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도강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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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강을 건너 강가에 닿으니 갈대며 억새가 비단결 같이 덮혀 아래에 있는 흙이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이 강둑 아래에서 앞다투어 갈대며 억새를 배고 배 위의 돗자리를 부지런히 주워 (사신 일행이 설 자리를 만들어) 펼쳐 놓으려 하였다. 배여 나간 갈대 뿌리는 창처럼 날카로웠고 그 밑엔 검은 흙이 두터운 진흙을 이루고 있었다. 정사부터 그 아래 사람들이 모두 갈대, 억새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어찌할 줄 몰랐다. "사람과 말 가운데 먼저 도착한 자는 어디로 갔는가?"하고 물으니 좌우에서 "모르겠습니다" 한다. 이어서 "방물은 무사한가?"하고 물으니 역시나 "모르겠습니다"하고는 멀리 구룡정이 있는 모래톱을 가리키며 "일행 중에 사람과 말 태반이 아직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저기 개미떼 처럼 보이는 것이 그들입니다" 한다.
멀리 있는 의주를 보니 한 조각 홀로 서있는 성인데 명주 한 필이
이때 양쪽 강에서 합쳐진 물이 넘쳐 가운데는 뚝 떨어진 섬이 되었다. 사람과 말이 먼저 내린 곳은 잘못 된 곳으로 원래 내려야 할 곳과 5 리나 떨어져 있었고 돌아가는 배도 없었다. 양쪽 배의 선원들에게 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라고 엄한 명령을 보냈지만 되돌아가려면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야 해서 하루에 될 일이 아니었다. 사신들이 모두 성급히 화를 내며 배의 운항을 책임진 의주 군교의 죄를 묻고자 하였으나, 이번엔 (명령을 집행할) 군뢰가 없다. 군뢰들 역시 먼저 내렸는데 중간에 섬이 되어 버린 곳에서 잘못 내렸기 때문이다. 부방 비장 이서구가 분을 참지 못하고 부방 마두를 시켜 의주 군교를 잡아들였다. 엎드리게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세워 둔 채로 볼기를 반쯤 내리게 하고 말채찍으로 너다섯 대 정도 때렸다. 붙잡아 들이라 명령을 외치자 즉각 거행되었다. 의주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지 춤을 붙잡은 채 섰고, 횟수를 외치고 답하며 매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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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우리 나라 임진강 만큼 넓었다. 잡초가 무성하고 주위에 그물을 쳐 호랑이의 침범을 막았다. 의주의 창군이 곳곳에서 나무를 배어 벼락 같은 소리가 먼 들판에 퍼졌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보니 산세는 밝고 물은 맑았다.
지금의 청나라가 (후금 시절에 당시
노숙을 하며 행차하는데 때로는 역관 셋이 한 천막에 함께 묵고 때로는 다섯이 한 장막에 함께 묵었다. 통역과 군졸, 말을 모는 사람은 다섯 씩 또는 열 씩 냇가에서 물 축이고 나무에 기대며 서로 모닥불을 쬐었다. 사람 소리며 말 울음이 성과 촌 사이에서 왁자지껄 하니 의주 상인
의주에서 가장 건실한 군뢰를 가려 뽑아 (경비를 서는) 조례로 합류한 일행은 일도 가장 많이 하였고 밥도 가장 많이 먹었는데 그 치고 받고 하며 사람을 부리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웠다. 푸른 운문단에 전립을 안에 쓰고 그 위로 고정립을 헝클어지듯 걸치고 봉긋한 갓 위에 붉게 물들인 실을 매달았으며 늘어진 실 앞으로 금실로 수 놓은 용(勇)자가 하나 붙어 있었다. 짙푸른 베옷 위로 소매 좁은 전복을 입고 그 위로 검붉은 배자를 또 겹친 뒤 허리에 남방사주 전대를 차고 어깨에는 붉은 비단 실로 만든 대융을 걸쳤는데 발에는 구멍 많은 삼으로 지은 신을 신었다. 그
각 방에서 작은 일이라도 시킬 것이 있으면 바로 군뢰를 부르는데 군뢰는 못들은 척 하다가 수십 차례를 연달아 불러야 구시렁거리며 높은 소리로 응답한다. 첫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려 치면 단번에 말에서 내려 돼지가 달리고 소가 숨을 헐떡이듯 달려오는데, 나발이며 군령판, 받아 적을 붓과 벼루 등을 한쪽 어깨로 매고 다른 손에는 몽둥이를 질질 끌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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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임신. 아침에 비 조금 정오 무렵 갬.
각 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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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련성을 출발하여 30 리를 가니 금석산 밑의 중화에 다달았다. 30리를 더 가 총유에서 노숙하였다.
새벽이 되어 안개를 무릅쓰고 출발하였다. 상판사의 마두 득룡이 다른 말 모는 사람
강세작의 할아버지 강림은 양호의 휘하로
세작도 묶인 채 큰 바위 아래 앉았는데 세작을 묶었던 자가 잊어버리고 가버렸다. 세작이 조선 병사를 보고 풀어달라고 하니 조선 병사는 서로 곁눈질을 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세작은 자신의 등을 바위에 대고 갈아 포박
스스로 생각해 보니 중원으로 가는 길은 끊겼고 머리를 짧게 깎이고 청나라의 옷을 입고 사느니 동쪽의 조선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금석산에 숨었다. 양을 잡아
득룡은 가산 사람으로 올해 사십세인데 연경을 드나들기를 30여 차례나 하였다. 중국어를 가장 잘하여 행차에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도 득룡이 없으면 해결할 자가 없었다. 자신이 원래 속한 가산은 물론이고 의주와 철산 등 여러 부에서 중군을 지내고 지금은 가선대부이다. 매번 사신 행차가 있으면 본군인 가산에 연락하여 득룡의 가족을 가두어 두는데 혹시나 득룡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이를 보아도 그의 재능을 알 수 있다. 세작이 처음 조선에 왔을 때 득룡의 할아버지 집에 손님으로 있었는데 이때 서로 조선 말과 중국어를 배웠다고 한다. 득룡이 중국어를 잘하는 것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며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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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晝伏夜行(주복야행):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길을 다님.
* 鳳凰城(봉황성): 옛 고구려 시절 오골성이 기원인 산성.
* 廣寧(광령): 광령현. 중국
* 未幾(미기): 오래지 않아.
* 薙髮左衽(치발좌임): 머리를 깍이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되는 일. 청나라의 복색을 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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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산을 바라보니 마치 온전히 돌로 만든 듯 하였다. 땅에서 우뚝 솟아 올라 섰는데 손바닥에서 엄지며 손가락이 일어선 것 같기도 하고, 반쯤 핀 부용 같기도 하고, 뭉개 구름 같기도 하였다. 수려하고 날카롭게 깍인 모양새가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지만 흠이라면 맑기와 윤기가 부족하였다. 이를테면 우리 서울의 삼각산이 금강산 보다 낫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금강산은 깊은
내가 일찌기 신원발과 함께 단발령에 올라 금강산을 바라본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이라 하늘은 짙푸르고 석양이 비스듬히 비치는데 하늘로 닿는 줄기엔 빼어난 색이 없고 산등성이도 윤기가 나지 않아 이것이 (그렇게 남들이 치켜세우던) 금강산인가 하고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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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가 드넓고 평탄한데 비록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곳곳에 땔나무를 배어 내고 대패질을 한 잔해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소 발굽 자국과 수레 자국이 거침없이 풀 사이를 지난 것을 보니 이미 책문 근처인 것을 알 수 있었고 주민들이 평소에 책문 밖을 나와 돌아다니는 것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말을 달려 일곱 여덟 리를 가니 책문 밖에 닿았다. 양이며 돼지가 산을 두를 지경이었고 아침밥 짓는 연기가 푸르게 감겨
책문은 듬성듬성 나 있는 풀로 덮여
은자의 무게를 확인하고 인원을 점검하는데 모여든 호인들이 물었다. "당신들 서울에서 몇 일이나 걸렸으며 오는 길에 내린 비는 피하였소? 집안은 두루 평안하오? (무역할 자금인) 포은은 받아 왔소?" 사람 마다 한 마디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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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문 밖으로 돌아가 책문 안을 바라보니 모여 있는 민가들 모두 들보 다섯을 써 높게 올렸고 지붕은 새를 엮어 올렸으며 지붕 마루는 둥글게 올라
나는 크게 반성하며 "질투가 나는구나. 내가 원래 성격이 담백하여 시기나 질투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었는데 이제 국경 밖으로 한 걸음 내뎌 만분의 일을 보았을 뿐인데도 망령된 마음이 이와 같이 일어나니 어찌하랴. 이는 바로 (이제껏) 본 것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와 같은 혜안이라면 시방세계를 두루 살펴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모든 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고 질투함이 없을 것을."하고 생각하였다. 장복을 돌아보며 "너는 다음 생에 중국에서 태어나면 어떻겠느냐?" 하니 "중국은 오랑캐라 쇤네는 싫습니다."하고 대답한다. 마침 맹인 한 명이 비단 주머니를 어깨에 두르고 손으로 월금을 연주하며 지나간다. 나는 크게 깨달아 "저것이야 말로 평등한 눈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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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서
그 중 한 호인이 갑자기 상삼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욕을 하자 득룡이 수염을 부르르 떨고 눈을 부라리며 곧장 그 앞으로 가서 가슴팍을 부여잡고 주먹으로 때리려 하였다. 호인 무리를 돌아보며 "이 무뢰배 녀석이 이토록 무례하여 재작년에는 겁도 없이 어르신의 서피항을 훔쳤고, 또 작년에는 이 어르신께서 주무시는데 내 허리춤의 칼을 풀어 칼집을 훔치고 내가 차고 있던 주머니도 훔쳤겠다. 내가 이 놈 소행을 알고 늙은 주먹으로 한 방 먹여서
책문 수직포고 2 명, 갑군 8 명 - 각 백지 10권. 작은 담뱃대 10개, 부시 쇠 10개, 봉초 담배 10봉. 봉성장군 2 원, 세관 1 원, 어사 1 원, 만주 장경 8 인, 가출 장경 2 인, 몽고 장경 2 인, 영송관 3 인, 대자 8 인, 박씨 8 인, 가출 박씨 1 인, 세관 박씨 1 인, 외랑 1 인, 어역 2 인, 필첨식 2 인, 포고 17 인, 가출 포고 7인, 세관 포고 2 인, 분두 포고 9 인, 갑군 50 명, 가출 갑군 36 명, 세관 갑군 60 명, 합 102 인 - 장지 156 권을 나누어 줌, 청서피 140 장, 작은 담배 상자 580 갑, 봉초 담배 800 봉, 가는 담뱃대 74 개, 팔면은목 담뱃대 74 개, 주석으로 만든 장도 37 자루, 초도 284 자루, 부채 280 자루, 대구어 74 마리, (가발의 일종인) 다래, 가죽으로 만든 장니 7 벌, 환도 7 자루, 은장도 7 자루, 은 담뱃대 7 개, 주석으로 만든 긴 담뱃대 42 자루, 붓 40 자루, 먹 40 개, 부시 쇠 262 개, 청청 다래 2 벌, 특별히 잘 만든 연죽 35 개, 기름 먹인 종이 2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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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내원과 정 진사와 함께 봉황산 구경을 나섰다. 예닐곱 리를 가니 전면이 보였는데 참으로 기이하게 깍여 있었다. 산 속에 안시성의 옛 터가 있고 지금도 성 가퀴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사실이 아니다. 삼면이 모두 끊어져 가파르고 오직 남쪽 한 면만 그나마 조금 평탄한데 둘레가 수백 보에 불과하여 여기엔 작은 성곽을 두를 수 있을 뿐이어서 그 옛날 대군에 맞선 땅이라고 할 수 없다. 아마도 고구려 시절 작디 작은 보루였을 것이다. 일행이 서로 끌어가며 큰 버드나무 밑으로 들어가니 시원하였다. 벽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는데 돌을 갈아 만든 뚜껑을 덮고 그 양 옆으로 구멍을 내고 물 길을 그릇을 매달아 두었다. 이로서 사람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 흙먼지를 막는다. 또한 물의 성질은 본래 음이니 (햇볕과 같은) 양의 기운이 닿지 않도록 막아야 물을 살려 기를 수 있다. 우물 덮개 위로 도르래가 있고 두레박 둘을 늘어뜨려 버드나무에 묶어 두었다. 이와 같이 두레박을 매어 놓으니 하나가 올라가면 하나가 내려가 하루 종일 물을 길러도 사람의 힘이 들지 않는다. 수통은 모두 쇠 테두리를 두르고 쇠못으로 단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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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광경에 여행길 고달픔을 까맣게 잊었다. 두 사람은 새로 단장한 불당을 구경한다고 나를 버리고 가버렸다. 10여 명이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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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돌로 만든 비석 두 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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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에 강영태의 집이 있다. 영태는 23 세로 스스로를 민가라 부르는 한인이다. 민가라 불리는 사람들을 만주족은 기하라고 하였다. 희고 밝은 피부에 잘
영태의 집은 물을 뿌려 청소하여 두었고 다채롭게 치장하여 가지가지 물건들이 자리 잡고 있는데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마루 위의 깔개는 모두 용과 봉황을 그린 모직 담요로 의자며 걸상을 덮었고 이불은 모두 비단이었다. 뜰 가운데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만든 차일을 치고 사방으로 누르스름한 발을 걸어 내렸고, 그 앞으로 석류 대여섯 그루가 늘어서 있었다. 그 가운데 흰색 석류가 만개하였다. 또 다른 나무 한 그루는 잎이 동백처럼 생겼는데 열매는 탱자와 닮았다. 이름을 물으니 무화과라고 한다. 쌍쌍이 꼭지를 나란하게 하여 열매가 달리는데, 꽃 없이 열매를 맺어 그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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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 조정진이 와서
부사는 나 보다 두 살 위로 내 할아버지와 부사의 할아버지는 동창으로 함께 과거 공부를 하였고 (동창들의 명단을 적은 목록인) 동연록에 함께 실려 있다. 내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당상관을 할 때에 부사의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시랑으로 있었다. 서로 옛날에 함께 있던 일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그 때 여덟 아홉 살이었는데 곁에 있으니 옛 정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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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천천히 문 밖으로 걸어 나가니 번화하고 수려하다. (변방인 책문이 이런 모습이니) 황성에 도착하면 어떨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중국의 성대함이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지경이다. 길 좌우에 있는 시장의 가게들은 모두 기와를 맞닿으며 밝게
가게에 있는 물건은 모두 내지에서 온 상품들이다. 변문은 벽지이자 오지인데도 귀감이 될 만한 것이 있다 하겠다. 또 다른 집에 들어가 보니 꾸밈은 강영태의 집보다 화려한데 구조와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집과 방의 지어진 모습이 수백 걸음 안의 땅에 길이와 넓이를 적절히 맞추어 평탄하고 반듯하게 깍아
길에서 (중추부의) 동지인 이혜적을 만났다. 통역관인데 3품 당상관이다. 이군이 웃으며 "궁벽한 시골에서 볼 만한 것이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황성에 가더라도 이 보다 못할 것 같소."하고 대답하였다. 이군은 "하기사 크고 작고나 사치스럽고 검소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모습은 여기나 거기나 거진 같습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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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모두 벽돌로 짓는데 벽돌은 길이 1 자, 넓이 5 치로 둘을 합치면 정사각형이 되며 두께는 2 치이다. 하나 하나가 모두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각도가 틀어지거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거나 몸이 뒤틀린 것은 한 장이라도 쓰지 않아야 집 전체를 정교하게 지을 수 있다. 따라서 한 장 마다 치수가 어긋나 들쭉날쭉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각자를 써서 검사한 뒤 도장을 찍기 때문에 (규격을 맞추기 위해) 갈고 닦고
기와를 얹는 방법은 더욱 본받을 만 하다. 기와의 모양은 커다란 대나무와 같은 원통을 4등분 한 것처럼 생겼다. 민가에서는 원앙와를 쓰지 않고 서까래 위로 산자를 짜 넣지 않으며 바로 삿자리를 몇 겹 깐다. 이후에 기와를 엎어 놓는데 삿자리 위로 진흙을 바르지 않는다. (같은 모양의 기와를) 하나는 엎어 놓고 하나는 뒤집어 놓아 서로 암수가 되며 석회를 갠 흙으로 이어서 비늘처럼 얽혀 붙인다. 참새나 쥐가 구멍을 뚫을 수 없고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약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와 얹는 법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집 위로 진흙을 두텁게 발라서 위가 무겁고 벽과 담을 벽돌로 짓지 않으니 기둥이 의지할 곳이 없어 아래가 허약하다. 기와가 너무 커서 기와가 너무 휘어져 잇고 너무 휘어져 있다 보니 빈 곳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진흙으로 채운다. 진흙이 너무 무거우면 용마루가 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진흙이 마르면 기와가 들떠서 비늘이 흘러 내리며 틈이 생겨 바람과 빗물을 막지 못하고 참새가 구멍을 내고 쥐가 숨어들고 뱀이며 고양이까지 날뛰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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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성은 이제 새로 쌓고 있다. 누군가 여기가 옛 안시성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말로 큰 새를 "안시"라고 하는데 지금도 시골에서는 종종 봉황을 안시라고 하고 뱀을 "백암"(배암)이라고 한다. 수당 시절의 나랏말로 고쳐 부르면 봉황성이 안시성이고 사성은 백암성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 세상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이라고 하는데 (당나라) 황제의 눈을 쏘아 맞추었다. 황제가 병사를 성벽 아래에서 물리면서 비단 백필을 하사하여 안시성주의 견고한 수비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삼연 김창흡은 동생 노가재 김창업이 연경에 가게 되자 시를 지어 "천추에 대담한 양만춘 규염(당태종)을 쏘아 눈동자를 맞추었지"라고 하였고, 목은 이색은 〈정관음〉에서 "주머니 속에 든 것과 같다고 여겼는데 흰 깃털에 검은 꽃이 떨어질 줄이야"라고 하였다. 검은 꽃은 눈동자를 흰 깃털은 화살을 말한다. 두 어르신이 노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해 오던 옛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당태종은 천하의 병사를 움직였는데 작은 성곽하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돌렸다는 이야기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김부식은 이 역사를 기록하였지만 아쉽게도 (안시성주의) 이름을 밝히지 못하였다. 어찌 김부식이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역사만 참고하여 글을 가려 뽑아 사실로 삼았겠는가. (당나라의 문인인) 유공권의 소설까지 인용하여 (당태종이) 포위 당하였다가 물러간 일의 증거로 삼았는데, 《당서》나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모두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이는 중국의 기록이 (부끄러운 사실을) 피한 것이라 의심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당태종이 안시성에서 눈을 잃은 것을 고증하는 것은 비록 불가능하더라도, 이 성을 안시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아니 할 수 없다. 《당서》에서는 안시성이 평양에서 오백리였다고 하고 봉황성은 또한 왕검성이라고도 하는데 《동국여지지》는 또한 봉황성의 옛 이름이 평양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 고증할 수 없어 (《동국여지지》에서 말하는 평양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동국여지지》는 옛 안시성이 개평현 동북 칠십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개평에서 동쪽으로 삼백 리에 수암하가 있고 수암하에서 동쪽으로 이백 리에 봉황성이 있으니 (지금의 개평이 안시성이고) 봉황성이 옛 평양이라면 《당서》에서 말하는 오백 리와 서로 부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로지 지금의 평양 만을 기자가 도읍한 평양이라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가 설치하였다는) 정전이 있다고 굳게 믿고, 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굳게 믿으니 만일 봉황성이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라서 '요동에도 평양이 있다니 무슨 해괴한 소리냐'고 질책할 것이다. 홀로 요동이 본래 조선 땅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신과 예맥같은 동이의 여러 나라는 위만조선에 복속하였다. 또한 오랄, 영고탑, 후춘이 본래 고구려의 땅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딱하다. 후세에 경계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여 한사군의 땅을 모조리 압록강 안으로 넣고 사실에 끼워 맞추다 보니 구구한 이견을 배척하고 그 안쪽에서만 패수의 위치를 찾으려 한다. 누구는 압록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청천강이 패수라 하고 누구는 대동강이 패수라 하며 이것이 조선의 옛 국경이라 하니 저절로 눈쌀이 찌푸려진다. 왜냐하면, 평양을 한 곳으로 정하여 두고 패수의 위치를 따지려고 하니 늘 사적을 쫓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이어받았다"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한사군의 반은 요동에 반은 여진에 있었고 우리나라의 땅 역시 영토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고증할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패수라 불리는 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도 지금의 평양 만을 기준으로 하여 패수의 위치를 생각하였다. 이는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국 사람들이 요동의 동쪽에 있는 강을 모두 그저 패수라고 불러서 그 때마다 위치가 어긋나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그 경계 안으로 넣고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의 위치를 정해야 옛 영토가 명확해 지고 옛 영토가 명확해 져야 옛날과 지금의 사실이 부합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사군의 땅은 요동 뿐만 아니라 여진의 땅도 들어가야만 한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한서지리지》에는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고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한 소제 시원 5년(기원전 82년) 사군을 합하여 2부로 재편하였는 기록이 있고 원봉 원년(기원전 80년) 2부를 다시 2군으로 재편하였다. 현도 3개 현에 고구려가 있고 낙랑 25개 현에 조선이 있고 요동 18개 현에 안시가 있으며 따로 떨어져 있는 진번까지 장안에서 7천 리이고 임둔까지 장안에서 6천1백 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김륜의 말처럼 (한사군이 모두) 우리나라 땅에 있었다고 보기 힘들고 당연히 지금의 영고탑 등지 까지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진번과 임둔은 한나라 말이 되면 부여와 읍루 옥저에 흡수되었다. 부여의 다섯 부족과 옥저의 네 부족은 혹은 물길로 혹은 말갈로 혹은 발해로 혹은 여진으로 변하여 갔다. 발해 무왕 대무예는 일본 쇼무 천황에게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습을 이어받았다"라고 한 것을 살펴보면 한사군의 반은 요동에 반은 여진에 있었고 우리나라의 땅 역시 영토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고증할 증거가 된다. 그러나 한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패수라 불리는 강의 위치는 일정하지 않았고 또 우리나라 선비들도 지금의 평양 만을 기준으로 하여 패수의 위치를 생각하였다. 이는 별다른 이유 없이 중국 사람들이 요동의 동쪽에 있는 강을 모두 그저 패수라고 불러서 그 때마다 위치가 어긋나고 사실과 부합하지 않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옛 영토를 알려면 먼저 여진을 그 경계 안으로 넣고 패수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 패수의 위치를 정해야 옛 영토가 명확해 지고 옛 영토가 명확해 져야 옛날과 지금의 사실이 부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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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봉성은 옛날에 평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기씨 위씨 고씨가 도읍으로 삼은 곳 모두가 제각기 평양이라고 불렸을 것이다. 《당서》의 〈배구전〉은 고구려가 본래 고죽국이고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가 4 군을 나누었다고 하면서 "고죽국의 땅은 지금의 영평부"라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광령현은 예전에 기자묘가 있었고 머리에 관을 쓴 인물상을 빚어 모셔 두었는데 명나라 가정제 시기에 전쟁에 휘말려 불탔다고 한다. 광령현도 사람들 중에는 평양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금사》와 《문헌통고》 두 책 모두 광령과 함평이 모두 기자의 봉토였다고 언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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