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도강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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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후삼경자인가? 지나간 길과 날씨를 기록하여야 하므로 햇수와 달수, 날짜를 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후라고 덧붙였는가? 숭정 기원 이후라는 뜻이다. 어찌하여 삼경자인가? 숭정 기원 이후 세 번째 맞이하는 경자년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숭정이란 연호를 생략하였는가? 압록강을 건너려 하므로 꺼려지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꺼리는가? 강 밖은 청나라이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나라의 새로운 역법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숭정 연호를 사용할 수 없다. 어찌하여 나는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가? 명나라의 황제가 중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 나라를 책봉한 윗나라이다.
숭정 70년 의종열황제는 사직을 잃었다. 명나라 황실이 망한 지도 약 130여 년이 흘렀는데 어찌하여 지금 그 연호를 쓰는가? 청나라가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어 옛 왕의 제도가 변하여 오랑캐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쪽 땅 수천 리를 감싸는 강이 나라의 경계가 되어 홀로 옛 왕의 제도를 지키니 이것으로 명나라 황실의 유산이 압록강 동쪽에서 존속하고 있다. 비록 힘이 부족하여 오랑캐를 물리쳐 없애고 엄히 처벌하여 중원을 바로잡지는 못하지만 이로서 앞선 왕조의 옛 제도나마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숭정 연호를
숭정 백오십육년 계유 열상외사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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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初留龍灣義州舘。 十日, 方物盡到, 行期甚促, 而一雨成霖, 兩江通漲。 中間快晴, 亦已四日, 而水勢益盛。 木石俱轉, 濁浪連空, 盖鴨綠江, 發源最遠故耳。 按唐書, 高麗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故號鴨綠江。 所謂白山者, 卽長白山也。 山海經, 稱不咸山, 我國稱白頭山。 白頭山, 爲諸江發源之祖, 西南流者爲鴨綠江。 皇輿考云, 「天下有三大水, 黃河, 長江, 鴨綠江也。」 兩山墨談, 陳霆著, 云, 「自淮以北爲北條, 凡水皆宗大河。 未有以江名者, 而北之在高麗曰鴨綠江。」 盖是江也, 天下之大水也。 其發源之地, 方旱方潦, 難度於千里之外也。 以今漲勢觀之, 白山長霖, 可以推知。 况此非尋常津涉之地乎。 今當盛潦, 汀步艤泊, 皆失故處, 中流礁沙, 亦所難審。 操舟者少失其勢, 則有非人力所可廻旋。 一行譯員迭援故事, 固請退期, 灣尹 李在學, 亦送親裨, 爲挽數日。 而正使堅以是日, 爲渡江之期, 狀啓已書塡日時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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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압록강을
《당서》를 보면 고려의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는 데 물 색이 오리 머리와 같다고 하여 압록강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른바 백산은 장백산이다. 《산해경》에서는 불함산이라 하고, 우리 나라에선 백두산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여러 강의 발원지인데 서남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압록강이다. 《황여고》는 "천하에 큰 강이 셋 있는데 황하, 장강, 압록강"이라고 하고 있다. 진정이 지은 《양산묵담》은 "회수 이북의 물은 북쪽의 지류로 모두 대하로 흐른다. 강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으나 북쪽에 있는 것은 고려에서 압록강이라 한다"고 적었다.
일행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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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산에는 비가 올 듯 하였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질한 다음 여행길 차림을 정돈하였다. 집에 보낼 편지와 여러 곳에 두루 답하는 편지를 손으로 봉하여 서울 가는 파발 편에 부쳤다.
여러 비장들은 이미 군복을 입고 전립을 썼다. 전립 (가운데 봉긋 솟는 부분인) 운월을 꽃모양 은으로 장식하였고 공작 깃을 달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 전대를 두르고 환도를 찼고, 손아귀로 단편을 들었다. 서로 바라보며 웃으며 "차림새가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상방 비장이었던 참봉 노이점은 철릭을 입으니 더욱 든든한 호걸로 보인다. 철릭은 사투리로 천익이라고 하는데, 비장은 우리 쪽 국경까지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소매가 좁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정진사도 상방 비장이었는데 웃으며 맞이하며 "오늘은 참말로 강을 건너나 봅니다." 하였다. 노 참봉도 덧붙여 "이제 강을 건너나 봅니다." 하기에 나는 모두에게 "그렇죠, 그렇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열흘을 객사에 머물고 보니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뿐으로 모두
역관 김진하는 2품 당상관으로 연로하고 병도 있어 뒤에 남아 돌아가기로 하였다. 정중히 작별을 고하는데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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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밥을 먹고 먼저 홀로 말을 몰아 나왔다. 말은 밤색 털에 이마가 하얗고 정강이는 홀쭉한데 발굽이 높았다. 날씬한 머리에 짧은 허리, 두 귀가 쫑긋하니 정말 만 리라도 달릴 것만 같았다. 창대가 앞에서 끌고 장복이가 뒤에서 밀며 가는데 안장 양쪽으로 주머니를 걸었다. 왼 편엔 벼루가 들었고 오른 편에는 거울을 넣었다. 붓은 두 자루 먹은 한 개였고, 작은 공책 네 권 한 묶음을 기록을 적기 위해 담았다. 행장이 가벼우니 짐 검사가 엄하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다.
성문에 다다르기 전에 소나기가 한 바탕 쏟아졌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채찍으로 길을 재촉하여 성곽에 다다라 말에서 내렸다. 홀로 성루에 올라 성 밑을 바라보니 창대만 홀로 말을 지키며 서있고
동쪽을 보니 용철의 여러 산들이 보이는데 모두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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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유혜풍이 심양에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나는 몇 차례 이 시를 읇다가 "이렇듯 국경을 넘는 사람이 되고 보니 무심결에 이런 시나 읇는구나. 어찌 물놀이 배며 퉁소와 북이 있을 것인가"하고는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 형가가 역수를 건널 때 출발을 미루었다. 태자 단은 그것을 보고 마음을 돌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진무양을 먼저 보내고자 하였다. 형가는 울분을 토하며 "제가 머무르려 하는 것은 함께 갈 제 친구를 기다리려는 것입니다"하였다. 형가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가 알랴?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가리켜 멀리 살았다고 하면서 형가의 심정을 위로한 것이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왔다면 또 얼마나 두려웠겠나? 그러니 "오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형가로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세상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라도 알아볼 것이다. 그 사람은 키가 7척 2촌(240 센티미터)에 눈썹이 두텁고 수염은 녹색이며 하체가 우람한데 상체는 가냘플 것이니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나는 혜풍의 이 시를 읽으며 이와 같은 (실제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거론하는) 뜻을 알았다. 혜풍의 이름은 득공이다. 다른 호로 영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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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의 행차에 앞서 전배들이 길을 떨치며
잠시 부사가 성을 나서는 것을 기다렸다가 고삐를 틀어 천천히 맨
하인은 저고리를 뒤집고 바지 속을 뒤졌고 비장과 통역은 행장과 짐 자루, 옷 보자기를 풀어 보이게 하였다. 강가에 가죽 상자며 종이 상자가 널브러지고 풀섶에서 다투어 자신을 수습하면서 서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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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다과를 내놓았으나
여럿이 함께 노젓는 소리를
홍군은 "감히 어찌하여 그런지 여쭙습니다" 하였고, 나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고 하지. 서양인들은 기하학을 증명하면서 선 하나 점 하나도 논증한다고 하더군. 그 미묘함을 다하는 것이 부족하여 (선이 길이만 있고 면적이 없다는 것을) 빛이 없는 사이에 있는 빛이라고 한다고 하니, 불교 식으로 말하면 둘이 붙어 있지도 않고 떨어져 있지도 않다는 것이지. 그러므로 양쪽의 사이가 바로 가장 좋은 방도이니 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할 수 있을 것이네. 정나라의 자산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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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강을 건너 강가에 닿으니 갈대며 억새가 비단결 같이 덮혀 아래에 있는 흙이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이 강둑 아래에서 앞다투어 갈대며 억새를 배고 배 위의 돗자리를 부지런히 주워 (사신 일행이 설 자리를 만들어) 펼쳐 놓으려 하였다. 배여 나간 갈대 뿌리는 창처럼 날카로웠고 그 밑엔 검은 흙이 두터운 진흙을 이루고 있었다. 정사부터 그
멀리 있는 의주를 보니 한 조각 홀로 서있는 성인데 명주 한 필이 누여있는 것 같았고 성문이 바늘 귀 만하게 보였다. 그 사이로 하늘 빛이 한 점 샛별처럼 나오고 있었다. 큰 뗏목이 물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시대가 "웨이"하고 소리쳤다. 중국어로 상대를 부를 때 웨이라고 하는 것은 존칭이다. 뗏목에 있던 사람이 일어나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였다. "당신들 때를 잘못 맞추었소. 어찌하여 대국에 조공을 왔는 지 모르겠으나 더운 날씨가 먼 길에 계속 되니 참 고생이 많소" 한다. 다시 "당신들은 어디 사는 사람들이고 어디서 나무를 배었소?" 하고 물으니, "우리는 봉성에 사는데 장백산에서 나무를 배어 오는 길이오" 한다. 이야기를 다 나누기도 전에 뗏목은 저 멀리 흘러 내려갔다.
이때 양쪽 강에서 합쳐진 물이 넘쳐 가운데는 뚝 떨어진 섬이 되었다. 사람과 말이 먼저 내린 곳은 잘못 된 곳으로 원래 내려야 할 곳과
두 배의 선원들에게 명령하여 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끌어내라 하였으나 물살이 거세어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물러나니 명령이 엄하여도 조금도 시행되지 않았다. 작은 배가 물가로 나는 듯이 대더니 군뢰들이 삼방의 가마와 말을 대령하고 온다. 장복이가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 구나. 정말 다행이다." 하고 소리쳐 불렀다. 정사와 부사가 행장을 살펴 보았는데 모두 별 탈 없었다. 비장과
십 리를 가서 삼강에 다다랐다. 물이 명주 처럼 맑고 다른 이름으로 애자하라 부른다. 어디에서 발원하였는 지 알 수 없으나 압록강에서 불과 십 리 떨어져 나란히 흐르는데 홀로 물결이 잔잔하다. 두 강의 발원지 상황이 서로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강 양쪽에 쪽배가 있는데 생김새는 우리 나라 물놀이 배와 같으나 길이와 폭이 모두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재질도 보다 단단하고 촘촘한데 배를 부리는 이는 모두 봉성 사는 사람들이다. 3일을 기다리니 양식이 떨어져 굶게 생겼다. 원래 이 강은 저들과 우리가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역학을 대국에 보내 외교 하는 왕래에 시간이 없다는 자문을 건넸다. 이에 봉성 장군이 배를 내어 주었는데 배는 수심이 깊은 곳에 정박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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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우리 나라 임진강 만큼 넓었다. 잡초가
지금의 청나라가 (후금 시절에 당시 명나라였던) 요동을 함락하자 진강 백성들이 차마 변발을 할 수 없어 일부는 모문룡에게 갔고 일부는 우리 나라에 왔다. 우리 나라에 온 사람들은 훗날 청나라가 모두 요동으로 데려갔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다수가 죽고 일부는 난민이 되어 바다를 떠돌았다. 이곳이 빈 땅이 된 지도 백여 년이 되어가고 막연히 보며 지나가니 산은 높고 물은 맑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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