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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기자 조선의 처음 도읍지는 영평부와 광령현 사이의 어디 쯤 이었다가 후에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쫓겨 2천리 땅을 잃었다. 마치 (외세에 쫓겨)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중국의 진(晉) 나라나 송나라와 같이 차츰 동쪽으로 옮기면서 세운 도읍을 모두 평양이라 부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대동강에 있는 평양도 그러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패수의 위치 역시 이와 같아서 고구려 영토가 넓어지거나 줄어든 시기에 따라 패수라는 이름도 이를 따라 자리를 옮겼을 것으로것이어서 마치 중국의 남북조 시대에 남조와 지방북조가 같은 주와 군의 이름을 서로 제각각 겹쳐서 부르던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지금의 평양이 평양이 되었고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 하게 되었으며 평양에서 함경도 사이의 양쪽 지대를 개마대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요양이 평양이었다고 하면 한우력수를 가리켜 패수라고 불렀을 것이고 개평현의 산을 가리켜 개마대산이라 하였을 것이다. 비록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부터 거짓인 지 알 수 없지만 오직 지금의 대동강만 패수였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작게 보는 논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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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儀鳳二年, 以高麗王臧, 高勾麗寶藏王高臧, 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以統之。 由是觀之, 高氏境土之在遼東者, 唐雖得之, 不能有而復歸之高氏, 則平壤本在遼東, 或爲寄名與浿水, 時有前郤耳。 漢樂浪郡治在遼東者, 非今平壤, 乃遼陽之平壤, 及勝國時, 王氏高麗, 遼東及渤海一境, 盡入契丹, 則謹畫慈 鐵兩嶺而守之 並棄先春 鴨綠而不復顧焉 而况以外一步地乎 雖內幷三國, 其境土武力, 遠不及高氏之强大 後世拘泥之士, 戀慕平壤之舊號, 徒憑中國之史傳, 津津隋唐之舊蹟曰 此浿水也, 此平壤也。」 已不勝其逕庭, 此城之爲安市爲鳳凰, 惡足辨哉
 
城周不過三里, 而甎築數十重, 制度雄侈, 四隅正方若置斗 今裁半築, 則其高低雖未可測 門上建樓處, 設雲梯浮空 駕起工役 雖似浩大, 器械便利, 運甓輸土 皆機動輪轉, 或自上汲引, 或自推自行, 不一其法 皆事半功倍之術 莫非足法 而非但行忙, 難以遍觀, 雖終日熟視 非造次可學 良可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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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의봉 2년(667년) 고려왕 장, 즉 고구려 보장왕 고장은 (당나라에 복속하여) 요동주도독이 되어 조선왕으로 봉해져 요동으로 돌려보내 지었다가 다시 안동도호부로안동도호부를 옮겨새로 신성을지은 거느리게성으로 하였다옮겼다. 이를 보면 요동의 고구려 영토는 당이 병합하긴 하였으나 유지하지 못하여 고씨에게 돌려 주었으므로 평양은평양이 본래 요동에 있었고있었다고 혹은하면 패수 역시또한 그러할평양과 것이라함께 하겠지만시대에 따라 이 곳 저 곳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한나라가 낙랑군을 요동에 설치하였다고 하므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요양이 (낙랑군 당시의) 평양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왕씨 고려가 세워질 때 요동과 발해 일대는 거란에 흡수되어 간신히 자비령과 철령을 잇는 선을 국경으로 지킬 수 있었다. 선춘령과 압록강은 모두 빼앗겨 수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이니시대의밖의 기록과 들어맞지는걸음에 않는다대해서야! 비록 삼국을 병합하였다고 하나 그 영토와 무력은 고씨의 강대함에 한 참 미치지 못한다. 후세에 고집불통인 선비들이 평양의 옛 이름을 연모하여 중국의 역사와 전기만 쫓고 수나라와 당나라의 옛 기록만 입맛에 맞다고 여기며 "여기가 평양이요, 여기가 패수요." 한다. 이미 이렇게 큰 차이를 메우지 못하는데 이 봉황성이 그 옛날 안시성이라는 것도 변증이 충분하지 않하다.
 
성 주위는 불과 3 리이지만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아 모습이 웅장하고 네 귀가 정사각형 모습이어서 마치 (물건의 부피를 재는) 말 통과 같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 성을 반 밖에 쌓지 않아 다 쌓으면 높이가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었다. 문 위로 누각을 세우는 곳에 구름다리를 만드려고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구인) 공가를 세워 작업하고 있었다. 비록 거추장스러워 보여도 기계를 써야 편리하게 벽돌이며 흙을 올린다. 모두 바퀴를 돌려 움직이는 데 어떤 것은 스스로 올라가며 물을 긷고 어떤 것은 스스로 밀고 스스로 가니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모든 일이 절반의 힘으로 두 배의 효율을 보이는 기술로 이루어져 부족한 것이 없다. 비록 가는 길이 바빠서 편안히 살펴보기가 어려웠지만 하루 종일 자세히 관찰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만드는 지 배울 수 없었을 것이라 참으로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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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遣歸(견귀): 전에 있던 곳으로 돌려보냄.
*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 [[:w:안동도호부|안동도호부]]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668년 평양에 설치한 군정 기관이다. 신라의 저항을 받아 요동 지방으로 이동한 뒤 2번이나 다시 옮기다가 758년 무렵 폐지되었다.
* 契丹(계단): [[:w:거란|거란]]을 말한다.
* 慈鐵兩嶺(자철양령): [[:w:자비령|자비령]]과 [[:w:철령|철령]]을 잇는 선. 고려의 국경이었다.
* 先春鴨綠(선춘압록): 선춘령과 압록강. 선춘령은 [[:w:윤관|윤관]]이 9성을 세운 곳이다.
* 拘泥(구니): 고집불통.
* 戀慕(연모): 그리워하다.
* 津津(진진): 진진하다. 입에 착 달라 붙을 만큼 좋다.
* 逕庭(경정): 매우 큰 차이.
* 空駕(공가):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와 같은 도구.
* 器械(기계): 작업을 하기 위해 설치한 큰 도구.
* 汲引(급인): 물을 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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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周不過三里 而甎築數十重 制度雄侈 四隅正方若置斗然 今裁半築 則其高低雖未可測 門上建樓處 設雲梯浮空 駕起工役 雖似浩大 器械便利 運甓輸土 皆機動輪轉 或自上汲引 或自推自行 不一其法 皆事半功倍之術 莫非足法 而非但行忙 難以遍觀 雖終日熟視 非造次可學 良可歎也
食後, 與卞季涵鄭進士先行 康永泰出門揖送, 頗有惜別之意 且囑歸時當値冬節, 願賷賜一件時憲 余解給一丸淸心
 
過一鋪, 掛一面金書當字牌, 旁書, 「惟軍器不當五字 此典當舖也 有數三美少年, 走出舖中, 遮馬請少刻納凉, 遂相與下馬隨入 其凡百位置, 更勝康家, 庭中有二大盆, 種三五柄蓮子, 養得五色鮒魚 年少手持掌大紗罾, 向小瓮邊, 臽了幾顆紅蟲, 浮沉盆中 蟲細如蟹卵, 皆蠕蠕 少年更以扇敲響那盆郭, 念念招魚, 魚皆出水呷沫
食後 與卞季涵鄭進士先行 康永泰出門揖送 頗有惜別之意 且囑歸時當値冬節 願賷賜一件時憲 余解給一丸淸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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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一鋪 掛一面金書當字牌 旁書‘惟軍器不當’五字 此典當舖也 有數三美少年 走出舖中 遮馬請少刻納凉 遂相與下馬隨入 其凡百位置 更勝康家 庭中有二大盆 種三五柄蓮子 養得五色鮒魚 年少手持掌大紗罾 向小瓮邊 臽了幾顆紅蟲 浮沉盆中 蟲細如蟹卵 皆蠕蠕 少年更以扇敲響那盆郭 念念招魚 魚皆出水呷沫
식사를 마치고 변계함 정진사와 함께 먼저 길을 나섰다. 강영태가 문 밖에 나와 작별하면서 몹시 서운해 하였다. 돌아오는 길이 겨울철이면 부디 시헌력 한 권을 가져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청심환 하나를 선물로 주었다.
 
어느 가게 앞을 지나치는데 앞에 금으로 당(當) 자를 쓴 나무 패를 걸고 그 옆에 "수군기부당"(惟軍器不當, 군사용품은 담보로 잡지 않습니다.) 다섯 자를 적어 두었다. 이곳은 전당포이다. 잘 생긴 소년 몇이 가게에서 나와 말을 붙들고 땀이나 식히고 가시라 하길래 말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의 갖가지 물건들이 강영태의 집 것 보다 더 화려하였고 뜰 가운데 큰 물그릇 두 개를 놓아 하나에는 네댓 뿌리 연꽃을 심었고 하나에는 비단잉어를 길렀다. 소년이 손에 손바닥 만한 실로 만든 그물을 들고 나와 작은 항아리 근처로 가더니 불그스름한 벌레를 떠서 물그릇에 띄웠다. 벌레는 게 알 만큼 작았는데 모두 꿈틀거렸다. 소년이 다시 물그릇 가장자리를 부채로 두드리며 소리를 내자 물고기들이 모여들더니 물거품을 뿜어낸다.
日方午天 火傘下曝 悶塞不可久居 遂行 與鄭進士或先或後 余謂鄭曰 “城制何如” 鄭曰 “甓不如石也” 余曰 “君不知也 我國城制不甎而石 非計也 夫甎一凾出矩則萬甎同樣 更無費力 磨琢之功 一窰燒成 萬甎坐得 更無募人運致之勞 齊匀方正 力省功倍 運之輕而築之易 莫甎若也 今夫石劚之於山 當用匠幾人 輦運之時 當用夫幾人 旣運之後 當用匠幾人 以琢治之 其琢治之功 又當再費幾日 築之之時 安排一石之功 又當再用夫幾人 於是削崖而被之 是土肉而石衣也 外似峻整 內實臲卼 石旣參差不齊 則恒以小石撑其尻跗 崖與城之間 實以碎礫 雜以泥土 一經潦雨 膓虛腹漲 一石踈脫 萬石爭潰 此易見之勢也 且石灰之性 能黏於甎 而不能貼石 余嘗與次修論城制 或曰 ‘甓之堅剛安能當石’ 次修大聲曰 ‘甓之勝於石 豈較一甓一石之謂哉’ 此可爲鐵論 大約石灰不能貼石 則用灰彌多 而彌自皸坼 背石卷起 故石常各自一石 而附土爲固而已 甎得灰縫如魚膘之合木 鵬砂之續金 萬甓凝合 膠成一城 故一甎之堅 誠不如石 而一石之堅 又不及萬甎之膠 此其甓與石之利害便否 所以易辨也” 鄭於馬上傴僂欲墮 葢睡已久矣 余以扇搠其脅大罵曰 “長者爲語 何睡不聽也” 鄭笑曰 “吾已盡聽之 甓不如石 石不如睡也” 余忿欲敺之 相與大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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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時憲(시헌): [[:w:시헌력|시헌력]]은 청나라 시기에 서양의 천문학 기술을 받아들여 고친 역법이다. 이전에 쓰이던 대명력과 가장 큰 차이는 [[:w:요하네스 캐플러|요하네스 캐플러]]의 타원 괘도설을 받아들여 24절기를 나누는 방법을 항기법에서 정기법으로 바꾼 것이다. 그 전까지는 계절과 상관 없이 절기 사이를 똑 같이 셈하였으나 시헌력에서는 [[:w:장축단|장축단]] 개념을 도입하여 근일점이 지나는 겨울철의 절기 간격은 짧게 원일점이 지나는 여름철 절기 간격은 길게 조절 하였다. 이렇게 조절하면서 겨울철에는 윤달이 거의 끼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빌린 돈을 "윤동짓달에 갚는다"는 속담이 생겼다. 시헌력 사용 이후 윤동짓달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안 갚는다는 소리다. 마치 양력 2월 30일에 만나자는 소리와 같다. 조선에서는 [[:w:조선 효종|효종]] 때부터 사용되었다.
* 淸心(청심): 청심환은 중국 송나라 시대부터 널리 알려진 처방약이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중국에서도 청심환이 만들어졌으나 가짜가 많아 조선에서 만든 것을 최고급으로 여겼기 때문에 귀한 선물로 사용되었다.
* 典當舖(전당포): 물건을 담보로 잡아 돈을 빌려 주는 곳.
* 五色鮒魚(오색부어): 비단잉어.
* 蠕蠕(연연): 꿈틀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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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方午天, 火傘下曝, 悶塞不可久居。 遂行, 與鄭進士或先或後, 余謂鄭曰, 「城制何如」, 鄭曰 「甓不如石也。」
 
日方午天 火傘下曝 悶塞不可久居 遂行 與鄭進士或先或後 余謂鄭曰 “城制何如” 鄭曰 “甓不如石也” 余曰, 君不知也 我國城制不甎而石, 非計也 夫甎一凾出矩則萬甎同樣. 更無費力. 磨琢之功, 一窰燒成, 萬甎坐得 更無募人運致之勞, 齊匀方正, 力省功倍, 運之輕而築之易, 莫甎若也 今夫石劚之於山, 當用匠幾人, 輦運之時, 當用夫幾人, 旣運之後, 當用匠幾人, 以琢治之, 其琢治之功, 又當再費幾日 築之之時, 安排一石之功, 又當再用夫幾人, 於是削崖而被之, 是土肉而石衣也 外似峻整, 內實臲卼 石旣參差不齊, 則恒以小石撑其尻跗, 崖與城之間, 實以碎礫, 雜以泥土, 一經潦雨, 膓虛腹漲, 一石踈脫, 萬石爭潰, 此易見之勢也 且石灰之性, 能黏於甎, 而不能貼石, 余嘗與次修論城制 或曰 '甓之堅剛安能當石', 次修大聲曰, '甓之勝於石, 豈較一甓一石之謂哉'。 此可爲鐵論 大約石灰不能貼石, 則用灰彌多, 而彌自皸坼, 背石卷起, 故石常各自一石, 而附土爲固而已, 甎得灰縫如魚膘之合木, 鵬砂之續金, 萬甓凝合, 膠成一城, 故一甎之堅, 誠不如石, 而一石之堅, 又不及萬甎之膠 此其甓與石之利害便否 所以易辨也。」 鄭於馬上傴僂欲墮 葢睡已久矣 余以扇搠其脅大罵曰 “長者爲語 何睡不聽也” 鄭笑曰 “吾已盡聽之 甓不如石 石不如睡也” 余忿欲敺之 相與大笑
 
鄭於馬上傴僂欲墮, 葢睡已久矣。 余以扇搠其脅大罵曰, 「長者爲語, 何睡不聽也。」 鄭笑曰, 「吾已盡聽之 甓不如石 石不如睡也。」 余忿欲敺之, 相與大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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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이 되자 불볕이 내리 쬐어서 더 오래 머무르기가 궁색하였다. 다시 길을 나서 정진사와 서로 앞 서거니 뒤 서거니 가다가 내가 "성 쌓는 제도를 보니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정진사는 "돌로 쌓는 것보다 못하더군요." 하고 대답한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 소리. 우리나라 성은 벽돌이 아니라 돌로 쌓는데 좋은 계책이 아니네. 벽돌은 한 번 찍어 내면 만 장이 모두 같은 모양이라 비용과 노력이 더 들지 않고 가마 하나에서 구워내어 만 장울 만들 수 있지. 또한 사람이 옮기는데 힘이 들지 않고 정사각형으로 반듯하니 들인 힘의 두 배로 효율을 내서 가볍게 옮겨 쉽게 쌓으니 벽돌이 이렇게 좋다네. 이제 산에서 돌을 캐려면 장인과 기계를 써야만 하고 때에 맞추어 옮기려 하여도 사람과 기계를 써야만 하고 옮겨 온 후에도 장인과 기계를 써야만 깎고 다듬을 수 있고 그렇게 깎고 다듬는데 또 다시 비용과 기계며 시간이 드오. 쌓을 때도 돌 하나 얹어 놓으려 하면 또 사람이며 기계를 써야 하고 이렇게 벼랑을 깎아 (돌을) 만들고는 다시(흙 위로) 입히니 그야말로 흙 살에 돌 옷을 입힌 것이라. 겉으로는 단단하고 가지런하여 보여도 속으로는 어그러져 영 불안한 것이 되지. 돌이 모두 틈이 있어 가지런하지 못하니 그 틈바구니에 다시 작은 돌을 괴어 넣고 성벽에 틈이 생기면 깬자갈로 채우고 진흙마저 바르는데 큰 비가 오면 빈 곳에 물이 차서 돌 하나만 빠져 나와도 만 개의 돌이 무너져 내리는 일을 쉽게 볼 수 있고. 그리고 석회의 성질은 벽돌하고는 잘 붙지만 돌하고는 붙지 않으니 내가 이미 차수(박제가)와 성 쌓는 제도를 논하였지. 누군가 벽돌이 '어찌 돌의 굳건함을 당하겠는가?' 하길래 차수가 '벽돌이 돌 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 어떻게 벽돌 하나하고 돌 하나를 비교하는 것이더냐!'하고 고함을 질렀거든. 이는 (반박할 수 없는) 철석 같은 이론일세. 대체로 석회는 돌과 붙지 않으니 석회를 너무 많이 쓰면 약해져서 저절로 터지고 뒤에 있는 돌이 들떠 일어나기 때문에 돌은 늘 돌 하나 하나를 따로 따로 쌓고 나서 저마다 흙을 발라야 하지만 벽돌은 석회를 써서 마치 아교로 나무를 붙일 때나 붕사고 금을 붙일 때처럼 붙일 수 있으니 만 개의 벽돌이 엉겨 붙어 한 덩어리로 붙은 성이 되기 때문에 벽돌 하나야 돌보다 단단하지 않아도 돌 하나의 굳건함으로 벽돌 만 개가 엉긴 것에 미치지 못하네. 이것이 벽돌과 돌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따진 것이 아니겠나? 이렇게 쉽게 변증할 수 있지."
 
정진사는 말 위에서 구부정하게 앉아 이미 졸고 있던 지 오래다. 나는 부채로 겨드랑이를 쿡 찌르며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찌 졸면서 듣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하고 고함을 질렀다. 정진사는 웃으며 "제가 이미 다 들었습니다. 벽돌이 돌만 못하고 돌이 졸음만 못하지요." 한다. 나는 화가 나서 쥐어 박을까 하다가 서로를 보고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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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臲卼(얼올): 얼울하다. 일이 어그러져서 불안하다.
* 碎礫(쇄력): 골재로 사용하려고 부수어 쓰는 잡돌. 깬자갈.
* 次修(차수): 차수는 [[:w:박제가|박제가]]의 호이다. 박제가는 북학파로 알려진 실학자로 중국의 여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고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 魚膘(어표): 물고기를 재료로 만든 아교.
* 鵬砂(붕사): [[:w:붕사|붕사]](硼砂)는 붕소 화합물이다. 소규모 금 채광이나 금세공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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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河邊 得柳陰納凉 五渡河五里之間一臺子 所謂頭臺子 二臺子 三臺子 皆烽堡也 甎築如城 高五六丈 正圓如筆筒 上施垜堞 多毁壞而不修葺何也 道傍或有柩 累石壓之 年久露置 木頭朽敗 葢待其骨枯 擧而焚之云 沿道多有墳塋 其封高銳 亦不被莎 多樹白楊 排行正直 行旅步走者絶少 步走者 必肩擔鋪盖 寢具謂鋪盖 無鋪盖者 店房不許留接 疑其姦宄也 掛鏡而行者 養目者也 乘馬者 皆着黑緞靴子 步行者 皆着靑布靴子 其底皆衲布數十重 絶不見麻鞋藁屨 宿松店 一名‘雪裡店’ 又號‘薛劉店’ 是日行七十里 或曰 此舊‘鎭東堡’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