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緩步出門, 繁華富麗。 雖到皇京, 想不更加。 不意中國之若是其盛也。 左右市廛, 連互輝耀, 皆彫牕綺戶, 畵棟朱欄, 碧榜金扁。所居物皆內地奇貨。 邊門僻奧之地, 乃有精鑑雅識也。 又入一宅, 其壯麗更勝於康家, 而其制度大約皆同。 凡室屋之制, 必除地數百步, 長廣相適, 剷剗平正, 可以測土圭安針盤, 然後築臺。 臺皆石址, 或一級或二級三級, 皆甎築而磨石爲甃。 臺上建屋, 皆一字, 更無曲折附麗。 第一屋爲內室, 第二屋爲中堂, 第三屋爲前堂, 第四屋爲外室。 外室前臨大道, 爲店房, 爲市廛。 每堂前, 有左右翼室, 是爲廊廡寮廂。 大約一屋長, 必六楹八楹十楹十二楹, 兩楹之間甚廣, 幾我國平屋二間。 未甞隨材短長. 亦不任意闊狹, 必準尺度爲間架。 屋皆五梁或七梁, 從地至屋脊, 測其高下, 簷爲居中, 故瓦溝如建瓴。 屋左右及後面, 無冗簷, 以甎築墻, 直埋椽頭。 盡屋之高, 東西兩墻, 各穿圓牕面南。 皆戶正中, 一間爲出入之門, 必前後直對, 屋三重四重 則門爲六重八重, 洞開則自內室門至外室門, 一望貫通, 其直如矢。 所謂「洞開重門, 我心如此」者, 以喩其正直也。
 
路逢李同知惠迪。 譯官三堂上。 李君笑曰, 「窮邊邨野, 何足掛眼。」 吾言, 「雖至皇城, 未必勝此。」 李君曰, 「然, 雖有大小奢儉之別, 規模大率相同耳。」

爲室屋, 專靠於甓, 甓者甎也。 長一尺, 廣五寸, 比兩甎則正方, 厚二寸。 一匡搨成, 忌角缺, 忌楞刓, 忌軆翻, 一甎犯忌, 則全屋之功左矣。 是故, 旣一匡印搨, 而猶患參差 必以曲尺見矩, 斤削礪磨, 務令匀齊, 萬甎一影。 其築法, 一縱一橫, 自成坎離, 隔以石灰。 其薄如紙, 僅取膠貼, 縫痕如線。 其和灰之法, 不雜麤沙, 亦忌黏土, 沙太麤則不貼, 土過黏則易坼。 故必取黑土之細膩者, 和灰同泥, 其色黛黧, 如新燔之瓦。 葢取其性之不黏不沙, 而又取其色質純如也。 又雜以檾絲, 細剉如毛, 如我東圬土. 用馬矢同泥, 欲其靭而無龜。 又調以桐油濃滑如乳, 欲其膠而無罅。
 
其葢瓦之法, 尤爲可效 瓦之體如正圓之竹而四破之 其一瓦之大, 恰比兩掌, 民家不用䲶鴦瓦, 椽上不構散木, 直鋪數重蘆簟 然後覆瓦, 簟上不藉泥土 一仰一覆, 相爲雌雄, 縫瓦亦以石灰之泥, 鱗級膠貼 自無雀鼠之穿屋 最忌上重下虛 我東葢瓦之法, 與此全異 屋上厚鋪泥土, 故上重, 墻壁不甎築, 四柱無倚, 故下虛 瓦軆過大, 故過彎, 過彎故自多空處, 不得不補以泥土 泥土厭重, 已有棟撓之患, 泥土一乾, 則瓦底自浮, 鱗級流退, 乃生罅隙, 已不禁風透雨漏, 雀穿鼠竄, 蛇繆貓翻之患
 
大約立屋甎功居多 非但竟高築墻, 室內室外, 罔不鋪甎 盡庭之廣, 麗目井井, 如畫碁道, 屋倚於壁, 上輕下完, 柱入於墻, 不經風雨, 於是不畏延燒, 不畏穿窬, 尤絶雀鼠蛇猫之患 一閉正中一門, 則自成壁壘城堡, 室中之物, 都似櫃藏 由是觀之, 不須許多土木, 不煩鐵冶墁工, 甓一燔而屋已成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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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에 있는 물건은 모두 내지에서 온 상품들이다. 변문은 벽지이자 오지인데도 귀감이 될 만한 것이 있다 하겠다. 또 다른 집에 들어가 보니 꾸밈은 강영태의 집보다 화려한데 구조와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집과 방의 지어진 모습이 수백 걸음 안의 땅에 길이와 넓이를 적절히 맞추어 평탄하고 반듯하게 깍아 다듬었는데 분명 나침반을 이용하여 터를 정하고 축대를 쌓아 올렸다. 축대는 돌을 기반으로 하였고 어떤 것은 1급 또 어떤 것은 2급이나 3급의 벽돌로 쌓은 뒤 갈아낸 돌로 마감을 하여 담장을 쌓았다. 축대 위로 집을 지었는데 모두 일(一) 자 모양으로 따로 덧이어 붙인 부속 건물은 없었다. (제일 안쪽부터) 첫 번째 집은 안채가 되고 두 번째는 중당, 세 번째는 전당, 네 번째는 바깥채이다. 바깥채가 큰 길과 닿아 점방도 차리고 가게도 차린다. 각각의 집 좌우에 곁방이 있어 (부속 건물인) 낭무나 행랑채를 대신한다. 한 집의 길이는 대략 6 영, 8 영, 10 영 또는 12 영인데 두 기둥 사이의 길이인 영은 제법 넓어 우리나라 보통 집의 2 간 정도 되었다. 제목이 길거나 짧다고 임의로 넓거나 좁게 집을 짓지 않고 반드시 정해진 길이에 맞추어 들보를 올렸다. 집의 들보는 다섯 아니면 일곱인데 땅에서 지붕의 수평마루까지 높이를 재서 그 가운데에 처마가 있기 때문에 기와 고랑이 가파르다. 집의 좌우와 뒷면에는 처마가 없고 서까래가 곧장 벽돌담에 묻힌다. 집 동서의 벽이 꼭대기까지 올라가며 둥글게 만든 창문이 남쪽 면에 나있다. 집의 한 가운데 드나드는 문이 있는데 모두 앞뒤가 곧장 마주하고 있어 집이 (겹겹이 담장을 둘러) 세 겹 네 겹이거나 문이 여섯 겹, 여덟 겹이어도 문을 모두 활짝 열어 재치면 안채에서 바깥채까지 한 번에 보일 정도로 곧다. 이른바 "겹겹이 두른 문을 활짝 열어 재치니 내 마음이 이와 같도다"라는 말은 이와 같은 정직함을 비유한 것이다.
 
길에서 (중추부의) 동지인 이혜적을 만났다. 통역관인데 3품 당상관이다. 이군이 웃으며 "궁벽한 시골에서 볼 만한 것이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나는 "황성에 가더라도 이 보다 못할 것 같소."하고 대답하였다. 이군은 "하기사 크고 작고나 사치스럽고 검소하고의 차이는 있지만 모습은 여기나 거기나 거진 같습니다."한다.

집을 모두 벽돌로 짓는데 벽돌은 길이 1 자, 넓이 5 치로 둘을 합치며 정사각형이 되며 두께는 2 치이다. 하나 하나가 모두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각도가 틀어지거나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거나 몸이 뒤틀린 것은 한 장이라도 쓰지 않아야 집 전체를 정교하게 지을 수 있다. 따라서 한 장 마다 치수가 어긋나 들쭉날쭉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직각자를 써서 검사한 뒤 도장을 찍기 때문에 (규격을 맞추기 위해) 갈고 닦고 하여 가지런히 하기 위해 애써서 벽돌 만 장이 모두 똑같다. 쌓는 법은 하나를 세로로 놓으면 다른 하나는 가로로 놓아 저절로 감괘(☵)와 이괘(☲)의 모양을 이루게 하여 그 사이를 석회로 발라 붙인다. 석회는 종잇장처럼 얇게 겨우 붙을 정도만 바르는데 쌓고 나면 마치 실처럼 보인다. 회를 개는 방법은 거친 모래가 섞이지 않도록 하고 점토도 피하는데 모래가 많으면 접착력이 떨어지고 점토가 지나치면 쉽게 갈라진다. 그래서 꼭 검은 흙에서 가늘고 찰진 것을 골라 석회와 진흙이 반반이 되도록 개서 그 색깔이 마치 눈썹 그리는 먹이나 새로 갖 구워낸 기와 같다. 개어낸 회는 그 성질이 점토도 아니고 모래도 아니며 색상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 또 어저귀를 털처럼 잘게 잘라 섞는데 우리나라에서 (집 벽에) 흙을 바를 때 말똥을 진흙에 섞어 넣어 질기고 갈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과 같다. 또 유동나무 기름을 마치 젖처럼 짙게 발라 틈이 없게 매운다.
 
기와를 얹는 방법은 더욱 본받을 만 하다. 기와의 모양은 커다란 대나무와 같은 원통을 4등분 한 것처럼 생겼다. 민가에서는 원앙와를 쓰지 않고 서까래 위로 산자를 짜 넣지 않으며 바로 삿자리를 몇 겹 깐다. 이후에 기와를 엎어 놓는데 삿자리 위로 진흙을 바르지 않는다. (같은 모양의 기와를) 하나는 엎어 놓고 하나는 뒤집어 놓아 서로 암수가 되며 석회를 갠 흙으로 이어서 비늘처럼 얽혀 붙인다. 참새나 쥐가 구멍을 뚫을 수 없고 위가 무겁고 아래가 허약한 것을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와 얹는 법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집 위로 진흙을 두텁게 발라서 위가 무겁고 벽과 담을 벽돌로 짓지 않으니 기둥이 의지할 곳이 없어 아래가 허약하다. 기와가 너무 커서 기와가 너무 휘어져 잇고 너무 휘어져 있다 보니 빈 곳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진흙으로 채운다. 진흙이 너무 무거우면 용마루가 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진흙이 마르면 기와가 들떠서 비늘이 흘러 내리며 틈이 생겨 바람과 빗물을 막지 못하고 참새가 구멍을 내고 쥐가 숨어들고 뱀이며 고양이까지 날뛰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벽돌로 집을 지으면 이점이 참으로 많다. 담장과 벽 뿐만 아니라 집 안팍으로 벽돌을 쓰지 않은 곳이 없다. 너른 뜰에 벽돌을 깔아 우물 정(井)자 무늬를 만드니 바둑판 같고 집의 벽도 벽돌로 만들어 위는 가볍고 아래는 튼튼히 하여 기둥이 담벽에 박히니 비바람이 들지 않으며 불이 나도 옆으로 번지지 않고 좀도둑이 들 걱정도 없고 또한 참새니 쥐니 뱀이니 고양이니 하는 따위의 근심도 없다. 정 중앙의 문 하나를 걸어 잠그면 저절로 성벽과 성루를 두른 작은 요새가 되어 집안의 물건들은 모두 괘짝에 넣어둔 것과 같게 된다. 이를 보면 (집을 지을 때) 수 많은 나무며 흙이 들지도 않고 대장장이며 미장이며 번잡하게 할 필요도 없고 벽돌 하나만 구우면 집은 다 지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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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龜(무균): 균열이 없음. 龜는 거북이를 뜻할 때는 귀로 갈라짐을 뜻할 때는 균으로 읽는다.
* 桐油(동유): [[:w:유동나무|유동나무]] 열매에서 얻는 기름.
* 䲶鴦瓦(원앙와): 암키와와 수키와가 짝을 이루는 기와. 암키와는 넓고 완만하며 수키와는 좁다.
* 散木(산목): 산자. 서까래 위를 건너질러 엮는 목재.
* 蘆簟(노점): 삿자리. 갈대로 엮은 자리.
* 延燒(연소): 불길이 옆으로 번짐.
* 穿窬(천유): 좀도둑.
* 壁壘(벽루): 성벽과 성루.
* 城堡(성보): 작은 규모의 요새.
* 許多(허다): 수 많은.
* 鐵冶(철야): 대장장이.
* 墁工(만공): 미장이. 벽 따위에 흙을 바르는 도장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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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葢瓦之法 尤爲可效 瓦之體如正圓之竹而四破之 其一瓦之大 恰比兩掌 民家不用䲶鴦瓦 椽上不構散木 直鋪數重蘆簟 然後覆瓦 簟上不藉泥土 一仰一覆 相爲雌雄 縫瓦亦以石灰之泥 鱗級膠貼 自無雀鼠之穿屋 最忌上重下虛 我東葢瓦之法 與此全異 屋上厚鋪泥土 故上重 墻壁不甎築 四柱無倚 故下虛 瓦軆過大 故過彎 過彎故自多空處 不得不補以泥土 泥土厭重 已有棟撓之患 泥土一乾 則瓦底自浮 鱗級流退 乃生罅隙 已不禁風透雨漏 雀穿鼠竄 蛇繆貓翻之患
 
大約立屋甎功居多 非但竟高築墻 室內室外 罔不鋪甎 盡庭之廣 麗目井井 如畫碁道 屋倚於壁 上輕下完 柱入於墻 不經風雨 於是不畏延燒 不畏穿窬 尤絶雀鼠蛇猫之患 一閉正中一門 則自成壁壘城堡 室中之物 都似櫃藏 由是觀之 不須許多土木 不煩鐵冶墁工 甓一燔而屋已成矣
 
方新築鳳凰城 或曰此則安市城也 高勾麗方言 稱大鳥曰‘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又世傳安市城主楊萬春 射帝中目 帝耀兵城下 賜絹百匹 以賞其爲主堅守 三淵金公昌翕 送其弟老稼齋昌業入燕詩曰 ‘千秋大膽楊萬春 箭射虬髯落眸子’ 牧隱李公穡貞觀吟曰 ‘爲是囊中一物爾 那知玄花落白羽’ 玄花言其目 白羽言其箭 二老所咏 當出於吾東流傳之舊 唐太宗動天下之兵 不得志於彈丸小城 蒼黃旋師 其跡可疑 金富軾只惜其史失姓名 葢富軾爲三國史 只就中國史 書抄謄一番 以作事實 至引柳公權小說 以證駐驆之被圍 而唐書及司馬通鑑 皆不見錄 則疑其爲中國諱之 然至若本土舊聞 不敢略載一句 傳信傳疑之間 葢闕如也 余曰 “唐太宗失目於安市 雖不可攷 葢以此城爲安市 愚以爲非也 按唐書 安市城去平壤五百里 鳳凰城 亦稱王儉城 地志又以鳳凰城稱平壤 未知此何以名焉 又地志古安市城在葢平縣東北七十里 自葢平東至秀巖河三百里 自秀巖河東至二百里 爲鳳城 若以此爲古平壤 則與唐書所稱五百里相合 然吾東之士 只知今平壤言箕子都平壤則信 言平壤有井田則信 言平壤有箕子墓則信 若復言鳳城爲平壤 則大驚 若曰 遼東復有平壤 則叱爲恠駭 獨不知遼東本朝鮮故地 肅愼濊貊東彝諸國 盡服屬衛滿朝鮮 又不知烏刺寧古塔後春等地本高勾麗疆 嗟乎 後世不詳地界 則妄把漢四郡地 盡局之於鴨綠江內 牽合事實 區區分排 乃復覔浿水於其中 或指鴨綠江爲浿水 或指淸川江爲浿水 或指大同江爲浿水 是朝鮮舊疆 不戰自蹙矣 此其故何也 定平壤於一處 而浿水前郤 常隨事跡 吾甞以爲漢四郡地 非特遼東 當入女眞 何以知其然也 漢書地理志 有玄莬樂浪 而眞番臨芚無見焉 葢昭帝始元五年 合四郡爲二府 元鳳元年 又改二府爲二郡 玄莬三縣 有高勾麗 樂浪二十五縣 有朝鮮 遼東十八縣 有安市 獨眞番 去長安七千里 臨芚 去長安六千一百里 金崙所謂我國界內不可得 當在今寧古塔等地者”是也 由是論之 眞番臨芚 漢末卽入於扶餘挹婁沃沮 扶餘五而沃沮四 或變而爲勿吉 變而爲靺鞨 變而爲渤海 變而爲女眞 按渤海武王大武藝答日本聖武王書 有曰 “復古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以此推之 漢之四郡半在遼東 半在女眞 跨踞包絡 本我幅員 益可驗矣 然而自漢以來 中國所稱浿水不定厥居 又吾東之士 必以今平壤立準 而紛然尋浿水之跡 此無他 中國人凡稱遼左之水 率號爲浿 所以程里不合 事實多舛者 爲由此也 故欲知古朝鮮 高勾麗之舊域 先合女眞於境內 次尋浿水於遼東 浿水定然後疆域明 疆域明然後古今事實合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