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도강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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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후삼경자인가? 지나간 길과 날씨를 기록하여야 하므로 햇수와 달수, 날짜를 셈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후라고 덧붙였는가? 숭정 기원 이후라는 뜻이다. 어찌하여 삼경자인가? 숭정 기원 이후 세 번째 맞이하는 경자년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숭정이란 연호를 생략하였는가? 압록강을 건너려 하므로 꺼려지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꺼리는가? 강 밖은 청나라이기 때문이다. 천하가 모두 청나라의 새로운 역법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숭정 연호를 사용할 수 없다. 어찌하여 나는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가? 명나라의 황제가 중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우리 나라를 책봉한 윗나라이다.
 
숭정 70년 의종열황제는 사직을 잃었다. 명나라 황실이 망한 지도 약 130여 년이 흘렀는데 어찌하여 지금 그 연호를 쓰는가? 청나라가 중국에 들어가 주인이 되어 옛 왕의 제도가 변하여 오랑캐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쪽 땅 수천 리를 감싸는 강이 나라의 경계가 되어 홀로 옛 왕의 제도를 지키니 이것으로 명나라 황실의 유산이 압록강 동쪽에서 존속하고 있다. 비록 힘이 부족하여 오랑캐를 물리쳐 없애고 엄히 처벌하여 중원을 바로잡지는 못하지만 이로서 앞선 왕조의 옛 제도나마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 숭정 연호를 존중하여존중하면 중국을 존중할존속시킬 수 있다고 한다.
 
숭정 백오십육년 계유 열상외사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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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初留龍灣義州舘。 十日, 方物盡到, 行期甚促, 而一雨成霖, 兩江通漲。 中間快晴, 亦已四日, 而水勢益盛。 木石俱轉, 濁浪連空, 盖鴨綠江, 發源最遠故耳。 按唐書, 高麗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故號鴨綠江。 所謂白山者, 卽長白山也。 山海經, 稱不咸山, 我國稱白頭山。 白頭山, 爲諸江發源之祖, 西南流者爲鴨綠江。 皇輿考云, 「天下有三大水, 黃河, 長江, 鴨綠江也。」 兩山墨談, 陳霆著, 云, 「自淮以北爲北條, 凡水皆宗大河。 未有以江名者, 而北之在高麗曰鴨綠江。」 盖是江也, 天下之大水也。 其發源之地, 方旱方潦, 難度於千里之外也。 以今漲勢觀之, 白山長霖, 可以推知。 况此非尋常津涉之地乎。 今當盛潦, 汀步艤泊, 皆失故處, 中流礁沙, 亦所難審。 操舟者少失其勢, 則有非人力所可廻旋。 一行譯員迭援故事, 固請退期, 灣尹 李在學, 亦送親裨, 爲挽數日。 而正使堅以是日, 爲渡江之期, 狀啓已書塡日時矣
 
午後渡鴨綠江, 行三十里, 露宿九連城。 夜大雨卽止。 初留龍灣義州舘。 十日, 方物盡到, 行期甚促, 而一雨成霖, 兩江通漲。 中間快晴, 亦已四日, 而水勢益盛。 木石俱轉, 濁浪連空, 盖鴨綠江, 發源最遠故耳。 按唐書, 高麗馬訾水, 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故號鴨綠江。 所謂白山者, 卽長白山也。 山海經, 稱不咸山, 我國稱白頭山。 白頭山, 爲諸江發源之祖, 西南流者爲鴨綠江。 皇輿考云, 「天下有三大水, 黃河, 長江, 鴨綠江也。」 兩山墨談, 陳霆著, 云, 「自淮以北爲北條, 凡水皆宗大河。 未有以江名者, 而北之在高麗曰鴨綠江。」 盖是江也, 天下之大水也。 其發源之地, 方旱方潦, 難度於千里之外也。 以今漲勢觀之, 白山長霖, 可以推知。 况此非尋常津涉之地乎。 今當盛潦, 汀步艤泊, 皆失故處, 中流礁沙, 亦所難審。 操舟者少失其勢, 則有非人力所可廻旋。 一行譯員迭援故事, 固請退期, 灣尹 李在學, 亦送親裨, 爲挽數日。 而正使堅以是日, 爲渡江之期, 狀啓已書塡日時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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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압록강을 건너건넜다. 삼십 리를 행차하여 구련성에서 노숙하였다. 밤에 큰 비가 왔지만 곧 그쳤다.
 
밤에 큰 비가 왔지만 곧 그쳤다. 처음에는 의주의 객사 용만관에 머물렀다. 10일에 방물이 모두 당도하자당도하였고 일정이 촉박하여 갈 길을 서둘렀는데,서둘렀지만 큰 비가 장마로 변하는 바람에 양쪽 강이 모두 넘쳤다. 나흘이 지나 날이 개었지만개었으나 물살이 더욱 거세졌다. 나무와 돌이 함께 구르고, 흐릿한게다가 흐린 물결이 연달아곤란하게도 곤궁하게압록강을 하며채웠는데 압록강을(강을 채우니,건너는 의주가) 발원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떨어진 지점이기곳이기 때문이다.
 
《당서》를 보면 고려의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는 데 물 색이 오리 머리와 같다고 하여 압록강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이른바 백산은 장백산이다. 《산해경》에서는 불함산이라 하고, 우리 나라에선 백두산이라고 한다. 백두산은 여러 강의 발원지인데 서남 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압록강이다. 《황여고》는 "천하에 큰 강이 셋 있는데 황하, 장강, 압록강"이라고 하고 있다. 진정이 지은 《양산묵담》은 "회수 이북의 물은 북쪽의 지류로 모두 대하로 흐른다. 강이라 불릴 만한 것이 없으나 북쪽에 있는 것은 고려에서 압록강이라 한다"고 적었다.
 
이 처럼이처럼 강이란 천하의 큰 물줄기이다. 그 발원지에서는발원지는 가물기도 하고 넘치기도 하겠지만, 천 리 밖에서는밖에서 그 정도를 알기알기가 어렵다. 지금 넘치는 기세를 보니 백두산에 장마가 들었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물며 이렇게 예사롭지 않게 큰 나루터야 어떻겠는가? 지금 기세가 대단한 물살을 맞으니 물가의 배 데는 곳도 모두 쓸려 가버려 자리를 잃고 물줄기 가운데의가운데 있던 암초며 모래톱 역시 자취를 감췄다. 뱃사공이 조금만 실수라도 할 참이면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되돌릴 수 없게 된다.
 
일행 가운데 통역원이역관이 예전에 낭패를 본 일을적이 말하면서있다고 하면서 돌아가기를 간청하고 의주 부윤 이재학도 비장을 보내와 몇 일만며칠만 기다려 달라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사는 이날 강을 건너기로 마음을 굳히고 장계에 아예 일시를 못 박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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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짙은 구름이 빽빽하게 드리워져 산에는 비가 올 듯 하였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질한 다음 여행길 차림을 정돈하였다. 집에 보낼 편지와 여러 곳에 두루 답하는 편지를 손으로 봉하여 서울 가는 파발 편에 부쳤다. 아침 삼아아침으로 죽을 간략히 먹고서 나는 객사에객사로 갔다.
 
여러 비장들은 이미 군복을 입고 전립을 썼다. 전립 (가운데 봉긋 솟는 부분인) 운월을 꽃모양 은으로 장식하였고 공작 깃을 달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 전대를 두르고 환도를 찼고, 손아귀로 단편을 들었다. 서로 바라보며 웃으며 "차림새가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상방 비장이었던 참봉 노이점은 철릭을 입으니 더욱 든든한 호걸로 보인다. 철릭은 사투리로 천익이라고 하는데, 비장은 우리 쪽 국경까지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소매가 좁은 옷으로 갈아 입었다. 정진사도 상방 비장이었는데 웃으며 맞이하며 "오늘은 참말로 강을 건너나 봅니다." 하였다. 노 참봉도 덧붙여 "이제 강을 건너나 봅니다." 하기에 나는 모두에게 "그렇죠, 그렇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열흘을 객사에 머물고 보니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 뿐으로 모두 갑갑한갑갑해 마음에하며 날아서라도 갈 기세였다. 장마로 강이 넘치자 성마르고 갑갑한 마음이 점점 커졌는데, 이제 이날을 갑자기 맞고 보니 건너고 싶지 않아도 달리 방도가 없다없게 되었다. 멀리 앞길을 살피니 찌는 듯한 무더위가 정말 사람을 삶을 듯 하고, 돌이켜 고향 집을 생각하니 구름과 산이 아득히 가로막는다. 사람의 정이란심정이란 것이 이러하여 불쑥 솟아나는 후회를 다독이지 못한다.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여행길이어서 늘 "한 번은 꼭 보아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했더라도 사실 최우선은 아니다. 그래서 "오늘 강을 건넌다"고 하는 말도 그리 썩 내키지 않는 말이어서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역관 김진하는 2품 당상관으로 연로하고 병도 있어 뒤에 남아 돌아가기로 하였다. 정중히 작별을 고하는데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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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밥을 먹고 먼저 홀로 말을 몰아 나왔다. 말은 밤색 털에 이마가 하얗고 정강이는 홀쭉한데 발굽이 높았다. 날씬한 머리에 짧은 허리, 두 귀가 쫑긋하니 정말 만 리라도 달릴 것만 같았다. 창대가 앞에서 끌고 장복이가 뒤에서 밀며 가는데 안장 양쪽으로 주머니를 걸었다. 왼 편엔 벼루가 들었고 오른 편에는 거울을 넣었다. 붓은 두 자루 먹은 한 개였고, 작은 공책 네 권 한 묶음을 기록을 적기 위해 담았다. 행장이 가벼우니 짐 검사가 엄하더라도 걱정할 일이 없다.
 
성문에 다다르기 전에 소나기가 한 바탕 쏟아졌다.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채찍으로 길을 재촉하여 성곽에 다다라 말에서 내렸다. 홀로 성루에 올라 성 밑을 바라보니 창대만 홀로 말을 지키며 서있고 장복이장복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 장복이는 소각문 길 옆을 드나들었다. 위 아래를 살피려고살펴 보려고 갓을 기울여 비를 막고 손에 작은 질 그릇 (술)단지를 드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두 하인 모두 자신들의 주머니를 뒤져 26 푼을 찾았다. 우리 나라의우리나라 돈을돈은 청나라고 가져 가는 것은것이 금지되어 있어서 국경 넘어로넘어 가져 갈 수 없기 때문에 길에 버리기는 아까우니 술을 사 먹으려는 것이다. "너희들 술은 얼마나 마시느냐"고 물으니 모두 조금 밖에 마시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나는 "더먹머리 총각이나총각이라 술을 못 마시지"하고 나무라고는 스스로 위안 삼아 "먼 길에 도움이 될 것이다"하며 초연하게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동쪽을 보니 용철의 여러 산들이 보이는데 모두 만 근의근 무게의 구름을 드리웠다. 한 잔 가득 부어 첫 번째 기둥에 붓고는 나 스스로의 탈 없는 여행을 기원하였다. 또 한 잔 가득 부어 두 번째 기둥에 붓고는 장복이와 창대를 위해 기원하였다. 단지를 흔들어 보니 그래도 몇 잔 술이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땅에 부으며 말을 위해 기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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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유혜풍이 심양에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나는 몇 차례 이 시를 읇다가 "이렇듯 국경을 넘는 사람이 되고 보니 무심결에 이런 시나 읇는구나. 어찌 물놀이 배며 퉁소와 북이 있을 것인가"하고는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 형가가 역수를 건널 때 출발을 미루었다. 태자 단은 그것을 보고 마음을 돌린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진무양을 먼저 보내고자 하였다. 형가는 울분을 토하며 "제가 머무르려 하는 것은 함께 갈 제 친구를 기다리려는 것입니다"하였다. 형가의 이말도이 말도 무심결에 나온 것일 터이다. 형가가 마음을 돌렸을 지 모른다고 의심하였다고 하면 형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고 형가가 친구를 기다린다고 한 것 또한 성명이 있는 특정한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한 자루 비수를 품고 헤아릴 수 없이 강한 진나라로 들어가는데들어가려 하는데 진무양 하나도 (같이 갈 사람으로는) 이미 많다고 할 것을 다른 친구를 기다려 무엇하겠나무엇 하겠나? 한풍가를 부르고 북을 쳐서 그때까지 마음에 남았던 것을 다 털어낸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쓴 사람은 "그 사람은 집이 멀어 오지 못하였다" 하고 적었다. 하필 집이 멀었으랴. 그런 사람이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였을 것이다. 그런 약속이라면 세상에 가장 큰 믿음을 가지고 한 것이었을 터이다. 이렇게 둘도 없는 친구가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약속을 하였는데 어찌 하루가 다 저물도록 오지 않았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사는 곳이 초나라나 오나라, 또는 삼진과 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는 아닐 것이다. 또한 그날 함께 진나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면, 악수를 나누며 진실된 약속을 하였을 것이다. 형가의 마음 속에는 그저 어떤 친구가 떠올랐을 뿐인데 글쓴이가 형가의 마음 속에 막연히 떠오른 친구를 구체적으로 그려내려고 하다 보니 실제 있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누가 알랴?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가리켜 멀리 살았다고 하면서 형가의 심정을 위로한 것이다. 혹시라도 그 사람이 왔다면 또 얼마나 두려웠겠나? 그러니 "오지 않았다"라고 한 것은 형가로서도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세상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라도 알아볼 것이다. 그 사람은 키가 7척 2촌(240 센티미터)에 눈썹이 두텁고 수염은 녹색이며 하체가 우람한데 상체는 가냘플 것이니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나는 혜풍의 이 시를 읽으며 이와 같은 (실제하지 않더라도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거론하는) 뜻을 알았다. 혜풍의 이름은 득공이다. 다른 호로 영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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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background-color: #FAFAFA; border: 1px solid #808080; padding: 5px; ">
정사의 행차에 앞서 전배들이 길을 떨치며 성을성 밖을 나서는데 깃발이며 몽둥이를 들었다. 앞서서 길을 트니 전배라고 부른다. 내원과 주주부가주 주부가 함께 걸었다. 내원은 내 팔촌 동생이고 주주부의주 주부의 이름은 명신으로 상방비장이었다상방 비장이었다. 편초를 옆구리에 끼고 안장 위에서 몸을 꼿꼿히꼿꼿이 펴서 어깨를 높이고 머리를 치켜드니 그야말로 날래고 용맹하였다. 안장 밑 짐 자루가 두툼하였고 따르는 종이 쓸 짚신을 안장 뒤에 걸었다.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만든 것이다. 오래된 것을 깨끗히깨끗이 빨아 새것처럼 입었는데입은 옷은 가장자리가 헤어진 것을 덧대어 고쳤으니고쳐서 역시나 검소한 성품이 아닐 수 없다.
 
잠시 부사가 성을 나서는 것을 기다렸다가 고삐를 틀어 천천히 맨 뒤에뒤로 따라 나서 구룡정에 다다르니 배가 출발하는 곳이다구룡정에 다다랐다. 의주 부윤이 미리 장막을 치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고 서장은 맑은 새벽에 먼저 출발하였는데출발하여 의주 부윤이 함께 입회한 가운데 규정에 따라 짐을 검사하였다. 사람이며 말이 잘못된 부분이 없는 지 살피는데살펴서 사람은 성명과 주소, 나이, 수염이나 흉터의 유무, 키의 크고 작음을 기록하였고, 말은 털색을 등록하였다. 세 깃발이 문처럼 세워져 있어 금지하는 물품을 검사하는데, 큰 것으로는 황금, 진주, 인삼, 담비 가죽이나 신고하지 않은 은과 같은 것들이었고, 작은 것들은 그때 그때 금지되는 수십 가지가 넘는 품목으로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하인은 저고리를 뒤집고 바지 속을 뒤졌고 비장과 통역은 행장과 짐 자루, 옷 보자기를 풀어 보이게 하였다. 강가에 가죽 상자며 종이 상자가 널브러지고 풀섶에서 다투어 자신을 수습하면서 서로를 흘끗 흘끗흘끗흘끗 돌아본다. 대체로 이렇게 검사하지 않으면 간사한 속임수를 막을 수 없고 그렇다고 검사를 하자니 체면이 상하게 되니되어 제도의 실제가 이와 같았다. (정작 밀수를 하는) 의주 상인들은 이미 먼저 몰래 넘어 갔다. 금지하는 물품을 지니고 있다가 첫 깃발에서 발각되면 곤장을 맞고, 가운데 깃발에서 발각되면, 유배를 가고, 세번 번째 깃발에서 발각되면 목을 베어 사람들 앞에 걸리는 효수형을 당하니 세워진 법은 엄격하다. (그러나) 이번 행차에 인정된 자금은 반도 되지 않고 대부분 몰래 가져가는 것이니 은의 남용을 더 말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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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다과를 내놓았으나 물리고는물리치고 돌아서돌아서서 강을 건너고자건너려고 하니 아무도 젓가락을 들지 못하였다. 배는 모두 다섯 척으로 경강의 나룻배와 같았으나 그보다 컸다. 먼저 방물, 사람과 말을 싣고 정사가 배에 오르니 표문과 자문을 들고 수석 역관과 이하 상방의 관리들이 함께 배에 올랐고, 부사 역시 서장과 함께 일행을 데리고 한 배에 올랐다. 이 때에 의주의 향리며 기생, 통인 등과 평양감사가 보낸 배행영리, 계서 등은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절을 하며 배웅하였다. 상방의 마두인 순안 노비 시대가 길 떠나는 소리를 외쳤는데, 이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뱃사공이 삿대를 찔러 넣으니 배는 빠른 물살을 타고 출발하였다.
 
여럿이 함께 노젓는 소리를 부르고,부르며 힘써 애쓴 보람이 있어,있어서 별자리가 번개처럼 바뀌어바뀌고 잠깐 사이에 동쪽의 신성이 멀어지듯 강을 건넜다. 통군정의 기둥이며 난간 자락의 여덟 모서리가 다투어 돌며 고별하더니 곧이어 모래톱 위에서 콩알 만하게 작아져 갔다. 나는 수석 통역관이던역관이던 홍명복 군에게 "자네 도를 아는가?"하고 물었다. 홍군은 공손히 대답하였다. "아니오,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는 "도라는 게 알기 어렵지 않네. 저쪽 언덕에 있지"라고 하였다. 홍군은 "이른바 먼저 태어나 언덕을 오른다는 것을 말씀하십니까?"하고 되물었다. 나는 "그 얘기가 아닐세. 이 강이 곧 그들과 우리의 경계가 닿는 곳이란 이야기지.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이잖나물이지 않나. 무릇 온 세상 백성이 떳떳하게 문물을 따른다는 것은 양 언덕 사이의 물과 같네. 도라는 것을 다른 곳에서 찾을 게 아니라 저 사이에서 찾아야지" 하였다.
 
홍군은 "감히 어찌하여 그런지 여쭙습니다" 하였고, 나는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고 하지. 서양인들은 기하학을 증명하면서 선 하나 점 하나도 논증한다고 하더군. 그 미묘함을 다하는 것이 부족하여 (선이 길이만 있고 면적이 없다는 것을) 빛이 없는 사이에 있는 빛이라고 한다고 하니, 불교 식으로 말하면 둘이 붙어 있지도 않고 떨어져 있지도 않다는 것이지. 그러므로 양쪽의 사이가 바로 가장 좋은 방도이니 도를 아는 사람만이 그리할 수 있을 것이네. 정나라의 자산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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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강을 건너 강가에 닿으니 갈대며 억새가 비단결 같이 덮혀 아래에 있는 흙이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이 강둑 아래에서 앞다투어 갈대며 억새를 배고 배 위의 돗자리를 부지런히 주워 (사신 일행이 설 자리를 만들어) 펼쳐 놓으려 하였다. 배여 나간 갈대 뿌리는 창처럼 날카로웠고 그 밑엔 검은 흙이 두터운 진흙을 이루고 있었다. 정사부터 그 아래가아래 사람들이 모두 갈대와갈대, 억새억새밭 가운데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어찌할 줄 몰랐다. "사람과 말 가운데 먼저 도착한 자는 어디로 갔는가?"하고 물으니 좌우에서 "모르겠습니다" 한다. 이어서 "방물은 무사한가?"하고 물으니 역시나 "모르겠습니다"하고는 멀리 구룡정이 있는 모래톱을 가리키며 "일행의일행 중에 사람과 말 태반이 아직 다 건너지 못했습니다. 저기 개미떼 처럼 보이는 것이 그들입니다" 한다.
 
멀리 있는 의주를 보니 한 조각 홀로 서있는 성인데 명주 한 필이 누여있는 것 같았고 성문이 바늘 귀 만하게 보였다. 그 사이로 하늘 빛이 한 점 샛별처럼 나오고 있었다. 큰 뗏목이 물결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시대가 "웨이"하고 소리쳤다. 중국어로 상대를 부를 때 웨이라고 하는 것은 존칭이다. 뗏목에 있던 사람이 일어나 부르는 소리에 응답하였다. "당신들 때를 잘못 맞추었소. 어찌하여 대국에 조공을 왔는 지 모르겠으나 더운 날씨가 먼 길에 계속 되니 참 고생이 많소" 한다. 다시 "당신들은 어디 사는 사람들이고 어디서 나무를 배었소?" 하고 물으니, "우리는 봉성에 사는데 장백산에서 나무를 배어 오는 길이오" 한다. 이야기를 다 나누기도 전에 뗏목은 저 멀리 흘러 내려갔다.
 
이때 양쪽 강에서 합쳐진 물이 넘쳐 가운데는 뚝 떨어진 섬이 되었다. 사람과 말이 먼저 내린 곳은 잘못 된 곳으로 원래 내려야 할 곳과 5리나5 리나 떨어져 있었고 돌아가는 배도 없었다. 양쪽 배의 선원들에게 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라고 엄한 명령을 보냈지만 되돌아가려면 배가 물살을 거슬러 올라야 해서 하루에 될 일이 아니었다. 사신들이 모두 성급히 화를 내며 배의 운항을 책임진 의주 군교의 죄를 묻고자 하였으나, 이번엔 (명령을 집행할) 군뢰가 없다. 군뢰들 역시 먼저 내렸는데 중간에 섬이 되어 버린 곳에서 잘못 내렸기 때문이다. 부방 비장 이서구가 분을 참지 못하고 부방 마두를 시켜 의주 군교를 잡아들였다. 엎드리게 할 곳이 마땅치 않아 세워 둔 채로 볼기를 반쯤 내리게 하고 말채찍으로 너다섯 대 정도 때렸다. 붙잡아 들이라 명령을 외치니외치자 즉각 거행되었다. 의주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바지 춤을 붙잡은 채 섰고, 횟수를 외치고 답하며 매질을 하였다.
 
두 배의 선원들에게 명령하여 물 속으로 들어가 배를 끌어내라 하였으나 물살이 거세어 한 치를 나아가면 한 자를 물러나니 명령이 엄하여도 조금도 시행되지 않았다. 작은 배가 물가로 나는 듯이 대더니 군뢰들이 삼방의 가마와 말을 대령하고 온다. 장복이가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 구나. 정말 다행이다." 하고 소리쳐 불렀다. 정사와 부사가 행장을 살펴 보았는데 모두 별 탈 없었다. 비장과 통역원이역관이 말을 타고 왔는데 일부는 오고 일부는 오지 않았다. 이에 정사는 군뢰 둘을 짝지워 말을 타고 먼저 출발하도록 하면서 나발을 불어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다른 두 군뢰는 짝을 이뤄 앞장서 걷게 하고 갈대와 억새를 서걱 서걱 밟아 가며 행차하였다. 나는 말 위에서 허리 춤에 찬 칼을 꺼내 갈대 한 줄기를 배어 들었다. 껍질은 단단하고 속이 두터워 화살을 만들기엔 마땅치 않았고 붓의 몸통으로 쓰기엔 좋아 보였다. 사슴 한 마리가 놀라 일어나 갈대를 뛰어 넘어 달아나는 모습이 마치 보리 밭에서 새가 나는 것 같아 일행이 모두 놀랐다.
 
십 리를 가서 삼강에 다다랐다. 물이 명주 처럼 맑고 다른 이름으로 애자하라 부른다. 어디에서 발원하였는 지 알 수 없으나 압록강에서 불과 십 리 떨어져 나란히 흐르는데 홀로 물결이 잔잔하다. 두 강의 발원지 상황이 서로 다름을 짐작할 수 있다. 강 양쪽에 쪽배가 있는데 생김새는 우리 나라 물놀이 배와 같으나 길이와 폭이 모두 비교할 수 없이 컸다. 재질도 보다 단단하고 촘촘한데 배를 부리는 이는 모두 봉성 사는 사람들이다. 3일을 기다리니 양식이 떨어져 굶게 생겼다. 원래 이 강은 저들과 우리가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역학을 대국에 보내 외교 하는 왕래에 시간이 없다는 자문을 건넸다. 이에 봉성 장군이 배를 내어 주었는데 배는 수심이 깊은 곳에 정박하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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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우리 나라 임진강 만큼 넓었다. 잡초가 무성하였는데무성하고 주위에 그물을 쳐 호랑이의 침범을 막았다. 의주의 창군이 곳곳에서 나무를 배어 벼락 같은 소리가 먼 들판에 퍼졌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방을 보니 산세는 밝고 물은 맑았다. 멀리까지 평평하게 펼쳐진 숲이 하늘에 닿았고 큰 마을들이 군데 군데 보였는데 닭이며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듯 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과연 땅을 일구어 개간할 만 하다. 대동강 서쪽에서 압록강 동쪽 사이에 이만한 곳이 없다. 큰 고을이 들어서기에 알맞으나 저들과 우리 사이에서 버려져 국경 사이의 땅이 되었다. 어떤 이는 "고구려 때에는 도읍이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국내성이다. 명나라 황제 시기에는 진강부였다.
 
지금의 청나라가 (후금 시절에 당시 명나라였던) 요동을 함락하자 진강 백성들이 차마 변발을 할 수 없어 일부는 모문룡에게 갔고 일부는 우리 나라에 왔다. 우리 나라에 온 사람들은 훗날 청나라가 모두 요동으로 데려갔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다수가 죽고 일부는 난민이 되어 바다를 떠돌았다. 이곳이 빈 땅이 된 지도 백여 년이 되어가고 막연히 보며 지나가니 산은 높고 물은 맑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