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도강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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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강을 건너 강가에 닿으니 갈대며 억새가 비단결 같이 덮혀 아래에 있는 흙이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이 강둑 아래에서 앞다투어 갈대며 억새를 배고 배 위의 돗자리를 부지런히 주워 (사신 일행이 설 자리를 만들어) 펼쳐 놓으려 하였다. 배여 나간 갈대 뿌리는 창처럼 날카로웠고 그 밑엔 검은 흙이 두터운 진흙을 이루고 있었다. 정사부터 그 아래 사람들이 모두 갈대, 억새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어찌할 줄 몰랐다. "사람과 말 가운데 먼저 도착한 자는 어디로 갔는가?"하고 물으니 좌우에서 "모르겠습니다" 한다. 이어서 "방물은 무사한가?"하고 물으니 역시나 "모르겠습니다"하고는 멀리 구룡정이 있는 모래톱을 가리키며 "일행 중에 사람과 말 태반이 아직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저기 개미떼 처럼 보이는 것이 그들입니다" 한다.
 
멀리 있는 의주를 보니 한 조각 홀로 서있는 성인데 명주 한 필이 누여있는뉘어있는 것 같았고 성문이 바늘 귀 만하게 보였다. 그 사이로 하늘 빛이 한 점 샛별처럼 나오고 있었다. 큰 뗏목이 물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시대가 "웨이"하고 소리쳤다. 중국어로 상대를 부를 때 웨이라고 하는 것은 존칭이다. 뗏목에 있던 사람이 일어나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였다. "당신들 때를 잘못 맞추었소. 어찌하여 대국에 조공을 왔는 지 모르겠으나 더운 날씨가 먼 길에 계속 되니 참 고생이 많소" 한다. 다시 "당신들은 어디 사는 사람들이고 어디서 나무를 배었소?" 하고 물으니, "우리는 봉성에 사는데 장백산에서 나무를 배어 오는 길이오" 한다. 이야기를 다 나누기도 전에 뗏목은 저 멀리 흘러 내려갔다.
 
이때 양쪽 강에서 합쳐진 물이 넘쳐 가운데는 뚝 떨어진 섬이 되었다. 사람과 말이 먼저 내린 곳은 잘못 된 곳으로 원래 내려야 할 곳과 5 리나 떨어져 있었고 돌아가는 배도 없었다. 양쪽 배의 선원들에게 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라고 엄한 명령을 보냈지만 되돌아가려면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야 해서 하루에 될 일이 아니었다. 사신들이 모두 성급히 화를 내며 배의 운항을 책임진 의주 군교의 죄를 묻고자 하였으나, 이번엔 (명령을 집행할) 군뢰가 없다. 군뢰들 역시 먼저 내렸는데 중간에 섬이 되어 버린 곳에서 잘못 내렸기 때문이다. 부방 비장 이서구가 분을 참지 못하고 부방 마두를 시켜 의주 군교를 잡아들였다. 엎드리게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세워 둔 채로 볼기를 반쯤 내리게 하고 말채찍으로 너다섯 대 정도 때렸다. 붙잡아 들이라 명령을 외치자 즉각 거행되었다. 의주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지 춤을 붙잡은 채 섰고, 횟수를 외치고 답하며 매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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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우리 나라 임진강 만큼 넓었다. 잡초가 무성하고 주위에 그물을 쳐 호랑이의 침범을 막았다. 의주의 창군이 곳곳에서 나무를 배어 벼락 같은 소리가 먼 들판에 퍼졌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보니 산세는 밝고 물은 맑았다. 멀리까지멀리 평평하게 펼쳐진 숲이 하늘에하늘까지 닿았고닿고 군데군데 마을들이보이는 군데 군데 보였는데마을들은 닭이며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듯 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과연 땅을 일구어 개간할 만 하다. 대동강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 사이에 이만한 곳이 없다. 큰 고을이 들어서기에 알맞으나 저들과 우리 사이에서 버려져 국경 사이의 땅이 되었다. 어떤 이는 "고구려 때에는 도읍이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국내성이다. 명나라 황제 시기에는 진강부였다.
 
지금의 청나라가 (후금 시절에 당시 명나라였던명나라 땅이었던) 요동을 함락하자 진강 백성들이 차마 변발을 할 수 없어 일부는 모문룡에게 갔고 일부는 우리 나라에 왔다. 우리 나라에 온 사람들은 훗날 청나라가 모두 요동으로 데려갔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다수가 죽고 일부는 난민이 되어 바다를 떠돌았다. 이곳이 빈 땅이 된 지도 백여 년이 되어가고되어가서 막연히 보며지나치며 볼 때는 지나가니그저 산은 높고 물은 맑을 뿐이다.
 
노숙을 하며 행차하는데 때로는 역관 셋이 한 천막에 함께 묵고 때로는 다섯이 한 장막에 함께 묵었다. 통역과 군졸, 말을 모는 사람은 다섯 씩 또는 열 씩 냇가에서 물 축이고 나무에 기대며 서로 모닥불을 쬐었다. 사람 소리며 말 울음이 성과 촌 사이에서 왁자지껄 하니 의주 상인 무리가 저절로 진을한 부대를 이루었다. 계곡에 이르러 닭 십 수 마리를 씯고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은 뒤 국을 끓이고 나물을 삶아 윤기나는 밥과 먹었는데 이것이 (행차 중에) 가장 풍요로운 식사였다. 한참 있다가 부사의부사와 서장이 차례로 도착하였다. 날이 이미 어두워져 화톳불을 30여 곳에 놓았는데 모두 아름드리 거목을 잘라낸 것이다. 날이 밝도록 밤을 새우다가 군뢰가 나발을 한 번 불자 삼백여 명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는데 호랑이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의주에서 가장 건실한 군뢰를 가려 뽑아 (경비를 서는) 조례로 합류한 일행은 일도 가장 많이 하였고 밥도 가장 많이 먹었는데 그 치고 받고 하며 사람을 부리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웠다. 푸른 운문단에 전립을 안에 쓰고 그 위로 고정립을 헝클어지듯 걸치고 봉긋한 갓 위에 붉게 물들인 실을 매달았으며 늘어진 실 앞으로 금실로 수 놓은 용(勇)자가 하나 붙어 있었다. 짙푸른 베옷 위로 소매 좁은 전복을 입고 그 위로 검붉은 배자를 또 겹친 뒤 허리에 남방사주 전대를 차고 어깨에는 붉은 비단 실로 만든 대융을 걸쳤는데 발에는 구멍 많은 삼으로 지은 신을 신었다. 그 신수를몸가짐이며 차림새를 보니 과연 으뜸가는 건아라고 할만하다. 다만 타고 가는 것이 이른바 반부담 말이라 (말이 너무 작아) 안장도 없이 짐을 얹고 말을 타는 것도 아니고 쭈그리고 앉은 모양새인데, 등 뒤로는 푸른색 소령기를 꽂고 한 손에는 군령판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과 벼루에 파리채까지 들고서 팔뚝에는 마가목으로 만든 말채찍 까지 둘렀고 그 모양새로 입으로는 나발마저 불었다. 앉은 밑으로 붉게 칠한 나무 몽둥이 십여 개까지 비스듬히 꽂혀 있다.
 
각 방에서 작은 일이라도 시킬 것이 있으면 바로 군뢰를 부르는데 군뢰는 못들은 척 하다가 수십 차례를 연달아 불러야 구시렁거리며 높은 소리로 응답한다. 첫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려 치면 단번에 말에서 내려 돼지가 달리고 소가 숨을 헐떡이듯 달려오는데, 나발이며 군령판, 받아 적을 붓과 벼루 등을 한쪽 어깨로 매고 다른 손에는 몽둥이를 질질 끌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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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임신. 아침에 비 조금 정오 무렵 갬.
 
각 방의 통역원수행원들과 역관 등이 모두 머물렀다. 곳곳에서 옷과 이불을 말렸다. 간 밤에 비가 와서 축축하였다. 말을 돌보는 사람 가운데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선천 노비이자 어의 변주부의 마두인 대종이 술 한 병을 사와서 바치기에 계곡으로 이끌고 가 함께 마시자고 하였다. 강을 건넌 뒤 우리 나라의 술을 볼 일이 없다가 이제 문득지금 얻게뜻밖으로 되니얻은 술 맛이 아주 좋을 뿐만 아니라 한가한 물가에물가에서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마두들이 앞다퉈 장대를 드리며 낚시를 하였다. 나도 취한 김에 낚싯대 하나를 빼앗아 들어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낚았다. (나 같이 낚시 못하는 사람이 두 마리나 낚은 것은) 물고기들이 아직 낚시질을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물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또 다시 구련성에서 노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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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련성을 출발하여 30 리를 가니 금석산 밑의 중화에 다달았다. 30리를 더 가 총유에서 노숙하였다.
 
새벽이 되어 안개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상판사의 마두 득룡이 다른 말 모는 사람 무리들과무리들에게 강세작 이야기를 하였다. 안개 속에서 멀리 금석산을 가리키며 "저 곳이 형주 사람 강세작이 숨어 살던 곳이오" 한다. 그 이야기가 자못 흥미진진하였다.
 
강세작의 할아버지 강림은 양호의 휘하로 우리(임진왜란 나라를때) 우리나라를 도우러 왔다가 평산에서 죽었다. 아버지 강국태는 청주통판을 지냈는데 좌천되어 요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당시 강세작은 18세였는데 아버지를 따라 요양에 와 있었다. 이듬해 청나라가 무순을 함락하여 유격장군 이영방이 항복하자 경략사이던 양호는 장수들을 나누어 파견하였는데 총병 두송은 개원으로, 총병 왕상건은 무순으로, 총병 이여백은 청하로, 도독 유정은 모령으로 출병하였다. 국태 부자는 유정을 따랐다. 청의 복병이 가운데를 끊어 공격해 오니 대군의 앞과 뒤가 서로를 구하지 못하였다. 유정은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자살하였고 국태는 싸움 중에 날아든 화살을 맞아 쓰러졌다. 세작은 날이 저물자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골짜기에 묻고 돌을 모아 표시하였다. 이때 조선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는 산 위에 진을 치고 있었고 조선군의 좌우 영장은 산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세작은 도원수 진영에서 머물렀다. 다음 날 청나라 군대가 조선 좌영을 공격하자 아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산 위의 군대는 이 광경을 보고 모두 다리를 떨며 두려워 하였고 홍립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다. 청나라 군은 홍립의 군대를 포위하고 잡아들였고 숨어들어 간 명나라 군사를 찾아내고는 손을 뒤로 하여 묶고 끌어내어 모두 칼로 머리를 배어 죽였다.
 
세작도 묶인 채 큰 바위 아래 앉았는데 세작을 묶었던 자가 잊어버리고 가버렸다. 세작이 조선 병사를 보고 풀어달라고 하니 조선 병사는 서로 곁눈질을 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세작은 자신의 등을 바위에 대고 갈아 포박 줄을 모서리를 끊어낸 뒤,끊고 죽은 조선 병사의 옷을 벗겨내어벗겨 입고서 죽을 위기를 모면하고,모면한 뒤 조선 병사의 무리에 숨어 들어 도망쳐 요양으로 돌아갔다. 웅정필은 요양에 진을 치고 세작을 불러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라며 부하로 받아들였다. 그해 청나라는 개원위와 철령위를 연달아 함락시켰고 이에 웅정필이 교체되어 설국용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 세작은 설국용의 군대에 남게 되었는데 심양이 함락되자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길을 다니며 봉황성으로 가 그곳에서 광령 사람 유광한과 요양의 패잔병을 수습하여 함께 수비를 하였다. 오래지 않아 유광한은 전사하였고 세작 역시 창에 십여 곳을 찔렸다.
 
스스로 생각해 보니 중원으로 가는 길은 끊겼고 머리를 짧게 깎이고 청나라의 옷을 입고 사느니 동쪽의 조선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금석산에 숨었다. 양을 잡아 굽고구워 먹고 가죽을 얻으며걸치고 나뭇잎을 모아 불을 피우면서 수 개월을 죽지 않고 버텼다.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 관서 여러 군을 돌아 다니다가 회령까지 흘러 들었다. 아내를 맞아 두 아들을 두었고 세작은 80여 세까지 살고 죽었다. 자손이 번창하여 백여 명에 이르는데 모두 한 마을에 산다고 한다.
 
득룡은 가산 사람으로 올해 사십세인데 연경을 드나들기를 30여 차례나 하였다. 중국어를 가장 잘하여 행차에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도 득룡이 없으면 해결할 자가 없었다. 자신이 원래 속한 가산은 물론이고 의주와 철산 등 여러 부에서 중군을 지내고 지금은 가선대부이다. 매번 사신 행차가 있으면 본군인 가산에 연락하여 득룡의 가족을 가두어 두는데 혹시나 득룡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다. 세작이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득룡의 할아버지 집에 손님으로 있었는데 이때 서로 조선 말과 중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득룡이 중국어를 잘하는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며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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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晝伏夜行(주복야행):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길을 다님.
* 鳳凰城(봉황성): 옛 고구려 시절 오골성이 기원인 산성.
* 廣寧(광령): 광령현. 중국 광저우의요동성의 고을.
* 未幾(미기): 오래지 않아.
* 薙髮左衽(치발좌임): 머리를 깍이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되는 일. 청나라의 복색을 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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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을 바라보니 마치 온전히 돌로 만든 듯 하였다. 땅에서 우뚝 솟아 올라 섰는데 손바닥에서 엄지며 손가락이 일어선 것 같기도 하고, 반쯤 핀 부용 같기도 하고, 뭉개 구름 같기도 하였다. 수려하고 날카롭게 깍인 모양새가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지만 흠이라면 맑기와 윤기가 부족하였다. 이를테면 우리 서울의 삼각산이 금강산 보다 낫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깊은 산이산으로 이른바 일만이천봉이라고일만이천봉이라 하는데불리면서 기이하고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뭍 짐승과 새가 살고 신선과 부처가 오르 내린다고 하니 깊은 숲이 아득히 어두워 마치 귀신 굴로 들어가는 것 같다.
 
내가 일찌기 신원발과 함께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라 하늘은 짙푸르고 석양이 비스듬히 비치는데 하늘로 닿는 줄기엔 빼어난 색이 없고 산등성이도 윤기가 나지 않아 이것이 (그렇게 남들이 치켜세우던) 금강산인가 하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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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가 드넓고 평탄한데 비록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곳곳에 땔나무를 배어 내고 대패질을 한 잔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소 발굽 자국과 수레 자국이 거침없이 풀 사이를 지난 것을 보니 이미 책문 근처인 것을 알 수 있었고 주민들이 평소에 책문 밖을 나와 돌아다니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말을 달려 일곱 여덟 리를 가니 책문 밖에 닿았다. 양이며 돼지가 산을 두를 지경이었고 아침밥 짓는 연기가 푸르게 감겨 오르는데오르고 있었으며 나무를 갈라 울타리를 쳐 경계를 표시하였다. 과연 (《시경》에 나오는 구절인) '절류번포 광부구구'(折柳樊圃, 狂夫瞿瞿 - "버들 가지를 꺽어 울타리로 삼으니 미친 사람도 두려워 하네"라는 구절과 같이 든든한 울타리)라고 할만 하다.
 
책문은 듬성듬성 나 있는 풀로 덮여 있었는데있었고 널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책문에서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세 사신을 위한 장막이 세워졌다. 잠시 뒤에 방물이 도착하여 책문 밖 길 위에 쌓았다. 호인 무리가 구경하려고 책문 안에서 줄지어 섰는데 입에 담뱃대를 물지 않은 자가 없었다. 반짝이는 머리에 부채질을 하는데하는 무리들이 더러는 흑공단 옷을 입었고 더러는 꽃무늬를 수놓은 명주를 입었으며 나머지는 물을 빼지 않은 삼베 옷이나 모시 옷이었는데 심지어 올이 성긴 삼베 옷인 삼승포를 입거나 산누에 고치에서 뽑은 야견사 옷을 입은 사람들 마저 구경을 나왔다. (저고리 뿐만 아니라) 바지도 이와 같았다. 몸에 지닌 노리개도 너저분하여 더러는 수 놓은 주머니와 서너 개의 패도를 찼는데 모두 쌍으로 짝 지어 꽂은 상아 칼집에 꽂혀 있었다. 담배 쌈지도 우스운 모양이어서 더러는 꽃과 들짐승 날짐승을 수놓은 것이거나 이름난 옛 글 구절을 수놓았다. 통역관이며 마두 무리들이 앞다투어 책문 밖에 서서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은자의 무게를 확인하고 인원을 점검하는데 모여든 호인들이 물었다. "당신들 서울에서 몇 일이나 걸렸으며 오는 길에 내린 비는 피하였소? 집안은 두루 평안하오? (무역할 자금인) 포은은 받아 왔소?" 사람 마다 한 마디씩 하는 것이하면서입에서목소리로 나오는 것 같았는데 다투어 묻기를똑같이 "한 상공과 안 상공은 함께 오지 않았소?" 한다하고 묻는다. 이렇게 묻는 몇 사람은 의주 상인들과 함께 하는 자들로 오랜 세월 연경에서 장사하여 모두 몹시 교활하고 연경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았다. (이들이 부르는) 상공이란 것은 상인들이 서로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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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문 밖으로 돌아가 책문 안을 바라보니 모여 있는 민가들 모두 들보 다섯을 써 높게 올렸고 지붕은 새를 엮어 올렸으며 지붕 마루는 둥글게 올라 있는데있고 드나드는 문이 반듯하였다. 길 역시 반듯하고 평탄하여 양 옆이 줄을 댄 듯 하였고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아 올렸다. 수레를 타거나 짐수레를 몰고 길을 거침없이 지나고 (상점에) 벌려 놓은 그릇은 모두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였다. 이런 제도를 보니 결코 시골의 기운이 아니었고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덕을 보니 과연 규모가 크고 상세한 법도라고 할 만 하였다. 책문은 천하의 동쪽 끄트머리인데도 그 모습이 이러하여 앞 길을 구경하는데 문득 곧바로 나 스스로 이것들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에 뱃속이 끓어오는 감정이 몰려왔다.
 
나는 크게 반성하며 "질투가 나는구나. 내가 원래 성격이 담백하여 시기나 질투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었는데 이제 국경 밖으로 한 걸음 내뎌 만분의 일을 보았을 뿐인데도 망령된 마음이 이와 같이 일어나니 어찌하랴. 이는 바로 (이제껏) 본 것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와 같은 혜안이라면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모든 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질투함이 없을 것을."하고 생각하였다. 장복을 돌아보며 "너는 다음 생에 중국에서 태어나면 어떻겠느냐?" 하니 "중국은 오랑캐라 쇤네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한다. 마침 맹인 한 명이 비단 주머니를 어깨에 두르고 손으로 월금을 연주하며 지나간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것이야 말로 평등한 눈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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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서 말다툼을말다툼 벌여하는 시끌시끌 한 소리가 났는데들려 목소리가가 보니 마치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것 같았다같은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급히 가서 보니 득룡이 여러 호인들에게 둘러싸여 예물이 많니 적니 다투고 있다. 예단을 줄 때에는 관례에 따라 나누어 주는데 봉성의 교활한 호인들은 꼭 가지 수를 늘리고 수량을 더 달라고 한다. 그것이 되고 안되고는 모두 상판사의 마두에게 달렸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고 중국어에 능통하지 않으면 제대로 따질 수가 없어 달라는 대로 주게 된다. 올해 이렇게 하면 이듬해에는 그것이 전례로 굳기 때문에 다툴 수 밖에 없다. 사신은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고 늘 책문에 들어가는 것을 서둘러 통역을 재촉하고 통역은 또 마두를 재촉하니 그 폐단의 뿌리가 오래되었다. 상판사 마두인 상삼이 예단을 나누어 전하는데 호인 백여 명이 둘러싸 서있다.
 
그 중 한 호인이 갑자기 상삼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욕을 하자 득룡이 수염을 부르르 떨고 눈을 부라리며 곧장 그 앞으로 가서 가슴팍을 부여잡고 주먹으로 때리려 하였다. 호인 무리를 돌아보며 "이 무뢰배 녀석이 이토록 무례하여 재작년에는 겁도 없이 어르신의 서피항을 훔쳤고, 또 작년에는 이 어르신께서 주무시는데 내 허리춤의 칼을 풀어 칼집을 훔치고 내가 차고 있던 주머니도 훔쳤겠다. 내가 이 놈 소행을 알고 늙은 주먹으로 한 방 먹여서 신고식으로신고식 삼았지삼았거늘. 이 녀석이 만 번을 애걸복걸 하면서 나를 되살아 온 아버지라 불러 놓고 올 해 오랜 만에 왔더니 다시 어르신을 속이는 구나. 얼굴도 잊어버리고 이리 겁 없이 큰 소리를 내는 것이냐? 이 쥐새끼를 봉성장군께 잡아가야 하겠다."하고 을러대었다. 모여든 호인 무리가 일제히 화해를 청하는데 아름다운 수염에 옷을 잘 갖춰 입은 나이 든 호인 하나가 득룡의 허리를 끌어 잡으며 "형님이 화를 삭히시죠." 한다. 득룡은 화를 거두고 빙긋 웃으며 "현명한 아우의아우님 체면을 보아 그만 두네만, 그렇지 않았으면 주먹 한 방으로 콧대를 봉황산 밖으로 날려 버렸을 걸." 하고 말했다. 허풍을 떠는 행동거지가 참 우스웠다. 판사 조달동이 내 옆에 와 섰길래 나는 조금 전 광경을 이야기 해 주며 혼자 보기 아깝더라고 하였다. 조군은 웃으며 "이게 (꼼짝 못하게 다루는) 살위봉법이라는 거죠." 한다. 조군은 득룡을 재촉하며 "사신 행차가 지금 책문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예단을 재빨리 나누어 주거라." 하였다. 득룡은 연신 네네 하고 대답하며 서두르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지켜보며 나누어 주는 물건의 목록을 보았는데 참으로 괴상하고 잡스러웠다.
 
책문 수직포고 2 명, 갑군 8 명 - 각 백지 10권. 작은 담뱃대 10개, 부시 쇠 10개, 봉초 담배 10봉. 봉성장군 2 원, 세관 1 원, 어사 1 원, 만주 장경 8 인, 가출 장경 2 인, 몽고 장경 2 인, 영송관 3 인, 대자 8 인, 박씨 8 인, 가출 박씨 1 인, 세관 박씨 1 인, 외랑 1 인, 어역 2 인, 필첨식 2 인, 포고 17 인, 가출 포고 7인, 세관 포고 2 인, 분두 포고 9 인, 갑군 50 명, 가출 갑군 36 명, 세관 갑군 60 명, 합 102 인 - 장지 156 권을 나누어 줌, 청서피 140 장, 작은 담배 상자 580 갑, 봉초 담배 800 봉, 가는 담뱃대 74 개, 팔면은목 담뱃대 74 개, 주석으로 만든 장도 37 자루, 초도 284 자루, 부채 280 자루, 대구어 74 마리, (가발의 일종인) 다래, 가죽으로 만든 장니 7 벌, 환도 7 자루, 은장도 7 자루, 은 담뱃대 7 개, 주석으로 만든 긴 담뱃대 42 자루, 붓 40 자루, 먹 40 개, 부시 쇠 262 개, 청청 다래 2 벌, 특별히 잘 만든 연죽 35 개, 기름 먹인 종이 2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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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내원과 정 진사와 함께 봉황산 구경을 나섰다. 예닐곱 리를 가니 전면이 보였는데 참으로 기이하게 깍여 있었다. 산 속에 안시성의 옛 터가 있고 지금도 성 가퀴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삼면이 모두 끊어져 가파르고 오직 남쪽 한 면만 그나마 조금 평탄한데 둘레가 수백 보에 불과하여 여기엔 작은 성곽을 두를 수 있을 뿐이어서 그 옛날 대군에 맞선 땅이라고 할 수 없다. 아마도 고구려 시절 작디 작은 보루였을 것이다. 일행이 서로 끌어가며 큰 버드나무 밑으로 들어가니 시원하였다. 벽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는데 돌을 갈아 만든 뚜껑을 덮고 그 양 옆으로 구멍을 내고 물 길을 그릇을 매달아 두었다. 이로서 사람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흙먼지를 막는다. 또한 물의 성질은 본래 음이니 (햇볕과 같은) 양의 기운이 닿지 않도록 막아야 물을 살려 기를 수 있다. 우물 덮개 위로 도르래가 있고 두레박 둘을 늘어뜨려 버드나무에 묶어 두었다. 이와 같이 두레박을 매어 놓으니 하나가 올라가면 하나가 내려가 하루 종일 물을 길러도 사람의 힘이 들지 않는다. 수통은 모두 쇠 테두리를 두르고 쇠못으로 단단히 박아두었는데박아두어 대나무 테보다는 한결 낫다. 여러 해를 사용하여 오래되면 결국 썩고 끊어지기 마련인데마련이고 수통을 건져 말리다 보면 대나무 테두리는 뒤틀려 벗겨진다. 이 쇠 테두리 수통으로는 물을 길어 어깨에 지고 가는데가서 이를 편담이라고 부른다. 편담을 지는 방법은 양팔 길이 정도 되는 길이의길이인 나무 장대를길이 장이라고나무 부르는데장대 양 끝에 물통을 달고 땅에서 한 자 정도 높이로 매달아 걸으면 물이 찰랑거려도 넘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평양에서도 이런 방법을 쓰지만 어깨에 걸지 않고 등 뒤로 매기 때문에 비좁고 지저분한 뒷골목을 지날 때면 통행에 방해가 된다. 물통 지는 방법 하나도 이처럼 이득이 있는 것이다. 옛날에 포선의 처가 동이로 물을 길러 날랐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조선에서 처럼) 머리에 동이를 이고 날랐다는 것인지 (지금의 중국처럼) 손으로 날랐다는 것인지 궁금했었다. 지금 보니 부인들이(중국의) 부인들은 모두 머리를 높이 올려 무엇이고 (머리에 이고는) 나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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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광경에 여행길 고달픔을 까맣게 잊었다. 두 사람은 새로 단장한 불당을 구경한다고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 10여 명이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며 지나는데지나는 것을 보니 모두 수 놓은 안장을 놓은 날랜 말들을 타고 의기 양양하게 지나간다. 내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멈추고 말을 내려 내 손을 다투어 부여 잡는데잡는 모습에서 친절한 마음이 묻어난다묻어났다. 그중에 잘생긴 소년이 한 명 있길래 나는 땅에 글자를 써서 보였으나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글자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 무슨 말인지 알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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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돌로 만든 비석 두 개가 있는데 모두 푸른 돌로 만들었다있었다. 하나는 위에 어사 선정비라 적혀 있고 다른 하나는 세관 아무개의 선정비이다. 만주 사람 이름 넉자와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세겨져 있는데 역시 만주인이다. 문장이나 글씨는 보잘 것 없었으나 비를 세우는 제도는 아름답기 그지 없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세심하게 살핀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비의 양 옆은 반들거리게 갈지 않고 대신 벽돌을 울타리처럼 쌓아 그 속에 비를 넣었다. 이어서 기와로 지붕을 만들어 올려서 비는 그 속에 파묻힌 모양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으니 (조선에서 비를 보호하기 위해 짓는) 비각보다 낫다. 비는 힘을 들여 자리를 잡아 세우고 비의 양 면에 글을 새기고 패하를 털처럼 가는 선으로 그렸다. 이것은 그저 변방 시골의 민가에 세워진 것이지만 정교하여 예스럽고 아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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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에 강영태의 집이 있다. 영태는 23 세로 스스로를 민가라 부르는 한인이다. 민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주족은 기하라고 하였다. 희고 밝은 피부에 잘 생겼는데생겼고 양금 연주를 잘했다. "글은 읽었는가?"하고 물으니 "사서를 독송하였지만 아직 '강의'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한다. 그가 말하는 책을 독송하고 강의를 배우는 두 가지 방법은 우리 나라에서 초급 학습자가 배울 때 음과 뜻을 함께 익히는 것과 다르다. 중원의 초급 학습자는 먼저 사서의 구절들을 통째로 암송하고 암송이 익숙해 지면 스승에게 그 뜻을 배우는데 이를 "강의"라고 한다. 설령 평생 동안 강의를 배우지 못하더라도 구절들은 암송하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관용어로 사용한다. 세계 각지의 외국어 가운데 한어가 가장 쉬우니 이 또한 유리하다.
 
영태의 집은 물을 뿌려 청소하여 두었고 다채롭게 치장하여 가지가지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마루 위의 깔개는 모두 용과 봉황을 그린 모직 담요로 의자며 걸상을 덮었고 이불은 모두 비단이었다. 뜰 가운데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만든 차일을 치고 사방으로 누르스름한 발을 걸어 내렸고, 그 앞으로 석류 대여섯 그루가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흰색 석류가 만개하였다. 또 다른 나무 한 그루는 잎이 동백처럼 생겼는데 열매는 탱자와 닮았다. 이름을 물으니 무화과라고 한다. 쌍쌍이 꼭지를 나란하게 하여 열매가 달리는데, 꽃 없이 열매를 맺어 그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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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조정진이 와서 보았는데인사한다. 나와 동갑이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부사 역시 찾아왔다. 부사 정원시하고는 만리를 함께 고생하며 가는 정이 생겼다. 자인을 호로 쓰는 김문순이 "이 행차에 나도 정신이 없다 보니 아직 서로 찾아보지 못하였습니다."하고 말하길래, 내가 "다른 나라에 와서야 친분을 쌓게 되었으니 과연 멀리 떨어진 곳의 친구라 하겠습니다." 하였다. 부사와 서장은 크게 웃으며 "누구더러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부사는 나 보다 두 살 위로 내 할아버지와 부사의 할아버지는 동창으로 함께 과거 공부를 하였고 (동창들의 명단을 적은 목록인) 동연록에 함께 실려 있다. 내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당상관을 할 때에 부사의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시랑으로 있었다. 서로 옛날에 함께 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그 때 여덟 아홉 살이었는데 곁에 있으니 옛 정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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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는데하여 기다리고마냥 있기만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허기도 참고 밖으로 나와 처음 마주치는 오른 편 작은 문을 들어섰다. 이 집이 얼마나 크고 사치스러운지 미처 몰랐다가 지금 문을 나서고 보니 바깥 정원이 수백 간 크기이다. 세 사신이 부하를 이끌고 이 집에 들어들여 온 사람들은수행원들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를 정도이다. 우리만 홀로 이곳 저곳을 느긋히 여유를 부리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상인이며 떠나가는 나그네가 계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수레 20여 량이 문을 드나드는데 수레 하나를 말이나 노새 대여섯 마리가 끌었으나 장원 깊은 속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치 빈 것처럼 느껴졌다. 갖가지 물건을 적절히 벌려 배치하였는데 규모가 커도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밖의 모습 만으로도 이러하니 기타 자세한 것들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가니 번화하고 수려하다. (변방인 책문이 이런 모습이니) 황성에 도착하면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중국의 성대함이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다. 길 좌우에 있는 시장의 가게들은 모두 기와를 맞닿으며 밝게 빛나는데빛나고 모두 무늬를 새긴 창문을 달고 마룻대를 아름답게 칠하고 붉은 칠을 한 난간을 세웠는데세웠으며 푸른 판에 금으로 글씨를 쓴 간판을 달았다.
 
가게에 있는 물건은 모두 내지에서 온 상품들이다. 변문은 벽지이자 오지인데도 귀감이 될 만한 것이 있다 하겠다. 또 다른 집에 들어가 보니 꾸밈은 강영태의 집보다 화려한데 구조와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집과 방의 지어진 모습이 수백 걸음 안의 땅에 길이와 넓이를 적절히 맞추어 평탄하고 반듯하게 깍아 다듬었는데다듬었고 분명 나침반을 이용하여 터를 정하고 축대를 쌓아 올렸다. 축대는 돌을 기반으로 하였고 어떤 것은 1급 또 어떤 것은 2급이나 3급의 벽돌로 쌓은 뒤 갈아낸 돌로 마감을 하여 담장을 쌓았다. 축대 위로 집을 지었는데 모두 일(一) 자 모양으로 따로 덧이어 붙인 부속 건물은 없었다. (제일 안쪽부터) 첫 번째 집은 안채가 되고 두 번째는 중당, 세 번째는 전당, 네 번째는 바깥채이다. 바깥채가 큰 길과 닿아 점방도 차리고 가게도 차린다. 각각의 집 좌우에 곁방이 있어 (부속 건물인) 낭무나 행랑채를 대신한다. 한 집의 길이는 대략 6 영, 8 영, 10 영 또는 12 영인데 두 기둥 사이의 길이인 영은 제법 넓어 우리나라 보통 집의 2 간 정도 되었다. 제목이 길거나 짧다고 임의로 넓거나 좁게 집을 짓지 않고 반드시 정해진 길이에 맞추어 들보를 올렸다. 집의 들보는 다섯 아니면 일곱인데 땅에서 지붕의 수평마루까지 높이를 재서 그 가운데에 처마가 있기 때문에 기와 고랑이 가파르다. 집의 좌우와 뒷면에는 처마가 없고 서까래가 곧장 벽돌담에 묻힌다. 집 동서의 벽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며 둥글게 만든 창문이 남쪽 면에 나있다. 집의 한 가운데 드나드는 문이 있는데 모두 앞뒤가 곧장 마주하고 있어 집이 (겹겹이 담장을 둘러) 세 겹 네 겹이거나 문이 여섯 겹, 여덟 겹이어도 문을 모두 활짝 열어 재치면 안채에서 바깥채까지 한 번에 보일 정도로 곧다. 이른바 "겹겹이 두른 문을 활짝 열어 재치니 내 마음이 이와 같도다"라는 말은 이와 같은 정직함을 비유한 것이다.
 
길에서 (중추부의) 동지인 이혜적을 만났다. 통역관인데 3품 당상관이다. 이군이 웃으며 "궁벽한 시골에서 볼 만한 것이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황성에 가더라도 이 보다 못할 것 같소."하고 대답하였다. 이군은 "하기사 크고 작고나 사치스럽고 검소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모습은 여기나 거기나 거진 같습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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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모두 벽돌로 짓는데 벽돌은 길이 1 자, 넓이 5 치로 둘을 합치면 정사각형이 되며 두께는 2 치이다. 하나 하나가 모두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각도가 틀어지거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거나 몸이 뒤틀린 것은 한 장이라도 쓰지 않아야 집 전체를 정교하게 지을 수 있다. 따라서 한 장 마다 치수가 어긋나 들쭉날쭉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각자를 써서 검사한 뒤 도장을 찍기 때문에 (규격을 맞추기 위해) 갈고 닦고 하여 가지런히 하기 위해 애써서 벽돌 만 장이 모두 똑같다. 쌓는 법은 하나를 세로로 놓으면 다른 하나는 가로로 놓아 저절로 감괘(☵)와 이괘(☲)의 모양을 이루게 하여하고 그 사이를 석회로 발라 붙인다. 석회는 종잇장처럼 얇게 겨우 붙을 정도만 바르는데 쌓고 나면 마치 실처럼 보인다. 회를 개는 방법은 거친 모래가 섞이지 않도록 하고 점토도 피하는데 모래가 많으면 접착력이 떨어지고 점토가 지나치면 쉽게 갈라진다. 그래서 꼭 검은 흙에서 가늘고 찰진 것을 골라 석회와 진흙이 반반이 되도록 개서 그 색깔이 마치 눈썹 그리는 먹이나 새로 갖 구워낸 기와 같다. 개어낸 회는 그 성질이 점토도 아니고 모래도 아니며 색상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또 어저귀를 털처럼 잘게 잘라 섞는데섞는다. 우리나라에서 (집 벽에) 흙을 바를 때 말똥을 진흙에 섞어 넣어 질기고 갈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과 같다. 또 유동나무 기름을 마치 젖처럼 짙게 발라 틈이 없게 매운다.
 
기와를 얹는 방법은 더욱 본받을 만 하다. 기와의 모양은 커다란 대나무와 같은 원통을 4등분 한 것처럼 생겼다. 민가에서는 원앙와를 쓰지 않고 서까래 위로 산자를 짜 넣지 않으며 바로 삿자리를 몇 겹 깐다. 이후에 기와를 엎어 놓는데 삿자리 위로 진흙을 바르지 않는다. (같은 모양의 기와를) 하나는 엎어 놓고 하나는 뒤집어 놓아 서로 암수가 되며 석회를 갠 흙으로 이어서 비늘처럼 얽혀 붙인다. 참새나 쥐가 구멍을 뚫을 수 없고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약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와 얹는 법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집 위로 진흙을 두텁게 발라서 위가 무겁고 벽과 담을 벽돌로 짓지 않으니 기둥이 의지할 곳이 없어 아래가 허약하다. 기와가 너무 커서 기와가 너무 휘어져 잇고 너무 휘어져 있다 보니 빈 곳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진흙으로 채운다. 진흙이 너무 무거우면 용마루가 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진흙이 마르면 기와가 들떠서 비늘이 흘러 내리며 틈이 생겨 바람과 빗물을 막지 못하고 참새가 구멍을 내고 쥐가 숨어들고 뱀이며 고양이까지 날뛰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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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은 이제 새로 쌓고 있다. 누군가 여기가 옛 안시성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말로 큰 새를 "안시"라고 하는데 지금도 시골에서는 종종 봉황을 안시라고 하고 뱀을 "백암"(배암)이라고 한다. 수당 시절의 나랏말로 고쳐 부르면 봉황성이 안시성이고 사성은 백암성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하는데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황제가 병사를 성벽 아래에서 물리면서 비단 백필을 하사하여 안시성주의 견고한 수비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삼연 김창흡은 동생 노가재 김창업이 연경에 가게 되자 시를 지어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 규염(당태종)을 쏘아 눈동자를 맞추었지"라고 하였고, 목은 이색은 〈정관음〉에서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다고 여겼는데 흰 깃털에 검은 꽃이 떨어질 줄이야"라고 하였다. 검은 꽃은 눈동자를 흰 깃털은 화살을 말한다. 두 어르신이 노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해 오던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태종은 천하의 병사를 움직였는데 작은 성곽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김부식은 이 역사를 기록하였지만 아쉽게도 (안시성주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였다. 어찌 김부식이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역사만 참고하여 글을 가려 뽑아 사실로 삼았겠는가. (당나라의 문인인) 유공권의 소설까지 인용하여 (당태종이) 포위 당하였다가 물러간 일의 증거로 삼았는데, 《당서》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모두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중국의 기록이 (부끄러운 사실을) 피한 것이라 의심된다. 그러나그러니 본토의 옛 이야기와 같은 것에것을 이르면인용하여구절을구절이라도 실으려고실으려 하여도 어떤 것은 믿을만하고 어떤 것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은 것을 고증하는 것은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당서》에서는 안시성이 평양에서 오백리였다고 하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고도 하는데 《동국여지지》는 또한 봉황성의 옛 이름이 평양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 고증할 수 없어 (《동국여지지》에서 말하는 평양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동국여지지》는 옛 안시성이 개평현 동북 칠십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개평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에 수암하가 있고 수암하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에 봉황성이 있으니 (지금의 개평이 안시성이고) 봉황성이 옛 평양이라면 《당서》에서 말하는 오백 리와 서로 부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로지 지금의 평양 만을 기자가 도읍한 평양이라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가 설치하였다는) 정전이 있다고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굳게 믿으니 만일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라서 '요동에도 평양이 있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질책할 것이다. 홀로 요동이 본래 조선 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신과 예맥같은 동이의 여러 나라는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다. 또한 오랄, 영고탑, 후춘이 본래 고구려의 땅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딱하다. 후세에 경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한사군의 땅을 모조리 압록강 안으로 넣고 사실에 끼워 맞추다 보니 구구한 이견을 배척하고 그 안쪽에서만 패수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누구는 압록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청천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대동강이 패수라 하며 이것이 조선의 옛 국경이라 하니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왜냐하면, 평양을 한 곳으로 정하여 두고 패수의 위치를 따지려고 하니 늘 사적을 쫓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사군의 땅은 요동 뿐만 아니라 여진의 땅도 들어가야만 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한서지리지》에는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고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년) 사군을 합하여 2부로 재편하였는 기록이 있고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2부를 다시 2군으로 재편하였다. 현도 3개 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개 현에 안시가 있으며 따로 떨어져 있는 진번까지 장안에서 7천 리이고 임둔까지 장안에서 6천1백 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김륜의 말처럼 (한사군이 모두) 우리나라 땅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 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로지 지금의 평양 만을 기자가 도읍한 평양이라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가 설치하였다는) 정전이 있다고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굳게 믿으니 만일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라서 '요동에도 평양이 있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질책할 것이다. 홀로 요동이 본래 조선 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신과 예맥같은 동이의 여러 나라는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다. 또한 오랄, 영고탑, 후춘이 본래 고구려의 땅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딱하다. 후세에 경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한사군의 땅을 모조리 압록강 안으로 넣고 사실에 끼워 맞추다 보니 구구한 이견을 배척하고 그 안쪽에서만 패수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누구는 압록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청천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대동강이 패수라 하며 이것이 조선의 옛 국경이라 하니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왜냐하면, 평양을 한 곳으로 정하여 두고 패수의 위치를 따지려고 하니 늘 사적을 쫓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이 되면 부여와 읍루 옥저에 흡수되었다. 부여의 다섯 부족과 옥저의 네 부족은 혹은 물길로 혹은 말갈로 혹은 발해로 혹은 여진으로 변하여 갔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일본 쇼무 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이어받았다"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한사군의 반은 요동에 반은 여진에 있었고 우리나라의 땅 역시 영토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고증할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패수라 불리는 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도 지금의 평양 만을 기준으로 하여 패수의 위치를 생각하였다. 이는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국 사람들이 요동의 동쪽에 있는 강을 모두 그저 패수라고 불러서 그 때마다 위치가 어긋나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그 경계 안으로 넣고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의 위치를 정해야 옛 영토가 명확해 지고 옛 영토가 명확해 져야 옛날과 지금의 사실이 부합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사군의 땅은 요동 뿐만 아니라 여진의 땅도 들어가야만 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한서지리지》에는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고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년) 사군을 합하여 2부로 재편하였는 기록이 있고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2부를 다시 2군으로 재편하였다. 현도 3개 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개 현에 안시가 있으며 따로 떨어져 있는 진번까지 장안에서 7천 리이고 임둔까지 장안에서 6천1백 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김륜의 말처럼 (한사군이 모두) 우리나라 땅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 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이 되면 부여와 읍루 옥저에 흡수되었다. 부여의 다섯 부족과 옥저의 네 부족은 혹은 물길로 혹은 말갈로 혹은 발해로 혹은 여진으로 변하여 갔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일본 쇼무 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이어받았다"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한사군의 반은 요동에 반은 여진에 있었고 우리나라의 땅 역시 영토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고증할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패수라 불리는 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도 지금의 평양 만을 기준으로 하여 패수의 위치를 생각하였다. 이는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국 사람들이 요동의 동쪽에 있는 강을 모두 그저 패수라고 불러서 그 때마다 위치가 어긋나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그 경계 안으로 넣고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의 위치를 정해야 옛 영토가 명확해 지고 옛 영토가 명확해 져야 옛날과 지금의 사실이 부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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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봉성은 옛날에 평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기씨 위씨 고씨가 도읍으로 삼은 곳 모두가 제각기 평양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당서》의 〈배구전〉은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고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가 4 군을 나누었다고 하면서 "고죽국의 땅은 지금의 영평부"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광령현은 예전에 기자묘가 있었고 머리에 관을 쓴 인물상을 빚어 모셔 두었는데 명나라 가정제 시기에 전쟁에 휘말려 불탔다고 한다. 광령현도 사람들 중에는 평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금사》와 《문헌통고》 두 책 모두 광령과 함평이 모두 기자의 봉토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있어 이를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영평부와 광령현 사이 어디쯤이 또 다른 평양 가운데 한 곳이 된다. 《요사》는 "발해의 현덕부는 원래 조선의 땅이다. 기자가 이곳에 평양성을 지었다. 요나라가 발해를 무너뜨렸을 때 동경으로 삼았고 지금은 요양현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이런 것을 바탕으로 추론하면 요양현도 또 다른 평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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