태평한 끝에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씻는 동시에 조선에 대하여도 또한 이름없는 군사를 일으켜서 민족적 혈전을 벌였다 .
 
그런데 무제가 침입한 조선이 둘이니 , 한서 ( 漢書 ) 식화지 ( 食貨志 : 史記平準書도 같음 ) 에 , “무제가즉위하고 수 년만에 팽오 ( 彭吳 ) 가 예맥조선 ( 濊貊朝鮮 ) 을 쳐서 창해 ( 滄海 ) 라는 군 ( 郡 ) 을 설치하였으니 , 곧 연 ( 燕 ) 과 제 ( 齊 ) 지방이 크게 소란해졌다 ( 武帝卽位數年 彭吳 穿濊貊 朝鮮 置滄海之郡 則燕齊之間 騷然騷動 ). ”고 한 예맥조선이 그 하나 요 , 사기 조선열전 ( 朝鮮列傳 ) 에 , “누선장군 ( 樓船將軍 ) 양복 ( 楊僕 )--- 좌장군 ( 左將軍 ) 순체 ( 筍체 )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여 사군 ( 四那 )을 만들었다 ( 樓船將軍楊僕 左將軍 筍체遂定朝鮮爲四郡 ). ”라고한 조선이 또 하나이다 . 뒤의 조선은 곧 조선열전으로 인하여 위씨 ( 衛氏 ) 의 조선인 것은 사람들이 다 알거니와 , 앞의 조선은 식화지나 평준서에 이렇게 간단히 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고 다른 전기 ( 傳記 ) 에서는 다시 발견되지 아니하므로 종래의 사학가들이 이를 어떤 조선인지를 말한 이가 없다 .
 
그러나 나는 전자의 조선은 곧 동부여를 가리킨 것이니 , 한무제가 위우거 ( 衛右渠 ) 를 토멸하기 전에 동부여를 저희 군현 ( 郡縣 ) 이라 하여 고구려와 9 년 동안 혈전하다가 패하여 물러난 일이 있은 것으로 생각 한다 .
 
무엇으로 증거하는가 ? 후한서 ( 後漢書 ), 예전 ( 濊傳 ) 에 , “한나라 무제 원삭 ( 元湖 ) 원년에 예의 남려왕 ( 南閭王 ) 등이 모반하여 , 우거가 28 만 호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 ( 滄海郡 ) 으로 만들었다 ( 漢武帝元朔元年 滅君南閭等叛 右案率 二十八萬口詣遼東降漢 以其地爲滄海郡 ). ”고 하였고 , 한서 본기 ( 本紀 ) 에 , “원삭 3 년 봄에 창해군을 폐지하였다 ( 元朔三年春罷滄海郡 ). ” 고 하였으며 , 사기 공손홍전 ( 公孫弘傳 ) 에는 , “공손홍이 여러번 간하여 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 ( 朔方 ) 만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 弘數諫---願罷---滄海 而專奉朔方 --- 上乃許之 ). ”고 하였으니 , 종래의 학자들이 위 세 가지 책과 앞에 말한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을 합쳐 , `예맥조선은 예임금 남려의 나라로 지금의 강릉이니 , 강릉이 당시 우거의 속국으로서 모반하고 한에 항복했으므로 한이 팽오를 보내어 항복을 받고 그 땅으로써 창해군을 삼았다가 그 뒤에 땅이 너무나 멀고 비용이 많이 듦으로 그 전쟁을 그만둔 것이다 .”라고 단정하였다 . 그러나 이 단정이 잘못임이 다음과 같다 .
 
1) 지나사에 매양 동부여를 예 ( 濊 ) 로 그릇 기록하였음과 , 남 ·북 두 동부여가 하나는 지금의 훈춘이요 , 또 하나는 지금의 함흥임은 이미 본편 제 2 장에서 서술하였거니와 , 동부여를 지금의 강릉이라 함은 신라가 그 동북계 1천여 리를 잃고 그 잃은 지방의 고적을 내지 ( 內地 ) 로 옮길 때에 동부여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겼음으로 하여 생긴 위설 ( 僞說 ) 이니 , 예의 남려는 함흥의 동부여왕이요 , 강릉의 임금이 아 니며 ,
 
2) 식화지 ( 食貨志 ) 의 본문에 명백히 , “무제가 즉위한 지 수년에 팽오 ( 彭吳 ) 가 예맥조선을 쳤다 .”고 하였으니 , 후한서에 기록된 창해군을 처음 설치한 해는 무제 즉위 13 년인데 , 13 년을 수년이라 할 수 없을 뿐더러 , 한서 주부언열전 ( 主父偃列傳 ) 의 원광 ( 元光 ) 원년 엄안 ( 嚴安 ) 의 상소에 , “지금 예주 ( 濊州 ) 를 공략하여 성읍 ( 城邑 ) 을 설치하고자 한다 ( 今欲--- 略濊州 建治城邑 ). ”고 하였는데 , 예주를 공략한다는 것은 곧 예맥조선 침략을 가리킨 것이요 , 성읍을 설치하는 것은 창해의 설치 경영을 가리킨 것이며 , 원광 원년 , 곧 원삭 원년의 6 년 전에 엄안이 예에 대한 침략과 창해군 설치를 간하였으니 , 남려의 항복과 팽오의 교통이 벌써 원광 원년의 일이요 , 그 6 년 후인 원삭 원년의 일이 아니고 ,
 
3) 원광 원년 창해군 설치의 해는 기원전 134 년이요 , 원삭 3 년 창해군 폐지의 해는 기원전 126 년이니 , 그러면 한이 동부여를 침략하여 창해군을 만들려는 전쟁이 전후 9 년 동안이나 걸쳤으니 , 동부여가 만일 우거의 속국이라면 우거가 가서 구원하지 않을 수 없으며 , 만일 돌아와 구원하였다고 하면 사기 조선왕 만전 ( 滿傳 ) 에 우거의 한에 대한 관계 , 진번진국 ( 眞番辰國 ) 의 옹알 ( 壅閼 ), 요동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의 공격이며 살해 따위를 다 기록하고서 어찌 이보다 더 중대한 9 년 전쟁 의 사실을 빼었으랴 ? 앞에서 말한 개정한 연대에 의하면 이때는 동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이니 , 남려는 위씨 ( 衛氏 ) 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의 속국이다 .
 
남려가 고구려의 속국이라면 왜 고구려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는가 ? 남려는 대개 남동부여 , 후한서와 삼국지의 예전 ( 濊傳 ) 에 기록된 불내예왕 ( 不耐濊王 ) 에게 시집 보낸 갈사왕이니 , 그러면 남려는 대주류왕의 처조 ( 妻祖 ) 요 , 대주류왕은 남려왕의 손자 사위요 , 호동은 남려왕의 진외증손 ( 眞外曾孫 ) 이니 , 말하자면 붙이가 가까운 터 이다 .
 
그러나 호동의 장인인 낙랑의 최이 ( 崔理 ) 도 토멸하는 판에 어찌 처 조와 진외증조를 알아보랴 . 고구려의 동부여에 대한 압박이 심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 그러니 남려가 지난날 아버지와 형의 원수로든지 , 당장의 압박의 고통으로든지 , 어찌 고구려에 대하여 보복할 생각 이 없었으랴 . 이에 같은 고구려에 대해 원한을 가진 낙랑의 여러 소국 들과 연합해서 몰래 우거에게 내통하여 고구려를 배척하려 하였으나 , 우거가 고구려보다 미약하여 고구려에 항거하지 못하므로 , 남려는 우거를 버리고 한 ( 漢 ) 에 통하려 한 것이다 .
 
그러나 한에 통하려면 부득이 위씨 ( 衛氏 ) 의 나라를 경유해야 하는 데 , 우거는 동부여가 혹 위씨 나라의 비밀을 한에 누설하지나 않을까 하여 국경의 통과를 허락하지 아니했으므로 , 사기 조선 왕만전 ( 朝鮮 王滿傳 ) 에는 , “진번 옆의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들어가 뵈려고 하였으나 우거가 또 막아 통하지 못하였다 ( 眞番旁衆國 欲上書入見天子 右渠又壅閼不通 ). ”고 하였다 .
 
진번 옆의 여러 나라란 곧 동남부여와 남낙랑 등을 가리킨 것이다 . 그러나 남려는 마침내 바닷길로 한에 통하여 사정을 고하니 , 야욕으로 가득 찬 한무제가 어찌 이 기회를 놓치랴 . 드디어 동부여를 장래의 창해군으로 예정하고 , 팽오를 대장으로 삼아 연제 ( 燕齊 )-- 지금의 직예 ( 直匠 ) ·산동 ( 山東 ) 의 군사와 양식을 총동원하여 ,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워 남동부여와 남낙랑 여러 나라를 구원하다가 고구려의 대항이 뜻밖에 강하여 9 년 동안 혈전을 계속하였는데 , 한이 여러 번 패하여 창해군을 폐지한다는 말을 핑계로 삼아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은 것이다 .
 
이같이 9 년 동안 두 나라 사이에 혈전이 있었으면 사마천이 어찌하여 사기 조선열전에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아니하였는가 ? 이는 다름이 아니라 , `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다 ( 爲中國諱恥 ). ' 하는 것이 , 공구 ( 孔丘 ) 의 춘추 ( 春秋 ) 이래 , 지나 역사가의 유일한 종지 ( 宗旨 ) 가 되었을 뿐 아니라 , 삼국지 왕숙전 ( 王蕭傳 ) 에 의하면 ,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 ( 景帝 ) 와 무제 ( 武帝 ) 의 잘잘못을 바로 썼더니 ,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했으므로 효경본기 ( 孝景本記 ) 와 무제본기 ( 武帝本記 ) 를 삭제하였다 .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 그 뒤에 사마천은 부형 ( 腐刑 : 남자를 去勢하는 형벌 . 宮刑 ) 에 처해졌다 .”고 하였으니 , 만일 한의 패전을 바로 썼더라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까지 당했을 것이다 . 그러니 그 사실이 빠졌음이 고의일 것이며 , 평준서에 겨우 그 사실을 비추었으니 , `팽오가 예맥조선을 멸망시켰다 . '고 하여 마치 조선을 토멸한 듯이 쓴 것도 또한 꺼려함을 피한 것일 것이요 , 반고 ( 班固 ) 의 한서 ( 漢書 ) 식화지 ( 食貨志 ) 에는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함을 싫어 하여 , 멸 ( 滅 ) 자를 천 ( 穿 ) 자로 고쳤으나 , 그 전부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하였음은 사마천과 마찬가지였다 .
 
그러면 한무제와 싸운 이는 대주류왕 , 곧 고구려 본기의 대무신왕( 大武神王 ) 일 것이다 . 그러나 본기에는 연대를 줄였기 때문에 한무제 와 같은 시대인 대주류왕이 한의 광무 ( 光武 ) 와 같은 시대가 되고 , 지나사의 낙랑 기사와 맞추기 위해 대주류왕이 한에게 낙랑국을 빼앗 겼다는 거짓 기록을 쓴 것이었다 .
 
2. 漢武帝의 衛氏 侵滅 ( 한무제의 위씨 침멸 )
 
한무제가 9 년이라는 오랫동안의 혈전에 패해 물러가서 그 이후 17 년 동안 조선의 여러 나라를 엿보지 못하였으나 그 마음에야 어찌 동방 침략을 잊고 있었으랴 . 이에 위씨 ( 衛氏 ) 는 비록 조선 여러 나라 중 하나이나 그 왕조 ( 王朝 ) 가 원래 지나족 종자요 , 그 장수와 재상들도 대개 한의 망명자의 자손들이었으므로 이들을 꾀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잠식하는 앞잡이를 만들려고 하는 중에 , 더욱 위씨에게 길을 빌어 동부여를 구원하고 고구려를 치는 편의를 얻으려고 하여 , 기원전 109 년에 한무제는 사신 섭하 ( 涉河 ) 를 보내서 먼저 한과 동부여를 왕래하는 사절이 위씨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여 달라고 우거를 한의 국위 ( 國威 ) 로 워협하고 , 금백 ( 金帛 ) 의 이익으로 꾀었으나 우거가 완강하게 쫓지 않았다 .
 
섭하가 한무제의 비밀 명령에 의하여 귀국하는 길에 두 나라의 국경인 패수에 이르러서 우거가 보낸 전송하는 사자 우거의 부왕 ( 副王 ) 을 쩔러 중이고 달아나 , 한으로 돌아가서 한무제에게 조선국 대장을 죽였다고 큰소리를 하니 , 한무제는 실상 딴 흉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 그가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도 않고 그 공으로 섭하를 요통 동부도위 ( 東部都慰 ) 에 임명하였다 .
 
섭하가 임지 ( 任地 ) 에 이른지 오래지 아니하여 , 우거가 전의 일 ( 副王의 피살 ) 을 분하게 여겨 군사를 일으켜서 섭하를 공격해 죽였다 . 무제는 이것으로 구실을 삼아 좌장군 ( 左將軍 ) 순체 ( 筍체 ) 는 보병 5 만으로 요수 ( 遙水 ) 를 건너 패수로 향하고 , 누선장군 ( 樓船將軍 ) 양복 ( 楊僕 ) 은 병선 군사 7 천으로 발해를 건너 열수 ( 列水 ) 로 들어가서 우거의 서울 왕검성 ( 王儉城 : 조선 고대 세 왕검성의 하나 ) 을 좌우에서 협격 (挾擊 ) 하게 하였는데 , 양복은 열구 ( 列口 ) 에 이르러 상륙하려다가 크게 패하여 산중으로 도망하여 남은 군사를 거두어 자신을 보호하고 , 순체는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으나 위씨의 군사가 항거해 지켜서 여의치 못하였다 . 한무제는 두 장수가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사신 위산 ( 衛山 ) 을 보내 , 금백 ( 金帛 ) 을 뿌려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이간시켰다 . 위씨의 나라는 원래가 조선과 지나의 도둑들의 집단이었으므로 그 신하들은 위씨에 대한 충성보다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매우 치열하였고 , 그들은 전쟁을 주장하고 화평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려 서로 다투었는데 , 한의 금백이 비밀히 뿌려지자 화평을 주장하는 파가 갑자기 강해져서 우거로 하여금 그 태자를 한의 군중 ( 軍中 ) 에 보내서 한의 장수에게 사죄하고 군량과 말을 바치기로 하는 조약을 맺게 하려고 하였다 . 그래서 우거는 , “태자는 호위병만을 데리고 패수를 건너가 한의 장수를 만나보게 하여라 .”고 하였고 , 한의 장수는 , “태자가 1 만의 군 사로 패수를 건너오려면 무장을 갖추지 말고 오라 .”고 하여 양편이 서로 버티어 교섭이 깨어졌다 .
 
그러나 그 돈과 비단이 효력을 나타내서 우거의 재상 노인 ( 路人 ) · 한음 ( 韓陰 ) · 삼 ( 參 ) 과 대장 왕겹 ( 王겹 ) 이 몰래 한에 내정을 알리고 전쟁에는 힘쓰지 아니하였으므로 , 한의 장수 순체는 패수를 건너 왕검성의 서북쪽을 치고 , 양복은 산에서 나와 왕검성의 동남쪽을 쳤다 . 한 무제는 교섭이 결렬되자 위산 ( 衛山 ) 을 죄주어 참형에 처하고 , 제남태수 ( 濟南太守 ) 공손수 ( 公孫遂 ) 로 사신을 삼아서 전권 ( 全權 ) 을 주어 두 장수를 감독하는 동시에 , 더욱 많은 돈과 비단을 가지고 가서 우거의 여러 신하들을 매수하게 하였다 .
 
이때에 순체와 양복이 항복하기를 다투어 서로 불화해지니 , 공손수가 순체의 편을 들어 양복을 불러 순체의 군중에 가두고 , 순체로 하여 금 양복의 군사를 합쳐 싸우게 하고 , 한무제에게 돌아가 보고하였다 . 무제는 , “돈과 비단만 낭비하고 위씨 군신 ( 君臣 ) 의 항복을 받지 못 했다 .” 하고 크게 노하여 공손수를 처형하였다 . 오래지 않아 한음 · 왕 겹 · 노인 등의 뇌물받은 일이 탄로되어 노인은 참형을 당하고 , 한음 · 왕겹 두 사람은 도망하여 한에 항복하였다 . 이듬해 여름에 삼 ( 參 ) 이 우거를 암살하고 ,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 우거의 대신 성기 ( 成己 ) 가 삼을 치니 , 우거의 왕자 장 ( 長 ) 이 삼에게 붙어 노인의 아들 최 ( 最 ) 와 힘을 합하여 성기를 죽이고 성문을 열어 항복해서 위씨가 이에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땅을 나누어 진번 · 임둔 · 현도 · 낙랑의 네 군을 만들었다 .
 
이때의 사실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에 의거할 뿐인데 , 거기에는 한 이 돈과 비단을 위씨의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한 기록이 없음은 무슨 까닭인가 ? 이는 사마천이 무제 본기 ( 無帝本紀 ) 의 화 ( 福 : 앞절에 보 임 ) 로 부형 ( 腐刑 ) 을 당하고 동부여에 대한 한의 패전을 기록하지 못한 일이 있어 , 바로 쓰지 못한 때문이다 .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이 전쟁 에 패하고 뇌물로 성공한 사실이 글 가운데 뚜렷이 보이니 , 이를테면 , “위만은 병위 ( 兵威 ) 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 ( 滿 得以兵威財物 侵降其旁小邑 ). ”고 하여 위만이 병위와 재물 두 가지로 건국을 성취하였음을 기록한 것은 은근하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하였음을 비웃고 꼬집은 것이다 .
 
`위산을 보내 병위로써 우거를 타일렀다 ( 遺衛山 因兵威 往諭右渠 ). '고 하여 `병위' 두 자만 쓰고 `재물' 두 자는 빼었으나 ,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패전하고 후원병도 가지 아니하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의 군사보다 약한 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 이는 곧 윗글의 `병위 ·재물' 넉 자를 이어받아 , 위산이 가져간 것이 병위가 아니라 재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고 ,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되었음을 기록한 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쓰고 성공치 못함에 노음을 표시한 것이고 , 위씨가 멸망한 뒤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침형당하고 하나는 파면되었는데 , 봉후 ( 封候 ) 의 상을 받은 자는 도리어 위씨의 반역신인 노인 ( 路人 ) 의 아들 최와 왕겹 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다 .
 
3. 漢四郡의 위치와 고구려의 對漢 관계
 
위씨가 망하매 한이 그 땅을 나누어 진번 ·임둔 ·현도 ·낙랑 네 군 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 사군의 위치 문제는 삼한 ( 三韓 ) 연혁의 쟁론 에 못잖은 조선사상 큰 쟁론이 되어왔다 .
 
만반한 ·패수 ·왕검성 등 위씨의 근거지가 지금의 만주 해성 개평 동지 ( 이는 제 2 편 제 2 장에 자세히 설명했음 ) 일 뿐 아니라 , 당시에 지금 의 개원 ( 開原 ) 이북은 북부여국 (北扶餘國 ) 이고 , 지금의 흥경 ( 興京 ) 이 동은 고구려이고 , 지금의 압록강 이남은 낙랑국이고 , 지금의 함경도 내지 강원도는 동부여국이었으니 , 이상 네 나라 이외에서 한의 사군 을 찾아야 할 것이므로 , 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요동반도 안쪽에서 찾 을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사군의 위치에 대하여 이설 ( 異說 ) 이 백출 ( 百出 ) 함은 대개 다음에 열거한 몇 가지 원인에 의한 것이다 .
 
첫째는 지명의 같고 다른 것을 잘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이를 테면 패수 ·낙랑 등은 다 `펴라'로읽을 것으로서 , 지금의 대동강은 당시의 `펴라'라는 강이고 , 지금의 평양은 당시의 `펴라'라는 서울이니 , 강과 서울을 다 같이 `펴라'라고 한 것은 마치 지금의 청주 ( 淸州 ) `까치내'라는 물 옆에 `까치내'라는 마을이 있는 것처럼 `펴라'라는 강 위에 있는 서울이므로 또한 `펴라'라고 한 것이요 , 패수 ( 浿水 ) 의 ' 패 ( 浿 ) 는 `펴라'의 `펴'의 음을 취하고 , 수 ( 水 ) 는 `펴라'의 `라'의 음 을 취하여 `펴라'로 읽은 것이다 . 그 밖에 낙랑·평양 ·평나 ( 平那 ) · 백아강 ( 百牙岡 ) 등도 다 `펴라'로 읽을 것이다 . 그 해석은 여기서 생략하거니와 , 한무제가 이미 위씨조선 곧 불조선을 토멸하여 요동군을 만들고는 가끔 신 · 말 두 조선의 지명을 가져다가 위씨조선의 옛 지명 을 대신하였으니 , 지금의 해성 ( 海城 ) 헌우란의 본래 이름이 `알티' ( 혹 安地 혹 安市라 한 것 ) 인데 , 이것을 고쳐 패수라 하였고 , 사기의 작자 사마천은 그 고친 지명에 의하여 사군 ( 四郡 ) 이전의 옛 일을 설하였으 므로 , “한이 일어나 물러나서 패수로 경계를 삼았다 ( 漢興---退以浿水爲界 ). ”느니 , “위만--- 동으로 달아나 새외 ( 塞外 ) 로 나가서 패수를 건넜다 ( 滿---東走出塞 漢浿水 ). ”느니 하였으며 , 진번 ( 員畵 ) 이 비록 신 · 불 두 조선을 합쳐 일컫는 것이지마는 , 한은 이를 차지하여 고구려를 진번군으로 가정 ( 假定 : 아래에 자세히 말함 ) 하였다 . 사기의 , “처음에 전연 ( 全燕 ) 때 일찍이 진번조선을 약취 ( 略取 ) 하여 예속시 켰다 ( 始全燕時 嘗略屬眞番朝鮮 ). ”고 하고 , “위만이 잠시 진번조선을 복속시켰다 ( 滿---稍役屬眞番朝鮮 ). ”고 한 진번조선은 신 · 불 두 조선을 가리킨 것이지마는 , “진번 · 임둔이 다 와서 복속하였다 ( 眞番臨屯 皆來服屬 ). ”고 하고 , “진번의 이웃 여러 나라가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하였다 ( 眞番旁衆國 欲上書見天子 ). ”고 한 진번은 다 사군의 하나인 진번을 가려킨 것으로써 , 또한 나중에 고친 지명에 의하여 고사 ( 故事 ) 를 설한 것이다 . 마치 을지문덕 이후에 살수 ( 薩水 ) 의 명칭이 청천강 ( 淸川江 ) 이 되었으니 , 을지문덕 당시에는 청천강이라는 이름이 없었지마는 우리가 , “을지문덕이 청천강에서 수 (隨 ) 나라 군사를 깨뜨렸다 .”고 하는 따위와 같은 것인데 , 종래의 학자들이 이를 모르고 사기의 패수와 진번 등을 사군 이전의 이름으로 아는 동시에 , 헌우란 패수 , 대동강 패수의 두 패수와 두 나라의 이름인 진번과 한 군 ( 郡 ) 의 이름인 진번의 두 진번을 혼동하여 설하였다 .
 
둘째는 기록의 진위를 잘 분별하지 못한 때문이다 . 이를테면 한서 본기 ( 本紀 ) 무제 ( 武帝 ) 원봉 ( 元封 ) 3 년 진번 · 임둔의 주 ( 註 ) 에 `무릉서 ( 茂陵書 ) 에 진번의 군치 ( 郡治 ) 삽현 ( 삽縣 ) 은 장안 ( 長安 ) 에서 7,640 리 임둔의 군치 동이현 ( 東이縣 ) 은 장안에서 6,138 리 ( 茂陵書 眞番郡治 삽縣 去長安 七千六百四十里 - - -臨屯郡治 東이縣、 去長安 六千 一百 三十 八 里 ). '라 했는데 , 무릉서는 무릉사람 사마상여 ( 司馬相如) 의 저작이라 하나 , 사기 사마상여전에 , “상여가 죽고 5 년에야 천자가 비로 소 후토 (后土 ) 를 제사지냈다 ( 相如旣卒五歲 天子始祭后土 ) · ” 하고 , 사기집해 ( 史記集解 ) 에는 , “원정 ( 元鼎 ) 4 년 비로소 후토를 세웠다 ( 元鼎四年---始立后土 ) ·”고 하였는데 , 원정 4 년은 기원전 113 년이요 , 사마상여가 죽은 것은 그 5 년 전인 원수 ( 元狩 ) 6 년 ( 기원전 117 년 ) 이니 , 상여는 원봉 ( 元封 ) 3 년 ( 기원전 l08 년 ) 진번 · 임둔군을 설치한 해보다 10 년 전에 이미 죽었으니 , 10 년 전에 이미 죽은 상여가 어찌 l0 년 후의 두 군의 위치를 말할 수 있었으랴 . 그러니 무릉서가 위서 ( 僞書 ) 인 동 시에 그 글 가운데 진번 · 임둔 운운한 것은 위증 ( 鴻證 ) 임이 의심없으 며 , 또한 한서지리지에 요동군 군현지 ( 郡縣志 ) 이외에 따로 현도와 낙랑 두 군지 ( 郡志 ) 가 있으므로 , 이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요동반도 이외에서 현도 · 낙랑 두 군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지마는 , 위략의 만 반한이 곧 한서지리지 요동군의 문 · 번한임과 사기의 패수가 곧 요동 군 번한현 ( 番汗縣 ) 의 패수 (浿水 ) 임이 이미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 지리지의 현도 · 낙랑 운운한 것은 후세 사람의 위증임이 의심없는데 종래의 학자들이 이것을 모르고 매양 한서 본기의 진번 , 임둔의 주나 지리지의 낙랑· 현도 두 군지를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글로 그릇 믿었다 . 이러한 원인으로 인하여 사군의 위치에 대한 고거 ( 考據 ) 가 비록 많으나 , 하나도 그 정곡 ( 正鵠 ) 을 얻은 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 한다 .
 
사군은 원래 땅 위에 구획을 그은 것이 아니고 종이 위에 그린 일종의 가정 ( 假定 ) 이니 , 말하자면 고구려를 토멸하면 진번군을 만들리라 , 북동부여 --- 북옥저 를 토멸하면 현도군을 만들리라 , 남동부여 ---남옥저를 토멸하면 임둔군을 만들리라 , 낙랑국을 토멸하면 낙랑군을 만들리라 하는 가정인 것이고 , 실현된 것이 아니다 . 한무제가 그 가정을 실현하기 위해 위의 여러 곳에 대하여 침략하기 시작했을 것이고 , 낙랑과 두 동부여는 앞에 말한 것과 같이 고구려에 대한 오래된 원한이 있으므로 한의 힘을 빌려 고구려를 배척하려고 했을 것이고 , 고구 려는 또 전번에 대주류왕이 승전한 기세로 한과 결전하려고 했을 것이다 . 그 전쟁이 대개 기원전 108 년쯤 , 곧 위씨가 멸망한 해에 비롯하 여 기원전 82 년에 이르러 끝이 났는데 , 한이 패하여 사군 실현의 희망이 아주 끊어졌으므로 진번 · 임둔 두 군은 그 명칭을 폐지하고 , 현 도 · 낙랑 두 군은 요동군 안에다 붙여서 설치함에 이르렀다 . 한서 본기에는 진번군을 폐지했다고 하였을 뿐이고 , 임둔군을 폐지했다는 말 은 없으나 , 후한서 예전 ( 滅傳 ) 에 , “소제 ( 昭帝 ) 가 진번 · 임둔을 폐지하여 낙랑 · 현도에 합쳤다 ( 昭帝罷眞番臨屯 以井樂浪玄토 ). ”고 하였음을 보면 , 임둔군도 진번군과 한때에 폐지하였던 것이다 .
 
후한서 예전에는 현도를 구려 ( 句麗 : 한의 고구려현을 가리킨 것 ) 로 옮겼다고 하였고 , 삼국지 옥저전 (沃沮傳 ) 에는 처음에 옥저로 현도성 을 삼았다가 뒤에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겼다고 하였으나 옥저전의 불내예왕 ( 不耐歲王 ) 은 북동부여와 남동부여의 왕을 가리킨 것이요 , 예전의 불내예왕은 낙랑왕을 가리킨 것이니 , 두 동부여와 낙랑국은 다 당시에 독립된 왕국이다 . 그렇다면 현도성이 옥저 , 곧 북동부여에서 요동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라 , 다만 북동부여로 현도를 만들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 비로소 요동---지금의 봉천성성 ( 奉天省城 ) 에 현도군을 붙이기로 설치한 것이고 , 낙랑군도 또한 동시에 붙이기로 설치하였을 것인데 그 위치는 확언할 수 없으나 , 대개 지금의 해성 ( 海城 ) 등지일 것이다 .
 
어찌하여 진번 · 엄둔을 폐지하는 동시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였는가 ? 이는 다름 아니라 , 곧 앞서 말한 낙랑국과 남동 부여국이 고구려를 몹시 원망하여 한이 패해 물러간 뒤에도 두 나라가 , 오히려 한에 사자를 보내 몰래 통하고 상민 ( 商民 ) 이 왕래하여 물 자를 서로 사고 팔았으므로 한이 요동에 현도 · 낙랑 두 군을 붙이기로 설치하여 두 나라에 대한 교섭을 맡게 하고 , 혹은 고구려와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에는 두 나라를 이용하였으니 , 이것은 한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고 , 고구려는 매양 두 나라의 한과 통하는 증적 ( 證跡 ) 을 알아내면 반드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켰다 . 이는 고구려의 두 나라에 대한 관계이니 , 수백 년 동안 두 나라로 인하여 , 고구려의 한에 대한 진취 ( 進取 ) 를 방해하였다 . 이 책에서는 두 낙랑을 구별하기 위하여 낙랑국은 남낙랑 ( 南樂浪 ) 이라 하고 한의 요동 낙랑군은 북낙랑 ( 北樂浪 ) 이라 하거니와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보인 낙랑국은 다 남낙랑을 가리킨 것인데 , 종래의 학자들이 매양 요동에 있는 북낙랑은 모르고 남낙랑을 낙랑군이라 주장하는 동시에 삼국사기 의 낙랑국 낙랑왕은 곧 한군태수의 세력이 동방을 웅시 ( 雄視 ) 하여 그 형세가 한 나라 왕과 같으므로 나라 또는 왕이라 일컬었다고 단언 ( 斷言 ) 하였으나 , 고구려 와 경계가 닿은 요동태수를 요동국왕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현도태수를 현도국왕이라 일컽지 아니하였는데 , 어찌 홀로 낙랑태수만 낙랑국 왕이라 일컬었으랴 ? 그것이 억설임이 의심없다 .
 
이즘 일본인이 낙랑 고분에서 혹 한대 ( 漢代 ) 연호를 새긴 그릇을 발견하고 지금의 대동강 남쪽 기슭을 위씨의 옛 서울 곧 뒤의 낙랑의 군 치 ( 郡治 ) 라고 주장하지마는 이러한 그릇은 혹 남낙랑이 한과 교통할 때에 수입한 것이거나 , 그렇지 않으면 고구려가 한과의 싸움에 이겼을 때 노획한 것일 것이요 , 이로써 지금의 대동강 연안이 낙랑 군치임을 단언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제4장 鷄立嶺(계립령) 이남의 두 새나라 ==
 
1.계립령 이남의 별천지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 ( 鳥領 : 새재 ) 이다 . 지금 문경읍 ( 聞慶邑 ) 의 북산 ( 北山 ) 을 계립령이라고 하지마는 , 고대에는 조령의 이름이 `저릅 재 '이니 , `저릅'은 삼 ( 麻 ) 의 옛 말이다 . `저릅'을 이두자의 음으로는 `계립 ( 鷄立 ) '이라 쓰고 , 뜻으로는 `마목 ( 麻木 ) '이라 쓰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령이 곧 계립령이다 .
 
계립령 이남은 지금 경상남북도의 총칭인데 , 계립령의 일대로 지금의 충청북도를 막으며 , 태백산 ( 太白山 : 奉化의 태백산 ) 으로 지금의 강원도를 막고 , 지리산으로 지금의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막으며 , 동과 남으로 바다를 둘러 따로 한 판국이 되었으므로 조선 열국 ( 列國 ) 의 당시에 네 부여 ( 고구려도 혹 卒本扶餘라함 ) 가분립한다 , 고구려가 동부여를 정복한다 , 또 낙랑을 정복한다 , 위씨가 한에게 망하여 그 땅이 사군 ( 四郡 ) 이 된다 , 백제가 마한을 토멸한다---하는 소란이 있었지만 영 ( 領 ) 이남은 그런 풍진 ( 風塵 ) 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 진한 · 변 한의 자치령 수십 나라가 그 비옥하고 아름다운 토지에 의거하여 벼 · 보리 · 기장 · 조 등의 농업과 누에치기 · 길쌈 등을 힘써서 곡식과 옷감들을 생산하고 철을 채취하여 북쪽 여러 나라에 공급하고 , 변진 ( 弁辰 ) 은 음악을 좋아하여 변한슬 ( 弁韓瑟 : 불한고 ) 이란 것을 창작하여 문화가 매양 발달하였으나 , 일찍이 북방의 유민으로 마한의 봉지 ( 封 地 ) 를 받았으므로 마한의 절제 ( 節制 ) 를 받고 마한이 망한 뒤에는 백제의 절제를 받았다 . 그러나 그 절제는 소극적으로 a) `신수두'의 건설 과 b) `신한' 칭호 쓰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 적극적으로 1) 해마다 의 조알 ( 朝謁 ) 과 2) 토산물의 진공 ( 進貢 ) 을 행할 뿐이었는데 , 나중에 진한 자치부는 신라국 ( 新羅國 ) 이 되고 , 변진 자치부는 여섯 가락 ( 加羅 ) 연맹국이 되어 , 차차 백제에 반항하기에 이르렀다 .
 
2.加羅(가라) 여섯나라의 건설
 
지금의 경상남도 등지에 변진의 12 자치부가 설립되었음은 제 3 편 제4 장에 말하였거니와 , 위의 각 자치부를 대개 `가라'라 일컬었다 . `가 라' 란 큰 소〔大沼〕의 뜻이니 , 각 부가 각각 제방을 쌓아서 냇불을 막아 큰 소를 만들고 , 그 부근에 자치부를 설치하여 그 부의 이름을 `가라'라 일컬은 것이었다 . `가라'를 이두문으로 `가라 ( 加羅 ) ' , `가락 ( 駕洛 ) ' , `가야 ( 加耶 ) ' , `구야 ( 狗邪) ' , `가야 ( 伽倻 ) ' 등으로 썼으니 , 야 ( 耶 ) · 야 (邪) · 야 ( 倻 ) 등은 옛 음을 다 `라'로 읽은 것이고 , `가라'를 혹 `관국 ( 官國 ) '이라 썼으니 , `관 ( 官 ) '은 그 음의 초성 · 중성을 떼어 `가'로 읽고 , `국 ( 國 ) '은 그 뜻의 초성 · 중성을 떼어 `라'로 읽은 것이다 . 기원 42 년경에 각 가라의 자치부원 ( 自治部員 ) · 아도간 ( 我刀 干) · 여도간 ( 汝刀干) · 피도간 ( 彼刀干) · 오도간 ( 五刀干 ) · 유수간 ( 留水干) · 유천간 ( 留天干) · 신천간 ( 神天干 ) · 신귀간 ( 神鬼干 ) · 오전간 ( 五天干 ) 등이 지금의 김해읍 ( 金海邑 ) 귀지봉 ( 龜旨峰 ) 위에 모여 대계 ( 大계 : 계는 당시 自治會의 이름 ) 를 베풀고 , 김수로 ( 金首露 ) 6 형제를 추대하여 여섯 `가라'의 임금을 삼았다 .
 
김수로는 제 1 가라 , 곧 김해를 맡아 `신가라'라 일컬으니 , `신'은 크다는 뜻이요 , 첫째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 `신가라'는 전사 ( 前史 ) 에 금관국 ( 金官國 ) 이라 쓴 것이 옳은데 , 가락 ( 駕洛 ) 혹은 구야 ( 狗邪) 라고 썼으니 , 이 둘은 다 `가라'의 이두자이므로 , 이로써 여섯 가라를 총칭 하는 것은 옳으나 , 다만 `신가라'를 가리켜 일컬음은 옳지 않다 .
 
둘째는 `밈라가라'니 , 지금 고령 ( 高靈 ) 의 앞내를 막아 가라〔大沼〕를 만들고 , 이두자로 `미마나 ( 彌摩那 ) ' 혹은 `임나 ( 任那 ) '라 쓴 것으로 서 , 여섯 가라 중 그 후손이 가장 강대하였으므로 전사에 대가라 ( 大加羅 ) 혹은 대가야 ( 大加耶 ) 라 기록하였다 .
 
셋째는 `안라가라'이니 , 지금 함안 (咸安 ) 의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 들고 , 이두자로 `안라 ( 安羅 ) ' , `아니라 ( 阿尼羅 ) ' 혹은 `아니량 ( 阿尼良 ) '이라 기록한 것인데 , 아니량이 나중에 와전하여 `아시라 ( 阿尸羅 ) '가 되고 아시라가 다시 와전하여 `아라 ( 阿羅 ) '가 되었다 .
 
넷째는 `고링가라'이니 , 지금의 함창 ( 咸昌 : 尙州郡 ) 으로 또한 앞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이두자로 고령 ( 古寧 ) 이라 기록한 것인데 , `고 링가라'가 와전하여 `공갈'이 되었으니 지금의 `공갈못〔恭儉池〕 '이 그 자리이다 . 여섯 가라 고적 중 오직 이것 하나가 전해져 그 물에는 연꽃 · 연잎이 오히려 수천 년 전의 풍경을 말하는 듯하더니 , 이조 광무 ( 光武 ) 시절에 총신 ( 龍臣 ) 이채연 ( 李采淵 ) 이 논을 만들려고 , 그 둑을 헐어 아주 폐허가 되게 하였다 .
 
다섯째는 `별뫼가라'이니 , `별뫼가라'는 `별뫼'라는 산중에 만든 가라로서 지금의 성주 ( 星州 ) 다 . 이두자로 `성산가라 ( 星山加羅 ) ' 혹은 `벽진가라 ( 碧珍加羅 ) '로 기록한 것이다 .
 
여섯째는 `구지가라'니 , 지금 고성 ( 固城 ) 의 중도 ( 中島 ) 이다 . 역시 내를 막아 가라를 만들고 , 이두자로 `고자가라 ( 古資加羅 ) '라 기록할 것인데 , 여섯 나라 중 가장 작은 나라이므로 또한 `소가야 ( 小加耶 ) '라 일컬었다 .
 
여섯 가라국이 처음에는 형제의 연맹국이었으나 나중에 연대가 내려갈수록 촌수가 멀어져 , 각각 독립국이 되어 각자의 행동을 취하였는데 , 삼국사기에 이미 육가라 ( 六加羅 ) 본기 ( 本紀 ) 를 빼고 오직 신라 본기와 열전 ( 列專 ) 에서 신라와 관계된 가라의 일만 기록한 가운데 , `신가라'를 금관국이라 쓴 이외에는 그 밖의 다섯 가라를 거의 구별이 없이 모두 가야 ( 加耶 ) 라 써서 그 가야가 어느 가라를 가리킨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 많다 . 이제 이 책에서는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구별하 여 쓰고 , 여섯 가라의 연대도 삭감당한 듯하므로 신라의 앞에 기술하 였다 .
 
3.新羅(신라)의 건국
 
종래의 학자들이 다 , `신라사가 고구려 · 백제 두 국사보다 비교적 완전하다 . '고 하였으나 , 이는 아주 모르는 말이다 . 고구려사와 백제 사는 삭감이 많거니와 , 신라사는 위찬 ( 僞撰 ) 이 많아서 사료로 근거 삼을 것이 매우 적으니 , 이제 신라 건국사를 말함에 있어 이를 대강 논 술하려 한다 .
 
신라의 제도는 6 부 ( 部 ) 3 성 ( 姓 ) 으로 조직되었는데 , 신라 본기에 의거하면 6 부는 처음에 알천양산 ( 閼川楊山 ) · 돌산고허 ( 突山高墟 ) · 무산 대수 ( 茂山大樹 ) · 자산진지 ( 자山珍支 ) · 금산가리 ( 金山加利 ) · 명활산 고야 ( 明活山高耶 ) 의 여섯 마을이었는데 , 신라 건국 후 제 3 세 유리왕 9 년 ( 기원 32 년 ) 에 여섯 마을의 이름을 고치고 성을 주었다 . 곧 알천양산은 양부 ( 梁部 ) 라 하고 성을 이 ( 李 ) 로 하였으며 , 돌산고허는 사량부 ( 沙梁部 ) 라 하고 성을 최 ( 崔 ) 로 하였으며 , 무산대수는 점량부 ( 漸梁部 : 一名 弁梁部 ) 라 하고 성을 손 ( 孫 ) 으로 하였으며 , 자산진지는 본피 부 ( 本彼部 ) 라 하고 성을 정 ( 鄭 ) 으로 하였으며 , 금산가라는 한기부 ( 漢祇部 ) 라 하고 성을 배 ( 裵 ) 로 하였으며 , 금산가라는 한기부 ( 習比部 ) 라 하고 성을 설 ( 薛 ) 로 하였다고 한다 .
 
3 성은 박 ( 朴 ) · 석 ( 昔 ) · 김 ( 金 ) 세 집이니 , 처음에 고허촌장 ( 高墟村長 ) 소벌공 ( 蘇代公 ) 이 , 양산 ( 楊山 ) 아래 나정 ( 羅井 ) 곁에 말이 꿇어앉아 우는 것을 바라보고 쫓아가보니 , 말은 간 곳이 없고 큰 알 하나가 있으므로 , 이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 데려다가 기르고 성을 박이라고 하였는데 , 그가 나온 큰 알이 박만하므로 `박'의 음을 딴 것 이라고 한다 . 이름을 혁거세 ( 赫居世 ) 라고 하였는데 , 혁거세는 그 읽는 법과 뜻이 다 전하지 않는다 . 나이 13 살에 영특하고 숙성하므로 백성이 그를 높여 거서간 ( 居西干) 을 삼았다 . 거서간은 그때의 말로 귀인 ( 貴人 ) 의 칭호라고 한다 . 이것이 신라 건국 원년 ( 기원전 57 년 ) 이고 , 이이가 박씨의 시조이다 .
 
신라의 동쪽에 왜국 ( 倭國 ) 이 있고 , 왜국의 동북쪽 1 천 리에 다파나국 ( 多婆那國 ) 이 있는데 , 그 국왕이 여국왕 ( 女國王 ) 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이를 밴 지 7 년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내다 버리라고 하니 , 여자가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싸고 금궤에 넣어 바다에 띄워보냈다 . 그 금궤가 금관국의 해변에 이르니 ,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지지 아니하였는데 , 진한의 아진포 ( 阿珍浦 ) 포구에 이르니 바닷가의 한 노파가 이를 건져냈다 . 열고 보니까 , 그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 이 노파는 데려다가 길렀다 . 이 때가 박혁거세 39 년 ( 기원전 19 년 ) 이었는데 , 금궤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 ( 脫解 ) 라 하고 금궤가 와 닿을 때에 까치〔鵲〕가 따라오면서 울었으므로 작 ( 鵲 ) 자의 변을 따서 성을 석 ( 昔 ) 이라 하니 , 석씨의 시조다 .
 
석탈해 ( 昔脫解 ) 9 년 ( 기원 65 년 ) 에 금성 ( 金城 : 신라의 서울 , 곧 慶 州 ) 서쪽 시림 ( 始林 ) 에서 닭 우는 소리가 나므로 대보 호공 ( 瓠公 ) 을 보내어 가보게 하였더니 , 금빛 조그만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므로 , 그 금궤를 가져다가 열어보니 , 또 한 조그만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데려다가 기르면서 이름을 알지 ( 閼智 ) 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 ( 金 ) 이라 하니 이는 김씨의 시조라 하였다 .
 
궤에서 나왔다 , 알에서 깨어났다 하는 신화는 그때 사람이 그 시조 의 출생을 신이 ( 神異 ) 하게 장식한 것이거니와 , 다만 6 부 · 3 성의 사적 이 고대사의 원본이 아니고 후세 사람의 보태고 줄임이 많음은 가석한 일이다 . 이를테면 조선 고사의 모든 인명 · 지명이 처음엔 우리말로 짓고 이두자로 기록하였는데 , 그 뒤 한문화 ( 漢文化 ) 가 성행하면서 한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 원래는 `메주골'이라 하고 , `미추홀 ( 彌鄒忽 ) ' 혹은 `매초홀 ( 買肖忽 ) '이라 쓰던 것을 나중엔 인천 ( 仁川 ) 이라 고친 따위인데 , 이제 알천양산 ( 閼天楊山 ) · 돌산고허 ( 突山高墟 ) 등 한자로 지은 여섯 마을의 이름이 6 부의 본 이름이고 , 양부 ( 梁部 ) · 사량부 ( 沙梁 部 )---등 이두자로 지은 6 부의 이름이 여섯 마을의 나중 이름이라 함이 어찌 앞뒤의 순서를 뒤바꾼 것이 아닌가 , 하는 의문이 있음이 그 하나다 .
 
신라가 불경을 수입하기 전에는 모든 명사를 다만 이두자의 음이나 뜻을 맞추어 쓸 뿐이었는데 , 불교가 성행한 뒤에 몇몇 괴벽한 중들이 비슷만 하면 , 불경의 숙어에 맞추어 다른 이두자로 고쳐 만들었으니 , 예를 들면 소지왕 ( 炤智王 ) 을 혹 비처왕 ( 毘處主 ) 이라 일컫는데 , 소지 나 비처가 다 `비치 '로 읽은 것이지마는 ,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 소지는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요 , 유리왕 ( 圖理王 ) 을 혹 세리지왕 ( 世利智王 ) 이라 일컫는데 , 유리나 세리가 다 `누리 '로 읽은 것이 지마는 , 유리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 세리는 또한 불경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 탈해왕 ( 脫解王 ) 도 그 주에 일명 `토해 ( 吐解 ) '라 하였는데 , 탈해나 토해는 다 `타해' 혹 `토해'로 읽을 것이고 , 그 뜻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 당시의 속어로 된 명사임은 분명하니 , 토해 ( 吐解 ) 는 본래 쓴 이두자이고 , 탈해는 고쳐 만든 이두자로서 , 불경에 해탈 ( 解脫 ) 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토해의 뜻을 탈 ( 脫 ) 로 고쳐 만든 것이다 . 원래는 당시 속어의 음을 취한 것이고 , 탈출 ( 脫出 ) 혹은 해출 ( 解出 ) 의 뜻이 없으니 , 금궤에서 탈출하였으므로 탈해라 하였다고 함이 괴벽한 중들의 부회 ( 附會 ) 임을 단언할 수 있음이 그 둘이다 .
 
3 성의 시조가 다 큰 알에서 나왔으니 , 그 큰 알은 다 `박'만 할 것인데 , 어찌하여 3 성의 시조가 다 같은 박씨가 되지 않고 , 박씨 시조 이 외에 두 시조는 석씨와 김씨가 되었는가 ? 석 · 김 두 성이 다 금궤에서 나왔는데 어찌하여 같은 김씨가 되지 아니하고 , 하나는 석씨 , 하나 는 김씨가 되었는가 ? 석탈해 ( 昔脫解 ) 의 금궤에 까치가 따라와 울었으므로 , 작 ( 鵲 ) 자의 변을 따서 석씨 ( 昔氏 ) 가 되었으며 , 김알지 ( 金斡智 ) 가 올 때에 닭이 따라와 울었으니 , 계 ( 鷄 ) 자변을 따서 해씨 ( 采氏 ) 가 되어야 옳겠는데 어찌하여 두 사람에게 다른 예를 써써 앞에서는 김씨가 되지 않고 석씨가 되었으며 , 뒤에서는 해씨가 되지 않고 김씨가 되었는가 ? 신화라도 이같이 뒤섞여 조리가 없을 뿐더러 게다가 한자 파자장 ( 破字匠) 의 수작이 섞여서 이두문 시대의 실례와 많이 틀림이 그 셋이다 .
 
초년 ( 初年 ) 에 초창 ( 草創 ) 한 신라는 경주 한 구석에 의거하여 여러나라 중에서 가장 작은 나라였는데 , `변한이 나라로 들어와서 항복하였다 . '느니 , `동옥저가 좋은 말 200 마리를 바쳤다 . '느니 함이 거의 사세에 맞지 아니할 뿐 아니라 , `북명인 ( 北溟人 ) 이 밭을 갈다가 예왕 ( 濊王 ) 의 도장을 얻어서 바쳤다 . ' 함은 더욱 황당한 말인듯하다 . 왜냐하면 북명 ( 北溟 ) 은 `북가시라'--- 북동부여의 별명으로 지금의 만주 훈춘 등지이고 , 고구려 대주류왕의 시위장사 ( 待衛壯士 ) 괴유 ( 怪由 ) 를 장사 지낸 곳인데 , 이제 훈춘의 농부가 밭 가운데서 예왕의 도장을 얻어 수천 리를 걸어 경주 한 구석의 조그만 나라인 신라왕에게 바쳤다 함이 어찌 사실다운 말이랴 ? 이는 경덕왕 ( 景德王 ) 이 동부여 곧 북명 의 고적을 지금의 강릉으로 옮긴 뒤에 조작한 황당한 말이니 , 다른 것도 거의 믿을 가치가 적음이 그 넷이다 .
 
신라가 여러 나라중에서 문화가 가장 늦게 발달하여 역사의 편찬이 겨우 그 건국 6 백 년 후에야 비로소 억지로 북쪽 여러 나라의 신화를 모방하여 선대사 ( 先代史 ) 를 꾸였는데 , 그나마도 궁예 ( 弓裔 ) · 견훤 ( 甄萱 ) 등의 병화 ( 兵火 ) 에 다 타버리고 , 고려의 문사들이 남산 · 북산의 검불을 주워다가 만든 것이므로 , 신라 본기의 기록의 진위를 가려냄이 고구려 · 백제 두 나라 역사나 마찬가지인데 , 역사가들이 흔히 신라사가 비교적 완벽된 것인 줄로 알아 그대로 믿었다 .
 
나의 연구에 의하면 , 신라는 진한 6 부의 총칭이 아니고 , 6 부 중의 하나인 사량부이다 . 신라나 사량은 다 `새라'로 읽을 것이요 , `새라' 는 냇물 이름이니 , `새라'의 위에 있으므로 `새라'라 일컬은 것이고 사량은 사훼 ( 沙喙 : 진흥왕 비문에 보임 ) 라고도 기록하였으며 , 사훼는 `새불'이니 또한 `새라'위에 있는 `불' --들판이기 때문에 일컬은 이름이다 . 본기에 신라의 처음 이름을 `서라벌 ( 徐羅筏 ) '이라 하였으 나 , 서라벌은 `새라불'로 읽을 것이니 또한 `새라'의 `불'이라는 뜻 이다 . 시조 혁거세는 곧 고허촌장 소벌공 ( 蘇伐公 ) 의 양자이고 , 고허촌은 곧 사량부이니 , 소벌공의 `소벌 ( 蘇伐 ) '은 또한 사훼와 같이 `새불'로도 읽을 것이므로 지명이고 , 공 ( 公 ) 은 존칭이니 , 새불 자치회 ( 自 治會 ) 의 회장이므로 `새불공'이라 한 것이다 말하자변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 새라 부장 ( 部長 ) 의 양자인 박혁거세가 6 부의 총왕 ( 總王 ) 이 되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새라'라 하고 이두자로 신라 ( 新羅 ) . 사로 ( 斯盧 ) · 사라 ( 斯羅 ) · 서라 ( 徐羅 ) 등으로 쓴 것이다 .
 
3 성의 박씨뿐 아니라 , 석씨 · 김씨도 다 사량부의 귀인의 성이니 , 3 성을 특별히 존숭하는 것은 또한 삼신설 ( 三神說 ) 에 의방 ( 依倣 ) 한 것이다. 본기 석탈해왕 9 년 ( 기원65년 ) 에 비로소 김씨 시조인 영아 ( 영兒 ) 김알지를 주웠다고 하였으나 , 파사왕 ( 婆娑王 ) 원년 ( 기원 80년) 에는 왕후 사성부인 ( 史省夫人 ) 김씨는 허루갈문왕 ( 許婁曷文王 : 추존한 왕을 갈문왕이라 함 ) 의 딸이라 하였으니 , 그 나이를 따지면 허루 ( 許婁) 도 거의 알지의 아버지뻘되는 김씨인 것이니 , 이로 미루어보면 박 · 석 · 김 3 성이 처음부터 사량부 안에 서로 연흔 ( 聯婚 ) 하는 거족 ( 巨族 ) 이었는데 , 같이 의논한 끝에 6 부 전체를 가져 3 성이 서로 임금 노릇하는 나라를 만든 것이다 . 이에 진한 자치제의 판국이 변하여 세습 제왕의 나라가 됨에 이르렀다 .
 
=제 5 편 고구려(高句麗) 전성시대=
 
== 제 1 장 기원 1 세기초 고구려의 국력발전과 그 원인==
 
1. 大朱留王 이후의 고구려
 
기원 1 세기 이후로 기원 3, 4 세기까지의 한강 이남 곧 남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초창하여 새로 일어선 때요 , 압록강 이남 곧 중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은 다 쇠미해지고 , 압록강 이북 곧 북부 조선의 여러 나라들도 거의 기울어져서 , 가라나 신라나 백제나 남낙랑이나 동 부여의 두 나라들이 다 기록할 만한 일이 별로 없고 , 오직 고구려와 북부여가 가장 강대한 나라로 여러 나라 중에 크게 떨쳤다 . 그러나 대 주류왕 이후 연대가 삭감됨에 따라 사실도 모두 빠져서 그 사적 ( 史積 ) 을 논할 수가 없게 되었고 , 이제 지나사에 의거하여 고구려가 지나와 선비에 대해 정치적으로 관련된 한두 사항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
2.고구려 대 支那(지나)의 관계
 
고구려가 동부여와 남낙랑과의 관계로 인하여 늘 한 ( 漢 ) 과 다투더니 , 기원 1 세기경에 한의 외족 ( 外族 ) 에 왕망 ( 王莽 ) 이라는 괴걸 ( 怪傑 ) 이 나와서 , 1)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볍 ( 井田法 ) 을 실행하고 , 2) 한 문화 ( 漢文化 ) 로 세계를 통일하여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 지나 본국뿐 아니라 조선의 여러 나라까지도 얼마간의 관계가 발생하였다 . 말하자면 지금의 중화민국 ( 中華民國 ) 이전에 지나는 수천 년 동안 왕조의 변역과 군웅의 쟁탈이 무상하였지마는 , 기실 을의 세력이 갑의 세력을 대신할 때에 , 민중에게는 한때 , `요역 ( 요投 ) 을 면제하고 부세 ( 賦稅 ) 를 감해준다 ( 省요役薄賦稅 ) '하는 6 장의 혜정 ( 惠政 ) 으로 고식적 ( 始息的 ) 인 편안을 주다가 , 오래지 않아 다시 옛 규 정을 회복하여 폭 ( 暴 ) 으로써 폭을 대신하는 극이 되풀이될 뿐이었으니 , 이를 무의식한 내란이라고는 일컬을지언정 , 혁명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는 받을 수 없었다 . 그러나 왕망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하였으니 , 이는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이제 정전설 ( 井田說 ) 발생의 경과와 왕망의 약사 ( 略史 ) 를 말하기로 한다 . 정전설은 지나의 춘추시대 ( 春秋時代 ) 말 전국시대 ( 戰國時代 ) 초 ( 기원 전 5 세기경 ) 에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생한 것인데 , 당시 여러 나라들이 서로 맞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나라마다 귀족이 전권 ( 專權 ) 을 하여 , 사치가 극에 이르고 , 전쟁이 끊일 날 없어서 , 부세가 날로 높아가고 ,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땅을 아울러 가져서 인민의 생활이 말할 수없이 곤란하였으므로 , 유약 ( 有若 ) · 맹가 ( 孟軻 : 孟子 ) 등 일부 학자들이 이를 구제하려고 토지평균설 ( 土地平均說 ) --- 정전설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 그들의 말에 의하면 , “지나의 하 ( 夏 ) · 상 ( 商 ) · 주 ( 周 ) 3 대가 다 정전제 ( 井田制 ) 를 행하였는데 , 정 ( 井 ) 자 모양의 9 백 묘 ( 묘 ) 의 땅을 여덟 집에 나누어주어 한 집이 1 백 묘씩을 경작하고 , 그 나머지 l 백 묘는 공전 ( 公田 ) 이라 하여 여덟 집이 공동으로 경작하여 공용 ( 公用 ) 에 바치게 하고 또 각자 경작한 1 백 묘에서 소출의 10 분에 1 을 공세 ( 公稅 ) 로 바치게 하여 이를 십일세 ( 什一稅 )라 일컬었다 .”고 하고 , “선대의 성왕 ( 聖王 ) 은 다시 나지 않고 중국이 분열하여 전국시대가 되매 , 제후와 왕들이 그 백성에게서 세를 많이 받기 위하여 정전을 파괴하는 동시에 , 정전에 관한 문적 ( 文籍 ) 까지 없애버렸다 .”고 하였다 .
 
어느 민족이고 그 원시 공산제가 있었음을 오늘날의 사회학자들이 다 같이 공언하는 바이니 , 지나도 그 태고에 균전제도 ( 均田制度 ) 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들 ( 有若 · 孟軻 등 ) 이 주장한 정전제는 당시 조선의 균전제를 눈으로 보고 혹은 전해듣고서 이를 모방하려 한 것이고 , 그들이 자인한 바와 같이 자기네의 옛 문적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 다만 조선의 균전은 팔가동전 (八家同田 ) 이 아니고 사가동전 ( 四家同田 ) 이니 , 지금 평양이나 경주에 끼쳐 있는 기자형 ( 器字形 ) 의 고전 ( 故田 ) 이 이를 충분히 증명하는데 , 그 세제는 10 분의 1 을 취하는 `십일세 ( 什一脫 ) 가 아니고 , 20 분의 1 을 취하는 입일세 ( 卄一脫 ) 였다 . 맹자가 , `맥 ( 貊 : 곧 濊 貊 ) 은 20 에서 1 을 취한다 ( 貊 二十取一 ). '고 한 말이 이를 명백히 지적한 것이다 .
 
저들이 사가동전제를 파가동전제로 고치고 20 분의 1의 세제를 10 분 의 1의 세제로 고쳐서 조선과 달리하고는 , 자존적 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이 이를 조선에서 가져왔다 함을 꺼려 숨기고 중국 선대 제왕의 유제 ( 遺制 ) 라고 속이는 동시에 조선을 이맥 ( 夷貊 ) 이라 일컫고 , 조선의 정전은 이맥의 제도라고 배척하여 춘추의 공양전 ( 公洋傳 ) · 곡량전 ( 穀梁傳 ) 이나 맹자와 마찬가지로 , “십일 ( 什一 ) 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 맥 ( 大貊 ) · 소맥 ( 小貊 ) 이다 ( 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 ). ”라고 하고 , “맥 ( 貊 ) 은 오곡이 잘 되지 않고 오직 기장만 나는데---백관 ( 百官 ) · 유사 ( 有司 ) 를 먹여 살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20 에 1 만 받아도 족하다 ( 貊 五穀不生 唯?용生之 - - -- - -無百官有司之養 故二十取一而足 ). ”고 하였다 . 후한서 부여 · 옥저 등의 전 ( 傳 ) 에 , “땅이 평평하고 넓으며기름지고 아름다워오곡이 잘 된다 ( 土地平?---肥美---宜五穀 ). ”고 하였고 , 위략의 부여 · 고구려 등의 전에는 , “그 벼슬에는 상가 ( 相加 ) · 대로 ( 對盧 ) · 패자 ( 沛者 ) 등이 있다 ( 其官 有相加對盧沛者 ). ”라고 하였으니 , 맹씨 ( 孟氏) · 공양 ( 公洋) · 곡량 ( 穀梁 ) 등의 말이 근거도 없고 이론에도 맞지 않는 조선 배척론임을 볼 것이다 . 조엽 ( 趙曄 ) 의 오월춘추 ( 吳越春秋 ) 에는 “하우 ( 夏禹 ) 의 정전 ( 井田 ) 이 조선 ( 본문의 州愼 ) 의 것을 모방해서 행한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는 공정한 자백이다 .
 
저들이 정전설을 아무리 소리 높여 외쳤더라도 본래 민중을 휘동하여 부귀의 계급을 타파하려 한 운동이 아니고 오직 임금이나 부귀의 계급을 설복하여 그 이미 얻은 부귀를 버리고 그 가지고 있는 것을 민중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자는 것이므로 민간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임금이나 귀족들은 바야흐로 권리의 쟁탈에 급급하여 정전설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다 . 진시황이 여러 나라를 토멸하여 지나를 통일하고 지나의 모든 재부 ( 財富 ) 를 독점하여 , 아방궁 ( 阿房宮 ) 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2 세에 망하고 , 8 년의 큰 난리를 지나 한 ( 漢 ) 나라가 일어나매 , 옛날부터 여러 나라에 있어 온 귀족과 토호 ( 土豪 ) 들이 많이 멸망하여 부귀 계급이 훨씬 줄고 , 인구도 난리통에 많이 줄어들어 농토 부족이 근심이 없었으므로 , 문제되어오던 사회 문제가 얼마 동안 잠잠하였으나 , 2 백 년의 태평세월을 지나면서 인구는 크게 번식하고 거농 ( 巨農 ) 과 대상 ( 大商 ) 이 발생하여 , 부자는 여러 고을의 땅을 가진 이가 있는 반면에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있어서 사회 문제가 학자나 정치가의 사이에 다시 치열하게 논란되게 되었다 . 그래서 혹은 한전의 ( 限田議 : 토지 소유를 제한하자는 의논 ) 를 내어 인민의 땅을 얼마 이내로 제한하자고 하고 , 혹은 주례 ( 周禮 ) 란 글을 지어 , 이것을 지나 고대에 정전제를 실행한 주공 ( 周公 ) 이란 성인이 지은 글이라고 거짓 핑계하여 당시의 제도를 반대하였다 .
 
그런데 이때에 한의 제실 ( 帝室 ) 은 쇠약해지고 , 외척 ( 外戚 ) 왕씨 ( 王氏 ) 가 대대로 대사마 ( 大司馬 ) · 대장군 ( 大將軍 ) 의 직책을 가져 정권과 병권을 마음대로 하다가 , 왕망이 대사마 · 대장군이 되어서는 한의 평제 ( 平帝 ) 와 유자영 ( 孺子영 ) 두 황제를 독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신 ( 新 ) 이라 하였는데 , 왕망은 설로 앞에서 말한 1) 정전제의 실행 2) 한문화 ( 漢文化 ) 의 세계 통일이라는 두 가지 큰 사상을 가진 자였다 . 그래서 주례 ( 周禮 ) 를 모방하여 온 지나의 정전 구획 ( 區劃 ) 에 착수하고 또 사신을 이웃 나라에 보내서 많은 재물을 임금에게 뇌물하여 , 인명과 지명을 모두 중국식으로 고치고 한문을 배우라고 꾀었다 . 이보다 앞서 흉노가 남 · 북 둘로 나뉘어져서 북흉노는 지금의 몽고 북부에 웅거하여 한과 대항하였으나 남흉노는 몽고 남부에 웅거하여 한에 신복 ( 臣服 ) 하였는데 , 이때에 왕망의 사신이 남흉노의 선우 ( 單于 ) 낭아지사 ( 囊牙知斯 ) 를 달래어 `두 글자 이상의 이름은 중국 문법에 어긋나니 , 낭아지사란 이름을 고쳐 `지 ( 知 '라 하고 , 흉노란 `흉 ( 匈 ) '자가 순하지 못하니 `항노 ( 降奴 ) '라 고치고 , 선우란 `선 ( 單 ) '자 가 뜻이 없으니 복우중국 ( 服于中國 ) 이란 뜻으로 `복우 ( 服于 ) '라 고치라 .'고하였다 . 낭아지사가 처음엔듣지 않다가왕망의 재물을 탐내어 한이 준 흉노선우 ( 匈如單于 ) 낭아지사의 인문 ( 印文 ) 을 버 리고 왕망이 새로 주는 항노복우지` ( 降奴服于知 ) '란 인문을 받았다 . 그러나 왕망이 다시 생각하기를 남흉노가 관할하는 부중 ( 部衆 ) 이 너무 많으니 혹 후일에 근심이 되지 않을까 하여 , 그 부중을 12 부로 나누어 열두 복우 ( 服于 ) 를 세우라고 하였다 . 그러니까 낭아지사가 크게 노하여 드디어 왕망에게 대항하여 싸우기에 이르렀다 .
 
왕망이 여러 장수를 보내어 흉노를 치는데 , 요동에 조서를 보내고 , 고구려현 ( 高句麗縣 ) 이 군사를 징발하였다 . 고구려현이란 무엇인가 ? 한나라 무제가 고구려국을 현으로 만들려다가 패하여 소수 ( 小水 ), 지금의 태자하 ( 太子河 ) 부근에 한 현을 두고 조선 여러 나라의 망명자 · 포로 등을 끌어모아 고구려 현이라 일컬어서 , 현도군에 소속시키고 , 통솔하는 장관 한 사람을 두어 고구려후 ( 高句麗候 ) 라 일컬은 것이었다 . 그 고을〔縣〕 사람들이 먼 길에 출정함을 꺼리므로 강제로 정발을 행하니 , 고을 사람들이 새외로 나와서 싸움터로 가지 않고 모두 도둑이 되어 약탈을 하였다 . 왕망의 요서대윤 ( 選西大尹 ) 전담 ( 田譚 ) 이 추격하다가 패하여 죽으니 , 왕망이 대장군 엄우 ( 嚴尤 ) 를 보내 그 고을의 후 ( 候 ) 추 ( 騶 ) 를 꾀어다가 목배어 장안 ( 長安 ) 으로 보내고 싸움에 크게 이겼음을 보고하니 , 고구려현을 하구려현 ( 下句麗縣 ) 이라 고치고 조서를 내려 여려 장수들을 격려하여 이긴 기세를 타 조선의 여러 나라와 흉노의 여러 부족을 쳐서 한화적 ( 漢 化的 ) 시설을 재촉하였다 . 이에 조선 여러 나라 , 북부여 · 고구려 등의 나라가 왕망에 대항하여 공수 ( 攻守 ) 동맹을 맺고 , 왕망의 변경을 자주 침노하여 왕망이 이에 대조선 · 대 흉노의 전쟁을 위해 세금을 늘리고 사람을 징발하여 전 지나가 소란해졌다 . 그래서 부유한 백성들만 왕망을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 가난한사람들도 떼를지어 일어나 왕망을 토벌하므로 , 왕망이 마침내 패망하고 한나라 광무제 ( 光武帝 ) 가 한나라를 중홍하였다 .
 
삼국사기에는 왕망의 침입을 유류왕 ( 儒留王 ) 31 년의 일로 기록하고 , 후·추를 고구려의 장수 연비 ( 延丕 ) 로 하였으나 , 이는 삼국사기 의 작자가 1) 고구려 고기 ( 古記 ) 에 연대가 줄어든 공안 ( 公案 ) 이 있음 을 보고 고기의 연대를 한서의 연대와 맞추고 , 2) 한서의 고구려가 고구려국과 관계없는 한나라 현도군의 고구려현인 줄을 모르고 , 이를 고구려국으로 잘못 알아서 한서의 본문에 그대로 초록하는 동시 에 , 다만 유류왕이 왕망의 장수의 손에 죽어 그 머리가 한 나라 서울 장안 에까지 갔다고 함은 , 저들 사대노 ( 事大奴 ) 의 눈에도 너무 엄청난 거짓말인 듯하므로 , `고구려후추 ( 高句麗候騶 ) ' 5 자를 `아장연비 ( 我將延丕 ) '의 4 자로 고친 것이다 ( 김부식이 흐리터분한 잘못은 많으나 턱없는 거짓은 못하는 사람이니 , 연비는 혹 고기의 작자가 위조한 인물인 듯도 하다 . 그러나 유류왕은 분명히 왕망보다 백여년 전 인물이고 , 한서에 말한 고구려는 분명히 고구려국이 아니니 , 설혹 참말로 연비 라는 사람이 있었다 할지라도 유류왕 시대 고구려 사람은 아닐 것 이다 ).
 
그러니 왕망은 지나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의식있는 혁명을 행하려 한 사람이다 . 그러나 이웃 나라를 너무 무시하여 남의 언어 · 문자 ·종교·정치 ·풍속·생활 등 모든 역사적 배경을 묻지 않고 , 한문화 ( 漢文化 ) 로 지배하려 하다가 그 반감을 불러일으켜서 얼마간의 민족적 전쟁을 일으키게 해서 , 결과가 내부 개혁의 진행까지 저지하여 , 그 패망의 첫째 원인을 만들었다 . `신수두'교가 비록 태고의 미신이지마는 , 전해내려온 연대가 오래고 유행한 지역이 넓어서 , 한나라의 유교는 이를 대적할 무기가 못 되고 , 이두문이 비록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서 만든 것이지마는 , 조선의 인명 · 지명 등 명사 ( 고대에는 모두 우리 말로 지은 명사 ) 뿐 아니라 , 노래나 시나 기록이나 무엇이거나 다 이때 조선인에게는 한자보다 편리하였으므로 , 한자로 이두자를 대신 할 가망이 없으니 , 왕망의 한 문화적 동방 침략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는가 ? 하불며 흉노의 본 이름은 `훈'인데 , 구태여 `훈'을 `흉노'로 쓰는 이는 한인 ( 漢人 ) 이고 , 고구려의 본 이름은 `가우리 '요 , 고구려 ( 高句麗 ) 는 그 이두자인데 , 구태여 고구려를 구려 ( 句麗 ) 혹은 고구려 ( 高句麗 ) 로 쓰는 이도 한인이었다 . 한인의 짓도 괘씸하거늘 하물며 게다가 본명과 얼토당토않은 글자를 가져다가 `항노 ( 降奴 ) '라 `하고려 ( 下高麗 ) '라 함이랴 ? 왕망의 패망함이 또한 당연한 것이었다 .
3.鮮卑(선비) 대 고구려의 관계
 
고구려와 한이 충돌하는 사이에 서서 , 고구려를 도우면 고구려가 이기고 , 한을 도우면 한이 이겨 , 두 나라의 승패를 좌우하는 자가 있으니, 곧 선비라 일걷는 종족이 그것이었다 . 선비가 조선의 서북쪽 , 몽고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가, 흉노 모돈에게 패하여 그 본거 지를 잃고 내외 흥안령 ( 內外興安領 ) 부근으로 옮겨갔음은 이미 제 2 편 제 3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 그 뒤에 선비가 둘로 나뉘어 하나는 그대로 선비라 일컫고 , 하나논 `오환 ( 烏桓 ) '의 고기를 먹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 목축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종족으로서 각기 읍락 ( 邑落 ) 을 나누어 사는데 , 부족 전체를 통솔하는 대인 ( 大人 ) 이 있고 , 읍락마다 부대인 ( 富大人 ) 이 있어 그 부족들은 다 그 대인이나 부대인 의 명자 ( 名子 ) 로 성을 삼으며 ,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젊은 사람을 존중 하고 , 늙은 사람을 천대하며 , 문자가 없으므로 일이 있으면 나무에다 새긴 것으로 신표 ( 信標 ) 를 삼아서 무리를 모으고 , 모든 분쟁은 대인에게 판결을 받아서 지는 자는 소나 양으로 배상을 하였다 .
 
조선이 모돈에게 패한 뒤에 선비와 오환이 다 조선에 복종하지 않고 , 도리어 조선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므로 고구려 초에 유류왕이 이를 걱정하여 부분노 ( 扶芬奴 ) 의 계략을 쫓아 군사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왕이 친히 거느리고 선비국의 전면을 치고 , 다른 한부대는 부분 노가 거느리고 가만히 사잇길로 하여 선비국의 후면으로 들어가서 , 왕이 먼저 교전하다가 거짓 패하여 달아나니 , 선비가 그 소혈 ( 巢穴 ) 을비워두고 다투어 추격하므로 , 부분노가 이에 소혈을 습격 점령하고 , 왕의 군사와 함께 앞뒤에서 쳐서 , 드디어 선비를 항복받아 속국을 삼았다 . 오환은 한의 무제 ( 武帝 ) 가 위우거 ( 衛右秉 ) 를 토멸한 뒤에 이를 불러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뺑陽 ) · 상곡 ( 上용 ) · 안문 ( 確門 ) · 대군 ( 代那 )---지나의 서북부 지금의 직예성 ( 直匠省 ) · 산서성 ( 山西省 ) 일대에 옮겨 살게 하여 흉노의 정찰을 맡아보게 하였다 . 그 뒤 소재 ( 昭帝 ) 때에 오환이 날로 불어나므로 , 당시 한의 집권자 곽광 ( 곽光 ) 이 훗날의 걱정거리가 될까 하여 , 오환의 선조 가운데 모돈에게 패하여 죽은 참혹한 역사로써 , 오환을 선동하여 모돈의 무덤을 파헤쳐 조상의 원수를 갚게 하니 , 흉노의 호연제선우 ( 壺衍제單于 ) 가 크게 노하여 날랜 기병 2 만 명으로 오환을 치매 오환은 한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 한이 3 만 군사를 내어 구원한다 일컫고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가 흉노가 물러나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오환을 습격해서 수없이 학살하여 오환이 아주 쇠약해져서 다시 한에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 왕망의 때에 이르러서는 오환으로 하여금 흉노를 치라 하고 그 처자들을 여러 고을에 볼모로 삼고 오환을 휘몰아서 흉노를 전멸시키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니 , 오환이 분하게 여겨 배반하고 달아나는 자가 많았다 . 왕망이 이에 그 볼모로 한 처자를 죄다 죽이니 , 그 참혹함이 또 한 심하였다 .
 
왕망이 망하고 지나가 크게 어지러워지니 , 고구려의 모본왕 ( 募本王 ) 이 이를 기회로 하여 , 요동을 회복하여 양평성 ( 襄平城 ) 의 이름을 고쳐 고구려의 옛 이름대로 오열흘 ( 烏列忽 ) 이라 일컫고 선비와 오환과 협력하여 자주 지나를 치니 , 한의 광무제가 한을 중흥한 뒤에 요동군 ( 遼東郡 ) 을 지금의 난주 ( 難州 ) 에 옮겨 설치하고 , 고구려를 막기 위하여 장군 채동 ( 蔡동 ) 으로 요동 태수를 삼았다 . 그러나 채동이 자주 전쟁에 지고 , 금백 ( 金帛 ) 으로 선비의 추장 ( 酋長 ) 편하 ( 偏何 ) 를 달래어 서 오환의 추장 흠지분 ( 歆志분 ) 을 살해하게 하니 , 모본왕이 다시 선비와 오환을 타일러서 공동작전을 취하였다 . 한은 계책이 궁하여 해 마다 2 억 7 천만 전 ( 錢 ) 을 고구려 · 선비 · 오환 세 나라에 바치기로 약조하여 휴전이 되었다 .
 
모본왕이 한을 이기니 몹시 거만해져서 , 몸이 아플 때에는 사람으로 누울 자리를 삼고 , 누울 때는 사람으로 베개를 삼아서 꼼짝만 하면 그 사람을 목베어 죽여 , 그렇게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 시신 ( 待臣 ) 두로 ( 柱魯 ) 가 왕의 베개가 되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일찍이 친구에게 울면서 그 사정을 하소연하니 , 그 친구가 말하기를 , “우리를 살게 하므로 우리가 임금을 위하는 것인데 , 우리를 죽이는 임금이야 도리어 우리의 원수가 아닌가 ? 원수는 죽이는 것이 옳소 .” 하였다 . 이에 두로가 칼을 품었다가 왕을 죽였다 . 모본왕이 죽은 뒤에 신하들이 모본왕의 태자는 못났다고 하여 폐하고 종실에서 맞아다가 세우니 이가 태조왕 ( 太祖王 ) 이다 .
 
고구려 본기가 대주류왕 이후는 확실히 연대가 줄어들었으므로 모본왕 본기 부터서야 비로소 근거할 만한 재료가 될 것이지마는 , 모본왕을 대주류왕의 아들이라고 함은 그 연대가 줄어든 자취를 숨기려는 거짓 기록이다 . 모본왕은 대개 대주류왕의 3 세나 혹은 4세가 됨이 옳 고 , 모본왕 때에 요동을 회복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 태조왕 3 년 ( 기원 55 년 ) 에 요서와 10 성을 쌓았으니 , 요동은 그 전에 한 번 회복되었던 것이 명백하며 , 후한서 동이열전 ( 東吏列傳 ) 에 , “고구려와 선비가 우북평 ( 右北平 ) · 어양 ( 漁陽 ) · 상곡 ( 上谷 ) · 태원 ( 太原 ) 등지 를 침략하다가 채동 ( 蔡동 ) 에 은혜와 믿음으로 불러다 다시 항복하였다 . ”고 하였으나 , 세출전 ( 歲出錢 ) 2 억 7 천만 전이 채동전 ( 蔡동傳 ) 에 기록되어 있으니 , 이는 세공 ( 歲貢 ) 이요 , 은신 ( 恩信 ) 이 아니다 .
 
==제 2 장 太祖·次大 두 대왕의 文治 ==
 
1. 太祖 · 次大 두 대왕의 世系의 잘못
 
왕조의 세계 ( 世系 ) 에 틀리고 안 틀린 것은 사학가가 아는 체할 것이 아니지만 , 고대사는 세대의 사실이 매양 왕조의 보첩 ( 譜牒 ) 에 딸려 전하므로 , 그 틀리고 안 틀림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 이제 먼저 태조왕 의 세계를 말하기로 한다 .
 
전사 ( 前史 ) 에 태조왕을 유류왕 ( 儒留王 ) 의 아들 , 고추가 ( 古鄒加 ) 재사 ( 再思 ) 의 아들 , 대주류왕의 조카라 했으나 , 유류왕은 이미 말한 바 와 같이 연대가 줄어진 동안에 든 제왕이고 , 광개토경호태왕 ( 廣開土 境好太王 ) 의 16 대조이니 , 모본왕 (募本王 ) 에게는 3 대조가 될 것이요 , 태조왕에게는 4 대조가 될 것이다 . 그러니 유류왕을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의 아버지로 한것은 잘못된 기록이 아니면 속인 기록이다 . 재사는 그 벼슬 이름이 고추가 ( 古鄒加 ) 요 , 고추가는 곧 `고추가'를 이두자로 기록한 것이다 . `고주'는 묵은 뿌리 〔古根〕 란 뜻이요 ( 지금 속어에도 묵은 뿌리를 `고주박'이라 함 ) `가'는 신 ( 神 ) 의 씨란 뜻으로 , 당시 5 부 ( 部 ) 대신의 칭호가 된 것이니 , `고주가'는 당시 종친 대신의 벼슬 이름이다 ( 지금의 속어에도 먼 동족을 `고죽지 먼 등그러기 '라 함 ). 재사가 `고주가'의 벼슬을 가졌으므로 종친 대신임이 분명하고 , 후한서나 삼국지에 , “처음에는 연나 ( 涓那 ) 는 왕 될 권리를 잃었으나 그 적통 ( 嫡統 ) 대인 ( 大人 ) 이 오히려 고추가라 일컬어 종묘 ( 宗廟 ) 를 세움을 얻었다 .”고 하였으나 연나는 서부 ( 西部 ) 의 이름이고 , 계나 ( 桂那 ) 는 중부 ( 中部 ) 의 이름이니 , 고구려의 정치체제에 중부가 주가 되고 4 부가 이에 복속하였으므로 , 어느 임금 때에도 중부를 두어두고 서부인 연나 에서 왕이 나왔을 리가 없으니 , 이는 태조왕이 연나의 우두머리인 고추가 재사의 아들로서 , 왕이 되고 모본왕의 태자가 계나를 차지하였던 `신한'의 아들로서 물러나 연나의 고추가가 되었음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 . 본기에는 태조왕 이후에 다시 대주류왕의 후예로서 들어가 왕위를 이은 이가 없고 , 광개토경호태왕의 비에 대주류왕이 그 직조 ( 直祖 ) 로 씌어 있으니 ,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대주류왕의 조카가 아니라 3 세손이 될 것이다 .
 
이제 또 차대왕 ( 次大王 ) 의 세계 ( 世系 ) 를 말하고자 한다 . 전사 ( 前史 ) 에 차대왕은 재사의 아들이요 , 태조왕과 한 어머니 아우라 하였으나 태조왕 당시에 차대왕은 왕자라 일컬었으니 , 차대왕이 태조왕의 아우라면 어찌 왕제 ( 王弟 ) 라 아니하였는가 ? 현재의 왕의 아들은 아니지마는 전왕의 아들이므로 또한 왕자라 일컬었다면 재사가 왕의 아버지요 왕이 아니니 , 왕부 ( 王父 ) 의 아들도 왕자라 일컬은 예가 있는가 ? 태조왕이 즉위할 때에 나이 겨우 7 살이요 , 생모되는 태후가 섭정하였 으니 , 이때에 재사가 생존해 있었을지라도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것이 여자나 어린아이만도 못할 만큼 노쇠하여 7 살된 아들에게 왕위를 내 주고 , 아내가 섭정함에 이른 것인데 , 그 뒤에 어찌 다시 굳세어져서 차대왕과 신대왕 ( 新大王 ) 과 인고 ( 仁固 ) 의 3 형제를 낳음에 이르렀으랴 ? 재사가 정치상에는 싫증이 났으나 , 아들을 낳을 만한 생식력은 강하였다 하더라도 차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6 살이었으니 , 태조 왕이 19 년이 그가 난 해요 , 신대왕은 즉위할 때에 나이가 77 살이었으니 , 태조왕 37 년이 그가 난 해다 . 태조왕 원년에 많이 늙은 재사가 19 년만에 또 차대왕을 낳고 그 뒤 또 20 년만에 신대왕을 낳았다 함이 어찌 사리에 맞는 말이랴 ? 대개 차대왕 · 신대왕과 인고 세 사람은 태조 왕의 서자이고 , 차대왕에게 죽은 막근 ( 莫勤 ) 과 막덕 ( 莫德 ) 두 사람은 태조왕의 적자이므로 , 신대왕과 인고가 비록 차대왕 ( 왕자시대의 ) 의 전천 ( 專擅 ) 을 미워하였으나 , 초록 ( 草綠 ) 은 동색 ( 同色 ) 이라 , 그 반역의 음모를 고발하지 않은 것이고 , 차대왕도 그 즉위한 뒤에 막근 형제는 살해하였으나 , 신대왕과 인고는 그대로 둔 것이니 , 후한서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들로 기록한 것이 실록 ( 實錄 ) 이요 , 본기에 차대왕을 태조왕의 아우라고 한 것은 잘못된 기록이거나 혹은 거짓 기록이다 . 본기 ( 本紀 ) 에 태조왕의 소자 ( 小字 ) 를 어수 ( 於漱 ) 라 하고 이름을 궁 ( 宮 ) 이라 하였으나 , 어수는 이두문으로 `마스'라 읽을 것이고 , 궁 ( 宮 ) 이라는 뜻이다 . 전자나 후자가 둘 다 태조왕의 이름이니 , 어수는 소자이고 , 궁은 이름이라고 나눌 것이 아니다 .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 ( 遂成 ) 이니 수성으로 읽을 것인데 , 더러운 그릇을 깨끗하게 하는 `짚몽둥이 '를 가리키는 말이요 , 태조왕을 전사 ( 前史 ) 에는 시호라고 하였으나 고구려는 처음부터 시호법을 쓰지 아니하고 생사에 그 공적을 찬양하여 , `태조 ( 太祖 ) ' 혹은 `국조 ( 國祖 ) '라고 하는 존호 ( 尊號 ) 를 올렸으며 , 차대왕은 그 공적이 태조왕 다음 간다는 뜻으로 올린 존호이다 .
 
2. 太祖王 · 次大王 시대의 `선배'제도
 
고구려의 강성은 선배 제도의 창설로 비롯된 것인데 , 그 창설한 연대는 전사에 전해지지 아니하였으나 , 조의 ( 조衣 : 다음에 자세히 설 함 ) 의 이름이 태조왕 본기에 처음으로 보였으니 , 그 창설이 태조 · 차대 두 대왕 때가 됨이 옳다 . `선배'는 이두자로 `선인 ( 先人 ) ' , `선인 ( 仙人 ) '이라 쓴 것으로써 , `선 ( 先 ) '과 `선 ( 仙 ) '은 `선배'의 `선'의 음 을 취한 것이고 , 인 ( 人 ) 은 `선배'의 `배'의 뜻을 취한 것이니 , `선배' 는 원래 `신수두' 교도의 보통 명칭이었는데 , 태조왕 때에 와서 해 마다 3 월과 10 월 신수두 대제 ( 大祭 ) 에 모든 사람을 모아 혹은 칼로 춤을 추고 , 혹은 활도 쏘며 , 혹은 깨끔질도 하고 , 혹은 태껸도 하며 , 혹은 강의 얼음을 깨고 물 속에 들어가 물싸움도 하고 , 혹은 노래하고 춤을 추어 그 잘하고 못함을 보며 , 혹은 크게 사냥을 하여 그 잡은 짐승의 많고 적음도 보아서 , 여러 가지 내기에 승리한 사람을 `선배 '라 일걷고 , `선배 '가 된 이상에는 나라에서 봉급을 주어서 그 처자를 먹여 집안에 누가 없게 하고 , `선배'가 된 사람은 각기 편대를 나누어 한 집에서 자고 먹으며 , 앉으면 고사 ( 故事 ) 를 강론하거나 학예를 익히고 , 나아가면 산수를 탐험하거나 , 성곽을 쌓거나 , 길을 닦거나 ,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거나 하여 , 일신을 사회와 국가에 바쳐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사양치 아니한다 . 그 가운데서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가장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긴다 . 일반 선배들은 머리를 깎고 조백 ( 조帛 ) 을 허리에 두르고 , 그 스승은 조백으로 옷을 지어 입으며 , 스승 중의 제일 우두머리는 `신크마리'`---두대형 ( 頭大兄 ) ' 혹은 `태대형 ( 太大兄 ) '이라 일컫고 , 그 다음은 `마리'---`대형 ( 大兄 ) '이라 일컨고 , 맨 아래는소형 ( 小兄 : 본래의 말은상고할수없음 ) 이라 일컬었다 . 전쟁이 일어나면 `신크마리'가 모든 `선배'를 모아 스스로 한단체를 조직하여 싸움터에 나아가서 , 싸움에 이기지 못하면 싸우다가 죽기를 작정하여 , 죽어서 돌아오는 사람은 인민들이 이를 개선하는 사람과 같이 영광스러운 일로 보고 , 패하여 물러나오면 이를 업신여기므로 , `선배 '들이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였다 . 당시 고구려의 여러 가지 지위는 거의 골품 ( 骨品 : 명문 ) 으로 얻어 미천한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지마는 , 오직 `선배 '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기의 지위를 획득하므로 , 이 가운데서 인물이 가장 많이 나 왔다 .
 
지금 함경북도의 재가화상 ( 在家和尙 ) 이라는 것이 곧 고구려 `선배 ' 의 유종 ( 遺種 ) 이니 , 고려도경 ( 高麗圖經 ) 에 , “재가화상 ( 在家和尙 ) 은 화상 ( 和尙 : 중 ) 이 아니 라 형 ( 刑 ) 을 받고 난 사람으로 , 중과 같이 머리 를 깎았으므로 , 화상이라 한다 .”고 하였는데 , 이는 실제와 맞는 말이다 . 그러나 형벌을 받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서긍 ( 徐兢 : 고려도경 의 저작자 , 지나 宋人 ) 이 다만 지나 한대 ( 漢代 ) 의 죄인을 머리를 깎고 , 노 ( 奴 ) 라 일컬은 글로 인하여 드디어 재가화상을 형벌받은 사람이라 억지의 판단을 한 것이다 . 대개 고구려가 망한 뒤에 `선배 '의 남은 무리들이 오히려 구 유풍 ( 遺風 ) 을 유지하여 , 마을에 숨어서 그 의무를 수행하여왔는데 , `선배 '란 명칭은 유교도에게 빼앗기고 , 그 머리를 깎은 까닭으로 하여 재가화상이란 가짜 명칭을 가지게 된 것이고 , 후손이 가난해서 학문을 배우지 못하여 조상의 옛 일을 갈수록 잊어 자기네의 내력을 스스로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
 
송도 ( 松都 : 開城 ) 의 수박 ( 手拍 ) 이 곧 `선배 ' 경기의 하나이니 , `수박'이 지나에 들어가서 권법 ( 拳法 ) 이 되고 , 일본에 건너가서 유도 ( 柔道 ) 가 되고 , 조선에서는 이조에서 무풍 ( 武風 ) 을 천히 여긴 이래로 그 자취가 거의 전멸하였다 .
3. 太祖王 · 次大王 때의 제도
 
고구려가 추모왕 때에는 모든 작은 나라들이 늘어서 있을 뿐 아니라 , 모든 규모가 초창이라 나라의 체제를 채 갖추지 못하였는데 , 태조 왕 때에 와서 차대왕이 왕자로서 집정하여 각종 제도를 마련하였다 . 그러나 그 제도가 대개 왕검조선 ( 王儉朝鮮 ) 이나 삼부여 ( 三扶餘 ) 의 것 을 참작하여 대동소이하게 만든 것이고 , 그 뒤 대 ( 代 ) 마다 다소 변경 이 있었으나 , 대개 차대왕이 마련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 `신 · 말 · 불' 삼한 ( 三韓 ) 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부에 재상 세 사람을 두었으니 , 가로되 `신가' · `팔치 ' · `발치 '다 . `신가'는 태대신 ( 太大臣 ) 이란 뜻이니 , 이두자로 `상가 ( 相加 ) '라 쓰고 , `신가'의 별명이 `마리'로 머리〔頭〕란 뜻이니 , 이두자로 대로 ( 對盧 ) ( 대는 옛 뜻으로 마주 ) 라 쓰고 , `신가'나 `마리 '를 한문으로는 국상 ( 國相 ) 혹은 대보 ( 大輔 ) 라 썼다 . 팔치는 `팔꿈치 ( 肱 ) '란 뜻이니 , 이두자로 `평자 ( 評者 ) '라 쓰는데 , 한문으로는 `좌보 ( 左輔 ) · 우보 ( 右輔 ) '라 썼다 . 위의 세 가지 를 만일 한문으로 직역하자면 `두신 ( 頭臣) ' · `굉신 ( 肱臣 ) ' · `고신 ( 股臣 ) '이라 할 것이지마는 , 글자가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대보·좌보·우보'라 했다 . 삼한고기 ( 三韓古記 ), 해동고기 ( 海東古記 ), 고구려고기 ( 高句麗古記 ) 등의 책에 혹 앞의 것을 좋아 `대로 ( 對盧 ) · 패자 ( 沛者 ) · 평자 ( 評者 ) '로 기록하고 , 혹은 뒤의 것을 쫓아 `대보 · 좌보 · 우보'라 하였는데 , 김부식 ( 金富軾 ) 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 이두와 한역 ( 漢譯 ) 의 이동 ( 異同 ) 을 구별하지 못하고 철없는 붓으로 마구 빼고 마구 넣고 마구 섞고 마구 갈라놓았으므로 , “좌우보 ( 左右輔 ) 를 고쳐 국상 ( 國相 ) 을 만들었다 . ” “패자 ( 沛者 ) 아무로 좌보를 삼 았다 .” 하는 따위의 웃음거리가 그 사기 가운데 가끔 있다 .
 
전국을 동·서 ·남·북·중 5 부 ( 部 ) 로 나누어 동부는 `순라' , 남부 는 `불라' , 서부는 `열라' , 북부는 `줄라' , 중부는 `가우라'라 하니 , 순나`順那' · 관나 ( 灌那 ) · 연나 ( 椽那 ) · 절나 ( 絶那 ) · 계안나 ( 桂安那 ) 는 곧 `순라·불라· 열라·줄라· 가우라'의 이두자인데 , 관나의 `관 ( 灌 ) '은 뜻을 취하여 `불 ( 灌은 본래 부을관 ) '로 읽을 것이고 , 그 별명인 `비류나 ( 沸流那) '의 비류 ( 沸流 ) 는 음을 취하여 `불'로 읽을 것이 니 , 지나사의 `관나 ( 灌那 ) '는 곧 고구려의 이두자를 직접 수입한 것인데 , 삼국사기에는 관 ( 灌 ) 을 관 ( 貫 ) 으로 고쳐 그 뜻을 잃었다 . 그 밖의 순 ( 順 ) · 연 (涓 ) · 절 ( 絶 ) · 계 ( 桂 ) 의 네나 ( 那 ) 는 다음으로 쓴 것이니 , 중부 ( 中部 ) 는 곧 `신가'의 관할이요 , 동 · 남 · 서 · 북 네 부는 중부에 딸려 각각 `라살'이란 이름의 높은 관리를 두었는데 , 이것을 이두자로 `누살'이라 쓰고 , 한문으로 `도사 ( 道使 ) '라 썼다 . 도사는 `라살' 곧 누살 ( 누薩 ) 이니 도사의 도 ( 道 ) 는 `라'의 의역이요 , 사 ( 使 ) 는 음역인 데 , 신당서에 , “큰 성에는 누살을 두니 당 ( 唐 ) 의 도독 ( 都督 ) 과 같고 , 그 밖의 성에는 도사를 두니 당의 자사 ( 刺史 ) 와 같다 .”고 하였음은 억지의 판단이다 . `신가'는 정권뿐 아니라 내외 병마 ( 兵馬 ) 를 관장하여 , 권위가 대단해서 대왕과 견줄 만하나 , 대왕은 세습으로 흔들리지 않는 높은 자리에 있고 , `신가'는 3 년마다 대왕과 4 부의 `라살'과 그 밖의 중요한 관원들이 대회의를 열고 적당한 이를 골라 맡겼고 , 공적이 있는 사람은 중임을 허락하였다 . `라살'은 대개 세습이지만 , 왕왕 왕과 `신가'의 명령으로 파면되었다 . 5 부는 다시 각각 5 부로 나누고 부 마다 또 3 상 ( 相 ) · 5 경 ( 卿 ) 을 내고 , 벼슬 이름〔官名〕 위에 부의 이름을 더하여 구별하니 , 이를테면 동부에 속한 `순라'는 `순라의 순라'이고 , `불라'는 `순라의 불라'이며 ,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으며 , 동부의 `신가'는 `순라의 신가'라 일컫고 , 남부의 `신가'는 `불라의 신가'라 일 걷고 , 그 밖의 것도 이와 같았다 .
 
이 밖에 `일치 '라는 것은 도부 ( 圖簿 ) 와 사령 ( 辭令 ) 을 맡아보는데 , 이두자로 `을지 ( 乙支 ) ' 혹은`우태 ( 優台 ) '라 쓰고 , 한문으로 주부 ( 主簿 ) 라 쓰며 , `살치 '란 것은 대왕의 시종이니 이두자로 사자 ( 使者 ) 라 쓰고 , 그 밖의 중외대부 ( 中畏大夫 ) · 과절 ( 過節 ) · 불과절 ( 不過節) 등 은 그 음과 뜻과 맡은 직무를 알 수 없다 . 삼국지 , 후위서 ( 逅魏書 ), 양서 ( 梁書 ), 후주서 ( 後周書 ), 당서 ( 唐書 ) 등에 12 급 ( 級 ) 의 벼슬 이름을 실었으나 , 조선어를 모르는 지나의 역사가들이 그 전해들은 것을 번역한 것이므로 , 삼국지에 주부 이외에 또 우태를 실은 것은 주부가 곧 우태의 의역임을 모른 때문이고 , 신당서에 누사 ( 騙奢 ) 이외에 또 누살 ( 누薩 ) 을 실은 것은 누사가 곧 누살의 와전임 을 모른 때문이 다 . 통전( 通典 ) 에 고추가 ( 古鄒加 ) 를 빈객 ( 賓客 ) 맡은 자라고 한 것은 다시 고구려의 종친대관 ( 宗親大官 ) 인 고추가가 외교관 된 것을 보고 마침내 고추가를 외교관 벼슬로 잘못 안 것이요 , 구당서 ( 舊唐書 ) 에 , “조의두 대형 ( 조衣頭大兄 ) 이 3 년만큼씩 바뀐다 .”라고 하였음은 `선배'의 수석 을 대신의 수석으로 잘못 안 것이다 .
 
==제 3 장 太祖 · 次大 두 대왕의 漢族 驅逐 ( 한족 구축 )과 옛 땅 회복 ==
 
1.漢의 국력과 東侵
 
모본왕 ( 幕本王 ) 이 한때 요동을 회복하였음은 이미 제 1 장에서 말하였거니와 , 모본왕이 살해된 뒤에 태조왕이 7 살에 즉위하여 국내의 인심이 의아해 하므로 요서에 10 성을 쌓았으나 , 이때에 한 ( 漢 ) 의 부강이 절정에 이르러 지나 유사 이래의 일이라 할 수 있게 되었다 . 맹장 반초 ( 班超 ) 가 서역도호 ( 西域都護 ) 가 되어 , 지금 서아시아의 거사 ( 車師 ) · 비선 ( 鄙善 ) 등의 나라를 토멸하고 , 지중해 ( 地中海 ) 에 다다라 대진 ( 大秦 ), 지금의 이태리 ( 伊太利 : 이탈리아 ) 와 소식을 통해서 피부가 희고 몸이 큰 인종과 양피지에 쓰는 해행문자 ( 蟹行文字 : 게가 기어가 듯 옆으로 써나가는 서양글자 ) 의 이야기가 후한서에 올랐고 , 두헌 ( 竇憲 ) 이 5 천여 리 원정의 군사를 일으켜 , 지금 외몽고 등지에 나아가 북 흉노를 크게 격파하여 북흉노가 흑해 ( 黑海 ) 부근으로 들어가서 동 ( 東 ) 고트 족 ( 族 ) 을 압박하여 , 서양사상 ( 西洋史上 ) 에 민족 대이동의 시기를 이루고 이로부터 2 백여 년의 흉노대왕 `아틸라'가 유럽 전체를 뒤흔드는 원인을 이루었다 . 한이 이만한 국력을 가진 때였으니 , 어찌 요동을 고구려의 예사 땅이라 하여 영구히 내어놓으랴 ? 어찌 고구려나 선비에게 영구히 2 억 7 천만의 굴욕적 세폐 ( 歲幣 ) 를 바치고 말랴 ? 이에 세폐를 정지하고 경기 ( 耿夔 ) 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6 현을 다시 빼앗고 , 경기로 요동태수를 삼아 동쪽 침략할 기회를 기다렸다.
 
2.王子 遂成 ( 수성 : 차대왕) 의 遼東 恢復( 회복 )
 
후한서에는 당시 한을 침략한 중심 인물을 잘못 알았으나 , 실은 태조왕은 당시 고구려에 군림한 제왕일 뿐이고 , 전쟁에 대하여는 거의 차대왕인 왕자 수성 ( 途成 ) 이 도맡았었다 . 전쟁이 처음에는 한이 주동자가 되어 , 요동을 침략하여 빼앗는 동시에 고구려를 침노하매 , 고구려는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 ( 被動的 ) 지위에 있었고 , 그 다음에는 고구려가 주동자가 되어 , 요동을 회복하는 동시에 나아가 한의 변경을 잠식하매 , 한이 이에 반항하는 피동적 지위에 있었는데 , 요동 회복의 전쟁은 기원 lO5 년에 비롯하여 121 년에 마치니 , 전후 17 년이었다 . 이 전쟁의 초년 , 기원 105 년은 왕자 수성의 나이가 34 살이었는데 , “고구려가 비록 땅의 넓이와 인구의 수는 한에 미치지 못하나 , 다만 고구려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이므로 웅거하여 지키기에 편리하여 적은 군사로도 한의 많은 군사를 방어하기에 넉넉하며 , 한은 평원광야 ( 平原廣野 ) 의 나라이므로 침략하기가 용이하여 , 고구려가 비록 한꺼번에 한을 격파하기는 어려우나 자주 틈을 타서 그 변경을 시끄럽게 하여 , 피폐하게 한 뒤에 이를 격멸해야 할 것이다 .” 하고 드디어 장기의 소란작전을 한에 대한 전쟁의 방략으로 정하고 , 정예한 군사로 요동에 들어가 신창 ( 新昌 ) · 후성 ( 候城 ) 등 여섯 현 ( 縣 ) 을 쳐서 수비병을 격파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 그 뒤에 예와 선비를 꾀어서 해마다 한의 우북평 · 어양 · 상곡 등지를 잇달아 침략하여 , 한은 17 년 동안 인축 ( 人畜 ) 과 재물의 소모가 대단하였다 .
 
기원 121 년 정월에 한의 안제 ( 安帝 ) 는 고구려의 침입을 걱정하여 , 유주자사 ( 幽州 刺史 ) 풍환 (馮煥 ), 현도군수 ( 玄도郡守 ) 요광 ( 姚光 ), 요 동태수 채풍 ( 蔡諷 ) 에게 명하여 유주 ( 幽州 ) 소속의 병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라 하였다 . 이에 수성이 태조왕의 명령을 받아 , `신치' 총사령이 되어 , 2 천 명으로 험한 곳에 웅거하여 , 풍환 등을 막게 하고 3 천 명으로 사잇길을 좇아 요동 · 현도의 각 고을을 불 질러서 풍환 등의 후방 응원을 끊게 하여 드디어 그들을 크게 격파하고 , 같은 해 4 월에 수성이 다시 선비의 군사 8 천 명으로 요동의 요대현 ( 遙隊縣 ) 을 치는데 , 고구려의 날랜 군사를 신창 ( 新昌 ) 에 잠복시켰다가 요동태수 채풍의 구원병을 습격하여 , 채풍 이하 장수 1 백여 명을 베어 죽이고 수없이 많은 군사를 살상하거나 또는 사로잡아 드디어 요동군을 점령 하고 , 그 해 l2 월에 또 백제와 예의 기병 1 만을 내어 현도 · 낙랑 두 군을 점령하여 , 이에 위우거가 한에게 잃었던 옛 땅 ---조선의 옛 오열홀 ( 烏 列忽 ) 의 전부를 완전히 회복하니 , 한이 여러 해의 전쟁에 국력이 피폐 한데다가 또 이처럼 크게 패하니 , 다시 싸울 힘이 없어서 드디어 요동 을 내어주고 다시 세폐 ( 歲幣 ) 를 회복하는 조건으로 고구려에 화의를 요청하였다 . 그리고 포로는 한 사람에 대해 겸 ( 겸 : 합사로 찬 명주 ) 40 필 , 어린아이는 20 필로 속환 ( 贖還 ) 하였다 .
 
요동 · 낙랑 등의 회복이 태조왕 본기나 후한서에 보이지 아니하였으나 , 당 ( 唐 ) 의 가탐전 ( 賈耽傳 ) 에 가탐의 , “요동과 낙랑이 한의 건안 ( 建安 ) 때에 함락되었다 ( 遙東樂浪 陷於漢 建安之際 ). ”고 한 말을 실었는데 , 가탐은 당나라 때의 유일한 사이 ( 四夷 ) 의 고사 ( 故事 ) 연구가이니 , 그 말이 반드시 출처가 있을 것이나 , 다만 건안은 기원 l96 년 한 나라 헌제 ( 獻帝 ) 의 원년이니까 , 고구려가 중간에 쇠미한 때이므로 , 건안은 곧 건광 ( 建光 ) 의 잘못이요 , 건광은 곧 기원 121 년 한나라 안제 ( 安帝 ) 의 연호다 . 왕자 수성이 채풍을 죽이고 한의 군사를 격파한 때이니 , 이때에 고구려가 요동군 안에 가설한 현도 · 낙랑 등의 군을 회복하였음이 의심없다 .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자 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 리에 환도성 ( 丸都城 ) 을 쌓아 서방 경영의 본거지로 삼고 , 국내성과 졸본성과 아울러 삼경 ( 三京 ) 이라 일컬었다 .
 
환도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후세 사람의 논쟁이 분분하여 혹은 환인현 ( 桓仁縣 ) 부근---지금의 혼강 ( 渾江 ) 상류인 안고성 ( 安古城 ) 이라고도 하고 , 혹은 집안현 ( 輯安縣 ) 홍석 정자산 ( 紅石頂子山 ) 위라고도하지마는 , 앞의 것은 산상왕 ( 山上王 ) 이 옮겨가 설치한 제 2 의 환도성이요 , 나중 것은 동천왕 ( 東川王 ) 이 옮겨가 설치한 제 3 의 환도성이다 . 이것은 제 6 편에서 다시 서술하려니와 , 태조왕의 환도성은 곧 첫 번째 옮겨 쌓은 제 1 의 환도성이니 , 삼국사기 지리지 ( 地理志 ) 에 , “안시성은 혹 환도성이라고도 한다 .”고 하였고 , 삼국유사에는 , “안시성은 일명 안촌흘 ( 安寸 忽 ) 이라고 한다 .”고 하였는데 , 환 ( 丸 ) 은 우리말로 `알'이 라고 하니 , 환도 ( 丸都 ) 나 안시 ( 安市 ) 나 안촌 ( 安寸) 은 다 `아리'로 읽 을 것이므로 , 다같이 한 곳---지금의 개평현 동북쪽 70 리의 옛 자리 임이 분명한데 , 후세 사람들이 앞 뒤 세 환도성을 옳게 구별하지 못하고 매양 환도성을 한 곳에서만 찾으므로 , 아무리 환도성의 고증에 노력하여도 환도성의 위치는 여전히 애매하였던 것이다 .
 
==제4장 次大王의 왕위 빼앗음 ==
 
1.太祖王의 가정불화
 
왕자 수성이 이미 요동을 회복하고 한나라의 세폐 ( 歲幣 ) 를 받으니 태조왕은 그 공을 상주어 `신가'에 임명하고 군국 ( 軍國 ) 대사를 죄다맡겼다 . 이에 위엄과 권세가 한봄에 모이고 명성과 인망이 천하에 떨치니 , 수성이 만일 이 명성과 인망을 이용하여 나아가 요서를 쳤으면 삼조선의 서북 옛 땅을 전부 회복하기가 쉬웠겠지마는 , 수성은 가정에 대한 불평이 공명 ( 功名 ) 에 대한 열심을 감쇄하여 , 요동을 회복한 이튿날 한의 화의 요청을 허락 ( 앞 장에 보임 ) 하고 귀국하였다 . 수성의 가정에 대한 불화란 무엇인가 ? 수성은 태조왕의 서자요 , 막근 · 막덕 형제가 태조왕의 적자임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막문은 고구려 왕실의 가법 ( 家法 ) 에 의하여 왕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고 , 수성은 그 빛나는 무공에 의하여 또한 태자가 되기를 희망하게 되었다 . 그래서 수성은 요동의 싸움을 마치자 급히 돌아와 원정할 생각을 끊고 밖으로는 정치에 힘쓰며 , 어진 신하 목도루 ( 穆度婁 ) · 고복장 ( 高福章 ) 을 기용하여 `팔치'와 `발치'를 삼아서 인심을 거두고 , 안으로는 사사로운 무리를 길러 태자의 자리 얻기를 도모하였는데 , `불라〔沸流那〕 '의 `일치 ' 미유 ( 彌儒 ) 와 , `환라〔桓那 〕 '의 `일치 ' 어지류 ( 어支留 ) 와 `불라'의 조의 ( 조衣 : 당시의 선배 수령 ) 가 수성의 뜻을 알고 이에 。 아부하여 태자의 자리 빼앗기를 몰래 모의하였다 .
그런데 태조왕은 수성으로 태자를 삼자니 가법 ( 家法 ) 에 걸리고 , 막근으로 태자를 삼자니 수성에게 걸려서 오랫동안 태자를 세우지 못하였다 . 수성이 정치를 오로지 한지 10 여 년에 태자의 자리를 얻지 못하자 원망하는 기색이 이따금 얼굴에 보이고 , 모의하는 흔적이 때때로 곁에 드러나니 막근은 태자의 지위를 빼앗길 뿐 아니라 수성에게 죽을까 두려웠으나 , 병권도 없고 또 위염과 명망이 수성에게 미치지 못하므로 그 대항할 방책은 오직 태조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있음을 깨달았다 . 이때에 고구려의 `신수두'에 신단 ( 神檀 ) 의 무사 ( 巫師 ) 는 비록 부여처럼 정권을 가지지는 못 하였으나 , 복술 ( 卜術 ) 로써 남의 길흉 화복을 예언한다 일컬어서 일반의 신앙을 받아 귀천의 계급을 불문하고 모든 의심나고 어려운 일을 이 무사에게 결정을 청하는 때였으므로 , 막근은 무사에게 뇌물을 주고 도움을 빌었다 . 기원 142 년에 환도성에 지진이 일어나고 , 또 태조 왕은 꿈에 표범이 범의 꼬리를 물어 끊는 것을 보고 , 마음이 좋지 못하여 , 무사를 불러 해몽해보라고 하니 , 무사는 수성을 참소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 “범은 온강 짐승의 어른이요 , 표범은 범의 씨요 , 범의 꼬리는 범의 뒤니 아마 대왕의 작은 씨가 대왕의 뒤 ( 후예란 말 ) 를 끊으려는 자가 있어 꿈이 그러한가 합니다·”고 하여 , 넌지시 서자 수성이 적자 막근을 해치리라는 뜻을 보였다 . 그러나 태조왕이 수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 갑자기 무사의 말에 기울어지랴 다시 `불치' 고복장을 불러 물으니 , 고복장은 수성의 무리는 아니지마는 아직 수성의 음모를 모르고 있었으므로 , “선을 행하면 복이 내리고 불선을 행하면 화가 이릅니다 . 대왕께서 나라를 집안같이 걱정하시고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하시면 비록 재난과 변괴와 악몽이 있을지라도 무슨 화가되겠습니까 ? ” 하고 무사의 말을 반대하여 태조왕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
 
2. 遂成(수성)의 음모와 太祖王의 禪位(선위)
 
수성이 40 년 동안이나 정권을 잡아 위염과 복을 오로지 하여 , 매양 마근을 죽여서 왕위 상속의 권한을 빼앗으려고 했지마는 , 다만 태조 왕이 이미 늙었으므로 그 돌아감을 기다려서 일을 행하려고 하였는 데 , 태조왕은 두 사람의 감정을 조화시켜서 자기가 죽은 뒤에도 아무 런 변란이 없도록 만든 뒤에 태자를 봉하려 하여 긴 세월을 그냥 지내왔다 .
 
기원 146 년은 태조왕이 왕위에 있은 지 94 년이요 , 나이 100 살 되는 경사스러운 해인데 , 수성도 이때에 나이 76 살이라 , 백살 노인인 태조왕의 건강함을 보고 혹 자기가 태조왕보다 먼저 죽어 막근에게 왕위가 돌아가지나 않을까 하여 , 그 해 7 월에 왜산 ( 倭山 : 연혁 미상 ) 에서 사냥하다가 지는 해를 돌아보며 탄식하니 , 좌우가 그 뜻을 알고 모두 힘을 다하여 왕자의 뒤를 따라 행동할 것을 맹세했는데 , 그 중 한 사람 이 홀로 , “대왕께서 성명 ( 聖明 ) 하시어 백성이 공경하여 받드는데 , 왕자가 좌우의 소인들을 데리고 성명하신 대왕을 폐위하려고 하는 건 한 가닥 실로 만 근의 무게를 끌려 함과 같을 뿐입니다 . 만일 왕자께서 생각을 고치셔서 효도로써 대왕을 섬기시면 , 대왕께서 반드시 왕자의 선함을 아시어 양위하실 마음이 였으시겠지만 , 그렇지 아니하면 큰 화가 있을 것입니다 .”고 하여 반대하였다 . 수성이 그의 말을 못마땅해 하니 , 좌우가 수성을 위해 그를 살해하고 , 음모가 더욱 급히 진행되 었다 . 고복장이 눈치채고서 태조왕에게 들어가 고하고 수성을 죽이기를 청하였다 . 태조왕은 신하로서의 부귀로는 수성의 마음을 달래지 못할 줄을 깨달았으나 , 차마 죽이지 못하여 고복장의 청을 거절하고 ,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별궁 ( 別宮 ) 으로 물러가고 , 수성은 자리에 올라 차대왕 ( 次大王 ) 이라 하였다 .
 
고구려 본기에 , “태조왕 80년에 좌보패자 ( 左輔沛者 ) 목도루 ( 穆度婁 ) 가 , 수성이 딴 뜻이 있음을 알고 , 병을 일컫고 벼슬하지 않았다 ( 左輔沛者 知遂成有異志 稱病不仕). ”고 기록되었고 , 차대왕 2 년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 ( 左輔穆度婁稱病退老 ). ”고 기록되었으니 , 이에 이미 15 년 전에 병을 일컫고 벼슬하지 아니한 목도루가 어찌 15 년 후에 차대왕 2 년에 또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났다고 할 수 있으랴 ?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때에 여러 가지 고기 ( 古記 ) 에 대하여 아무런 선택 없이 마구 수록하였음이 이같이 심하였다 . 하물며 좌보 ( 左輔 ) 나 패자 ( 沛者 ) 가 다 `팔치'의 번역인데 , 좌보패자라는 겹말의 명사를 글에 올렸으니 , 어찌 가소로운 일이 아니랴 ? 또 태조왕 본기 에 , “ 94 년 8 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 ( 西安平 ) 을 습격하여 대방 ( 帶方 ) 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 ( 九十四年 八月 王遺將 襲遼東西安平 殺帶方令 량得樂浪太守妻子 ). ”라 하였는데 , 이는 후한서에 , “고구려왕 백고 ( 伯固 ) 가---질환 ( 質桓 ) 의 어간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빼앗았다·( 高句麗王伯固 質桓之間 復犯遼東西安平 殺帶方令 량得浪太守妻子 ). ”고 한 글을 그대로 초록한 것이다 .
 
질환의 어간이란 질제 ( 質帝 ) 와 환제 ( 桓帝 ) 의 사이를 가리킨 것이니 , 그것은 태조왕 94 년이므로 , 김부식이 이 해에다 기록해 넣은 것이고 , 백고 ( 伯 固 ) 는 신대왕 ( 新大王 ) 의 이름이니 , 이때는 신대왕 원년 전 20 년이므 로 , 김부식이 `고구려왕 백고 ( 高句麗王伯固 ) '의 여섯 글자를 `견장 ( 遺將 ) '의 두 글자로 고친 것이다 . 그러나 이때 태조왕의 가정에 차대왕 과 막근의 다툼이 있어 외부의 일을 물을 사이가 없는 때였으므로 , 후한서의 질환의 어간은 환령 ( 桓靈 ) 의 어간---환제 ( 桓帝 ) 와 영제 ( 靈帝 ) 의 사이 , 신대왕 때로 개정함이 옳은데 , 김부식이 이를 태조왕 94년의 일로 적어넣음이 이미 망령된 조작임에도 불구하고 , 게다가 친절하게도 달까지 박아 ` 8 월'이라고 하였음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국내외의 기록을 뽑아 넣을 때에 모호한 것은 아무 근거 없이 연윌 ( 年月 ) 을 스스로 정하고 자구를 가감한 것이 많았던것이다 .
 
==제 5 장 次大王의 피살과 明臨答夫(명림답부)의 專權(전권) ==
 
1. 次大王의 20 년 專制(전제)
 
차대왕이 양위를 받아 20 년 동안 고구려에 군림하여 전제를 하다가 연나 ( 緣那 ) 의 조의 ( 조衣 ) 명림답부 ( 明臨答夫 ) 에게 살해당하였다 . 그러나 차대왕의 본기 ( 本紀 ) 가 간략하고 허술하여 , 그 전제 ( 專制 ) 의 정도와 살해당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기 어렵다 . 이에 본기의 전문을 여기에 번역해 싣고 나서 논평하고자 한다 .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 ( 遂成 ) 이니 , 태조왕의 동모제 ( 同母弟 : 동모 제 3 字는 서자로 고칠 것임 ) 로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나 , 인자 ( 仁慈 ) 가 적었다 . 태조왕의 양위 ( 讓位 ) 로 왕위에 오르니 , 나이 76 살이었다 . 2 년 봄 정월에 관나 ( 貫那 : 灌那 ) 의 패자 ( 沛者 ) 미유 ( 彌儒 ) 로 우보 ( 右輔 ) 를 삼았다 . 3 월에는 우보 고복장 ( 高福章 ) 을 죽였는데 , 그가 죽을 때에 , “원통하고 원통하다 . 내가 당시에 선조 ( 先朝 ) 의 근신이 되어 어찌 난을 일으킬 사람을 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 선군께서 나의 말을 듣지 않으시어 이에 이르렀거니와 , 지금 임금이 왕위에 올라 마땅히 정 ( 政 ) 과 교 ( 敎 ) 를 새로이 하여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 , 이제 불의로 충신을 죽이니 내가 무도한 세상에서 사느니보다 죽는 것이 낫다 .” 하고 형을 받으니 , 모두들 이 소식을 듣고 분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가을 7 월에 좌보 목도루가 병을 일컫고 늙어서 물러가니 , 환나 (桓那 : 椽那로 고칠 것임 ) 의 우태 어지류로 좌보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대주부 ( 大主簿 ) 를 삼았다 . 겨울 10 월에 비류나 ( 沸流那 ) 의 조의 ( 조衣 ) 양신 ( 陽神 ) 으로 중외대부 ( 中畏大夫) 를 삼아서 작위를 더하여 우태를 삼았다 . 이상은 다 왕의 옛날 친구였다 . 11 월에 지진이 있었다 .
 
3 년 여 름 4 월에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왕의 원자 ( 元子 ) 막근을 죽이니 , 그 아우 막덕이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스스로 목매어 죽 었다 . 가을 7 월에 왕이 평유원 ( 平偏原 ) 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 흰 여우가 따라오며 , 울므로 왕이 이를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 왕이 무사 ( 巫師 ) 에게 물으니 , “여우는 요망한 짐승이니 , 길한 상서가 아닌데 게다가 흰 여우니 더욱괴이한 변입니다 . 천제 ( 天帝 ) 께서 인간의 임금에게 맞대해서 순수히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요괴를 보여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반성하게 함이니 대왕께서 만일 덕을 닦으시면 화를 돌려 복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고 하였다 . 왕이 , “흉한 것이면 흉할 것이고 길한 것이면 길할 것인데 , 이제 이미 흉하다고 하고 또 길하다고 하니 어찌 속이는 말이 아니냐 ? ” 하고 드디어 무사를 죽였다 .
 
4 년 여름 4 월 정묘 (丁卯 ) 그믐날 일식 ( 日食 ) 이 있었다 . 5 월에 다섯 별이 동쪽에 모였는데 , 일관 ( 日官 ) 은 왕의 노함을 두려워하여 거짓말로 , “이는 임금의 덕이요 나라의 복입니다 .”고 하니 , 왕이 크게 기뻐 하였다 . 겨울 12 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 .
 
8 년 여름 6 월에 서리가 내려 쌓였다 . 겨울 12 월에 천둥하고 지진이있었다 . 그음날 객성 ( 客星 : 彗星 ) 이 달을 범하였다 .
 
13 년 봄 2 월에 꼬리별 〔패星 ) 이 북두 ( 北斗 ) 를 범하였고 5 월 갑술 ( 甲戌 ) 그믐날에는 일식이 있었다 .
 
20 년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 3 월에 태조왕이 별궁에서 돌아가니 , 나이 119 살이었다 . 겨울 l0 월에 연나의 조의 명림답부가 왕이 백생들 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이고 , 그 호 ( 號 ) 를 차대왕이 라 하였다 . ”
 
이상이 차대왕 본기의 전부다 . 맨 끝에 , “명림답부가 백성들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을 하므로 왕을 죽였다 .”고 했으나 , 그 이전의 기록을 상고해보면 , 차대왕이 백성에게 차마 하지 못할 정사를 한 일이 하나 도 없다 . 고복장 ( 高福章 ) 은 차대왕의 음모를 고발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 목도루는 차대왕과 막근의 중간에서 모호한 태도를 취한 사람이므로 내쫓은 것이고 , 무사는 태조왕의 꿈을 야릇하게 풀어 차대왕을 해치려 한 사람이므로 죽인 것이고 , 막곤 형제는 차대왕과 맞선 적이므로 죽인 것이니 , 이것을 아무리 참혹하고 불인 ( 不仁 ) 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사로운 원한의 보복이고 , 인민에게는 이해 관계가 없는 일일 뿐더러 , 또 이것이 모두 차대왕 2 년 내지 3 년까지의 일이니 , 18년 후인 차대왕 20 년에 반란을 일으킨 , 명림답부의 유일한 구실이 될 수 없으며 , 그 이외의 기사는 일식 · 지진 · 성변 ( 星變 ) 등뿐이니 , 이 같은 천문 지리의 변화는 차대왕의 정치의 잘잘못에 관계가 없는 일이라 이로써 인민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한 증거로 삼을 수 없다 .
 
그러면 차대왕이 패망하고 명림답부가 성공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 차대왕이 패한 뒤에 좌보 어지류가 여러 중신과 더불어 차대왕의 아우 백고 신대왕에게 왕위 계승을 권진 ( 勸進 ) 하였는데 , 어지류는 처음부터 차대왕을 도와 왕위 찬탈을 계획한 괴수요 , 그 여러 중신이 란 대개 미유 · 양신 등일 것이니 , 이로 미루어보면 차대왕의 패망은 곧 자기 당의 이반 ( 離反 ) 에 의한 것일 것이다 . 차대왕의 즉위 이전 10여 년 동안에 차대왕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왕위 찬탈을 계획한 그 무리들이 차대왕과 20 년 동안 부귀를 누리다가 도리어 왕을 배반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 그 원인은 찾기 쉬운 것이다 . 고구려는 원래 일인전제 ( 一入專制 ) 의 나라가 아니라 벌족공치 ( 閔族共治 ) 의 나라이니 , 국가의 기밀 대사는 왕이 전결 ( 專決 ) 하지 못하고 , 왕과 5 부의 대관들이 대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 형별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를 열어 결정하고 , 형벌로 사람을 죽이는 일 같은 것도 회의의 결정으로 행하였다 . 그런데 차대왕은 부왕을 가두고 당시 신앙의 중심인 무사를 죽인 사람으로서 , 비록 어지류 등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왕위에 오른 뒤에는 이 무리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군권 ( 君權 ) 이 오직 제일임을 주장하여 모든 일을 자기 독단으로 행하므로 , 연나의 `선배' 우두머리 명림답부가 그 본부 ( 本部 ) 의 `선배'로서 밖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어지류 등이 내응 ( 內應 ) 하여 , 태조왕이 돌아간 뒤를 기회하여 차대왕을 죽이고 벌족 공치의 나라를 회복한 것이다 .
 
어떤 이는 명림답부를 조선 사상 처음으로 혁명을 일으킨 혁명가라고 하지마는 , 혁명은 반드시 역사상 진화의 의의를 가진 변동을 일컫는 것이니 , 벌족 공치를 회복한 반란이 어찌 혁명이 되랴 ? 명림답부는 한때 정권 쟁탈의 효웅 ( 梟雄 ) 이라 함은 옳지마는 혁명가라 함은 옳 지 않다 .
 
2. 明臨答夫의 專權과 외교 정책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죽이고 차대왕 당년에 해를 피하여 산중에 숨어 있던 백고 ( 伯固 ) 를 세워 신대왕 ( 新大王 ) 이라 하고 , 국내에 사면령 ( 敬免令 ) 을 내려 , 차대왕의 태자 추안 ( 鄒安 ) 까지도 용서하여 양국군 ( 讓國君 ) 으로 봉하고 , 차대왕의 준엄한 형법을 폐지하니 ,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 이에 명림답부가 `신가'가 되어 ,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맡아 처리하고 , `팔치'와 `발치'를 겸하고 , 예량 (濊梁 ) 여러 맥 ( 貊 ) 의 부장 ( 部長 ) 을 다 차지하니 , 그 위엄과 권세가 태조 왕 때의 왕자 수성보다 더하였다 . 본기에는 , “명림답부가 국상 ( 國相 )으로 패자 ( 沛者 ) 를 겸하였다 . ”고 하였고 , 또 “좌우보 ( 左右輔 ) 를 고쳐 국상으로 한 것도 이때에 비롯된 것이다 .” 하였는데 , 이는 국상이 곧 `신가'인지를 모르고 , 패자가 `팔치' 곧 좌보인지를 모르고서 함부로내린 주해이다 .
 
태조왕 때에 한이 요동을 지금의 난주 ( 난州 ) 에 옮겨다 설치하였음은 이미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 기원 169 년에 한이 요동을 회복하려고 경림 ( 耿臨 ) 으로 현도태수를 삼아서 대거하여 침입하였다 . 명림답부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신대왕 앞에서 회의를 열고 싸우고 수비할 계책을 논의 하였는데 모두들 나가 싸우기 를 주장했으나 , 명림답부는 , “우리는 군사는 적으나 험한 땅을 가졌고 한은 군사는 많으나 군량을 대기가 힘드니 , 우리가 우선 수비를 하여 한의 병력을 지치게 한 뒤에 나가 싸우면 , 백번 싸워 백번 이길 것입니다 .”고 하여 먼저 지키고 나중에 싸우기로 계책을 정하고 각 고을에 명하여 인민과 양식과 가축들을 거두어 성이나 산으로 들어가 굳게 지키게 하였다 . 한의 군사가 침입한지 여러 달을 노략질했으나 , 얻는 것이 없고 싸우려고 해도 응하지 아니하므로 , 양식이 떨어져서 배고프고 피로하여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까지 추격 하여 한의 군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 명림답부는 한의 침입군을 격파하자 국토를 개척하려고 먼저 선비의 이름난 왕인 단석괴 ( 檀石塊 ) 를 꾀어서 한의 유주 ( 幽州 ) · 병주 (幷州 ) 두 주 ---지금의 직예 · 산서 두 성을 침략하게 하고 , 그 뒤를 이어서 고구려의 군사로 한을 치려고 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죽으니 나이 113 살이었다 . 신대왕이 친히 가서 통곡을 하고 왕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엔 신대왕 4 년 ( 기원 l68 년 ) 에 , “한의 현도태수 경림 ( 耿臨 ) 이 와 침범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으므로 , 왕이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하였다 .”고 하고 , 신대왕 5 년 ( 기원 l69 년 ) 에 , “왕 이 대가 ( 大加 ) 우거와 주부 ( 主簿 ) 연인 ( 然人) 등을 보내서 요동태수 공손도 ( 公孫度 ) 를 도와 부산 ( 富山 ) 의 적을 치게 하였다 . ”고 하고 , 8 년 ( 기원 172 년 ) 에 , “한이 대병 ( 大兵 ) 으로 우리를 공격해왔으므로---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까지 추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려 한의 군사가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고 하였는데 , 앞의 두 기록은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 뒤의 한 기록은 고기 ( 古記 ) 에서 뽑아 쓴 것이다 . 그러나 조선 사략 ( 朝鮮史略 ) 에는 , “신대왕 5 년에 한의 현도태수 경림이 대병으로 침략해오므로 ,명림답부가 좌원 ( 坐原 ) 에서 이를 크게 격파하여 ---.”라고 하여 그 연조가 후한서의 , “영제 ( 靈帝 ) 건녕 ( 建寧 ) 2 년 ( 기원 169 년 ) 에 현도태수 경림---백고 ( 伯固 ) 가 항복하였다 ( 靈帝 建寧二年玄도太守耿臨---伯固降 ). ”고 한 것과 부합하므로 경림의 침략군이 명림답부에게 패하였음이 분명한데 , 김부식이 이것을 그릇 두 번의 사실로 나누어 , 하나는 신대왕 4 년의 또 하나는 신대왕 8 년의 조항에 기록한 것이고 , 공손도는 삼국지에 의하면 , 한의 헌제 ( 獻帝 ) 영평 ( 永平 ) 원년에 비로소 요동태수가 되었는데 , 영평 원년은 기원 l90 년이요 , 신대왕 5 년에서 20 년 후이니 , 신대왕이 20 년 후에 요동태수 공손도를 도울 수 없었음이 또한 분명한데 ,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한 김부식이 그대로 신대왕 본기 가운데 잘못 기록한 것이다 . 그러나 패해 달아나 경림을 크게 이겼다고 하고 , 연대도 닿지 않는 공손도를 신대왕의 종주국으로 기록하였으니 , 이런 곳에서 지나사의 거짓이 많음을 보겠거니와 , 동국통감 ( 東國通鑑 ) 에는 현도태수 경림이 침략해왔다가 명림답부에게 패한 것을 신대왕 8 년의 일로 기록하여 또 조선사략과 다르다 . 대개 이조 초기에는 삼한고기 ( 三韓古記 ) 해동고기 ( 海東古記 ) 등 몇 가지가 있어 삼국사기 이외에도 참고할 만한 책이 더러 있었는 데 , 그 고기 ( 古記 ) 들이 각각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
 
==제 6 장 乙巴素(을파소)의 엽적 ==
 
1.王后의 정치 간여와 左可慮(좌가려)의 난
 
기원 179 년에 신대왕 ( 新大王 ) 이 죽고 고국천왕 ( 故國川王 ) 이 즉위하여서는 , 왕후 우씨 ( 于氏 : 椽那于素의 딸 ) 의 뛰어난자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아 , 왕후의 친척 어비류 ( 於卑留 ) 는 `팔치'가 되고 , 좌가려 ( 左可慮 ) 는 `발치'가 되어 정권을 마음대로 하니 그 자제들이 교만하고 난폭하여 남의 아내와 딸을 빼앗아다가 첩 으로 삼고 , 아들과 조카들을 잡아다가 종을 만들며 남의 좋은 밭과 훌륭한 집을 빼앗아 자기네 것으로 만들어서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 . 왕이 이것을 알고 죄주려고 하니까 , 좌가려 등이 마침내 연나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 왕이 기내 ( 畿內 ) 의 군사와 말을 징집하여 이를 쳐 평정하고 , 왕후 친족의 정치 간여를 징계하고 , 4 부 ( 部 ) 대신에게 조서를 내려 , “근자에 벼슬을 총애로써 임명하고 지위가 덕으로써 승진하지 못하여 , 덕이 백성에 행해져서 왕실을 움직였으니 이는 다 내가 밝지 못한 때문이다 . 너희 4 부는 각기 그 관하의 어진 사람을 천거하라 .”고 하였는데 , 4 부가 의논하고 동부의 안류 ( 晏留 ) 를 천거하였다 .
 
2.을파소의 등용
 
고국천왕 ( 故國川王 ) 이 안류를 써서 국정을 맡기려고 하니 안류가 자기의 재능은 큰 임무를 맡을 수 없다고 하고 , 서압록곡 ( 西鴨綠谷 ) 의 처사 ( 處士 ) 을파소 (乙巴素 ) 를 처거하였다 .
 
을파소는 유류왕 때의 대선 을소 (乙素 ) 의 후손인데 , 고금의 치란 ( 治亂 ) 에 밝고 , 민간의 이로움과 폐단을 잘 알고 학식이 넉넉하였으 나 ,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므로 초야에서 밭갈아 살아가고 벼슬할 뜻이 없었는데 , 고국천왕이 말을 낮추고 후한 예로 맞아 스승의 예로써 대접하고 , 중외대부 ( 中畏大夫 ) 를 삼아 `일치 '의 작위를 더하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
 
을파소는 자기가 받은 벼슬과 작위가 오히려 자기의 포부를 펼 수 없으므로 굳이 사양하고 , 다시 다른 어질고 유능한 이를 구하여 높은 지위를 주어 큰 사업을 성취하기를 정하였다 . 왕이 그의 뜻을 알고 을파소로 `신가'를 삼아서 모든 관리의 위에 있어 국정을 처리하게 하였다 . 여러 신하들은 을파소가 초양의 한미 ( 寒微 ) 한 처사로서 하루아 침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시기하여 비난이 자자하니 , 왕이 조서를 내려 “만일 `신가'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일족을 멸할 것입니다 .” 하고 더욱 을파소를 신임하였다 . 을파소는 자기를 알아주고 크게 대우해주는 데 감격하여 지성으로 국정을 처리하였다 . 상과 벌을 신중히 하고 , 정령 ( 政令 ) 을 밝혀 나라 안이 크게 다스려져서 , 고구려 9 백 년 동안 첫째가는 어진 세상으로 일컬어졌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 “고국천왕 ( 혹은 國襄이라 함 ) 의 이름은 남무 ( 男武 : 혹은 伊夷謨 ) 로 ,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 백고가 죽자 나라 사람들이 맏아들 발기 ( 拔奇 ) 는 불초하다고 , 함께 이이모를 세워서 왕을 삼았는데 , 한의 헌제 건안 초에 발기는 자기가 형으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소노가 ( 消奴加 ) 와 함께 각각 딸린 민호 ( 民戶 ) 3 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돌아와 비류수 ( 沸流水 ) 상류에서 살았다 ( 故國川王 ( 或云國襄) 諱 男武 ( 或云伊夷謨 )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不得立 興消奴加各將不戶 三萬餘口 지公公孫康 還住沸流水上 ). ”고 하였으나 , 이는 김부식이 삼국지 고구려전의 본문을 그대로 떠다가 옮겨 쓴 것으로 , 발기 ( 拔奇 ) 는 곧 산상왕 ( 山上王 ) 본기 ( 本紀 ) 가운데의 발기 ( 發奇 ) 요 , 이이모 ( 伊夷謨 ) 는 곧 산상왕 연우 ( 延優 ) 이니 , 삼국지의 작자가 발기 ( 發奇 ) · 연우 ( 延優 ) 두 사람을 신대왕의 아들로 잘못 전한 것인데 , 김부식이 경솔하게 믿고 고국 천왕 남무 ( 男武 ) 를 곧 이이모라 하였고 , 남무를 곧 발기 ( 技奇 ) 의 아우라고 하였으니 , 이것이 첫째 잘못이요 , 삼국지 공손도전 ( 公孫度傳 ) 에 의하면 , 공손강의 아버지 공손도가 한의 헌제 초평 원년 ( 기원 190 년 ) 에 요동태수가 되어서 건안 9 년 ( 기원204년 ) 에 죽고 , 공손강이 뒤를 이었는데 , 한의 헌제 초평 원년은 고국천왕 12 년이니 , 고국천왕 즉위 초에는 공손강은 고사하고 그 아버지 공손도도 아직 요동태수를 꿈꾸지 못한 때인데 , 김부식이 이를 고국천왕 즉위 원년의 일로 기록하였으니 ,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앞에서 말한 신대왕 5 년에 , “공손도를 도와 부산 ( 副山 ) 의 적을 쳤다 ( 助---公孫度 討富山賊 ). ”고 한 것과 아울러 보면 , 김부식이 곧 공손도를 어느 때의 사람인 줄을 모른 듯하니 또한 기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