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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 말아, 내 집에 가서 가져오지!"
 
그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그저 선선하였다. 딴은 안해가 잠에 곯아지거든 슬며시 들어가서 이것저것 마음에 드는대로 후므려오면 그뿐이다. 앞으로 굶주리지 않아도 맘편히 살려니 생각하니 잠도 안올만치 가슴이 들렁들렁하였다.{{PD-old-50}}
 
방은 우풍이 몹시도 세었다. 주인이 그악스러워 구들에 불도 변변히 안 지핀 모양이다. 까칠한 공석자리에 등을 붙이고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대구 떨었다. 한 구석에 쓸어박혔던 아이가 별안간 잠이 깨었다. 킹얼거리며 사이를 파고드려는 걸 어미가 야단을 치니 도로 제자리에 가서 찍소리 없이 누웠다. 매우 훈련 잘 받은 젖먹이었다.
 
그러나 근식이는 그놈이 생각하면 할 수록 되우 싫었다. 우리들이 죽도록 모아놓으면 저놈이 중간에서 써버리겠지. 제애비 본으로 노름질도 하고, 애미를 두들겨패서 돈도 뺏고 하리라. 그러면 나는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격으로 헛공만 들이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니 당장에 곧 얼어죽어도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어미의 환심을 서려니깐
 
"에 그놈······ 착하기도 하지." 하고 두어번 그 궁둥이를 안 뚜덕일 수도 없으리라.
 
달이 기울어서 지게문을 훤이 밝히게 되었다.
 
간간 외양간에서는 소의 숨 쉬는 식식 소리가 거푸지게 들려온다.
 
평화로운 잠자리에 때아닌 마가 들었다. 뭉태가 와서 낮은 소리로 계숙이를 부르며 지게문을 열라고 찌걱거리는 게 아닌가. 전일부터 계숙이에게 돈좀 쓰던 단골이라고 세도가 막 댕댕하다.
 
근식이는 망할 자식, 하고 골피를 찌푸렸다. 마는 계숙이가 귓속말로
 
"내 잠깐 말해 보낼게 밖에 나가 기달리유." 함에는 속이 좀 든든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은 남편을 신뢰하고 하는 통사정이리라. 그는 안문으로 바람같이 나와서 방벽께로 몸을 착 붙여세우고 가끔 안채를 살펴 보았다. 술집주인이 나오다 이걸 본다면 담박 미친 놈이라고 욕을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저께는
 
"자네 바람 잔뜩 났네 그려. 난 술을 파니 좋긴 허지만 맷돌짝을 들고 나오면 살림 고만 둘 터인가?" 하고 멀쑤룩하게 닥기었다. 오늘 들키면 또 무슨 소리를―――
 
근식이는 떨고 섰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방문께로 바특이 다가서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왜냐면 뭉태가 들어오며
 
"오늘두 그놈 왔었나?" 하더니 계집이
 
"아니유, 아무도 오늘은 안 왔어유." 하고 시치미를 떼니까
 
"왔겠지 뭘. 그자식 왜 새바람이 나서 지랄이야." 하고 썩 신퉁그러지게 비웃는다.
 
여기에서 그놈 그자식이란 물을 것도 없이 근식이를 가리킴이다. 그는 살이 다 불불 떨렸다.
 
그뿐 아니라 이말저말 한참을 중언부언 지껄이더니
 
"그자식 동리에서 내쫓는다던걸!"
 
"왜 내쫓아?"
 
"아 홰엔 안 오고 술집에만 박혀 있으니까 그렇지."
 
(이건 멀쩡한 거짓말이다. 회좀 안 갔지고 내쫓는 경우가 어딨니, 망할 자식.) 하고 그는 속으로 노하며 은근히 굳세게 쥐인 주먹이 대구 떨리었다.'
 
그민아라도 좋으련만
 
"그자식 어찌 못낫는지 안해까지 동리로 돌아다니며 미화라구 숭을 보는걸!"
 
(또 거짓말. 안해가 날 어떻게 무서워하는데 그런 소리를 해!)
 
"남편을 미화라구? 하고 계집이 호호대고 웃으니까
 
"그럼 안그래? 그러구 계숙이를 집안망할 도적년이라고 하던걸. 맷돌두 집어가고 속곳도 집어가구 했다구."
 
"누가 집어가 갖다주니까 받았지." 하고 계집이 팔짝 뛰는 기색이더니
 
"내가 아나, 근식이 처가 그러니깐 나두 말이지."
 
(안해가 설혹 그랬기루 그걸 다 꼬드겨바쳐? 개새끼 같으니!"
 
그담엔 들으려구 애를 써도 들을 수 없을만치 병아리 소리로들 뭐라 뭐라고 지껄인다. 그는 이것도 필경 저와 계숙이의 사이가 좋으니까 배가 아파서 이간질이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계집도 는실날실 여일히 받으며 같이 웃는 것이 아닌가.
 
근식이는 분을 참지 못하여 숨소리도 거칠을만치 되었다. 마는 그렇다고 뛰어들어가 두들겨줄 형편도 아니오 어째볼 도리가 없다. 계숙이나 뭣하면 노엽기도 덜하련마는 그것조차 핀잔 한 마디 안 주고 한통속이 되는 듯하니 야속하기가 이를데 없다.
 
그는 노기와 한고로 말미암아 팔짱을 찌르고는 덜덜 떨었다. 농창이 난 버선이라 눈을 밟고 섰으니 뼈끝이 쑤시도록 시렵다.
 
몸이 괴로워지니 그는 안해의 생각이 머리속에 문득 떠오른다. 집으로만 가면 따스한 품이 기다리련만 왜 이 고생을 하는지 실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허지만 다시 잘 생각하면 안해 그까짓건 싫었다. 아리랑타령 한 마디 못하는 병신, 돈 한푼 못 버는 천치―――하긴 초작에야 물불을 모를만치 정이 두터웠으나 때가 어느 때이냐, 인제는 다 삭고 말았다.
 
뭇사람의 품으로 옮아안기며 에쓱거리는 들병이가 말은 천하다할망정 힘 안 들이고 먹으니 얼마나 부러운가. 침들을 게제 흘리고 덤벼드는 뭇놈을 이손 저손으로 맘대로 후물르니 그 호강이 바이 고귀하다 할지라―――
 
그는 설한에 이까지 딱딱거리도록 몸이 얼어간다. 그러나 집으로 가서 자리 위에 편히 쉬일 생각은 조금도 없는 모양 같다. 오직 계숙이가 불러들이기만 고대하여 턱살을 받쳐대고 눈이 빠질 지경이다.
 
모진 눈보라는 가끔씩 목덜미를 냅다 갈긴다. 그럴 적마다 저고리 동정으로 눈이 날아들며 등줄기가 선뜩선뜩하였다. 근식이는 암만 기다려도 때가 되었으련만 불러들이지를 않는다. 수근거리던 고것조차 끊이고 인제 굵은 숨소리만이 흘러 나온다.
 
그는 저도 모르는 약이 발뿌려서 머리끝까지 바짝 치뻗었다. 들병이란 더러운 물건이다. 남의 살림을 망쳐놓고 게다 가난한 농군들의 피를 빨아먹는 여우다, 하고 매우 쾌쾌히 생각하였다. 이변 그렇게까지 노해서 나갔는데 안해가 지금쯤은 좀 풀었을까 이런 생각도 하여 본다.
 
처마 끝에 쌓였던 눈이 푹 하고 땅에 떨어질 때 그때 분명히 그는 집에 가려 하였다. 만일 계숙이가 때맞춰 불러들이지만 않았더면
 
"에이 더러운 년!"
 
속으로 이렇게 침을 배앝고 네 보란듯이 집으로 삑 달아났을지도 모른다.
 
계집은 한문으로
 
"칩겠수, 얼른 가우."
 
"뭘 이까진 추워."
 
"그럼 잘 가게유, 낭종 또 만납시다."
 
"응, 내 추후루 한번 찾아가지."
 
뭉채가 이렇게 눈도 털 줄 모르고 감지덕지하여 닝큼 들어서며 우선 얼른 손을 썩썩 문댔다.
 
"밖에서 퍽 추웠지유?"
 
"뭘 추워 그렇지." 하고 그는 만족히 웃으면서 그렇듯 분분하던 아까의 분노를 다 까먹었다.
 
"그자식, 남 자는데 왜 와서 쌩이질이야!"
 
"그렇게 말이유, 그런 눈치 코치도 없어!" 하고 계집은 조금도 빈틈없이 여전히 탐탁하였다. 그리고 등잔에 불을 다리며 거나하여 생글생글 웃는다.
 
"자식이 왜 그 뻔세람. 거짓말만 술술 하구!" 하며 근식이는 먼젓번 뭉태에게 흉잡혔던 그 대가품을 안할 수 없었다. 나두 네가 헌만치만 허겠다, 하고
 
"아 그놈 참 병신 됐다드니 어떻게 걸어다녀?"
 
"왜 병신이 되우?"
 
"남의 계집 오입하다가 들켜서 밤새도록 목침으로 두들겨 맞었지. 그래 응치가 끊어졌느니 대리가 부러졌느니 허더니 그래두 곧 잘 걸어다니네!"
 
"알라리, 별일두."
 
계집은 세상에 없을 일이 다 있단듯이 눈을 째웃하더니
 
"제 계집좀 보았기루 그렇게 때릴 건 뭐야."
 
"아 안그래 그럼. 나라두 당장 그놈을!" 하고 근식이는 제 안해가 욕이라도 보는듯이 기가 올랐으나 그러나 계집이 낯을 찌푸리며
 
"그 뭐 계집이 어디가 떨어지나 그러게?" 하고 샐쭉이 뒤둥그러지는데는 어쩔수 없이 저도
 
"허긴 그렇지, 놈이 원체 못나서 그래." 하고 얼른 눙치는 게 상책이었다.
 
내일부터라도 계숙이를 따라다니며 먹을텐데 딴은 이것저것을 가리다는 죽도 못 빌어 먹는다. 그보다는 몸이 열파에 난대도 잘 먹을 수만 있다면이야 고만이 아닌가―――
 
그건 그렇다고, 어떻게 뭉태란 놈의 흉은 그만치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담배를 하나 피워물고 뭉태는 본디 돈도 신용도 아무것도 없는 건달이란둥, 동리에서는 그놈의 말은 곧이 안 듣는다는둥, 심지어 남의집 보리를 훔쳐내다 붙잡혀서 콩밥을 먹었다는 허풍까지 찌며 없는 사실을 한창 늘여 놓았다.
 
그는 이러게 계집을 얼렁거리다 안말에서 첫홰를 울리는 계명성을 듣고 깜짝 놀랐다. 개동까지는 떠날 차보가 다 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계집의 뺨을 손으로 문질러보고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나온다.
 
"내 집에 좀 갔다올게 꼭 기다려 응."
 
근식이가 거리로 나올 때에는 초승달은 완전히 넘어갔다.
 
저 건너 산밑 국수집에는 아직도 마당의 불이 환하다. 아마 노름꾼들이 모여드어 국수를 눌려먹고 있는 모양이다. 그는 밭둑으로 돌아가며 지금쯤 안해가 집에 돌아와 과연 잠이 들었을지 퍽 궁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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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35년 작품]]